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라즈블리토(中)

2009.09.02 09:2609.02

그때는 내가 대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나도 파릇파릇한 새내기였을 때였다. 처음 동아리에 들어가 동아리사람들과 친해지며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보내고 있었을 때 두 명의 여성이 동아리 방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저 동아리 들고 싶어서 왔어요."
 
가뜩이나 냄새나는 수컷들이 가득했던 우리 동아리방은 그 두 여성을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고 더군다나 그 둘 모두 남녀비율 1대9를 자랑하는 외국어대학 스페인어학과 학생들이라니 선배들은 당장 축제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중 예비역 선배 한명은 자신의 사비를 탈탈 털어 나에게 과자와 음료수를 사오라고 시켰다.
 
'쳇 내가 처음 왔을 땐 김빠진 콜라나 주더니'
 
물론 나도 동아리에 여자 멤버가 생기는 것이 싫지는 않았으나 같은 새내기인대도 갑자기 찬밥신세가 됀 기분에 그 두 여성이 곱게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녀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고 하루하루가 흘렀다.
 
시간은 흘러 대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5월 축제시즌이 다가왔다. 우리 동아리는 올해 새내기들이 많이 들어온 덕분에 처음으로 동아리 주점을 열기로 결정했다. 축제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우리는 축제의 절정! 연예인들의 학교방문이 있는 딱 하루만 하기로 했다.
 
선배들의 주도하에 우리는 차근차근 준비를 했고 이윽고 주점을 열기 하루 전이 되었다.
 
"야 지형아 마트가서 내일 쓸 일회용 그릇이랑 나무젓가락 같은것좀 사와"
 
시간이 남아 동아리방에서 뒹굴거리던 중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
 
"아 형 저 혼자 그 많은걸 어떻게 들고와요"
 
"그런가? 잠깐 기다려봐"
 
선배는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응 나다. 너 지금 시간 있어? 아 다른게 아니라 내일 쓸 일회용 식기같은것좀 사오라고. 내가 오늘 실험발표준비를 해서 시간이 안될 것 같아. 아 그래? 그럼 학생회관 밑에서 기다려 한 놈 더 보낼게"
 
전화를 끊은 선배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웰컴 투 어색 월드!"
 
왠지 육감이 적색경보를 띄우고 있다.
 
난 선배가 시킨대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학생회관 밑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안녕?"
 
예전에 들어온 그 두 여자중 한명이 서있었다. 이름은 한정원. 이름만 듣고 처음에는 남잔 줄 알았으나 여자다. 170이 넘는 장신에 새하얀 피부. 빨간 뿔태안경이 인상적이다. 아 하필……. 아까 선배의 사악한 웃음이 생각난다.
 
"가자"
 
그녀에게 딱딱하게 말을 건넨 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5월인대도 불구하고 나와 그녀 사이엔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을 받는 듯 차가운 칼바람이 불었다. 그런 어색한 기류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우리는 학교를 나섰다.
 
난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고 내 시야에 같은 화학실험조 친구 한명이 눈에 들어왔다. 기회는 이때다!
 
"야!"
 
"여~ 지형!"
 
"하하 어디가냐?"
 
난 그 녀석을 붙잡고 정원이에게 말했다.
 
"아 정원아 미안한대 먼저 가서 물건 고르고 있을래? 내일 실험 때문에 이녀석하고 얘기 좀 하고 금방 갈께"
 
"응 그래."
 
그녀도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됐는지 쉽게 수긍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간 뒤 난 친구와 이런저런 애기를 하고 20분정도 후에 그녀를 뒤따라갔다.
 
금방 마트에 도착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 일회용 식기가 있는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이것저것 고르고 있어야 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식품코너를 봐도 없고 위층에 의류매장까지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혼자 벌써 다 사갖고 간건가? 그 많은걸 혼자 들긴 힘들텐데'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심부름을 시킨 선배의 문자였다.
 
'010-****-**** 정원이 휴대폰 번호다. 길을 잃었단다. 전화해서 찾아'
 
어이가 없었다. 학교에서 마트까지는 고작해야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다. 초등학생들도 이정도 거리면 길을 잃진 않을 것이다. 그런대 길을 잃었다니.
 
