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라즈블리토(下)

2009.09.02 09:2709.02

 종준이와 이야기를 마친 후 동방으로 내려오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으니 이번에 새내기들이 많이 들어왔나보다. 창가에는 내가 충성을 다하는 그녀도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하지만 옛 기억을 되살린 후 그녀를 보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다.
 
우리가 들어오자 곧 동아리 회장이 일어나 말했다.
 
"자 모일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개강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잠깐만요~~옷!"
 
사람이 많아 답답해서 동방문을 열어놨는대 열려진 문사이로 복도를 메아리치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듯 빠른 발소리가 들리고 곧 익숙한 실루엣이 문 앞으로 튀어나왔다.
 
"헥..헥...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익숙한 실루엣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 한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정원이누나!"
 
옆에 있던 종준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순간 패닉상태로 빠져들었다.
분명 그녀는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갔다고 들었다. 그런대 지금 여긴 한국. 그녀가 여기 있으면 안되는거 아닌가? 아니 여기 있을 수가 없잖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상태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빈자리에 들어와 앉았고 개강총회는 시작되었다.
 
개강총회는 각자의 소개로 시작되었고 올해 우리 동아리의 목표를 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회장이 일어나 말했다.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모두 뒤풀이 자리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을로 이동해주세요"
 
마을은 우리학교사람들이 학교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술집골목을 부르는 애칭이다. 우리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삼삼오오 흩어져서 마을로 향했다. 나는 종준이와 이런 저런 애기를 하며 학관을 나와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정원이가 뛰어왔다.
 
"야! 송지형! 너 나한테 인사도 안하냐?"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귀여운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내 눈과 가슴이 편치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여전히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그랬나? 미안……."
 
난 어색하게 대답했고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내가 2년동안 보고싶지도 않았나보지? 난 얼마나 니가 보고 싶었는데!"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농담은... 그런대 언제 한국에 들어온거야?"
 
"아, 얼마전에. 헤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이번학기 복학을 위해 미리 한국에 들어온 듯 했다.
 
"아 그랬어...? 뭐 어찌됐건 빨리 가자, 애들 기다린다."
 
나는 괜스레 발걸음을 빨리 했고 정원이와 종준이도 서둘러 뒤따라 왔다. 그때 난 갑작스런 정원의 출연에 정신이 팔려 뒤쪽 새내기 무리 중 한명이 날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술자리에서도 새내기들은 얼굴을 잘 몰라 어색하다며 내 옆자리를 고집하는 정원이 때문에 무척 난처했다. 곧 술자리는 무르익어 대학가 술문화의 꽃인 게임으로 이어졌다. 스타트게임은 스피드한 진행이 매력인 눈치게임! 1부터 숫자를 부르며 마지막 숫자를 외치거나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같은 숫자를 외치면 걸리는 게임이다. 마지막 숫자는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숫자로 정한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난 특히 이 게임에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게임에 지는날엔 500cc맥주잔에 가득담긴 소맥을 한번에 원샷을 해야 한다. 어떤 정신나간 자식이 소맥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맥주잔 안에는 맥주가 거의 들어있지 않은 듯 맑은 색을 띄며 청아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잔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술이 소주란 소리다.
 
"하나!"
 
눈치 빠른 선배 한명이 먼저 선수를 친다.
 
"둘!"
 
대담한 새내기 한명이 소리를 질렀다.
이쯤에서 한번 외쳐…….
 
"셋!"
 
아 늦었다. 그렇다면
 
"넷!"
 
"넷!"
 
동시에 소리가 울렸다. 난 절망했다.
 
'아……. 이게임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 그나저나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누구지?'
 
난 이 게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나와 같은 운명을 하게 된 사람을 보려 얼굴을 돌렸다. 아뿔싸……. 그곳엔 낙담하고 있는 정원이가 있었다. 우린 서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그런 우리를 향해 새내기들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러브샷! 러브샷!"
 
이 녀석들 새내기 OT에서 제대로 배우고 왔나보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나 러브샷 처음하는거다……. 너! 영광인줄 알아!"
 
