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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LAST SCENE <상>

2010.03.09 19:4503.09

태희

해가 지고 있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위의 사물들이 시시각각 제 색깔을 잃어가고 있었다. 간간히 거세게 바람이 불어, 전봇대 사이에 매어놓은 플랜카드가 요란하게 펄럭여댔다.
개. 천. 도
어딘가의 개업을 알리는 광고일까. 한쪽 줄이 끊어져 위로 말려 올라가는 바람에,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글자 되지 않았다. 울긋불긋, 화려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얼핏봐도 조잡하기 그지없는 현수막이다. 조잡하게 들어서 있는 주변의 건물들에 어울리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태희는 그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아 어둠과 정적이 그럴 듯하게 짝을 지어 내려 앉기 시작했다. 포근하다. 무채색의 바다에 안긴듯한 이 안도감.
저 소리. 저 펄럭이는 소리만 아니라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을텐데.
비스듬히 손을 뻗어 좌석 등받이를 조금 낮춘다. 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어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슬램화된 이 주택가에 몇시간씩 세워놔도 눈에 뛰지 않을 차는 이 고물 외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어제 그가 방문한 중고차 가게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차는 없어보였다.
2028년식 트리아노. 석유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본격적인 전기자동차 붐이 일었을당시 가장 많이 팔린 소형모델의 하나로, 창에는 스티커를 떼어낸 자국이 덕지덕지 남아있고, 뒤 쪽의 범퍼는 떨어져 나가고 없다. 군청색 차체는 여기저기 긁히고 패여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들어내 놓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쌓여있는 많은 차들중에 이걸 골랐을때, 중고차판매원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몸을 조금 눕히고, 고개를 들어 '타겟'의 집으로 시선을 옮긴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2층짜리 맨션. 태희의 시선이 머문 곳은 2층의 가장 오른쪽 집이다. 개방형 복도 너머로 조금 크다 싶은 창문이 나있다. 4시간 째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어두워졌는데도 불을 켜지 않는다. 오늘 아침, 가정용 수소코어 검침원을 사칭해 옆집을 방문해서 구조를 살펴두었다. 이런 낡은 맨션의 구조가 집집마다 다를 리는 없을 터. 커튼이 쳐져있어 확인할 순 없지만, 창 너머는 분명히 부엌겸 거실이다. 녀석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방에서 뭘 하는 걸까.  
당장에라도 작업을 시작하고 싶지만, 마음을 가라 앉히자고 태희는 자신을 추슬렀다. 시간은 충분하다. 오늘은 그냥 지켜만 봐야한다. 넘겨받은 자료로 봐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웃들과 왕래가 있을 수도 있다. 도중에 누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른 주민들의 귀가시간을 체크해 두지 않으면 빠져나올 때 귀찮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그'를 불러내 볼까...
작게 기지개를 켜면서 태희는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펄럭이는 플랜카드,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 순식간에 이미지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이다. 동네 독서실 앞에 개원을 알리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영어학원이었던가, 독서실 3층에 학원이 생겼다. 독서실의 아이들 대부분이 그곳에도 다니게 되었는데, 5학년인데도 중학생처럼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 형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학원 이름이 새겨진 파란 가방을 걸쳐 메고 자신을 괴롭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참다 못한 태희가 주먹을 한대 날리고 도망치자 집에서 기르던 도베르만을 데려와 '물어!' 하고 낄낄대던 그 누런 이빨. 스펀지 케익 자르듯 간단히 허벅지를 뚫고 들어오던 그 거대한 이빨의 날카로움도 기억난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사귀던 여자애도 강아지를 길렀었다. 아마도 메리라는 이름이었을 거다. 레몬 향기가 나던 그 애의 방, 정신없이 그 애의 몸을 탐하고 있을 때 나를 향해 미친듯이 짖어대던 그 강아지 새끼.
거미가 자기집을 넓혀가듯, 기억이 차츰 가지를 뻗어간다. 10대에서 20대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그러다 다시 어린시절로, 군대시절로......  
