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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건번호 J-276B4

2021.06.23 13:3406.23

사건번호 J-276B4

5은하 정부소속 크리스토퍼 마이어 요원(이하 ‘크리스’)이 불법 인체 개조 시술을 받은 반란분자의 소탕 이후의 제출한 증거 자료 건에 대하여.

 

본 건은 신정부의 사회 안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활동으로, 위험 요소가 인지된 이후에는 요원의 단독적인 행동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제출되어야 할 자료를 상신함.

 

(본문)

크리스는 반란분자 ‘스탠리 베이커’(이하 스탠)와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이후, 그의 행동을 추적하고 감시하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함. 스탠은 불법 시술을 통해 인체 개조 행위를 자행했음은 물론, 신정부의 전복을 꾀하며 수많은 일반 알파 시민들의 희생을 일으킴. 그 피해가 막심했으나, 크리스와 스탠이 주고 받은 통신의 추적을 통해 신정부 시청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던 스탠을 발견 직후, 요원이 직접 사살함으로써 소요는 종결됨. 

 

사살 직후, 크리스 요원은 신속한 사후처리를 하지 않고 사살된 스탠의 시신을 감싸고 돌았기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는 인간이라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으로 인해 촉발된 일임을 감안하기를 바라며 별첨의 증거자료를 송부함.

 

 

 

(별첨)

 

—72-03-10

K,

 

편의상 K라고 하겠습니다. 기록이 남는 통신 체계에 실명이 거론되는 일은 아무래도 껄끄러우니까요.

 

처음 만남 이후에 당신이 이렇게 서로 긴 글을 주고받자고 제안했을 때, 솔직히 저는 놀랐습니다. 당신이 제게 그렇게 큰 호감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제 머리칼이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옷차림?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헤어지기 직전에 당신이 이런 뜬금없고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제안을 해준 것이 어쩐지 귀엽네요. 대수롭지 않게 끝났을 만남을 조금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해주신 것 같아 고맙기도 해요.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제가 분명 일반적이고 지루한 사무직에서 일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알쏭달쏭 한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 같다고 중얼거릴 때 어쩐지 오싹하면서 짜릿한 기분이 들었어요. 한번도 누굴 속여본 적 없는데 제가 왜 이럴까요?  아직도 궁금하시면 다음에 만났을 때 말씀드려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제가 글을 길게 써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네요. 횡설수설한 것만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만 어쨌든 당신은, 제가 먼저 이렇게 말을 걸지 않으면 딱히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미리 이렇게 선수를 쳐 봅니다. 지구의 밤은 이제 그렇게 밝지가 않아요. 저는 곧 지루한 서류작업을 하러 떠나야 하고요.

 

또 연락해요. 

S.

 

p.s. 

얼핏 지켜보기에 (일부러 염탐한 것은 아닙니다만) 외행성계로 순환하는 고속 포털을 타고 가시던데, 꽤나 멀리 사시나 봐요. 저는 당연히 지구 은하계 근처에 살고 계시는 줄 알고 이곳으로 장소를 골랐죠. 다음에 저희가 만날 때는(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간 지점에서 만나요. 

 

 

—72-04-01

안녕, K.

 

이렇게 빨리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될 줄 몰랐어요. 생각보다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저녁은 드셨나요? 저는 방금 퇴근해서 간단하게 해결했어요.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육식을 하지 않아요. 제가 하는 일에도 관련이 있고 도저히 남의 살을 제 입으로 집어넣을 수가 없더라고요. 당신이 고른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녜요. 미리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이죠. 오해하지 않았음 해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쩐지 밝히기 꺼려졌어요. 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저는 K, 당신과의 관계를 최대한 아끼며 가꾸고 싶거든요. 부담스러우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셔요. 이렇게 간격을 두고 연락을 하며 서로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하니까요. 그렇지만 당신과 더 가까워지려면 어쩔 수 없이 제 이야기를 다 해 드리는 편이 낫겠죠. 많이 저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연락드리는 거예요.

