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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낯선 행성으로의 추락

2021.07.03 08:0307.03

1 추락
인간은 디스코르디아 행성에서 사는 외계인 에리스족과 새로 발견된 행성을 두고 3년 넘게 우주전쟁을 벌이고 있다. 인간은 환경 문제와 우주산업 성장 한계로 인해 한 행성에서 모든 인구가 함께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새로운 행성을 찾아 도시와 산업 시설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만이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1,000년 정도 후면 그런 날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한 인간은 생명체가 살아 갈만한 새로운 행성을 찾는데 많은 자원을 투자했고, 오랜 시간 끝에 지금 살고 있는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행성을 찾는데 성공했다. 적합한 행성만 찾으면 인류의 어두운 미래가 일시에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마침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외계인 에리스족은 인간이 먼저 발견한 새로운 행성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까지 대비한 인간은 초반에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면서 어렵지 않게 에리스족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뜻대로 쉽게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에리스족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이번 전쟁을 준비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전세는 에리스족에게 전반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형국이 됐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너무 많은 비용을 소모하게 되고 전세까지 좋지 못 한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하고 다른 행성을 찾는 것이 차라리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는 국가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더욱이 참전 중인 지구우주연합군 군인들은 예상보다 길어지는 전쟁과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는 치열한 전투로 인해 하루하루 심신이 많이 지쳐가고 있다.

우주에서 교전을 하던 중 선정우 소령이 몰고 있는 우주전투기가 후미에 미사일을 맞았다. 방향을 급하게 트는 과정에서 미사일이 맨 뒷부분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운 좋게 우주전투기가 폭파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미사일에 맞은 힘에 의해서 우주전투기는 교전하고 있는 대열에서 벗어났다. 계기판 여기저기서 경고등이 깜박거리고 경고음이 계속 울린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엔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경고등이 켜졌다는 것이다. 우주전투기는 빙글빙글 돌면서 전투를 하던 곳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점점 더 멀어진다. 자신의 우주전투기가 격추되면서 크게 당황한 선정우 소령은 정신을 차리고 로켓 엔진을 다시 가동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엔진이 완전히 파괴된 것 같다. 엔진이 고장난 이상 다시 대열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서는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참 치열하게 교전 중이라 당장은 선정우 소령을 구하러 오지는 못할 것이다. 우주전투기가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다. 선정우 소령은 눈 앞이 희미해지고 정신이 점점 흐려진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나 의지대로 되지 않고 결국 기절했다. 선정우 소령의 우주전투기는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우주 공간 어디론가로 무기력하게 계속 날아간다. 관성에 의해 한참을 날아가던 중 맞은 편에서 날아오는 작은 운석이 조정석 왼쪽 부분에 비스듬하게 충돌했다. 운석은 산산조각이 났고 부서진 파면은 어두운 우주 속으로 흩어졌다. 다행히 큰 운석이 아니었고 정면으로 충돌하지도 않았다. 조정석 왼쪽 부분이 꽤 부서지고 안쪽으로 깊게 찌그러지기는 했으나, 조정석 내부가 뚫릴 정도의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석이 부딪치면서 우주전투기의 날아가는 방향을 바꿔 놓았다. 궤도가 바뀌면서 우주전투기는 인근에 있는 어느 행성을 향해 날아가게 됐고, 한참을 행성 방향으로 날아가다 중력에 붙들려 그 행성으로 빨려 들어가듯 추락하기 시작했다. 우주전투기가 빠른 속도로 행성으로 떨어진다. 잠시 후 행성의 지면에 가까워지자 우주전투기에서 자동으로 대형 낙하산이 펼쳐졌고 낙하 속도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작은 물체 하나가 빠르게 날아오더니 우주전투기 몸체에 박혔다. 잠시 후 낙하산 하나가 더 펼쳐졌다. 떨어지는 속도는 더 줄어들었다.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머리가 아프다. 살며시 눈을 떴다. 앞 유리 너머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눈이 부신다.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무슨 상황에 놓여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왼쪽 허벅지에 심한 통증이 몰려온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허벅지 통증이 더 심해진다.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눈이 부시지만 희미한 빛에 금새 적응이 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주전투기 조정석에 앉아있다. 쓰고 있는 헬멧을 벗으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고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고 쑤시는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선정우 소령은 힘겹게 헬멧을 벗은 후 우주전투기 내부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둘러봤다. 앞 유리에는 먼지가 뿌옇게 가득 덮여있어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조정석 왼쪽 부분으로 추락을 했는지 아니면 무엇에 부딪혔는지 탑재된 무기를 제어하는 왼쪽 계기판이 심하게 부서지면서 선정우 소령 왼쪽 허벅지 위로 무너져 내렸다. 다리를 빼내려 시도해본다.
“으아아아아아아!” 끼어있는 다리를 빼내려 허벅지를 억지로 움직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비명을 질렀다.
큰 일이다. 다리를 뺄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다리를 빼려 시도한다.
