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하마드리아스 -중-

2011.11.20 21:0511.20

  잔뜩 흐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추적일 기세다.
사내가 온전치 못한 걸음으로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별관에서 쟌센과의 독대가 제법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저녁 식사가 끝났는지 일층은 주류 판매가 한창이었다. 사내가 번잡한 테이블과 채 몸을 가누지 못한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지나왔다. 테이블에는 술을 엎질러 놓았는지 바닥으로 질질 흘러내리고 있다. 테이블 위나 바닥 등 도처에 먹다 남긴 음식이나 찌꺼기가 굴러다녀 쥐들을 불러 모았다.
  사내가 계단으로 향할 때 모진 일갈이 들려왔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니 마담이 어린 소녀를 중년 사내들 쪽으로 모질게 앉혔다. 여자 아이는 자리를 벗어나려 애썼지만 마담의 억센 팔뚝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전쟁 통에 오 갈 데도 없는 널 보살핀 게 누군데!> 맞은편에 앉은 불룩한 배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가 기괴한 눈웃음과 뒤틀린 미소를 보내며 소녀를 다독였다. 마담이 손님의 비위를 맞춰주고 주방으로 몸을 돌리자 사내는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담이 사내를 보고 반색했다. 서둘러 쟁반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담아 건네며 슬쩍 사내의 옆으로 자리했다. <마로니카에서 데려온 어린 여자를 불러줄까?> 마담이 계단을 올라가는 사내에게 식사를 건네주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마담의 얼굴은 만져보지 않아도 지그시 누르면 쇳덩어리처럼 단단하고, 닿은 순간 서늘한 감촉이 느껴질 것 같다.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마담이 마로니카에 물난리가 나서 귀금속 값이 많이 올랐으니 내다 파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마담이 말을 마치자 사내는 이미 저만큼 올라가 있다. 마담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오며 요즘엔 전쟁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다닥 끝나지 뭐야, 덕분에 보석 값이 많이 올랐어, 등으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못된 괴물들처럼 보물을 잔뜩 끼고 살 것도 아니면서… 그러지 말고…….> 마담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밑에서 마담을 찾는 덕분에 사내는 마담의 조잘대는 속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담이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사내는 복도의 맨 끝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밤, 통로 양 옆의 객실에서는 점잖지 못한 행위의 증거들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가정집에서였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낯을 붉히게 만드는 소리였다. 뜻하지 않은 청음으로 채찍질이라도 맞은 듯 사내의 걸음이 빨라진다. 저편의 방문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사내가 문을 거칠게 열고 닫았다. 벽걸이들이 제일 먼저 바르르 떨었다. 이어 경첩에 매달린 문이 지르릉 울리는 걸 몸으로 받아내며 사내가 기대어 선다. 사내의 어깨가 곤하게 늘어져 있다. 전날 열어놓은 창으로 밤바람이 불어와 서늘했다. 짐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서두르느라 미처 개키지 못한 침대보와 이불이 구겨진 채 얽혀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재차 노크소리가 들리고서야 사내가 몸을 돌렸다. 마담이었다. <독고 여행자는 원래 외롭게 마련인데….>하며 차를 들고 온 마담을 향해 사내는 짜증스럽게 거절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사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세어 나왔다.
  사내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몸을 뉘인 채로 깃털달린 바늘만 만지작거리다 던져 버리고는 한숨만 내쉬었다. 탁자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식사가 그대로 놓여졌다. 사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후두둑 빗줄기가 긴 사선을 그었다.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다.
  두 팔로 팔베개를 한 사내의 눈은 파격적인 음주와 노곤하게 늘어진 신체로 인해 일찌감치 감겼다. 사내가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벽면 너머에서 여자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벽을 통과해 스며 나왔다. 사내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벽을 통과해 울려왔다. 뒤척이던 사내가 똑바로 누웠다. 감긴 두 눈꺼풀 안에서 동공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자정이 넘은 밤까지, 사내의 눈동자는 멈출 줄 몰랐다.  
    
  밤바람이 불어오다 창에 스러진 탓인지 창문이 미약하게 떨린다.
이내 까만 그림자가 달을 가리며 창가로 들어섰다. 동시에 객실의 손잡이가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째깍’ 순조롭게 돌아가던 손잡이에 제동이 걸렸다. 창문이 살짝 덜걱거리고 유리가 털털대며 진동했다. 유리창에 하아얀 김이 서린다. 창문 틈새로 얇고 기다란 무언가가 쑥 밀고 들어오더니 슬며시 창문에 걸려있던 걸쇠를 위로 밀어 올린다. 창문이 바깥으로 열리고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창문에서 검은 형체가 주춤하는 사이 객실 문에서는 문고리가 미동하면서 철컥 거렸다.
  문이 안으로 찬찬히 열리다가 ‘짤깍’ 멈췄다. 워낙 소음이 컸던지 검은 형체는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불 꺼진 복도의 어둠속, 검은 옷자락 안에서 불쑥 하얀 손이 튀어나와 문과 벽 사이를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올라갔다. 그러더니 우뚝 멈췄다. 빗장이 걸려 있다. 문의 빗장이 소리 없이 제거되는 사이 창문이 열렸다. 창밖의 검은 형체에 가려 바람이 새어 들어오진 않았다.
  창문의 검은 형체가 안쪽 문마저 열고 조심조심 바닥에 발을 들여놓는다. 때를 같이해 방문의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객실 문을 열고 조용히 내부로 들어선다. 뒤를 따르는 검은 그림자가 또 있었다. 방문을 먼저 들어온 검은 그림자가 사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간다. 발소리가 나지 않고 ‘스스스’ 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만 들렸다.
  뒤따라 들어온 검은 그림자는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근다. 창문으로 들어온 검은 형체도 창문을 잠그지는 않고 닫아만 뒀다. 침대는 어두운 방 한 귀퉁이에 자리했다. 침대주변의 윤곽이 검게 가려졌다. 어느 새 검은 그림자들이 침대를 둘러싸버린 것이다. 누군가 자리 한 듯 이불이 불룩 솟아오른 게 희미하게 보였다. 검은 형체 중 하나가 바닥으로 몸을 굽히더니 시트를 살며시 들어 올려 침대 밑을 확인했다. 다른 한 명은 이불을 설핏 들추어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다리를 발견한 참이었다. 용의주도했다. 바닥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검은 형체들의 손이 일제히 새까만 옷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와르르 팔을 침대로 내질렀다. 단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움켜쥐고서 무던히 팔을 아래로 내지르는 동작에, 창밖에서 번져 오는 달빛이 비추자 검은 그림자들의 손아귀가 번뜩이며 빛났다. 침대가 마구 들썩인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이 끼이익 소음을 토해내며 연신 삐걱거렸다. 그 서슬에 이불이 크게 나부낀다.
  시커먼 옷자락의 검은 형체들이 침대 위를 헤집고 난도질 하는 모습은 선뜩했다. 베갯속 깃털이 나풀거리다가 침잠하게 가라앉을 즈음에야 동작이 멈췄다. 그럼에도 흉기에서 상해의 흔적은 묻어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아귀를 바라본 검은 형체들이 서로 두런거린다. 그들은 보풀이 올라오고 구멍이 숭숭 뚫린 이불 속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굽혔다.
  부울쑥
  돌연 이불 한 켠이 솟아오르더니 검은 그림자를 후려갈겼다. 이불덕분에 타격 음은 없었지만 검은 형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곧이어 이불이 젖혀지며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옷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너덜거렸다. 놀랍게도 의복에는 구멍이 숭숭해 거진 헤어져 있는데도, 사내의 몸에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찍힌 듯 무수한 붉은 실선만이 남아있었다. 너덜거리는 의복사이로 사내의 몸에 그려진 기묘한 도형들이 얼핏 보였다.
