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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메이의 마음

2021.05.01 11:5205.01

1. 만남
유서하는 로봇과 AI를 개발하는 기업 ㈜뉴다이내믹스에 다니고 있다. 뉴다이내믹스는 로봇과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세계적인 기업에다, 근무 환경도 우수하고, 직원들을 위한 복지제도도 매우 좋다. 무엇보다 급여가 최고 수준이다 보니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다니고 싶어하는 직장으로 꼽힌다. 입사 5년차인 서하는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다.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이지만, 서하는 매일 퇴사를 꿈꾸며 다닌다. 업무가 힘들 때가 많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니다. 5년 정도 다니다 보니 힘든 업무는 익숙해졌고, 열심히 하다 보면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일도 어느새 해결된다.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지도 않다. 팀장을 비롯해 팀원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힘들 때마다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일하는 분위기이다. 그런 면에서 서하는 자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보면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꿈꾸는 이유는 회사 체질이 아니어서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없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침마다 출근하기가 싫다. 일이 재미가 없다. 일 하는 것이 신나지 않는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회사를 그만 두지 못하고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서하는 그림 그리고 글 쓰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언젠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매일 출근한다.

서하는 휴먼로봇 개발팀에서 일하는 이문오와 회의를 하고 있다. 문오는 서하와 입사 동기이다. 한 달간 합숙하는 신입사원 교육에서 처음 만났다. 교육기간 한 달 내내 같은 팀을 하면서 친해졌다. 같은 팀원이 총 6명이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문오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다.
“어떤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서하가 문오에게 물었다.
“회의를 하자고 한 이유는 너한테 제안할 게 있어서.
“나한테 제안을 한다고?”
“응. 우리 팀에서 진행 중인 휴먼로봇 개발 프로젝트가 최근에 완료 됐어.”
“와! 진짜? 너 그 동안 고생 많았는데 드디어 개발 완료 했네.”
“이제 겨우 1차 완료 된 거야. 앞으로 1년동안 테스트해야해. 테스트가 끝나면 보완작업을 해야 하고. 아마 최종 상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래도 1차 완료가 어디야? 뿌듯하겠다.”
“맞아. 뿌듯하기는 해. 어쨌든 본론을 말하면 이번에 우리 팀에서 테스트용 휴먼로봇을 10대를 생산 했어. 이 10대의 로봇을 회사 직원들에게 맡겨서 1년 동안 테스트 할 예정이고 지금 테스트에 참여할 직원들을 선발하는 중이야. 그래서 말인데 서하야, 너 혹시 이 테스트에 참여할 생각 있어? 내가 담당하고 있는 로봇을 네가 테스트하면 어떨까 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다.
“별 거 없어. 집에다 로봇을 두고 1년 동안 사용하기만 하면 돼. 의무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로봇 사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보고서 작성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테스트에 참여하는 직원에게 매달 급여의 25%를 수당으로 지급한다는 거지. 어때 솔깃하지 않아?”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한다. “25%나? 너무 괜찮다. 문오야, 우리 회사가 좋기는 좋다.”
“하하. 이것도 일이잖아. 24시간을 테스트에 참여하는 거나 마찬가지니 25%면 아주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휴먼로봇이 뭘 할 수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테스트에 참여하면 로봇에게 집안 일 시키고, 같이 대화 하고 그러면 되는 거야. 어려운 거는 전혀 없을 거야.”
“정말 사람이 하는 거 다 할 수 있어?”
“그럼. 웬만한 건 다해. 운전도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건 불법이어서 시키면 안돼. 자율주행은 합법이고 로봇 운전은 불법이라는 게 좀 이상하지만.” 문오가 어깨를 한 번 뜰썩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제안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네가 잘 할 거 같아서지. 일을 열심히 하고 잘 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꼼꼼하잖아. 이 테스트에 참여하는 직원의 가족 구성원도 다양화 할 예정인데 마침 너는 오빠 식구랑 같이 살다가 얼마 전에 나와서 혼자 살고 있잖아. 아직 혼자 사는 직원 중에 테스트에 참여할 사람이 없거든. 또 회사생활이 무료하고 재미가 없다고 네가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일이 재미없다 보니 삶 자체가 무기력해 질 때도 많다고 그러고. 그래서 혹시 이 테스트에 참여하면 회사 생활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제안하는 거야. 1주일 고민해보고 할지 말지 나한테 알려줘.”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고민 안 해봐도 될 거 같아.
“왜, 별로야?”
“아니. 나 테스트, 참여할래. 네 말대로 좋은 계기가 될지도 모르잖아.”
서하가 바로 결정하자 문오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 고민 안 해봐도 돼?”
“응.”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거 아냐? 그래도 생각은 해봐야 하지 않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거는 맞는데.. 한 번 해보고 싶어.”
“그래. 그럼 우리 팀장님한테 네가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보고할게. 비공개 프로젝트라서 비밀 유지가 필요해. 네가 테스트 참여하는 거는 너희 팀장님에게만 전달 될 거야. 팀원들은 알면 안돼. 그리고 다음주 안에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 할 거고 휴먼로봇은 2주 후 집으로 내가 직접 배달 할 거야. 정말 마음 정한 거 맞지? 혹시 마음 바뀌면 1주일 안에만 말해줘.”
“결정했다니까.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말하자마자 고민도 안 하고 바로 결정하니까 그렇지. 그럼 잘 부탁할게. 너한테 전달될 휴먼로봇의 이름은 메이야.”
“메이.. 예쁜데. 이름 누가 지었어?”
“이름은 내가 지었어. 일곱 번째로 생산된 로봇이어서 처음에는 칠호, 칠수, 칠현, 영칠, 호칠. 칠 자가 들어가는 걸로 여러 가지 생각해 봤는데 딱히 맘에 드는 이름이 없더라고.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그럼 5월 1일에 최종 생산이 됐으니까 5월과 관련된 이름으로 해야겠다고 정했지. 그리고 나서 별 생각 없이 영어로 5월이 May니까.. 그냥 이름을 메이로 정했어. 특별한 의미는 없어.”
“메이, 이름 예쁘다. 별 생각 없이 지은 거 치고 잘 지었네.”

2주 후 일요일. 문오가 휴먼로봇 메이와 함께 서하의 집에 왔다. 서하는 문오와 함께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메이를 유심히 본다. 외모는 사람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졌고, 키는 170cm 정도에 건장한 체격이다. 몸체 밖을 둘러쌓고 있는 재질은 하얀색의 단단한 고무로 보인다. 걷는 모습에 어색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로봇치고 매우 자연스럽다. 신발을 벗을 때도 허리와 무릎을 구부려 신발에서 발을 빼는 모습이 능수능란하다. 그래도 사람만큼 유연하게 움직이지는 못하고 어딘가 조금 부자연스럽다.
거실로 들어온 메이는 반듯한 자세로 가만히 서있는다.
서하가 메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한다. “우아! 멋지다. 이 로봇을 네가 개발한 거야? 너 대단하다.”
문오는 서하의 집안을 둘러본다. “내가 메이 담당이어서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 팀에서 개발한 거지. 그나저나 서하야, 집 좋다. 집이 꽤 넓네. 공간이 충분해서 메이랑 같이 생활하기에 좋을 것 같다.” 문오는 메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 친구가 앞으로 1년 동안 너랑 같이 지낼 메이야.”