“아아아아아아아!” 선정우 소령은 이번에도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무너진 기계와 조정석 의자 사이에 다리가 완전히 끼어 살을 깊게 도려내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꼼짝없이 조정석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이다. 허리를 숙여 자세히 보니 계기판의 날카롭고 뾰족하게 부서진 부분이 왼쪽 허벅지 살을 파고들어갔다. 왼쪽 다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환부를 자극해 통증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살을 아주 깊게 파고들어 가지 않았고 아직 출혈이 심한 편도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처는 깊어질 거고 출혈은 심해질게 분명하다. 지금 처해진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선정우 소령은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 본다. 상체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까지 같이 움직여지면서 허벅지에 통증이 조금 심해졌다. 선정우 소령은 통증을 참아가며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해 있다 지금 깨어난 걸까?’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에리스족과 전투 중에 격추를 당했던 것이 기억났다. 격추를 당해 자신의 우주전투기가 전투 대열에서 떨어져 나왔다. 전투 대열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으나 엔진이 고장나면서 그럴 수가 없었고, 관성으로 계속 멀어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이다. 운 좋게 알 수 없는 행성에 추락한 것 같은데, 어떻게 왔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선정우 소령은 우선 전투비행기의 전원을 켜보았다. 계기판 부분 부분이 켜지면서 전원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추락한 행성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레이더를 켰다. 통신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인공위성과 통신하기에는 너무 먼 곳으로 왔는지 위치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레이더에는 이상이 없어 보인다. 지금으로써는 추락한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레이더에는 구름 같은 것만 잡힐 뿐 비행체로 의심할만한 물체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선정우 소령은 자신을 구조하러 올 수 있게 신호를 내보내도록 설정해 놓았다. 이번에는 불시착한 행성의 중력과 대기를 분석하는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다행히 분석시스템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중력은 지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 행성에 기체층이 있다는 것이다. 대기는 질소가 대부분이고 산소, 이산화탄소, 메탄으로 구성 돼 있다. 또한 일산화탄소, 황 산화물, 철, 망간, 니켈, 납, 카드뮴 같은 물질도 꽤 많은 양이 포함 돼 있다. 선정우 소령은 산소가 충분하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공기정화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공기정화 시스템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한 자세로 긴 시간 앉아있어서 그런지 엉덩이가 저리고 허리가 불편하다.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는 없지만 자세를 조금이라도 고쳐 앉아보려고 양팔을 팔걸이에 지지해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선정우 소령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몸을 억지로 들어올리면서 허벅지를 찌르고 있는 날카로운 부분이 조금 더 깊게 환부를 파고들어갔다. 선정우 소령은 고개를 위로 들어 고통을 참아보려 하지만 통증이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구조대가 오기까지 3일에서 5일은 걸릴 것이다. 그 동안 이 한 자세로만 앉아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막막하다.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다리의 상처가 얼마나 더 악화될지도 걱정이다. 더군다나 구조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다리를 덮고 있는 기계를 절단하고 치우는 일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조금 지나고 나니 극심한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견디기 힘든 통증이 남아있다. 선정우 소령은 오른쪽으로 몸을 구부려 조정석 오른편 아래에 설치돼 있는 비상용 구급함을 열었다. 구급함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려 최대한 몸을 구부리고 팔을 뻗었다. 이 와중에 다시 왼쪽 허벅지가 움직여지면서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으아아아아!” 다시 비명을 지른다.
통증을 참아가며 구급함 안에 있는 물건을 힘들게 꺼내서 조정석 앞에 놓았다. 구급함 안에는 전투식량 세 끼, 작은 생수 다섯 통, 마약성 진통제 주사 키트 세 개, 압박붕대, 반창고, 가위 그리고 해열제, 진통제, 소화제 같은 비상 약이 들어있다. 우선 마약성 진통제 키트 하나를 뜯어서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왼쪽 허벅지에 찔렀다. 진통제가 왼쪽 허벅지 안으로 투여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허벅지 통증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환부 주변에 감각이 없어졌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 진통제 주사를 너무 빨리 소모하면 안 된다. 통증이 다시 시작되면 경구용 진통제를 복용하면서 버텨보고 주사는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진통제 주사는 하루에 한 대만 맞기로 정했다. 허벅지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그나마 좀 살 것 같다. 선정우 소령은 구급함에서 꺼낸 물품을 유심히 본다. 식량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물은 충분하기 때문에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차피 5일 안에 구조대가 오지 않으면 자신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물은 상황에 따라 하루에 반 통에서 한 통까지 먹기로 한다. 문제는 음식이다. 세 끼 분량 밖에 없는 전투식량을 어떻게 나누어 먹을 지가 고민이다. 구조되기까지 최대 5일로 잡으면 세끼 식량을 4일 동안 나눠 먹는 것이 최선일 듯 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첫 날 한 끼 분량을 세 번에 나눠 먹고, 나머지 3일 동안에 두 끼 분량을 여섯 번에 나눠서 먹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먹으면 구조 될 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어차피 5일이 넘어가면 이 넓은 우주에서 나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5일이 지난 후에 음식이 있어봐야 고통만 길어진다. 만의 하나 5일이 지나고 구조대가 와도 5일 이후는 안 먹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글피까지 전투식량을 나눠서 먹는 게 최선이다.”
