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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상하고 아름다운 꿈

2021.06.25 05:0106.25

“이무기야, 이무기야.”

 

아기 선녀가 버들가지를 들고 쭈그리고 앉아 강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강물이 미동도 없자, 손에 든 가지를 흔들며 칭얼댔다.

 

“이무기야아! 나와아아!”

 

그래도 강물에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기 선녀는 강가에 털썩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그때, 물결이 출렁이더니 꾸물꾸물, 무언가가 서서히 솟아오른다.

 

“이무기야!”

 

아기 선녀가 벌떡 일어나 양팔을 마구 흔든다.

 

“바보,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까맣고 둥근 이무기의 머리는 햇빛을 받아 빛났다. 선녀는 버드나무 가지로 이무기의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푸르르, 이무기는 상을 찌푸리고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흔든다. 선녀는 그 모습이 더욱 재미나서, 가지로 이무기의 이곳저곳을 간지럽힌다. 푸릉, 이번엔 정말 센 콧김을 내쉰 이무기가 나뭇가지를 입에 물더니 저 멀리 휙 던져버린다. 가지는 아주 멀리멀리 날아갔다.

 

“뭐야, 내 가지... 너, 그렇게 심보를 밉게 쓰면 용이 못 된다?”

 

그 말에 이무기가 째릿, 선녀를 흘겨봤다.

 

“너, 말할 줄 알지? 진화 선녀님이, 너는 말을 할 줄 아는 이무기랬어.”

 

이무기는 조용히 아기 선녀를 쳐다봤다. 선녀는 손을 뻗어 이무기의 비늘을 쓰다듬었다.

 

“뭐, 말을 안 해도 괜찮아. 여기 놀러 오면 아무도 나를 못 보는데, 너는 내가 부르면 나와주잖아.”

 

이무기는 입으로 꿍, 소리를 내더니 선녀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너도 나 보면 좋지? 저번에 보니까 고양이들은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하더라. 너도 내가 좋으니까 이러는 것 같아.”

 

선녀는 종알대며 이무기의 입을 만지작거렸다.

 

“나, 이제 가볼래. 금방 헤어져서 슬프지만, 너 봤으니까 됐어. 할 일이 많거든.”

 

그렇게 돌아서다 말고, 고개를 홱 돌리고는 덧붙였다.

 

“참, 오늘 밤엔 화가 나도 구름 들이받지 말아줘! 오늘은 진화 선녀님 생일잔치가 있거든.”

 

그 말을 남기고 뽈뽈 걸어 멀어지는 아기 선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선녀가 점이 되고 나서야 물속으로 돌아가는 이무기였다.

 

 

 

이무기들은 강이나 호수를 하나씩 맡아 그곳을 지켰다. 그리고 터마다 자리 잡은 구름 위에는 선녀들이 살았는데, 이 이무기가 지내는 강 위에는 아기 선녀가 있었다. 아기 선녀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들의 꿈속에 들어가는 일을 했다. 날개옷을 펄럭이며 집마다 찾아가, 오색찬란한 꿈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때로는 꿈 주인의 동무가 됐고, 때로는 강아지가 됐고, 때로는 엄마도 되었다. 꿈 내용은 꿈 주인의 몫이었기 때문에 선녀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날도 아기 선녀는 낮잠을 자는 아이들을 모두 찾아간 후, 구름으로 돌아갔다. 밤이면, 진화 선녀의 생일잔치가 있을 터였다.

 

“진화 선녀님!”

 

아기 선녀는 진화 선녀를 보자마자 반가워 다리에 철썩 달라 붙었다.

 

“너 왔구나,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아기 선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늘도 그 아이 꿈에 들어갔었구나?”

 

“응? 어떻게 알았지요?!”

 

진화는 말없이 아기 선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가 오래 머물러 준다고 해서 꿈 주인이 덜 외로운 게 아니야.”

 

“그치만 그 애는 꿈이 끝나도 계속 겁을 먹고 우는데, 달래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걸 두고 어떻게 금방 돌아와요?”

 

“그건 그렇다만...”

