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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령 생태 보고서

2009.08.25 13:4308.25

  다음 지문을 읽고 화자의 심정을 서술하라.
  [거리에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ㅇㅇ씨를 아시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죽었소"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해저물녘에 나는 동산에 올라갔다. 적당한 돌을 찾아 손가락을 찧었다. 스러지는 해처럼, 줄어드는 그림자처럼 고통과 뭉개진 손가락은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죽었다. 나는 유령인 것이다. ]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어떤 강사의 수업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대치동 A 강사는 화려한 문장을 강조한다. 잠실 B 강사는 짧은 문장에 핵심어를 강조한다. 상관없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 얼마만큼의 사실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가의 문제. 이것은 나의 답이다.

   오오, 박정미 불굴의 이름이여. 학교의 탄생과 종말까지 함께할 이름이여. 박정미는 체구가 작았지만 누군가의 눈이나 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 얘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고 소문의 근원이었다. 생리통은 박정미 똥구녕만큼 아팠고 학주는 박정미랑 놀아났는지 지랄을 떨었다. 사탄이자 찐따였고 저주의 대상이었다. 박정미는 다양한 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피어났다.  

   박정미를 설명하는 기계적인 말들: 8번 박정미. 153cm에 49kg. 등급 5/6/5/6/7/7/7/
 담임의 소견서: ‘골칫덩이’ ‘가망성 없는 놈’ ‘ 저런 애가 왜 우리 반에’
 애들이 아는 사실:
 작은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 몸에 비해 큰 얼굴, 앙상한 등뼈, 툭 뭉개진 눈을 보면 아프리카 난민 같았다. 모두들 그 애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증오했다. 그렇게 불쌍한 것과 내가 같은 세상을 산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럭저럭 학창생활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애는 뜯어낼 돈도 없었고 싸대기 한 번만으로도 죽을 것 같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가 출장 갔다가 시계 사왔다고, 연예인과 문자 하는 사이라고, 옆 지역구 일진이 밤마다 오토바이를 태워준다고. 애들은 알았다. 그 애의 아버지는 지하철에서 껌을 파는 사람이었다. 학교 앞에서 우리 딸이 3학년 7반인데 친구 아빠 돕는 셈 치고 껌 하나만 사줘 하다 끌려간 적도 있었다. 체육시간마다 그 애의 짝꿍은 가슴과 허리, 허벅지에 남아있는 박정미 아버지의 흔적을 봐야 했다. 그 애의 핸드폰은 액정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애에게 관심 있는 남자라고는 아버지뿐이었다. 그 애의 거짓말은 허무맹랑해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코웃음이라도 치면 목 울대를 세우며 시뻘건 얼굴로 소리를 꽥꽥 지르는 그 애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 그 애의 거짓말을 한층 강화되었다. 엄마는 파리에 유학간 거라고, 오빠랑 키스를 했다며 쉬는 시간마다 목덜미의 데일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도 그 애를 막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대책 없는 찐따 거짓말쟁이 년.
   오늘도 사고가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누구는 울었고 누구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떨어진 성적만큼 새로운 숫자가 등에 새겨지는 날이다. 수다쟁이-한 반에 한 명은 있는, 목소리가 크고 옷핀으로 치마를 겨우 고정하며 온갖 소문의 수집/창조의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박정미랑 키스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 때 박정미가 급식을 받아오다가 진탕 쏟았다. 국물이 튄 애는 물론이고 다른 반에 있던 수다쟁이와 그 무리들이 달려와 박정미를 몰아댔다. 붉은 육개장 국물 속에서 박정미는 어쩔 줄 몰랐다. 경원이 대걸레를 가지고 왔다. 얘들은 고개를 돌려 식판에 처박았다. 숟가락들 위에서 경원이에게 일을 만든 박정미가 씹고 찢어 뭉개졌다. 붉은 쇠고기 기름 위의 박정미와 이경원, 사탄과 마리아.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뻔 하다가 민지가 꼬집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가 없지. 난 단지 살아있었을 때, 널 만나기 전에 경원과 친구가 되었어도 재미 있었을 거란 생각이었어.
  
