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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태평요술서

2010.02.20 14:2202.20

  인간이 이루었던 모든 지식들을 거두어들인 이래로,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끝없는 서가에서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담은 책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일은 없었다.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 부자들이 사람을 신에 이르게 해 줄 지식을 탐내어 권력으로 힘으로 또는 황금으로 간청하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지혜는 가장 강한 힘이었고, 일곱 밤 이전의 것보다 날카로운 칼날 또한 없었으며, 단 한 줄의 구절은 서가 전체를 채우는 황금보다 더 가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의 실랑이는 갈망하던 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관장들은 권력을 쥔 자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 이외에도,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권위에 범접하지 못하는 대신, 엄숙한 사서들로부터 조심스럽게 지식을 넘겨받은 필경사들이 각국에 파견되어 긴요한 물품을 고안하고 정책을 조언하게 되었다. 책은 서가를 떠나서는 안 되었고, 암송에 의해서만 지식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지식을 휘둘러 다시 ‘일곱 밤’을 불러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세월 동안 지켜져 왔던 이 엄격한 금지의 법도도, 한 어린 사서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그 어린 사서는 대담하게도, 한 부의 책을 소매에 숨기고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이 멋대로 읽을 수 있게 나누어줘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세상에는 상당한 혼란이 일었으며, 이에 대해 문책하고 징계하고자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관장들이 소집되었다. 서기들이 이 모임의 내용을 속기하고 옮겨 적어서 봉하여 도서관의 기록에 더하였다.

현 관장(이후 특기할 사항에서만 관장의 재직회기를 기입하고, 필요치 않다고 판단될 경우는 관장으로 통침함.) : 지금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문책 및 토의를 시작하겠다. 귀하는 348년째 천지 간의 조화와 오행의 상성을 관장한 사서 아람이 맞는가?

아람 : 예, 맞습니다.

관장 : 귀하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시간 기준으로 아흐레 전,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금기를 어기고 태평요술서 다섯 권을 반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귀하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람 : 예, 인정합니다.

관장 : 귀하의 행동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비롯될지 알지 못했단 말인가? 모든 사서는 관장 부문을 막론하고 ‘일곱 밤’ 이전의 역사를 모두 암기해야 한다. 귀하 또한 이 절차를 거쳤을 터이므로 태평요술서가 어떤 책인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람 : 알고 있습니다.

관장 : 태평요술서는 오행에 따라 다섯 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기 그 행의 성질과 그를 활용하는 법을 담고 있다. 모든 사서는 자신이 관장하는 영역의 책을 모두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책이 소실되더라도 귀중한 지혜가 소실되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다. 귀하 또한 태평요술서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을 것이다.

아람 : 그렇습니다. 요구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섯 권을 모두 외워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증명해보일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지만, 관장들은 형식적으로 다섯 차례의 질문을 던졌고 아람은 완전하게 해당 장을 암송해보였다. 단순 절차였으므로 이 내용은 생략한다.)

관장 : 귀하의 사서로써의 능력은 인정한다. 그러므로 책이 ‘일곱 밤’ 이전의 유물이라는 점은 제외하더라도,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즉시 그 책에 담겨 있던 지식을 복원하고 보존할 수 있다. 이곳에서 문책하고자 하는 바는 책의 소실에 관한 것이 아니다.

23대 관장 : 태평요술서는 '일곱 밤' 이전의 시대에, 올바른 정치를 간하고자 하는 현자가 저술하여 강대한 왕에게 진상하였다. 왕은 영특한 이였지만, 불행히도 그의 지혜는 오로지 남을 지배하고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데만 쏠려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오행의 성질을 활용하는 장에서 영감을 얻어 한 달 안에 일곱 나라를 쳐서 떨어뜨렸다. 다섯 제후들이 그 비결을 탐내었으며, 환관들이 소매에 베껴적어 빼돌린 내용만으로 왕은 살해당하고 하루 아침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들었다. 이로 인한 전란은 오백년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그 후로도 태평요술서의 내용은 병사를 죽이고 남을 짓눌러 복속시키기 위해 쓰였다.