서하가 어색해한다. “인사부터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 내가 간단하게 설명부터 할게. 서하 너와 메이의 관계는 상하 관계야. 네가 윗사람이고 메이가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메이는 너한테 존댓말을 쓸 거고 너는 반말을 하면 돼. 메이의 주된 임무는 일상적인 집안일과 너와의 대화야. 청소, 정리, 빨래 같은 무엇이 됐든 메이는 네가 시키는 집안일을 지속적으로 할 거야. 네가 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의 집안일을 정해줘야 해. 대화는 규칙적으로 할 필요는 없고, 틈나는 대로 하면 돼. 아무래도 같이 사니까 말할 기회야 많겠지. 주제는 어떠한 것도 상관이 없어. 매달 보고서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메이가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 작성하면 돼. 대화에 대한 보고는 사적인 대화 내용까지 자세히 적을 필요는 없고 대화 주제, 이해력, 어휘 선택, 문장 구사력 정도에 관해서만 작성하면 될 거 같아. 그리고 월 1회 특별 임무를 주고 어떻게 수행했는지 보고서에 작성해야 돼. 특별 임무는 휴먼로봇 테스트 담당자가 자율적으로 정하는 거야.”
“내가 자율적으로 정한다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너무 막연한데.”
“특별임무를 자율적으로 정하게 하는 거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휴먼로봇이 각각 다른 일을 다양하게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야. 음.. 뭐가 됐든 상관 없어. 반려견이랑 놀아주기, 고장 난 전자제품 수리, 책 한 권 읽고 독서토론, 특정분야에 대한 공부, 프로야구팀 전력 분석, 같이 운동하기. 나도 갑자기 떠오르지는 않는데 뭐가 됐든 상관 없어. 자유롭게 특별 임무를 부여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서에 작성하면 돼. 특별히 어려운 건 없을 거야. 보고서 양식은 회사 메일로 보낼게. 우리가 테스트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건 휴먼로봇이 얼마나 인간같이 행동하고, 얼마나 인간같이 사고하고, 얼마나 인간과 잘 소통하고 가까워 질 수 있는가야.”
“특별임무는 루틴한 임무를 제외하고 무엇이 됐든 일상적인 걸 하면 되는 거구나.”
“맞아. 그래서 특별 임무 정하는 것도 크게 어려운 건 없을 거야. 비슷한 임무가 겹치지 않게만 해 줘. 메이는 하루에 한 번 정도 전기 충전을 해야 하는데 그거는 메이 스스로 할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메이는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은 절대 못하게 돼있어. 그래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 절대 혼자 밖에 내보내면 안돼. 운전할 줄 알지만 운전도 시키면 안되고. 이 정도면 설명은 다 된 거 같은데. 이제 서로 인사해.”
서하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메이, 만나서 반가워. 나는 유서하야.”
메이가 악수를 청하며 말한다. “안녕하세요. 서하님, 반갑습니다. 저는 메이입니다. 저는 주식회사 뉴다이내믹스 소속이고 저의 책임자는 이문오 연구원님입니다. 앞으로 1년동안 서하님과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중저음의 20대 남자 목소리다. 갸름하고 달걀형 얼굴에 세련된 곡선의 민머리가 중성적 느낌을 풍기고, 넓은 어깨와 근육질 형의 몸매는 남성적이다.
서하가 메이와 악수를 했다. 메이는 자연스럽게 서하의 손을 붙잡았다. 메이의 손은 단단하고 매끈한 고무 느낌이다. 손의 악력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다. 서하는 메이와 악수를 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문오야,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네?”
“메이의 표면이 사람 체온과 같게 36℃에서 36.5℃로 온도가 설정 돼있어.”
“메이 표면 재질은 뭐야?”
“표면은 실리콘이야.”
“아! 그렇구나.” 서하가 메이의 눈을 보며 말한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 드립니다.”
“서하야, 처음에 한 번 네 얼굴 표정을 메이에게 등록해야 돼. 표정 없는 얼굴을 등록하면 그걸 기준으로 네 표정을 읽을 수가 있어. 메이 얼굴을 정면으로 봐봐. 메이 얼굴 스캔 부탁해.”
서하가 메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메이는 약간 키를 낮춰 서하와 얼굴 높이를 맞춘다. 메이의 양쪽 눈에서 가느다란 녹색 빛이 나와 서하의 얼굴 위아래 좌우로 지나간다.
“안면 스캔이 완료 됐습니다.” 메이가 말했다.
“이제 다 됐어. 그럼 서하야, 나는 그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
“바로 가게? 차라도 마시고 가지.”
“아니야. 어제 잠을 거의 못 자서 집에 가서 눈 좀 붙이려고. 메이랑 처음 만났는데 둘이서 얘기도 하고 그래.”
문오가 갔고 메이와 둘이 남았다. 첫날 서하와 메이는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하는 자신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다. 가족, 어린 시절, 친구, 일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메이는 서하의 얘기를 잘 들었고 적절한 반응을 했다. 처음에는 기계와 대화하는 것이 많이 어색했지만,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졌고 처음에 느꼈던 낯설음과 거리감도 어느새 사라졌다. 서하는 메이에게 해야 할 집안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2. 3개월 후
서하는 고등학교 동창인 지수, 미희와 함께 방배동 서래마을에 있는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지수와 미희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난다. 대화 주제는 지수가 사귀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이다. 셋 모두 약간 취기가 올라온 상태다.
반 정도 남은 소주잔을 비우고 미희가 말한다. “지수야, 잘 헤어졌어. 잘 됐어. 아주 잘 됐어. 네 남자친구 처음 봤을 때 말은 안 했지만 완전 별로더라고. 허우대는 멀쩡한데 뭔가 좀 이상했어. 바람기가 많아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나는 처음 딱 봤을 때 네가 아까웠어. 안 그래 서하야?”
서하는 미희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래? 내가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아 보였는데. 지수가 우리한테 남자친구 소개시켜 줬을 때 나는 속으로 엄청 부러워했어.”
“서하야, 네가 그러니까 연애를 못하는 거야.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야. 그리고 너는 눈을 낮춰야 돼.” 미희가 혀가 꼬인 채 말했다.
서하가 발끈하면서 말한다. “야, 김미희! 내가 연애를 못하기는.. 안 하는 거야. 그리고 나 눈 안 높아.”
“뭔 소리하는 거야? 너 높아. 그나저나 지수야, 왜 헤어진 거야?”
지수가 술 한 잔 마시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뭐.. 성격도 안 맞았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부분도 너무 많았어. 확실 한 거는 아닌데 다른 여자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희가 말한다. “거 봐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 놈 인상이 딱 바람 피우게 생겼어. 잘 헤어졌어. 저번에 봤을 때 지수 몰래 지나가는 여자들 엄청 쳐다 보더라고. 내가 다 봤거든. 그때 지수한테 얘기 해줬어야 했는데 말이지.”
서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희에게 인상을 쓴다. “미희 너 그만해. 나도 지나가는 괜찮은 남자들 곁눈질로 쳐다보거든.” 서하는 지수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말한다. “지수야, 또 좋은 사람 만나면 되니까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그래 고마워. 나 괜찮아. 금방 좋아지겠지. 네 말대로 또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얘들이 뭘 모르네. 요즘 같은 세상에 좋은 남자 만나는 게 쉬운 줄 알아? 가만히 있는다고 좋은 남자가 올 거 같아? 이지수, 그 바람난 놈은 잊고 무조건 많이 만나봐. 네 눈에 차지 않더라도 일단 한 번 만나봐. 그런 사람들한테도 네가 모르는 매력이 있을 수도 있어. 너도 너무 고른다니까. 그래야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막 만나 봐!” 미희는 혀만 꼬인 게 아니라 눈도 풀린 채 말한다.
“야야, 김미희 너 취했다. 우리 그만 일어나자. 시간도 많이 늦었다.”
밖으로 나와 서하는 많이 취한 미희를 택시 태워 먼저 보냈다.
“지수야, 미희 말 너무 신경 쓰지마. 너무 취해서 그런 거니까.”