  검은 형체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사내의 손목에 덜컥 붙잡혔다. 용을 쓰는지 검은 형체가 이리저리 팔을 뒤틀어보았지만 사내는 꿈쩍도 안한다. 반대쪽 팔로 사내를 후려치려했지만 사내가 미동도 않고 팔을 놀리자 검은 형체는 바닥을 붕 떠서 허공을 날았다. 괴력이었다. 그리곤 모로 벽에 호되게 부딪히고는 스르르 쓰러졌다. 그 틈에 하얀 빛줄기가 쏜살같이 침대로 내리 꽂힌다. 사내가 몸을 돌리자 빈 침대에 칼이 깊숙이 박혔다. 몸을 날린 관성과 침대의 매트 덕분에 칼을 놓친 검은 형체는 그 자세로 침대에 처박히게 됐다. 그걸 사내가 보기 좋게 걷어차자 방안을 가로질러 테이블에 부딪히더니 그마저 넘어뜨리고는 벽을 퉁 울려 대며 떨어지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최초 일격에 나가떨어졌던 검은 형체가 그 사이 다시 뛰어들어 흉기를 휘둘렀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사내의 손바닥에도 기하학적인 도형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했다. 사내의 오른손에 부딪힌 뭔가가 쨍 하고 부러져 내렸다.
  그 서슬에 검은 그림자가 주춤 뒷걸음질 치는 걸 사내가 복부 깊숙이 발을 내질렀다. ‘헉’ 그 자는 활처럼 등을 구부린 채 힘이 빠지더니 침대에 풀썩 상체를 걸치며 무너졌다. 그동안에 벽 한 켠  에서 검은 형체하나가 구무럭구무럭 몸을 일으켰다. 그자는 뒤도 안돌아보고 창문으로 달음질 쳤다. 사내가 급히 침대에 박혀 있던 칼을 내던졌다. 검은 그림자는 억 하는 단말마와 함께 다리를 움켜쥐고는 고꾸라졌다.
  바닥에는 테이블이 넘어져 산산 조각난 물병으로 인해 엎질러진 물이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실내는 밀폐된 공간에서의 혈투로 후끈했다.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후우우 긴 숨을 내뱉었다. 찢어진 상의 사이로 사내의 굴곡진 몸이 달빛에 윤곽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사태에 한동안 사내는 앉아 있기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마주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가 문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휙 들어올렸다.
  문을 급히 두드리고 있었다. 사내가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마담이다. 사내는 다급하게 남자들을 구석으로 옮기고 유리조각을 쓸어 담았다. 테이블을 다시 세운 사내가 문을 열었다. 마담이 무슨 일이냐고, 조금은 마뜩찮은 어조로 물어왔다. 사내는 발을 헛디뎌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둘러댔다. 마담은 의아한 듯 사내의 큰 체구 너머로 방안을 둘러보다가 자신은 괜찮지만 다른 투숙객에 방해될지도 모르니 조심해 달라고 하며 몸을 돌렸다.
  마담이 내려가는 걸 확인 한 사내가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그리곤 바닥의 카펫을 걷어내더니 조그마한 분필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삼각형 두 개를 포개어 놓은 듯한 기묘한 도형과 알 수 없는 문자를 여기저기 그려 넣었다.
  작업을 마친 사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조용히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어떤 리듬감이 있는 듯 했고 규칙적인 운율을 내포하듯이 들리기도 했으며 시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듯 도 했다. 사내가 여태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해오던 말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발음이었다. 잠시 후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의미의 언어 아닌 언어의 노래가 반복되는 후렴구로 끝맺었다.
  사내의 입술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즈음 이였다. 마담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던 삐걱거리는 나무계단 소리가 뚝 끊어졌다. 동시에 창 밖에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나 야행성 조류의 홰치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검은 남자들 중 정신을 차린 한명도 마담이 사라진 방문과 창밖을 번갈아 주시하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무서우리만치 투명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이방 너머 모든 세상의 생물이 모두 사멸한 듯이. 어느 방향에서도 생의 울부짖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부드러움을 넘어선, 질감을 느낄 수 없는 표면 위에 접촉한 느낌이었다. 실내는 공허함으로 수렴되다가 구석에 널브러진 검은 형체들이 내지르는 신음과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으로 인해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검은 남자는 다가오는 사내를 보고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실핏줄이 드러나 보일 만큼 눈을 부릅떴다. 사내가 천천한 걸음으로 다가오자 남자는 물려진 재갈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 바람에 까만 두건이 흘러내렸다.
  사내가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사내는 남자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남자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예의 그 뜻 모를 소리만 읊조렸다. 사내의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이한 언어의 성량이 높아져 가자 남자는 이마 위 사내의 손으로 두 눈의 초점이 모아졌다. 이윽고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두 눈을 까뒤집고는 흰자위를 드러냈다. 하지만 허옇게 눈이 돌아가다가 곧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몇 번을 더 시도 했지만 검은 남자는 심한 경련과 신음성을 흘리며 축 늘어져 버렸다. <지독한!> 사내가 이를 갈며 뱉어냈다.
  바닥에는 어느새 침대 속 시트가 깔려져 있었다. 검은 남자 셋은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다. 맨 처음 정신이 든 리더인 듯 보이는 남자는 사내가 정체를 추궁하자 자신들을 강도라고 우겼지만 사내는 믿지 않는 눈치다.
  사내는 이미 다른 남자들도 깨어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일러줬다. 사내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들에게서 반응은 없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를 맹렬히 굴리면서도.
  사내가 고개를 설레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고리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문을 밀어대는지 빗장역시 진동하고 있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을 목격한 사내가 문가로 다가갔다.
  <왜 이리 문을 잠그고 있어.> 아까 깜박했다며 마담이 수신인이 사내에게로 된 서찰을 전해준다. 발신인은 없었다. 버드나무 문양의 붉은 인장만이 단출하게 서신을 봉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엊저녁에 얘기 말인데…….>
   한사코 여자를 마다하는 사내에게 마담은 능글맞게도 다시 칼과 보석류 같은 금붙이를 팔라고 애걸했다. 값은 톡톡히 쳐준다면서. 사내는 이제 질렸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마담은 푸덕하고 두툼한 살집에 풍성한 볼 살을 가진 얼굴이었다. 웃을 땐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한 인상이지만, 이런 얼굴은 화가 나면 삐쩍 마른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매서워지고 포악해질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내는 단호히 거절했다. 마담의 앞으로 삼분의 일쯤 문이 열린 채 사내가 내부를 가로막고 선 형국이었다. 마담은 사내의 거절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생글거렸다.
  마침 우유를 가지고 왔다며 쟁반을 든 마담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사내는 막 서찰을 살펴보려는 중이라 화들짝 놀라며 마담을 제지하려 했다. 사내는 그러지 못했다. 쟁반을 든 마담을 막거나 문을 닫아버렸다면 애써 가져 온 우유를 엎어 버리는 참상이 벌어졌을 테니까. 사내는 옷깃이라도 잡아볼 요량으로 손을 뻗었지만 채 닿지도 못했다. 쟁반을 든 마담이 탁자로 다가갔다. 사내가 긴장한 듯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거 좀 마시고 내 얘기 다시 한 번 생각해보….> 마담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곧이어 조금 전 테이블이 넘어질 때와 비슷하게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사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폭신한 카펫이 우유에 적신 빵 마냥 엎질러진 내용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사내는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상황이 난처하기도 하련만 당황스럽진 않은 모양이다. <절도범들인 모양인데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사내는 덜룩 우유를 착실하게 흡수한 희부연 카펫을 보고 덧붙였다. <깨진 물병이나 카펫상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제 잘못이…….>
  ‘끼야아아악’
  상황에 맞지 않는 예의 없는 비명이라고 생각 했던지 사내가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그럼에도 찢어지는 비명에 사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마담에게 다가갔다.
