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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불안은 잠들지 않는다

2021.06.03 10:3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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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얼마 전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 종수 신혼집에 초대를 받아서 왔다. 종수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종수가 요리를 좋아한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요리한 음식은 오늘 처음 먹어 봤다. 예상보다 훨씬 맛있어서 놀랐다. 종수와 친하고 안지도 오래 됐지만 이 정도로 요리를 잘하는 줄은 몰랐다. 요셉은 종수 부부가 저녁 먹은 걸 정리하는 동안 집안을 둘러보고 있다. 집이 꽤 넓고 좋다. 인테리어를 새로 다해서 새집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요셉은 결혼하자마자 이런 좋은 집에 사는 종수가 부럽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서재로 들어왔다. 한 쪽 벽면 전체가 책으로 채워져 있다. 요셉은 책장에 어떤 책이 있는지 천천히 살펴본다. 종수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 종수 아내의 책임이 분명하다. 종수의 아내, 세아는 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책장에 미술관련 책이 많다. 요셉은 아무 책 한 권을 책장에서 뺐다. 표지에 서양 미술사라고 적혀있고 책이 꽤 두껍고 보기보다 훨씬 무겁다. 몇 장 넘겨 보니 글은 얼마 없고 그림으로 가득하다. 요셉은 책을 빠르게 넘기다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펼쳤다. 펼쳐진 페이지의 그림에는 아주 먼 옛날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 4명이 있다. 세 명의 남자가 한 남자의 몸에 난 상처를 신기하듯 쳐다본다. 그림 밑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1-1602, 포츠담 신궁전>이라고 적혀 있다.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 요셉이 아주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 그림을 한 참을 뚫어져라 본 후 엄지손가락으로 책 전체를 다시 빠르게 넘겨가며 본다. 요셉은 책을 끝까지 훑어보고 원래 자리에 다시 꽂았다. 이때 종수가 요셉을 부른다.
“요셉아! 거실로 와.” 요셉은 종수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계속해서 책장에 꽂힌 책들을 천천히 본다.
대답이 없자 종수가 다시 부른다. “정요셉! 뭐해? 얼른 나와.”
그제서야 요셉은 종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왔다. 저녁 먹었던 테이블은 깔끔하게 정리가 돼있고 대신 와인과 와인 잔이 보기 좋게 놓여 있다. 종수는 보울이 넓고 깊은 잔에 레드 와인을 따르고 있다. 와인 따르는 소리가 거실 전체에 퍼진다. 세아는 와인과 함께 먹을 몇 가지 안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이상하게 종수의 아내가 저녁 먹을 때와 어딘가 다르게 보인다. 잠깐 사이에 더 아름다워졌다.
종수는 서재에서 나오는 요셉을 보고 말한다. “앉아. 한 잔 해야지.”
최대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거실의 큰 전면 유리 옆에 놓여있다. 유리창 밖으로 우면산이 보인다. 27층에 위치한 종수 집은 우면산과 우면산 바로 앞 예술의 전당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해는 푸른 하늘을 빠르게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하늘의 변화는 어느새 우면산도, 예술의 전당도, 지금 앉아있는 테이블도, 종수와 세아의 얼굴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분홍색 공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와! 오늘 분위기 너무 좋다. 세상이 완전 핑크 핑크 하네. 이런 느낌이 자주 나면 좋을 텐데. 그리고 이런 순간이 오래 지속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아쉽게도 해가 떨어지면서 너무 빨리 사라진다니까.” 세아가 아쉬움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아의 말대로 핑크 빛 세상은 잠시 후 사라졌다. 요셉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한다. “그러게요. 전망이 너무 좋아요. 특히 해지는 풍경이 정말 예술이네요. 그나저나 세아씨는 책 읽는 거 좋아하나 봐요? 서재에 갔더니 책장에 책이 엄청 많네요. 분명 종수 책은 아닐 텐데 말이죠.”
와인을 다 따르고 건배를 제안하면서 종수가 말한다. “당연히 내 책 아니지.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지금은 책 읽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일에 필요한 논문이나 전문 서적 보는 거 말고는 거의 안 봐.”
“사실 저도 요새 책 잘 안 봐요. 대부분 오래 전에 산 거에요. 예전에는 항상 자기 전에 책을 봤는데 요즘은 잘 안보게 되더라고요.”
요셉이 세아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저도 그렇거든요. 예전에는 자기 전에 항상 책을 봤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쵸? 저랑 똑같네요. 저도 자기 전에 항상 스마트폰을 해요.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불면증이 있어서 잘 때 스마트폰을 더 보게 되는 거 같아요. 자려고 누웠는데 잠 안 오면 스마트폰 보고, 다시 자려고 하다가 잠 안 오면 또 스마트폰 보고 그래요. 그렇다 보니까 잠을 깊이 못 자서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아요.”
“요셉아, 그렇게 잠을 잘 못 자?” 종수가 물었다.
“응. 잠을 잘 못 자는 편이야. 잠 들었다가도 중간에 깨서 다시 잠이 안 올 때도 많아.”
“정말? 그 정도면 꽤 심한 불면증 같은데. 네가 불면증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네. 나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거든. 대신 나는 자다가 화장실을 자주 가. 화장실 때문에 자주 깨는 편이야.”
“요셉씨 힘들겠다. 제가 그 마음 잘 알아요. 저도 불면증 심했거든요. 잠 안 오면 정말 괴롭잖아요. 그런데 저는 남편이랑 연애하면서부터 불면증이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이요? 연애하니까 불면증이 바로 없어진 거에요?” 요셉이 물었다.
“아니요. 바로 없어지지는 않았고요. 6개월 이상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없어진 거 같아요.” 세아가 종수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나서 가끔 잠이 안 와서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럼 자기 만나서 불면증이 없어진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야? 나 만나고 안정감이 드니까 불면증이 사라진 거지.” 종수가 강하게 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다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니까?”
“그건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겠지. 요즘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잖아.”
“뭐.. 그렇다고 치자.” 세아가 요셉을 보며 말한다. “요셉씨도 연애하면 불면증이 없어질 수도 있을 텐데. 몇 달 전에 소개해준 내 친구랑은 왜 연락 안 해요? 지영이는 요셉씨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요셉이 와인 잔을 비우며 말한다. “저랑은 잘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저한테 과분한 분이기도 하고요.” 종수와 세아도 요셉을 따라 와인 잔을 비웠다.
종수가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한다. “야! 한 번 보고 잘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아? 지영씨는 너 마음에 들어 했다니까. 안 맞는다느니, 과분하다느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연락해 봐. 한 번 만나 보라고. 몇 번 만나다 보면 지영씨만의 매력이 보일 수 있어.”
“억지로 그러지마.” 세아가 종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지영씨한테 다시 연락하기는 좀 그렇지.. 나도 인연을 빨리 만났으면 좋겠어. 두 사람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사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했어. 요즘에 누가 스물아홉에 결혼해. 삼십대 초반도 빠르다고 하는데.” 세아가 말했다.
“맞아. 그렇기는 해.” 종수도 세아 말에 동의한다.
“아 맞다. 요셉씨, 점 보러 가는 거 어때요? 제가 잘 아는 집이 있거든요. 완전 잘 봐요. 저랑 같이 가서 연애운 한 번 물어 봐요.”
요셉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점이요?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서요.”
“세아야, 다른 사람한테 권하지는 말라니까. 세아가 점 보는 걸 워낙 좋아해. 하하. 그리고 요셉이 집은 교회 다녀.”
“부모님이랑 누나는 다니는데 저는 교회 안 다녀요. 어릴 때는 다녔었는데 지금은 안 다녀요.”
세아가 종수를 보며 말한다. “그냥 재미로 보는 건데 뭐 어때? 교회 다니는 거랑 전혀 상관 없어. 내가 권해서 본 애들은 다 재미있어 했단 말이야. 더군다나 요셉씨는 교회도 안 다닌다고 하잖아.”
“하하. 그럼요. 당연히 재미로 볼 수 있죠. 사실은 얼마 전에 점 봤어요.” 요셉은 세아의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아까 안 믿는다며?”
“응 안 믿어. 내가 본 게 아니라. 누나가 점 보러 갔다가 내 것도 봤다고 하더라고.”
세아가 종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한다. “거봐. 요셉씨 누나도 보잖아. 그냥 재미로 보는 거라니까. 뭐라고 했대요? 좋은 사람 만난대요?”