 

저는 미화원예요. 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들과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분들과는 하는 일이 많이 달라요. 요즘도 미화원이라는 직업이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꽤 많이 만났어요.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근무하시는 분들은 있어요, 어쨌든. 저는 더 깊숙하게 숨겨진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을 해요. 대부분 사체들이죠. 아시다시피 동물은 신정부가 들어오고 나서 절대 수렵이나 포획이 불가해졌으니까. 이 대부분의 행위들이 범법을 행했다는 증거물인 셈인 거예요. 짐작하셨겠지만, 제가 처리하는 것들은 동물의 사체만은 아니랍니다. 사냥꾼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집착하니까요. 그래도 저, 이래 봬도 신정부가 선발한 정식 공무원예요.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뒷배를 봐주는 게 아니고요. 정부가 공식적으로 맡긴 업무 중 일부인 거죠. 어쩐지 변명을 하는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사실인걸요.

 

K,

당신은 제가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절 무시하거나 경멸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요. 그렇지만 불안해져요. 전 겁쟁이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요. 거절은 일상적이고, 모욕적인 말이 섞인 대화가 오간 적도 많지만 그래도 당신에게만큼은 받아들여지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도저히 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답장에 의사를 적어주세요. 섬세하고 배려심 넘치는 당신은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말하려 할 테지만, 당신을 마주하고 거절당한다면 좀 오래갈 것 같아서요.

 

벌써 새벽 한 시네요. 5은하의 밤은 어떤가요? 듣자 하니 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장관이라던데,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제 신분으로 은하계 여행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 지구의 밤은 조용해요. 반쪽짜리 달이 천천히 기울고 있죠. 우울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쩐지 이게 제가 보내는 마지막 글이 될까 봐 무섭고 두려워요. 그렇지만 잘 기다려볼게요.

 

연락줘요. 좋은 밤 되기를.

 

당신의 S.

 

 

 

—72-06-30

안녕, K.

 

매일같이 연락하다 오랜만에 이렇게 길게 글을 쓰려니까 어색하네. 잘 들어갔어? 나는 오늘 잔업이 남아서 너랑 헤어지고 난 뒤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출근 중이야. 오늘도 잘 챙겨줘서 고마워.

 

네가 어젯밤에 계속해서 내 다리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 그렇지만 별말 하지 않아서 고마웠어. 너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베타 인간이야. 너는 아마도 알파 인간이겠지? 네 안색이 어두워지던 걸 기억해. 아무래도 내 사회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남겨진 내 수명에 대해 걱정하는 거라 생각해.(너라면 내가 베타 인간이라는 이유로 날 경멸하지 않을 거란 걸 아니까)

 

나는 여타의 베타 인간들이 그렇듯, 뇌세포가 빠르게 소멸되기 직전에 닥터들한테 인공두뇌를 이식받았어. 그래, 네가 베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작 25년 정도를 살 수 있는 우리가 어떻게든 더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지. 몇 년간 죽어라 일해서 번 돈으로 한 수술인데, 정신 차려보니 닥터가 내 다리를 떼어 갔더라. 그러고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크롬 합금으로 된 엉성한 다리를 붙여놨더라고. 불법 행위로 먹고 사는 놈들 주제에 지독히도 꼼꼼한 게, 모든 신경 다발이 섬세하게 기계 다리랑 연결되어 있도록 수술해놨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야. 덕분에 나는 바로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지만 간담이 서늘해졌어.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 몸에 대해 내가 소유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왔었어. 그럼에도 나는 보통의 알파 인간처럼 보이고 싶어서 어떻게든 돈을 버는 족족 철골 다리에 색을 칠하거나 인공 피부를 이식하거나 했는데,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나, 원래 다리도 꽤 괜찮았는데 더 이상 스커트나 드레스를 입을 수 없게 돼서 몇 년간은 좀 우울했어. 지금은 괜찮아.