 나는 유령이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믿기 힘들다는 거 안다. 당신도 그런데 논리적인 나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5월 무렵 내게 말을 거는 애가 한 명도 없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방인>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만 했다. 보통 애들에게 <잃어버린 시간>보다는 <세계문학으로 잡는 논술>에 나오는 까뮈의 <이방인>이 친숙할 테니까. 책 선정에 왜 집착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남자거나 공학을 나온 여자다. 책은 책이 아니라 여고 1년을 보내기 위한 떡밥이다.
 3월 3일. 개학을 하고 방학 동안 독서실에 파묻혀 있던 고3을 맞는 것은 첫사랑의 풋풋함이나 여고시절의 추억 따위가 아니다. 담배와 생리 혈이 눅진 교실, 술이 덜 깨 해롱대는 담임, 친구라는 이름의 생존이 굶주린 눈을 빛내며 기다린다. 고3 생활의 성패는 몇 등급이냐가 아니라 어떤 애를 곁에 두느냐에 달려있다. 친구를 따라 강남이 아닌 대학을 가는 시절에 친구 고르는 3월은 중요한 순간이다. 사실 나는 친구가 필요 없다. 친구라는 것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친구 사귀기는 귀찮음을 수반한다. 하지만 왕따라고 뒷공론을 듣긴 싫다. 완전한 나라도 친구는 필요하다.
 나는 현명한 편이라 친구 고르는 이치를 일찍 터득했다. 담임 눈에 애들은 대학 갈 놈, 못 갈 놈으로 갈리겠지만 내 눈엔 그렇지 않다. 첫째, 공부를 잘하는 무리들. 가령 23번 이경원 같은 경우. 사실 프루스트를 아는 것은 경원뿐이었다. 하지만 공부 잘 하는 얘는 눈에 띄기 때문에 패스. 둘째, 적당히 놀고 적당히 수능 등급이 나오는 대부분의 애들. 아이돌 이야기 듣다가 1년 간다. 망하기 십상이다. 남은 건 떨거지들이다. 나는 떨거지에게 밑밥을 던진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아 버림받은 즘생들. 3월 내내 두려워하며 친구를 만들려고 애쓰다 내게 오는 습성들. 그들을 반기면 안 된다. 그네들은 상상도 못할 책을 읽어서 내가 친구가 필요 없음을, 너희와 다른 지적 존재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야 떨거지들은 내가가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하고 두려워한다.  이렇게 하면 친구로서 요구 - 돈을 빌려달라, 매점 가자, 야자를 빼먹자-를 피할 수 있다. 고 1, 2 때는 내 선택이 현명하다는 게 증명됐다. 하지만 두 달 동안 쭈뼛거리면서 “저기…… 너 책 좋아하는구나?” 라며 다가오는 애가 없었다. <이방인>으로 바꾸자 마음먹었다. 유령임을 깨달은 것은 다음날이었다.
   모의고사 날이었다. 밤을 새서 잠이 부족했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자마자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사방이 어두웠다. 사태를 깨달은 것은 교실 문에 걸려있는 자물쇠를 봤을 때였다.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고요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같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낮과 밤의 교실은 달랐다. 낮에만 해도 애들이 서로의 뒷담화를 하고 담배를 피워대느라 활기찬 공간이었지만 밤은 죽어있었다. 애들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둠과 고요가 어우러진 공허다.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 한 모퉁이부터 ‘그것’이 다가왔다. 비어있다, 허나 스물 거리는 꼴이 늪 같았다. 나를 삼키려 한다.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핸드폰을 쥐었다. 엄마? 아빠? 1학년 떨거지? 2학년 떨거지? 반장? 담임? 전화할 곳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그것’ –바싹 마른 늪과 같은 것-은 코 앞까지 다가왔다.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잠든 내 곁을 수십 명의 사람이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수위 아저씨까지도.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떨림이 멈추고, 민지가 나타났다.