  마담이 우두커니 어깨를 떨고 있다. 사내가 마담의 어깨를 피해 옆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너머로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남자들은 모두 거품을 입에 물고 죽어 있었다. 사내가 남자들에게 다가서자 말림 틈도 없이 마담은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사내는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부글거리는 허연 거품은 가슴께까지 흘러내렸다.
  층계참의 소란스런 발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사내는 겨우 시선을 옮겼다. 세 구의 시체. 자신이 묵은 방. 뛰쳐나간 마담. 아래층의 무수한 발소리.
  사내가 급히 움직인다. 짐 꾸러미에서 수통을 꺼낸 사내가 시신의 입에서 거품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뚜껑으로 단단히 봉하고는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이 살인자!> 마담은 돌변했다. 이를 가는 마담에게 사내가 설명하려 했지만 막무가내다. 마담의 덩치에 맞는 커다란 눈과 볼 살이 많아 사람 좋은 웃음을 간직한 억실한 인상과 실한 살집이, 그만 반대로 거대한 위압감을 주고 만다. 화를 낼 때는 숨을 크게 들이키는지 원피스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어서 우레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이것도 훔친 거겠지!> 그악스러웠다. 마담은 사내의 짐을 뒤지려다 칼에 박힌 보석을 빼앗으려 했다. 마담의 억센 손아귀에 사내의 단추 몇 개가 두둑 떨어져 나갔다. 사내가 서둘러 마담을 밀쳐내 버리곤 창문을 열어 젖혔다. 마담은 완력사용을 그만두고 이제 방안의 물건을 죄다 사내에게 집어던지고 있었다.
  일출이 시작 되려는지 여명이 밝아왔다. 사내가 뒤를 돌아본다. 세 남자의 동공은 크게 벌어진 채 반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빛에 반응하는 눈동자는 사내와 마담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마담이 내던진 유리조각이며 구멍 난 베개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사내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경비병들이 오는지 복도가 소란스럽다. 시신들의 혈색이 하나같이 급살한 모양으로 퍼렇게 질려 있다. 마담이 병사들을 재촉하러 밖으로 나갔다.
  <빨리 와! 빨리! 이 양반들아!> 마담이 발을 동동 굴렀다. 병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으나 아무도 없었다. 마담의 눈에는 아직 사내의 칼에 박힌 큼지막한 보석이 눈에 선한지 대단히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열어 젖혀진 창문사이로 짙은 새벽안개에 가려진 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마담과 병사들은 갑자기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온 방을 헤집느라 요란을 떨었다. 사내를 발견하지 못한 병사들이 열려진 창문으로 다가갔다.
  짙은 안개로 창은 흡사 뿌연 장막으로 보였다.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 본 그들은 수색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땅은 간밤에 내린 비로 질척해져 있었다. 이층 발코니 아래 축축한 흙길에는 주변에 비해 유난히 깊은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안개 사이로 화광이 번쩍인다.
화재(火災)다. 화염의 열기와 빛에 안개가 주춤거린다. 건물의 목재들이 타닥타닥 마지막 숨을 내쉬며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창사이로 시뻘건 불길과 새카만 연기가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근처 주민들은 불타고 있는 건물의 화재진압보다는 주변 건물로 불길이 옮겨가는 경우를 막는데 급급했다. 주택가가 빼곡히 밀집했던 탓이다. 화재가 난 건물의 바로 옆집들은 귀중품들을 옮겨두는 한편, 외벽에 물을 뿌려대느라 야단이다. 몰려든 인파는 결코 넓지 않은 길을 가득 메워 진화작업을 더디게 했다. 제 집 불구경 하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유독 구경하기에는 좋지 않은, 맨 뒤에서 화재가 난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긴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남자였다. 우두망찰하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뒤로 젖힌다. 사내였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창백한 안색이다.
  그때 사내의 몸이 왈칵 쏠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사내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구석진 곳으로 잡아끌었다. 사내를 이끈 남자는 코와 턱 밑, 구레나룻가 연결되어 시커먼 숲을 이룰 정도였다. 털보라고 해도 좋았다.
  남의 이목이 두려운 건지 적막한 곳에 다다르자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털보가 사내를 밀치며 일갈했다.
  <저게 다 당신 때문이야!> 털보가 눈을 부라렸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병사들이 우리 지부를 불태우는 거지?> 경황이 없던 사내는 자신도 잘 모르겠노라고 답했다. 털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사내를 탓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당신 신상에 다른 뭔가 안 좋은 일은 없었소? 이 정도로 난리를 치면 벌써…….>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내는 아침 일찍 약초꾼 노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수통에 든 걸 의뢰해볼 요량으로 방문한 사내에게 노인은 황급히 문을 닫아걸었다. 백작의 성에서 자신의 치부가 밝혀진 이유에서인지 거듭 부탁하는 사내에게 욕설로 일관했다.
  사내는 하릴 없이 약초상점들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점원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의아해 하는 사내가 벽면에 붙은 수배지를 목도하고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고, 그로부터 줄곧 사내가 긴 로브를 입고 다니는 점도 그러한 연유였다.      
  사내는 털보에게 수배자가 된 사연을 얘기해줬다. 그러면서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털보의 목소리는 사내가 의뢰하러 찾아갔을 때의 그 수납원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털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추측이 맞다 고 알려줬다.
  <그런데… 짐작 가는 누군가도 없소?> 털보의 말에 사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잠시 후 사내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품에서 마담에게 받은 편지를 꺼낸 사내가 인장이 찍힌 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친애하는 아스타를로아에게.

  감시가 심해 당신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겁게 짓눌리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다녀간 이후로 부쩍 심해진 느낌입니다.
  저를 둘러싼 이 음험한 감시와 억압의 그물망이 당신에게도 뻗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때면,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들끓는가 하면 무기력하고 참담한 현실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제가 혐오스럽습니다.
  그들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할 것이고, 그들은 당신을 상상하기도 힘든 위험에 빠뜨릴 겁니다. 그래서 제 우매한 머리로 생각해 낸 게 고작 국외로 도주하라고 하는 충고가 전부라는 점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난데없이 편지를 꺼내 읽고 있는 사내를 보고 털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사내의 얼굴에 나타난 육중한 무게에 말을 걸려는 털보가 입술을 들썩이다가 닫아버렸다. 오히려 그런 기색이 방해가 되었는지 사내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필자가 급히 덧붙인 듯 휘갈겨 진 필체의 마지막 추신을 읽고 있었다.

급하게 씁니다. 그들이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본의 아니게 마로니카로 종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국왕의 칙사가 칙명을 통보해왔습니다. 바로 떠나야 합니다. 전쟁터로 떠나는 마당에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을 듯해서 우둔한 서신을 남깁니다. 당신도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르브레 궁에서
                                                                쟌센 데 팰트로.

  털보는 사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중얼거렸다. <당신도 꽤 골치 아픈 사람이  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이 나라를 뜨는 게 좋을 거야.> 털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어갔다. 사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부탁할 게 있소.>
  
  털보가 쩝 입맛을 다신다. 사내가 수통을 건네며 부탁했을 때부터 털보는 어이없다는 듯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뒷구멍으로 일하기에 어느 정도 위험성은 따르는 법이지만 지부를 날려먹은 당신을 우리가 그냥 두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고, 애초에 사내의 대답을 기대한건 아닌지 혼자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 돈을 지불한 고객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까’ 했다.
  사내가 정식으로 의뢰를 하겠다고 몇 십 에퀴쯤 지불할 의사를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돌아서는 털보를 향해 사내가 만류하며 거액을 약속할 때조차 내키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외면한 걸로 봐서, 금전적인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 속사정은 짐작 할 수 없었다.
  거듭된 사내의 간곡한 설득 끝에 털보는 끝끝내 그러겠노라 고 수락하고 말았지만, 입 밖에 꺼내자마자 곧 후회한 듯이 복잡다단한 표정을 지금까지 보이고 있었다.