49대 관장 : 귀하는 아는가? 역사는 과거의 일을 거울삼아 미래를 비추어보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

아람 : 알고 있습니다.

49대 관장 : 앞선 수레의 바퀴가 진창에 빠졌다면 뒤의 수레는 바퀴 자국을 따라가지 않는다. 바퀴 자국이 진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50대 관장 :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옛적의 흉사를 경계하고 주의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현명한 이는 오래된 지식에 조언을 구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아람 : 허나 으뜸가는 깨달음은 서가에 놓인 문진이 아니며, 처마를 장식하는 기와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배워 알지 못한 지식은 묵과 종이에 지나지 않고, 말로만 바다의 이야기를 들어서는 소금의 짠 맛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관장 : 귀하의 발언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길고 긴 역사에서 으뜸가는 분쟁이 저들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기억하지 못했단 말인가? 어린 아이에게 칼을 쥐어주고 멋대로 휘두르게 하려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깊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우물 속으로 떠미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13대 관장 : 모든 사서는 관장 부문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역사를 모두 암기해야만 한다. 이는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어째서 생겨났고, 그 금기가 어째서 지켜져야 하는지 알기 위함이다.

아람 : 그러나 저는 칼날을 더듬는 손이 베일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의 뜨거움을 아는 손은 화상을 입은 적이 없지 아니하고, 육친을 잃은 적이 없는 아이는 사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베인 상처와 덴 화상, 사별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널리 평등하다고만 여겼지, 지식이 불러오는 결과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의 주장은 그들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관장 : 귀하는 베인 상처와 덴 화상, 사별이라고 말했다. 그리하면 귀하의 손으로 건네어진 태평요술서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라. 베인 상처가 어떠하고 덴 화상이 어떠한지 보라. 사별이 어떤 것인지, 보라.

31대 관장 : 허청환이라는 도사가 위두 땅의 달국에 이르러 청엽병의 경작을 간하였다. 심어 가꾸지 않아도 한 달 만에 다 자라나고, 한 뿌리의 병사가 삼천의 병사가 되는데 석달이 걸리지 아니한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고 아픔을 모르므로 전투에 나서서 물러섬을 알지 못한다. 땅에 뿌리를 박고 물만 마시며 볕을 쬘 뿐이라 해도 군마가 필요치 않고 힘은 장정 한사람과 맞먹었다. 이리하여 온 땅의 백성들이 모두 논밭의 벼며 보리를 죄다 뽑고 그 자리에 청엽병을 심어 가꾸었다. 논둑과 밭고랑에도 가리지 않고 뿌리를 심고 길가에도 뿌리줄기가 뻗어, 열 달 만에 오십만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단숨에 이웃 나라로 처들어가 모조리 들부수어 다섯 나라를 떨구는데 불과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지굴과 대천, 유우불두가 연맹하여 싸우매 화공에 능숙하여 청엽병을 불로 지져 태워 진군을 막았다.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이십만의 청엽병을 협곡으로 몰아넣어 재로 만들어버리고 한 숨을 돌렸으나 그 사이 달국 땅에서만 다시 이십만 병사가 새로 자라나고 다른 다섯 나라에서 자라난 병사의 수는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항거하던 세 나라의 성을 깨고 궁을 불태우니 이윽고 위두 땅에서는 아무도 그 위세에 대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싸움이 평정된 후에도 청엽병의 수는 계속 늘어나 두 달이 지나고 난 후에는 밭의 어느 한 구석을 파 보아도 청엽병의 뿌리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잔뿌리는 어지럽게 뒤얽혀 다른 풀의 생장을 막고, 드높은 이파리들이 그늘을 이루어 새싹이 돋질 못했다. 뒤늦게 허청환이 다시 간하여 일백만의 청엽병을 모조리 짠 물에 처박아 수장하였으나, 온 땅을 바닷물로 적시고 뿌리를 캐내느라 뒤헤집었으므로 자그마치 십년 동안이나 온 위두 땅의 백성들이 초목근피는 커녕 흙과 돌로 연명하게 되었다.