   유령이 된 것보다도 민지를 만나게 된 것이 기뻤다. 민지는 매력적이고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동그랗고 찢어진, 고양이 눈이 나를 볼 때 나는 갓 세탁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곤 했다. 민지는 말의 힘을 믿었고 말과 말 사이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민지는 말했다. 말을 다룰 줄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민지는 말했다. 무엇을 믿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라고. 나는 너와 영원히 있을 거라고. 행복했기에 다시는 ‘그것’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민지는 말했다. ‘그것’ –민지는 그것을 ‘늪’이라고 불렀다- 은 유령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피하려면 ‘늪’들의 관심을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려야 했다. 산 자의 절망은 늪의 먹이였다. 나는 주저 없이 박정미를 선택했다. 그 얘는 이미 관심의 대상이니 ‘늪’의 관심을 받는다고 해도 괜찮을 터였다. 게다가 사랑에 빠져서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텐데 뭐. 민지와 나는 몇 가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하는 방법 1. 화장실을 애용한다.
 똥을 싸거나 오줌을 갈기는 그 곳은 또 다른 욕망의 배설구다. 특히 소문 없이는 운영이 안 되는 여고에서 화장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3반 애가 2반의 목덜미를 핥느라 쪽쪽거리는 사운드는 음모의 전조로 알맞았다. 나는 저녁 야자 시간에 일을 시작했다. 화장실 안에는 수다쟁이가 열흘 치 똥 덩어리 때문에 고생 중이었다.

  “ 야, 그 7반에 찐따 있잖아. 아까 교사 휴게실에 들어갔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야. ”
  “ 어떤 소리?”
  “ 쪽쪽거리고 신음소리 나는 게 꼭…… 그 있잖아. 섹…….스 하는 것 같더라니까?”
  “ 뭐?”

 마지막 소리는 수다쟁이의 것이었다. 그녀는 소문에 대한 동물적 민첩성으로 배설본능을 이기고 뛰쳐나온 것이다. 물론 나는 도망갔으니까 못 봤겠지만. 그녀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들어왔고 야자가 끝나기 전에 소문은 교실에 가득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출발이 좋았다. 소문은 원래 믿을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짓말을 하는 방법 2: 원인을 제공한다.
   확실한 것은 정미 본인이 사실을 수긍하는 것이었다. 촉매제로는 수다쟁이가 딱이다. 다음날, 간만에 박정미가 침 자국 하나 없이 성한 목에 대일밴드를 붙이며 오빠 운운하자 수다쟁이가 말했다.

  “ 박정미, 요즘에 교무실에서 재미 좋다며? 그거 오빠 거야? “

  보통 때 박정미는 길길이 날뛰고 책상을 던질 일이었다. 박정미는 말 없이 데일 밴드를 뗐다 붙였다. 그 애는 웃고 있었다. 수다쟁이는 부르르 떨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8교시 종이 울리고 저녁시간이 되자 박정미는 뛰어나갔다. 수다쟁이가 그 뒤를 따라가더니

  “ 교사 휴게실 쪽으로 갔어!” 하고 소리쳤다. 교실 안은 ‘박정미’ ‘휴게실’ ‘더러워’ ‘설마’등으로 가득 찼고 애들 머리 위 그것은 크기가 작아진 대신 짙어졌다. 애들은 밥을 받아 박정미를 먹어댔다. 시금치처럼 질긴 년, 밥알처럼 문드러진 년, 고기 하나 없는 년, 토해도 안 먹을 년, 싸고 맛없는 년...... 나는 소문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애들의 귀에 적절한 단어를 속삭여댔다. 소문은 커지고 커져 애들은 박정미의 신음소리, 소파 팔걸이를 잡고 있는 핏기 마른 손가락, 박정미의 손톱 자욱이 그득한 등을 그릴 수 있었다. 박정미가 들어왔다.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시작은 수다쟁이였다.

   “ 야, 재미 좋았냐고? 더러운 년아. “

 박정미는 수다쟁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머리 2개는 더 큰 수다쟁이는 박정미를 내게 던졌고 나는 의자에서 떨어져서.........어? 얼떨떨해 하는 내게 박정미가 소리쳤다.