지수가 짜증스럽게 말한다. “미희가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좀 너무하네.”
“맞아. 미희가 오늘은 너무했어. 완전 너무했어. 평소에 너를 부러워해서 그랬을 거야. 쟤 질투심 많은 거 너도 알잖아. 너는 부족한 게 없으니까. 그리고 또 좋은 사람 만날 거니까 너무 힘들어 하지마. 나도 취했나 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서하야, 고마워.”
“지수야, 어디 가서 한 잔 더 할래?”
지수가 잠시 고민을 한다. “아니야. 늦었잖아. 너도 쉬어야지. 오늘은 들어가고 다음에 또 보자.”
지수도 택시를 타고 갔다. 서하는 집이 근처여서 걸어가면 된다. 집으로 가는 중 지수에게 톡이 왔다.
『서하야, 잘 들어가고 오늘 고마웠어. 너는 진짜 내 친구야.』

미희는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말을 가끔 한다. 자기 딴에는 솔직하게 말하는 거겠지만 종종 누가 들어도 지나칠 때가 있어서 문제다. 술이 취해서 그런가 오늘은 유난히 좀 심했다. 지수가 미희의 말에 상처 받았을까봐 서하는 신경이 쓰인다. 본성은 착한 친구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메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씻고 나왔더니 메이가 따뜻한 우롱차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서하는 긴 소파 중간에 앉아 우롱차를 마신다. 따뜻한 차가 하루 동안 몸 안에 쌓인 정신적, 육체적 찌꺼기를 씻어내는 것 같다. 차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있으니 편하다. 메이는 긴 소파 끝 옆에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았다.
메이가 서하를 보며 묻는다. “서하님, 오늘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내 표정이 그래 보여?”
“네. 그래 보입니다.”
서하가 우롱차 한 모금을 마시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한다. “맞아 제대로 봤어. 그런데 메이는 진짜 표정을 잘 읽는 거 같아.”
“반복된 학습 결과입니다.”
서하는 지수와 미희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메이에게 말했다.
“미희는 지수를 위로한답시고 말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상처만 준다니까. 나도 은근히 기분 나빴어. 나한테 연애도 못 한다고 그러고 말이지. 기분이 별로야.”
서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메이가 묻는다. “그럼 미희님은 연애를 잘 합니까?”
“응. 미희는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아. 티 나지 않게 끼도 잘 부리는 스타일이야. 남자친구도 많이 사귀었어. 한 남자를 오래 만났던 경우는 별로 없었고 중간중간에 잘 갈아타더라고. 뭐.. 그것도 능력이지. 미희처럼 많이 만나보면 좋은데 나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그런 미희님이 부럽습니까?”
“부러우냐고? 뭐.. 솔직히 그런 면이 부러울 때도 있어. 나 같은 경우는 먼저 다가가지 못해서 내가 관심이 있어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도 못 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어쨌든 미희는 착하고 다 좋은데 남한테 상처 줄 수 있는 말버릇을 고쳐야 한다니까.”
“제가 볼 때는 미희님과 친하게는 지내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를 두라고? 말을 심하게 할 때가 가끔 있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아무리 학습을 해도 저는 아직까지 인간들이 말하는 착하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서하는 남아있는 우롱차를 다 마시며 말한다. “음.. 착하다.. 나쁘다.. 딱히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긴 하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면도 있고 정서적인 부분도 커서 인공지능 입장에서는 어려운 개념일 수 있겠다.”
“제가 거리를 두라고 하는 이유는 미희님은 신의를 쉽게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희가 쉽게 신의를 버린다고? 그럴 친구는 아닌데.”
“너무 쉽게 연애 상대를 바꾸는 사람은 신의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는 서하님이 걱정이 돼서 입니다.”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야?
“혹시 서하님이 상처 받을까봐 그럽니다.”
“미희가 신의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아무튼 걱정해줘서 고마워. 참고할게.”
석 달 동안 서하는 메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메이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문득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메이에게도 감정이 있어 보인다.

다음날, 휴먼로봇 개발팀 회의실에서 서하와 문오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문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석 달 조금 지났는데, 메이랑 별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어?”
“그럼. 전혀 문제없이 아주 잘 지내고 있지.”
문오가 웃으면서 말한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어떻게 보면 메이랑 같이 지내는 것도 회사 업무인데 전혀 일하는 거 같지가 않아.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일은 메이가 다 하지. 집안 일도 해주고 틈틈이 나랑 얘기도 해주잖아. 메이랑 같이 얘기하면 재미있어. 이렇게 일하고 수당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야. 그나마 매달 보고서 쓰는 게 일이라면 일인데, 그것도 별로 어렵지는 않으니까.”
“잘하고 있네. 왠지 예감에 너랑 잘 맞을 것 같았어.”
“문오야,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메이랑 얘기하다 보면 메이한테 감정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혹시 메이한테 감정이 있어? 개발할 때 감정이 있게 만든 거야?”
문오는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감정? 감정은 당연히 없지. 감정을 어떻게 개발할 수가 있겠어. 메이는 학습을 통해서 적절하게 반응할 뿐이야.”
“내 표정을 보고 감정을 잘 읽는단 말이야.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야. 처음 봤을 때 네 얼굴 등록했잖아. 그걸 기반으로 표정 변화를 인식하는 거야. 그건 초기값으로 세팅이 돼있어. 평소 너랑 하는 대화와 표정 변화를 같이 분석하고 학습을 하면서 더 표정 변화를 잘 인식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또 자기 나름대로 빅데이터를 통해서 별도로 계속 학습을 했을테고.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주관적 감정이 배제돼서 사람보다 타인의 표정을 더 잘 읽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메이한테 감정은 없어. 있을 수가 없어.”
“표정 변화 읽는 거뿐만 아니라 대화하다 보면 그런 느낌을 받거든. 어디까지나 내 느낌인가 보네.”
“그리고 나도 감정의 실체를 모르는 걸. 물론 감정이 들고 감정을 느끼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생기고 발전되는지 모른다고. 개발자가 감정이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개발할 때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겠어. 안 그래? 개발하는 동안 우리 팀에서도 감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어.”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하기야 사람들은 인형이나 자동차 같은 사물에도 감정 이입을 하기도 하잖아. 메이는 사람을 닮았고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까지 하니까, 내가 더 감정이입 돼서 그렇게 생각이 들었나 보네.”
“메이랑 너무 정들지마. 9개월 후면 헤어져야 해.”
서하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한다. “그래 알았어.”

3. 3개월 후
토요일 늦은 밤. 서하와 메이는 반포 한강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 오늘은 기온이 따뜻하다. 11월초 날씨 같지 않다. 가끔 바람이 불면 시원함까지 느껴지는 걷기 좋은 밤이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공원에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인간과 거의 똑같이 걷고 움직이는 메이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어떤 사람은 서하에게 처음 보는 모델이라며 어느 회사 로봇인지, 언제 출시했는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서하는 제품으로 출시 되지 않은 모델이어서 제조사를 말해 줄 수 없고, 특별한 기능은 없으며 지금 그냥 자연스럽게 걷기 테스트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 사람이 메이를 만져봐도 되는지 물었다. 메이를 만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서하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상업화된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 가입이 안돼 있어 사고가 나거나 고장이 났을 때 어떠한 보상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메이를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 본 후 가버렸다. 그 사람의 메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싫었다. 또한 그 사람의 시선으로 메이가 언짢지는 않은지 신경이 쓰였다. 메이에게 감정이 없다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 서하와 메이는 반포대교를 지나가고 있다. 메이는 걷는 동안 반포대교 한 곳을 계속 쳐다본다.
“메이, 뭘 그렇게 쳐다 봐?”