그러는 와중에도 태희의 시선은 창문에 고정되어 있다. 오직 눈만이 그의 육체와 유리되어 다른 생물이 된 느낌이다. 민감한 폭발물 스위치처럼, 태희가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도록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상태다. 눈 속에서 또 하나의 누군가가 생겨나, 자신은 과거속을 헤매고 그 사람은 눈동자와, 시신경과, 그것들을 관장하는 뇌세포들을 컨트롤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를 봐, 나를 봐, 엄마를 보란 말이야."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엄마는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소리를 지른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일수록 체벌의 강도는 심해졌다. 손바닥이 주먹이 되고, 주먹이 발길질이 되고, 그래도 분이 안풀리면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태희는 결국 엄마를 쳐다볼 수 밖에 없다. 엄마는 몹시 화가 나있다. 당장에라도 손에 들고 있는 다리미를 던질 것만 같다. 한편으론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깨어있는 얼굴. 붉그스레 상기된 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눈치 채지 못할 그 미묘한 희열.
하지만 무엇보다 태희를 무섭게 하는 건 눈이다. 엄마의 눈은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 걸까. 두렵다. 두렵다.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몸이 떨려오고, 그럼에도 그 눈을 봐라봐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태희가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 부터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다. 자신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생명체다.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시간이 되면 그 사람이 알려준다. 다 끝났어. 이제 현실로 돌아와도 돼.
그가 자신을 대신해 '현실'을 들여다 봐줄동안 태희는 과거로 간다. 분열하는 세포처럼, 연상되는 기억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대의 도미노 ──.
처음엔 두려울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자 그를 불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도, 할 일이 없어 무료할 때도, 조바심이 나서 자신을 억제할 필요가 있을 때도 그는 언제나 나타나 준다. 그 작은 사람은 눈 속에서 살고 있다. 귀찮게 말을 걸지도 않고,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는, 태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자신의 편이다.
가로등이 켜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창문이 밝아졌다. 작은 사람이 태희를 현실로 돌려놓는다.
어깨를 펴고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쉰다. 걷히지 않은 커튼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느릿느릿 옮겨 다니던 그 시커먼 형상은 이내 다시 사라져 버렸다.
시계를 보니 7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아직 맨션에는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더 많다. 태희는 모든 창문이 환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조바심을 내면 안된다. 그러다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까. 태희가 그렇게 몇 번인가 되뇌이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그림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한 손으로 안경을 만지작 대며, 다른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더니 천천히 태희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특징없는 노인이다. 머리가 조금 더 길뿐,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동선을 따라 가로등이 이어져 있다. 50미터 정도 걸어 가더니 전봇대 아래에 손에 든 물건을 휙 던져놓고 돌아선다. 하늘색 츄리닝 바지가 나트륨등 불빛때문에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다.
태희는 멀찍이서부터 그의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고물 트리아노에도 선팅빔은 설치되어 있다. 버튼을 누르자 차창이 검게 변하고, 뚫어져라 쳐다봐도 들킬 일은 없다. 가로등의 간격에 따라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검은 사람. 노란 사람. 검은 사람. 노란 사람.
그 짧은 시간에 수도 없이 얼굴을 바꾼다.
노인이 다시 문을 닫고 그림자로 돌아갔을 때, 태희의 마음속에서 조바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도베르만의 얼굴이 떠오른다. 새벽2시, 태희가 살금살금 담을넘어 정원에 메어져있던 놈의 목덜미에 부엌칼을 찔러 넣었을때,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에 송곳니를 들이밀던 녀석의 표정이. 이어서 메리의 얼굴도.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파르르 떨면서 죽어가던 그 작은 생물의 얼굴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태희는 상상했다. 저 오렌지색 그림자가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를. 유선형의 칼날이 그 형태를 고스란히 남기고 나온 폐에서 푸쉬쉭,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날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를.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실어나르듯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늦가을. 미쳐 수거하지 못한 낙엽들이 길가에 휘날리고, 말려 올라간 플랜카드가 스르르 내려왔다.