버틸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구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가도 만약 너무 멀리 왔다면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갑자기 허기가 심하게 진다. 일단 첫 끼를 먹기로 하고 전투식량을 뜯었다. 안에는 비스킷, 쿠키, 에너지바, 견과류, 쵸코렛, 커피가 들어있다. 이 한 끼분량을 세 번에 나눠 먹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3분의 1씩 먹었다. 선정우 소령은 평소 전투식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 맛있게 느껴졌다.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러면 버티지 못한다는 생각에 참았다. 생수병을 따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물이 달게 느껴진다. 다시 입안 가득 물 한 모금을 마셨고 삼키지 않고 입안에 담아 둔다. 커피가 담겨있는 포장지를 뜯은 다음 생수 뚜껑에다 커피 가루를 담는다. 뚜껑에 두 번 나누어 담으면 3분의 1정도가 될 거 같다. 커피를 생수 뚜껑에 담아서 입에 두 번 털어 넣었다. 입 안에서 물과 커피를 마구 섞는다. 체온 때문인지 의외로 커피가 물에 잘 녹는다. 극한상황에 처한 기분 탓인지 커피 맛도 제대로 느껴졌다. 선정우 소령은 아껴가면서 커피를 조금씩 삼켰다. 해가지기 시작한다. 내일 해질 무렵까지 남아있는 첫 번째 전투식량을 두 번에 나누어 먹으면 될 것 같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뿌옇게 먼지가 쌓인 우주전투기 앞 유리 너머로 붉은 빛이 들어온다. 앞 유리에 가득 쌓인 먼지 때문에 밖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고 가끔 바람이 불면 모래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막 비슷한 곳에 떨어진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추락할 때 앞 유리가 깨지지 않고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 것이 신기하다. 더군다나 우주전투기가 격추되고 엔진까지 고장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우주 미아가 되지 않고 주변 행성에 추락하게 된 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거기다가 목숨까지 건졌으니 아주 운이 좋았다. 해가 지니 날씨가 조금 쌀쌀해진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서 우주전투기의 전원을 껐다. 동이 트면 다시 전원을 켜 구조 신호를 우주로 보내기로 한다. 전원을 끄니 가동 중이던 공기 정화 시스템도 꺼졌다.
선정우 소령이 혼잣말을 한다. “이 행성은 지구랑 많이 비슷한 거 같네. 중력도 그렇고 대기가 있는 것도 그렇고 또 적당한 거리에 항성이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 이렇게 기체층이 있는 행성을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발견하기 어려운데.. 그러고 보니 기온도 비슷하네. 우연히 추락한 행성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라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산소가 이렇게 많다는 건 이 행성 어딘가에는 적어도 물도 있고 식물이나 광합성을 하는 플랑크톤 같은 것도 있다는 증거 아닌가? 질소랑 이산화탄소까지 있는 걸 보면 식물이 충분히 자랄 수 있는 환경 같은데? 음.. 뭐.. 내가 과학자는 아니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 어쨌든 지구랑 매우 비슷한 행성인 건 분명하네.”
해가 완전히 졌다. 우주전투기가 미사일에 격추 당했던 당시 전투 상황을 떠올려 본다. 선정우 소령은 가장 선두에서 에리스족 전투기를 공격하고 있었고 교전이 시작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격추당했다. 비행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후미가 적군에게 노출되기는 했지만, 미사일이 날아온 방향이나 격추된 부분을 미루어 볼 때 아군 미사일에 격추 당한 것이 분명하다. 기억이 맞는다면 격추 당시 에리스족 우주전투기들이 있던 방향에서 선정우 소령 우주전투기를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은 없었다. 아군의 우주전투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건 시스템 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주전투기 캐리어에서 자신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분명히 누군가 아군 보호시스템을 해지하고 일부러 격추시킨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당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선정우 소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자신에게 미사일을 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늦게까지 에리스족과의 교전 상황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날이 밝았다. 선정우 소령은 눈을 뜨자마자 구조 신호를 보내기 위해 레이더를 켰다. 공기정화기도 가동시킨다. 선정우 소령은 밤새 깊이 자지 못하고 선잠을 잤다. 정말 이상한 것이 밤의 길이도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밤 동안 꽤 쌀쌀했지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계속 한 자세로 조정석에만 앉아 있으니 몸이 불편해서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배겨 잠이 잠시 들었다가도 금방 깨기를 반복했다. 잠깐이라도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싶으나 허벅지가 끼어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한 자세로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있다 보면 정신이 이상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있었으나, 지금은 구조대가 빨리 오는 것이 간절해졌다. 일단 식사를 하기로 한다. 어제 먹다 남은 전투식량에서 3분의 1을 또 먹었다.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커피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양팔, 어깨, 허리 스트레칭을 한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허벅지 말고 크게 다친 데가 없는 것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손을 팔걸이에 대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본다. 몸을 움직이니 허벅지가 또 아프다. 하지만 어제 맞은 진통제 덕분인지 통증이 아주 심하지는 않다. 몸을 들고 있으니 엉덩이와 다리에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되는 느낌이다. 몸을 내려 놓았다. 밤새 허벅지 통증에서 자유로웠지만,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 약효가 떨어져서 그런지 서서히 통증이 다시 올라온다. 진통제 주사 효과가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지속되는 것 같다. 진통제 주사를 맞으려면 해지는 시간까지 버텨야 한다. 경구용 진통제 두 알을 물과 함께 먹었다. 선정우 소령은 어젯밤 잠에서 여러 번 깼다. 그때마다 누가 미사일로 격추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계속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짐작 가는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시스템 고장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걸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매우 낮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복잡하다. 실제로 아군의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거였다면, 그 누군가는 지금 자신을 구조하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지났고 모레까지 오지 않으면 구조될 가능성 매우 낮아지는데.. 글피가 지나서도 오지 않는다면 구조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이렇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 선정우 소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오는 분명히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 함께 하기로 맹세한 친구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로 했다. 태오를 믿자. 태오만큼은 반드시 나를 구하러 온다.’
