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상처입고 상처를 잊어버린 남자는 고통을 이겨내 상처를 치료한다.
  
꿈을 꾸었다. 많은 시간을 보냈던 마을에서의 꿈을, 행복했던 시절의 꿈을, 여행을 하며 몸이 가는대로 바람을 따라 여행하던 시절을.

하지만 눈을 떠보니 그는 황무지에 있었다. 그것도 하늘을 떠다니는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밤인데도 황무지는 엄청난 열을 내뿜고 있었다. 바위 역시 그 열에 달궈져 있었다.

야헤스는 오른손을 이마에 올려놓고는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야헤스의 눈에 달이 들어왔다. 하지만 달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읊조리는 듯 중얼거렸다.
  
“망할... 하필이면 이런 곳에 떨어질게 뭐람. 대체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몸을 움직이니 여기저기 바늘로 쑤신 것 같이 아팠다. ?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숨은 계속 가빠왔다.
그런데 그때 무엇인가가 자신의 배를 누르고 목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는 괴로움에 몸을 움직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듣는 사람 하나도 없는 황무지에서 그 비명을 듣고 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몸부림을 쳤다. 어찌나 몸부림이 심한지 그는 자신이 누워있던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떠다니는 바위 위에서 추락하는 그의 몸을 북풍이 거세게 때렸다. 그리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황무지의 모래위로 떨어졌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젠장… 젠장. 망할 곳. 대체 여기에 내가 왜 있는 거야!!”
  
사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외침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는 새와 동물들도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친 몸을 모래로 뒤덮인 대지에 몸을 마꼈다. 그리곤 정신을 놓은 채 잠에 빠졌다.
다시 꿈을 꿨다.
불타는 마을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그런데 그 낯익은 마을이 불타면서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도망치며 외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사ㄹ…살려줘요.!”
  
야헤스는 그런 그들을 보며 입을 떡 벌린 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을 도와줘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있을 때, 사람들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뭉갰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사악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점령했다. 그 목소리 빼고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양손을 얼굴에서 때고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의 앞에는 칼을 든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사나이는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불에 그을린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붉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누구지? 당신은 누구야?”
  
사나이는 붉은 가면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높이 들었다. 그런 다음 그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차례로 베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칼에 하나 둘 피를 흘리며 죽었다. 사나이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야헤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노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사나이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몸은,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나이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칼을 거둔 뒤 ?를 보았다. 사나이는 그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쓸쓸히 불타고 있는 마을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마을의 불은 서서히 꺼져갔고 이내 완전히 소화되었다. 야헤스는 불이 꺼진 마을에서 잿더미가 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완전히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는 분노에 몸서리 쳤다. 왜 그는 이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왜 대체 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심장이 요동을 치며 가슴을 쳤다. 그러자 야헤스의 숨이 가빠오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야헤스는 어지러움에 몸을 좌우로 흔들다 잿더미들 속에서 쓰러져 버렸다.
마을은 고요함 속에 잠들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희미한 정신 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가볍게 뒤척이며 일어났다. 아직 시아가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무지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흐릿한 시아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아름다운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긴 저희 집이에요. 황무지에 쓰러져 계시던 걸 지나가던 중에 발견해 데려왔어요. 어쩌다가 황무지에 쓰러져 있었던 거예요?”
  
목소리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 왜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황무지에 쓰러져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모르시군요. 어쨌든 오늘은 여기서 편히 쉬세요.”
  
야헤스는 고개를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렸다. 희미하던 시야가 점점 뚜렷해져 갔다. 야헤스는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가 나간 후 방은 아주 정적이 가득했다. 그 정적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듯했다. 야헤스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손님들을 위해서 준비해둔 방 같았다.
  
“헤… 꿈같잖아 이거... 방금 전 까지는 황무지에 누워있더니 이제는 방이야?”
  
투덜거리며 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야헤스는 고개를 다시 천장으로 돌리곤 생각했다. 그때 그 꿈은 대체 뭐였을까? 낯설지가 않았는데... 야헤스는 깊은 사색에 잠기며 곰곰이 생각했다.
꿈에 나왔던 마을은 분명 내겐 낯익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낯익은 마을이었는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하면 기억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그의 귀에 방 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 방 앞에서 수다를 떠는 것 같았다. 야헤스는 귀를 기울여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들었다.
  
“여기에 나그네가 있다지?”
“암 그렇단게, 보소 내가 말이지. 들은 이야기론 정부 측으로부터 쫓기다 사막에 쓸어졌다는 데?”
“아녀, 내가 듣기론...”
“아저씨들이 무슨 아줌마예요? 왜 환자 방 앞에서 이러고 계시는 거냐고요!”
  