 

강물 위로는 노을이 져가고, 진화와 아기 선녀는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어느덧 하늘이 깜깜해지고 잔치가 시작됐다. 오늘은 진화 선녀의 생일, 그러니까 그가 처음 선녀가 되던 날을 기리는 날이었다. 선녀들은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갔다 오는 길에, 길 잃은 별들에게 입을 맞추고 떠도는 바람을 안아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기뻐서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선녀들의 생일잔치였다. 사람은 듣지 못하는 별과 바람의 노랫소리가 온 하늘 그리고 땅에 가득 찼다. 땅에서는 오직 수염 긴 고양이들과 이무기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 이무기는 몸을 강둑에 기대고 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달빛 아래 들리는 노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어 아기 선녀도 그 노래를 연주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괜시리 웃음이 지어졌다. 그날밤엔 더더욱, 어서 기한을 채우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아기 선녀가 진화 선녀 손을 잡고 강에 왔다.

 

“오늘은 진화 선녀님이랑 같이 꿈에 들어갈 거다!”

 

아기 선녀가 뿌듯하게 말하더니, 이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 내가 부를 때는 한참 만에야 나오더니 진화 선녀님이 부르니까 금방 나오는구나?”

 

이무기는 푸르르, 콧김만 뿜었다.

 

“오랜만이구나.”

 

진화 선녀가 이무기에게 말했다.

 

“너는 이무기로 지내는 동안 도력을 꽤 쌓았으니 천 년이 다 차는 날, 필시 용이 될 수 있을게야.”

 

“선녀님, 이 이무기는 도력이 많이 쌓여서 말도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말을 한 번도 안 해요?”

 

“...제가 하고 싶은 날이 오면 하겠지.”

 

진화 선녀는 너른 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너무 미워 말거라... 저번처럼, 화가 난다고 너무 큰 비를 내리면 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해.”

 

“천 년?! 또다시 천 년은 너무 길다...”

 

아기 선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무기의 주둥이를 쓰다듬었다.

 

“천 년 동안 물을 온통 다스리면서 권세를 실컷 누려놓고, 제 스스로 기회를 걷어차버린 걸.”

 

진화 선녀는 매정하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가자. 시간이 늦겠다...”

 

“선녀님, 같이 가요! 잘 있어, 이무기야!”

 

아기 선녀는 이무기에게 급히 인사를 전하고는 종종 뛰어 진화의 뒤를 쫓아갔다. 둘은 이내 하늘을 날아 저 강 건너 먼 곳으로 향했다.

 

“네가 졸라서 특별히 와줬다만, 내가 같이 왔다고 한들 네 바람대로 그 아이를 도와줄 수는 없어.”

 

“...나도 알아요, 선녀님. 선녀님은 내가 정말 아기인 줄 아시나 봐.”

 

진화는, 볼멘소리를 하는 아기 선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진화와 아기 선녀는 하늘을 훨훨 날아가, 창문을 통해 한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구나.”

 

그때, 아이의 인상이 찌푸려지더니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선녀님, 꿈이 시작되려나 봐요!”

 

둘은 손을 잡고, 잠든 아이의 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안은 무척 춥고 어두웠다. 거기서, 아이는 혼자 밥을 챙겨 먹으려다가 바닥에 쌀을 쏟았다. 깜깜한 꿈속에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엄마가 나를 혼내러 올 거야.’

 

아기 선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금세 아이의 엄마로 변했다. 그리고 꿈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따라, 아이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아이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고 창고로 갔다.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마!”

 

창고 문을 닫으며 아기 선녀, 아니 엄마는 말했다. 꿈속 창고 문은 투명해서 그 너머가 훤히 보였다. 다만, 아이는 바깥을 보지 못할 뿐이었다.

 

“진화 선녀님, 마음이 참 아프지요...?”

 

아기 선녀가 진화에게 귓속말을 했다. 두 선녀는 마음이 무척 슬펐다. 좁은 창고 안에서, 아이는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다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어진 눈물은 어느새 커다란 호수를 이뤘다.

 

“이 아이 마음에는 매일 이렇게 호수가 생겨요.”