선정우 소령과 심태오 대위는 우주사관학교 동기이다. 당시 두 사람은 사관생도 중 가장 촉망 받는 미래 우주전투비행사였다. 둘은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선의의 경쟁자임과 동시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이다. 또한 같은 전투비행단에서 근무를 했고 엄청난 경쟁을 뚫고 지구우주연합군에도 함께 선발 됐다. 디스코르디아 행성과의 오랜 전쟁에 참여하면서 두 사람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기도 했고, 심태오 대위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 선정우 소령이 가까스로 구해준 적도 있었다. 선정우 소령은 이처럼 즐거웠던 시절, 힘든 순간을 함께 보낸 심태오 대위와 자신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심태오 대위는 어떻게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거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이 전시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을 고려해 보면 심태오 대위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하러 오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가 나를 찾고 싶어하겠지만, 지금은 한창 전쟁 중이라 쉽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아니야, 필사적으로 나를 찾고 있을 거고 반드시 구하러 올 거다. 음.. 태오의 마음은 그래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전쟁이 길어지면서 모두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상황이다. 태오도 예외는 아닐 텐데.. 더군다나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태오 입장에서 나를 구하러 올 심리적 여유가 있을까? 아아아, 모르겠다. 아니야 그 동안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선정우 소령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점점 더 초조해진다. 낯선 행성에 고립되어 있는데다가 몸까지 전혀 움직일 수 없어 자신의 앞날을 머릿속으로 밖에 그릴 수 없다 보니 심리상태가 짧은 시간 안에도 양극단으로 오고 가고를 반복한다. 금방 구조되는 긍정적인 상상을 끝없이 펼치다가도 갑자기 불길한 감정에 휩싸여 구조될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긍정적인 생각은 불안한 예감을 지워 보려는 노력에 불과할 뿐 사실은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 짓눌려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선정우 소령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고 몸을 심하게 흔들어 봐도 허벅지에 극심한 통증만 또다시 몰려올 뿐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는다. 허벅지 통증이 심하지만 아직 주사를 맞을 수 없다. 해질 때까지 버텨야 한다. 선정우 소령은 서둘러 진통제 두 알을 먹었다.
‘분명 태오가 내일이면 올 거야. 늦어도 모레까지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자.’
억지로 마음을 추슬러보려고 애쓴다.
“태오가 분명히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선정우 소령은 주문을 외우듯 계속 작은 소리로 말한다. 태오가 올 거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자기암시 효과인지 마음이 조금 안정되고 불안감도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감고 과거에 있었던 좋은 기억만을 떠올려보려 한다. 하지만 좋았던 기억보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늘 경쟁에서 이기고 남보다 앞서 가는 삶을 살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었고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선정우 소령은 가장 친한 친구 태오와의 경쟁에서도 항상 앞섰다. 그 동안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굳이 친구인 태오에게까지 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후회된다.
‘그 동안 너무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았었네. 여기서 구출되면 좀 더 주위를 돌아보면서 살아야겠다. 나를 구하러 올 태오를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경쟁 상대로만 여겼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자. 어쩔 때는 저주는 게 이기는 걸 수도 있다. 태오한테만큼은 양보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내가 모든 부분에서 태오를 앞서는 건 아닌데.. 태오는 내가 유일하게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다.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태오한테는 있잖아. 태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태오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처음 소개시켜 주던 날,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다. 그날 세아씨,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는데...’
선정우 소령은 태오의 아내를 생각하니 갑자기 질투심이 치솟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아. 우리는 친구잖아. 태오는 나를 구하러 올 사람이야. 늦어도 모레까지는 올 거니까 그때까지 버텨보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하고 기온도 내려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낮과 밤의 길이가 지구랑 비슷한 게 신기하다. 선정우 소령은 남아있는 첫 번째 식량을 다 먹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전투식량은 사흘에 나눠서 먹어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대가 모레까지 오지 않으면 어차피 자신은 죽음 목숨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이 두 끼 분량을 굳이 3일 동안 먹을 필요가 없다. 이틀 동안 남은 두 끼 분량을 먹기로 계획을 바꿨다. 방금 첫 번째 전투식량의 남은 3분의 1을 먹었지만, 당연히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양은 아니다. 여전히 배가 심하게 고프다. 두 번째 전투식량의 3분의 1을 지금 먹고 내일 두 번만 먹을지 고민한다. 충동적으로 계획을 자꾸 바꾸는 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더 먹지 않고 그냥 참기로 했다. 선정우 소령은 저녁을 먹자마자 진통제 주사를 왼쪽 다리에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다리가 무감각해졌다. 양팔을 이용해 가볍게 몸을 들었다 놓기도 하고 좌우로 돌려 보기도 한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제는 잠을 설쳤기 때문에 오늘은 푹 자야만 한다. 음식 섭취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잠이라도 충분히 자야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선정우 소령은 우주전투기의 전원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진다. 바람소리도 더 매서워지고 우주전투기에 모래 부딪히는 소리가 심하게 들린다. 우주전투기는 바람에 날아갈 것같이 흔들린다. 거센 모래바람 소리와 심하게 흔들리는 우주전투기가 선정우 소령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하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저 바람이 멈추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모래 폭풍은 마치 우주전투기를 집어 삼키려는 듯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됐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우주전투기는 흔들리다 못해 몸체가 조금 들리기까지 한다. 선정우 소령은 바람이 멈추지 않고 더 강해지면 우주전투기가 바람에 날아가 나뒹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부서진 기계에 끼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왼쪽 다리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게 뻔하다. 운 좋게 목숨은 구하더라도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부상을 당할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 극한의 공포심이 몰려왔고 선정우 소령은 조정석 팔걸이를 더 힘껏 부여잡았다. 이후로도 오랜 시간 동안 강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었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모래폭풍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다. 거짓말처럼 바람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날아갈 듯 바람에 한 없이 흔들리던 우주전투기도 멈추었고, 마치 우주전투기를 집어 삼키려는 거대한 괴물의 울부짖음 같던 거센 모래바람 소리도 일시에 사라졌다. 태초부터 이 행성에는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어떠한 매질도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해졌다. 거센 바람이 멈추자 일순간에 긴장이 풀리면서 선정우 소령은 깊은 잠에 빠졌다.

