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도시의 용

2005.06.01 18:5006.01

따르릉.

깊이 침잠된 의식을 흔드는 전화벨 소리에 나는 무의식중에 눈살을 찌푸렸던 것 같다. 반쯤 눈을 감고 손을 내어 이리저리 휘젓자,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

따르릉, 따르릉.

몇 번의 전화벨 소리에 나는 비로소 눈을 떴다. 가맣게 방 안에 내려앉은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전화기는 울고 있었다. 깜박깜박 착신등을 빛내며.

대체 누구람.

올 일이 없는 전화. 일주일에 기껏해야 한두 번 걸려오는 전화가 아니던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침대에 누운 채로 팔을 길게 뻗었다. 달캉 하는 소리를 내며 안경집이 굴러떨어졌지만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전화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바람 소리. 저 거친 바람 소리는 도시의 소리던가. 그러나 도시의 바람보단 좀더 거칠고 야성적인, 그리고 자유로운.

"여보세요."

침대에 한 팔을 기대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 이불은 나의 몸을 휘감고 나를 묶어둔다. 나는 도시에 있다. 저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은 도시의 것이 아니다. 그 야성적인 바람, 그 자유로운 바람. 그러나 나는 이불의 따뜻함에 몸을 내맡기고 결박에 버둥대길 포기한다.

"여보세요."

침묵, 계속되는 침묵. 문득 불쾌감이 솟아오른다. 저 바람 소리. 저 너머의 사람은 저 바람에 휘감겨 자유롭다. 그런 자유로운 자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나는 도시에, 모든 것에 결박당해 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약간 짜증스럽게 변했지만, 전화기 너머의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욱아."

흐릿하게, 가냘프게 들려오는 음성. 의식의 홀연한 외침.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빠지고 졸음이 달아났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평안하시었습니까, 폐하."





전화기 너머 나의 여왕-아니, 전 여왕은 다시 한 번 긴 침묵을 끌었고, 나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일까. 왜 이런 시간에.

왠지 섬뜩한,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 나는 스탠드를 켰다. 스탠드의 불빛은 어둠을 갉아먹고 방 안을 부옇게 떠오르게 했다.

빈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술에 취해 세탁기에 넣는 것을 잊어버린 셔츠 하나. 전화를 받으려다 떨어뜨린 책무더기와 안경집. 그 외에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고, 평소와는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내 방의 풍경.

그러나 부옇게 떠오른 방 안의 풍경은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 전화기 너머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그녀와, 어딘지는 모를 그녀가 있는 곳의 바람 소리. 그것은 방 안의 분위기를 낯설고 살풍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래 왔던 낯설음. 내가 바래 왔던 살풍경함. 그러나 내가 바래서는 안 되는 것.

왜 전화했을까.

나는 재촉하지 않았고,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울음의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욱아....[그]가 죽었어."

나는 곰씹을 것도 없이 '[그]가 죽었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녀가 나에게 '[그]'라고 지칭할 사람은 단 하나뿐이니.

그녀의 연인이자, 그녀가 종족을 버리고 도망가게 만든, 일족의 배신자.

"......찾아뵙겠습니다. 장례는?"

"...아직."

"장례 때문이라도, 찾아뵙겠습니다."

[그]는 일족의 배신자. 그러나 한때 일족에 속했고, 일족의 피가 흘렀던 자. 용의 시체는 화장함이 법도이다. 그러나 보통 화장터의 열기로는 타지 않을 만큼, 용의 육체는 죽고 나면 쓸모없이 강인해져 살을 태우고 뼈를 빻으려면 몇 가지 주술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죽기 전의 용의 육체는 인간과 똑같이 허약함에도, 죽고 나서야 용은 그렇게 실체를 드러낸다.

왜 [그]는 죽었을까.

살아 있을 때의 용의 육체는 인간과 똑같아, 어떤 사고를 당했을지는 추측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육체는 인간과 같더라도, 청룡인 [그]에게는 물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인간을 뛰어넘은 힘을.

게다가 [그] 옆에는 한때 용족의 여왕이었던 그녀가 있지 않은가.

헌데, 왜 [그]는 죽었을까.