 

불법 시술을 받은 나 같은 베타 인간은 수명을 얻은 대신 정부에 적발되는 순간, 시민으로 취급되지 않고 기계이자 정부의 자산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만 이 글을 수신한다면 바로 지워주길 바라. 너도 내가 폐기 처분 되는 걸 원치 않다면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공무원이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일 거야. 그건 다음에 알려줄게. 어쨌든 오늘 말하거나 글로 이야기하는 건 껄끄러운 것 같아서. 아무래도 네가 내 일에 관심을 가져주니까 나도 알려주고 싶어지네. 어리석은 일이라고 다른 베타 인간들은 중얼거리겠지만. 

 

최근에 청계천 나래교에 신원불명의 시신들이 20구 정도 버려졌어. 나는 그걸 처리하는 일을 맡았지. 대부분 얼굴 가죽이 벗겨진 채로 버려져 있었어. 사실 그건 대수롭지 않은 점이긴 해. 대부분 처리된 시신들은 정치범이나 신정부에 반항한 사람들, 아니면 나 같은 불법 시술자들이니까. 근데 이렇게 대량의 시신들이 버려진 적은 3년간 이 일을 하면서도 처음 봐. 무슨 일이 생긴걸까? 정부가 직접 지침을 내려준 사안이니까 내 신변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이걸 이렇게 관련 없는 네게 말해도 되는 걸까 모르겠네. 이들이 대부분 베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가슴을 답답하게 해. 이렇게 네게 하소연 하는 게 다 지만 솔직히 나도 한 때는 ... 

 

어쨌든 '진짜 알파 인간'인 네게, 내가 베타 인간임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어. 유쾌한 기분은 아니야.

 

모르겠다. 또 연락할게.

갑자기 울적한 말들을 나열해서 미안해. 불완전한 두뇌 때문이라고 생각해. (구차한 내 변명을 이해해줘.)

그럼, 안녕.

 

당신의 S.

 

 

— 72-07-31

 

K,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해. 잠든 널 바라보는데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어. 마치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기체에 올라서 시간이 납작하게 흐르는 걸 직접 경험한 것처럼.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내게 발가락이 있다고 느껴졌던 밤이야. 그저 뭉특하게 발 모양으로 빚어진 내 고철 다리가 따뜻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착각이겠지. 더 이상 혈관이 없는 육체에서 피의 흐름을 느낀다는 건.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다가, 당신이 이렇게 떠나 버리니까 방이 너무나 커 보이는 거 있지. 아직 당신 정수리에서 은은하게 나던 향이 이불에 남아 있네. 복잡한 마음이야. 어쩐지 익숙한 냄새거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오직 당신만을 만나서 그런가.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 곁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이 알 수 없는 향이 궁금했어. 다음에 만나면 알려줄래? 어떤 향수를 쓰는지, 아니면 어떤 샴푸를 쓰는지. 

 

아, 어쩌면 좋아. 

나도 새침해지고 싶어. 나도 당신처럼 표현을 절제하고 싶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겐 처음이야. 내가 베타 인간이라는 걸 보건소에서 통보 받은 다음에 나 아닌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하거나 믿을 수 있다는 게.

 

사족이 길었어. 

어쨌든 이 메일을 읽으면 삭제해줘. 당신의 수신이 확인되는 즉시 나도 내 데이터에서 지울테니. 내가 겁쟁이라서 그래, 이해해줘.

 

그럼 다시 연락할게. 언제든지 우리 집에 들러도 좋아. 당신 자는 내내 생체 정보를 등록해두었으니까, 번거롭게 내게 연락할 필요도 없을거야. 나, 갑작스러운 거 좋아하거든.

 

그럼 정말 이만 줄일게.

 

당신의 S.

 

 

 

— 72-09-14

K,

 

너랑 아무 걱정 없이 여든 살까지 여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완전한 베타 인간으로 태어난 게 내 죄는 아니잖아. 그렇지만 가끔씩 이렇게 서글퍼져. 날 사랑해주는 네 곁에서 평범한 연인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게 모두 내 잘못인 것만 같이 느껴져.