소녀의 목소리가 떠들던 목소리들을 잠재웠다. 사람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해 달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자 소녀는 방문을 열고 야헤스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물을 받은 대야가 들려있었다.
소녀가 야헤스에게 다가와 그가 누운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야헤스는 그런 그녀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그녀에게서 돌리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보지 못했던 마을의 풍경들이 보였다. 마을은 모래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집들은 나무를 잘라 만든 집들이었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집 같았다. 하지만 마을에는 푸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신기하시죠? 어떻게 이런 황무지 가운데 푸른색 나무들이 있는 마을이 있다는 게 말이에요.”
“네?”


야헤스가 소녀를 돌아보며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소녀는 미소를 살짝 지어주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소녀의 눈은 회상에 잠겨갔다.
  
“원래 이곳은 황무지였습니다. 황무지요, 하지만 마을사람들과 함께 가꾸어나갔죠. 이렇게 마을이 푸른빛을 가지게 된지는 10년이 지났죠. 그래서 전 이 마을이 그 무엇보다도 좋습니다. 마을사람들과 함께 가꾼 마을이니까요.”
“그렇군요.”
  
야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창문 너머로 돌렸다. 그리곤 다시 창밖의 마을들을 살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지금 이대로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이 마을에서 그대로 눌러 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군요. 제 이름은 아사야 라고 해요. 당신 이름은요?”
“이름?”
“네, 이름이요.”
  
스스로를 아사야 라고 밝힌 소녀가 그에게 물었다. 야헤스는 그녀의 물음에 자신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생각해 보았다.
  
“야…야, 헤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았어도 그 이름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름에 대한 뜻까지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소녀는 그의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야헤스라...”
“좋은 이름이 아니야. 좋은 이름이 아니에요.”
  
소녀는 야헤스의 말에 놀랐다. 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야헤스는 그런 소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이름은 고통을 의미해요.”
  
그렇다. 그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를 대변해주는 이름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자신에게 있었든지,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에게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는 것을.
  
“그런데 그런 걸 어떻게 아신 거죠?”
“알았다기보다는 유일하게 남아있었어요. 제 기억 속에 말이죠. 지금 기억하는 건 이름과 그 이름의 뜻만이 제 유일한 기억입니다.”
  
그의 말속에선 쓸쓸함이 묻어났다. 소녀는 그런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만, 곁에서 그의 말동무를 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옆에 있는 것이 전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야헤스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사야는 그의 행동에 놀라 당황하며 말했다.
  
“저, 아직 안정을…”
“괜찮아요. 그저 걷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아사야는 그를 부축하며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그들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아주 길었다. 그리고 걷는 내내 양쪽에서 방문 하나씩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여긴?”
“여긴 여관이에요. 저희 집은 여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소녀의 말에 야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조금 걷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가니 테이블들이 배열을 맞춰 놓여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저마다의 사연을 늘어놓으며 수다를 떨고들 있었다.

“어? 깨어났나 보구먼.”
  
그때 수다를 떨던 사람 중 거칠어 보이는 사람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야헤스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그러자 수다를 멈추고 야헤스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는 야헤스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과 애처롭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은 당연 어린아이들이었고, 애처롭게 보는 사람들은 나이든 여자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야헤스를 향해 말했다.
  
“어쩌다가 저 사막에 쓰러져 있었던 거야?”
“그래요, 거기에 왜 있었어요?”
“거기에 어떻게 쓰러져 있었든, 지금은 우리 마을에서 편히 쉬다가 가세요.”
  
쉴 틈 없이 질문공세와 위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야헤스는 그런 그들의 호의에 부담스러웠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사야는 마을 사람들과 야헤스를 번갈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누나! 아사야 누나!”

사람들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아사야를 부르며 여관 입구에서 한 소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사야는 소년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소년이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와 아사야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안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상하게 말했다.
  
“왜 그러니?”
“그게 말이야. 우리 형에 대한 예언을 부탁해.”
  
예언? 야헤스는 소년의 말에 귀가 쫑긋했다. 그는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아사야는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려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야헤스의 것이란 걸 알고 깜빡하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형이 누나가 예언에서 봤다는 그 형이야?”

소년이 아사야의 치맛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어? 어…”
“형! 우리 아사야 누나에게 잘해줘요. 누나의 예언이 아니었으면 형은 사막에서 벌써 찜통구이가 되었을 거라고요.”