"헌데, 왜..."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침묵한다. 나는 답을 기다린다.

"...갑자기 아프더니..."

전화기 너머 그녀는 울먹인다.

"갑자기 아프더니, 그냥 그렇게...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용족의 육체는 참으로 연약한 것. 나도 모르게 빈 맥주캔으로 눈이 간다. 용족의 피를 받아 화룡이면 불을, 청룡이면 물을 마음대로 부린다 해도 맥주 몇 캔으로 취해 잠들어 버리는 것을.

"어디입니까."

".....동해 바닷가.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심술궂은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 한다. 왜 바다로 가셨습니까? [그]가 원했나요? 아마 그랬겠죠, [그]는 언제나 당신을 이끌었으니. 그런데 왜 [그]는 바다로 가려 했나요? 자신이 청룡이라서? 물을 갈구하고 물 안에서 평안한 청룡이라서? 청룡의 일족을 그토록 모질고도 비열하게 배신한 [그]가, 왜 우리 청룡 일족의 모태인 바다로 간 겁니까?

그러나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침착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소 알아내어 연락주세요. 내일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장로들에게는..."

"알리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조금은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습기찬 목소리만은, 그 가냘프고 슬픈 목소리만은 그대로였지만 음성은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끊고...다시 전화할게."

"기다리지요."

달칵,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전화기를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탠드에 의해 부옇게 떠오른 방 안은 더이상 낯설지도 살풍경하지도 않았다. 방 안은 따스하고 무겁게 떠오르며 나를 다시금 결박하고 있었다.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닦아냈다.





기차를 타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거기에다 옆자리의 남자가 줄담배를 피워대며 쓰레기 기사가 가득한 스포츠 신문을 쭉 펼쳐 읽는다면 말이다. 덧붙여 아줌마들의 높은 웃음소리와 맥주잔이 오가기 시작하자 나는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지끈대는 이마를 누르며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이 겹쳐도 어찌 이리 불운만이 겹칠까.

그러나 아무리 불운이 겹쳐도 기차 안에서 '일족'을 만나는 불운까지 겹칠 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통로에 기대 있던 낯익은 얼굴에게 나는 심술궂게 내뱉었다.

"왠일이오, 선배님?"

"MT도 빠진 채로 어딜 가시는 거요, 후배님?"

아아, 나는 이마를 좁혔다. 신학기였고, 4월달이었으며, 술자리니 MT니 하는 것들이 쌓이고 넘쳐났었다. 그리고 나는 말도 안하고 빠져버렸으니 동기들이 이상해했을 것이고, 선배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겠지. '욱이요? 글쎄요. 말도 안하고 어딜 갔나...' 그리고 나의 사촌형이며 대학 2년 선배인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욱이 무슨 일 있어요? 선배는 욱이 사촌이라니까 알까 해서.' 그리고...

수현 형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아프게 튕겼다. 이마를 만지며 얼굴을 찌푸리는 나에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짐작은 하고 있어. 장례식용 향과 제기들은 함부로 위치를 옮기거나 하는 일은 없어. 몇 개 꺼내고 살짝 위치를 옮겨서 줄어든 것을 안 보이게 하려 했겠지만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사촌형이자 현 용족의 왕은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수현 형은 내 머리카락을 비벼 헝클어뜨렸다.

"별다른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냐...누구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 가득 뿌옇게 차오르는 무언가가 한없이 싫어져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너무나도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은 따뜻했고...떨리고 있었다.

"....설마..."

수현 형이 놀라움과 의문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무언가 확신하고 있었고,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나도 바보구나."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이라면, 네가 말 안 할리가 없지. 너는 일족에 충실하니까. 하지만 너도 바보다. 왜 내게는 말하지 않은 거야?"

"형, 나는 단지..."

"나무라고 싶은 게 아니다. 정말 허무해지는구나."

수현 형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불꽃이 튀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는 있을 수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난리를 치고,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 거냐? 그렇게 서로 좋아 죽을 지경이더만, 그녀는 그래도 살아 있는 모양이지? 없어진 향이 하나니까. 맞지?"

"수현 형..."