“누나 말로는 사주도 보고 신점도 보는 유명한 집이래.”
요셉의 말에 세아는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오! 그렇구나. 그 집 저도 좀 알려주세요. 점괘가 어떻게 나왔어요?”
“저는 안 믿는데 누나한테 들은 대로만 얘기할게요. 관운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관운이 많다면서 혹시 동생이 공무원이냐고 묻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누나가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법조계에서 일하냐고 물었대요. 그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점 보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그럼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동생은 대기업에 다녀서 관운이랑은 거리가 먼 거 같다고 누나가 말했나 보더라고요. 그랬더니 그 점 보는 사람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요즘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워낙 어려워서 대기업 입사도 관운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지 뭐에요. 저는 이 대목을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어쨌든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앞으로 회사에서 크게 성장하고 승승장구 할 거라고 했나 보더라고요. 그 이유는 관운이 좋아서. 요즘 세상에는 관운이 좋은 사람이 대기업에 들어가면 더 좋다고 그러면서, 공직에 있는 거보다 훨씬 더 잘 된 거라 그랬대요. 세상이 바뀌면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져야 하는데, 자기니까 이렇게 볼 수 있지 아무나 이렇게 못 본다는 말까지 했대요. 제가 보기에는 무언가 억지로 끼워 맞춘 거 같은데 우리 누나는 잘 맞춘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점술에 조예가 깊은 세아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확실히 억지스럽죠?”
세아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요. 제가 볼 때는 완전히 잘 맞는 거 같아요. 세상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직업이 있고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도 많은데 대기업 다니면 당연히 관운이 있는 거죠. 요셉씨가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의사였으면 틀렸다고 할 수 있겠죠. 대기업에 다니는 건 관운이 완전히 좋은 거죠. 저는 그 집 진짜 용한 거 같은데요. 누님한테 어딘지 좀 물어봐 주세요.”
“그래요? 저는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졌어요.”
“또 뭐라 그랬대요?”
“인생 전반적으로 큰 굴곡이 없는 좋은 운을 타고 났대요. 사업은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굴곡이 없다니.. 요셉씨 사주가 아주 좋네요. 연애운이나 결혼운은 뭐래요?” 세아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믿지는 않지만 올해 운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그랬나 봐요. 빠르면 한두 달 안으로 만날 수도 있다고. 하하.”
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셉을 쳐다본다. “한두 달 안에 운명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요?  그렇게까지 얘기해주는 사람은 처음 봐요. 진짜 용한 사람인가 보네. 요셉씨! 왠지 느낌에 곧 운명을 만날 거 같아요.”
“그러게 정말 누구 만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좋겠다. 야, 그냥 믿어 봐. 좋은 얘기인데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종수가 요셉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아유, 말도 안 되지. 내가 한두 달 안에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한들 나는 점 본거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해. 점쟁이가 예지력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맞았을 뿐인 거지.”
세아가 발끈한다. “아니, 만났으면 맞춘 거죠. 왜 상관이 없어요? 당연히 예지력이 있다고 봐야죠.”
“그러게 만났으면 상관 있는 거지. 그런걸 어떻게 알고 맞추겠어?”
요셉은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건들이 무수히 반복해서 일어나는데 아무라도 막 예측을 해대면 한 두 개는 얻어 걸린다고 생각 안 해? 그리고 내 나이가 누굴 만날 수도 있는 나이라 맞춘다고 해도 신기해 할 거 전혀 없다고 봐. 세상에 무수히 많은 만남 속에서 그냥 하나 얻어 걸린 거라고. 사람들은 틀린 건 쉽게 잊어버리고 맞춘 건 잘 기억하기 때문에 잘 맞춘다고 착각할 뿐이야. 더군다나 논리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는데 어떻게 믿어?
세아는 요셉의 말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왜 근거가 없어요? 사주가 됐든 신점이 됐든 다 나름의 논리가 있다고요. 이 세상에 다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라고요.”
“하여간 까다롭기는.. 그 정도 맞추면 인정해야지.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 넌 세상 아무것도 안 믿는 거야? 세아 말대로 세상에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야. 완전히 틀리면 누가 보러 가겠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걸 믿어. 과학이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많을 걸 설명하고 있잖아. 아직 모르는 분야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계속 새로운 진실을 찾고 있다고.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운명론을 어떻게 믿는다는 거야? ”
“누가 이공계 아니랄까 봐. 나도 이과지만 넌 융통성이 너무 없어. 세상을 좀 너그럽게 바라봐. 나는 인간에게 주술적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 필요를 넘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종교도 다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고. 그걸 너무 과학적으로 따지고 드는 게 웃긴 거야. 정말 한두 달 안에 누굴 만나서 결혼까지 한다면 점쟁이 말을 포용해 줄 수 있는 거잖아. 하여간 쟤는 어릴 때부터 인정머리가 없었다니까.” 종수는 말이 끝나자마자 잔에 남은 와인을 비웠고 안주를 입에 넣었다.
“음.. 나는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 엄마도 내가 곧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말해. 난 그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어머! 어머니도 믿으시는구나. 거 봐요.” 세아가 반가운 듯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엄마가 요새 저 좋은 사람 만나라고 새벽 기도를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야! 어머니께서 아들 잘 되라고 새벽에 기도하시는데 너도 좀 믿어라. 그걸 과학이 어쩌고 저쩌고 할 문제는 아니지.
“그렇기는 한데 아닌 건 아니지.” 요셉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아를 보며 종수가 말한다. “얘랑은 대화가 안 된다. 늦었다. 우리 남은 와인 마시고 마무리 하자.”
“나는 요셉씨가 곧 운명의 누군가를 진짜로 만날 거 같아.” 세아가 말했다.
“만나도 그건 우연이라니까요.”
“요셉씨 그렇게 안 봤는데 고집 장난 아니네요. 하하.”
“와! 정말 이 자식 징하다 징해. 내가 졌다. 자자, 마지막 잔 짠하고 끝내자. 요셉아 자주 놀러 와.”
“그래요 자주 놀러 와요. 요셉씨랑 이런 얘기하는 거 답답하기도 하지만 은근히 재미도 있네요. 하하.”
“세아씨, 저도 완전 답답했거든요! 하하. 농담이에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종수야, 잘 먹고 잘 놀다 간다.”

한 달 후. 요셉은 협력업체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회의실에 요셉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협력업체의 팀장과 직원 셋이 있다. 요셉은 개발 중인 장비 테스트 결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팀장님 말씀대로 빛의 난반사가 심해서 결과값이 잘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하나의 광원으로만 테스트 하지 마시고요. 할로겐, LED, 레이저. 다양하게 실험해 주세요. 음.. 이미지 센서는 아무래도 CMOS에서 CCD로 바꿔서 테스트해 보죠. 지금은 비용 절감보다 민감도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각 부품의 성능만 가지고 결과값을 예측해서는 안됩니다. 한두 번 만족할 만한 결과 값이 나왔다고 만족해서도 안 되고요. 반복해서 테스트하고 계속 수정, 보완을 해야만 재현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다들 잘 아시잖아요? 결과를 끊임 없이 의심하고 반복해서 실험해야만 장비의 성능과 효율을 높일 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로보틱 모듈 담당하시는 분이 누구시죠?”
“접니다.” 가장 끝에 앉아 있던 협력업체 직원이 대답했다.
요셉은 대답한 사람을 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쉽지는 않겠지만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민해 주세요. 지금 설계대로라면 장비가 너무 커집니다. 이렇게 해서는 시장에서 경쟁력이 전혀 없어요. 컴팩트한 디자인이 나 올 수 있도록 설계 단계에서부터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기구 부피나 구동하는 공간을 감안하면 줄이는 게 쉽지 않겠지만, 머리를 짜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부탁 드릴게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도 될 거 같은데요. 혹시 다른 의견이나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다들 아무도 대답이 없고 표정도 좋지 않다.
“오늘 회의는 제 의견만 너무 일방적으로 말한 거 같아서 죄송한데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팀장님, 제가 어려운 부탁 드린 거 알고 있습니다.”
협력업체 팀장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한다. “아니에요. 저희는 연구원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일하기가 편합니다. 방향성이 확실하니까 불필요한 일을 최소화할 수 있잖아요. 저희야 당연히 연구원님 입장을 이해하고 있죠.”