 

어제는 미안했어. 인공 두뇌를 좀 변경해야할 시기가 온 것 같아. 아무래도 불법 시술이니까 불완전한가봐. 혹시 내가 헛소리하지는 않았어? 술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더라고. 원래 시술해 준 닥터를 다시 만나긴 어렵겠지만, 이렇게 불안하게 너와 함께하고 싶지는 않아. 하,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 왜 그렇게 너만 만나면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다 하게 되는 건지. 부모님 이야기까지 그렇게 쉽게 꺼낼 줄은 몰랐네. 나에게는 너무 큰 상처라 되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했다시피 알파 인간 부부였던 우리 부모는 내가 베타 인간이라는 사실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어디서 주워왔냐고 아버지가 어머니께 윽박을 지를 때는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어. 어머니의 아버지는 베타 인간이었다고 해. 다행스럽게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알파 인간으로 나고 자라게 되었지만, 내 순서에 맞춰 베타 인간의 유전인자가 발현된 것 같아. 지독히도 운이 없는 거겠지, 나는. 그렇지만 결국 베타 인간이라서 힘든건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고 나라는 걸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했어. 이후에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서야 했지. 방황하고 있던 나를 찾아 어머니가 몰래 아버지가 지닌 지위의 힘을 빌어, 나를 미화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셨더라. 그 때부터 돈을 모아서 어떻게든 더 살 길을 찾았어. 끈덕지게 살아남아서 반드시 복수하고 싶었어.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누굴 원망할까? 그렇지만 이렇게 태어난 나라고 ‘정당하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 건지. 그런 믿음을 정당화시킨 그 무언가가 미워. 미안해. 또 감정이 올라와.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른 얘기 할게.

 

사실 그렇게 블랙아웃이 온 동안, 악몽 같은 걸 꿨어. 네가 사실은 정부 관계자고 나에게 접근한 게 다 계획이라는 내용이었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으로 내게 접근한 것까지 모두 말이야. 웃기는 일이지? 이걸 입밖으로 내어 너에게 말해주면, 네가 날 괴상하게 여길까봐 말하지 못했어. 어라, 사실 정말 정부 요원인 거 아냐? 후후.. 내가 꽤나 촉이 좋다고. 

 

이렇게 너스레를 떨지만 사실 꿈은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어. 피와 땀에 절여진 네가 여러 시신들을 검은 캐리어에 구겨넣고 청계천 나래교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까지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지. 내가 지금 불안한가봐. 계속해서 산처럼 쌓이는 시신들을 치우느라 과민한 것 같기도 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도 돌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악귀가 하루에도 수십명의 불법 시술을 자행한 베타 인간들을 색출해 내서 갈기갈기 찢어 발긴 뒤에 우리 구역에 전부 버린다고. 굳이 우리 구역을 택한 건, 우리 구역에 숨어 있는 불법 시술자 베타 인간을 색출해내기 위해서라고. 참 웃기지? 볕보다 달빛을 많이 받으면 좋지 않다고 누가 그러더라. 아무래도 내 마음이 섬뜩해지는 건 매일같이 맞이하는 달빛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네 품에서 잠들 때는 달빛이고 햇빛이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아직 너 말해주지 않았다. 네가 풍기는 그 달콤한 향이 무언지 말이야. 꼭 알려줘. 너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을 때, 거리에서 그 향을 맡고서는 네가 나의 근처에 있다는 슬픈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가 가고 난 자리는 왜 이리 금방 냉기가 돌까. 가끔씩 내 다리를 만지다 깜짝깜짝 놀라곤 해. 이게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모르겠어. 화들짝 손을 떼고 나면 화끈거려. 내 다리는 나보다 네 손길이랑 어울리는 것 같지, 아무래도?

 

또 연락할게, 사랑해.

 

당신의 S.

 

 

— 73-01-27

K, 

 

연락이 없네. 많이 바쁜가봐? 

자기 사업이 바쁜 거 나도 아니까. 보채는 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끼고 싶은데 그래도 궁금해서 글을 써. 

여유 되는대로 연락줄래?

 

스탠.