"왜 넌 화도 내지 않는 거냐? 화내야 할 건 너잖아. 왜 그녀가 부르는 데로 찾아가는 거냐? 꼴을 보아하니 그녀에게 퍼붓지도 않고 묻어 두기만 한 것 같은데, 맞지?"

"화를 내라구? 나보고 화를 내?"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움찔했다.

"우리는 일족에 충실해. 그렇지 않아, 형? 아니 폐하? 우리는 일족에 충실하잖아요. 나는 그녀-아니 여왕의 보좌관이었고, 여왕은 모든 것을 버린 후에도 일족이죠. 죄를 지은 건 여왕을 유혹한 [그]지 여왕은 아니라는 게 장로들의 결정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녀에게 화를 내라구요, 나보고? 그럴 수만 있다면....나는 오래 전에 일족을 버릴 수 있었어요!"

그렇다. 그녀의 행동을 나무랄 만한 의지가, 장로에게 반할 만한 의지가 있었다면 나는 일족을 버렸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일족을 버릴 의지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를 '[그]'가 아닌 '형'으로 칭하리라. 같은 아버지의 핏줄을 받고 같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난 [그]를 '형'이라 부를 권리마저 빼앗아간 나의 일족이여, 나는 그대들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하리라. 나는 도시의 용. 일족이라는 굴레에 속박당해 찢어진 날개로 침묵하는 도시의 용.

눈을 뜨고, 찢어진 날개를 펼쳐들려 해도 나는 결국 나를 감싼 쇠사슬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처음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사람들 몰래 파도를 잠재우는 제를 지낼 때라 했다. 관습에 따라 그녀는 치렁치렁하고 단순한 비단옷만을 입고 바닷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제를 지냈다. 보좌관으로 향을 피우며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서 있던 나는 처음으로 지내는 거대한 제에 움츠러들어 있어 그녀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제가 끝날 때쯤 나는 [그]가 단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도를 일으킨 용은 늦게서야 그 몸을 일으켜 여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여왕은 바닷물에 젖은 몸으로 용에게 다가가 잠시나마 여왕을 거역한 것에 대한 벌로 역린에 상처를 주었다. 용은 고통에 포효하고 참지 못해 그 고통을 방출하여, 그곳의 일족들은 그 고통의 전이에 몸을 떨었다. 나 역시 찌릿하게 다가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떨지 않았고 고통스러워하는 빛도 없었다. [그]는 여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고통스러워하며 파아란 빛을 띄우고 빛나는 그 용의 눈동자만큼이나 강렬했다.

사람들이 용을 믿지 않게 되면서 우리 일족은 힘을 잃었다. 우리들은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고, 우리의 육체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해져 버렸다. 그러나 그 때 [그]의 눈빛은, 먼 옛날 우리 일족의 눈빛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훗날 회상했다.

그러나 여왕을 사랑하던 그때, 그처럼 옛날의 용과 닮았던 [그]는 용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버리고 말았다.

이 이율배반은 무엇일까 하고 나는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여왕을 보며.

"다시 뵙습니다."

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목례로 답했다. 가냘프고 조용한 그녀는 고귀함은 있었으나 여왕으로서의 당당함은 없었다. 나는 장로들의 뜻대로 용의 역린을 건드려 용을 벌주었으나 결국은 전이되는 고통에 쓰러지고 말았던 그녀를 잠시 떠올렸다.

그 때 [그]는 쓰러진 그녀를 바다에서 건져올리고 용을 따끔하게 나무랐다. 바다에 살아 힘은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강했을 그 용은, 지능면에서는 한갓 축생이나 다를 바 없어 [그]의 권위에 굴복했다. 그의 위엄에 공포에 질린 용은 얌전히 바다로 돌아갔다.

위엄 따위는 없는 그녀. 한갓 보좌관의 형만큼도 위엄이 없던 그녀. 그녀는 지금이나 이때나 다름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웠고, 가냘프고 부드러웠다.

"제사지낼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응."

해가 뜨려면 시간이 약간 일렀다. 나는 그 동안 그를 장사지낼 제단을 차렸다. 주위에 부적을 붙여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향을 피우고 제기를 늘어놓았다. 그녀가 간소하고 깔끔하게 차려온 음식을 제기에 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그]의 시체를 끌어올렸다.