“서로가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라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반복해서 테스트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회의록은 작성되는 대로 보내주시고요. 다음 미팅은 2주 후에 하도록 할게요. 시료는 바로 준비해서 내일까지 보내드리도록 할 테니 일정 지연되지 않게 최대한 신경써 주세요. 다음 번에는 오늘보다 결과가 더 좋았으면 좋겠네요. 혹시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면 미리 알려주시고요. 그래야 저도 일정 조정해서 회의 시간 다시 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요셉과 협력업체 직원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회의를 마쳤다.
요셉은 협력업체 사무실에서 나와 테헤란로를 걷고 있다. 협력업체 사무실은 요셉이 다니는 회사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협력업체 팀장이 팀원들과 함께 회사로 오겠다는 걸 요셉은 잠시 걸으면서 바람도 쐴 겸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 요셉은 장비 개발을 외부에 위탁하지 말고 사내에서 직접 개발하자고 의견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 내 욕하고 있겠지? 팀장은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던데. 어린 놈이 가르치려 든다, 개발하고 테스트 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다, 저 놈은 주둥아리로 개발하려 든다,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 너무 한 거 아니냐, 완전히 갑질이다. 별의별 욕을 다하고 있을 거다. 욕 먹어도 어쩔 수 없다. 일하는 태도나 아웃풋으로 보아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아무 결과도 못 얻을 것이 뻔하다.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고 믿고 맡기면 대충 할 게 분명하다. 더 확인하고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지. 내가 이럴 줄 알고 사내에서 개발을 하자고 한 거였는데. 다들 편하게만 일하려고 한다니까. 분명 후회할 거야.’
요셉은 협력업체와 했던 미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회사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고,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적당히 해도 되는데 말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지도 알 수 없다. 아무리 크고 좋은 회사라고 직원들의 인생까지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책임감을 강조한다. 아니 강요한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잘못 된다면 모든 책임은 요셉 자신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올게 뻔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왼쪽 머리 안 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든다. 점점 더 심해진다. 통증이 너무 심해 저절로 왼쪽 눈살이 찌푸려진다. 더 심해지기 전에 진통제를 먹는 게 나을 듯 하다. 요셉은 주위에 약국이 있는지 둘러본다. 한 5미터 앞에 약국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약국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약국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머리 위로 가벼운 물체 하나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물체는 머리를 맞고 요셉의 신발 앞에 떨어졌다. 요셉은 허리를 숙여 그 물체를 집었다. 스마트폰 하단에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스마트폰 펜이다. 요셉은 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색 작은 구름 하나가 떠 있다.
‘뭐야? 저 구름에서 이 펜이 떨어졌을 리는 없을 거고? 이 건물에서 누가 떨어뜨렸나?’’
가까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 본다. 이 펜을 떨어뜨려 건물 아래를 내려다 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위 건물을 둘러본다.
‘뭐지? 이 펜이 어디서 떨어진 거지? 신기하네.’
요셉은 얼마 전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있는 펜을 잃어버렸다. 지금 머리 위로 떨어진 펜은 요셉이 잃어버린 것과 같은 기종이다. 동일한 브랜드의 동일한 모델이며 심지어 색깔도 잃어버린 펜과 똑같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하단에 주운 펜을 끼워 밀어 넣었다. 펜은 “딸깍” 소리를 내며 스마트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신기하다. 요셉은 주위를 둘러본다. 이 펜을 잃어버려 찾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펜을 살지 전화기를 바꿀 때까지 그냥 쓸지 고민하던 차였다. 펜이 없어 메모를 손으로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잘 된 일이다. 요셉은 다시 회사 방향으로 걸어간다.
‘얼마 전 잃어버린 펜과 똑같은 펜이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근처 건물에서 떨어뜨렸겠지만.. 확률적으로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게 운명인가?’
요셉은 멈추어 서서 뒤돌아 펜이 떨어진 장소를 봤다. 저 멀리 약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머리가 아파서 약국에 가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 보니까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급하게 약국으로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통증이 없다. 스마트폰 펜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두통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두통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회의를 하고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 졌다. 요셉은 회사로 돌아가서 기분 좋게 일하다가 퇴근했다. 그날 밤은 평소와 달리 불면증도 없이 숙면을 취했다.

2주 후. 요셉은 사무에서 일하고 있다. 오전에는 협력업체 미팅을 다녀왔다. 2주 전에 그렇게 제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달 후면 장비 1차 시연을 해야 하는데 차질 없이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다. 격주에 한 번 하던 회의를 시연 전까지 매주 하자고 했다. 그래도 불안하다.
‘또 내 욕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지들이 똑바로 하지 못 한 건 생각도 못하고 남 탓만 하고 있을 거야. 내가 얘기한 거 반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열 받고 짜증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이때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린다. 종수에게서 온 전화다.
“종수야!”
“요셉아, 통화 괜찮아?”
“그럼, 괜찮지. 이 시간에 왠 일이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목소리? 아무 일도 없어. 사무실에서 크게 얘기하기가 좀 그래서 그래.”
“그렇구나. 너 잠깐 시간 돼? 나 미팅 때문에 너희 회사 근처에 왔거든. 지금 막 미팅 마쳤는데 괜찮으면 잠시 차라도 한 잔 어때?”
“그래? 지금 별로 안 바빠서 괜찮아. 차 한 잔 하자.”
“잘 됐다. 나는 한 5분 정도면 너희 회사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5분 후에 전에 갔었던 카페 데우스에서 보자.”
“그래 좋아. 나 하던 일만 마무리 하고 바로 내려갈게.”
“오케이.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하던 일 천천히 마무리 하고 와. 이따 보자.”
전화를 끊었다. 마침 짜증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차에 잘 됐다. 요셉은 팀장에게 친구가 찾아와서 잠시 외출하고 오겠다고 보고한 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종수와 만나기로 한 카페로 서둘러서 걸어간다. 걷는데 발이 조금 불편하다. 얼마 전 새로 산 로퍼를 오늘 처음 신었다. 뻣뻣한 가죽이 아직 발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불편함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불편함이 새 신을 신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종수로부터 카페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톡이 왔다. 톡을 확인한 요셉은 좀 더 빠르게 걷는다. 카페 데우스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있는 종수의 뒷모습이 보인다.
“종수야!” 요셉은 종수 맞은 편에 앉았다.
“요셉아, 빨리 왔네. 나 때문에 일 하다 말고 온 건 아니지?”
“아니야. 너 뭐 마실래?”
“나는 아메리카노.”
요셉은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종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말한다. “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여기 커피가 맛있어. 아메리카노가 진하고 향도 좋아. 다른 카페는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진한 맛이 안 나.”
“맞아. 여기 커피 맛있어. 그러니까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데도 잘 되지. 커피 맛뿐만 아니라 카페 분위기도 좋고.”
종수가 카페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맞아. 프랜차이즈 아닌 곳이 이렇게 잘 되기가 쉽지 않아. 커피 맛도 맛이지만, 네 말대로 나는 이 카페 분위기도 너무 마음에 들어. 왠지 모르게 여기만 오면 편안하고 안정감이 생겨. 분위기가 아늑해. 이 근처에 올 일 있으면 나는 무조건 카페는 여기만 온다니까. 내 주변에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카페 데우스 추천 많이 해줬거든. 와본 사람들은 다 좋아라 하더라고. 안 좋아할 수가 없지.”
“그 정도로? 나도 좋아는 하는데 너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하.”
“그런데 요셉아, 아까 전화 받았을 때 목소리가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사무실에서 시끄럽게 전화하면 안되니까 일부러 작게 얘기한 것도 있고, 사실은 오전에 좀 심하게 스트레스 받는 일도 있었어. 그래서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나? 안 그래도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 좀 식히려고 했는데 마침 너한테 전화가 온 거 있지. 완전 반가웠어! 네가 반갑기는 처음이었어.”
“하하. 전혀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아니던데. 아무튼 뭐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거야?”
요셉은 협력업체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종수에게 말했다.
요셉의 말을 다 들은 후 종수가 말한다. “난 또 무슨 큰 일 있는 줄 알았네. 내가 볼 때는 심하게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닌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직장생활이 어디 있어?”