 

진화는 슬픈 눈으로 호수를 들여다보았다. 호수 안에는 물고기들이 몇 헤엄치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물고기, 외로움이라는 물고기, 그리고 서러움이라는 물고기였다. 그때 갑자기 꿈속 공간이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제 다음 꿈으로 넘어갈 시간인 모양이었다. 다음 꿈에서는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싸움을 했다. 진화가 엄마가 되고, 아기 선녀가 아빠가 됐다. 아빠가 엄마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엄마는 머리맡을 더듬어 유리병을 깨뜨리더니 그걸 들고 아빠를 위협했다. 둘은 서로를 때리며 싸웠다. 그리고 분에 겨워 아이를 걷어찼다. 아이는 현관문을 열고 도망쳤다. 꿈속 문밖 풍경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그 모습이 꼭, 아이를 놀리는 것 같았다. 아이가 달려간 꽃밭에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 담임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아이는 선생님에게 울며 말했다.

 

“선생님, 엄마 아빠가 서로 죽일 듯이 무섭게 싸우고 저도 맨날 가두고 때려요. 도와주세요.”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선생님은 아이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답했다.

 

“너희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점잖고 훌륭하신 분들인데. 학교에도 자주 찾아와서 나도 만나고 가시는걸. 너는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니?”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어딘가로 걸어갔다. 뒤따라온 진화와 아기 선녀는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눈에서 뚝, 뚝, 아까보다 굵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물은 어느새 또 다른 호수를 이뤘다.

 

 

 

새로 생긴 호수에는 아까 못 보던 물고기가 있었다. 그 물고기는 아주 새빨간 몸을 갖고 있었고, 비늘 대신 한천처럼 몰캉거리는 얇은 막에 싸인 채 호수 안을 빠르고 거칠게 휘젓고 다녔다.

 

“이 물고기는, 화로구나.”

 

호수에는 슬픔보다 깊은 절망이 흐르고 있었다. ‘화’라는 물고기는 그런 호수에서 곧잘 생겨나곤 했다. 차갑게 흐르는 절망 위에, 가시 돋친 연잎들이 떠올랐고 화는 그것을 몸에 감으며 자꾸만 아이의 마음속 호숫가를 부딪쳤다. 진화와 아기 선녀는 그것이 하는 모양을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아 호수는 한없이 깊어져 가고, 물고기들은 사정없이 아이의 마음을 휘저었다.

 

“선녀님, 멈출 줄을 몰라요. 어쩌면 좋죠?”

 

“우리가 저것을 멈추게 할 자격은 없어. 다만... 저대로 놔두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후에, 아주 무서운 녀석으로 변할 텐데 걱정이구나.”

 

진화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더니, 아기 선녀에게 일렀다.

 

“가서, 이무기를 불러오려무나.”

 

“이무기요?”

 

“...그래.”

 

아기 선녀는 동그란 눈으로 진화 선녀를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이 방 창문을 열고 외쳤다.

 

“이무기야! 이리 오려무나!”

 

짧은 혀와 앳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바로 그 소리가 천하를 호령할 듯 크고 위엄 있는 까닭에 천지가 흔들리고 강에 있는 이무기에게도 대번에 이르렀다. 이무기는 아기 선녀의 명에, 강물을 쏜살같이 헤엄쳐 목소리가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이무기야.”

 

아기 선녀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난 이무기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진화 선녀님이, 너를 여기 사는 아이의 꿈속으로 부르셨어.”

 

그러고는 이무기와 함께 아이의 꿈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왔구나.”

 

가만히 뒤돌아선 채, 진화가 이무기를 맞았다.

 

“저기, 마음속 호수가 한도 끝도 없이 깊어지고 있어서 너를 불렀다. 게다가 저 녀석이 멈추지를 않으니...”

 

진화의 손가락 끝엔, 빨간 물고기가 하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무기는 끄르르, 성난 소리와 함께 몸을 떨었다. 이무기도 잘 아는 물고기였다. 구렁이로 살던 때, 동네 사내들의 손에 목이 졸려 죽은 제 짝이 마음에 절로 떠올랐다. 그때 이무기는 마음속 호수에서 저 녀석을 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네가 여전히 사람을 보면 분에 차는 것을 안다. 그것을 다스리지 못해 바깥세상에 또다시 큰비를 내리면, 이번에는 용이 될 기회를 영영 잃을지 몰라.”

 

용이 되지 못했다는 오랜 한이, 이무기의 마음에 사무쳤다.