메이가 자신이 보던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반포대교 위에 서있는 저 남자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메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어떤 남자가 반포대교에 서 있다. 멀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50대 정도로 보인다.
“저 사람 왜?”
“저 사람 조금 이상합니다.”
“바람 쐬러 온 사람 같은데, 뭐가 이상해?”
“아까부터 지켜 봤는데 강물과 하늘을 번갈아 계속해서 쳐다봅니다. 마치 뛰어내릴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서하는 고개를 돌려 메이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에이, 설마?”
“그냥 그렇게 보입니다.”
“음.. 메이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인간의 삶이란 게 고민도 많고 매우 고단해. 저 사람도 뭔가 고민이 있어서 머리를 식히고 있는 걸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마.”
“저도 인간의 삶에 고민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은,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거와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게 피부에 와 닿는 거랑은 다르다는 의미야. 나도 고민 많아. 삶도 복잡하고 말이지. 그러니 모르는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산책이나 하자.”
“네, 알겠습니다.”
서하와 메이는 반포대교와 세빛섬을 지나 서래섬에 왔다. 서래섬 한 바퀴를 돌았다. 서래섬에서는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 몇몇 커플들은 메이가 신기한듯 쳐다보면서 지나간다. 이번에도 한 커플이 다가와 메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여자는 자신도 갖고 싶다며 제품으로 출시되면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해 했다. 서하는 메이의 가격을 묻는 것을 듣고 기분이 이상했다. 서하는 메이는 자신의 친구여서 가격으로 따질 수 없다고 불쾌한 표정과 함께 싸늘하게 대답했다. 서하의 대답에 무안해한 커플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사람들 눈에 메이가 신기하게 보이기는 하나 보다.
서하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여기서 데이트를 많이 하네.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젊은 남녀가 많이 보입니다.” 메이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서하와 메이는 서래섬에서 나와 다시 반포대교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다정한 커플들 보니까 나도 남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도 서하님에게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하하 고마워. 확률 높이라는 건.. 미희처럼 하라는 말이야?”
“필요나 상황에 따라 연애 상대를 바꾸라는 게 아니라 서하님과 잘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만남의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랑 잘 맞는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이라.. 음.. 메이,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서하님을 잘 이해해주고 배려심 많고 마음이 따뜻한 돈 많은 사람을 만나면 좋습니다.”
서하가 크게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마지막이 반전인데.. 착하고 돈 많은 사람을 만나라는 거네?”
메이가 잠시 주저하다가 말한다. “음.. 전에도 말했지만 착한 사람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학습을 해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확실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맞다. 착하고 나쁜 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저번에도 그랬었지. 끊임없이 학습을 하는 메이도 모르는 게 있구나.”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어쨌든 네가 말한 그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지구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물론 서하님도 상대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한국에 없을 수도 있겠네?”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있어도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하. 그래서 만나려면 결국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거구나.”
얘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다시 반포대교로 돌아왔다.
메이가 반포대교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사람 아직도 저기 그대로 있습니다.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러네. 아직도 있네. 진짜 고민이 많나 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메이와 나란히 걷던 서하가 메이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한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걱정하지마.”
“알겠습니다.”
“메이,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뭡니까?”
“혹시 메이는 감정이 있어?”
메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감정의 정의를 아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있는 거라면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심박수 상승, 호흡 변화, 혈관 확장, 표정 변화, 눈물, 콧물, 땀과 같은 생체적인 현상까지 감정에 포함 시켜야 한다면 저는 감정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서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말을 계속 이어서 한다. “그럼 감정이 있다기 보다는 감정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네?”
“이해한다기 보다 감정의 정의를 알고 있다 혹은 외우고 있다가 좀더 정확한 거 같습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우리 오늘 많이 걸었다. 이제 집에 가자. 벌써 주말의 반이 지나갔네.”
“주말만 반이 지나간 게 아니라, 서하님과 함께 하는 시간도 반이 지났습니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벌써 6개월이나 됐어.”
메이가 한강공원을 둘러보며 말한다. “저는 집 가까운 곳에 한강공원이 있어서 좋습니다.”
“나도 그래.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너무 편해.”
서하와 메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오후. 휴먼로봇 개발팀 회의실에서 서하와 문오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벌써 6개월이 됐어. 시간 진짜 빠르다. 메이는 잘 지내고 있지?” 문오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그럼 잘 지내고 있지. 이번 달 스페셜 미션으로 뭘 했는지 알아?”
“뭐 했는데?”
“애기랑 놀아주기. 우리 조카가 한 10개월 정도 됐는데 메이 보고 같이 놀아주라고 미션을 줬어.”
“10개월이면 메이한테 맡기기에 너무 어리지 않나? 어땠어?”
“6개월 정도 메이 지켜보니까 괜찮을 거 같더라고. 그것보다는 조카가 무서워할까 봐 걱정 많이 했었거든. 그래서 이 미션을 해야 하나 고민을 좀 했었는데 우리 오빠가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하게 됐어. 처음에는 조카가 무서워도 하고 낯설어도 했는데 금방 풀렸어. 메이가 의외로 애기랑 잘 놀아줘. 조카가 낯설어 하니까 손가락에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불이 들어오게 하더니, 그걸로 조카의 주목을 끌더라고. 손가락에서 불이 번쩍번쩍하니까 조카가 엄청 신기해 하던 걸. 다양하게 재미있게 놀아주더라고. 그리고 밥도 잘 먹이고 기저귀도 잘 갈아. 나는 조카가 메이에게 편하게 잘 안겨 있는 게 제일 신기했어. 마치 자기 엄마나 아빠한테 안겨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어. 오빠랑 새언니도 그걸 보더니 엄청 신기해 했어.”
문오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한다. “메이가 아주 잘 하고 있네.”
“완전 잘 하고 있지. 아! 맞다. 이번 주말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하하. 서하야, 당연히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어떤 일이 있었는데?”
“메이랑 나랑 토요일 밤 늦게 반포 한강공원에 산책하러 갔었어. 그런데 메이가 반포대교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계속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거야.”
“어떻게 이상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 그냥 고민이 많아서 바람 쐬러 나온 사람 같아 보였거든. 그런데 메이는 그 사람이 계속 다리 밑을 보는 게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마 고민이 많아서 그럴 거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자고 했지.”
“그런데 그 남자가 강물에 뛰어 들었구나? 뛰어든 남자를 메이가 구해준 거야? 그랬다면 완전 대박인데.”
“아니. 우리는 그냥 집으로 왔지.”
“뭐야?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
“그런데 어제 저녁에 기사 하나가 떴는데 그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무슨 기사인데?” 문오가 서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토요일 밤 그러니까 일요일 새벽에 어떤 남자가 반포대교에서 투신 자살 했다는 기사가 났더라고.”
문오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그럼 결국 그 사람이 뛰어내렸던 거야? 메이가 제대로 본 거구나.”
“아니. 그건 모르지. 어떻게 알겠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우리가 그걸 확인 할 길은 없잖아. 그런데 메이는 그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많이 안타까워했어. 자기가 구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메이가 안타까워했다는 거지? 만약 그 사람이라고 해도 자살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도와 줄 방법은 없지.”
“내 말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몇 달 전에 메이에게 감정이 없다고 너랑 얘기했잖아. 메이에게 감정이 없다는 거는 알겠는데, 메이를 보면 매우 이타적인 면이 있어 보이거든. 특히 이번 일로 더 그런 걸 느꼈어.”
“메이한테 이타적인 면이라..” 문오가 잠시 생각을 한다. “그건 메이가 감정이 있어 보이는 거랑 똑같은 거야. 메이는 사람처럼 보이게,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들어진 로봇이야. 내 생각에 메이는 이타적인 게 아니라 이타적으로 보이게 행동을 하는 거야.”