천국! 혼자 갈순 없잖아요
낙원교회 개축기념 특별 전도주간

태희는 입가를 찡그리고 잠시 웃어보였다. 여전히 눈앞에는 무채색의 바다가 펼쳐져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잠겨들어 간다. 태희의 다리도, 허리도, 심장 위에 차고 있는 칼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손도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익현

아침 일찍 일어나 그림을 그린다. 배가 고프면 인스턴트 식품을 적당히 데워 먹는다. 식품은 인터넷을 통해서 보름치 정도를 한번에 주문한다. 담배와 와인의 구입도 온라인으로 해결한다. 불법이긴 하지만 대행서비스 업체에 웃돈을 얻어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거실 바닥은 그가 그린 그림들로 가득하다. 점심 때가 되면 잠시 창문을 열어놓는다. 유화물감 냄새를 창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다. 커텐 뒤의 세상은 여전히 밝고,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익현은 아찔해진다. 기름냄새가 창밖으로 옮겨가고 새로운 공기가 그 공간을 차지한다. 잠시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본다. 그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냄새, 다른 질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익현의 그림들은 밝은 곳에 있으면 기괴해진다. 무서워진다.
익현은 얼른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쳤다. 돌아보니 누군가의 얼굴이 있다. 거실에 걸린 대형 거울에 낯선 얼굴이 비친다. 노인의 얼굴이다. 굵은 주름이 이마와 볼의 가운데를 관통하고 잔주름과 검붉은 피부들이 그 사이사이에 작은 섬들처럼 자리잡고 있다. 십년을 넘게 써온 안경만이 눈에 익을뿐, 도저히 자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다. 거무튀튀한 피부와 대비되어 머리카락의 하얀색이 도드라져 보인다.
시간이 모자랄 지도 모르겠다 ㅡ .
익현의 마음 속에 조바심이 싹 튼다. 전자렌지로 데운 인스턴트 스파게티를 후다닥 먹어치우고 방으로 들어간다. 거울 속의 인물도 거울을 빠져나와 방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방의 벽지는 원래 하얀색이었다. 이제는 누렇게 떠서 황갈색에 가깝다. 제대로 된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다. 왼쪽 구석에 싸구려 매트리스가 놓여있고 그 옆에 노트북이 올려져있는 작은 수납함이 있을뿐이다. 커버를 씌우지 않은 매트리스는 심하게 변색되어 깎아놓고 방치해둔 사과같은 색을 띠고 있다.
방에는 창문이 없다. 형광등이 달려있지만 스위치를 올려도 조도는 크게 올라가지 않는다. 먼지가 잔뜩 쌓인 형광등은 제 수명을 거의 다 한듯 보인다. 대여섯평 정도나 될까. 방안은 온통 물감 비린내와 니코틴냄새와 선굵은 어둠으로 포화된 상태다.
익현은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았다. 바람 든 사과처럼 푸석한 쿠션이 잠시 출렁인다. 담배를 피워물고 노트북 옆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거대한 수족관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진이다. 구부정하게 서서 묘하게 생긴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살짝 웃음을 띤듯, 어찌보면 화가난듯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익현은 한참을 바라보다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맞은편 벽에 거의 기대다 싶이해서 이젤이 서 있다. 멀리서 보면 허수아비처럼 보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 익현은 그 허수아비에 얼굴을 그려넣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거실과 방안을 가득 채운 그림들에는 여지없이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모두 24점으로, 하나같이 여자들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캔버스 위에는 사진에서 본 젊은 남자의 얼굴이 있다. 사진과는 다르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캔버스가 가득 찰 만큼 클로즈업 되어있다.
파레트에 물감을 짜고 커다란 물통 속을 휘휘저어 말라버린 붓을 헹군다. 물통 옆에 놓인 와인병을 입으로 가져가 홀짝이다  더 이상 술을 입에 대면 안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맨정신으로 그림을 완성시켜야 한다. 와인도, 그림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익현은 잠시 한숨을 쉬고 다시 색칠을 시작한다. 남자의 얼굴 위로 무채색 물감들이 한붓한붓 옮겨가기 시작했다.