 

 

 

— 73-05-09

K,

 

나 일이 생겼어.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거야. 제대로 내 글을 삭제해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조금 불안해. 그렇지만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냐. 그냥 요새 서로 연락이 뜸하고 또.. 아니야.

 

K, 

너한테 많은 걸 숨긴 것 같아 미안해. 언젠가 내가 복수를 꿈꾼다고 했지. 우리 부모에게?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내가 알파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베타 인간으로 태어난 다른 이를 이해하며 사랑해줄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야. 만약이란 없지. 그렇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사랑은 어려운 일이야. 수없이 많은 조건들이 발목을 잡지. 좋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좋은 면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사실인거니까. 

 

몇 년전에 시체들 틈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어. 나와 같은 베타 인간이었지. 그 아이는 아예 얼굴 자체를 실리콘으로 무장을 한 채였어. 사냥꾼에게 사냥 당한 채로 버려진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시체들 틈에서 죽은 척을 하고 있었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지만, 눈에 띄지 않을수록 살아남을 기회는 생기지. 너는 모르겠지? 그렇다고 너를 무시하는 건 아냐. 네가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이건 치열하게 살고 말고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는 어떻게 사는 것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이 아이의 행방과 신원을 이 글에 밝히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겠어. 네게 밝히는 게 멍청하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그건 내가 이 아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건 확실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서 이 녀석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며칠 전에 네가 옷가지를 뒤적거리면서 말했지. 여기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사는 건 아니냐고. 귀여운 질투로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실 굉장히 뜨끔했어. 너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그리고 사실 그거, 무례한 짓인 거 알지?

 

K,

네가 남기고 간 아이스크림을 미친듯이 퍼먹었어. 

그렇게 꽝꽝 얼어있던 게, 냉장고에서 나오자마자 금세 흐물흐물해지더라.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처럼 제 모습을 유지하는 것들도 야속할만큼 자신을 버리곤 한다는 생각을 했어. 네가 남기고 간 칫솔의 질감을 만지작 거리며, 몰래 그 칫솔로 내 이를 닦아보려고 하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만 두었어.(안심해, 깨끗하게 말려 놓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너 벌써 머리끈 세개나 놓고 갔어. 사업한다는 애가 이렇게 칠칠맞으면 어떡해. 가지고 간 내 머리끈 돌려줘! (덕분에 매일매일 네 머리끈 돌려가며 잘 쓰고 있다)

 

네가 가지런히 접고 간 옷가지들, 깨끗하게 닦아 놓았지만 내가 놓지 않는 곳에 두었던 컵과 접시, 수저와 젓가락, 침대 근처에 떨어진 네 머리카락과 몸의 털들, 아직까지 베개에 은은하게 남아있는 네 냄새, 네가 내게 주었던 3은하의 높은 산에서 판매하는 강렬한 향들, 그걸 피우며 널 기다렸던 날들, 형태는 유지하지만 바람만 불어도 그 모습을 잃는 향의 잿더미들,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과 아직 치우지 못한 전 애인들의 사진과 편지들, 그 사이에서 기묘한 죄책감을 느끼는 내 모습과 전에 마무리했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너의 눈망울,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간간이 그 사이를 채우는 시체의 모습들과 엉겁결에 겹쳐지는 그들 죽은 몸에서 풍기는 냄새와 네 향기가 겹쳐져. 기묘한 우연이겠지.

 

안 본지 오래됐어, 우리. 할 말도 많아. 고철덩어리 내 뇌가 네 모습을 제멋대로 바꿔놓기 전에 날 만나러 와주기를 바라. 

 

사랑을 담아,

당신의 스탠.

 

 

— 74-08-20

K,

 

나 이제는 아무도 듣지 않는 포크 가수의 노래가 좋아. 너무 좋아서 몇 트랙은 아예 이가 빠진 아주 옛날 카세트 테이프로 한 앨범만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어. 이 노래들이 왜 좋아졌나면 어느 날에 널 만났을 때, 우리 서로 엄청 피곤해 했잖아. 넌 일이 늦게 끝났고 심지어 함께 사는 우주 강아지가 아파서 걱정하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지. 그게 다 내 멋대로 너와 만나는 일정을 늦춰버려서 생긴 일인 것도 알아. 기분 많이 상했을 것도 알고. 그렇지만 네가 날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어. 서로가 피곤하고 힘든데도, 그런데도 함께 있는 시간들이 기억에서 평생 지워지지 못할 만큼 좋게 느껴졌어. 그 순간에 흐르던 노래가 이 가수의 노래였거든. 너도 기억할까.