 

2 구조
아침이 왔다. 모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앞 유리 너머로 희미한 빛이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온다. 심한 모래 폭풍으로 밤 늦게까지 잠들 수 없었던 선정우 소령은 날이 밝은지가 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고 있다.
“삑삑삑삑 문이 열립니다. 철컹 위이이잉 위이이잉 철컹.” 조정석 뒤쪽에 있는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자고 있는 선정우 소령은 우주전투기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들은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 같은데.. 벌써 구하러 온 건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꿈에서라도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 선정우 소령은 자면서 생각했다.

심태오 대위는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쓰고 있는 헬멧을 벗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바닥에 헬멧을 내려놓은 후 총구를 앞으로 겨누고 조심스럽게 조정석으로 접근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조정석에 앉아있는 선정우 대령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구고 있는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죽었겠지? 우주에서 추락했는데 살았을 리가 없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조정석 바로 뒤로 와서 숨을 죽이고 총구 끝으로 선정우 대령의 어깨를 툭 건드려 본다.
“으으음… 아아.” 총구로 건드니 잠에서 덜 깬 선정우 대령이 몸을 뒤척이면서 자세를 바꾼다.
뒤척이는 모습을 본 심태오 대위는 화들짝 놀라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살아 있잖아. 격추 당한지 시간도 꽤 흘렀고 우주에서 추락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운도 좋네.’
다시 총구로 선정우 소령의 어깨를 건드린다. “정우야, 정우야!”
자고 있던 선정우 소령은 크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것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보니 허벅지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아아!”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허벅지를 감싸 안으며 고통스러워 한다.
심태오 대위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선정우 소령을 빤히 쳐다보고 있고, 괴로워하던 선정우 소령은 뒤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심태오 대위를 발견한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심태오 대위를 보면서 말한다. “태오야! 태오 맞지? 이거 꿈 아니지?”
“그래 나 태오 맞아. 꿈 아니야. 그런데 정우야, 어떻게 된 거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선정우 소령 얼굴에는 고통을 참는 모습과 환희에 찬 표정이 섞여있다. “태오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너는 나를 찾아 올 줄 알았다고. 진짜 고마워. 여기까지 나를 구하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 선정우 소령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간다. “우주전투기가 이곳에 추락하면서 조정석 왼쪽 측면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면서 허벅지가 완전히 여기 끼었어. 지금 전혀 움직일 수가 없고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상태야. 3일째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중이야. 절단기로 여기를 다 잘라내야 할 거 같아. 빨리 구조대 좀 불러줘. 태오야, 나는 네가 날 구하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선정우 대위는 진통제 주사를 더 이상 아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진통제를 허벅지에 놓았다. 서서히 왼쪽 허벅지가 무감각해진다.
선정우 소령은 잠시 심태오 대위를 빤히 쳐다 본다. “그런데 태오야, 왜 나한테 총을 겨누고 있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우, 너.. 격추 당했는데도 운 좋게 살아있네.”
선정우 소령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마치 내가 죽기를 바랬던 사람처럼.. 나.. 지금 위급한 상황이야. 3일째 다리가 끼어있고 지금 출혈도 심하단 말이야. 태오야, 빨리 구조대 부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심태오 대위는 계속 선정우 소령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의문에 찬 표정으로 선정우 소령이 묻는다. “혹.. 시.. 네가 나 격추시킨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정우 소령이 먼저 어색한 적막을 깨면서 말을 꺼낸다. “에이.. 태오야, 설마 아.. 니.. 지..? 아닌 거 맞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네가 나한테 미사일을 쐈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한참 말이 없던 심태오 대위는 선정우 소령에게 총구를 더 가까이 갖다 댄다. “정우, 너 쥐새끼 맞지?” 심태오 대위가 소리를 지른다. “너 쥐새끼 맞지? 빨리 대답해.”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쥐새끼라니. 누가.. 쥐새끼라는 거야?” 선정우 소령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심태오 대위는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말한다. “너 에리스족 첩자 맞지? 네가 우리 쪽 정보 다 넘겨주는 쥐새끼 맞잖아.”