어두운 바다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내며 둘로 갈라지고, 희미하게 빛나는 [그]의 시체가 나타났을 때 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불렀다.

"작별인사를 해 줘."

왜 나에게 이런 것까지 강요하는지. 입술 끝까지 쓴물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여왕. 습관적으로 나의 몸은 그녀의 말을 따른다. 고개를 돌리고, [그]의 시체를 본다. 마음 속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나가고 온몸에 실리는 전율을 무시하며, 3년 동안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를 본다. 그는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죽음을 뜻하는, 용의 시체에 흐르는 엷은 푸르스름한 빛만 빼고는.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마저 서려 있었다.

어째서지? 왜 난 당신을 미워할 수 없을까.

당신은 나를 버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버리고, 우리 가족을 버리고, 일족을 버렸어. 당신은 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지. 죽을 때까지 당신은 그녀 옆에서 행복했겠지. 봐, 지금도 당신은 웃고 있잖아.

그런데도 난 당신을 미워할 수 없어. 왜지? 너무나 불공평하잖아. 너무나 화가 나. 화가 나고, 너무나 화가 나서....

화르륵 불길이 부적에서 타올랐다. 그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푸르스름한 빛이 불길과 어울렸다. 그의 시체는 겉보기엔 아무런 상흔도 없었지만, 불꽃은 그의 시신을 희미한 푸른 연기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제사를 진행했다.

바다의 빛깔이 점점 변해 갔다. 어두운 하늘이 회색으로, 청남색으로, 그리고 분홍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용은 모태로 돌아갔다.





"가지 않아."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의 말투는 슬프도록 가녀리게 느껴졌고, 그것은 나의 신경질을 돋우었다.

"가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혼자 사실 순 없을 텐데요."

"부탁이야, 욱아...이 아이에겐 자유를 주고 싶어."

나는 [그]의 아이이자 그녀의 아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시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혼자 사시기에 익숙치 않은 분이십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싫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기를 끌어안았다. 나는 싸늘히 말을 이었다.

"굳이 같이 가려 하지 않으신다면 직접 모시진 않겠습니다. 장로들에게 연락을 하지요."

"욱아!"

배신감과 당혹감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배신감. 그 명백한 감정에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일족의 안위는 폐하의 명령보다 우선합니다."

사실이기도 했으니,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네 조카야! 네 조카라구....네 형의 아들이란 말야! 부탁이야, 욱아...난 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이 애에겐 자유를 주고 싶어.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었지. 그래, 난 그의 아들이며 나의 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

".....형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아요!"

".........욱아!"

"나에게서 '형'이란 단어를 앗아간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3년 동안 나에게서, 우리 가족에게서, 일족에게서 [그]를 앗아간 당신이 어떻게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수현 형에게 멍에를 안겨 줘 놓고서도 당신은 그렇게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한낱 인간도, 그렇게 탐욕스럽진 않아!"

그녀의 놀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입맛이 무척이나 써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어쩌려는 거였나. 이미 [그]는 죽었다. 수현 형에게 씌워진 왕이라는 멍에는 돌이킬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여왕이라는 멍에는 바라지 않았을 터. 지독히 입맛이 쓰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 거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보면 그녀만의 잘못은 아닌데. 그녀에게 모든 죄를 씌우고 나 자신은 회피하고 싶은 거다.

"미안해...."

그녀는 울었고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안해...정말 미안해..."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다.





"모든 게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군."

"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덕이지요."

".....때려 준다. 단 둘만 있는데도 계속 그런 말 쓸래?"

"..고마워, 수현 형."

수현 형은 감사의 말에는 반응도 없이 내 품에 안긴 것을 무슨 괴물 보듯 하고 있었다. 나는 혀를 찬 후 그것을 수현 형에게 떠맡겼다. 무심결에 그것을 안아든 수현 형은 질겁을 했다.

"...야, 야! 욱아!"

"애 돌본 적 없어? 그냥 안고 있으면 돼. 조용히!"