소년의 말에 야헤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야헤스를 아까와는 다른 신기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헤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아사야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모두들 저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그 말에 사람들은 날카로운 시선을 숨겼다. 아사야는 그런 그들을 한 번 둘러보고 시선을 다시 야헤스에게로 옮겼다.
  
“저… 방금 예언이라고...”
“사실 제 이름에는 예언자라는 뜻이 있어요. 아주 오래전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죠.”
  
고개를 숙인 채 아사야가 말했다. 그녀의 풀이 죽은 듯한 말에 분위기가 사해졌다. 그 순간 아사야의 품에 안겨있던 소년이 야헤스를 바라보며 분위기를 전환 시켰다.
  
“아사야 누나가 아니었다면 우리 마을은 푸른빛을 가질 수 없었을 거예요. 누나가 마을의 오아시스를 발견했죠. 신의 계시를 받아서 말이에요. 누나는 두려워했어요. 언젠가 자신의 그 힘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다칠까봐서요.”

아사야는 소년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때 덩치가 있는 남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아사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요한 네 말이 맞아. 우리 딸은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안 그래 여보?”
“맞아요.”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여자가 그의 말에 답했다.
  
“아사야 그러니 걱정 말고 말해주겠니? 우린 가족이잖아.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말이야.”
“하지만...”
  
남자의 위로에도 아사야는 망설였다. 자신이 예언으로 본 걸 말한다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할까? 혹여 그들이 불안에 떨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그런 생각을 멈추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해주세요. 저 아이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제가 이곳으로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건데, 그렇다면 제 기억에 관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떠올리긴 싫지만...”
“누나, 저 형이 원하는데 그냥 말해주면 안 돼?”
  
소년이 아사야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주지 않겠니?”
“그래, 엄마도 부탁할 게.”
  
남자와 여자 역시 그녀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아사야는 그런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내가 너무 과민 적으로 반응한 게 아닐까? 그리고 저 사람과 관련된 예언이니 말해주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
마침내 아사야는 침묵하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언이란 능력에 대한 것과 야헤스의 예언에 관한 것들이 그녀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제가 예언능력을 가졌던 건 5살 때였을 거예요.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예언은 아주 사소한 것들뿐이었죠. 하지만 점차 성장해나가면서 마을의 위기나 길한 일들이 제게 보이더군요. 그리고 어느 날 저 아이의 말대로 오아시스를 찾았죠. 그런데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죠. 신이 제게 준 우연이요.”
“아니,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 신께서 우리 마을에 준 선물이었지.”
  
소년이 아사야의 말이 끝나자 우연이었다는 말을 반박했다. 아사야는 소년에게 미소를 짓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오아시스를 파서 가꿨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마을에는 풀들이 자라고 무성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제게 한 가지 계시가 보였어요. 당신과 우리 마을에 대한 예언이 말이죠. 하지만 전 그 예언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어요. 불길한 예언이었거든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순간 눈보라가 지나 간 것 같이 침묵이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특히 야헤스는 충격이 컸다. 아사야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제 표정이 안 좋았는지 왜 그러냐고 물어왔습니다. 전 요한에게 예언에 대해서 숨기려 했죠. 하지만 이 아인...”
“이제부턴 내가 얘길 할 게 누나. 그래서 누난 내게 형의 얘기와 우리 마을에 대한 예언을 해줬어. 예언의 내용은 한 남자가 모래 속에서 잠들다. 그를 깨우면 그 뒤에 불이 따라올 것이다. 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 불이 뭔지는 몰라도 아마 별 일은 아닐 거야. 그런데도 누나는 자꾸 걱정만 하고 내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사야가 말을 흐리자 요한이 그녀의 말을 이어 말했다. 그 이야길 모두 들은 야헤스는 휘청거리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왔다. 뭔가가 기억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 돼! 안 돼! 기억해내기 싫단 말이야.
그는 그만 기대고 있던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다시 테이블을 잡고 일어섰다. 쓰러졌다가 일어선 그를 보며 사람들이 걱정 어린 눈빛을 했다. 야헤스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다시 올라가서 자야겠다고 말하고는 이내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자고 나면 괜찮겠지.” 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붙였다.
  