“야, 네가 몰라서 그래. 이 프로젝트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요셉아! 일하다 보면 그 정도 문제는 매번 발생하기 마련인데 네가 유독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듯 한데. 세상에 네 입맛에 딱 맞게 일하는 협력업체가 있을 거 같아? 각자 다 생각의 차이도 있고, 일하는 방식에 차이도 있는데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로 딱 맞춰서 결과를 가지고 오겠어. 세상에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실제로 그 사람들이 일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네 기대가 너무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 정도의 문제랑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허다하게 일어나고 계속 반복 돼. 난 또 뭐 엄청난 스트레스인 줄 알았네. 너 같은 성격이 꼼꼼하게 일은 잘하는데, 예민해서 자기 자신을 굉장히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나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일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나한테 너무 중요해서 그래. 그래서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아. 진짜 내 평가에 엄청 중요한 프로젝트야. 올해 고과 잘 받아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진짜로 그 협력업체 사람들이 일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이럴 줄 알고 내가 외주 주는 걸 반대했었다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 뭔지 알겠어. 그 사람들 일 못할 수도 있지. 잘 해도 네 성에 안 찰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내 말은 아마 너는 지금보다 덜 중요한 프로젝트였어도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고 지금 협력업체보다 더 일 잘하는 곳을 만났어도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라는 거야.”
“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종수야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안다니까. 아는데.. 바꿔 생각해보면 네가 협력업체면 갑의 입맛에 딱 막게 결과를 내 놓았을 거 같아? 그게 그렇지 않다니까.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누가 됐든 갑은 을이 성에 안 차고, 누가 됐든 을은 갑의 요구를 맞추기 쉽지가 않은 거라고. 네 성격상 스트레스를 필요 이상으로 받아서 그렇지 회사 아주 잘 다니고 있는 거 같은데. 아주 꼼꼼하게 협력업체도 잘 갈구고 말이지.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겠어. 역시 너는 관운이 좋은 가봐.”
“야, 여기서 관운이 왜 나와? 내가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지 알고 승승장구야? 앞으로 뭐 먹고 살지가 걱정이다.”
“지금 회사 잘 다니고 있고만. 쓸데없이 뭐 먹고 살지 걱정은 왜 하는 거야?”
“너는 그런 걱정 없어?” 요셉은 종수 뒤 쪽을 흘끗 보면서 말한다. “너도 회사를 평생 다닐 수는 없을 거잖아. 우리가 월급 받아봐야 얼마나 모을 수 있겠어. 회사가 우리 인생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언젠가 자기 일을 찾아야지. 하기야 너는 벤처 창업 멤버니까 회사가 아주 잘 돼서 상장도 하고 그러면 우리사주로 크게 한 몫 챙길 수도 있겠다.” 요셉은 말을 하면서 종수 뒤를 흘끗 흘끗 반복해서 봤다. 말을 마치자마자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에 다 마셨다.
“우리 회사 잘 되려면 아직 멀었어. 네 말대로 나도 고민 왜 없겠어. 무지 많지. 그런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일부러 외면하면서 사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 나도 말은 안 해서 그렇지 고민도 많고 불안하지.”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게 처갓집이 엄청 부자잖아. 나 너희 신혼집 보고 깜짝 놀랐잖아.”
“야, 장인 돈이 내 돈이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집은 3년만 살기로 한 거야. 3년후에 나와야..” 종수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칫한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자꾸 어딜 보는 거야?”
종수가 뒤를 향해 몸을 조금 돌린다.
“종수야 뒤에 보지마. 나 방금 눈 마주친 거 같아.”
“누구랑?” 종수가 몸을 돌리다 말고 말했다.
“우리 반대편 끝에 있는 여자랑. 바로 너 등 뒤 맨 끝 좌석.”
“그럼 그렇지. 얘기하는데 자꾸 어딜 그렇게 보나 했네. 예뻐?”
“응. 내 이상형이야. 전에도 이 카페에서 한 번 봤었어. 오늘 스타일 너무 괜찮다. 품이 큰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었어. 신발은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었고 왼쪽 발목에는 은색 발찌를 했어. 바지 밑단과 스니커즈 사이에 발찌가 눈에 확 띈다. 단정하게 입었지만 칼라 매치를 잘 해서 세련돼 보이고 발목에 발찌는 내면에 감춰 놓은 화려함을 살짝 드러내는 거 같아. 안 봐도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지?”
“야, 안보고 어떻게 알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엄청 궁금하네. 나 뒤 돌아봐도 돼?”
“아니 안돼. 그러면 저쪽에서 눈치 챌 거 같아.
“눈치 채면 어때? 하여간 소심해가지고. 야, 우리 조각 케익 하나 먹자.”
종수는 자리에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로 가면서 요셉이 말한 여자를 곁눈질로 봤다. 케익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흘끗 한 번 보고 요셉을 쳐다 봤다. 요셉도 종수를 쳐다 봤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종수는 케익을 들고 자리로 돌아 왔다.
종수가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말한다. “둘 중에 벽 쪽에 앉은 사람 말하는 거 맞지? 진짜 괜찮더라. 이 자식 눈만 높아가지고.”
“그렇지?” 요셉도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요셉아, 가서 말 걸어 보는 거 어때? 명함 주면서 번호 물어 봐. 넌 대기업 다니니까 명함 주는 것도 어필이 될 수 있어. 무작정 번호 달라는 거 보다 나을 거 같은데?”
“아.. 안돼. 나 그런 거 못 해.”
“야야!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번호 잘 물어보는 사람들은 날 때부터 할 줄 알아서 하겠어? 그냥 용기 내서 하는 거겠지.”
요셉은 한참 말 없이 고민을 한다. “아니야. 못하겠어. 적어도 오늘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다음에 만나면 해야겠어.”
“다음에 만날 줄 어떻게 알아?”
“두 번이나 만났다는 건 여기 자주 온다는 거 아닐까? 내 생각에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 같아. 운명이라면 또 만나겠지.”
“운명 같은 거 믿지도 않는다는 놈이. 너 말 잘했다. 너희 누나가 점 봤을 때 곧 만난다는 그 인연이 저 사람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인연이 왔으면 잡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네 어머니께서도 기도한다며 네가 그 기도에 부응해야지.”
“그거랑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어? 운명이 왔으면 붙잡아야지. 이 멍청한 놈아.”
“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간다.”
“빨리 가서 말 걸어 봐.” 종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그녀는 함께 있던 사람과 카페를 나갔다.
“야 됐다, 됐어. 너 학교 다닐 때는 연애 잘만 하더니 요새는 왜 그러냐?”
“그때는 자연스럽게 만난 거잖아. 비교할 걸 비교해.”
“따라나가서 말이라도 걸어보지. 아유, 답답해가지고는.” 종수가 시간을 확인한다. “난 사무실 들어 가봐야겠다. 너도 들어가서 일해.”
“그래. 종수야 다음에 또 보자. 세아씨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날 밤. 요셉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카페에서 봤던 그녀가 자꾸 떠올라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두운 방안은 그녀 모습으로 가득하다. 종수 말대로 용기를 내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된다. 운명을 놓친 게 아닌지 불안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말을 걸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요셉은 그날 이후로 카페 데우스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Epilogue 1
10년 후. 한참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이다. 전화를 받았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네. 요셉님도 안녕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부탁 하나 드리려고요.”
“저한테 부탁을요? 뭔데요?”
“제가 여성 한 분 소개시켜 드리려고 하는데 아마 요셉님 스타일은 아닐 거에요. 요셉님이랑 나이가 동갑이거든요. 요셉님이 동갑인 여성분 원하지 않는 거 잘 아는데요. 이번에 절 봐서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될까요? 이 여성분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요. 이 분한테 어떻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느냐고 컴플레인을 받았거든요. 자기를 안 좋아해도 되니 맘에 드는 사람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이 분이 요셉님 같은 스타일을 원하거든요. 이번만 눈 한 번 딱 감고 만나주세요. 부탁 드려요. 이번에 제 부탁 들어주시면 제가 요셉님이 원하는 스타일로 열심히 아니.. 미친 듯이 찾아 볼게요.”
“하하. 정말 꼭 찾아주셔야 해요. 가입한지 6개월이 됐는데 저도 아직 못 만났잖아요. 그럼 만나 볼게요. 이번 주 일요일 2시로 약속 잡아주세요.”

일요일 오후 강남의 한 카페. 요셉은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만나기로 한 여성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 정요셉씨 맞으신 가요?”