아람 : 그러나 그로 인해서 위두 땅의 백성들은 어느 한 종류의 나무나 풀이 급속하게 자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배웠을 것입니다. 흙심은 한정되어 있고, 숲은 여러 풀과 나무들이 함께 뒤섞여 사는 것이니, 이를 가벼이 여기면 온 숲이 다 말라죽고 백성은 초목근피로 연명하고자 하여도 푸름을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29대 관장 : 아내모 땅에는 하나의 나라가 없고 일곱 개의 가야가 연맹하여 지냈다. 제각기 품질 좋은 쇠가 났으므로 먹고 살 만 했다. 그 가운데 한 고을의 장인이 쇠로 혼을 담는 커다란 그릇을 짓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한 오라기 김도 빠져나갈 틈 없이 고사리금, 단쇠, 육철, 생동, 공작은, 활연, 단황을 섞어 그릇을 짓고, 그 안에 다시 복잡한 기관장치를 넣어 혼을 옮겼다. 보고 듣는 것도 진짜와 다름없었고, 쉽게 상하거나 다치는 법도 없었으며, 조금만 익숙해지면 몸을 날려 움직이는 데도 어렵지 않았다.
이 술법의 이름이 널리 퍼지자 일곱 가야의 왕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이 저마다 찾아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을 얻기 원했다. 밤낮 없이 화로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그릇을 구워내도 원하는 이 모두에게 지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곧 온 가야의 쇠가 모조리 동났으므로, 그릇을 지을 재료가 모자라게 되었다. 왕족과 높은 귀족들은 이미 새 몸을 얻었으나 피가 엷은 귀족들이나 그 아래 백성들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매 이전의 제도가 무너지고 새 몸을 얻은 이들과 얻지 못한 이들로 계층이 나뉘었다. 이 잡듯이 땅을 뒤져도 겨우 나오는 쇠 부스러기로는 그릇 하나를 지을만 하지 않았고, 다른 땅에서 사오려 한들 본디 일곱 가야가 쇠를 팔아서 먹고 살았는지라 구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릇 하나를 녹이면 새로 그릇 하나를 만들 수 있는지라, 새 몸을 얻은 귀족들은 서로 모략하고 새 몸을 얻지 못한 자들을 꼬드겨 정적의 몸을 녹여 없애고 대신 자기에 줄을 댄 사람에게 새 몸을 주려 하였다.
이러매 정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백성들은 쇠는 구경도 못할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불만이 터져나와 백성들이 몰려가 궁궐을 뒤엎고 그릇을 모조리 때려 부수어 쇠를 고루 나누어 가졌다. 난리통이 가라앉고 난 뒤, 다른 나라의 상인들이 나타나 부서진 그릇들을 내가려 하였다. 처음에는 부서진 그릇을 싸간 저마다 쉽게 큰 돈을 얻을 듯 했으나, 사려는 이는 한정되어 있는데 저마다 앞다투어 팔고 싶어했으므로 값이 점점 내려갔다. 겨우 다 팔아치우고 나서 한동안은 솥에 끓일 쌀이며 피울 나무를 살 돈은 되었지만, 이윽고 몇푼 안되는 동전이 떨어졌을 때 다시 일하려 해도 광산에서 나오는 것이 없고 더 내다 팔 쇠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곱 가야의 온 백성은 다시 먹고 살 길이 없게 되었다.