'내가... 처음?'
 
우리는 새내기들의 성화에 못이겨 러브샷을 했고 난 그녀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원샷을 했다. 원래 술이 약하지 않은 나조차 이 소맥은 넘기기가 힘들었다. 대충 잔을 비우고 그녀를 보니 그녀는 깨끗이 잔을 비우고 머리위로 잔을 세우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그리곤... 그대로 쓰러졌다…….
 
잊고 있었다. 그녀는 소주 한잔도 여러 번 끊어마실정도로 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난 갑자기 쓰러진 정원이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새내기들에게 말하며 그녀를 업었다.
 
"내가 동방에 데려가서 재울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계속 놀아."
 
난 그녀를 업고 술집을 나왔고 이때까지도 나를 쳐다보고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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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뭐 이렇게 무거워."
 
역시 키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술에 취해 몸을 축 늘어뜨려서 그런지 동방으로 오기까지 평소 같으면 10분이면 오는 거리를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난 그녀를 반듯하게 눕힌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술때문에 기절을 한건지 어떤 건진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듯 새근거렸다. 난 조용히 그녀 얼굴을 바라봤다.
 
지난 2년동안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2년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이번엔 꼭 잡고 싶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대 막상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자 망설여졌다. 얼마전에 나타난 한 사람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 때문에 2년동안 기다려온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누가 문을 열려는 듯 동아리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고 한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은 바로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아 미소야……."
 
내가 나온 뒤 뒤따라 나온 모양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물었다.
 
"죽을래?"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난 당황했다.
 
"뭐..뭐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둘이 무슨 사이야?"
 
그녀는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정원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재차 물었다.
 
"무슨사이긴 우린 1학년 때부터 엄청 친한 친구사이였어."
 
"짝!"
 
내 얼굴이 오른쪽으로 90도 돌아갔다. 뺨이 얼얼해지며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눈뜬 장님인줄 아냐? 뭐? 엄청 친한 친구사이? 지금 나랑 장난하냐?"
 
그녀는 새빨갛게 충열된 눈으로 소리쳤다.
그녀의 강력한 손바닥에 난 순간 생각이 멈췄고 이성을 잃은 입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장난? 내가 지금 장난하자고 너랑 얘기하는 걸로 들리냐? 지금 우리가 연인사이라도 되는 줄 아나본대 그래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연인사이라고 치자. 니가 뭔데 우리 사이에 참견인대? 너야말로 나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줄 아냐? 너랑 나랑 만난 지 고작 2주도 안됐어. 니가 날 알기나 해? 내기에서 져서 해달라는거 다해주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정말 내가 네 꼬봉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이 닫혔다.
그녀는 충격이 큰 듯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충열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큰 소리를 내며 울 것 같은 눈이었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굳게 닫은 그녀의 입술은 절대 눈물을 허용치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뒤돌아 나가버렸다.
 
난 그녀가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서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사방은 정원이가 숨 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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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방에서 자고있는 정원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큰 사건을 겪은 뒤라 그런지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지 오래다. 곧 새벽이 다가왔고 오늘은 웬일인지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또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뒤척이며 깨어났다.
 
"아우...머리야……."
 
"일어났어?"
 
"지형아 나 물좀줘"
 
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목이 많이 탔던 듯 그녀는 조그만 생수 한 병을 한 번에 비워냈다.
 
그녀의 모습에 미소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아... 죽겠네... 지형아 어제 어떻게 된거야?"
 
"기억 안나? 너 소맥 한잔마시고 완전히 뻗었어."
 
"정말? 아후... 왜 그랬지...근대 왜 넌 여기있는거야?"
 
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몰라서 묻냐? 니가 뻗으면 챙겨줄 사람이 나밖에 더있냐?"
 
"헤헤. 고마워. 그럼 그때부터 쭉 여기있었던거야?"
 
"응"
 
"에이... 만나자 마자 못볼꼴부터 보였네……."
 
"뭐 어때 우리사이에"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그녀도 금방 환히 웃었다.
 