 

“허나 만약, 네가 이 아이 꿈속에 비를 내리면... 오늘 밤, 저 고기가 멈추고 호수는 넘치지 않아.”

 

이무기는 여전히 분에 차, 비늘 하나하나를 빳빳이 세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래야, 네가 용이 되는 그날까지 바깥세상에 비를 내리지 않을 수 있어. 이제 겨우 삼 일 남지 않았느냐”

 

용, 용이 될 수 있다. 그 말이 이무기의 마음을 설렘으로 울렁이게 했다. 지난 천 년 동안, 그리고 또다시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얼마나 용이 되고 싶었던가. 용이 되어 천지를 날아다니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제 짝을 찾아 이번에는 기필코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엔 구름이 없는데 무슨 수로 비를 내린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이무기는 다시 괴로웠다. 그러자 비늘이 더욱 거칠게 일어섰다.

 

“이무기야...”

 

아기 선녀가 걱정스러운 듯 이무기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선녀가 되면 슬프지 않을 줄 알았더니, 눈을 여기 두어도 저기 두어도 세상은 여전히 슬프구나. ...그치요, 선녀님?”

 

진화는, 말이 없었다.

 

 

 

똑, 똑. 아이의 눈에서는 지칠 줄 모르고 눈물이 떨어지고, 호수는 끝을 잴 수 없이 깊어간다. 색색의 물고기들이 닿을 때마다 호숫가엔 계속해서 상처가 남았다. 그리 말랑해 보이는 물고기들이, 단단한 아이의 마음에 어찌 저런 흔적을 남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한가운데, 가장 힘세고 날렵한 빨간 물고기가 있었다. 이무기는 그것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번번이 놓쳤다. 가만히 지켜보던 진화가 이무기를 막아섰다.

 

“물러서라. 강에서처럼, 네 멋대로 이놈들을 잡아먹을 수 없다. 너는 이 중 무엇도 건드려선 안 돼.”

 

이무기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구름도 없는 이곳에 비나 내리기 위해 자신이 이렇게 불려왔단 말인가? 위엄있는 선녀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구름은 보이지 않고, 비를 내릴 방도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익숙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자꾸자꾸 옛 짝만 떠올랐다.

 

“...비를 내리지 못하겠나보구나.”

 

진화가 말했다.

 

“그럼 별수 없지. 이 아이 마음은 계속 이대로 망가져 갈 테고, 너는 남은 사흘 동안 세상에 비를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네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진화 선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차가워서, 이무기는 그만 눈물이 흘러버렸다.

 

“이무기야, 울지 마...”

 

아기 선녀가 이무기의 목덜미를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진화 선녀님, 괜찮아요. 비가 내리지 않아도 하는 수 없어요. 어차피 이 아이는 내일도 모레도 무섭고 슬픈 일을 겪을 테니까, 그때마다 꿈에서 나를 부르면 내가 곁에 있어 줄 거예요.”

 

진화가 물처럼 고요하고, 그러나 서글픈 눈으로 아기 선녀를 바라봤다.

 

“이 아이는 꿈에서 깨어도 여전히 나쁜 꿈속이겠구나.”

 

“맞아요. 그리고 꿈 바깥에는, 아이가 무서운 일을 당할 때 부르면 와서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꿈에서는 내가, 일부러 때리는 시늉만 하고서 지켜줄 수 있는데...”

 

“...너, 종종 아이가 꿈에서 깨어도 이곳에 왔지?”

 

“네, 선녀님... 잘못했어요.”

 

“잘못은 아니란다.”

 

“있지요, 이 아이는 도망쳐도 보고, 싸워도 보고, 엄마 아빠가 바라는 대로 다 해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도, 슬프고 무서운 일이 멈추지 않았어요.”

 

“그야,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 아이 탓이 아니었으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계속 그런 일을 겪다니 마음이 참 아파요. 나는, 이 아이 마음을 알아요... 아이를 지키는 선녀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이무기의 등을 계속 쓰다듬는 아기 선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선녀가 되기 전에 그렇게 지냈으니까요.”