“태오야, 나 아니야. 우리 쪽에 첩자가 있어? 나는 금시초문이야. 그래서 나한테 미사일을 쏜 거야?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난 진짜 아니야. 태오야,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왜 그래?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그럼 알고 말고 내가 너를 잘 알지. 겉으로는 세상 정의로운 척하면서 뒤에서 온갖 구린 짓 혼자 다 하잖아. 네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너라는 정황은 넘쳐나거든.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악을 쓰면서 말하던 심태오 대위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다. “너, 도대체 얼마나 받아 처먹은 거야? 온갖 정보를 에리스족한테 넘기고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고?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안 봐도 뻔하지. 혼자서 많이 처먹었겠지.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와 달리 매우 차분한 태도로 말한다. “태오야, 화부터 내지 말고 우리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화를 낸다고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 차근차근 얘기하면서 풀어 보자.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정황이라니,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첩자라는 정황이 넘쳐난다니,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태오야, 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진짜 아니야.” 선정우 소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간다. “너 진짜 나 죽이려는 거야? 내가 에리스 족 스파이라서? 좋아. 그렇다고 치자. 내가 스파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더더욱 나를 생포해야지, 왜 죽이려고 하는 거야?”
심태오 대위는 조금 더 총구를 선정우 소령 머리 가까이 가져가면서 말한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널 살려주면 쥐새끼처럼 또 빠져나갈게 뻔한데 살려두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리고 너는 내 인생에서 항상 걸림돌이었어.”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네 인생에 걸림돌이라니..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나보다 항상 앞서 나갔고 나는 항상 네 뒤에 처져있었단 말이야. 우주사관학교, 전투비행단, 지구우주연합군. 어디에서든 너는 나보다 뛰어났다고. 나는 그런 너를 언제나 증오했어. 너만 없었으면 내가 최고가 될 수 있었단 말이야!” 심태오 대위는 또다시 악을 썼다.
“태오야, 왜 그래? 나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우리는 좋은 친구잖아. 나는 너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누가 누구의 걸림돌이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언제나 널 응원했고 우리는 항상 함께 잘 해왔잖아.”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와 달리 차분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심태오 대위 얼굴은 광기에 휩싸인 표정으로 변해간다. “친구? 좋은 친구라고? 맞아. 너는 친구이기도 하면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해. 네가 친구로써 필요할 때도 있었지. 그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이제는 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 줘야겠어.”
선정우 소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태오야, 우리 차근차근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전쟁을 하고 있잖아. 그래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이성적이지 못하고 자꾸 이상한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아. 너나 나나 마찬가지일 거야. 나는 전투를 하다 보면 내가 가끔 비이성적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논리적으로 사고하지도 못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전쟁에 오래 참전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 같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지금 그런 상황인 거 같아. 태오야, 그럴수록 우리 침착해야 해. 나한테 겨누고 있는 총 잠시 내려놓고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원한 친구잖아. 우리는 죽을 고비도 함께 넘긴 사이야. 그리고 잘 생각해 봐. 너한테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줘도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어. 너한테는 세아씨가 있잖아. 세아씨를 생각해서도 이러면 안 돼.”
“선정우! 갑자기 여기서 세아 얘기를 왜 하는 거지? 세아를 생각해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야? 너 이 새끼, 예전부터 세아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어.” 심태오 대위는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지금 세아 얘기를 왜 하는 거냐고!”
“태오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세아씨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니.. 내 말 뜻은 네가 앞으로 세아씨랑 함께 할 날이 많고 얼마 전 태어난 애기를 생각해서라도..”
“닥쳐. 이 쥐새끼야. 죽어, 그냥 죽으란 말이야!!”.
“탕, 탕” 우주전투기 안에 두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심태오 대위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선정우 대위는 총소리에 놀라 조정석 등받이 아래로 몸을 바짝 숨겼다. 총성이 사라지자마자 어디선가 여자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린다.
“아, 진짜.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미쳤나? 왜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그 여자는 쓰고 있는 헬멧을 벗더니 총에 맞아 쓰러진 심태오 대위 머리를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어? 아냐고?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내가 너 죽이려고 지구우주연합군에 지원했어. 내가 복수하려고.. 너 때문에 내 군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다고!! 너는 죽어도 마땅해. 내가 널 죽이는 날만 기다렸단 말이야!!”
다시 한번 발로 심태오 대위 가슴을 걷어찬다. 선정우 소령은 등받이 옆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다. 심태오 대위를 쏜 사람은 이미소 중위이다. 선정우 소령은 이미소 중위가 심태오 대위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둘이 무슨 관계이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미소 중위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우주 비행사이다. 우주전투기 비행 능력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전에 투입되면 언제나 기대 이상의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줬다. 전시 때 전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소 성격은 온화하고 다정감한 편이며 주변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매우 높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다 보니 따르는 후배가 많아 리더십도 탁월하다. 군인으로써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이미소 중위는 모범적인 우주전투 비행사 모습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보고 있는 이미소 중위의 모습은 선정우 소령이 알고 있던 이미소 중위가 전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마치 괴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이미소 중위는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내가 여기 오다가 에리스족, 그 외계인 놈 시체를 하나 발견했거든. 내가 너랑 그 놈이랑 엮어서 너를 쥐새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너를 첩자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너 같은 쓰레기는 명예롭게 죽으면 안돼. 내가 너를 첩자로 만들어서 네 명예를 제대로 더럽혀 줄 거라고.” 이미소 중위는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죽은 심태오 대위를 향해 악을 쓴다. “알아 들었어?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알아 들었냐고!”