"세수라도 하고와. 해장하러가자."
 
"응!"
 
밝게 대답한 그녀는 동방에 비치된 비누를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우리는 밖으로 나와 근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은 뒤 헤어졌다.
 
난 방으로 돌아와 바로 침대와 몸을 합체했다. 강의가 하나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머릿속은 온통 미소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하지만 밤을 샌 나는 피곤했던지 난 금방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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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정말 오랜만에 잘 잔 것 같다. 제일 머릿속이 복잡한 이때에 잠을 설치기보다 더 푹 잘 수 있는 내가 더 신기할 따름이다. 간단히 세면을 한 뒤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봤다. 문자한통이 와 있었다.
 
'문자 보면 바로 연락줘!'
 
정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를 만날 기분이 아니다.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려던 찰나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찬수.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도로 침대에 던졌다. 핸드폰은 두 번 정도 더 울린 뒤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난 조용히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키고 습관처럼 메신저에 접속했다. 미니홈피를 열어보니 인터넷을 하지 않은지 꽤 되서 그런지 방명록에는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보였다. 난 특별히 할일도 없고 하니 방명록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우선 종준이가 쓴 글이 보였다.
 
'형 저 그 사람 진짜 좋아해요. 저 포기하지 않을꺼에요. 형 항상 고마워요!'
 
내 얼굴엔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그밖에도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 모르는 사람들의 광고글...
무심히 마우스 휠을 아래로 돌리는 중 한 사람의 이름에 마우스가 고정되었다. 이미소...
 
어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생생히 되살아나 귀에 꽂혔다.
'어쩌자고 그런 말들을 내뱉은거지…….'
그러나 지금 후회해봤자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난 씁쓸한 마음을 안고 그녀가 쓴 방명록을 읽어내려갔다.
 
"쫄따구! 이 몸이 여기에 글써주는걸 영광으로 알아라! 동방에 써져있는 주소보고 몸소 찾아왔으니 말이야ㅋㅋ 너 근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냐? 모르지? ㅋㅋㅋ 오늘은!! 바로 이 몸이 귀빠진 날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무~지 기분이 좋아ㅋㅋ 이따가 개강총회서 보자!"
 
방명록을 쓴 날짜를 보니 바로 어제... 하필 그녀의 생일에 그런 말들을 하다니…….
저승사자가 와서 내 팔을 잡아끄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낙담하여 머리를 움켜잡고 좌절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송지형!! 내다 임마!"
 
찬수다. 전화를 안받자 방까지 찾아왔나보다.
 
"그렇게 쳐서 문 부서 지겄냐?"
 
"그러길래 왜 전화는 안받는대? 손가락이라도 부러졌나?"
 
난 시답잖은 그의 농담에 썩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됐고, 근대 여기까지 왜 온건대? 뭐 급한일이라도 있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니 가운데 손가락이 부러지는걸 니 눈으로 보개 될 거야"
 
"까칠하긴, 니 어제 정원인 잘 데려다 줬나?"
 
"아 동방에서 재우고 아침에 해장국 사 먹이고 들여보냈어. 왜? 정원이 얘기냐?"
 
"하여간... 눈치빼면 시체인 놈. 맞다 정원이 말인데. 스페인에 있는 대기업에 대학생 인턴으로 들어갔다더라. 그래서 4학년은 스페인에 있는 대학에 다닐껀가봐. 이번에 학교온건 그것 때문에 서류정리 하려고 온 거고. 근대... 니 괜찮나?"
 
1학년 때 정원이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대충 아는 찬수는 정원이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에게 뛰어온 것 같다. 난 급히 정원이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여보세요?"
 
내 전화를 기다렸던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나 지금 외대야"
 
"거기 꼼짝말고 기다려!"
 
"무슨?..지형.."
 
난 바로 전화기를 끊고 외대로 달려갔다. 떠난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멀리 그녀가 보였다. 핸드폰을 한손에 든 채 의문스런 표정으로 서있었다. 곧장 그녀를 향해 뛰었다.
 