“네 맞는데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자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정요셉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이마리라고 해요.” 마리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저도 5분 일찍 온 건데 일찍 오셨네요.”
“아니요. 오래 안 기다렸습니다. 저도 지금 막 왔습니다. 그런데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한 분 밖에 없어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는데.. 맞았네요. 하하. 제가 좀 촉이 좋아요.”

요셉은 마리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다. 요셉과 마리는 6개월을 사귀고 결혼했다. 결혼하고 3년은 두 사람 모두 꿈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반복하면서 살았다. 심각한 이혼 위기도 두 번 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혼까지는 가지 않았고 평생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함께 살았다.

 

2
*오늘의 운세
오늘 하루 말과 행동을 조심하세요. 부주의함으로 중요한 인연을 놓칠 수도 있고, 사소한 실수로 금전적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운입니다.

“뭐야! 좋은 것 좀 나오지. 찜찜하게시리.”
마리는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다. 출근하면서 사온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마리는 1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한 마리는 과학서적 전문 번역가이다. 다른 분야 번역은 의뢰가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지금은 과학 분야 번역에 집중하여 입지를 다져야만 하는 시기다. 언젠가는 번역하는 분야의 영역도 넓히고,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다. 마리는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70%만 벌 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거보다 훨씬 많이 버는 달도 있고 그렇지 못한 달도 있다. 얼추 평균해서 기대했던 만큼은 벌고 있다. 마리는 회사를 나오기 전 잘못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기대했던 수익을 벌 수만 있다면 직장인보다 프리랜서가 마음만큼은 자유로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프리랜서가 되고 보니 막연한 불안함이 항상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자유로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이게 과연 진정한 자유로움인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일이 끊길 수도 있다. 마리의 불안은 부정적인 상상력을 계속 자극한다.
‘언젠가 인공지능이 번역을 도맡아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이 있는 과학 지식을 갖게 될 것임은 확실하다. 단어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더 많이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르는 단어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과학서적을 더 잘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런 날은 반드시 올 텐데 큰 일이네. 회사를 나오기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는 회사 다니기가 싫어서 프리랜서의 좋은 면만 봤을 거다.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런 날을 대비해 내 글을 써야만 해. 그런데 사람들이 과연 내 글을 좋아할까? 그만 생각하자. 오늘의 운세가 안 좋아서 그런가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네.’
마리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그래도 커피를 마시니 안 좋았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듯 하다.
‘과학서적 번역,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이것도 다 인간적인 감성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좋게 생각하자.’
마리는 사업하는 친구 미지 사무실에서 글 쓰는 작업을 한다. 미지는 고등학교 친구이다. 마리는 회사를 처음 나왔을 때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일했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일하는 느낌을 줘 카페가 업무 장소로 나쁘지 않았지만, 날이 거듭 될수록 자신만의 업무 공간이 없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리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미지의 회사는 사업이 잘 되면서 강남에 있는 넓고 좋은 사무실로 이사를 하게 됐다. 마리가 카페를 전전하면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던 미지는 마리에게 새로 이사한 사무실에 여유 공간이 있으니, 책상 하나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을 해준 미지가 너무 고마웠다. 미지는 괜찮다고 했지만, 매달 임대료 명목으로 미지 회사에 11만원을 내고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미지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좋은 사무실을 쓰게 됐다. 복사기, 프린터, 팩스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너무 편하다. 무엇보다 사무실이 집이랑도 가깝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미지는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지 않고 쥬얼리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미지가 너무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다. 미지의 사업은 처음 2, 3년 동안은 매우 힘들었고 3년 전부터 사업이 잘 되기 시작했다. 매출은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고, 시작할 때 한 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스무 명으로 늘었다. 미지의 사업이 이렇게 잘 되기까지는 아버지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 초기 투자금에다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지원만으로 미지가 지금의 성과를 이룬 것은 절대 아니다. 미지는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미지 아버지는 큰 사업체를 운영한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사회 생활을 하다 적당한 시기에 아버지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처음부터 아버지 회사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지는 자기 사업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다. 미지는 쥬얼리 사업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성실함에 있어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미지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지 감탄이 나올 때가 많다. 마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렇게 사업을 잘 일궈나가는 미지를 보면 항상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집도 부자고 본인 스스로도 돈을 많이 버는 미지가 부럽기도 하다.
마리가 시간을 확인한다. 10시 37분이다. 미지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미지는 2주 전 유럽 출장을 떠났다 어제 귀국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좀처럼 늦지 않는 미지인데 마리는 미지가 왜 늦는지 궁금하다. 미지에게 톡을 보내려고 할 때 미지가 출근한다.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미지를 보고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인사를 한다. “대표팀, 안녕하세요?’, “출장 잘 다녀오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미지가 아주 환한 표정으로 직원들의 안부를 묻는다. “다들 잘 있었어? 별일 없었지?”
“네. 별일 없었습니다.”
“윤대리, 점심 먹고 1시 30분에 전체 회의할 수 있게 준비해.”
“대표님, 3시에 하면 안 될까요? 출장 자료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윤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네. 이슈가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겠네. 그럼 3시로 하고 늦어질 거 같으면 미리 얘기해 줘.”
미지가 고개를 돌려 마리를 쳐다 본다. 미지와 눈이 마주친 마리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미지도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도 미지를 따라 들어간다.
“미지야, 출장 잘 다녀왔어?”
“응. 잘 다녀왔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 잠은 잘 잤어?”
“아니. 거의 한 숨도 못 잤어.
“왜 못 잤어?”
“너무 피곤해서 잠이 잘 안 올 때가 있잖아. 어제가 그랬어. 어떤 건지 알지?”
“응. 나도 알아. 피곤은 한데 잠은 안 오고 말똥말똥한 거. 그냥 오늘 하루 쉬지 그랬어?”
“힘들어서 쉴까도 생각했는데 사무실을 2주나 비웠잖아. 마음 편하게 못 쉴 거 같아서 그냥 나왔어.”
“하루 쉰다고 회사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에 놀러 간 게 아니라 일하러 갔다 왔는데 하루 정도 쉬어도 돼. 회사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이 안 놓이는 거야? 아무튼 잘 나가는 애가 더 앓는 소리한다니까.”
“야! 잘 나가기는 뭐가 잘 나가! 이제 조금 잘 되기 시작하는 거야. 사업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아빠한테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은행 대출도 많단 말이야. 지금 하는 걸로는 많이 부족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돼야 해.”
“하여간 욕심은 많아가지고 앞으로 더 잘 되겠지. 내가 어릴 때부터 널 봐왔잖아. 넌 그야말로 성실의 아이콘이라고. 지금 보다 더 잘 될 거니까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먹어.”
“하하. 고마워. 그런데 마리야, 너 너무 기계적으로 좋은 말 해주는 거 아니냐?”
“야, 너는 왜 좋은 얘기 해줘도 지랄이야? 기계적으로 하는 말 아니거든.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너무 의심이 많아.” 미지 말에 마리가 발끈했다.
“마리야, 농담이야. 발끈하기는.. 어쨌든 아빠한테 빌린 돈은 빨리 갚아버리고 싶어. 나 졸업하자마자 사업한다고 아빠가 투자했을 때 새엄마가 엄청 반대했었어.” 미지는 말을 하려다 잠시 멈칫한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지금에 만족 할 수 없는 상황이야. 네가 몰라서 그래.”
“그래 알았어. 그나저나 유럽 출장 갔던 일은 잘 됐어? 부럽다 나도 유럽 가고 싶다.”
“그러게 시간 내서 우리 같이 유럽여행 가자.”
“완전 좋아. 너무 재미있겠다.”
“아무튼 출장은 잘 된 일도 있었고 심각한 문제도 있었어. 다행히 괜찮은 세공 업체 몇 군데를 알게 됐고 기존 제품은 생산 단가를 조금 더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찾았어. 그런데 지금 문제가 두 달 후에 출시해야 할 신규 모델이 우리가 줬던 디자인대로 샘플이 안 나왔어. 그동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어서 믿고 맡겼는데 사고가 터지네. 아! 진짜 어찌나 짜증나고 열 받던지. 다시 가공, 세공 해서 샘플 만들고 우리가 그걸 다시 확인 후 생산까지 하려면 아무래도 출시 예정일을 못 맞출 거 같아. 홍보랑 마케팅 일정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 틀어지게 생겼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두 달이나 남았는데 그 일정 맞추기가 어려운 거야?”