소리를 지르던 이미소 중위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갑자기 우주전투기 안을 말없이 이러 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하지만 호흡이 여전히 거칠어 보이는 게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이때 선정우 소령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 기.. 이.. 미소 중위.”
이미소 중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조정석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말이 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고, 놀란 이미소 중위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기.. 이미소 중위. 내가 지금 허벅지가 끼여서 움직일 수가 없어. 출혈도 심하고 얼른 구조대를 불러야 할 거 같아.”
이미소 중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선정우 소령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 소령님. 아.. 안녕하세요? 살아계셨네요?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주에서 추락했는데 살아계시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괘… 괜찮으신 거죠?”
“아 그래. 괜찮기도 하고 안녕도 한데.. 지금 인사할 상황은 아닌 거 같아. 구조대를 얼른 불러줘. 심태오 대위랑 이미소 중위가 여기 온 걸 보면 우리 병력이 이 행성 근처에 있을 거잖아.”
이미소 중위는 선정우 소령 다리를 유심히 살펴본다. “어머, 다리가 여기 완전히 끼었네요. 상처도 깊고 피도 많이 흘린 것 같네요. 많이 아프실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응. 아직까지는 괜찮아. 이중위 고마워. 그런데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얼른 구조대를 불러줘.”
이미소 중위가 선정우 소령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말한다. “그런데 소령님, 구조대 부르기 전에요. 물어볼게 있는데.. 혹시 다 보고 들으셨죠?”
“뭐.. 뭐를?”
“알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한 짓 다 보셨잖아요. 제가 한 말 다 들으셨고요.”
“이중위,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얼른 구조대부터 불러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심태오 죽이는 거 봤잖아요. 심태오 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저한테 소령님이 쥐새끼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는 안 믿었었는데. 지금 못 본 척 하는 거 보니까 쥐새끼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기력은 좀 부족하신 거 같은데요.” 여전히 이미소 중위는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다. “다 봤죠? 그렇죠?”
“뭐.. 뭐를? 나는 허벅지가 다쳐서 기절..”
이미소 중위가 선정우 소령 머리에 총을 겨눈다. “저는 심태오 저 쓰레기 같은 놈이 미쳐서 혼자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소령님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였네요. 이 우주전투기에 들어오자마자 심태오를 바로 쏴버리는 바람에 상황 파악을 전혀 못했었네요. 멍청하게도.. 다 본 거 맞죠?”
선정우 소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마… 맞아. 그런데 내가 못 본 걸로 할게. 나도 이미소 중위와 함께 심태오 대위를 에리스족 사체랑 엮어서 첩자로 만드는 거에 동참할게. 좀 전에 있었던 일은 절대 함구할 테니 걱정하지마.”
“맞네. 다 본거 맞네요. 소령님, 제가 했던 얘기까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그러면서 몰랐다고 한 거에요?”
“미.. 미안해. 그냥 못 본 척 하는 게 이미소 중위를 도와주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같이 돌아가자. 그러면 이미소 중위는 나도 구하고 첩자도 잡은 영웅이 될 거야. 훈장도 받고 특진도 할거라고.. 어때?”
“오! 소령님,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렇지? 어서 구조대를 불러줘.” 선정우 소령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소령님, 저는 여기 소령님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심태오 저 쓰레기를 죽이러 온 거거든요. 그리고 만약 소령님을 구해서 돌아간다고 하면 소령님이 절 지켜줄 거라는 걸 어떻게 믿죠? 소령님이 에리스족의 스파이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세상에 쥐새끼를 믿는 바보가 있을까요?”
“이.. 미.. 소 중위, 무슨 소리야? 나 잘 알잖아. 나 첩자 아니야. 스파이 아니라고. 누구보다도 이미소 중위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왜 그래?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나만 믿어!”
“한 배를 탔다니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말이 안되잖아요. 소령님이 살아서 무사히 본부로 돌아간다면 제가 심태오를 죽인 걸 못 본 척 할 이유가 없잖아요. 소령님은 저를 감싸줄 이유가 전혀 없다고요. 제가 소령님이라도 돌아가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제 입장에서는 그냥 소령님이 죽어주는 게 가장 깔끔해요. 그런데 막상 소령님을 죽이려고 하니 마음이 좀 안 좋기는 하네요. 심태오랑은 다르게 군 생활하면서 소령님께는 고마웠던 일이 참 많았었거든요.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저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네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이중위, 제발 이러지마. 살려만 주면 정말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할게. 제발 한번만 믿어줘.”
“그럼 소령님, 안녕히 가세요.”
“탕! 탕!” 총성 두 방이 울려 퍼졌다.
이미소 중위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선정우 소령은 이번에도 등받이 밑으로 몸을 숙였다. 총성이 사라지고 나니 어디선가 다소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 났네. 똑 같은 인간들끼리. 으흐흐흐흐흐.”
키가 매우 큰 에리스 족 외계인이 허리를 숙이고 선정우 소령에게 다가온다. 에리스족은 키가 3미터는 족히 돼 보이고 매우 가는 몸통과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가늘어 보이는 몸과 팔다리는 가까이서 보면 매우 단단한 근육질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몸에 털이 하나도 없고 피부는 녹색빛이 섞인 짙은 회색이다. 얼굴은 타원형에 매우 작으며 눈은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코는 매우 납작하다. 인간과 달리 입 주위에 입술이 없고 겉으로 드러난 앞니는 송곳니 모양으로 모두 뾰족하다. 척추관절이 많은지 좁은 공간에서 허리를 매우 유연하게 움직인다. 인간의 관점에서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다. 인간 언어를 번역하는 장치를 사용해 말을 하고 있다. 번역 장치에서 나오는 음성, 말투, 괴상한 웃음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듣기에 불쾌하다.