태희

날이 밝았다. 태희는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분명히 누군가를 보았던 것 같은데, 꿈속에서 본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기어나와 창문을 연다. 허파속을 헤집고 나온 연기가 허파주름 마냥 묘한 무늬를 그리다가 창밖으로 사라지고, 자기 전에 마신 맥주냄새가 목을 타고 코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태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다. 바닥에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바닥에 붙인다. 아침공기로 차가워진 타일 바닥이 적당한 긴장감을 온 몸에 전해준다. 수축된 어깨를 충분히 이완시키고나면 팔 근육들을 긴장시킬 차례다. 종아리 근육을 천천히 당겨준 후 발목을 굴려서 아킬레스건을 푼다. 그리고는 3Km쯤 되는 정해진 코스를 달리고 돌아온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절대로 빼먹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평소에는 손대지 않는 맥주와 담배도 그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TV를 틀었다. 어느새 오전 9시. 지난 방송 보기에서 뉴스를 선택한다. 바(Bar)를 내려 기사요약 항목 중에 하나를 고르고 오케이 버튼을 누른다. 단발머리 여자앵커가 담담한 표정으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목사가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어제 서울시 삼청동 낙원교회에서 윤모목사가 예배를 마친시간은 저녁 9시 10분. 교회 앞에서 신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직접 운전을 해 자신의 집까지 간 윤목사는 정원 옆에 있는 개인 주차장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주차장 문을 여는 소리가 나고도 한참을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하던 부인이 뒤늦게 발견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습니다. 윤목사의 시신에는 목과 가슴을 비롯해 전부 열두군데의 자상이 발견되었으며, 경찰은 원한에 의한 범행으로 보고있으나 아직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평소 활발한 봉사활동과 굳은 신앙심으로 많은 이들의…… "
태희는 담배를 맥주캔에 비벼끔과 동시에 TV를 껐다. 허기가 느껴진다. 냉장고에서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고 현관의 투입구에서 우유를 꺼내온다. 빵이 완성되자 접시에 받쳐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를 확인한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을 모조리 검색해 보았으나 짤막한 단신으로 보도된 곳이 한 군데 있었을뿐, TV와 특별히 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행이다. 증거는 남기지 않았다. 정원에 족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신발은 더 이상 내 물건이 아니다. 피가 뭍은 상의와 함께 한강 밑에 가라앉아 버렸을 것이다.
적잖이 안도를 하면서도 태희는 자신을 책망했다. 무모한 짓이었다. 사전 준비도 없이 기분에 휩쓸려 저질러 버리다니.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놈은 죽어도 싼 놈이다. 제일 뒷자리에 서서 설교를 듣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멘과, 할렐루야와, 번쩍번쩍 치켜올리는 수많은 손들이 파도를 이루어 자신을 덥치려고 했지만 꾹 참고 있었다. 온종일 자신을 괴롭히던 플랜카드 소리가 플래시백되어 해일처럼 귓속에 들이닥쳤지만 그냥 돌아 나오려고 하던 참이었다.
" 주 예수를 보십시오. 고개를 들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의 말씀을 전하는 저의 눈을 보십시오."
보십시오. 보십시오. 저의 눈을 보십시오. 이런 찢어죽일 개새끼가.  