  <일단 봐야겠소.> 털보가 수통을 건네 달라는 듯 손짓을 하자 사내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말했다.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수통을 열어 본 털보는 침과 뒤섞인 독약의 고약한 냄새에 곧 얼굴을 찡그렸다. <침이 좀 섞였소.> 사내가 거 보라고 했다. 털보가 냄새  때문인지 휘휘 손을 내젖는다.
  <여러 약초로 알아내는 수밖에…, 꽤 걸릴 거요.> 털보는 고명한 의사를 초빙해왔는데 다른 방에서 그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사내는 수배중이니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벽 귀퉁이의 그림으로 시선이 쏠렸다. 화장대에 앉아있는 청순한 여인을 그린 초상화. 가만 보니 양쪽 귀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하단에 조그만 필체로 ‘숲의 요정 아넬라’ 라고 씌어져 있었다. 사내가 유심히 그림을 쳐다보자 털보가 의외라는 듯 지나가는 말투로 덧붙였다.
  <이 여자를 아시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털보는 대신 말을 이었다. <전설에 나오는 사랑하는 인간 정혼자에 배신당한 사연 많은 여자요정이지. 그래서 얼굴이 저 모양이고.> 털보가 자리를 비우자 사내 혼자 남았다.
  과연 털보의 말대로 눈물에 화장이 크게 번진 순수한 여자 요정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사내는 벽으로 다가가더니 연신 그 그림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털보가 돌아 왔을 때는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전직 약초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다는 의사의 말을 털보가 대신 전해줬다. <워낙 극독이라 검사하는데 고생했다고 하더군. 그 작자 말로는 협죽도나 천남성의 열매가 미량 조합된 바꽃 이라고 하더이다.> 사내의 안색이 낭패라는 듯 급격히 어두워지는 걸 털보가 눈치 채고는 이유를 물어왔다.
  <중요한 단서가 될 뻔했는데… 별거 아니오.>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털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문을 이어갔다. <이 약물은 사람을 죽이는 극약이나 사냥용에 잘 쓰이니 만큼 맹독성 식물로 만들어졌소. 매우 위험하며 미량으로도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고 하더군. 특히 섭취하는 것보다는 상처에 직접 침투할 시에는 굉장히 치명적이라는군. 섭취 할 때보다 혈관에 직접 닿으면 그 치사량도 낮아진다면서 정말 위험한 독물이라고 했소.>
  털보가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했다. <에… 그리고… 바 꽃에 대해서는….> 털보가 주섬주섬 메모한 종이를 꺼내들었다. 의사의 말을 전문으로 적어 놓은 듯 미끄러지듯 읊어 내렸다.
  길이 약 일 미터로 깊은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바꽃은 줄기가 곧고 늦여름과 초가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털보가 설명했다. 뿌리에 강한 독성이 있으며 르브레의 깊은 산속이 원산지이다 며 부연설명을 늘어놓았다.
  의사의 말로는 이 독은 특수한 환경에 적합한 이곳이 원산지라는 점과 그만큼 생산과 유통에 이르는 관리가 엄격해서 밀반입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생약과 가공물의 독성차이를 들어 가공이 되면 극소량도 치사랑이 될 수 있다고 털보가 말했다. 전문가만 가공할 수 있어 암시장에서도 불가능하다며 국가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중에서도 바꽃의 가공은 굉장히 어려운 분야라고 전문가의 힘든 자격에 대해 서술했다.
  위험 식물인 만큼 그 생산과 관리가 엄격하기에 허가는 신분과 용도가 확실한 사람에게만 허가서가 발급된다는 의사의 말을 털보는 강조했다. <이만한 양이면 굉장히 많은 거라는군. 민간인은 절대로 구하기 어렵고 분명 높은 누군가의 입김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놀라는 눈치였소.>
  의사의 설명은 거기서 끝났다. 허가서는 범죄의 증거가 되기에 왕이 친히 내린 특명으로 반드시 보관하게 되어 있다고 털보가 설명했다. 청부길드답게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듯 했다.
  허가서는 단 2부이며 사사로이 열람 할 수 없기에 위조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문서 보관자와 관리자, 수취인이 허가 받을 때 단 한 번 볼 수 있다는 점, 허가서의 발급과 그 제조 과정에는 모두 중앙에서 내려온 감시자와 기사들이 참여한다고 알려줬다. 또한 그 별관은 기사들과 마법으로 경비된다면서 위조나 탈취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일반약초들은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지만 독초나 기타 위험물들은 왕궁에서 엄중히 생산하며 관리를 총괄 담당하고 있소. 허가서는 왕궁의 원본과 똑같은 사본을 백작별관에 보관한다고 알려져 있소. 약초의 재배나 채취 역시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깊은 산속은 위험해서 못 들어가고 채취역시 국가에서 정한 곳에서만 가능한데다, 잘못해서 교단에 속한 경작지에 들어갔다간 큰 사단이 벌어지기 때문이지.
  사실 토지나 산의 대부분이 교단과 왕궁의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야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이런저런 공공연한 사실 외에도 은밀한 정보도 갖고 있지만 약물에 대해서 작업을 시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러면서 털보는 사내와 눈을 맞추며 확신하듯 말했다.
  <난 지금 당신이 무얼 궁금해 하는지, 어떤 것과 싸우고 있는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소…. 르브레를 벌집에 비유하자면 약초시장은 르브레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여왕벌인 셈이오. 이 나라는 그걸로 먹고사니까.
  그저 벌이 만들어놓은 가장 가치 있고 보편적인 보물인 벌꿀에 욕심이 있다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은 시도할 가치가 있소. 아니면 애벌레나 벌집의 다른 부산물을 원하는 것이라도 조금의 피해만 각오한다면야 성공할 수도 있소. 아무런 피해가 없을 수도 있고….> 사내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벌집의, 벌떼의, 그 군집자체의 생존권과 정체성의 상징인 여왕벌을 원하고 있는 게 문제요. 여왕벌이 문제라면 애초에 적당한 타협이란 끼어들 여지가 없소.  오로지 침입자에 대한 무섭고 집요한 응징만이 있을 뿐이지.> 여왕벌을 건드린다면 그 거대한 군집 전체가 달려들 거라고, 어리 섞은 욕망이며 자신을 파멸로 내모는 호기심이라고 털보는 경고했다. <
  우리 같은 청부길드도 여왕벌에 관한 의뢰를 많이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소. 르브레에서는 그게 유일한 청부거절사안이요. 그래서 왕국과 어느 정도 타협과 견제가 존재하는 법이고.> 털보는 청부길드조차 청부를 거절 하는 이유에 대해서 진심으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사내의 태도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걸 보고 털보가 혀를 차며 중얼 거렸다. <쓸데없는 소릴 주절거리고 있었군. 나는 이제 그만 발을 빼야겠소. 상부에서는 의뢰자를 무시하고 철수하라고 했지만…. 내 독단으로 당신을 도왔으니, 이젠 내 몸을 사려야 할 때니까…….>
   털보가 짐을 챙기며 세밀하게 그려진 도면을 건넸다. <백작의 성이 그려진 구조요. 경비병이나 기사들 위치도 표시되어 있소. 대신 마법에 대한 건 없소. 그 분야는 완전히 문외한이니까. 아 당신, 거기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털보가 짐을 어께에 걸치며 수배지를 흔들어 보였다.
  <당신, 아주 유명하더군. 덕분에 우리 지부도 말아먹고 말이야. 웬만해선 청부길드를 눈감아 주는데……. 그래서 이번일은 더 구리단 말이야. 아무튼 의뢰받은 일에 대해서 의뢰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는 않으니까. 우린 이 나라에서 철수할거요. 당신 같은 위험인물과 또 다시 어울린 것도 지부가 날아간데 대한 내 자존심 때문이랄까 후후.>
  털보가 몸조심하라면서 방을 나서려 하자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혹… 의사가 투구꽃이 섞였다는 언급은 없었소?> 그에 털보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토해내더니 슬며시 웃으며 돌아봤다.