   “ 은따 년아 안 비켜?”

 나를 살린 것은 박정미였고, 나를 일으켜준 것은 이경원이었다. 경원은 날 일으켜 세우더니 치마의 먼지를 털어주었다. 손이 회초리처럼 매서웠다. 그렇게 나는 경원의 친구가 되었다.

  이야기를 해야 할까? 부끄럽다. 경원의 눈빛 앞에서 나는 벌거벗을 수밖에 없었다. 경원의 눈빛은 굳건하고 매력적이다. 그래, 난 경원이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근데 되지 못했어. 아무와도 되지 못했어. 그래서 민지를 만든 거야. 내가 왕따라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 경원의 눈빛이 점차 매서워져 무서웠지만 그럴수록 나는 통제할 수 없었다. 입은 빨라지기만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봤는지, 왜 소문을 퍼트렸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뱉어, 그럼 상을 줄게 라고 경원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박정미의 이야기도 했다. 그 얘가 교사 휴게실에서 노닥거린다는 것을. 뼈마디가 굵은 손이 그 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을, 그 얘의 주머니에는 휴게실의 커피와 간식으로 가득 찼고 그 얘는 행복해 보인다고. 경원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경원은 나를 안아주었다. 부끄러움의 대가로 나는 경원을 얻었다.
   경원은 완벽했다. 그 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깔끔했고 공부를 잘했고 글도 잘 썼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봐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욕을 한 적도 없었다. 아이돌, 매점일주, 욕, 담배, 뜯어진 교복단추, 남자친구…… 고 3의 특성을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 어느 것도 경원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 얘는 체육을 못하고 아이돌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아무도 경원이 뒤떨어졌다던가 촌스럽다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경원은 무얼 하든 경원이었다. 얘들은 경원을 좋아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경원을 보는 얘들의 눈빛에서 나는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랬다, 경원은 완벽했기에 인간 같지 않았다. 그 얘와 인간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벽이 있었다. 상관없다. 경원의 곁에 있는 건 나였으니까. 경원은 똑똑했다. 경원은 정말로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를 다 읽었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도 알고 까뮈도 안다고 했다. 사는 건 헛되다는 까뮈의 철학에 동의한다고 했다. 신은 인간을 증오해서 세상에 던진 거라는 사르트르의 말도 알고 있었다. 경원은 세상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점점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전에 내가 겉멋 들린 어린애에 불과했다면 경원은 어른이었다. 그 얘는 내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경원과 지내면서 하루 하루가 즐거웠다.
  단지 경원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나는 경원이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무서웠다. 그 얘가 제발 똥이고 오줌이고 화장실에 안 들어갔으면 했다. 경원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경원의 신음소리는 손가락을 비집고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경원이 나오는 게 싫었다. 피범벅이 된 화장실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싫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경원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휴지에 물을 묻혀서 닦았다. 손을 씻어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경원은 잘 웃지 않았다. 경원은 울지도 않았다. 그 얘의 얼굴은 가면인양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언어 2등급을 받았을 때 경원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수다쟁이가 콰당하고 자빠졌을 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행복했다. 아무도 모르는 경원의 표정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원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머리 위에 있는 ‘늪’이 있었다. 분명했다. 아스팔트 같기도 한, 바싹 마른 ‘늪’. 건드렸다가 한없이 빠져들 것 같은 그것. 민지도 없는데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유령은 없는데? 아마도 내 것이 경원에게 옮겨간 듯 했다. 경원을 구해야 했다. 포사인가? 나는 미녀를 웃게 하려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왕 같았다. 괜찮아, 나는 나라가 아니라 박정미 하나니까.