"야, 난 싫다! 네 조카잖아. 삼촌이 돌봐!"

"그녀에게 갔다 올 테니 그 동안만 봐줘. 원 참....애들을 왜 이리 싫어해?"

"아무래도 나이도 두살 어린 주제에 애늙은이처럼 조숙해서 날 부려먹는 누구 때문이겠지...야, 야!"

당황해서 허둥대는 수현 형을 놔두고 나는 안채를 찾았다.

늦봄, 그것도 정오의 햇살은 따뜻하기보다는 뜨거웠다. 안채의 마루에서 그녀는 예전 여왕으로 지내왔던 때처럼 그렇게 지내오고 있었다. 얇고 하얀 비단옷을 걸치고 마루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는 또 하나의 나였다. 도시에 구속되어 버린 용.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투명하고도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와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당신의 보좌관이 되었을 때의 첫 제례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그 때 당신을 보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저에게 말했었지요. 저는 그 제례를 기억합니다. [그]는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때 [그]의 눈길은, 옛 용의 눈을 연상케 했습니다. 옛 용, 우리들이 아직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우리들의 존재를 믿고 있었을 때의 그 때의 용을 말이지요. 저에게 피로 전승되는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요?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그의 눈길은, 옛 용의 눈길이었다고 말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이면서 공허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저는 그 후에, [그]가 일족을 버렸을 때 생각했지요. 왜 [그]는 그때 옛 용처럼 보였을까. [그]는 용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렸는데. 용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시발점이 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그]는 왜 그리 옛 용처럼 보였을까. 해서, 옛 고서들을 깡그리 뒤져 보았지요."

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가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은, 용이 아닌 건가요?"

그녀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자유로웠습니다. 우리들은 독립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들어서고 돈과 권력이 판치며 버림받은 자들이 밤거리를 헤매며 우리는 변해 갔습니다. 인간들은 우리를 믿지 않았고, 믿음에 기반된 우리들의 힘은 약해졌지요. 우리들은 살기 위해 뭉쳤고, '일족'을 우선시했지요. 그러나 용족은 본래 독립된 자들. 그런 건가요?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겁니까? [그]가 택한 것이 오히려 용족의 삶이었다는 겁니까?"

"용족....이라는 게 정말 독립된 자들일까?"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뜻밖의 말에, 나는 가슴에 서늘한 것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고서에서 그들은 말하지. 우리는 독립된 자들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믿음에 기반한 존재야. 인간이 우리를 믿지 않으면 우리들은 힘이 약해지지. 인간들에게 영향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들에게서 독립될 수 있을까? 다른 종족에 의해 영향을 받는 우리가, 같은 종족들에게서 독립될 수 있을까?"

".....그러면..."

"[그]는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어. [그]는 그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야. 옛 용들은 자유로웠어. 그러나 그들이 독립된 자들은 아닐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들이 독립된 자가 아니었다고요? 그들은 모여 사는, 함께 사는 존재였다는 의미인가요?"

"아니야. 모여 사는 존재도, 독립된 존재도 아냐."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비껴 내리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그녀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어떤 용은 독립된 존재고, 어떤 용은 모여 사는 존재지. 단순히 독립된 존재만 자유로울까? 아냐. 모여 사는 존재도 자유로울 수 있어. 그들은 모여 살기도 하고, 혼자 살기도 했을 거야. 어느 쪽이건 그들은 자유로웠어. 단순히 모여 산다고 해서 자유가 없어지진 않아.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이 모여 사는 상황이 강요되었다는 거지. 원치 않았어.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 했지. 그래서 우리들의 자유는 박탈당하고 말았던 거야."

"당신과 [그]는 그것을 거부했고 말이죠."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무래도 좋아."

"옳았다고 생각합니까?"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상처받았지...응. 그래도 옳았다곤 생각해. 용족은 자유로워야 하는 거니까."

햇살이 뜨거워 나는 그늘 쪽으로 당겨 앉았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틀렸어요."