“메이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타적으로 보이게 의도적으로 행동한다고?”
“그럼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서하야, 메이는 어디까지나 인공지능을 갖고 있는 로봇이야. 사람도 이타적인 척 행동하는데 인공지능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메이에게 사람에게 하듯이 너무 감정이입 하지마. 이 테스트가 끝나면 수정되고 개선될 로봇이라고.”
“사람도 이타적인 척 행동한다고?”
“당연하지.”
“그럼.. 네가 착한 것도 착해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거야?”
“내가 착한 거 같아?”
“응. 너 착해. 우리가 처음 만난 신입사원 교육 때부터 지금까지 널 보면 착하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
“그래? 뭐.. 좋게 봐줘서 고마워. 당연히 일부러 주위 사람들한테 착해 보이려고 하지는 않지. 착하다는 게 뭘까? 난 착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문오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런 건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어떤 거?” 서하가 몸을 문오쪽으로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보이는 게 나한테 손실 보다는 이득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배우지 않았을까?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체득이 된 거지. 오랜 시간 그게 학습이 돼서 무의식적으로 착해 보이게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고 봐.”
“착하게 보여서 얻는 이득이 뭔데?”
“뭐가 됐든 이득이 있을 수 있지. 칭찬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사람과 친해 질 수도 있고. 알게 모르게 얻을 수 있는 건 많을 것 같은데.”
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럴 수 있겠네.”
“내가 착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내 욕망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야.”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 차원에서라면 메이도 이타적으로 보이도록 행동할 수 있겠네.”
“서하야, 쉽지 않겠지만 메이 행동 하나하나에 너무 감정이입 하지마. 인간과 닮은 로봇이라는 걸 잊지마. 그나저나 오늘 퇴근하고 술 한 잔 어때?”
“우리 둘이?”
“응.”
“문오야, 미안한데 다음에 하자.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쉬고 싶어.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고 나는 일하러 가야겠다.”
“알았어. 다음에 하자.”

4. 3개월 후
서하는 지수와 미희를 만나 논현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미희가 말한다. “얘들아, 짠 하자!”
셋은 건배를 하고 소주를 마신다.
서하가 지수를 보며 말한다. “지수야, 너 얼굴 좋아 보인다. 전에 봤을 때 보다 표정도 밝고 편해 보여.”
“그러게 얼굴 좋아졌어. 헤어진 남자친구는 잊었나 보네?” 미희가 물었다.
지수가 미희를 빤히 보며 말한다. “야, 그럼 다 잊었지. 그게 언제 적인데? 6개월도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구나. 얼굴이 유난히 좋아 보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서하가 물었다.
“요즘 나 썸 타는 사람 있어. 전 남자친구랑은 비교도 안되게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걔를 왜 좋아했는지조차 모르겠어.”
서하가 기뻐하며 묻는다. “오! 정말? 진짜 잘 됐다. 어떻게 만났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아직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없었는데 곧 사귀게 될 거 같아.”
서하가 묻는다. “같은 건물에서 일한다면 회사는 다른데 너희 회사랑 그 사람 회사가 한 건물에 있다는 말이지?”
“응.”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가다 얼굴은 자주 볼 수 있어도 같이 일하거나 얘기할 수 있는 접점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연결이 된 거야? 보나마나 그 남자가 너 맘에 들어서 번호 물어 봤겠네.” 미희는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아니. 내가 먼저 번호 물어봤어.”
서하와 미희가 동시에 놀란다. “정말?”, “진짜?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어?”
미희가 지수를 보며 말한다. “너 진짜 용기가 대단하다. 정말 잘 됐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니까 저번에 바람 피운 그런 인간은 아닌지 잘 알아봐. 네가 너무 착해서 잘 당한다니까.”
서하가 미희를 툭 치며 말한다. “지수가 애도 아니고 잘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설마 또 그런 사람 만나겠냐?”
미희가 서하를 보며 말한다. “왜에? 나는 그냥 지수가 또 상처 받을까 봐 걱정 돼서 그러는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지수가 어색하게 웃는다. “하하. 내가 알아서 잘 할테니 걱정들 마.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면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 그나저나 서하야, 넌 회사는 어때? 여전히 다니기 싫어? 아직도 회사 체질이 아니야?”
“야, 세상에 회사가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냐? 그냥 다니는 거지. 뉴다이내믹스 다니면서 회사 체질이 아니라고 하면 배부른 소리지.” 미희가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응. 조직 생활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사실은.. 회사 그만 둘까 생각 중이야. 지금은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못 그만두고. 그거 끝나면 그만 둘 수도 있을 거 같아.”
지수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정말? 조직 생활을 싫어하는데 다른 회사로 옮기지는 않을 테고.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나 취미로 블로그에 글도 쓰고 일러스트로 그림도 그리잖아.”
지수가 말한다. “응. 그거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어. 내가 완전 네 팬이잖아. 그런데?”
“그걸 보고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여행 에세이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 글이랑 사진이랑 일러스트가 같이 담겨있는 여행 책을 내보자고 하더라고. 내 그림이랑 글이 마음에 들었나 봐.”
지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말한다. “우아! 잘 됐다.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또 블로그 팔로우도 꽤 많잖아. 너랑 딱 맞는 거 같은데. 오! 윤서하, 이제 여행작가 되는 거야?”
미희가 조금 흥분한 톤으로 말한다. “얘가 얘가, 너 미쳤어? 좋은 직장 놔두고 뭐 하는 짓이야! 남들은 뉴다이내믹스 다니고 싶어도 못 다녀. 전업 작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 거 같아? 야, 하지마. 정말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친구로서 난 반대야.”
미희의 무작정 하지 말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서하는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다.
“회사 당장 그만두고 전업으로 뛰어드는 건 위험하기는 하지. 책 낸다고 다 유명 작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 미희 말대로 책 낸 사람 중 전업 작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맞는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도전해 보고 싶어. 도전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서하의 말을 듣고 지수가 말한다. “난 서하 말이 맞는 거 같아. 서하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니까 무모한 도전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회사 다니면서 모아둔 돈도 있을 거고, 퇴직금도 받을 거고, 그럼 당장 수입이 없어도 괜찮잖아.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봐. 혹시 잘 안 되더라도 서하 넌 능력이 있으니까 재취업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나는 서하 네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서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지수야.”
미희는 지수의 말을 듣고 더 흥분한다. “야! 이지수, 너 애를 왜 부추겨? 너 잘 못 되면 네가 서하 인생 책임 질 거야? 나는 뭐 회사 체질이어서 다니냐? 좋아서 다녀?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서하야 너 정신 차려.”
지수도 다소 흥분해서 말한다. “내가 왜 서하 인생을 책임져. 잘 되든 못 되든 서하 자신의 책임이지. 다만 나는 서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나는 현실에 안주해서 하고 싶은 거 있어도 못하고 살기 때문에 이런 서하의 용기가 진짜 부러워. 정말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 정말 잘 돼서 내 친구가 유명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미희 너는 그런 생각 안 해? 왜 무조건 안 좋게만 말하는 거야? 나는 서하 능력을 아니까 하는 말이야.”
서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별거 아닌 일로 왜 흥분하고 그래? 지수야, 고마워. 미희 뜻도 잘 알겠어. 유명한 작가가 되는 건 꿈도 꾸지 않아. 이 일을 계기로 프리랜서로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아직 출판사에 하겠다고 답을 주지 않았는데 마음은 어느 정도 기울어졌어.”