 

 

 

진화가 말없이 아기 선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선녀님, 나는 이제 선녀가 되어서 슬퍼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아이가 무서워해도, 곁에 있어 주는 것 말고는 무엇을 못 해주니 미안해요. 나는, 이 아이 엄마 아빠를 혼내주고 싶기도 하고 아이를 멋지고 포근한 집으로 데려다주고 싶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돼...”

 

“하늘에서 벌을 받기 때문이지요?”

 

“아니, 우리는 원래부터 이 땅의 삶에 그런 식으로 끼어들어서는 안 돼... 그러면 꿈에서마저 아이와 함께해줄 수 없어지니까. 그렇지만 네 마음이 참으로 아프겠구나.”

 

“네, 선녀님. 나는 이 아이 엄마가 화를 내면 내 엄마가 생각나고, 아빠가 아이를 때리면 내 아빠가 생각나요.”

 

그 말을 하며 아기 선녀도 꿈주인 아이처럼 눈물을 똑, 똑 흘리기 시작했다. 아기 선녀의 눈물이 이무기의 등으로도 떨어졌다. 이무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 선녀가 슬퍼하는 것을 보니 그만 마음이 저려왔다. 그리고 아기 선녀도 사람일 적에 무서운 일을 겪었을 생각을 하니, 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이무기의 눈에서도 뚝, 뚝 눈물이 흘렀다. 아까와 같은 눈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다른 눈물이었다. 이제 이무기는, 저기 울고 있는 아이가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기 선녀처럼 느껴졌다. 또, 제가 잃은 소중한 짝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무기는 아이가 만들어낸 호수를 보면서 울었다. 저 호수 안에 얼마나 깊은 절망과 슬픔이 있을지 생각하며 울었다. 이무기의 눈에서 방울방울 흘러나온 눈물들은,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 데 모여, 뭉실뭉실 커다란 구름이 되었다. 투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보슬비였다. 비가 내린 자리엔 보송보송 잔디가 돋았다. 잔디는 살그머니 자라나 어느새 호수를 뒤덮었다. 쭈그려 앉아 울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구름을 쳐다봤다. 아이의 얼굴에 눈물 대신 빗물이 가득 흘렀다. 진화 선녀와 아기 선녀, 이무기는 한 데 모여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느냐...?”

 

진화 선녀가 말했다. 아기 선녀는 그림 같은 광경에 말을 잃은 채 진화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너, 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나보구나. 비를 내린 걸 보니... 이제야 마음 놓고 너를 강에 두고 올 수 있겠다.”

 

진화 선녀가 이무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선녀님.”

 

그때, 이무기가 입을 벌려 말했다. 아기 선녀는 깜짝 놀랐다. 이무기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다.

 

“왜 그러느냐?”

 

진화가 나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 마음속 호수는... 사라졌다가도 다시 생기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럴 때, 그 호수를 다스리는 이무기는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 이런 마음속 호수는 너무 춥고 외로워서, 이무기들이 찾아오질 않지. 그러고 보니, 네가 여기 온 첫 이무기겠구나.”

 

“선녀님. 만일, 제가... 이 호수에 머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기 선녀는 아까보다 더욱 놀랐다. 용이 되려면 이제 겨우 삼 일이 남았는데, 이무기는 여기서 지내다가 용이 되려는 걸까?

 

“정말 여기 머물고 싶으냐? 용이 되려면, 하늘 문이 열릴 때 바깥세상에서 달과 눈을 맞춰야 해. 사흘 뒤면 네가 이무기로 땅에서 보낸 두 번째 천년이 끝나 하늘 문이 열리는데, 한 번 여기 머물기로 정하면 이 아이가 자랄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이제 저는... 용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만 같습니다. 눈물이 흘러 비가 되고 나니,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씻겨 내려간 것 같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람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구렁이 적 제 짝입니다. 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용이 되어도 제가 바라는 바 대로 그를 지킬 수 없음을... 그럼에도, 용이 되어 하늘의 창을 열고... 어떻게든 찾아내어, 만나고 싶었습니다. 다만 어떤 얼굴로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제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진화는 이무기의 말을 가만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이의 마음속 꿈에, 창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창 너머로 꿈주인 아이와 또 다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모래밭에 손을 포개고 두꺼비집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사람이 있었다. 이무기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모습도 변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사랑했던 제 짝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움에 눈물이 흘렀다. 물에 젖은 목소리로 이무기가 물었다.