야헤스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의 눈부심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꽤 오랜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그는 일어나 앉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주 밝게, 모든 고요한 세상을 밝혀주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고요함에 잠겨있었다.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도 고요함에 무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때 그의 눈에 아사야의 모습이 띄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눈에 띄면 안 되는 초조한 사람 같았다. 야헤스는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허름한 옷차림으로 그녀를 쫓아 방을 나섰다. 다행히도 복도와 아래층은 조용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건물을 나온 그는 땅을 살펴보았다. 혹여나 발자국이 찍혀 있을까 해서였다.
다행히도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발자국은 빠져나온 건물의 왼쪽으로 나 있었다.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그녀의 발자취를 쫓았다. 발자취를 쫓아가니 마을의 외곽근처였다. 게다가 인적도 드물었다. 달빛만 없다면 아주 캄캄해서 위험할 것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긴장이 되었지만 이 마을에서 위험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계속 아사야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렇게 조금을 걷자 마을과의 경계부분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주위와는 다르게 빛나는 곳이 있었다. 별빛과 달빛을 받아서 밝은 게 아니었다. 야헤스는 그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푸른 빛깔과 비슷한 갈색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소녀가 밧줄사다리를 잡고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야헤스가 소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자 소녀가 깜짝 놀라 조심스레 고개를 뒤로 돌리며 말했다.
  
“아니, 당, 당신은?”
“저 뭔가가 수상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뒤쫓아와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묻자 아사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곤 고개를 밧줄사다리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사야가 말했다.
  
“바람 좀 쐬려고요.”
“뭔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요?”

아사야는 그의 말에 눈을 감고 작게 끄덕였다. 그리곤 이내 밧줄사다리를 잡고서 한 발 한발 지상에서 위로 올라갔다. 야헤스도 그녀를 따라 밧줄사다리를 잡았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지상에서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보니 공중에 떠있는 섬이 나타났다. 그곳은 아주 작은 정원 같았다. 꽃들과 나무 게다가 작은 호수까지 있었다.
섬에 발을 디디고 서서 주위를 둘러본 야헤스는 주위가 사막뿐인 이곳에 이런 곳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름다운 곳이죠?”
“이곳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나요?”
  
아사야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팔을 뻗어 모래뿐인 사막을 가리켰다. 야헤스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곳과 비슷하게 생긴 섬들이 하늘에 떠있었다.
야헤스는 그 섬들을 보고 놀라 아사야를 쳐다보았다. 아사야는 싱긋 웃더니 그 섬들을 쳐다보았다.
  
“아뇨. 여기는 자연이 만든 거예요. 저희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들은 이렇게 아름다웠죠. 꽃과 나무들 이 모든 게 이곳에서는 거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들겠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걸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걱정이에요.”

야헤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거지? 그는 아사야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거죠?”
“실은 요한에게 예언에 대한 내용을 전부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그 아인 제가 예언 전체를 알려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전부 알려주지 않았다니? 설마 낮에 말한 예언 뒤에 뭔가가 있다는 얘긴가요?”
  
아사야는 그의 다급 침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헤스는 실웃음이 나왔다. 아사야는 그런 그를 보고 한 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 예언의 뒷내용은 이러해요. ‘그리곤 불은 엄청난 기세로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그러면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잊혀 진 남자의 기억을 끄집어 낼 것이다. 잊혀 진 남자의 기억은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정신을 잃게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고요함을 가져올 것이다.’ 이게 예언의 나머지 내용이에요. 처음에는 전부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걱정을 할 것 같아서 말을 하지 못했어요. 특히 요한에게는 더더욱 말이죠. 그 아인 너무 어리잖아요. 그러니 이런 무시무시한 일에 대해서 걱정할 나이가 아니니까.”
  
아사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자 자신이 아까 한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아니면 옳지 못한 것이었을까? 그냥 다 말하는 게 나았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예언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사야는 다리를 모은 자세로 고쳐 앉고는 얼굴을 다리에 묻었다.
  
“그래서 혼자서 그 고민을 다 떠안으려고 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야헤스가 목소리를 높이고 말했다. 아사야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화를 내고 있었다. 혼자서만 모든 걸 책임지려는 그녀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저 화만을 내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눈빛이었다. 아사야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이 되었다. 야헤스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혼자서 그 모든 걸 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제가, 제가 도와드릴게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이 일은....”
  
그의 말을 반박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의 일이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닌… 그의 일.
아사야는 체념을 하고 야헤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확고해 보였다. 지금 자신이 뭐라고 말하든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알겠어요. 도와주세요.”
  
야헤스는 그녀의 부탁을 흥쾌히 들어주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기에 부탁을 하지 않았어도 했을 것이다. 야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리곤 그들은 잠시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야헤스는 저 별들이 언제까지나 반짝였으면. 언제까지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느낌상 그러했다. 그들은 별을 보던 떠다니는 섬에서 내려와 마을로 돌아갔다.
다음날 야헤스는 아사야의 아버지로부터 옷을 받아 갈아입고서 아침을 먹고 그녀의 아버지가 밭가는 일을 도왔다. 도왔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마을 이름이 에덴이라는 것과 아사야의 부모님의 이름, 그리고 요한의 형이 몇 년 전에 먼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까지.