'그나저나 길도 잘 모르면서 순순히 먼저 간다고 한걸 보면 그정도로 나랑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건가?'
 
난 전화기를 들고 선배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곧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지형인대. 지금 어디야?"
 
"아... 미안... 근대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주위에 큰 건물같은거 있으면 알려줘봐"
 
"음.. 큰 건물은 없고 무슨 공원같아. 벤치같은거 있고 농구골대도 있고 놀이터도 있어."
 
이 근처의 공원이라면 하나뿐이다. 아는 선배의 자취방이 그 근처라 자주 신세를 진나는 그 장소를 기억해 냈다.
 
"어딘지 알겠다. 내가 그쪽으로 갈께. 농구골대 근처에 앉아있어"
 
"응.. 미안"
 
전화를 끊은 후 공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공원끝쪽 농구골대 아래 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마치 네 살짜리 꼬마애가 길을 잃고 엄마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웃으면서 다가갔다.
 
"찾았다. 길치!"
 
"아!... 미안..."
 
"괜찮아 자 이거 마셔. 불안했지?"
 
나는 마트에서 산 캔 커피를 건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말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럴수도 있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 나 중고등학교때도 학교가는 길을 잘 못 찾아서 매일 아빠가 차로 데려다 주셨어."
 
난 그녀의 왠지 다가서기 힘든 인상과는 달리 서투른 면을 보며 예전에 경계했던 마음을 풀고 서슴없이 대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불안했던 마음이 놓여서인지 생각보다 말도 많이하고 사소한 말에도 크게 웃어주기 시작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도 알고 친해질 수 있었고 주점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하루에 문자 백통도 넘게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친해지고 보니 그녀는 꽤나 귀엽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에게 조금씩 기울어 가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방학시즌이 가까워지면서 시험기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같이 공부를 했다. 배가 고프면 치킨도 시켜먹으며 시험을 준비했고 드디어 나는 마지막 시험 하나를 남겨놓고 있었다. 이 시험만 보면 여름방학에 돌입하고 난 집이 있는 인천으로 올라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와 더 이상 쉽게 만날 수 가없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음에도 난 그 생각 때문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 마음을 보여주기 힘들꺼야, 절대 후회하긴 싫어'
 
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지형아."
 
"공부하는대 미안, 잠깐 나와서 음료수 한잔하자 공부도 쉬엄쉬엄해야지"
 
"그럴까? 잠깐만 기다려"
 
난 먼저 기숙사 앞으로 가서 음료수 캔 2개를 뽑은 후 그녀를 기다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나왔다. 캔 하나를 건네준 뒤 말했다.
 
"산책이나 할까?"
 
"그래"
 
우리는 천천히 산책삼아 천천히 걸었고 이윽고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천문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이곳이 높은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학교야경이 훤히 보여서 분위기가 꽤 좋았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와 오늘 보름인가봐. 달이 정말 동그라네."
 
"그러게 엄청 밝다."
 
난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입을 열었다.
 
"정원아. 나 하고싶은 말이 있어……."
 
난 잠시 뜸을 들였다.
 
"이런 말 처음 하는거라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뭐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역시 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용기가 필요한때이다.
 
"나 정말 네가 좋다."
 
말했다!
 
갑작스런 고백에 그녀는 놀란 토끼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했다. 아직 별로 덥지 않은 6월인대도 내 등줄기에는 굵은 땀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처음에 놀란 눈으로 날 바라 봤지만 이윽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달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형아 나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내일 너 시험이잖아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일찍 쉬어, 나 먼저 들어갈게"
 
말을 마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한 강풍 앞의 거미줄마냥 긴장되었던 마음이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난 왠지 허탈한 기분에 달을 보며 남은 음료수를 단숨에 비웠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빛나는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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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난 시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날 인천으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고백을 한 뒤로 그녀와의 사이는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그렇게 그녀도 마지막 시험을 앞둔 전날 우리는 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자료열람실에서 빌린 책을 읽고 그녀는 공부를 했다. 그렇게 몇 시간 후…….
 