"헉헉... 야! 너... 사실이야?"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말했다.
 
"응? 뭐가? 왜 그래? 뭐가 사실이란거야?"
 
난 간신히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너! 스페인에서 인턴으로 취직했다는거!"
 
그녀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며 대답했다.
 
"아... 그거.... 들었나 보구나. 응... 사실이야."
 
난 급격히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걸 느꼈다.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앉았다.
 
"사실...이구나……."
 
"미안... 어제 말해주려고 했는데……."
 
난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 말했다.
 
"괜찮아. 잘됐네 스페인에서 취직까지 하다니. 맨날 공부 안하고 놀러만 다닌 줄 알았더니 가서는 공부 열심히 했나보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
 
"그래... 그렇구나……."
 
웃고있었지만 내 웃음이 억지라는 건 지나가는 지렁이라도 알 지경이었다. 그녀도 내 표정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형아! 나 먹고 싶은거 있는데!! 같이 가자!"
 
"응?"
 
갑자기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그녀가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술집. 1학년 때 그녀와 친해진 후 자주 와서 술을 마시던 곳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소주는 한잔도 잘 못 마시지만 이곳의 칵테일 소주는 두병도 너끈히 마셨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
 
"아주머니 저희 만두부대찌개랑 칵테일소주 주세요. 레몬맛으로요."
 
그녀는 주문을 한 뒤 나를 보고 싱글거리며 말했다.
 
"나 스페인에 있을 때 여기서 칵테일소주 진짜 먹고 싶었다? 너 기억나? 왜 우리 여기서 그거 마시다가"
 
"아! 보관함!"
 
난 처음 그녀가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바로 보관함. 이 가게안쪽 구석 벽에는 특이하게도 지하철에나 있을법한 물건보관함이 있었다. 지하철의 그것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조그만 책 한권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이 보관함은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자신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넣어놓는 이색적인 보관함이었다. 우리도 예전에 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 보관함을 보고 추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각자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넣고 보관했던 걸로 기억한다.
 
"너 아직도 보관함 열쇠 갖고 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내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두 번째 손가락 끝에는 조그만 열쇠가 흔들거렸다.
 
나는 열쇠를 가지고 보관함에서 예전에 넣어뒀던 물건들을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와 보라색 펜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기억나? 넌 우리가 만난 2006년을 기념하려고 2006년이 새겨진 100원짜리 동전을 넣었었잖아. 난 이 펜을 넣었고."
 
"까먹고 있었는데 이제 기억나네. 근대 넌 왜 펜을 넣은거야? 그때에 펜을 넣은 이유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음~ 그건... 비밀!"
 
"엥?"
 
비밀이라 말하며 '절대 말해줄 수 없어'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 피식 웃으며 방금 나온 칵테일 소주를 채웠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건배나 하자. 우리 오랜만이지?"
 
"응. 정말 오랜만이다 헤헤"
 
그녀의 귀여운 웃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스페인으로 떠난다해도 난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과 같이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우리는 이런 저런 애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그녀의 미소에 취한건지 아니면 잔잔한 술기운에 취한건지 미소에게 심한 말들을 내뱉고 괴로워하던 마음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보름이 흘렀다. 오늘은 정원이가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이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는 4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하니 조금 일찍 스페인에 가서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녀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눈앞엔 정원이가 있을 때에도 그 사람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오늘 난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공항까지 마중을 해주기로 했다.
 
"응 알았어. 공항에서 보자."
 
그녀의 전화를 끊은 뒤 준비를 끝낸 후 나가기 위해 신발장을 열고 신발을 꺼냈다. 문득 신발장에 놓여있는 뾰족구두가 보였다. 미소와 등산을 갈 때 잘못알고 처음 신었던 구두다. 그녀는 보름째 아무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할 자신은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난 고개를 한번 저은 후 신발장을 닫고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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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잘있어, 가서도 연락할게."
 
"응, 건강 잘 챙기고 한국 들어올 일 생기면 꼭 말해줘."
 