 

우리 집으로 돌아와 코를 골며 자고 있던 네가 눈을 뜨고 나를 살피던 순간을 기억해. 나는 자는 척을 하고 있었지. 너는 몰래, 아주 자그마한 소리로 그 가수의 노래들을 틀었지.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여전히 네 흔적 투성이인 내 방 창에 비치는, 밤의 작고 귀여운 달빛인지 뭔지 모를 빛줄기가 내 머리 위에 펼쳐져. 나는 그렇게 또 눈물이 조금.

 

비가 사정없이 나리던 날에 좋아하는 친구이자 선배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베타 인간을 증오하는 알파 인간의 집에 찾아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눌때, 나는 즐거워서 K 네 이야기도 좀 했고 괜히 장난도 안 치고 멋진 사람이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나. 그 때 나는 비가 온단 걸 알고 남의 집에 찾아가는데 아주 예의도 없이 작업복을 갈아 입지도 않은 채로 집에 들어갔지. 모래와 흙과 쓰레기 투성이인 내 가짜 발을, 그 사람이 소속된 알파 인간의 권익을 챙기는 사회 운동 집단에서 기념으로 만든 수건으로 닦고, 나는 정말 진심으로 깨끗이 빨아서 가져다 주겠다고 했는데, 며칠이 지난 날, 문득 그가 내가 까먹고 빨지도 않고 놓고 간 수건 사진을 보내주었고 나는 꺄르륵 웃었지. 그 때도 나는 그 포크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괜히 우울해하며 너를 그리워하고 있었지, 몸에서 왜인지 시체가 썩는 악취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그 수건에 네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무시했었어.

 

네가 내게 답장을 하면 긴장이 되면서 기대가 됐어. 

우울함이란 건 정말 행복함이 있어서 또한 존재하는 것 같고 그건 동시에 너와 나의 다른 면들과 닮아 있는 것 같아. 베타 인간 친구가 애인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너와 많이 싸운다고 생각해서 너에게 그렇지 않냐고 물었더니, 너는 언제 그랬냐고 물었지. 네가 싸움이라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게 다를 수도 있겠지. 싸움이란 말은 너무 과격하니까. 친구가 했던 말처럼 그게 사랑인 것 같다고. 계속 싸워도 중요한 건 변하지 않고 다시 메워져가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네가 연락이 되지 않았던 지구의 의미 없는 여름날의 언젠가,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보고 싶던 사람들과 청계천의 싸구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자리에 앉아서 괜시리 네 얼굴을 떠올렸어. 귓가에 맴도는 친구들 목소리를 약간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생각에 잠겼었지. 난 그 포크 가수의 노래 ‘새’의 가사처럼 도망치는 데는 수준급이라서 어쩐지 네가 스스로 날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너무 무섭고 두려워했어. 우린 너무 다르니까. 네가 나 따윌 소중하다고 말해줬을 때는 그 어떤 노래 오백트럭이 와서 날 치고 간 것 보다 훨씬 몽롱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는 걸 꼭 전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하루가 매일 그렇게 어둡다가도 다시 갠 하늘처럼 맑아지고,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 태풍이 이끄는 구름처럼 금방 눈앞에서 달아나곤 해. 그 가수의 노래도 트는 즉시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네다섯번째 노래가 재생되고 있어. 그럼 갑자기 내가 사랑하는 다른 이의 ‘다 고마워지는 밤’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고개를 들면 어느새 밤이 다가와 있지. 매일같이 꼴뵈기 싫은 먹구름같은 얼굴들을 마주하지만 너랑 나랑 노래랑 물결을 떠올리면서.