“응. 쉽지 않을 거 같아. 신규 모델 출시는 일정을 다 다시 짜야 할거 같아. 휴~ 머리 아프다. 일도 이렇게 꼬이는 상황에서 같이 출장 간 윤대리 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윤대리 일 잘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 할 때도 있고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었지.”
“항상 마음에 들 수는 없겠지. 세상에 대표가 원하는 만큼 일 잘 하는 직원이 얼마나 되겠어? 그런 거까지 감안하면서 같이 일해야지.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너무 짜증나더라고. 나는 애가 타는데 걔는 아주 신났더라고. 여행 온 줄 알아.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진짜 출장가있는 2주동안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어. 샘플이 디자인대로 안 나온 날은 일 다 마치고 호텔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얼굴에 아주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너무 놀라서 손으로 벌레 떨어지라고 얼굴을 막 쳐냈어. 그랬더니 괜찮더라고. 그리고 나서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또 얼굴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이번에는 불을 켜고 거울로 얼굴을 봤더니 벌레가 안 보이더라고. 아주 작은 벌레 같아서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봤는데도 안 보이더라. 그래서 ‘뭐지?’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불 끄고 누웠는데 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길래 이번에는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했어. 비누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가면서 세수를 했어. 그리고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또 그러는 거야. 얼굴에 아주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 아주 미치겠더라고.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다시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 거울 보고를 반복했어. 아무리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벌레는 없는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실제로 벌레가 있는 게 아니구나.’하고 깨달았어. 그날 밤은 완전 꼴딱 샜어. 정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거기다가 윤대리까지 속 썩이니까 얘를 한국 돌아가자 마자 잘라야겠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출장 가서 정말 힘들었구나. 거의 신경쇠약이었네. 벌레 얘기는 충격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증상까지. 신규 모델은 정 안되면 출시를 좀 미뤄야지 어쩌겠어. 미지야,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너 진짜 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윤대리는 우리랑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미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워낙 사업을 일찍 시작해서 그렇지 윤대리 아직 경력이 짧다고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윤대리 처음으로 해외출장 가는 거였는데 어떻게 보면 설레는 게 당연하지. 다른데도 아니고 유럽으로 갔는데 말이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윤대리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니까 윤대리가 더 안 좋게 보였을 거야.”
“뭐.. 네 말대로 일이 꼬이면서 윤대리한테 더 화가 난 것도 있지. 그때는 정말 화가 너무 많이 나서 나도 내가 아니었어. 그래도 너랑 얘기하고 나니까 좀 기분이 풀리네. 마리야, 우리 점심 일찍 먹으러 갈까? 나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오랜만에 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좋아. 나도 오늘 아침 안 먹어서 배고파.” 마리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리는 미지랑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책상에 앉았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할 일은 많은데 졸음이 몰려 온다. 오전은 미지와 수다 떨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서적 1차 번역본을 두 달 후에 출판사에 넘겨야 한다. 남은 분량을 감안하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긴 하다. 그렇다고 그걸 믿고 게을리할 수는 없다. 마음의 여유는 항상 마감에 쫓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감에 쫓겼을 때 더 큰 문제는 번역 품질이 떨어진다는 거다. 그런데 졸음이 계속 쏟아진다. 의지만으로는 졸음을 몰아내기가 힘들다. 마리는 탕비실에 가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왔다. 달고 쌉싸래한 커피를 마시니 졸음이 사라지고 각성이 되는 듯 하다. 2시간 정도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다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마리는 이번에도 탕비실로 가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마시며 2시간 동안 번역한 내용을 천천히 살펴본다. 문장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야 하고 문장은 조금 더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아무리 읽어봐도 원문의 의도를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남은 커피를 한 입에 다 마셔버리고 일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집중이 안 된다.
‘도대체 2시간 동안 뭘 한 거야? 아침부터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마리는 건물 10층에 있는 정원에 가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한다. 우선 1층으로 내려가서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커피가 당기는 거야? 도대체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르겠네.’
10층에 도착하여 정원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밝은 빛이 마리에게로 마구 쏟아지면서 심하게 눈이 부신다. 눈은 금새 밝은 빛에 적응했다. 정원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다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만 하고 있나 보다. 마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햇빛도 쐬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니 답답한 속도 뚫리고 머리도 맑아진 느낌이다. 정원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기분 전환이 되다니 진작에 나와 바깥 바람을 쐴 걸 그랬다. 마리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진한 커피 향으로 입안이 가득 채워진다. 마리는 다시 하늘을 본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하나가 떠 있고 그 주위로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저 새들은 보이는 것처럼 정말 자유로울까? 그렇다면 나도 새가 되어 날아보고 싶다. 아니다. 새들의 자유도 불완전 할 거야. 아닌가? 그래도 땅에 붙어 있는 나보다는 나으려나?’
마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난간 쪽으로 걸어간다. 정원의 난간은 폭이 매우 넓고 높이는 마리의 명치 정도까지 된다. 커피가 담긴 컵과 스마트폰을 난간 위에 놓고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다. 다들 바쁘게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다들 어딜 저렇게 가나?’
긴 머리가 가볍게 날릴 정도의 바람이 분다. 시원하다. 바람은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뜻함을 잠시 사라지게 한다. 바람이 멈추면 다시 따뜻해진다. 마리는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또 마셨다. 이 때 마음에 안 드는 번역 문구를 수정 할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리 고민을 하고 머리를 쥐어짜내 보려 해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한 마리는 난간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스마트폰 하단에서 펜을 꺼냈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 꺼내다 손에서 펜을 놓쳤다. 펜은 난간에 떨어져 한 번 튀어올라 한 바퀴를 돈 후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마리는 밖으로 튀어나간 펜을 잡아 보려 했으나 손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재빨리 아래를 봤다. 펜은 빙글빙글 돌면서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어떤 남자 머리 위로 떨어진다. 워낙 가벼운 물건이라 사람이 다칠 염려도 없고, 펜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펜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에 마리는 바로 정원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37층에 있다. 10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두 번 정도 멈출걸 감안하면 계단으로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다. 마리는 비상구 계단으로 가서 1층까지 뛰어내려 갔다. 비상구를 빠르게 빠져 나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펜이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는 부근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어디에도 펜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튀어 멀리 날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큰 반경으로도 찾아 본다. 여전히 찾을 수가 없다. 있을만한 곳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주워갔나 보다. 마리는 늘 스마트폰 펜으로 메모를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무언가 생각나면 반사적으로 스마트폰 하단을 눌러 펜을 꺼내는 습관 있다.
‘진짜 짜증나네.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스마트폰 펜을 주워 간 거야? 스마트폰 펜 찾으려고 cctv를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리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봤다.
‘없네, 없어. 다시 사면 되지 뭐.. 비싸지도 않은데.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급하게 내려오느라 정원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다. 다시 정원으로 올라가니 난간 위에 아메리카노와 스마트폰이 그대로 놓여있다.

*오늘의 운세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세요.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 운명적 귀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마리는 출근하자마자 미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지야, 굿모닝! 오늘 왠 일로 일찍 출근했어?”
“뭔 소리하는 거야? 나 원래 일찍 출근해. 너야말로 오늘 일찍 왔다. 어제 푹 자고 일찍 일어났나 봐?”
“푹 자기는.. 나 어제 한 숨도 못 잤어.”
“왜?”
“모르겠어. 요새 갑자기 불면증이 생겼어. 진짜 밤에 잠 안 오면 너무 괴롭더라. 너도 여전히 불면증 심해? 출장 가서는 잘 때 얼굴에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까지 들었었잖아.”
“벌레 기어 다니는 느낌은 그 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멘탈이 완전히 나가서 그랬던 거 같고. 가끔 잠이 잘 안 올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불면증이 많이 좋아 졌어.”
“정말? 다행이다. 잠 잘 자는 비법 좀 알려줘. 나 정말 힘들어.”
“딱히 비법이 있는 건 아니고. 남자친구랑 같이 살면서부터 불면증이 좋아졌어. 그런데 이게 말이지, 집에서 나와서 좋아진 건지 아니면 남자친구랑 같이 자니까 좋아진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뭐.. 남자 친구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졌겠지. 나도 연애를 하면 좀 좋아지려나?”