“아이디 요원, 왜 이제 오는 거야? 진짜로 죽을 뻔 했잖아.” 선정우 소령이 에리스 족 외계인을 보자마자 말했다.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온 외계인은 디스코르디아 행성의 우주정보원 소속 아이디 요원이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선정우 소령,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정보원을 죽게 놔둘 수 없다. 당신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죽게 내버려두겠는가?”
“무슨 소리야! 두 번이나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었단 말이야.”
“으흐흐흐흐. 우리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이 행성으로 추락하도록 유도한 것도, 그리고 추락할 때 죽지 않게 당신을 살린 것도 다 우리가 한 거다.”
아이디 요원 뒤로 에리스족 외계인 두 명이 절삭 장비를 들고 들어왔다. 레이저 절삭기로 선정우 소령의 허벅지를 짓누르고 있는 기계를 잘라내기 시작한다.
아이디 요원이 선정우 소령에게 말한다. “인간의 시간으로 30분정도 걸릴 거다. 조금만 참아라.”
“알았다. 도와주러 와줘서 고맙다.”
선정우 소령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계를 제거하는 에리스족 외계인을 보고 있다.
“으흐흐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더 큰 부상 당하지 않게 조심해서 제거할 거다.” 아이디 요원이 선정우 소령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선정우 소령, 우리가 당신을 왜 정보원으로 선택한 줄 아나?”
선정우 소령은 아이디 요원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나를 정보원으로 선택한 이유? 아니 모른다. 이유가 뭔가?”
“우리가 선택한 이유는 당신은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진짜 내면의 모습을 철저하게 숨기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극단적으로 반대로 하는 전형적인 부류이다. 당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선하디 선한 가면을 쓰고 뒤에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길 바란다.”
“…….….”  선정우 소령은 아이디 요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느꼈겠지만 심태오 대위 같은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 물증뿐만 아니라 어떠한 심증도 남겨서는 안 된다.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영특함과 차가움을 지녔다. 당신은 내가 본 최고의 스파이이다.”
두 명의 에리스족 외계인은 선정우 소령 다리를 누르고 있는 기계를 완전히 제거한 후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갔다. 선정우 소령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작업이 끝났다. 기계가 제거되자마자 선정우 소령은 살이 깊게 패여 대퇴골이 보이는 환부를 압박 붕대로 묶었다.
아이디 요원이 바닥에 있는 심태오 대위의 총을 들고 말한다. “등받이 뒤로 몸을 숙여라.”
아이디 요원 말대로 선정우 소령은 몸을 숙였다. 그러자 심태오 대위와 이미소 중위의 총을 우주전투기 뒤쪽을 향해 번갈아 여러 발 발사했다. 귀 안을 깊숙이 찌르는 듯한 총성이 우주전투기 안에 퍼진다. 아이디 요원은 들고 있던 총을 바닥에 던졌다. 이번에는 자신의 총으로 전투기 앞쪽을 향해 여러 발 쐈다.
“우주전투기 밖에 나가서도 총을 쏴서 우리와 인간이 총격전한 흔적을 만들어 놓겠다. 밖에 있는 우리 종족의 시체 한 구도 그대로 두고 가겠다. 우리가 당신을 구해준 걸 들키지 않도록 총격전한 상황을 가지고 스토리를 잘 만들도록 해라. 그런 쪽으로 전문가이지 않나?” 아이디 요원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절대 들킬 일 없을 테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곧 지구우주연합군 병력이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디 요원에게 선정우 소령이 묻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추락한 행성이 어디인가?”
“여기는 지구이다.”
“뭐? 지구라고? 그건 말이 안 된다. 교전하던 위치나 내가 격추당해 튕겨져 나간 방향을 보면 여기는 지구일 수가 없다. 만약 지구라면 나는 바로 구조 됐을 것이다.”
아이디 요원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말한다. “으흐흐흐흐흐. 여기는 지금 인간이 살고 있는 두 번째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먼 과거에 살았던 첫 번째 지구이다. 인간이 최초로 살았던 바로 그 지구란 말이다. 당신은 첫 번째 지구의 고비 사막이라는 곳에 추락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에 추락시켰다. 그럼 지구우주연합군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얼른 떠나겠다.”
“잠시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출입문 밖으로 나가려던 아이디 요원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부탁인가?”
“심태오 대위를 당신들과 내통하는 첩자로 엮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주기를 바란다.”
“알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다.”
“무엇이냐?”
“심태오 대위의 아내를 납치해주기를 부탁한다.”
“그것도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다음에 접선할 시간과 장소는 일주일 후에 알려주겠다. 새로운 임무가 나갈 것이다.”
“알았다.” 선정우 소령이 대답했다.
“그리고 명심해라. 인간의 이성과 이기심으로는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로 세 번째 지구 후보 행성을 차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없다.”
“…………” 선정우 소령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디 요원은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가면서 혼잣말을 한다. “쥐새끼 같은 놈. 역시 우리가 제대로 봤어. 으흐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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