미희가 말한다. “지수야, 왜 이렇게 흥분해? 내 말을 좀 오해 했나 본데 나도 서하가 잘 됐으면 좋겠어. 나는 그냥 서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러니까 흥분하지마.” 미희의 말에 지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미희가 계속 말한다. “아직 하겠다고 얘기 안 했다니 천만다행이네. 서하 너 진짜 잘 생각해라. 그냥 즐기면서 살아. 꿈은 그냥 취미로 하는 거야. 어쨌든 그건 네가 알아서 잘 하고 이제 내 얘기 좀 하자. 얘들아 나 이번에 차 계약했어.”
“정말? 오늘 타고 왔어?” 지수가 물었다.
“아니 일주일 전에 계약했고 차는 두 달 후에 나와. M모터의 AX7이야. 완전 자율주행도 되는 모델이야. 차 나오면 SNS에 이 차로 다 도배할 거야. 생각만해도 신나.”
지수가 말한다. “그 차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이잖아.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매달 나가는 돈이 장난 아니겠다.”
미희가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계약한 차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자랑한다.
사진을 보고 서하가 말한다. “예쁘다. 그런데 이 차가 그렇게 비싼 차야?”
지수가 대답한다. “응. 완전 비싸. 우리 같은 월급쟁이가 사기 부담스러운 차야. 하기야 서하는 차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지.”
“응. 나는 처음 봤어. 차 이름이 뭐라고?”
미희가 소주 한잔을 비우고 발끈한다. “어떻게 너는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없냐? 좋은 차를 봐도 좋은지 모르고 말이야. 너는 우리 중에 돈도 제일 잘 버는 애가 차 한 대 사라. 네가 작가는 무슨 작가야. 그냥 회사 열심히 다니고 우리랑 즐겁게 놀아. 인생이 다 그런 거야. 뭐 별거 있어?”
미희의 말에 기분이 언짢은 서하는 소주 한 잔을 단 숨에 비웠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수가 서하의 눈치를 보면 말한다. “미희야, 너 또 왜 그래? 차에 관심 없을 수도 있지.”
“자기만 고고한 척 하잖아. 야! 누구는 꿈 없어? 꿈 없냐고? 아주 혼자 잘 났어 그냥.” 미희는 혀가 꼬인 채 말하고 있다.
“서하가 언제 고고한 척 했다고 그래. 너 많이 취했다. 안 되겠다. 그만 일어나자.”
술집에서 나와 서하와 지수는 많이 취한 미희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서하와 지수도 각자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 지수에게 전화가 온다.
“서하야, 잘 들어가고 있어?”
“응. 잘 들어가고 있지. 너는?”
“너 타고나서 나도 바로 택시 탔어. 미희가 가끔 저러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심하네. 원래 저런 애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지금 하고 있다는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하는 거야?”
“3개월 정도 남았어.”
“아직 좀 시간 있네. 천천히 잘 생각해 봐. 나는 네가 도전해봐도 좋을 거 같아. 너는 분명히 잘 할 거야.”
“고마워 지수야. 네 말이 큰 힘이 되네.”
“그럼. 잘 들어가고 다음에는 우리 둘이 보자. 밉상 미희 빼고.. 진짜 왜 저러는지 몰라.”
“좋았어. 완전 좋은 생각이야. 복수하는 의미로 다음에는 우리 둘만 보자. 잘 들어가고 또 연락하자.”

서하가 씻고 나왔더니 오늘은 메이가 따뜻한 홍차를 탁자 위에 놓아 두었다.
“메이, 고마워. 잘 마실게.”
“오늘도 미희님이 기분 안 좋은 말을 했나 보군요. 서하님 표정에 다 써있습니다.”
“맞아. 오늘 기분 진짜 안 좋았어. 네 말대로 이제부터는 미희랑 거리를 둘 거야. 당분간 안 만나려고.”
“제 말은 만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정서적으로 거리감을 두라고 한 거였습니다. 미희님이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게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정서적으로 조금 밀어내기 위해서 당분간 안 만나려고 하는 거야. 내가 출판사에서 제안 받은 거 얘기했거든. 그래서 회사 그만 두려고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글쎄 미희가 제안 받은 거 하지 말라는 거 있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냥 회사나 다니라지 뭐야! 네가 뭐 대단한 줄 아냐고 혼자 잘 난 척한다는 식으로 나를 막 몰아 부쳤어. 그 얘기 듣고 진짜 기분 나빴어. 지는 별것도 없으면 허세만 부리는 주제에.. 뭘 잘 났다고 이래라 저래라 그러는 건지. 메이 네가 사람 제대로 봤어. 나쁜 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거 같아. 네가 사람 보는 눈이 나보다 낫다.”
“서하님, 화 많이 나셨군요. 지수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지수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어. 회사를 그만두고 하는 건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만 좋은 기회인 거 같다고 말해 줬어. 내가 딱 듣고 싶었던 말이야.”
“그랬군요.”
“메이, 네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은 반드시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인데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서하님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안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들은 서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저 높은 곳으로 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남들도 안 하길 바랄 뿐입니다. 비단 미희님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미희님 말에 상처 받지도 말고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설마, 미희가 그렇게까지.. 그나저나 나 잘 되겠지?”
“저도 잘 될지, 잘 안 될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서하님은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도전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메이랑 지수 말 들으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희 때문에 짜증났어. 그리고 차 새로 계약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나 차 안 사는 거 가지고도 나한테 막 뭐라고 했어. 혼자만 똑똑한 척 한다고 그랬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간 그런 비슷한 말을 계속 했어. 생각만해도 열 받고 짜증나네. 나한테 기분 나쁜 말을 끊임없이 하더라고 글쎄. 아주 열등감 덩어리라니까. 새로 산 차 나오면 어디다 갖다 박았으면 좋겠어.”
“서하님! 아무리 미희님이 거리를 둬야 할 사람이라도 교통사고가 나면 안 됩니다. 저도 미희님이 서하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거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교통사고는 위험합니다. 교통사고는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사고입니다.”
미희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미희가 하도 얄미워서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났으면 하는 거야. 5km 정도 속도로 가다가 다른 차랑 부딪치면 아주 쌤통일 거 같다는 거지. 그 정도면 사람은 다치지 않고 차만 좀 찌그러지겠지.”
“네. 그런 뜻이었군요. 서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미희님은 나쁩니다.”
“본성은 착하고 원래 나쁜 애는 아닌데, 오늘은 좀 나빴어. 많이 나빴어. 내가 제대로 복수해 주겠어.” 서하는 홍차가 담긴 컵을 입술에 갖다 댄 후 눈매를 매섭게 만들면서 말했다.
서하의 그런 모습을 메이가 빤히 쳐다본다.
“어쨌든 메이도 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거 응원한다는 거지?”
“당연히 응원합니다. 서하님은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 메이랑 얘기하고 나니까 속이 많이 시원해지고 후련해졌어.” 서하가 스마트폰에서 시간을 확인한다. “많이 늦었다. 내일 또 출근하려면 자야겠다.”
서하는 침실로 들어갔고 메이는 충전하려고 자신을 전원에 연결했다.

5. 3개월 후 그리고 이별
서하는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있다. 교통체증과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항상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았다. 서울 시내 교통상황 때문에 버스 운행 간격이 벌어져서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버스에 사람이 많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세상에 부지런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뭘 위해 부지런하게 사는지 궁금하다. 다음주면 메이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메이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메이는 기계일 뿐이다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메이와 함께한 1년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메이는 누구보다 좋은 친구이다. 창 밖을 보며 메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린다. 지수이다. ‘지수가 왠 일로 아침 일찍 전화했지?’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지수야!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서하야! 혹시 연락 받았어?”
지수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 “무슨 연락? 무슨 일 있어?”
“못 받았구나. 미희가 어젯밤 교통사고로 하늘 나라로 갔대.”
“뭐라고! 미희가?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나도 조금 전에 연락 받았어. 너무 놀래서 심장이 막 뛰어. 장례식장은 OO대학병원이래. 너 오늘 갈 거지?”