 

“내 님이로군요... 선녀님, 그럼 저 아이는 혹시...”

 

“그래, 네가 사랑하던 짝의 아이다. 그가 혼자서 키우고 있어.”

 

“저 이가, 이 꿈 주인 아이도 잘 압니까?”

 

“아무렴. 함께 놀 동무가 없던 외로운 저 아이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게, 꿈 주인 아이인걸.”

 

또다시 눈물이 났다. 이무기는, 창에 비친 낯익은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돌아서 아이에게로 향했다.

 

“가서, 아이를 안아주려무나. 그럼, 너는 앞으로 아이 마음에 호수가 생길 때 그걸 다스리는 이무기가 되는 거야.”

 

보슬비를 맞으며 앉아있던 아이는, 머리 위로 이무기의 그림자가 비치자 그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모습임에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반가운 얼굴로 팔을 벌렸다. 이무기는, 몸을 낮춰 아이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이무기야, 잘 있어.”

 

헤어지기 전, 아기 선녀는 이무기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꿈에 호수가 생기는 날엔 또 볼 터이지만, 어쩌면 매일같이 볼지도 모르지만, 이전처럼 강에 가서 만날 수 없게 되어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용이 되어 구름 위에서 만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무기가 있어 아이가 덜 외롭기를, 이무기를 자주 보지 못해도 좋으니 마음속 호수가 덜 생기기를 바라며 돌아섰다.

 

“잘 있거라.”

 

진화 선녀는, 이무기에게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용이 된 너와 구름 위에서 만날 날을, 종종 그리곤 했다. 허나 아무래도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이곳인 것 같더구나...”

 

이무기가 진화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선녀님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진화는 손을 뻗어 이무기의 앞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무기는 이마를 진화의 손바닥에 비비며 꿍, 소리를 냈다. 진화가 빙긋 웃었다. 이제 비로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뒤돌아보다, 진화는 아기 선녀와 손을 맞잡고 아이의 꿈속에서 나왔다. 이무기는 둘이 떠난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절을 하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방에 있는 아이는 아직 한창 잠들어 있었다. 아기 선녀가 아이의 머리칼을 다정스레 만져주었다. 악몽은 끝났지만, 땀에 젖은 머릿결이 아직 촉촉했다.

 

“선녀님, 그런데요...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되지요?”

 

진화가 허리를 굽히며 답했다.

 

“이 아이는, 살아남아 어른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진화는 아이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사랑이 많은 아이인데...”

 

“그럼. 안쓰럽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부모를 만났지만, 이 아이는 사랑을 아는 아이야.”

 

진화와 아기 선녀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떠나기 전, 아기 선녀는 아이의 귀에 대고 말해주었다.

 

“아이야. 너는, 살아남아서 어른이 된대. 힘겹지만 사랑하며 자라서, 사랑하는 어른이 된대.”

 

“이제 가자꾸나. 별들이 기다린다...”

 

진화가 날개옷으로 아기 선녀를 감싸 안았다. 둘은 하나가 되어 어둑한 하늘을 날았다. 진화의 얼굴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흩뿌려진 눈물은 또 다른 별이 되어 아이의 방을 비추었다. 날아가는 길에 아기 선녀는, 엊그제 제가 입을 맞춰준 별들을 만났다. 안아주었던 바람도 만났다. 소곤소곤, 그들에게 명했다. 가서, 아이를 감싸 줘. 그 말에 바람과 별은 땅으로 내려가 선녀들이 있던 방으로 향했다. 창을 열고 들어선 바람은 팔 벌려 아이를 안아주고, 별들이 내려앉아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하늘의 선녀들이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줄 수 있음에 기뻐 노래하고 춤추며. 아이는 뒤척이며 평온한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포근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잠에서 옅게 깨어나 실눈을 떴다. 바람이 선선하고 별빛이 밝은 밤이었다. 어쩐지 꿈결에 무슨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하며 아이는 생각했다. 내일은 친구를 만나 우리 집 이야기를 해야지. 못 알아들으면, 계속 계속 해야지. 별처럼 무수한 날을 살아갈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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