 

그렇지만 K,

 

내가 모를 줄 알았겠지. 흔적 자체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흔적 이외에는 볼 수가 없다고들 말하니까. 하지만 내 삶의 이면에서 조금씩 네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어. 내가 이렇게 네게 글을 보내는 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어. 어쩌면 정말 이러다 바보가 되는 걸 수도 있겠지. 너를 생각하며 지금 느끼는 경악과 놀라움에 대해 너는 그저 임무를 완수한다는 목적에 향수를 느낄 뿐이었다는 사실이 서글퍼.

 

내게 행복한 사랑은 없었어. 행복한 사랑이 있다는 건 분명 거짓이었을 거야.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날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날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을 나는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지.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나는 널 사랑했기 때문에 너는 아마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겠지. 

 

그렇다면 모든 세상이 그런 나의 죽음을 즐길 게 분명하구나. 

 

넌 날 사랑했지만 좋아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건 분명 다른 방식이겠지. 아니, 그건 파멸의 한 종류일지도 몰라.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알아. 내가 어느날 꾸었던 악몽이 단순히 악몽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굴러가는 내 삶의 법칙과 수레바퀴들을 믿고 싶지 않았어. 너를 사랑하는 나를 믿었어. 나를 사랑하는 너를 믿은 게 아니고. 

 

나 이제 더이상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지겨워. 그걸 가지고 네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도 상상하고 싶지 않아. 어제 내가 챙겨주던 동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아무런 글도, 음성도, 영상도 남기지 않은 채로. 이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그리고 K 너밖에 없었어.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자리에 놔두려고 할거야? 그리고 내 얼굴가죽은 언제 벗길 셈이야? 

 

K,

삶이란 어쩜, 다시는 물릴 수 없는 잔인한 바느질과도 같아. 너와 어쩌다 엮여버린 이 굵은 바늘코 때문에, 나는 아직도 떨어져 나간 가슴팍 어딘가를 쓰다듬으며 남들 마실 자리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는걸. 나를 얼마나 비웃을까? 근데 이상하게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 언젠가 너와 닮은 거짓말을 만나서 너와 함께 하던 대화를 나누곤 할 때, 이 미칠듯한 기시감에 나는 몇번이고 뒤늦은 사과를 보내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는지 몰라. 사라진 와중에도 너는 참 잔인하지.

 

K, 

내가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을 때, 밤중에 물 한 잔씩 마시는 너를 위해서 침대 머리맡에 항상 준비해놓은 물 몇 잔이 있던 거 기억나? 가끔 너 목마를 때 마시라고 떠 놓은 물을 내가 잠결에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개운히 잠든 적이 있지. 그날부터 어쩐지 네가 더이상 내 꿈에 자리하지 않았지. 그래, 너를 위해 마련한 작은 자리끼 그릇에도 조금씩 기분좋은 먼지가 내려앉을거야.

 

여전히 너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너 이외에는 없지만. 작은 천들을 기워서 만든 내 어린날의 양말 뒷꿈치처럼, 조금 지저분하고 또 요란스러웠을지라도 이제는 따뜻하고 튼튼한 기억들이 자리잡을 거라 믿어. 나를 이루던 네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서, 이제는 너를 닮은 거짓말 같던 존재들이 모여 나를 이룰 거라 믿을 거야.

 

답장은 하지 않아도 돼. 

이제 나는 일을 그만두고 이곳을 떠날거야. 네가 어디까지 그 파랗고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감시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으로 삶을 살아갈거야. 네가 훔쳐간 내 동생의 시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뒷목덜미를 잡아 기절시키고 얼굴 가죽을 벗겨 나래교에 버리기 전까지는 나를 베타 인간이나 알파 인간이 아닌 그저 나로 봐주길 바라. 그러니까 좀 봐줘. 나도 살고 싶어. 죽이지 말아줘.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조금 시간을 줘. 부탁이야.

 

그럼, 부탁이니까 잘 지내줘.

 

안녕.

 

스탠.