아람 : 그러나 그로 인해서 아내모 땅의 백성들은 쇠란 것이 무한정 나오지 않으며 함부로 캐어 쓰다가는 머지않아 곧 달리게 됨을 배웠을 것입니다. 세상이 넓고 하늘 아래는 끝이 없다 하되 어느 한 땅에는 한정된 자원만이 있고 다 써버리고 나면 어찌 할 길이 없게 됩니다. 절제는 단순히 아름다운 덕이 아니요 장차 살아가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1대 관장 : 곽달 땅은 예로부터 그 흙에 모래가 섞인 것이 많아 강의 흐름이 쉬이 잦아들고 해가 강하여 오래 물이 괴어 있지 못하여 세 나라 가운데 풍족히 밭갈아 지어먹을 수 있는 나라가 한 군데도 없었다. 하늘이 건조하고 맑아서 석 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다가도 한 번 쏟아지면 단숨에 두 주일을 퍼부어 밭과 길을 가릴 것 없이 흙탕물이 넘쳐 흘렀으므로 농사를 망쳤다.
이에 치수의 일흔가지 비법 중 세 가지를 익힌 사두문이라는 군자가 선비들에게 호소하고 백성들에게 부르짖어 땅을 파고 강 바닥을 다듬었다. 지하수를 캐어 수로를 채우니 물의 기운이 감복하여 쉬이 떠나지 않고 머물렀고, 비가 한번 쏟아지면 만수보에 괴여 둑을 넘지 못하여 대 풍작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인근 고을에서 그의 이름이 드높았으며 덕망 또한 높았으므로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직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허나 치수의 법이란 물의 흐름을 돌려 부족한 곳에 더하고 넘치는 곳에서 퍼내는 것이어서, 한 나라가 물을 끌어다 모아 쓰면 다른 두 나라의 샘은 말라붙고 시내 바닥의 작은 물줄기마저 잦아들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젖은 자죽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사두문이 이 사실을 알고 남의 나라 백성들을 목태워 가며 자기 나라 백성들을 마시게 하는 것이 유가의 참 뜻에 맞지 않아 번민하였으나 도로 치수의 법을 풀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밤잠을 자지 않고 꼬박 요술서를 연구한 끝에 기우의 일흔가지 비법 중 한 가지를 익혀, 구름을 풀고 바람 주머니를 제치며 뇌공이 북을 울리게 하여 곽달 땅 전체를 적시게 하였다. 이 덕으로 간신히 세 나라에 모두 치수의 법을 펴는 듯 하였으나, 결국에는 기우의 법이란 것도 다른 하늘의 구름을 끌어오고 뇌공의 북채를 빼앗아 울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근 땅의 하백들과 유모들이 크게 노하여, 용을 내몰고 자라병사며 새우병사, 온갖 비늘달린 병사들을 휘몰아 단숨에 곽달 땅을 들이치매 삽시간에 온 땅을 물로 씻겨나고 말았다.

아람 : 그러나 그로 인해서 곽달 땅의 백성들은 물의 흐름을 어느 한 곳에서 더하면 어느 한 곳에서 줄어드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흐름의 순리는 모름지기 잠시의 필요로 단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머리와 꼬리를 아울러 생각치 않으면 뜻하지 아니한 곳에서 흐름이 순탄치 못합니다. 홍수와 가뭄 조차 순리 안의 것이니, 어찌 가벼이 생각하겠습니까?