  털보가 떠나고 사내도 곧 길을 나섰다. 근처를 흐르는 강의 영향 때문인지 안개는 그때까지도 자욱하게 남아있었다. 사내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사내의 물음에 털보는 바꽃을 다른 말로 투구꽃이라고 부르노라고 일러줬다. 차갑고 뿌연 수증기가 사내의 몸을 끈적끈적 휘감더니 삼켜버렸다.
  사내는 골목 곳곳의 병사들을 피해서 낡은 창고로 숨어들었다. 천장에 가까운 기둥과 기둥을 잇는 나무뼈대사이에 자리를 잡은 사내는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곤 망토를 펴서 자리를 잡은 다음 들어 누웠다. 가축이 머물렀던지 분뇨로 인해 지저분한 냄새를 풍겼지만 여의치 않는 듯 했다. 좁은 탓에 모로 누워 잠을 청하던 사내는 주변의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듭 몸을 일으켜야 했다.
  사위가 어둑해지자 달빛에 사내는 검은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자주 뒤척이던 사내가 구무럭 몸을 일으켰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침실의 창가에서 두 개의 달이 휘황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불룩 솟아있는 침대와 방안의 정경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열려진 창문으로 밤바람이 커튼을 한들거린 후 침대까지 도달했고 사람으로 보이는 거무스름한 형체는 예기치 못한 자극으로 곧 수면에서 깨어나야 했다.
  눈꺼풀을 밀어 올려 외부의 자극을 목도하게 되자 그 사람은 몸을 일으키려 튕기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새파란 광택의 금속성 물체가 목을 지그시 눌러 제동을 걸었다. 신음성도 채 나오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목을 누른 신속한 제동력에 기인한 건지 아! 하는 감탄사뿐이다. 누워있는 사람의 목젖이 위아래로 꼴깍 거린다. 당혹과 긴장의 증거였다.
  침대 옆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칼을 겨누고 있었는데 어두워서 윤곽만 그려질 따름이다. 시커먼 그림자는 번뜩이는 두 눈으로 칼을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일어나라는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그 사람은 부스스한 자세로 일어나 서둘러 옷을 꿰었지만, 달빛에 반사되는 흉기가 마음에 걸리는 듯 옷을 반대로 꿰거나 목과 팔을 꿰는 구멍이 뒤바뀌기도 했다. 한동안 허둥거리고 나서야 그 사람은 나름 의복을 갖출 수 있었다. 칼은 어느새 치워져 있었다.
  방 한 켠이 일순 환해진다. 밤늦은 시각이라 일출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마치 해가 떠오를 때의 색채로 주위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불을 켠 것이다. 밝혀진 조명 사이로 낡은 망토에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딱딱한 표정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렌지 빛 조명사이로 벽에 걸린 액자와 가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램프(Lamp)를 든 사내가 다가가자 늙은 관리인이 갑작스런 불빛에 눈을 가렸다.
  유리에 금이 간 외눈 안경을 끼운 늙은 관리인과 사내가 침실을 나섰다. 사내의 추궁에 늙은 관리인은 벌벌 떨면서도 자신이 백작 휘하의 하급관리로 서기를 맡아보고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노(老) 서기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백작에게 얽매여 있는 처지였는데 낡고 깨진 외눈 안경이 부유했던 과거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늙은 서기는 침실에서 보여준 흉기를 든 사내의 모습과 자신의 처지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었으나, 사내의 점잖은 행동에 적이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 늙은 서기는 사내의 의문 사항을 고분고분 만족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백발은 아니더라도 반백은 훨씬 넘은 늙은 서기는 사내에게 대항할 힘도 없어 보였고 그럴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저 점잖은 괴한이 태도를 바꿀지 몰라 불안 해 하는 눈치였지만.
  노 서기의 말로는 백작별관의 경비는 중앙에서 파견된 기사가 담당한다고 했다. 위급 시에는 파견기사와 영지에 주둔 중인 병력이 합류하는 체계였다. 또 보관소 출입 시에는 위조나 도난방지를 목적으로 반드시 파견된 상급기사와 백작이 함께 동행 한다고 말했다.
  <보관된 장소가 어디쯤이오?> 사내가 묻자 실무를 맡고 있는 노 서기가 위치는 알지만 열쇠는 백작이 보관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열쇠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요. 나으리.> 백작과 파견기사가 쇠문의 두 개의 열쇠 중 하나의 열쇠를 각각 갖고 있기에 불가능하다고 늙은 서기는 조그맣게 말했다.
  사내가 출렁거리는 쇠붙이들을 품에서 꺼내더니 노 서기에게 던져줬다. <그들에 대해선 신경 쓸 것 없소.> 사내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찰랑이는 수많은 열쇠꾸러미를 받아든 노 서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마도 사내는 열쇠란 열쇠는 죄다 집어온 모양이다. 노 서기가 사내에게 한껏 굽실거리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램프가 훑고 지나간 불빛에 어두컴컴한 복도의 벽면과 액자,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램프의 조명덕분에 또 다른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복도 중간 중간 열린 방문으로 쓰러진 경비병들과 하인들이 언뜻 보인다. 갑옷 입은 기사 역시 통로 구석에서 한껏 늘어져 있다. 눈의 띄지 않는 벽면의 구석진 곳에는 세심하게 그려진 도형들과 기묘한 문자들이 조합된 문양이나 패턴 등이 마구 긁어져 있거나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늙은 서기는 사내의 능력에 겁을 집어먹은 듯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보관소는 맨 꼭대기 층의 커다란 첨탑에 위치해 있었다. 원형 계단을 부지런히 발을 놀려 빙글빙글 올라가자 사내와 늙은 서기는 널따란 쇠문과 마주 할 수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크기였고 꽤 두꺼워 보였다.
  왼편에는 불을 뿜는 용이 역동적인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반대쪽에는 나무나 식물을 상징화한 단정한 문양이 부조로 나타나 있었다. 노 서기가 경건한 눈빛으로 각종 약초를 뜻하는 르브레 왕실의 문양과 백작가의 문양이라고 일러줬다. 여백에는 유려한 필체를 따서 조각되었는데 노 서기가 역대 왕의 시호와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했다.
  열쇠구멍은 두 군데였다. 노 서기가 쇠문으로 다가가 각각 같은 문양이 그려진 열쇠를 밀어 넣으려 할 때, 사내가 조용히 제지한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쇠문의 여기저기를 찬찬히 살펴봤다. 사내는 굉장히 신중한 자세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고심하던 사내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몇 마디 흘러 나왔다. 긴 노랫가락이 아니라 단호하게 말하는 듯이 몇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였다. 이윽고 쇠문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아주 잠시 동안 사내와 노 서기의 머릿결이 나부꼈다. 그제야 사내가 눈짓을 하자 노 서기가 열쇠를 꽂아 넣는다. ‘그그그긍’ 하고 쇠문이 열린다. 열린 쇠문의 측면이 드러났는데 퍽 두터운 두께였다.
  서각은 방대한 규모였다.
  램프를 들어 올리자 문서들이 빼곡히 꽂힌 서가는 천장에 닿을 법했다. 사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세어 나온다. 선반에는 더 이상 종이 한 장 비집고 쑤셔 넣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서가선반을 비죽이 튀어나온 문서들은 두서없는 무질서의 지저분함 보다는 숨 쉴 틈도 없는 빽빽함으로 오히려 깔끔한 정돈의 인상을 풍겼다. 사내가 서가로 다가가 문서들을 살피고 있을 때 늙은 서기는 다른 램프에 막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투구꽃에 관한 허가승인서를 찾고 싶소.>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불빛에 드러난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은 유구한 역사와 세월의 증거가 되었다. 더불어 오래된 종이 내음만큼이나 기둥 같은 위용의 수많은 서가에게서 서재 특유의 원목 향이 숨 막힐 듯 뿜어 나왔다.
