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어. 쏟아지는 장대비는 시원해도 그 거침없는 모양새를 보자면 가끔은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는데. 오늘은 요 며칠간 피어난 새싹도 쓰러지지 않는 부드러운 비가 내렸어.
이런 날은 풀잎 향기가 진해져서 좋아. 비염인 나도 비에 젖은 풀 냄새를 맡았어. 너와 살갗을 가까이 맞대 안을 때 맡았던 부드럽고 시원한 향.
무더위에 바로랑 산책가면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편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어. 한 손엔 목줄을 잡고 오랜만의 단비를 맞는 꽃, 나무, 돌담. 이것 저것 둘러봤어. 비에 젖은 모양새도 운치있고 좋더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꼭 필요한 순간에만 오는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뿌리지. 우리 사는 삶에서는 언제 어떻게 맞닥뜨릴지 몰라 우리를 웃거나 지치게 만들어. 그 날도 나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늘이 조금 구리구리 한게 올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기대했는데 역시 오진 않더라.
그래서 그냥 비가 온다고 상상했어. 커튼을 모조리 닫고 핸드폰으로 시끄러운 장대비 소리를 들으면서. 그땐 왜 그랬나 몰라.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지만 그래도 빗소리를 들으면서 한구석 허전한 마음을 채웠어. 네가 떠올라 힘들때마다.
그러다 너를 잊었다 생각할 때 즈음, 이 비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거야. 내가 상상했던 그 풍경보다 더 아름다웠어. 밤새 젖어 색이 진해진 넝쿨과 나뭇잎들. 떨어진 나무 열매. 비에 젖어 짙어진 향기.
그러니까 지금 쓰는 이 글도 모두 우연인 거야. 내가 보고 맡았던 풍경을 되새기는 일. 그러다 문득 네가 떠오른 일. 또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너를 삼키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