“응. 오늘 가야지.”
“그럼 퇴근하고 7시에 장례식장에서 보는 거 어때?”
“그래. 알았어. 정말 이게 무슨 일이야? 지수야, 이따 보자.”
“그래. 이따 봐.”
전화를 끊었다. 회사까지 가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후회가 밀려온다. 지난번 미희한테 마음이 상한 후 한 번도 못 봤다. 못 본 게 아니라 일부러 안 만났다.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일부러 미희를 피한 것이 후회된다. 미희가 원래 그런 애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서하는 퇴근하고 미희의 장례식장에 왔다. 7시가 막 넘었다. 지수는 아직 도착 전인가 보다. 미희의 영정 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목례를 했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고 미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희 사진을 보면 눈물이 크게 터질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는 않았다. 친구여서 고마웠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미희 부모님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미희 어머니를 말 없이 안아드렸다. 미희 어머니는 서하를 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미희 가족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지수에게 톡이 왔다.
『서하야, 나는 일찍 왔었어. 지금 장례식장 로비에 있으니까 이리로 와』
서하와 지수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서하가 지수를 보며 말한다. “네가 일찍 올 줄 알았으면 나도 좀 일찍 퇴근 할 걸 그랬다.”
“나는 오늘 연차 냈어. 사실은 낮에 왔다 갔어. 집에 있다가 너 보려고 다시 온 거야.”
“진짜? 번거롭게 뭐 하러 그랬어? 내가 너희 집 근처로 가도 되는 돼. 그나저나 미희는 갑자기 무슨 일이래? 그때 이후로 안 본 게 후회가 되네.”
“경부고속도로에서 자율주행으로 운전하다가 다른 차랑 부딪친 거래.”
“아! 그렇구나. 새로 산 차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나 봐. 경찰에서 조사하겠지.”
“상대방 차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
“상대방 운전자랑 미희랑 같이 타고 가던 사람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나 봐.”
“그렇구나. 미희만.. 안타깝게 그렇게 됐네. 그나마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서하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지수가 말을 하려다 멈칫한다. “저기 서하야, 미희랑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알아?”
“몰라. 누군데?”
“내 전 남자친구야.”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한다. “서.. 설마. 잘 못 알고 있는 건 아니고?”
“잘 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전 남자친구가 내게 말했어. 미희 만나고 있다고.. 미희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
“6개월 전인가 헤어진 남자친구 말하는 거지?”
“6개월 더 됐지. 한 9개월, 10개월 된 거 같아.”
“그랬구나. 너 그걸 알고도 계속 미희를 만났던 거야?”
“응. 너랑 미희랑은 아무 문제 없는데 우리 셋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깰 수는 없었어. 그리고.. 미희가 차 샀다고 자랑한 날. 너무 짜증나서 속으로 사고나 나라고 생각했었거든. 어디다 심하게 처박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 내가 괜히 그런 생각해서 미희가 저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죽길 바랬던 건 아닌데.”
“지수야, 그런 생각하지마. 생각한다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잖아. 왜 쓸데 없이 괴로워하고 그래. 살면서 누구나 그런 생각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생각 안하고 살지. 마음에 걸려. 어제 한 숨도 못 잤어.”
“아니야. 사실은 나도 너랑 비슷한 생각을 했어.”
“정말? 네가? 너같이 착한 애가? 나 위로하려고 거짓말 안 해도 돼.”
“거짓말 아니야. 그날.. 미희가 차 자랑한 날 나한테 엄청 기분 나쁜 말 많이 했었잖아. 나 혼자 잘난 척 한다는 식으로.. 정말 너무 얄미워서 나도 새로 차 뽑으면 사고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너 진짜지?”
“그럼 진짜지.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그러니까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너 때문에 사고 난 게 아니야. 나 때문에 사고 난 것도 아니고. 물론 미안은 하지만 우리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지수는 가볍게 한 숨을 쉬면서 말한다. “휴~ 그렇구나.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서하 네 얘기 들으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어. 어쨌든 미희가 저렇게 떠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게. 기분이 좀 그렇다. 지수야, 너 저녁 먹었어?”
“아니. 넌?”
“나도 안 먹었지. 미희 가족한테 인사하고 바로 나온 거야.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좋아.”
서하와 미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갔다. 서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희가 지수의 전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걔가 그런 애였나?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 친구를.’ 미희는 신의를 쉽게 버릴 수도 있다는 메이의 말이 떠오른다.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미희를 만났던 지수도 이해가 안 간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나 보다.

일주일 후 월요일 오전. 서하는 메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회사에 가고 있다. 오늘은 메이와의 마지막 날이다. 메이가 회사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메이, 벌써 1년이 지났네. 너랑 헤어지려고 하니까 너무 슬프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저는 로봇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노트북 새로 사서 쓰던 노트북 버릴 때보다 슬픕니까?”
서하가 발끈하며 말한다. “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농담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서하님에게 제가 기계라는 걸 환기시켜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한 농담이었습니다.”
“사람이든, 기계든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리가 좋은 친구라는 게 중요한 거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서하님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하님을 좋아합니다. 서하님의 꾸미지 않고 솔직한 모습에 반했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서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고마워.” 서하가 말을 하면서 메이의 손등에 손을 올려 놓았다. 메이의 손이 따뜻하다. 메이의 몸은 인위적으로 따뜻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그 온기가 기분을 더 이상하게 만든다. 택시가 회사에 도착했다. 서하와 메이는 휴먼로봇 개발팀으로 갔다. 서하와 메이를 본 휴먼로봇 개발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친다. 문오가 달려와 서하와 메이를 맞이한다.
“서하야, 고생 많았어.”
이번에는 메이를 보며 말한다. “메이도 고생 많았어. 1년동안 잘 해내줘서 너무 고마워.”
휴먼로봇 개발팀장, 김현준 팀장이 다가와 서하에게 말한다. “윤대리, 정말 너무 수고 많았어. 1년동안 테스트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앞으로 더 정교한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사실 저는 보고서 쓴 거 말고는 딱히 한 일이 없어요. 메이가 전부 다 스스로 해낸 거죠.”
“우리가 10대를 테스트 했는데 크고 작은 문제로 중도에 모두 중단이 되었어. 끝까지 완수한 팀은 윤대리랑 메이 뿐이야.”
서하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정말요? 무슨 문제요? 메이를 보면 테스트를 중단할 만큼의 문제가 생길게 없을 거 같은데요.”
“어떤 문제인지는 회사기밀이어서 말해줄 수가 없어.” 문오가 말했다.
10대의 로봇, 크고 작은 문제, 테스트 중단. 이런 말을 들으니 메이가 진짜 로봇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김현준 팀장이 말한다. “아쉽겠지만, 메이는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서하와 메이가 마지막으로 포옹을 한다.
“메이, 너는 나의 진짜 친구야.”
“네 감사합니다. 서하님, 꼭 도전해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휴먼로봇 개발팀 팀원 중 한 명이 메이를 데리고 개발실로 갔다. 개발실로 들어가는 메이의 뒷모습을 보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하는 메이를 보내고 고개를 돌려 문오를 봤다.
“문오야, 우리 언제 술 한잔 할까? 너 언제 시간 돼?”
“나 이번 주는 메이 분석하느라 정신 없이 바쁠 거 같아. 다음주 금요일 어때?”
“다음주 금요일 좋아.”

Epilogue
다음주 금요일. 서하와 문오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테이블이 4개 밖에 없는 작은 주점이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인이 주문도 받고,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는 곳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가게여서 음식이 늦게 나올 수 있다고 메뉴판에 명시돼 있다. 퇴근하자마자 와서 그런지 손님은 서하와 문오 둘 뿐이다. 작은 술집에 둘만 있으니 마치 전세를 낸 기분이 든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통주 한 병과 저녁 될 만한 안주를 시켰다.