  노 서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요 근래에는 그 약물에 대한 허가가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 몇 개의 서류를 무작위로 훑어보던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반드시 있소!> <나으리. 여긴 저와 백작각하만 드나 들 수 있습니다요. 맹세코 투구꽃 허가서는 없을 겝니다.> 늙은 서기는 난처한 듯 반론을 제기했지만 사내는 꼿꼿한 눈빛으로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노 서기가 사내의 거듭된 고집에 수긍하고 말았다.
  <하지만 찾기가 수월치는 않을 겝니다. 원체 그 양이 방대한데다 최근 몇 달동안의 서류들은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고 있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루에 처리하는 업무가 워낙에 많아 일일이 봉투를 들추어 년 월 날짜, 약물이름 등을 순서에 맡게 일일이 꽂아 놓을 수 없습니다요. 월별로 정리하기에 한두 달 이전의 것은 마구 섞여 있어서 다음 달이나 되어야 정리하고 있습지요.> 어차피 열람할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고 그럴 일도 거의 없다보니 생겨난 관리자의 얄팍한 관행이라고 늙은 서기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방대한 서가가 난장판이라 늙은 서기는 애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없소.> 사내가 다급하게 말하더니 램프를 이리저리 비추며 또 다른 종이 뭉치들을 뒤적였다. 각 장마다 저 마다의 사연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내와 노 서기가 분주히 램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의 깊게 살핀다. 두 개의 불빛에 서가의 그림자들이 너울거리며 번잡한 춤을 추고 있었다.
  서류를 쉴 사이 없이 훑어 내리며 분주히 움직이던 노 서기의 손길이 멈칫했다. 지나친 몇 장을 거꾸로 들추어내자 노 서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누가 이런 짓을! 어떻게 이게 여기에 …….> 늙은 서기는 사내를 부르려 했지만 채 이어지지 못했다. ‘퍽’ 하며 창문이 깨져나가고 늙은 서기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두 개의 유일한 불빛 중 하나가 급격히 사그라졌다.
  뒤적이던 사내가 서둘러 달려와 늙은 서기를 안아 일으켰다. 사내가 부축하려다 비로소 서기의 몸에 난 상처를 발견한 듯 램프를 가까이 들이댔다. 뭔가가 관통했는지 사내가 서둘러 구멍 난 가슴을 막아보지만 손바닥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우즈즉-
  사내가 발에 밟힌 유리 조각을 힐긋 보고는 창밖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창문너머 높이 자란 정원수의 가지가 어둠 속에서 추적이고 있었다. 곧이어 그곳에서 뭔가 빠른 것이 하나 더 날아와 ‘피잉’ 사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머리카락 몇 개가 올올이 일어났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자 램프의 불빛에 가는 막대기 같은 것이 책장에 부르르 떨며 박히는 게 보인다.
  <크로스 보우!(Cross bow: 석궁)> 사내가 다급히 몸을 날렸지만 오른쪽 창문에서도 검은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곧이어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몸을 숙이자 바로 앞 책상에 ‘쩍’ 박히며 석궁화살의 자루가 바르르 떨리는 모습이 커다랗게 확대된 사내의 동공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모든 창문에서 핑핑 화살이 날아들었다. 사내가 서둘러 램프의 불을 꺼버린다.  램프가 꺼지며 어둠의 층위는 한층 더 깊어졌다. 사내가 간신히 고개를 들자 노서기로 보이는 검은 윤곽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노 서기의 상태가 염려 되는지 사내는 고함을 지르며 화살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갔다. 석궁의 위력은 좀 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파공성은 더욱 커져 있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서가와 가구들이 ‘짝’ 소리와 함께 패이며 허연 나무 속살이 드러났다. 동시에 조각난 나무 파편들이 비산하며 달리는 사내의 몸을 때렸다.
  사내는 가까스로 미끄러져 갔다. 늙은 서기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는 듯 했다. 말을 하려고 할 때면 거품 섞인 기침만 내뱉었다. 사내는 서기를 안아 올리고는 비교적 안전한, 서가의 깊숙한 구석으로 옮겨 갔다. 그리곤 다급히 커다란 탁자를 하나 골라 옆으로 세워놓고 서기의 몸과 자신을 막아 세운다. 곧이어 벽처럼 세워둔 탁자가 진동하며 저편에서 퍽퍽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으로 지지하던 사내의 오른쪽 어깨위로 제법 단단한 탁자를 뚫고 화살촉 몇 개가 쑤욱 비집고 들어온다. 그걸 본 사내의 눈가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내는 급히 몸을 돌려 양 손바닥을 활짝 편 다음, 탁자에 가져다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들썩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사내는 과한 힘을 소모하고 있는 양, 어깨가 삽시간에 땀으로 젖어갔다. 탁자에 가져다 댄 사내의 손바닥 역시 축축했다. 사내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더 이상 테이블을 관통하는 화살은 없었다. 퍽퍽 화살이 탁자에 박히던 소리와 진동 대신, 단단한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팅팅 되 튕겨 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제야 사내의 몸이 스륵 늘어지더니 헉헉 숨을 찬다. 램프를 잡으려 사내가 그세 몸을 움직이자 끙 하는 신음이 세어 나왔다. 램프를 켠 사내가 노 서기의 상처를 볼 양인지 상의를 풀어 헤치고는 불빛을 비추어 상태를 살폈다.
  늙은 서기는 의식이 없었다. 얼굴이 납빛같이 창백했다. 노 서기의 상처를 압박하는 사내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다. 사내가 피로한 때문인지 피는 멎지 않았다. 사내는 우선 옷자락을 부욱 찢어 노 서기의 가슴을 압박했다. 상체는 온통 피 칠갑이었다. 대충 지혈은 됐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듯 했다. 언제부턴가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상처를 동여매면서도 사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얼굴이었다.
  그때, 실내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어둠이 한 꺼풀 더 드리워지자 사내가 급히 고개를 돌린다. 옅은 달빛이 들어오던 창이 뭔가에 가려진 듯 시커멓게 변해 있다. 가만 보니 창밖은 단순히 새카만 게 아니었다. 검은 형체 같은 것이 일렁이는 듯 했다. 사내는 뭔가를 발견했는지 창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곧 그곳을 통해서 시커먼 형체가 쑤욱 몸을 들이밀었다. 시커먼 형체는 발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칼부터 빼들었다. 하얀 금속 광이 선뜩했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자르릉 자그마한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쳐 떠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의 두 개의 창문에서도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고 있다. 챠릉 울리는 쇳소리는 온통 촘촘하게 짜인 긴 사슬 셔츠(Hauberk)를 걸친 남자에게서 나왔는데, 각 부위가 서로 마찰하면서 생긴 소음이었다.
  그보다 조금 늦게 들어선 남자는 사슬 셔츠위에 육중한 흉갑(Breast Plate)을 상체에 걸치고 있었다. 모두 석궁(Cross Bow)과 화살 통을 등에 걸친 채 가슴에는 둥근 원반 모양의 철판을 단단하게 동여 멘 모습이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남자가 사내에게로 다가오자 잘 무두질된 가죽갑옷(Leather Armor)이 옅은 불빛에 드러난다.
  셋 다 사슬로 짠 투구(Coif)와 복면을 뒤집어 쓴 채 번뜩이는 두 눈만을 드러냈다. 남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오자 사내의 허리에 맨 칼이 시이잉 뽑혀 나왔다.
  가죽 갑옷만을 단촐 하게 걸친 남자가 실내를 채우고 있는 서가와 탁자 등을 스윽 훑어보더니 다른 남자들에게 고갯짓을 준다. 아마도 좁은 공간과 장애물이 기동성에 크게 방해된다는 생각인 듯 했다. 두 남자는 즉시 가슴에서 작은 원형 방패(Round Shield)를 떼어 든다.