“그럴 수도 있지. 너도 연애할 때가 됐어. 남자 안 만나지 꽤 됐잖아. 내 남자친구한테 너 소개해줄 만한 사람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마리가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정말 너 밖에 없다. 내가 성공하면 너한테 신세진 거 다 갚을 게.”
“신세? 뭔 소리하는 거야? 소개팅 해주는 게 무슨 신세야?”
“소개팅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좋은 사무실 쓰게 해주는 것만해도 신세지는 거지.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또 항상 나한테 잘 해주잖아. 나는 너한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난 또 뭔 얘기한다고. 내가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주겠어? 그리고 매달 사무실 쓰는 돈 입금 안 해도 돼. 그냥 써.”
“어떻게 그래? 얼마 안되지만 그런 건 확실히 해야지. 우리 관계가 오래 가려면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 해. 그런데 미지야, 나 오늘의 운세가 뭔 줄 알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웬 오늘의 운세? 뭔데?”
마리는 미지에게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여주면서 말한다. “네가 소개팅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났어. 글쎄 오늘의 운세가 귀인을 만난대. 운명적 귀인. 그래서 오늘 기분이 괜찮아.”
“그런데 너 이런 운세를 믿어?”
“믿는다기 보다 좋은 말 나오면 좋잖아. 재미 삼아 보는 거야.”
“너 화학 전공이잖아. 과학 전공한 사람도 이런 걸 믿는 구나. 네가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네. 하기야 인간은 누구나 불안한 존재니까.”
“그냥 재미로 본다니까 무슨 또 불안한 존재까지 나와. 너 왜 이렇게 진지하냐?”
“볼 거면 유명한데 가서 제대로 봐야지. 오늘의 운세처럼 한두 줄 나오는 걸 어떻게 믿어?”
“아 진짜, 그냥 재미로 보는 거라고. 간만에 좋은 운세 나왔는데 왜 초 치려는 거야?”
“초 치려는 게 아니라. 오늘의 운세는 너무 간단하잖아. 나 같으면 제대로 보러 가겠다고.”
“뭐.. 굳이 점까지 보러 갈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그래 알았어. 갈 마음이 없다면 굳이 볼 필요 없지. 네가 오늘의 운세 보고 기분 좋다고 하길래 말해 봤어. 그리고 마리야, 나 오늘은 점심 약속이 있어서 조금 이따 나갈 거야.”
“그렇구나. 그럼 나는 윤대리랑 먹을게.”
“내일은 같이 점심 먹자. 너 윤대리랑 내 욕하면 죽어.” 미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리가 미지의 방을 나가면서 말한다. “왜 네 욕할까 봐 겁나? 아주 내가 잘근잘근 씹어주겠어. 하하. 점심 맛있게 먹어.”
“아! 맞다. 마리야 잠깐만.”
“응?” 문을 열고 나가는 마리가 다시 들어왔다.
미지가 예쁘게 포장이 된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넨다. “이번에 나온 새로운 모델이야. 발찌인데, 지금 한 번 해봐. 잘 어울리는지 한 번 보자.”
“나 주는 거야? 와우! 땡큐.” 마리는 얼른 포장을 뜯었고 발찌를 발목에 착용했다.
두껍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늘지도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발찌다. 마리는 발찌를 처음 차본다. 발찌를 하고 몇 발자국 걸어 보았다.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조금씩 흔들리는 발찌의 느낌이 낯설다. 이 낯섦은 어색함 보다는 새로움의 낯섦이다.
“와! 너무 예쁘다. 너한테 잘 어울리네. 너는 키가 커서 그런지 발목도 길어 보여. 발목이 적당히 가늘면서 길어 보이니까 더 잘 어울리네.” 미지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 너무 예쁘다. 색도 그렇고 디자인도 화려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세련됐네. 너무 마음에 들어.”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나도 기분 좋다.”
“미지야, 고마워. 그럼 점심 약속 잘 다녀 오고.” 마리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미지의 방에서 나왔다.

윤대리와 점심을 먹고 온 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운세도 좋았고 선물까지 받아서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집중이 잘 된다. 번역하는 속도도 다른 날보다 빠르다. 오늘따라 번역한 문장은 다시 봐도 크게 손댈 거 없이 매끄럽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 선택했던 단어는 하나 하나가 다 마음에 든다. 오늘은 막힘이 없는 날이다. 이런 날은 좋은 흐름이 끊기지 않게 퇴근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한참 집중해서 일하는 중에 스마트폰 벨이 울린다. 너무 몰입한 나마지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마리는 화들짝 놀랐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지금 번역하고 있는 서적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최소희 대리이다.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왜 또 전화하는 거야?’
몰입을 방해하는 최대리의 전화가 짜증난다.
“최대리님, 안녕하세요?” 마리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지난주에 통화했는데 오랜만은 아니죠.”
최대리는 마리의 말에 멋쩍게 웃는다. “하하. 그러네요. 지난주에 통화했었네요. 작가님 지금 어디세요?”
“저는 지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마침 잘 됐네요. 제가 외근 나와서 막 일을 마쳤거든요. 지금 역삼동인데 작가님 사무실이 이 근처라고 들어서요. 혹시 작가님 시간 되면 잠깐 뵈려고요. 일 때문은 아니고요. 근처 온 김에 작가님이랑 차 한잔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편집자가 근처에 왔다는데 거절하기가 힘들다. “네 괜찮아요. 마침 쉬려던 참이었는데 잘 됐네요. 사무실 근처에 카페 데우스라고 있거든요. 거기서 봐요.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작가님, 저 거기 알아요. 그럼 거기서 뵐게요. 저는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고요. 작가님은 하던 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오세요.”
마리는 번역하던 문단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최대리한테 톡이 왔다.
『작가님, 저는 도착했습니다. 뭐 드실래요? 출발하실 때 연락 주시면 주문할게요. ^^』
『저 지금 출발해요. 제가 살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니에요. 제가 약속도 없이 뵙자고 한 건데 제가 사야죠. 작가님 좋아하시는 아메리카노 주문할까요?』
『네 그럼. 저는 에스프레소로 할게요. 투샷으로 부탁 드려요. ^^』
『네 작가님 천천히 오세요.』
‘설마 귀인이 최대리는 아니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카페 데우스로 갔다.
최대리는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있다. 마리는 최대리 맞은 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에스프레소 한 잔과 최대리가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놓여있다.
“최대리님, 오랜만이에요. 통화는 자주했어도 직접 본지는 꽤 된 거 같네요.”
최대리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뵙자고 한 건 아닌지..”
“아니에요. 전화로 얘기한 거처럼 저도 마침 쉬려고 했어요.” 마리는 억지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최대리가 밝게 웃는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일하시는데 방해한 건 아닐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작가님도 이 카페 아시네요? 저 여기 좋아하거든요. 뭔가 분위기가 아늑하고 좋아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만 알고 있는 좋은 곳. 왜 그런데 있잖아요. 카페 데우스가 저한테는 바로 그런 곳이거든요.”
“저야 이 근처에서 일하니까 알게 됐죠. 저도 여기 좋아해서 종종 와요. 최대리님 말처럼 나만 알고 싶은 좋은 카페. 딱 그런 장소에요. 그런데 이 근처에 어쩐 일이에요?”
“혹시 유성훈 작가님 아세요? SF 소설 쓰는 작가님이신데.”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 그 분 작품은 한 편도 못 봤어요.”
“아, 아시는 구나. 이 근처에서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이 있었거든요. 그 분이랑 미팅하는데 작가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갑자기 연락 드렸어요. 마침 이 근처에 사무실이 있다고 전에 들었던 게 기억도 났고요.”
마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하는데, 제 생각이 났다고요? 왜 생각났는지 궁금하네요.”
“미팅 중에 작가님 생각이 번뜩 떠올랐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렸는데 제가 작가님 문체를 좋아하거든요.”
마리가 눈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저는 작가님의 수사를 최대한 자제하는 담백하면서 담담한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문장이 필요한 순간에만 꾸며져 있어요. 그렇다 보니 글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간결하면서 전달력이 강한 것도 마음에 들고요. 작가님 문장은 불필요한 아름다움이 없어서 좋아요. 그러면서도 원작 작가의 의도가 한 문장,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죠. 그리고 작가님의 글은 어떨 때 담백하면서도 시적일 때가 있어요. 과학서적에서 시적인 순간을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데, 작가님 글에서는 마주할 때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작가님 글을 더 좋아해요.”