   다시 장난이 시작되었다. 9월 중순, 수능 80일을 얼마 안 남긴 시점에 얘들의 긴장감은 최고조였다. 비극의 무대로 알맞았다. 박정미가 교사 휴게실에서 XX랑 떡을 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더럽다고 욕하는 목소리 가운데 “ 근데 박정미는 뭘 보고 학주랑……” 이라고 한 마디만 던져주면 끝이었다. 소문, 입술과 입술은 살아서 먹이를 물고 토했다. 우리는 학주가 박정미에게 시험지를 빼돌린다고 믿었다. 박정미의 성적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박정미의 배는 이상하게 불러왔고 우리는 둥근 배에 맺어진 어두운 거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10월 달 모의고사였다. 담임은 “지금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이라며 우리의 기운을 꺾어버렸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자습은 없었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교실에 남아서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채점을 끝낸 나는 경원의 쪽을 봤다. 컴퓨터용 사인펜을 잡고 있는 경원의 손은 떨고 있었고 입꼬리도 올라갔다. 위험신호였다. 그 때 복도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애들은 모두 문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박정미가 들어왔다. 수다쟁이가 말했다.
 
   “ 시험인데 입 좀 닥쳐라!”
 
    박정미는 수다쟁이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박정미에게 부푼 배는 사랑의 상징이었다. 우리에겐 역겨움의 상징이었다. 얘들은 이를 갈며 온갖 욕설을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나는 보았다. 얘들 머리 위에, 수많은 ‘늪’들. 얘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얗고 끔찍했다. 스스로에게, 부모에게, 오르지 않는 점수에 질려서 헛소문을 만들고 박정미를 박살내는 유령 족속들. 민지가 맞았다. 유령은 지옥에 갈 것들이었다. 내가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수다쟁이가 말했다.
 
  “ 몸 팔아서 시험 점수 올리니까 좋나, 걸레 년아?”
 
   박정미가 웃음을 멈췄다. 박정미는 말없이 배를 쓰다듬었다. 박정미는 ‘늪’이 없었다. 부른 배가 무엇보다 소중한 듯 했다. 그 모습은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처럼 숙연케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애들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늪’들은 사라지는 듯 했다. 아니 ‘그것들’은 경원에게 몰려들었다. 경원의 눈꼬리, 입 꼬리가 모두 올라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경원이야말로 ‘늪’이 좋아하는 유령인 것을. 그 얘가 했던 수많은 말들이 스러져갔다. 카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경원이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명과 책상 넘어지는 소리, 달려드는 소리, 수 많은 고함이 가득했다. 그러다 숨이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눈을 떴다. 박정미가 쓰러져있었다. 옆에는 복대가 있었다. 찢겨진 블라우스 아래 박정미의 배는 난민 모양으로 홀쭉했다.
 
   소란은 교장실로 들어갔다. 뼈마디가 굵은 손과 박정미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갖은 소문이 돌았다. 박정미가 교장 앞에서 학주한테 키스했다, 옷을 벗었다, 변태 교장이 어떻게 했는지 시연해보라고 했다던데? 아냐 박정미 년이 혼자 쇼 한 거래. 학주가 그럴 리가 없지. 누가 모텔에서 봤다던데? 이미 애를 낳고 복대만 했던 거래. 아니 그 년이 위자료 뜯어내려고 쇼 한 거라니까. 교장실에 들어간 것은 한 사건이었지만 학교에는 수많은 연애와 불륜담이 쏟아지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학주는 전근 가고 박정미는 퇴학이라는 사실이었다. 경원은 즐거워 보였다. 경원의 입은 쉴새 없이 침을 바르며 소문을 확산하고 재생산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경원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늪’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나를 잡아먹을지 몰랐다. 학주가 전근 가는 날이 다가왔다. 학주는 어느 날처럼 자습하는 교실을 한 바퀴 돌더니 아무 말 없이 학교를 떠나갔다. 운동장에 선 학주가 불 켜진 교실 개수를 세어보는 순간, 무언가 쿵- 하고 학주의 곁에 떨어졌다. 정미였다. 그 애의 시체를 치우기 전에 나는 봤다. 그 애의 배는 불러있었다.