“밭가는 게 힘들긴 힘들지?”
  
아사야의 아버지인 세브가 야헤스에게 물었다. 야헤스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사실 힘들긴 했지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아버지였기에 이런 일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그는 마을 일을 도우며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래서 마치 그가 예전부터 마을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야헤스는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악몽 같았던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심했다. 불에 휩싸이던 마을과 죽어가던 사람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서 생생히 떠오르긴 했지만 그 꿈을 꾸었을 때 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갈 것을. 야헤스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 끔찍한 꿈을 꾸어 고통스러워 할 것임을.
하지만 꿈을 꿀 것 같은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매일이 행복했고 편안한 잠자리였다. 그래서 자신이 기억을 잊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그는 마을에서의 삶을 즐겼다.
  

야헤스가 에덴에 도착한지도 한 달이 지났을 어느 날이었다. 그는 몇 주 동안 꾸지 않았던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이전에 꾸었던 꿈이랑 비슷했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게 있었다. 자신이 그 마을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마을을 보며 사람들을 죽이며 생각했다.
안 돼. 죽이면 안 돼!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말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가? 네가 누군지를. 넌 혼돈이야, 혼돈. 살인자. 네 진정한 모습이 바로 그거다. 넌 사람을 죽였어. 언젠가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겠지. 그래, 꿈속의 그들을 죽이는 거야. 죽이는 거야. 그리고 또 그렇게 하는 거야.”
  
목소리는 환청이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는 불타는 마을과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꿈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그가 꿈에서처럼 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다. 마치 그렇게 할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야헤스는 목소리를 향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속에서 밖으로 억지로 끌어내 외쳤다. 그 순간 그 외침과 함께 그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아냐!!! 난 살인자가 아니야!!!”
  
식은땀이 온 몸과 이불을 적셨다. 그는 식은땀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아우성이었다. 야헤스는 창문 밖을 보았다. 사람들이 여관 앞에 모여 있었다. 야헤스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여관 앞으로 가보니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과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들렸다.
  
“이런, 야셋이 어쩌다가 쯧 쯧.”
“그러게 말야,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야헤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야셋이란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분명 그 이름은 요한의 형의 이름이었다. 몇 년 전 여행을 떠난다고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요한의 형의 이름이었다. 야헤스는 사람들을 비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쓰러진 남자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아사야와 요한이 보였다. 그는 둘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이죠?”

그 말에 요한과 아사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사야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요한은 그럴 수 없었다. 요한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큰, 큰일이야. 이, 이, 앞에서, 괴, 괴물을 만났데.”
“괴물?”
“응. 괴, 괴물.”
  
야헤스는 야셋을 내려다보았다. 야셋의 몸은 갈기갈기 살 갓들이 찢겨져 나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야셋은 가쁜 호흡으로 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셋이 가쁜 호흡으로 입을 열려고 했다. 사람들은 야셋의 움직임에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조, 조심…해… 검은 그림자였어. 사, 사막의 모래에 부우울 까아악.”
  
그러나 야셋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는 기절해버렸다. 사람들은 야셋의 말에 수근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사야는 달랐다. 그녀는 그 말에 생각이 났다. 예언이.
그녀는 이제 곧 그 예언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사야는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더운 사막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야헤스를 불렀다.
야헤스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다가가 그녀의 등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리곤 그녀의 귀에다 데고서 속삭였다. 그때 했던 약속을 말이다.
그제야 그녀의 떨림이 멈췄다. 떨림이 멈추자 야헤스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느끼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느낌은 강하게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가 아파왔다.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머리는 점점 아파왔다. 그는 아픔에 그만 쓰러졌다. 하지만 정신은 잃지 않았다. 아니,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람들이 쓰러진 그의 주위를 에워싸며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야헤스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 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야헤스에게 낯익은 목소리였다.
  
“혼돈을 지키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야헤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통을 꾹 참으며 사람들의 부축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니 사막에선 볼 수 없는 긴 코트를 입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야헤스가 말했다.

“대체 넌 누구지? 누구 길래 나보고 혼돈 이라고 하는 겁니까?”
“내가 누구냐고? 난 지나가던 바람이지. 존재할 가치 없는 것을 끌고 가는 바람.”
  
그러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야헤스는 뭔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답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면서 남자는 야헤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누구고 네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오늘 밤 동쪽 사막으로 나와라. 안 그러면.”
  