17대 관장 : 야막마조 땅은 산세가 험하고 지형이 기이하여 단지 일천평의 평평한 자리를 구할 수 없고 일만의 군대로도 백 사람이 지키는 한 군데 관문을 뚫지 못하며 백성들은 산기슭에 층층이 매어달려 살아가야 했다.
하자달의 태학에서 땅의 이치를 연구하던 박사들이, 꼬인 산을 풀고 빗질하듯 지맥을 가지런히 할 수단을 고하였다. 지층을 파내려가 몇 군데 혈을 끊고, 맥을 떡 주무르듯 반죽하여 새로 이어붙혔다. 산령을 사냥하여 심장석을 부수고, 새로이 제를 지내 모여든 뭇 신들 가운데서 토지신을 새로 선출하여 묶어두었다. 모든 것이 대간을 내달리는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없고 혈을 막히게 한 것이 없어서 단숨에 땅이 가라앉아 산 하나가 없어지고 그 자리를 농토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하자달 궁이 박사들을 치하하고 그 이치를 더욱 널리 펴도록 하는 한편, 은밀히 태학에 밀사를 보내어 이웃한 각찬둘 나라와 국경을 이루는 호문관을 칠 방도를 모색하게 하였다. 박사들이 호문관에서 오십리나 떨어진 곳에 이르러 패철로 방위를 측정하고 지침을 세워 거리를 측량한 후, 혈에 쇠말뚝을 박아넣고 돌의 혼령들을 몰아내니 하룻밤만에 계곡이 흔들려 솟았다. 때를 호응하여 일천 병사들이 일시에 호문관을 치고 그리로 일만 군병을 내몰아 각찬둘을 단숨에 떨구었다.
야막마조의 열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가 무너지자 다른 여덟 산봉우리들이 하자달을 적으로 돌리고 합종하였다. 여덟군데 관문으로 여덟갈래 군마가 들이치니 하자달의 명운이 산 꼭대기에 올라앉은 흔들바위 같은지라 궁이 태학을 독촉하였다. 박사들이 다시 방위를 척정하고 거리를 측량하여 지맥에 신을 쫓는 독을 풀어넣고 지층을 들부수자 뜻대로 크고 작은 땅울림들을 부릴 수 있었다. 마침내 넉달이 지나고 산봉우리의 수가 넷으로 줄었으나 박사들이 땅울림을 부리는 것은 지나치게 이치에 벗어나고 잔혹한 일로 여겨 더 이상 암석과 토사로 적병을 내리쳐 생매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궁이 간신히 어르고 달래어 높은 관문을 세워 침입을 막고 땅을 평평하게 하여 병사를 기르게만 되었다.
이로써 일단락 된 듯 하였지만, 실지로 야막마조의 지세가 험한 것은 그 아래 깊은 지반이 서로 맞부딫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생각치 못하고 단지 얕은 지맥만 이어붙이고 작은 혈만 뒤바꾸자, 더 아래층의 지맥과 맞지 않고 혈이 막히었다. 세 해가 지나가고 나서 무시무시한 지진이 야막마조를 덮쳐 하자달이 무너졌으나, 모두가 방자한 하자달을 산령이 쳤을 뿐이라 여기면서도 그 땅에 지진이 끊일 날이 없으므로 감히 들어서지 못하고 신림지로 삼아 두려워 하였다.

아람 : 그러나 그로 인하여 야막마조의 백성들은 만물에 토대가 있고 그 아래에 더 깊은 토대가 있으며 그 모든 기반들이 서로를 닮았고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기게 됨을 배웠을 것입니다. 작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더 큰 원인을 생각치 않으면 심층에 이르지 못하여 이윽고 더 큰 재난이 닥치게 되니, 실로 탐구는 항상 더욱 깊이 해야 할 것이며 그 실행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37대 관장 : 사작 땅의 어느 술법자가 와룬의 불을 불러냈으나, 그 힘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폭주하여 인근 두개 고을이 쑥밭이 되고 술법자의 암자는 흡사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진 해처럼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거대한 불이 되었다. 네 나라가 놀라서 촉각을 세우고, 사방에서 모여든 술법자들이 불을 옮겨 붙여가서 연구하였다. 이윽고 불의 비밀을 풀어냈다고 자부하는 술법자들이 저마다 궁에서 자신의 고안품이며 술법을 내보이려고 길게 늘어섰다.
그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것은 와룬의 불을 작은 그릇에 담아 밀봉해서 바퀴를 돌려 말 없이 수레를 달리게 하거나 저절로 물을 길어올리는 장치를 움직이는 고안이었다. 곧 다른 술법자들이 이 고안품들을 뜯어 연구하고 다시 와룬의 불을 옮겨 붙여가서 저마다 궁리에 열중한 결과, 온갖 기이하고 희안한 물품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쓸만한 것들만 추려도 대개 사람이 힘 써야 하는 일을 크게 줄일 수 있었으니, 밭가는 일이며 물 대는 일에 땀 흘릴 필요도 없어지고 큰 짐을 옮기는데 노새가 수고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지레 몇 개로 풍로를 조종하고 심지를 돋우거나 죽여 열기를 전달하기만 하면 상세한 것을 몰라도 아이라도 어른이 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러매 고안품 가운데는 성벽을 부수고 병사들을 실어나를 수 있게 한 것도 많았다. 싸움에서는 불이 담긴 철 인형들이 서로 심지를 자르려고 애쓰고, 마부도 없는 마차들이 미친 듯 내어 달리며 불화살을 어지러이 내쏘았다. 이리하여 네 나라가 전에 없이 풍족하면서도 이제는 서로 제 것에 만족치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기 쓰고 다투었다.
또 어떤 술법자가 와룬의 불에 열기를 어느 이상 더하면 처음 사작 땅에 폭발이 일어났던 것처럼 터뜨려 천지를 진동시키고 가로막는 장애물을 부술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는 작은 사발 만한 것들이 몰래 기어가 터져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크고 작은 총통으로 비격진천뢰를 사격하여 적을 몰살시키게 되었다.
어느 술법자는 술법으로 와룬의 불에 열기를 더 빠르게 더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무기로 고안된 것들 뿐 아니라, 보통 백성들이 쓰는 고안품에 들어 있는 와룬의 불이 죄다 고을 하나씩은 날려버릴 수 있는 흉악한 무기가 되었다. 이에 네 나라는 백성들에게 이제까지 쓰던 온갖 고안품을 다 내버리게 하고 와룬의 불을 무기 이외의 용도로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술법자가 발견한 것은, 와룬의 불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빠르게 불어나면 다른 와룬의 불들과 일제히 연동하여 흡사 열 개의 해가 떴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이 것이 최후의 발견이 되었다. 사작 땅의 모든 와룬의 불들이 한꺼번에 타올라, 네 나라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나서야 염제가 내려와 잃어버린 불들을 소매에 쓸어 넣고 사라졌다. 살아남은 백성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슬린 땅 뿐이었다.