그녀가 동의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알기에 나는 그녀가 말하건 말건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용족은 자유로워야 하죠? 용족이 자유롭지 않은 이상 용족은 용족이 아니죠. 그래도 좋습니다. 진심으로,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용족이 용족이 아니더라도, 난 내가 아는 나의 일족들이 살았으면 합니다. 뭉쳐야만 살 수 있다면, 뭉쳐서 살았으면 해요. 난 지금까지 일족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나를 묶는 모든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아녜요. 살 수만 있다면 용족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자유롭고 싶었다. 일족을 버리고 싶었다. [그]를 [그]라고 불러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퍼,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결국 자유란 나에게 무엇인가? 자유가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자유를 꿈꾸게 된 것은, [그]의 배신 이후였다. [그]가 배신하고, 무거운 짐이 떠맡겨지고, 일족의 비난을 받고, 어머니가 괴로워하고, 아버지가 술로 밤을 지새고, 그리하여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나는? 그 이전에도 나에게 자유란 없었다.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일족이 우선. 나는 어머니를 화룡 휘련 님이라 불렀고, 아버지를 청룡 예신 님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좌랑이라 불렀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아들 이전에 여왕을 보좌하는 보좌관 좌랑이었고 나에게 그들은 부모님 이전에 일족의 일원인 화룡과 청룡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족 안에서 행복했다. 자유를 가지지 않은 도시에 속박된 용으로서의 나는 행복했다.

일탈이 생겨나고, 무언가가 어긋나기 전의 나는 구속 속에서도 행복했다. 그 때에는 자유란 한갓 잡히지 않는 구름. 아름다워도 그저 부러워하며 지나쳐 버릴 수 있던 그런 것.

"아이는 당신 품에서 자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자유를 꿈꾸지 않는다면요. 나는 당신이 자유를 버리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우리 일족이 살 수 있다면, 살아나갈 수 있다면....삶보다 우선하는 명제가 있을까요?"

"그는 자유를 우선했지. 죽을 각오도 하고 있었고..."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내가 그녀를 설득하리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만큼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쓴웃음을 흘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용족으로써의 삶을 버릴 겁니다. 살기 위해서요. 그럼 나는 용족이 아닌 겁니까? 용족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겁니까?"

"글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너를 뭐라고 생각했지? 그걸 아는 건 너야. 너 외엔 아무도 그걸 알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지?

나는 도시의 용. 용이되 용이 아닌, 도시의 족쇄에 사로잡힌 도시의 용. 찢어진 날개를 접으며 고개를 수그려 잠이 드는 도시의 용.

그리고, 이제는 결코 그 날개를 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삶과 자유를 맞바꾼 도시의 용.



단편 중에서는 '좋아하는' 축에 드는 글입니다. 지금 보면 이래저래 단점도 많지만 요즘은 슬럼프라, 이 정도 이하의 글도 못 써내고 있다는 느낌이라서 울적하군요ㅠ.ㅜ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39 단편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2005.04.27 0
2038 단편 내 안의 산타클로스1 Nitro 2005.04.28 0
2037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환상, Fantasy 미소짓는독사 2005.04.28 0
2036 단편 정상과 비정상 왁슘튤람 2005.05.05 0
2035 단편 노을은 결코 붉지 않다 미하번 2005.05.08 0
2034 단편 발디엘 꼬마양 2005.05.09 0
2033 단편 미팅(meeting)2 moodern 2005.05.09 0
2032 단편 바람 부는 날 adama 2005.05.10 0
2031 단편 초능력자들 moodern 2005.05.11 0
2030 단편 공부와 목숨과 꽃 2005.05.11 0
2029 단편 독수리 스아 2005.05.12 0
2028 단편 딸이 피는 뒷동산 pilza2 2005.05.13 0
2027 단편 통증 rav. 2005.05.23 0
2026 단편 햄릿 rubycrow 2005.05.23 0
2025 단편 옛 하늘4 amusa 2005.05.25 0
2024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철듦 미소짓는독사 2005.05.26 0
단편 도시의 용 rubycrow 2005.06.01 0
2022 단편 남가일몽(南柯一夢)1 2005.06.02 0
2021 단편 잎글/ 불꽃놀이4 amusa 2005.06.03 0
2020 단편 괴물의 꿈 다담 2005.06.05 0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