그 말이 끝나자말자 이내 그의 등에서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라 야헤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기들은 야헤스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도중에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연기들은 이내 개의 형상을 취하며 땅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땅을 박차며 달려 야헤스를 향했다. 야헤스는 달려오는 연기로 된 개들을 양팔로 막았다.
야헤스는 개들을 양팔로 밀어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연유로 날 공격하는지 모르겠지만, 덤벼드는 상대를 피하지는 않아. 자, 덤벼!
개를 향해 주먹을 후려쳤다. 개들은 그의 주먹에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선 깨갱 거리며 남자가 걸어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야헤스는 개들이 가고 도망치자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피했다. 그는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아사야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양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제발… 제발 그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빌며.
  


노을이 지고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막의 밤은 추워진다. 야헤스는 여관의 탁자에 기대어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초조했다. 그 꿈이 사실일 수도 있기에…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걱정 마세요. 당신은 살인자가 아닐 거예요.”
  
아사야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야헤스는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계속 꾸어왔던 그 꿈들 속에서의 자신이 정말 자신일까? 라는 의구심이 가슴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노을은 계속해서 파란하늘을 붉은 하늘로 물들여 갔다. 하지만 이내 그 붉은 하늘은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을 만들어냈다. 야헤스는 밤하늘을 보고는 이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말한 예언대로 일어날 지도 모른다. 마을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불로 하늘이 뒤덮여 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이 완성되기 전에 모든 걸 끝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을 되찾는 거다.
야헤스는 아사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야헤스는 아사야를 껴안고 말했다.
  
“이제 은혜를 값 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당신과 당신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 때네요. 저 보고 걱정 말라고 하셨죠? 그래요. 걱정 하지 않을게요. 모두 모두 잘 될 거니까.”
  
그는 그 말만을 남겨둔 채로 여관을 나와 마을 동쪽으로 향했다. 동쪽사막은 떠다니는 부유 섬들이 없는 온통 사막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드디어 왔군. 별이 참 아름답지 않나?”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유희를 즐기듯 말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내리깔며 야헤스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빛은 야헤스를 증오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야헤스를 향해 크게 외쳤다.
  
“넌 네가 한 죄도 잊고 평화롭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구나!”
“내 죄라고? 대체 무슨 소리죠? 난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 나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이야. 하지만 결국은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더군.”
  
남자는 야헤스를 향해 미소를 짓고, 발걸음을 야헤스에게로 옮겼다. 야헤스는 다가오는 남자를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죠? 대체 누구 길래 날 안다고 하는 겁니까?”
“너에 대한 전부를 알지. 넌 존재할 가치 없는 살인자지. 아니, 살인마.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지금 네 몸에서 더러운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을 내줄테니까.”
  
남자가 말을 끝내자 그의 몸에서 마을에서와 같이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개의 형상을 했다. 남자는 손짓으로 야헤스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개들은 남자의 명령을 받들어 야헤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헤스는 개들을 피해서 달아났다. 사막을 향해 절대로 그 예언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도망치는 건가? 하지만 결국은 내 손에 걸리게 되어 있지. 널 잡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신이 왜 널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가. 넌 사람을 죽였는데. 신의 사랑을 받잖아? 이건 불공평해!”
  
남자가 도망치는 야헤스를 향해 외쳤다. 야헤스는 남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이 자신을 사랑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신이 있다는 듯. 그리고 자신과 야헤스를 잇는 것인 듯 말했다.
야헤스는 뒤돌아 개들을 보았다. 개들은 미친 듯 날뛰며 그를 노려왔다. 야헤스는 주먹을 쥐곤 말했다.
  
“신이 날 사랑한다니 무슨 말이죠!?”

그러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증오가 차있었다.
  
“말 그대로야. 넌 신의 사랑을 받고 있지. 너한테는 과분한 사랑을 말이야. 네 이름이 왜 고통인 줄 알아? 신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지. 넌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다. 아니지, 아니야. 넌 괴물이야. 신이 만든 괴물. 네 몸을 이루고 있는 게 뭔지 알아? 바로 혼돈이다. 넌 이성을 잃고 마을 하나를 날렸어. 그런데 신께서는 왜 널 살려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 그래서 난 널 처단하려고 나섰다. 그 와중에서 너와 비슷한 녀석들을 몇 더 만났지.”
  
야헤스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말을 듣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야헤스는 달려오는 개들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개들은 한 방에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개들을 깨갱 거리며 주인인 남자에게 연기가 되어 돌아갔다. 남자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흠. 실력은 녹 쓸지 않았나 보군. 좋아. 그래야지만 내가 널 죽이고 신의 독차지를 해야겠다. 나 이외에는 신에게 사랑받으면 안 돼. 특히 저 마을은 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더군. 그래서 불살라 버려야 해."
“그게 무슨? 그런…”
  
순간 나머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남자의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아사야. 그녀야 말로 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막에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지?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 넌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자, 싸워. 나랑 싸우자.”
  