그녀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도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떠난다니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녀는 마주 손을 흔들며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난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안으로 향하는 것을 본 뒤 난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나오려했다. 그때였다.
 
"지형아!"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날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
 
"쳇! 들어가는것도 안보고 가냐 이 매정한 놈아!"
 
"미안……."
 
난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자 이거 받아"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 열쇠가 들려있었다.
 
"우리 보관함 열쇠야. 이따가 가서 열어봐"
 
내가 그 열쇠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는 내 손을 들어 열쇠를 꽉 쥐어 주었다.
 
"지형아. 우리 정말 좋은 친구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만큼 좋은 친구도 세상에 없을걸?"
 
난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녀의 웃는 표정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그래, 나 진짜 갈게. 잘있어"
 
그녀는 말을 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잠시 손을 펴 그녀가 쥐어준 열쇠를 쳐다본 뒤 곧 주머니에 집어넣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와 방에 멍하니 앉아있을때 찬수가 찾아왔다.
 
"여~ 뭐하고 앉아있냐?"
 
난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멍하니 앉아있었다.
 
"왜이리 넋이 나갔나? 정원이때문에 그러냐? 아 쉐끼 사내자식이 그런 일로 넋이 나가고 그래, 밥이나 묵으러 가자"

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니가 쏘는거냐?"
 
"아 이 개새끼"
 
찬수와 난 밥을 먹기 위해 기숙사 푸드코트에 갔다. 밥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분위기였다.
 
찬수에게 말했다.
 
"난 제일 비싼걸로 먹을래"
 
"닥치고 사주는대로 쳐 묵으라."
 
역시 내 친구다. 그는 제일 싼 참치비빔밥 두 그릇을 들고 왔다.
우린 푸드코트 중앙에 놓인 대형티비를 보며 열심히 밥을 비볐다. 티비에선 8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신입앵커인지 가끔씩 말을 더듬었는대 우린 그걸 보며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 받았다.
 
"야 너 사투리도 이제 많이 안쓰는대 앵커나 해라, 목소리도 좋자나 내가 생각하기엔 저 앵커보다 니가 훨씬 나을 것 같다."
 
"동감이다. 쟤 왜 저렇게 말을 더듬나?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뉴스진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때였다. 그 어설픈 신입앵커 가슴팍 밑으로 빨간 바탕에 속보 자막이 나왔다.
 
'대한항공 스페인행 비행기 운행 중 추락, 현재 확인된 사망자 201. 생존자 無'
 
화면은 곧바로 넘어가 불이 붙어있는 비행기 앞쪽부분을 비추고 앵글을 옆으로 팬닝했다. 화면에 보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주위엔 구급차로 보이는 차들이 즐비했고 소방차들도 여러 대 있었다.
주황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난 불길한 예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찬수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스페인행이면... 정원이!"
 
설마 그럴리가 없다. 저 비행기는 정원이가 탄 비행기 일리가 없다.
정원이는 분명 스페인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을 계속 주시했다.
 
화면은 쉴 새 없이 넘어갔고 곧 확인된 사망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화면에 나오지 말아야 할 나와선 안 될 석자의 글자를 볼 수 있었다. 한정원... 글자는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내 눈엔 모든 것이 멈춰있는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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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그녀의 화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안이다. 굵은 빗줄기들이 창가를 두드린다.
 
처음 그녀의 장례식에 갔을 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녀가 활짝 웃고있는 영정사진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다가와 떠나는 자신을 왜 잡지 않았는지 물을 것 같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니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세상이 날 버린 것 같았다. 그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삼일 밤을 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지금 주저앉으면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장례절차가 끝날 때까지 두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고 그녀의 가족과 인사를 한 후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검은 넥타이를 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방은 어두웠고 주위엔 빗소리 외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시간이 죽어있는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눈뜰 힘조차 없었다. 쾅소리를 내며 머리가 책상을 때렸다. 아프지 않았다. 난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허리에서 적색경보가 울려 난 눈을 뜨고 몸을 세웠다.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다.
 