담배갑을 열고 갯수를 헤아려 본다. 열두 개피가 남아있다. 서랍안에 담배를 넣으면서 태희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피부를 가르며 전진하는 칼날. 그 끝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지던 내장의 떨림. 고통에 떨면서 물러서던 구두굽 소리. 잘려진 성대를 움켜지고 소리대신 공기를 뱉어내던 입술. 피가 점점 빠르게 돌고, 미세한 혈관들이 팽창하기 시작하고, 이윽고 온몸을 뜨겁게 관통하던 고통과 쾌감.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과, 과도한 아드레날린이 만들어낸 흥분이 교차편집되어 단편적인 장면들로 머리속이 뒤죽박죽되어 간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 배불뚝이 목사놈이 간 곳은 천국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제 막 천국에 가려하는 인간이 절대로 그런 얼굴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좀있으면 다시 그 느낌을 맛볼 수 있다. 그 노인네의 죽어가는 얼굴을 볼 수가 있다. 좀있으면 다시 맥주를 마실 수 있고, 서랍 안의 담배는 그 숫자가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


태희의 엄마는 자살을 했다. 태희가 13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엄마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태희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문을 열어보니 흥건한 피웅덩이 속에 엄마가 누워 있었다.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또다시 최고기온을 갈아치웠다는 여름이었다. 극에 달한 온난화때문에 기업들에 막대한 징벌적 세금을 물리는 법안의 통과를 앞두고 온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시끄럽던 주말이었다. 40도에 가까운 폭염 속을 뛰어온 터라 태희의 온몸은 땀으로 가득했다. 손에 들고 있는 성적표에도 온통 땀이 번져 있었다. 전교석차를 표시하는 부분에 1/326 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그래서 뛰어 왔는데. 운이 좋다면 엄마가 웃어줄지도 모르는데.
태희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찜통같은 방에서 땀한방울 흘리지 않고 편안하게 누워있던 엄마의 얼굴. 피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가가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아직 말랑말랑하다. 피만 없었더라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편안해 보이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엄마의 심장에는 부엌칼이 절반가량 들어가 있었는데, 손잡이를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있는 힘껏 양손으로 움켜 쥐고 있다. 속시원한 마음과 울고싶은 마음이 번갈아 가며 태희의 심장을 찌른다. 태희는 작은 사람을 불러 내기로 했다. 이웃집 여자가 화석처럼 굳어있던 그들 모자를 발견하고 까마귀같은 비명을 질러댄것은 그로부터 74시간이 지난후의 일이었다.
태희가 민정을 귀찮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상체를 일으켜 잠들어 있는 민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지긋이 닫힌 입술, 노랑제비 줄기 처럼 내려앉은 코, 눈밑으로 주름이 접혀 그늘을 만드는 볼. 민정의 얼굴은 엄마를 닮아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고 있는 표정이, 태희가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모든 살의가 사라져 버린다. 이미 죽어있는 고깃덩어리에 칼을 들이밀어봤자 아무런 쾌감도 얻을 수 없다. 민정은 태희가 순수한 성욕만으로 안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다.
태희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의 겨울로 아직 민정이 17살이었을 때다.
"오빠, 심심하면 나랑 놀래요?  1시간에 10만위안"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 쪽이었다. 태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자 않자 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져 있는 벤치의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중년의 남자가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민정은 욕설과 함께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남자의 손이 민정의 뺨과 머리를 내려친다. 쓰러진 민정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더니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쌀쌀한 공원엔 비둘기들이 날아다닐 뿐이다. 태희는 천천히 걸어가서 지갑을 꺼내어 5만위안짜리 전자지폐 네장을 민정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오빠, 나 잠좀 자고가도 되죠?"
태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녀는 바로 잠이 들었다.
상처입은 짐승마냥 질러대던 신음소리가, 가슴에 생긴 커다란 멍 때문인지 거친 섹스 때문인지 태희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잠든 얼굴을 작은 사람을 불러내지 않고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후로도 민정은 종종 찾아왔다. 돈이 떨어진 건지, 태희가 올 때까지 등을 동그렇게 말고 집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이 서너 번 되풀이 되자 민정은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입이 거친 여자였다. 자신을 아홉살때부터 겁탈한 아버지란 새끼가 얼마나 나쁜 개새끼인지, 반평균 깍아먹는 버러지라고 대놓고 말하던 대머리 담임선생이 얼마나 나쁜 십새끼인지, 돈도없고 공부도 못하는게 얼굴까지 못생겼다고 괴롭히던 같은 반 아이들이 얼마나 좆같은 놈년들인지, 중간에 적당히 끊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재재거리며 욕을 해댔다.