그러면서 남자가 야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야헤스는 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모래언덕 아래로 던졌다. 남자는 야헤스가 피한 것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계속 덤벼야지? 안 그래? 계속 덤벼봐!”
  
야헤스는 남자의 도발에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남자는 야헤스의 주먹을 가뿐히 피해버렸다. 그러면서 다시 그에게 도발하고 나섰다.
  
“고작 그 정도인가? 그때 넌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는데 말이야. 이거 내가 과대평가를 한 것 같군.”
  
그 말에 야헤스는 다시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 주먹은 남자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하지만 이내 남자의 발차기로 멀리 날려버린다. 야헤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고 달려들었다. 자신이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으로.
그러나 남자는 그의 공격에 아무런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며 검은 연기들을 발산하며 말했다.
  
“넌, 네 입으로 살인자가 아니라고 했지.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를걸? 네 기억을 되살려주지.”
  
말이 끝나자 검은 연기들이 무서운 속도로 마을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들은 이번에는 개의 형상에서 거대한 도마뱀과 커다란 새들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곤 마을의 풀과 나무들을 불태우며 마을을 위협했다.
야헤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땅을 치며 자신을 원망했다.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그런 그 순간 그의 머리에서 한 줄기의 빛이 관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모든 게 기억이 났다. 전부다. 자신이 예전에 했던 짓이.
  
“마…말도… 안 돼. 내가 정말?”
“이제 기억나나? 넌 한 마을을 없애버린 살인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등을 밟았다. 야헤스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그런 그를 보다가 불타는 마을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훨훨 타오르는 군. 지옥처럼 말이야.”

야헤스는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살인마다. 살인마. 그래, 용서받지 못 할 살인마.
그런데 그때 그의 눈앞에 아사야의 얼굴이 나타났다. 야헤스는 그 얼굴이 헛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저 불타는 마을 속에서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생각을 하니 괴로움이 솟구쳐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눈물을 머금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내게 대체 뭘 원하는 거죠?”
“몰라서 묻는가 보군. 네 존재의 소멸이다. 난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지옥을 떨어뜨리고 싶거든. 그리고 넌 그런 지옥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지.”
“그럼, 그렇다면. 제가 사라진다면 저 마을의 사람들을 구해주는 건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 꼬리를 치켜세워 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야헤스를 바라보았다. 야헤스의 눈은 불꽃을 머금고 있었다. 결심에 찬 눈이었다. 남자는 야헤스의 표정을 보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많이 변했군.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다니. 좋아. 속죄할 기회를 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이내 코트 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야헤스의 눈앞의 모래에 꽂았다. 야헤스는 그런 남자의 행동을 수상케 여기며 단검을 보았다. 단검은 손질이 아주 잘 되 있었다. 그 무엇도 벨 수 있을 듯 했다. 차가운 날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야헤스는 단검에 사로잡히는 듯 눈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남자가 말했다.
  
“이 단검은 말이지. 내가 가진 검들 중 최고야. 이 검으로 저 마을의 검은 연기들을 없앨 수 있겠어? 그 괴물들을 말이야. 그럴 수 있다면 마을 사람들을 살려주지. 하지만 단, 그 괴물들을 처치하고 난 다음 넌 이 검으로 네 존재를 없애는 거야. 그럴 수 있겠어?”
  
단검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의 제안은 실로 매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야 한다. 야헤스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칼날이 잘 든 단검으로 마을 사람들을 구한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은 죽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도 마을 사람들은 구할 수 있다. 야헤스는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크흐흐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는 밟고 있던 발을 치워주었다. 그런 다음 그에게 땅에 꽂힌 단검을 손에 쥐어주었다. 야헤스는 단검을 손에 꼭 쥐고서 다짐했다. 절대, 절대 그들을 죽게 놔두지 않겠다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때처럼.
야헤스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은 이미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하늘에는 건물들을 불태웠다는 것을 알리듯 연기들이 뿌옇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야헤스는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부디 부디 살아있길 빌면서.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헤스는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다친 요한이 서 있었다. 요한은 야헤스를 부르며 쓰려졌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있…어.”
  