난 한숨을 크게 쉬고 뿌예진 눈을 비비고 시야를 확보했다. 삼일동안 비어있던 방안은 지금의 내 심정을 보듯 난잡하게 어질러져있었다. 난 천천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어놓고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뒀다. 책상 또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어질러져있다. 펜들을 정리하고 노트북도 닫고 여기저기 정리를 했다. 그러다  문득 책상 귀퉁이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열쇠였다.
 
그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열쇠... 그러고 보니 자신이 떠난 후 보관함을 열어보란 말이 떠오른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난 그 술집에 가기 위해 대충 샤워를 한 후 모자를 쓰고 술집으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보관함을 열자 조그만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난 그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든 후 방으로 돌아왔다.
 
모자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편지봉투를 뜯었다. 예쁘게 접힌 편지지를 꺼내 열어보았다. 작지만 하나하나 정성스레 쓴 듯 아주 예쁜 보라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지형아? 나야 정원이
 
내 글씨 예쁘지? 나 진짜 글씨연습 많이 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넌 아마 모를걸? 이거 저번에 보관함에 넣어뒀던 보라색 펜으로 쓰는 거야……. 저번에 이 펜 넣어둔 이유... 비밀이라고 했잖아? 사실그땐 아무생각없이 펜을 넣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이 편지를 쓰려고 보라색 펜을 넣어놨던것 같아 이렇게 되고 보니 꼭 엄청난 운명같지 않아? 헤헤
 
음... 아마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아마 스페인으로 날아가고 있거나 도착해서 새 학기를 준비중이겠지…….
 
이번에 한국 들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니까... 너도 알지?
 
뭐 서론은 여기까지하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할께
 
나 사실 이번에 한국 들어온 거... 그거 때문만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너 때문에 들어온거야. 넌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2년 동안 나 정말 네가 보고싶었어. 너랑 같이 놀았던 때도 그립고 너랑 같이 술 먹던 것도 그립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서 나 한국에 오자마자 너한테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왜 그런 줄 알아? 네 옆에는 이미 내가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하긴 내 연기실력이 워낙 뛰어나니까 말이야 하하하!
 
개강총회때 기억나지? 나 술 먹고 뻗은 날. 사실 나 스페인와서 술 엄청 늘었다? 스페인 술들이 엄청 쌔자나……. 그래서 그런지 이제 소주정돈 가볍게 비울 수 있는 경지를 이뤘지. 그런대 왜 그날 그렇게 쉽게 뻗었냐고? 바로 그거야 바보야……. 너랑 단 둘이 있고 싶어서 뻗은 척 한거야……. 그 자리에 날 아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그래서 분명히 너라면 날 챙겨줄꺼라고 생각했어. 역시 내 예상은 딱 들어맞았지. 너는 뻗은 날 업고 동방으로 옮겼지.  (너 근대 한숨 엄청 쉬드라? 내가 그렇게 무거워?? 야 나 키에 비하면 엄청 가벼운 편이야! 그날 창피해서 계속 얼굴 빨개진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떨린다야...)
 
아무튼 그렇게 내 계획대로 너와 단 둘이 있게되서 난 기뻤어. 그런대 왜 안깨어 났냐고? 니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잖아……. 나 사실 그때 엄청 두근두근거려서 내 심장소리가 너한테 들리면 어쩌나 걱정 무지 했다? (난 키스라도 할 줄 알았지? 이 순진한 자식! 나같이 예쁜 얘가 아무 저항도 없이 누워있는대...) 아무튼 날 쳐다보기만 하는 네가 한심스러워서 막 놀래켜 줄려고 그랬어. 그러던 찰나!
 
그 애가 들어오더라……. 미소라고 했던가? 그 애와 네가 하는 대화를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어... 미안...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용서해줄꺼지? 아무튼 너희 둘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이미 너와 그 아이사이에 내가 낄 틈은 없었어. 그 얘가 나간 뒤에도 난 일어나기가 뭐해서 계속 잠든 척 했던거고... 네가 내 옆에서 한숨도 못잔것도 알아…….
역시 그 애한테 내뱉은 말들이 잠도 못잘 정도로 후회돼서 그런거지?
 
