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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초능력자들

2005.05.11 00:2605.11

손가락

20대를 막 들어선 어느 날,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헌 책방에서 유리겔라를 재발견(혹은 뒤늦게 발견)했다.
숟가락 구부리기. 그렇게 해서 손가락은 염동력에 눈을 뜬다.
염동력, 정신력으로 물체를 움직이거나 변형시키는 힘.
그러나 그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서, 숟가락이 구부러진 정도는
가시적이라기 보다는 계기측정적이다. 한 시간 집중시 몇 억분의
나노미터 정도밖에는 휘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을 찾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고, 실험결과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지만
결국 변한 건 없었다. 남들의 시선도, 세계내에서의 위상도,
그의 존재가치도... 아무런 외재적 변화도 없었다.
그저 덧없는 확신 속에서, 위안 속에서 그는 50년동안 숟가락
구부리기에만 자신을 소모했다. 그리고 숟가락이 부러지던 날,
그의 삶도 끝이 났다.



허벅지

우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황량한 세계에 지쳐 심각한
정신장애를 겪고 있었다. 회백색의 그로테스크한 세계.. 라고
그는 말한다.
허벅지는 투시능력자이다. 모든 인간이 그의 눈에는 X-ray
사진에 찍힌 것처럼 보인다. 단 좀더 자세히.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세계에 내던져져서, 혐오감을 품은채,
혹은 헛된 기대를 품고 인간을 관찰해왔다.
어느날 문득, 그 역시 성적 욕망에 눈을 떴으나
그 이유도, 대상도, 목적도 알지 못한 채 시작하고 만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미의식을 공유하지 못했다.
어떤 인간적인 아름다움도 그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니 그는 쾌락을 느껴 본적도 없었다.
그저 막연한 기대 속에서, 그는 상상한다.
인간의 핏줄과 혈관과 내장들을.. 그는 말한다.
' 내가 최고로 집중했을 때, 혹은 끝없이 상상했을 때,
어느날 회백색의 뼈에서 힘줄이 자라고, 붉은 살이 들러붙고,
선홍색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죠 '
그는 지금도 헛되이, 혐오와 기대로 범벅이 된 시선으로,
인간의 얼굴을 찾아다닌다. 표피로 덮인 세상을 꿈꾼다.



안경

그는 원래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사춘기에 들어서자
그는 점점 오그라들고 투명해져서, 그에게 남은 건 안경밖에 없었다.
집 가득히 전시되어 있는 안경들을 가리키며, 혹은 그 속에서 그 중의
하나가 말한다. ' 저를 남에게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
정부는 그를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고, 그의 유일한 가시적
특성인 안경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거의 장님에 가까운 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고심끝에(혹은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콘텍트렌즈를 사용하게 했다.
얼마후 그는 자신의 실재성을 의심하다가 자아가 붕괴되고 말았다.



발바닥

그는 시간여행자였다. 단 개인적이고 상상적인 시간에서만.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사람의 몸에는 그가 거쳐온 시간이
먼지처럼 쌓여있다. 그 주름들, 그 퇴적층들은 다른 사람과의
공유된 기억을 통해 공통된 시간을 형성한다. 그 관계망들은
객관적 역사를 구성한다. 그는 개인의 시간을 통해, 그 주름을
들치고 과거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는 야심적인 사나이가 아니었고, 그의 능력 또한 그러했다.
그저 변심한 애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를 화나게 한
자신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처음으로 과거를 변형시킬 생각을
했고, 그 결과는 기억이, 개체성이 훼손된 현재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시간의 개별적, 상상적 특성에 대한 거부감에서,
역사는 실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그녀를 망가뜨렸다는 자책감에서
그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다양한 그녀들/과거들 속에서 조각난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머리카락

근묵자흑, 가까이 있으면 닮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그의 능력이었다.
단 그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수동적인 변신이었지만.
어릴때부터 그는 누구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커가면서 그의 능력도 강해져서, 약간의 시간, 조금의 접촉만으로도
그는 상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자
그의 능력은 사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기 위해, 자기자신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일정한 거주지도 없으며,
고정적인 인간관계도 없이 고독하게 인간과 사물들 사이를 흘러다녔
다. 결국 어느날 (이런 표현이 맞는다면)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덮고 자던 신문지처럼 되어있었다.
신문지의 의식, 신문지의 감정, 신문지의 의지, 신문지의 욕망....
곧 구겨져 버려지는 지저분하고 초라한.