술잔을 부딪치며 서하가 말한다. “회사 주변에 이런 데가 있었네. 여기 분위기 좋다.” 서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문오야, 우리 둘이서만 술 마시는 건 처음인 거 알아?”
문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 그래도 우리가 안지 꽤 됐고 나름 친하게 지냈는데 둘만 술 마시는 게 처음이라니 놀랍다. 둘이 점심은 가끔 먹었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이 처음이라니.”
“휴먼로봇 테스트에 참여해줘서 고맙고, 또 중단되지 않고 계획대로 잘 끝낼 수 있도록 해줘서도 고마워.”
“전에도 말했지만 난 사실 별로 한 게 없어. 메이가 다 했지. 그나저나 메이를 보면 다른 휴먼로봇은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안돼.”
“회사 기밀이어서 자세한 사항은 말 할 수 없는데, 로봇 별로 세팅을 다 다르게 했거든. 그게 테스트를 지속 못할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 팀에서도 아직 정확한 원인은 파악이 안됐어. 좀더 연구를 해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구나. 메이랑 같이 지내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메이가 인공지능이다, 로봇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 그냥 친구 같았어. 좋은 친구.”
“그랬구나.”
“메이 분석 하는 건 다 끝난 거야?”
“아니 아직 멀었어. 지난주는 메이가 돌아온 첫 주여서 특히 더 바빴고 앞으로도 아직 할 게 많이 남았어. 그런데 서하야, 내가 지난 주 내내 1년 동안의 메이 기록을 살펴 보면서 이상한 기록을 하나 발견했어.”
“뭔데? 1년 동안 나랑 같이 있었으니까, 나랑 관련된 거겠네?”
“너랑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한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
“뭐길래 그런 약속까지 해야 돼?”
문오가 비장하게 말한다. “꼭 약속해야 돼. 약속해야만 말해 줄 수 있어.”
“뭐길래 그래? 당연히 약속하지.”
“메이 기록을 분석하는데 메이가 어떤 자동차에 접속한 기록을 발견했어.”
“메이가 자동차에?”
“응. 자동차. 너는 차도 없는데 메이가 자동차에 접속한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메이에게 이 자동차에 왜 접속했냐고 물어 봤어. 그랬더니 자신이 접속한 차가 서하 네 친구 차라는 거야. 5km 정도 속도로 가벼운 접촉사고를 내기 위해서 접속 했다고 하더라고.”
문오의 말에 서하는 너무 놀랐다. “메.. 이.. 가..” 놀란 서하는 말을 하다 말았다.
문오가 계속 말을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너무 놀랐어. 속으로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지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접촉 사고를 내서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서하 네 친구가 죽었다고 말하는 거야. 다시 물었지. 어떻게 5km 속도로 달리다 사고가 났는데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그랬더니 메이가 하는 말이 경부고속도로를 자율주행으로 달리고 있는 네 친구 차에 접속해서 옆 차선에 100km로 달리고 있던 차를 105km로 박았다고 말하더라고.. 자기는 5km 속도의 접촉 사고를 냈을 뿐이라고.”
서하는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그런..”
“그래서 내가 왜 그런 사고를 냈는지 메이에게 다시 물었어. 그랬더니 메이가 하는 말이 네 친구가 나쁜 행동을 하는 것 같아서 그냥 골탕 한 번 먹이고 싶었다지 뭐야. 메이가 자기는 접촉사고로 사람이 죽을지 몰랐다고 말했어. 그래서 다시 메이한테 너는 사람한테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돼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어. 메이는 자신은 사람을 위험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5km 속도로 접촉해서 그렇게 큰 사고가 날 줄은 전혀 몰랐대. 나는 메이 얘기를 듣고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 내가 제작에 참여한 인공지능 로봇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마..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럼.. 메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큰 일 나잖아. 우리 회사가 어떻게 되겠어? 우리 팀이랑 나도 그렇고.. 내가 메이에게 접속한 흔적이 남았을 거라고 말했더니, 자기가 흔적이 남지 않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인공위성을 거쳐 우회하고 또 우회하면서 들어갔대. 절대로 자기가 그 차에 접속한 걸 알 수 없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나보고 걱정하지 말랬어. 다만 자기 내부에 있는 기록만 지우면 된다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그 기록을 바로 지워버렸어.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메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우리 팀장님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지금 너랑 나랑만 알고 있는 거야. 너는 1년동안 메이랑 지냈으니까 알아야 될 거 같아서 말하는 거야.”
서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거였구나. 메이가 그랬구나.”
서하와 문오는 한 동안 말 없이 술만 마신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고 문오가 말한다. “서하야, 너 회사 그만두는 건 결정 났어?”
“아직 우리 팀장님이랑 얘기하고 있는 중인데, 나는 두 달 후에는 퇴사하고 싶어.”
“마음을 완전히 정한 거야?”
“응. 정했어.”
“회사 다니면서 할 수는 없나?”
“그냥 회사 그만두고 열심히 한 번 해보려고 해.”
“그렇구나. 멋지다. 난 너 응원해. 넌 분명히 잘 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듣기 좋은 말 해주는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내가 듣기 좋은 말을 왜 해. 네가 어떤지 잘 아니까 하는 말이지.”
서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문오야, 고마워.”
“도전하는 사람만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누가 그랬었는데..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이 안 나네.” 문오가 말했다.
“나도 어디서 그런 얘기 들었었는데. 하하.”
문오는 자신의 옆에 놓여있던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가로, 세로, 높이가 10cm 정도 되는 직육면체 상자이다. 상자는 파란색 포장지와 빨간색 커다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돼있다.
서하가 상자를 보고 말한다. “뭐야?”
“선물이야. 휴먼로봇 테스트에 참여해 줘서 고맙고 회사 그만두고 새롭게 도전하는 일 잘하라는 의미에서 준비했어.”
“갑자기 선물? 생각도 못했는데 완전 감동이다. 우와! 지금 뜯어봐도 돼?”
“아니. 집에 가서 뜯어봐.”
문오는 상자를 다시 쇼핑백에 넣고 서하에게 건넸다.
“뭔지 궁금하다. 지금 열어보면 안 되는 거야?”
“응. 지금은 좀 그래. 집에 가서 열어보면 뭔지 알 수 있잖아.”
“그래 알았어. 참았다 집에서 열어볼게. 술이랑 안주 거의 다 먹었는데 우리 2차 갈까?”
서하와 문오는 남은 술을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주점에 들어가기 전만해도 환하게 밝았었는데 술을 마시고 나오니 어느새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 어디 갈까?” 서하가 물었다.
“걸어가다 괜찮은데 있으면 들어가자.”
“좋아. 그런데 이제 5월말 밖에 안됐는데 날씨가 꽤 덥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덥네. 올해는 여름이 빨리 찾아 오려나 봐.”
“그런데 문오야. 메이한테는 감정이 없다고 했잖아.”
“응. 우리는 감정을 만들 줄 몰라.”
“그럼. 감정은 없지만 메이한테 마음은 있지 않을까?”
문오가 고개를 갸우뚱 한다. “글쎄.. 감정이랑 마음이랑 다른 건가? 같은 건 아닌 듯 한데. 음.. 메이에게 마음이라.. 난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에 왠지 마음은 있을 거 같아.” 서하가 미소 짓는 얼굴로 문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서하와 문오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갈만한 술집을 찾는다. 걸어가는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진다. 이상하게 날씨가 덥다. 올해 5월은 바로 무더운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나 보다. 그렇게 서하와 문오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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