한국에 있는 동안 너에게 고백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추억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너한테 고마워……. 난 충분히 2년 동안 널 그리워한 대가를 받은 기분이야... 스페인에 가서도 우리 추억 기억하면서 나 열심히 해서 네가 '아 그때 내가 왜 저렇게 멋진 여자를 잡지 않은 거지?'라고 후회할 정도로 멋진 여자가 될 거야. 그때가서 후회해도 이미 늦은거 알지?
 
지형아. 마지막으로 친구로서 부탁 한가지만 할께...
그 미소라는 애...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은 조금 험할지 모르겠지만 그 말 속에도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뭍어나와서 난 금방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네가 먼저 그 애한테 손을 내밀어. 그런 애들은 성격이 워낙 강해서 먼저 굽히는 성격이 아니거든……. 아마 너의 말에 그 애는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았을꺼야. 아직 연락 한번 없지? 그것 봐…….
 
나 때문에 그 애가 오해를 한 거잖아. 그것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네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거야. 그 애는 너를 좋아하는마음 때문에 말을 한 건대 넌 그런 그 애의 마음을 깨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나중에 한국에 돌아올 때 정식으로 여자친구라고 그 애를 나한테 소개시켜줘야 한다? 알았지? 안그러면 그땐 정말로 내가 널 뾰족한 하이힐로 발등을 찍어버릴테니까 각오하고!
 
이만쓸께. 지형아. 꼭! 행복해야돼!
 
From. 너의 진정한 친구 정원이가.
 
편지를 다 읽었을 땐 내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편지지의 보라색 글자들 위로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귀에서 재잘거리는 것 같다.
 
그때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신혜다.
 
"훌쩍..."
 
"우냐?"
 
"훌쩍..."
 
"사내자식이 울긴 왜 울어. 나와 슬플 때 혼자 있으면 더 슬퍼져 우리랑 술이나 한잔 하자."
 
"니가 쏘는거냐?"
 
세상이 두쪽나도 확인은 해야한다.
 
"찬수가 사겠지"
 
"아 왜 또 나야"
 
전화기 너머로 찬수의 불평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눈물을 닦으며 피식 웃고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신혜와의 통화로 진정이 된 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신혜와 찬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정원이와 친했던 친구들이다. 속으론 많이 힘들겠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날 위로해 주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다.
 
"기운 내 자슥! 니가 축 쳐져있으니까 우리가 더 힘빠진다 자슥아."
 
찬수가 위로를 건넸다. 난 힘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썩소를 날렸다. 우리는 정원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추억들이 다 떨어져 갈때쯤이었다.
 
가게 문 쪽으로 우연히 시선을 돌린 난 낯설지 않은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미소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무척이나 화난 얼굴이다. 그녀가 오자 신혜이가 말했다.
 
"내가 불렀어. 대충 얘기 들었는데 너라면 분명히 미소한테 먼저 연락 안할 것 같아서. 나 같으면 너 반쯤 죽여놨을테지만 마음착한 미소라서 그나마 다행인줄 알아~ 찬수야 우린 이만 일어나자."
 
신혜는 같은 방까지 쓰면서 아직까지 미소의 성격을 잘 모르나보다. 찬수와 신혜는 우리만 내버려 두고 사라졌고 그들이 사라지자 미소는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 사이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성격답게 미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난 문득 정원이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만! 말하지마."
 
난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의 날 처음 보는 그녀는 당황했는지 열려던 입을 도로 굳게 닫았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그날 내가 너에게 했던 말들은 내 진심이 아니었단 걸 믿어줬으면 좋겠어…….
 
사실 그날 나 자고있는 정원이 모습에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때 문득 니 얼굴이 떠올랐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는건 확실해. 이런 나... 용서해 줄 수 있어?"
 
내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나하고 술내기해서 니가 이기면 용서해줄께!"
 
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가 이기면?"
 
그녀는 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니랑 나랑 사겨야지"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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