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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배타적 사랑

2021.07.03 13:5207.03

배타적 사랑

도도, 내 말 잘 들어. 지금 천천히 다락 위로 가. 그리고 지붕으로 통하는 사다리에 올라타는 거야. 그러면 우리를 볼 수 있어. 우리가 지금 집 근처를 날아다니고 있어. 아니야, 너 후회할 거야. 후회하게 돼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올라와. 아직 우리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너 올 때까지 기다릴게. 제발, 제발 올라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애석해하잖아. 우리가, 네가 죽는다면 바로 우리가 애석해할 거라고. 혈육만 가족이야? 오랫동안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살았잖아. 왜 우리 감정은 무시하는 거야. 우리가 너를 아낀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 거야. 기억하고 있어?

그때 절벽 바위틈에 피었던 구절초꽃 꺾으러 나랑 갔던 것? 너는 그게 구절초꽃이라고 확신하면서 반드시 그 꽃을 꺾어서 나에게 준다고 했지. 나는 어리석게도 그때 네 마음이 진심인지 알고 싶어서, 그렇다면 꺾어달라고 했지. 넌 망설이지 않았어. 넌 허리에 밧줄 하나를 매고, 절벽 꼭대기에 있는 나무에 반대쪽을 묶고선 아래로 조심조심 내려갔어. 그러곤 정말 구절초꽃, 우리가 구절초이라 믿었던 그 꽃에 도달해서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어. 연보라색 꽃 앞에서 네가 손을 흔들 때 절벽 위에서 밧줄을 꼭 붙들고 있던 나는 아찔했어. 동시에 정말 많은 감정이 코끝까지 올라왔어. 벅찼다고 해야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너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이런 무모한 요청을 하고,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너를 보자니, 내가 참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젊은 날에는 무모함을 혐오했는데, 100살이 넘고 보니 오히려 그런 열정이 과연 인간의 삶에 실재했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 인간의 생에서 무모함과 열정은 정말 존재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희미해지고 궁금해지는 거야. 평균수명이 고작 100살 정도였을 때는 그런 종자들이 많았다고들 교과서에 그러던데, 500년을 육박하자 우리는, 노인의 몸으로 수백 년을 사는 우리는 사실 알 길이 없잖아. 그런데 그날 네가 내가 보여준 거야. 272세의 네가 298세인 내게 보라 꽃 앞에서 손을 흔들었을 때,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너를 사랑하게 된 거야, 도도.

도도, 무슨 소리야. 거짓이라니. 아니야 도도.

인간이 어떻게 500년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겠어. 내가 라라를 만난 건 구절초꽃 사건 이후로도 37년이나 지나서 있었던 일이잖아. 나는 라라를 만나기 전과 후에도 너를 정말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고. 너를 귀하게 여겼고, 너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고, 너를 안고 있으면 기나긴 이 생이 지루하지만은 않았어. 위안이 되었고 의지가 되었다고. 그저 빛깔과 온도가 다를 뿐이라는 걸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딨는 거니.

기억나? 우리가 노래 대결했던 거? 누가 더 고음을 자연스럽게 잘 지내는지 정말 치열하게 대결했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높은 곧은 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힘을 주었어. 그러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지. 우리 모습이 정말 바보 같았으니까. 그때 나는 정말 너와 그렇게 단둘이만 있어도 너무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어. 너를 평생 사랑할 거라고 믿었어. 그날이 그날 같아도 일상 속에 서로가 비루해 보이는 순간이 온다 해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아직도 사실이야. 우린 그렇게 수십 년을 사랑한 거야.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그러다 내가 라라를 만났지. 라라가 우리가 사는 이 산속으로 왔을 때 네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어. 그녀에게 음식과 옷가지를 내주고, 함께 씨앗을 심고, 같이 산짐승을 잡으러 갔지. 그래. 맞아 나도 라라와 함께 나물을 따러도 가고, 꽃을 따러도 가고, 같이 요리도 했어. 둘만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령 우리가 이 지구의 마지막 인류라도 도도 너와 함께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래그래 미안해, 더없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라라가 오니까 더 좋아졌어. 더 활기가 돋고, 우리 셋의 관계의 온도가 뜨거워지고, 뭐랄까, 액티브해졌어. 그건 너도 그랬잖아. 나하고 매일 그날이 그날인 하루하루를 살다가 라라가 오니까 같이 미래를 도모하기도 하고 좋아했잖아. 그래 부정하지 않을게. 라라는 이제 막 150살이 넘었잖아. 우리보다 한참 젊고,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사람과 일도 많이 겪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어. 나도 젊은 에너지가 좋았어.

아니야 도도. 나는 그냥 너도 사랑하고 라라도 사랑하는 것뿐이야. 너와 함께해온 세월만큼 너를 깊이 사랑하고 라라의 젊은 에너지만큼 그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뿐이야. 오로지 그것뿐이야. 믿어줘. 사람의 마음은 한 갈래가 아니야. 500년 이상 살면서 한 갈래의 마음만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거짓이거나 닫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도도 올라와. 지붕 위로 올라와서 어서 우리의 스카이십에 올라타. 이대로 산불에 타죽게 너를 놔둘 수 없어. 이 불은 꺼지지 않을 거야. 정말 지구 전체를 덮을 거야. 세상이 온통 불바다라고 도도. 몸에 불이 옮겨 붙는 순간 너는 후회하게 될 거야. 같이 가자 도도. 우리 셋이 안전한 곳을 찾아보자 도도. 이제 통신도 끊길 거야. 우리 이제 정말 이대로 끝인 거야?

뭐라고? 뭐? 정말이야? 그게 사실이야? 도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 우리의 생존터인 이곳에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인류의 산불로 종말시킬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아이를 낳자고 했잖아. 노력해보기로 했잖아!

이거 놔 라라.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라라. 이거 놓으라고. 도도가 저기 있잖아. 도도가 도도가 저기 있잖아. 도도가 저기 있다고! 라라, 믿을 수 있어? 도도가 도도가 스스로 죽겠다는 걸 믿을 수 있어? 도도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고작 독점적 사랑 때문에 인류를 멸종시켰다고.

뭐?

라라,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정말이야?

정말? 도도가 너를? 너 때문에?

오, 라라. 도도.

우리 셋은 같이 행복할 수 있었는데, 너와 라라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존속시킬 수도 있었는데, 결국 수천년 동안 종교처럼 여겨져온 배타적 사랑이 인류와 지구를 끝내고 말다니.


- 끝

 

도제희

도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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