   장례식이 열려 모의고사가 연기 되었다. 교장은 명문대에 미쳤지만 모의고사를 연기할 정신은 있었다. 애들은 박정미를 욕하던 입으로 울음을 토해냈다. 박정미에게 달려들던 손으로 그 애의 자리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그 애의 아버지조차 자식 잃은 심경을 훌륭히 해냈다. 그는 잘 다린 군복을 입고 와 우리의 손을 잡으며 울었다. 나는 군복 주머니 속에 껌이 들어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운구 차가 떠나고 담임이 들어왔다. 담임은 장례식 핑계로 막걸리를 몇 잔 한 모양이었다. 불콰한 얼굴로 담임이 말했다.
 
   “친구가 죽은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너희가 친구 몫만큼 ......”
 
   기차 화통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다쟁이였다. 수다쟁이를 필두로 한바탕 울음이 일었다. 나는 경원을 보았다. 경원은 고개를 수그리고 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 애는 눈치를 보면서 흑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경원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울음판이 된 교실 밖을 나왔다.
 
 나는 박정미가 떨어졌다는 옥상 위로 올라갔다. 박정미에 대한 거짓말을 시작한 것은 나였다. 그 거짓말을 가장 믿은 것은 박정미였다고 생각했다. 내게 민지가 있었던 것처럼 그 애에게는 학주와 학주의 아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가 보고 싶었다. 민지의 샤프란 향기가, 민지의 고양이 눈이, 민지의 심장소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뿐이다. 나는 박정미가 될 수 없었다.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사냥이 시작될 조짐인 것이다.
 
 “ 이경원 그 재수없는 년 하고는…… 그 년이 정미 욕 그렇게 해댔지?”
 “ 그 년이 정미 죽인 거야. 그 년이 얼마나 정미를 씹어댔는데. “
 “ 미친년. 사람 죽여 놓고도 울지도 않더라. “
 “ 그게 사람인가, 어디?”
   “ 친구도 하나 없는 년이 매일 중얼거리기나 하고……”

 나는 멈칫거렸다. 경원이가 친구가 없다고? 나는?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매일 자기 혼자 중얼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공부하다 돈 거 아냐?”
 
  교실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모든 애들이 날카로운 칼을 머리에 띄운 채 웃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익숙한 목소리는 대화를 이끌어 갔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어조, 적당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는 경원을 사람 죽인 왕따로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문을 열었다. 가운데 있는 사람, 소문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민지였다.

누군가 말했다.  “ 걔 진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냐? 매일 중얼거리고 난리치고……”
누군가 말했다.  “ 걔 누구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면 얼마나 무서운데…… 그거 뭐냐……”
민지가 말했다.  “ 싸이코패스? 유영철 같은?”

  교실의 기운이 비명으로 가득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경원이가 미쳤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말을 해야 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경원의 친구는 나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날뛰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민지에게 달려들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민지가 나를 보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민지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표시로 내 입술을 가로막았다.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공론이 어느 정도 형성되고 스스로 돌아갈 것 같자 민지는 나를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내가 말했다.   “ 어떻게 된 거야? 넌 가짜잖아?”
  민지가 말했다. “ 그건 중요하지 않아. “
  손 끝이 흐릿하게 보였다. ‘ 아냐, 내가 진짜고 넌 가짜라고!’
  민지가 웃음소리가 복도 가득 퍼졌다.
   “ 진짜는 없어. 무엇이 그럴듯하냐 문제지. 넌 스스로를 증명하는데 실패한 거지”
  손이 투명해졌다. 내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민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넌 박정미나 이경원처럼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어. ”
  손이 투명하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데?
  민지가 윙크를 했다.  “ 사라지는 게 어때? ”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민지는 똑똑했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민지를 믿었다. 경원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경원이 끌려가는 날 그 애 치마에서 떨어진 셔터 칼을 주웠다. 칼날을 만지는 감촉은 오줌을 참는 것과 같았다. 면도날을 그었다. 아프고, 피도 났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늪’이 다가온다. 경원도, 수다쟁이, 누구도 모두 공허하기만 하다. 마침내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피하고 숨어있다. 나는 정미의 아기를 생각한다.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야, 내가 왜 죽어. 난 살아있어. 내가 민지를 만들었다! 김민지를 만든 건 나라고! 김……. ㅁ……ㅣ………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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