야헤스는 그 말을 듣고서 요한을 등에 업고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은 마을의 오아시스 옆에 있었다. 하지만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검은 연기들이 사방에서 그와 쓰러진 요한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야헤스는 요리조리 피하며 요한을 업지 않은 손으로 검은 연기들을 상대했다. 그러자 검은 연기들이 괴음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잿빛 하늘에서 두세 마리의 검은 연기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야헤스는 그 연기들이 자신들의 형상을 갖기 전에 얼른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불길은 마을회관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들은 아사야를 중심으로 모여 그녀에게 이 재앙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 예언을 묻고 있었다. 야헤스는 그런 그들을 향하여 다가가 아사야에게 요한을 건네며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그 어떤 위험에서라도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젊은이 저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하게?”
  
마을에서 꽤 나이가 많은 크렛사 라는 노인이 말했다. 야헤스는 그를 향해 걱정 없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러니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잠해졌다. 그런 노인을 본 야헤스는 마을회관을 한 번 둘러본 후 말했다.
  
“걱정 마세요. 상대 할 방법은 있으니까요. 다만, 여러분께서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오시지 않으시면 되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야헤스는 그들의 말에 기쁘게 웃어주며 마을회관을 나섰다.
야헤스가 나간 후 그녀의 눈앞에 장면 하나가 나타났다. 아사야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 장면은 야헤스가 싸우는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검은 연기들을 단검 하나로 모두 물리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은 애절하고 간절하며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 순간 장면이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밖은 여전히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아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아사야. 저 밖은 위험해!”
“뭔가 달라요.”
“그래, 아사야. 이 애비도 부탁하마. 밖은 위험해!. 야헤스가 한 말 못 들었니? 여기서 기다리면 알아서 처리할 거야.”
“하지만… 하, 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말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을회관을 뛰쳐나왔다. 그러자 불타는 마을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마을은 처참히 무너져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야헤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사야는 그를 찾아 잿더미로 변한 마을을 거닐었다. 그러나 그래도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대체 그는 어디 있는 것일까?
  
  
한편 야헤스는 여관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먼지들 사이로 인영 하나가 다가왔다. 인영의 주인은 남자였다. 남자는 쓰러져 죽어가는 야헤스를 보며 말했다.
  
“그래, 모두 해치운 것 같군.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그 검으로 널 찌르는 거 말이야.”

야헤스는 남자의 말에 작게 끄덕였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목에 검 끝을 가져다 댔다. 그는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저질렀던 죄. 그 죄의 죄 값을 이로써 모두 치루는 것이다.
야헤스는 잠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런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비추어왔다. 그 빛은 모든 구름들을 거치게 하고 불을 껐다. 남자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여전히 이 녀석을 편드시는 겁니까? 당신은 왜 이 녀석을 살려두려고 하는 거죠? 왜 대체 왜!”
  
남자의 외침은 하늘 높이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외침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목적들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신이 망쳐버렸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였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야헤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날개 달린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은발의 천사였다.
  
“사도. 당신의 역할은 여지까집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남자의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그럼, 그렇다면 그분은 무얼 원하는 것입니까?”
  
남자가 천사를 향해 외쳤다. 천사는 묵묵히 야헤스를 쳐다보았다. 가련한 눈빛으로, 그 어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같이.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강한 존재를 보듯이.
  
“고통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하시죠. 고통을 알아야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 녀석은 살인을 했습니다. 한 마을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 녀석이 고통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저 자는 악마입니다.”
  
천사는 그 말에 날카로운 눈을 하고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그의 눈에 다음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천사는 야헤스에게 몸을 숙이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악일지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하시지 않는 게 없으시죠. 악마든 천사든 그분께는 아이일 뿐입니다. 악마도 가련한 존재니까요. 그들 역시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구원하는 것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진정한 악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악이란 없는 것 아닌가요?”
“그, 그렇긴 하지만…”
“그럼 된 겁니다. 물러나는 겁니다.”
  
남자는 혀를 차며 뒤돌아 걸어갔다. 야헤스는 남자를 보고 천사를 보았다. 천사는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껴안았다. 야헤스는 어쩐지 그의 품이 낯설지 않았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천사가 말했다.
  
“괴로운 고통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고통들이 뒤따르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잘 헤쳐나가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이름은 야베스, 야베스입니다. 고통과 낙원이라... 잘 어울리는군요.”
  
천사는 그 말을 끝으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야헤스는 배가 하늘을 향하도록 누웠다. 그리고는 기쁨을 만끽했다. 모든 것을.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야헤스! 당신 어디 있어요!”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헤스는 벌떡 일어나 그 목소리를 향해 답했다.
  
“나 여기 있어요!”
  
야헤스는 생각했다. 그래, 이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거야. 그 어떤 고난이 있어도 잘 헤쳐나가리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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