아람 : 그러나 그로 인해서 사작 땅의 백성들은 불의 이치가 심지와 손잡이, 그를 쥔 손을 가리지 않으며 한번 넘쳐나고 나면 걷잡을 수 없어짐을 배웠을 것입니다. 무릇 이치는 사람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사람이 이치를 자신에게 유용하게 쓰려 함이니, 한시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화상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작게는 덴 상처로 끝나 다행한 일이요, 일이 커지면 한 나라를 태우고 신령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으로도 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관장 : 귀하는 이 모든 것들을 베인 상처와 덴 화상, 사별이라고만 말하는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울부짖는 아비규환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41대 관장 :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고, 어리석음은 눈을 가려 발 밑의 패인 곳을 보지 못한다. 양껏 손에 움켜쥐고도 남의 손 안에 있는 것을 탐내고, 그러고 나서도 손이 부족하면 심지어는 남을 부려 자기 것을 대신 들고 따르게 만든다.

43대 관장 : 역사를 기록한 책 가운데, 단 한 장이라도 다툼이 그친 장이 있었던가? 피로 쓰여지지 않은 장이 있었던가? 배부른 자들이 주린 자들을 침탈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단 한 시기라도, 태평천국이 이 땅에 이른 때가 있었단 말인가?

17대 관장 : 오, 실로, 증오의 연도와 복수의 맹서가 끊이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인가? 사람이 기뻐하며 기꺼이 서로를 죽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남의 고통에 기뻐하고, 자신의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일에 몰두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관장 : 물론, 이렇게 말하는 우리 또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더 많은 것을 지니기 원하고, 남을 해치더라도 탐욕을 채우고 싶어할 것이다. 지금 지닌 것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남보다 자신을 중하게 여길 것이다. 빼앗기면 노하며 잃은 만큼 갚아주리라고 이를 갈 것이다. 증오는 은혜보다도 선명한 것이고, 같은 하늘을 지고서는 평안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관장들 :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룬 것들이 나아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오는지 안다.

관장 :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이룬 것들이 한 자 한 자가 피로 쓰여진 것임을 안다. 수많은 희생과 죽음 없이는, 어떤 것도 알지 못했으리란 것을 안다.