'툭'
 
뭔가 내 머리를 쳤다.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렇다. 책 몇페이지 넘기고 바로 몽환의 세계로 빠져버린것이다. 난 어렸을 적부터 책 몇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항상 잠에 빠져버리곤 했다. 주위사람들은 이런 날 보고 KH대에 입학한 것은 하늘이 내리신 기적이다 뭐다 해서 합격당시 여러 예비 고3 어머니들이 날 찾아와 손을 어루만지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잡담은 이만하고 난 내 머리를 친 것의 정체를 알기위해 주위를 돌아보며 시야를 밝혔다. 옆에 있던 그녀는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언제 나갔지?'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기 위해 책상을 봤다. 거기엔 내 머리를 친 범인인 것 같은 편지 한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난 그 편지를 보자 갑자기 불안해 휩싸이기 시작했다. 자세를 고쳐 잡고 난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편지지에 써져있는 글을 보고 처음 들은 생각은
 
'참 글씨 못쓰네…….'
 
예상대로 정원이가 쓴 편지였다. 대부분 내 또래 여자애들은 예쁜 글씨를 쓰려고 글씨를 작게 쓴다던지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던데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자니 머리가 다 아팠다. 이건 아마 내 왼손으로 쓴 글씨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글씨였다.
하지만 그런 글씨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인간적인 면을 또 하나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글씨는 이쯤해 두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지형아. 네가 나를 좋아한단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기뻤어. 이런 나를 좋아해줘서 너무 고마워.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난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사실 나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어. 그런대 지금은 그 감정이 이루어 질 수 없단 걸 깨닫고 그 사람을 잊어가는 중이야…….
그러던 중 너의 마음을 듣게 된 거고……. 지금 이런 상태로 내가 너를 좋아하면 그건 너한테 너무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아. 너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한테는 도저히 내가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이해해줄수 있지? 우리 정말 좋은 친구잖아.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정말 미안해.' From 정원
 
난 나락에 떨어지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난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학교에 있으면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이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쓰디쓴 아픔을 느끼며 이틀을 지냈다. 그녀에게는 연락도 없고 나또한 그녀에게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밥도 안먹고 이틀을 보낸 나를 보면서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는지 내 방에 들어오셔서 왜그러는지 묻기도 하셨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은지 삼일 째, 오후가 되자  집에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의 이름은 김상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지만 서로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사이마냥 첫 만남부터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다. 이 친구는 상대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정곡을 찌르는 비상한 말재주를 가져 가끔 처음만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곤하지만 알고보면 굉장히 인간적이고 털털해 금방 친해 질 수 있는 친구다. 가끔 보이는 수준급의 몸개그를 통한 바보같은 모습은 그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이다. 부모님이 내가 걱정이되서 불렀나보다.
 
"야임마! 뭐하냐!"
 
"웬일이냐"
 
"웬일이긴! 인천에 올라왔으면 형님한테 먼저 신고를 해야지! 빠져가지고 이게"
 
이 친구는 인천에서 초, 중,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I대로 간 순 토종 인천사람이다.
 
"뭔 헛소리야. 인천이 니땅이냐?"
 
"몰랐냐? 내땅인거?"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인사를 건넨 그는 컴퓨터 책상에 딸린 의자를 끌고 와서 등받이를 양손으로 감싸고 턱을 괜 채 앉았다.
 
"실연이라도 당했냐? 뭐 그리 풀이죽어있어"
 
"……."
 
"설마 진짜 실연당했냐?"
 
역시 비상한 재주를 가진 놈이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께 걱정 끼쳐서야 쓰겠냐? 얼른 밥이나 먹어라 형님이 술 한 잔 살께"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꽃등심안주 아니면 안먹는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니 몸뚱이에서 꽃등심 없어지는 줄 알아라."
 
 
 친구와의 술한잔후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잊어보고자 시간을 바쁘게 보내기 시작했다. 해외로 여행도 다녀오고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고 덕분에 점차 마음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름방학의 중반, 나는 동아리 엠티에 참석하기 위해 대천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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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아래 열이 오를대로 오른 아스팔트는 자기만 뜨거울 수 없다는 듯 사방으로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겁고 텁텁한 공기를 몰고 와 실로 여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날씨였다. 그런 날씨 북적북적한 휴가인파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동아리니 그녀 또한 엠티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녀를 잊기 위해 하루하루 쉴 새 없이 시간을 보낸 내가 왠지 더 초라해지고 허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도 분명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나를 대하는 걸 보면 꽤나 용기를 낸 것이리라.
 