넥타이

중년의 나이, 실업자가 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날, 공원의 벤치에서,
늦게서야 자신의 능력에 눈을 떴다. 오감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단 너무도 많은 제약이 있어서 쓸모없을 정도의 능력.
시력, 청력, 촉각, 운동지각... 등등의 감각들을 그는 조정할 수
있었다. 단 감소시키는 한에서만.
시력을 한 단계(혹은 마음먹은 대로)떨어뜨릴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청력을 마음먹은 대로 손상시킬 수 있지만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번 변형된 감각능력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이런 자기파괴적인 능력도, 이미 패배감과 소외감에 젖어있던 그에게
는 일종의 구원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남들과 틀리다는 생각,
나도 쓸모있을지는 모른다는 느낌, .. 그러한 쓸쓸한 확신 속에서,
그 확신마저도 흔들릴 때, 그는 그의 능력을 사용했다.
우리들을 찾아와, 그의 능력에 대해 (우리를 혹은 자기자신을)
만족시키고자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를 닫아버렸다.



배꼽

그의 능력은 지금껏 소개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탁월한 것이며, 그래서 가장 비극적인 것이다. 그는 텔레파시
능력자이다. 그 중에서도 독심술.
이런 수동적인 능력은 그의 삶, 존재와도 연관이 깊다.
그가 태어나기 몇 시간 전에, 그의 부모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사망, 산모도 병원에 옮겼을 때 매우 위독한 상황이었고,
수술대에 위에서 죽었다. 그리고 제왕절개를 통해 그가 세상에
나왔다. 사고의 충격으로 모든 감각은 마비된 상태, 사지는 절단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축복과 자기자신에게 마저 버림받은 채
그의 생은 시작되었다.
그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서 그는 능력에 눈을 뜨게
된다.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생명력 덕분에 감정과 욕망이 조직되어
가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게 되고,
자신과 다른 형태의, 소녀의 숨결과 소녀의 밝음과...
그는 어둠 속에서도 한 소녀를 알게 되었다.
이름붙일 수 없는, 결국 완전하게 깨달을 수 없을 감정이 그의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정체도 밝히지 않은채, 침묵속에서.
그리고 어느날 그 소녀의 마음이 그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혐오감.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세계와 관계한 순간의 일이었다.
점점 그의 개체성이 굳어지고, 자아가 무게를 늘여가면서,
그는 그때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혐오감 위에 양념처럼 안도감과 자기만족감이 뿌려지고,
엉성하지만 굵직하게 얽힌 동정심과 인간애가 덧입혀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어린 시절을 마감한다.
우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지하보도 구석에, 신문지 위에서
동전이 몇 개든 알루미늄 깡통과 함께 놓여있었다.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것도 주지 못한 채, 그의 어떤 감정도,
적의도 전달되지 못한 채,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흐름과 그 흐름들
을 떠돌아다니는 불결하고 고독한 마음들의 흐름과, 그 흐름들을 잔인
하게 묶어놓는 세상의 흐름이 그의 조그마한 머리 속으로, 그 무기력
한 어둠 속으로, 그 상처 속으로 흘러들어와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by moodern 1999.10/19)
이게 미팅에 앞선 글이죠. 1999년도에 두 글을 연속으로 썼으니
꽤나 지난 글들이군요. 그동안 너무 뜸해서. 안부차 올립니다.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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