 

 

 

— 75-01-31

K,

 

잘 지내? 오랜만이네. 어쩌다보니 네게 글을 쓸 용기가 다 나고 그랬네. 뉴스 봤어? 나도 꽤 하지? 어쩌면 정말 네가 나를 잡기 전에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푼 생각이 들곤 해. 

 

동료들이 꽤 많이 생겼어. 생각보다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됐어.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시술이 알고 보니, 신정부가 지하에서 권장하는 사업이라는 것, 삽입된 인공 두뇌 안에는 전기 신호를 송수신 하는 장치가 달려 있다는 것, 사실 지하의 닥터들은 국가시험을 보고 정식으로 국가에 소속된 의사들이라는 것까지. 너는 어디까지가 진실이었을까? 너 역시 정말 요원이었던걸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기회가 있었잖아. 내가 이렇게 떠나와 신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일 때가지 너는 이미 나라는 싹을 자를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을텐데. 이해가 되질 않아.

 

크리스토퍼, 내가 네게 너무 무심했던 걸지도. 우연이란 걸 가장해 나의 불안함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던 걸지도. 너를 점점 더 사랑하는 마음이 무거워져 사실은 그 멍에를 벗어던지고 싶었던 걸지도.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믿고 싶어. 

 

오는 3월, 세계정부청사 광장에서 열리는 스즈키씨 귀환 행사 때, 나는 거기에 있을거야. 많은 고관들이 모인다고 하더라. 정작 성간 탐사 활동을 다녀온 당사자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말이지. 이게 신정부가 말하는 사회 안정 운동인건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 스즈키씨는 아무래도 베타 인간이겠지? 200년동안 우주에서 살다 돌아왔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말이야. 죽지 않는 뇌세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베타 인간들의 인공두뇌 밖에 없으니까. 

 

우리들은 거기에 의미를 두려고 해. 의미야 부여하면 되는 거지. 마치 너와 나의 관계처럼. 

 

네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그걸 믿어. 오후 세시 정각. 광장 한 가운데, 스즈키 씨의 동상이 진수되는 순간, 그 때가 내가 행동할 순간이야. 너만 괜찮다면 지근거리에서 내 모습을 바라봐 주었으면 해. 

 

좋은 달빛이야, K.

 

함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날이 생각나. 달이 코앞까지 내려와 금방이라도 지구의 품에 안길 것만 같았던 이상한 날이었지. 정말 금방이라도.

 

내가 보고싶다면 그날 만나.

 

당신의 스탠.

 

 

 

— 75-02-28

K,

답장 잘 받았어. 바보 같은 놈. 어찌할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는 알겠어. 그렇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어. 오히려 그렇게 죽는다면 우리의 운동과 동지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야. 어차피 세상은 쇼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잖아. 오히려 아무 생각 없는 알파 인간들에게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날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스즈키 씨의 귀환은 정말 큰 행사니까.

 

네가 언젠가 그랬지. 알파고 베타고 우리는 모두 사람으로 태어난 거라고. 나는 여전히 네가 무해한 인간이란 걸 믿어. 그렇지만 동시에 네가 거스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마저 알고 있지.

 

네게 나의 계획을 말해준 걸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후회는 네가 하고 있겠지? 내 계획을 알아버린 이상 너는 어쩔 수 없이 행동해야만 하니까. 

 

개인적인 복수라면 복수랄까. 아니 사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어. 사람들을 이끈다는 일은 힘들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도 여기지 않고. 내 뒤통수만 바라보는 십대 아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결국 다 죽을거야. 다 죽겠지. 내가 죽지 말라고 말해도 죽을거고 죽이겠지.

 

사실 난 죽고 싶어. 물론 네 손에 죽고 싶지는 않지만 죽어야한다면 내 손이 아닌 네 손에 맡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네 상사는 좋은 사람이야? 이런 글을 주고 받는 걸 허용해줄만큼?

 

너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너만큼 좋은 사람은 아닐거야.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비록 내가 정말 싫어하는 거짓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사랑할 수 있었어. 

 

안녕, 우리 정말 그날 만날 수 있겠다.

 

스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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