"그럼! 밥 먹을 시간도 못챙길정도로 바빠 죽는 줄 알았어! 아오 근대 너무 날씨가 더워서 말이지……."
 
나 역시 그녀의 용기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로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모든 동아리 사람이 모이길 기다린 후 우리는 방을 잡고 옷을 갈아입은 후 차가운 파도가 반겨주는 바다로 몸을 내던졌다. 그렇게 신나게 노는 동안에도 나는 힐끗 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역시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물장난을 쳤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도 왠지 안심이 되었다.
 
해질 무렵까지 물놀이를 즐긴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메뉴는 엠티의 단골메뉴 삼겹살! 저녁이 되자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한여름 밤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거기에 갓 구운 삼겹살을 얹은 큼지막한 상추쌈을 한입 먹으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푸짐한 저녁을 먹은 우리는 곧바로 술자리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웃음소리로 가득해지고 여기저기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아마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느라 다들 피곤한 차에 술을 마시니 취기가 빨리 오른 모양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몇 잔만 더 마시면 바로 골아떯어질 것 같았다.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 온 여름엠티인대 이렇게 빨리 잠을 잘 순 없다. 그리고 먼저 잠들면 나에게 어떤 봉변이 닥칠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난 고등학교보다 심한 장난으로 익히 알려진 대학엠티문화가 두려웠다.
 
난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술이나 깰 겸 바람을 쐬러 바닷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고 빠져나가며 내 발을 살짝살짝 간지럽혔다. 시원한 그 느낌이 싫지 않아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다.
 
"지형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감았던 눈을 뜨고 뒤를 바라봤다. 그녀였다. 그녀도 꽤나 취했는지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정원이구나."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발을 맞추며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름엠티 정말 재밌는 것 같아. 내가 기대했던 대로야"
 
"그렇지? 나도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 먼저 가야된다는 게 너무 아쉬워"
 
그녀는 어머니 생신이 껴서 내일 먼저 올라가 봐야 한단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 생신이신대 하나뿐인 딸이 곁에 없어서야 되겠어?"
 
"응……. 네 말이 맞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바닷가를 걸었다. 
 
오랜 적막을 먼저 깨뜨린 건 그녀였다.
 
"그런대 지형아"
 
"응?"
 
그녀는 말을 시켜놓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땠다.
 
"너 혹시 아직도 날 좋아해?"
 
순간 눈앞이 아늑해짐을 느꼈다. 한껏 취기가 올라와 제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그것도 너무 갑작스레 그런 질문을 받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맨정신이었으면 백번이고 '당연하지'
라고 대답했을 질문이다. 하지만 입에 철장을 달아놨는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애들아~!"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듯한 큰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동아리 여선배중 하나가 뒤에서 우리를 부르며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그분역시 취하셨는지 달려오는 상태가 휘청휘청 보는 사람이 더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기를 꽤나 잘하시는지 순식간에 우리앞으로 다가왔다.
 
"술먹고 바다 들어가면 안된대 헤헤, 정원아 우리 빨리 돌아가서 한잔 더 하자 빨리"
 
선배는 정원이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
 
"지형아 너도 빨리와!"
 
"네 선배 술만 깨고 금방 갈게요"
 
그렇게 대답한 나는 멀어져가는 정원이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다음날 예정대로 정원인 우리보다 하루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여름엠티는 끝나갔다. 그 후에도 우리는 예전처럼 친구로 재미있게 지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여전히 그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런 관계마저 깨질까봐 두려워 그 마음을 깊은 곳 어딘가에 꽁꽁 묶어 숨겨두었다. 단지 그냥 옆에서만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2학년이 된 후 난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한 후 다음해부터 군복무를 시작했고 그녀도 나와 같은 시기에 휴학을 한 뒤 다음해에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 아냐 어디까지 말했지?"
 
종준이의 말에 나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지금 종준이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의 내 모습과 딱 겹쳐졌다. 난 조용히 말했다.
 
"그 애도 아마 지금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과 이뤄질 수 없음을 깨닫고 꽤나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꺼야. 네가 정말 아름일 좋아해 줄 수 있다면 그 상처를 바로 네가 아물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건 너만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절대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녀에게 고백 한 후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
 
종준이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 하게 걸쳐있는 담배불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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