  그리곤 서로 눈짓으로 위치를 재조정하며 흉갑을 입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포위 대형을 형성했다. 반질반질한 표면의 원형 방패가 광택을 뿜어냈다. 사내의 오른쪽에서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가 한발 한발 다가서고 반대편과 앞쪽에서는 두 남자가 차츰 거리를 좁혀왔다.
  사내는 자세를 낮춘 채 눈동자를 굴리며 다가오는 남자들을 빈틈없이 관찰하는 중이다. 가드(Guard) 자세를 취한 사내가 두 다리를 굳건히 했다. 사내가 노 서기가 쓰러져 있는 뒤쪽을 힐긋거리고 주변의 서가를 둘러보고는 곧 주위 공간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슬그머니,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남자들이 한발자국씩 접근할 때마다 뒤쪽 램프에 비친 사내의 그림자에 서서히 가까워진다. 램프가 만든 사내의 짧은 그림자가 남자들에게 닿을 무렵, 사내는 네모난 탁자를 걷어차 버렸다.
  그걸 신호로 까만 그림자 셋이 동시에 환한 조명 안에서 흐려지더니 순식간에 사내의 그림자를 깔아뭉갰다. 화살이 빼곡히 꽂힌 탁자가 주우욱 흉갑을 걸친 남자 쪽으로, 사내의 좌측으로 밀려가자 그는 테이블을 훌쩍 뛰어넘어보였다. 미끄러지던 탁자는 저편의 또 다른 테이블과 의자에 부딪혀 요란한 소음을 토해냈다.
  셋 다 사내에게 몸을 날렸는데, 가죽갑옷을 걸친 남자의 칼이 조금 더 빠른 듯 보였다. 사내는 우측에서 내려찍어 오는 가죽갑옷 남자의 칼을 슬쩍 흘리면서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테이블을 뛰어넘은 흉갑을 입은 남자가 달려들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사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사내의 정면에서 찌르기를 시도한 것을 사내가 간신히 몸을 뒤틀어 피해내자, 그 짧은 사이에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의 칼이 대각선으로 내리 그어지고 있었다.
  파칭! 불꽃을 튀기며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긴 했지만, 그 충격으로 사내는 뒤로 몇 걸음을 비치적거려야 했다. 비틀거리는 사내를 향해, 사내가 얄밉게도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허공을 가른 검을 회수한 흉갑을 입은 남자가 사내의 하체를 노렸다.
  사내가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자 남자의 칼이 신발의 밑창을 잘라냈다. 사내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가 달려든다. 사내의 칼에서 새된 금속음이 비명을 토했다. 미처 여유가 없었는지 사내는 왼손으로 칼끝을 지지하며 힘겹게 막아냈는데 그 남자는 칼을 맞댄 상태로 사내를 힘껏 밀쳐 냈다. 사내는 거의 넘어질 정도로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중심을 잃은 사내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사슬셔츠를 입은 남자의 칼끝이 사내의 가슴을 향해 쭉 뻗어졌다.
  그 남자는 사내가 양쪽에서 다른 남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회피할 때면 그 틈을 비집고 날카롭고 강력한 공격을 감행했다. 막 넘어지려는 상황이라 찔러오는 칼끝에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가슴이 꼬치처럼 꿰어질 찰나 사내는 검의 가드로 칼끝을 간신히 흘려보냄과 동시에, 것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사내의 입에서 헛바람이 세어 나올 정도였다. 사내가 찔러오는 칼끝을 가까스로 흘리고 회피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칼은 재빠르게 회수됐다.  첫 번째 찌르기는 사내가 막을 걸 의식해서 계산된 얕은 공격이었는지, 사슬 셔츠를 입은 남자는 재차 이번에는 깊숙하고 빠르게 내찔렀다.
  사내는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지 않으려 뒷걸음질 치는 형국이었다. 사내가 오히려 그 탄력을 이용하는 듯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벌어지자 상대적으로 피할 여유가 많아진 사내는 남자의 칼을 스치듯 피해내며 깊숙이 찔러 들어온 남자의 머리로 발을 뻗었다. 사내의 발길질이 바람소리를 자아낸다. 눈을 크게 뜬 남자의 눈에 사내의 발이 보였다. 남자의 왼팔이 급히 위로 올라온다. 왼손의 방패로 발길질을 막아낸 남자가 주춤 할 때 그 충격으로 뒤로 밀려난 사내의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거세게 몰아붙이던 남자들은 사내가 등을 붙인 벽을 응시하더니, 더 다가오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신중하게 위치를 고수했다. 사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반면, 남자들은 안정적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남자들의 칼과 방패는 하나같이 조명에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사내의 칼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칼끝을 스치듯 피했던 사내의 옷자락이 베어져 붉은 생채기가 드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지친 사내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그때 노 서기가 컥컥 피를 뿜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미 적지 않은 피를 흘려서인지 입술이 새파랬다. 사내는 노 서기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남자들을 의식하는지 주저하는 듯 했다. 노 서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확인한 사내가 남자들에게 꼿꼿한 시선을 던졌다. 사나운 눈길이다. 이내 사내는 뭔가를 결심한 듯, 오른쪽 허리춤에 맨 또 다른 칼을 빼어 들었다. 동료의 유품이라는 그 칼의 가드에는 해바라기 문양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노린 건지 사내는 벽을 등지고도 당황한 기색 없이 힘겹게 자세를 다잡는다. 사내가 벽에 닿아 더 갈 곳이 없어진 순간부터 남자들의 그림자들이 많이 접근해 있었다. 램프는 어느새 남자들의 뒤쪽에 있었다. 이번에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사내에게 닿을 법 했다. 남자들의 그림자가 사내와 겹치는 순간,
  와락, 동시에 남자들이 달려든다.
  노오란 불빛 안에서 까만 그림자들이 넘실거린다. 사내는 노 서기의 안전과 자신이 찾던 서류봉투가 혹여 소실될까 그를 옆으로 던져버린 후 칼을 휘둘렀다. 사슬셔츠의 남자는 다가오는 사내의 검을 방패로 되 튕겨낸다. 되려 퉁겨 나오는 그 반동을 이용해서 검을 회수한 사내는 옆에서 날아오는 가죽갑옷남자의 섬뜩한 칼과 맞부딪쳤다. 서로의 칼이 부딪치자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흉갑을 입은 남자가 찔러온 칼끝을 사내는 몸을 틀어 간신히 회피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흉갑을 입은 남자는 사내의 균형을 잃게 하려는지 방패를 거세게 밀어붙인다. 남자의 칼을 피하느라 몸을 뒤틀었던 사내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더니, 허리를 회전시키며 크게 휘둘렀다.  
  사내의 칼날은 남자의 작은 원형 방패를 부숴버린 것도 모자라 남자의 건틀릿(gauntlet: 중세갑옷의 금속장갑)을 얕게 파고들었다. 왼팔마저 가세한 사내의 검은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방패의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들은 비산하는 그 쇳조각에 놀란 듯 분주히 몸을 놀렸는데,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마저도 훌쩍 뒤로 물러섰다.
  모두 파편을 피하려고 움찔한 그 틈을 노린 듯 사내가 사슬셔츠의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옆에서 흉갑을 입은 남자가 걷어차자 사내의 검이 옆으로 흘렀다. 그 서슬에 스친 듯 사슬셔츠를 입은 남자가 주춤 뒤로 물러선다.
  쨔릉. 사내의 칼에 끊어진 듯 축 늘어진 몸통 사슬이 챨랑 거렸는데 안에 껴입은 가죽옷마저 살짝 찢어져 있다. 사슬이 끊어져 늘어진 갑옷자락을 보고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슥 해진다.
  겨우 중심을 잡은 사내에게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가 무릎으로 복부를 가격해오는 걸 사내가 칼 몸으로 막아냈다. 가격한 남자는 적지 않은 충격인 듯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고, 사내역시 상체가 휘청거리는 걸로 봐서 꽤 강력한 일격인 모양이다.