"그 개새끼가 자꾸 건드려도 내가 왜 그 나이까지 참고 있었는지 알아요?  치이, 또 자는 척 하시네, 듣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누구한테도 말 안했던 건데 오빠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까봐."
민정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모금 토해낸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집에 어항이 있었는데, 금붕어를 두마리 키웠어요. 빨간놈하고 까만놈.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엄마가 사준 거였지. 학교를 마치면 싫어도 억지로 집에 가야했어요. 그 새끼가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까지 산소펌프를 틀어줘야 했으니까. 왜 그거 있잖아요, 동그란 물방울이 퐁퐁퐁, 하고 올라오는 거.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별 지랄을 다하면서 코드를 뽑아놨지. 씨발, 지 입에 들어가는 술은 아까워서 어떻게 샀나 몰라."
태희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재떨이를 건네준다.
"하루는 우리반 반장새끼가 어쩐 일로 술자리에 나를 끼워 주겠다는거야. 그것도 선심 팍팍 쓰는척 하면서. 가기 싫어도 왕따가 별 수 있나? 억지로 따라 나섰더니 여자는 나뿐이고 돼지같이 생긴 것들만 일곱 놈이 있는 거에요. 자꾸 나한테 술을 권하는게 이러다 꼼짝없이 당하겠다 싶어서 화장실 가는 척하고 죽어라 도망쳤어요. 눈치밥이 몇 년인데. 남자 새끼들 발정난 냄새는 그 때부터 훤했는 걸 뭐. 버스타고 집에 오니까 꼰대 새끼는 벌써 엉망으로 취해있더라고요. 들어가자 마자 머리채를 잡아채더니 방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올라타대요. 술기운을 빌어서 냅다 밀어내고 그 새끼 지갑을 낚아채고 내 방으로 도망가서 문을 걸어 잠궜어요. 다행히 지갑에 키홀더가 들어 있대. 그 새낀 항상 내 방 열쇠를 가지고 다녔으니까."
민정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한 시간 정도 지났나. 방문을 두드리는게 멈춰서 잠들었나 싶었는데 씨발,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는 거에요. 물 넘치는 소리도 나고, 막 욕하는 소리도 들려오고, 무서워서 이불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는데, 다음날 오후에 조심조심 나와보니까 어항이 깨져 있지뭐야. 금붕어는 두마리다 삐쩍말라 죽어있고...... 그 길로 집 나와서 이 모양, 이 꼬라지로 살고 있다는 말씀. 킥킥,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참 지랄 좆같다 그치? 나도 늙으면 소설이나 써 볼까봐. 하긴 이런 궁상맞는 이야기는 팔리지도 않겠지만......"
다음날 나타난 민정의 손에는 작은 어항이 들려 있었다. 산소펌프도, 플라스틱 수초도, 비닐에 담겨있는 빨강,까망 금붕어 두마리도.
민정은 이전보다 훨씬 자주 태희를 찾아왔다. 방에 들어서면 금붕어 먹이부터 챙겼다. 어두운 방에서의 말없는 섹스가 끝이나면 TV 모니터 불빛을 이용해서 기포가 올라가는 모습이나 헤엄치는 금붕어들을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나갈 때는 금붕어 밥 챙기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년 후에 원인모를 이유로 금붕어들이 죽어버리자 민정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후로 몇 번인가 민정을 데리고 수족관에 갔다. 건물 한면을 가득 채운듯한 거대한 유리벽, 수상하게 생긴 갖가지 물고기들,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민정은 더 이상 금붕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수족관에 가자고도 하지 않는다. 그 뒤로 태희는 혼자 수족관에 간다. 몇 시간씩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가 돌아온다. 자신은 민정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ㅡ 라고 태희는 생각한다.
진동으로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오후 다섯 시. 태희는 민정이 깨지않게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멀찍히 떨어진 곳에 고물 트리아노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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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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