“최대리님, 좋게 봐줘서 너무 고마운데 너무 과찬이에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과학서적이다 보니까 문체가 수사는 적고 간결하고 담백할 수 밖에 없죠. 제가 글을 잘 썼다기 보다는 원작 작가님들이 잘 쓴 거죠.”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번역에도 번역 작가만의 개성이 다 드러나요. 원문 대조, 교정, 교열을 하다 보면 그런 게 많이 느껴져요.”
“당연히 그런 면도 있겠죠. 최대리님이 좋게 얘기해주니까 기분은 좋네요.”
“좋게 얘기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거에요. 어쨌든 작가님 글을 좋아하다 보니 작가님이 번역하신 거 교정, 교열할 때가 가장 재미있고 신나요.”
“계속 칭찬만 해주니까 쑥스럽네요. 그나저나..” 마리가 말하는 중에 카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 남자에게 눈길이 간다. 마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 남자를 흘끗 쳐다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치노팬츠를 입었고 밝은 갈색 로퍼를 신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스타일에 고급스러운 로퍼가 세련미를 더해준다. 날렵하게 주름이 잡힌 베이지색 치노팬츠, 고급스러운 갈색 로퍼,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난 발목이 잘 어울린다. 그 남자는 카페 안으로 들어와 마리와 최대리가 앉은 반대편 끝 유리창을 향해 앉아 있는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바지 기장이 위로 당겨지면서 굵은 발목이 더 길게 드러났다. 마리는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진한 향이 온 몸에 퍼진다.
“작가님, 아시는 분 있으세요?” 최대리는 마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아.. 아니에요. 갑자기 딴 생각을 했어요. 아까 번역할 때 고민했던 거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떠올라서요.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으면.. 작가님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작가님이랑 작업하는 게 신난다고 하니까, 작가님이 쑥스럽다고 하면서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셨어요.”
“아 맞다. 하하. 유성훈 작가님 만나면서 왜 제 생각이 났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순간 딴 생각을 했네요.”
“아, 그랬군요. 저도 그 얘기를 한다는 게 그만.. 하하.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작가님도 SF소설을 써 보면 어떤가 해서요.”
“SF소설요? 소설을 써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요.”
“저번에 얘기하셨잖아요. 번역 말고 작가님 자신의 글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고요.”
“네. 그렇긴 한데 에세이를 생각했지,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유성훈 작가님이랑 미팅을 하면서 작가님의 개성이 담긴 문체로 쓰여진 SF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은 이공계 쪽이고 과학서적 전문 번역가니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지 않을 까요? 편집자로서의 직감인데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거 같아요. 작가님이 쓰면 작품에 전반적으로 냉엄한 기류가 흐르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시적인 황홀함을 마주하는 SF소설이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정말 작가님 팬으로서 너무너무 읽어 보고 싶어요.”
“정말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의견 줘서 너무 고마워요. 깊이 고민해 볼게요.”
“사실 오늘 갑자기 작가님을 뵙자고 한 건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에요. 만약 정말로 쓰신다면 제가 꼭 편집자로 함께 작업에 참여하고 싶어요.
“하하. 그럼요. 당연하죠. 만약에 쓰게 되면 최대리님이랑 꼭 할게요.”
“작가님, 저는 회사에 복귀해야 해서요. 이만 일어날까요?”
“그래요. 일어나죠. 저도 사무실로 들어가봐야 해요.” 마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집중을 끊어 짜증났던 자리가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됐다. 마리와 최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마리는 나가면서 그 남자를 흘끗 쳐다 봤다. 그 남자도 곁눈질로 마리를 본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마리와 최대리는 밖으로 나갔고 가는 길이 반대 방향인 두 사람은 출입문 앞에서 바로 헤어졌다. 마리는 카페 유리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그 남자 뒤로 걸어간다. 고개를 돌려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그런데 그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 낯이 익다. 초등학교 동창이다. 카페 안에서는 멀리 뒷모습만 보여서 알아 보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마리는 다시 카페 데우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 뒤로 갔다.
마리는 반가운 목소리로 친구 이름을 부른다. “종수야!”
종수가 뒤돌아 봤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마리야!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게 우리 엄청 오랜만이다. 적어도 5년은 된 거 같은데?”
“맞아. 최소한 그 정도는 된 거 같아. 회사가 이 근처야?”
“나 회사 그만뒀어.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어. 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어.”
“프리랜서 번역가? 회사 그만뒀는지 몰랐네. 번역가 멋지다. 프리랜서로 일하다니 너무 부러운데?”
“부럽기는..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힘들어 죽겠어. 너도 사무실이 이 근처야?”
“아니. 사무실은 잠실에 있어. 외근 나왔다가 이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 만나고 있는 중이야. 서로 인사해. 이 친구는 정요셉. 요셉아. 얘는 내 초등학교 친구 이마리.”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종수야.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퇴근하고 저녁 같이 먹을래?”
“나야 좋지. 나 사무실에 들어가봐야 해서. 사무실 갔다 퇴근하고 이리로 다시 올게. 7시 좀 넘을 거 같은데 괜찮아?”
“응. 나야 괜찮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와도 돼. 나는 일하고 있으면 되니까.”
“그래. 그럼 여유 있게 7시 30분에 볼까?”
“7시 30분 좋아. 그나저나 진짜 반갑다.”
“그러게. 어떻게 여기서 널 만나냐? 요셉아, 약속 없으면 너도 오늘 같이 저녁 먹자. 술도 한 잔 하고 어때?”
“나? 아니야. 나는 괜찮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둘이서 먹어야지. 내가 낄 자리가 아닌..”
마리는 요셉의 말을 끊는다. “괜찮아요. 같이 먹어요. 혹시 약속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래 약속 없으면 같이 먹자. 마리랑 둘이 먹는 거 알면 와이프가 싫어할거야. 네가 있어야만 해.”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너 결혼 했어? 엄청 빨리 했네.”
“응. 어쩌다 보니 빨리 하게 됐어. 연애할 때가 좋지 결혼하니까 엄청 피곤해. 친구인 너랑 술 먹는 것도 눈치 봐야 하고 말이지.”
“하하. 그렇구나. 너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렇겠지.”
“야, 많이 좋아하기는 개뿔.. 그냥 의심하는 거지.”
“결혼식에 왜 나 안 불렀어?”
“한 동안 연락 안 했는데 결혼 한다고 갑자기 어떻게 연락하냐? 연락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마리가 종수의 어깨를 치며 말한다. “야, 뭐 어때? 다 그런 거지.” 마리는 고개를 돌려 요셉을 보며 웃는다. “같이 저녁 먹어요. 얘가 와이프 눈치 보느라 저랑 단 둘이 저녁 못 먹겠다고 하잖아요.”
“아.. 네 그럼 같이 먹죠.” 요셉이 마지못한 척하며 대답했다.

그날 마리, 요셉, 종수는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마리와 요셉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금새 가까워졌다. 특히 대화가 잘 통했다. 술자리를 마치고 마리는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요셉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요셉에게서 톡이 왔다. 잘 들어갔는지 묻는 내용이다. 마리는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답을 보냈다. 오늘의 운세가 이렇게까지 잘 맞은 건 처음이다. 잠이 몰려온다. 마리는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순간 잠에 빠졌다.

Epilogue 2
마리와 요셉은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번째 만남 이후 바로 사귀기 시작했다.
마리는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많이 좋아한 적이 있나 싶다. 요셉은 훤칠한 외모에 스타일이 세련됐고,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유머감각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형인 마리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게 믿어지지 않는다. 첫 만남부터 마리는 자신에게 강한 호감의 눈빛을 보냈다. 마리와의 만남은 기적이고 커다란 행운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두 사람은 연애를 하는 동안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3년을 만나고 결혼했다. 결혼하고 요셉은 회사를 계속 다녔고, 마리는 SF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은 연애와는 또 다른 달콤함이 있었다. 하지만 연애와는 다르게 결혼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보다는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마리는 유명한 SF소설가가 되었고, 요셉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연애 때 가졌던 서로에 대한 감정은 아주 아주 느리게 증발해 가고 있었다. 너무 느리게 증발하는 바람에 마리와 요셉은 그 감정이 사라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문득 두 사람은 그 감정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애할 때의 감정이 그리웠고 되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때 그 감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리와 요셉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받아들였고 결국 둘은 결혼 7년만에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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