  그 틈을 타서 거리가 가까워진 걸 노린 듯, 사슬셔츠의 남자가 방패를 옆으로 뉘인 채로 사내의 노출된 머리를 자신 있게 내리 찍는다. 도저히 피해 낼 수 없다는 확신이 담긴 듯 어깨가 크게 돌아간 동작이었다. 남자는 자신감에 찬 듯 반짝이는 눈이다.
  사내는 그 동작을 무심한 듯 응시하더니 스윽 몸을 놀려 피해냈다. 그에 남자는 크게 당황한 듯 동공이 좁아지고 입이 벌어지며 헛바람을 삼켰다. 당황한 탓인지 동작이 커짐으로써 남자의 왼쪽 어깨가 깊숙이 안으로 들어왔고, 그 공격으로 오른손의 검은 상대적으로 뒤쪽에 쳐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슬셔츠를 입은 남자의 머리가 무방비로 노출됐다. 사내가 위에서 남자를 내려다보는 꼴이다. 힐긋 그 틈을 바라본 사내는 베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는지, 칼자루를 이용해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빡! 사슬투구가 찢겨나감과 동시에 남자의 머리가 깨져 나갔다. 선혈이 왈칵 튀었다. 사슬셔츠의 남자는 머리가 터져나감에도 관성에 의해 벽까지 달려 나가더니 풀썩 쓰러진다. 주위로 선혈과 뇌수가 뒤섞여 바닥을 흘렀다.
  으아아아!
  흉한 광경에 남은 두 명의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사내에게 달려든다. 흉갑을 입은 남자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더운 숨을 몰아쉬며 칼을 휘둘러 왔다. 사내가 고개를 틀어 간단히 피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깨진 방패의 부재로 인해 비무장인 왼팔을 사내의 안면을 향해 휘두른다.
  건틀릿의 섬뜩한 톱니가 사내의 안면을 찢어발길 찰나, 사내가 왼손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 제동을 걸었다. 반격으로 사내는 남자의 상대적으로 비어있는 다리를 찌른다. 흉갑을 입은 남자는 검으로 가까스로 흘려보냈지만 바지 자락이 스윽 베어지더니 사내의 칼에 붉은 선혈이 묻어 나온다. 남자의 굵은 땀방울이 또르르 볼을 타고 굴러 내려와 턱 끝에 맺혔다.
  그 순간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의 칼끝이 사내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내는 완전히 회피하기보다는 살짝 몸을 틀면서 마주 찔러나간다. 사내는 옆구리를 틀어 가까스로 피해냈고, 남자도 몸을 돌려봤지만 가죽갑옷이 사내의 칼에 스윽 베인다. 그 바람에 가죽갑옷의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가죽갑옷의 남자는 가까워진 사내를 밀어내려는지 가슴팍을 향해 발을 쭉 뻗었다. 사내도 마주 발을 놀려 남자의 가슴을 걷어찬다. 두 접촉면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력이 일었다. 사내는 상체만 약간 기울어졌으나, 남자는 뒤로 비치적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앞서 흉갑을 입은 남자가 다소 거칠게 사내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는 정도였다면, 사슬갑옷을 짜 입은 남자는 가까스로 사내의 칼을 흘려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죽옷만을 덜렁 걸친 남자는 갑옷이나 보조무장을 장착하지 않고서도, 사내의 날카로운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낼 뿐만 아니라 손발을 놀려 그럴듯한 반격마저 해내는 정도였다.
  사슬셔츠를 입은 남자가 머리가 터져 나뒹구는 걸 눈앞에서 목도한 그의 동료가 분노와 초조함에 붉게 달아올라 씩씩거리며 땀을 비 오듯 쏟아내는 반면, 가죽으로 몸을 감싼 남자는 사내의 동작 하나하나를 쫓으며 틈이라고는 거의 없는 허점을 노려 예리한 공격을 수행해 내고 있었다. 그런 그조차도 동료 한명을 잃고서도 여전히 사내를 어찌할 수 없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어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다 사내의 검과 맞부딪힌 남자들의 칼날은 이가 빠지고 충돌로 생긴 불꽃에 그슬려 흉한 모양새였다. 사람의 머리를 힐트로 바숴버린 사내의 칼은 보통이 아닌 듯 했다.
  사내의 몸이 기운 틈에 남자의 팔을 놓치자 흉갑을 입은 남자가 사내의 등 뒤에서 건틀릿을 재차 휘두른다. 그 남자는 사내가 이번에도 막아낼 걸 예상하는 듯, 후속타는 상대적으로 길고 치명적인 검으로 할 의도였는지 미묘한 시간차를 두고 칼을 날린다.
  사내가 건틀릿을 슬쩍 피하며 남자의 가슴으로 검을 내리 긋는다. 남자는 갈등하는 듯 주저하더니 하릴없이 사내의 어깨로 향하던 검을 황급히 돌려 맞받아친다. 탕! 서로의 검과 충돌하여 아주 잠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사내의 칼이 남자의 검날을 얕게 파고들어가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의 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균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남자의 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남자가 힘에 부치는지 왼팔마저 가세해 검을 받친다.
  순간 사내의 검이 그그긍 유연하게 미끄러지며 칼끝이 남자의 가슴을 향하더니 갑옷마저 뚫고 들어가 그의 등 뒤에서 삐죽 튀어나온다. 강철로 된 흉갑마저 사내의 칼 앞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제야 가죽갑옷의 남자가 겨우 중심을 잡고 크게 소리 지르며 달려든다. 사내가 칼을 회수하려 황급히 팔을 당긴다. 검에 딸려 나온 남자의 시신이 앞으로 풀썩 쓰러진다. 혼자 남게 된 가죽갑옷을 입은 남자가 괴성을 질러대며 다가오는 통에 램프가 바닥을 굴렀다.
  불이 꺼지자 컴컴한 어둠이 사내와 남자의 모습을 삼켜버렸다. 어둠속에서 언뜻 언뜻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뒤이어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리기도 했다. 잠시 후 육중한 뭔가가 털썩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찧는 마찰음이 흘러 나왔다.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지 인기척이 들리다 돌연 뚝 끊어졌다. 저만치 조그만 불꽃이 일었다. 곧 실내가 환해진다. 불빛너머로 쓰러져 있는 가죽갑옷의 남자가 드러났다. 램프를 든 사내는 다소 지친 기색으로 걸어오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숨을 헐떡인다.  
  하지만 사내의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커다란 쇠문 너머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창밖도 소란스러웠다. 사내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통로 저 끝에 서 깨어난 병사들과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가 급히 문을 닫으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철문은 무게만도 굉장한 듯 했다. 사내가 있는 힘을 다하는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내가 용을 쓰자 커다란 쇠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문을 닫은 사내는 잠글 수단을 찾아 헤매다가 멈칫했다. 쇠문은 밖에서 잠그는 구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사내는 백작의 열쇠를 찾는 걸 뒤로 하고 서가를 끌어다 문을 떠받쳤다. 저편에서 병사들이 격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겹의 책장이 쌓였지만 잠기지 못한 문은 아주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버텨 낼 수 있으리라.          
  사내는 서둘러 램프를 찾아 들고 노 서기에게 다가갔다. 서기는 안색이 파리한 채 늘어져 있었다. 피투성이 손에는 꾸깃 죄어진 서류 봉투가 있다. 사내는 서류를 확인하려다가 서기의 손을 잡고는 눈을 부릅뜬다. 사내는 손목을 만져보기도 하고 서기의 코와 목에 손을 대 보기도 했다.
  사내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고개를 숙이던 사내가 노 서기의 손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더 이상 가슴이 부풀지 않는 서기의 오그라든 손가락이 문서를 꽉 쥐고 있었다. 사내가 노 서기의 굳어있는 손가락을 우악스럽게 펴내고 서류를 빼냈다.
  사내가 허가서를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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