관장들 : 그렇기에 우리는 지식을 폐기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차마 찢어진 종이 조각들과 흩날리는 먼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6대 관장 :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설립자들은, ‘일곱 밤’ 이후 살아남은 백성들에게 어떤 삶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두고 오랜 시간동안 토론하였다. 저들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제외하더라도,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들 가운데서 백성들에게 불을 가져다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리에 따른 삶, 조용하고 작은 삶, 보잘 것 없는 것에 만족하면서 충족히 사는 삶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다.

관장 : 하지만 그것이 으뜸가는 지혜를 지니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폐기하는 대신에 모아들여 봉하는 것에 그쳤다.

아람 : 저는 서가에 불을 지르고 책을 묻어버릴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장 한 장을 써내려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는지 잊고 있지 않으며, 또한 천하의 모든 백성들을 본성 그대로 풀어두면 조용하고 작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란 더 많은 것을 원하며, 때로는 그것을 남을 해치게 되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관장 : 그렇게 말하면서 귀하가 태평요술서의 다섯 권이 불러온 재난을 베인 상처, 덴 화상, 사별이라고 이르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사서는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지녔을 뿐, 역시 사람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교만한 사서들이 스스로를 세상의 백성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일이 있으나, 우리는 사람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아람 : 그러나 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지식을 폐기할 수 없고, 지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 수 있다면, 세상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사람이기 때문에 지식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관장 : 귀하의 주장은 다시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의 것과 가까워지고 있다. 불의 뜨거움을 알기 위해서 덴 화상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이의 손을 불 속으로 밀어 넣어 뜨거움이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한단 말인가?

10대 관장 :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지식이 불러오는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지식을 독점하고 있을 뿐이라고만 주장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그를 바탕으로 권력을 틀어쥐었으며, 이제 뭇 백성들에게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일러주지 않는 것은 지식의 무게를 핑계 삼아 보배로운 것을 홀로 차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관장 : 이제, 그 지식이 세상의 백성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태평요술서의 태평천국은 어떠한가? 청엽병은 어떠하며, 일곱 가야는 어찌 되었고, 곽달 땅은 어떤가? 야막마조의 산봉우리는 이제 세 개 뿐이고, 와룬의 불이 휩쓸고 간 사작 땅은 그을음 뿐 재조차 남지 않았다.

관장들 : 이것이 지식의 무게이다. 지식이 불러오는 힘이다. 재난이며, ‘일곱 밤’이고, 사람이다. 다시 ‘일곱 밤’이 닥치지 않은 것은, 뭇 백성이 자애로워서가 아니라, 단지 ‘일곱 밤’을 불러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장 : 이제 다시 저들의 손에 지식을 쥐여주면, 그들은 기꺼이, 기쁘게도 ‘일곱 밤’을 불러 내리리라. 자신들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뽐내고 싶어하는 아이인 양, 서로 겨루고 다툰 끝에 탐욕도 증오도 복수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 뿐, 겨우 살아남은 한 줌도 안 되는 백성들이 다시 두드리고 통곡하며 우는 것을 보아야겠느냐?

아람 : 하지만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일곱 밤’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지식의 무게에 대해 그토록 엄중히 주의하고 경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뭇 백성들에게 ‘일곱 밤’은 오래된 옛날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 지식이 어떤 힘을 불러내리는지 보고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필경사들이 조심스레 궁에서 선보이는 지식의 자투리들만으로는 ‘일곱 밤’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관장 : 귀하는 뭇 백성들이 지식의 무게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일곱 밤’이 도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인가?

아람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저들이 또한 지식의 무게에 대한 지식이 없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지식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무게가 어떠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다섯 권의 태평요술서는 태평천국이 아니라 수라계를 만들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백성들은 지식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게 되었고, 지식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게 되었고, 더하여 사람이 어떠한지, 스스로의 욕심과 증오로 인하여 자신의 목을 죄어챌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행의 지식을 전해주었을 뿐이지만, 백성들은 결국 그를 스스로 배워 알게 된 것입니다.

관장 : 귀하는 그것들을 수라계라고 부르면서도, 어찌하여 백성들에게 수라계를 가져다 준 것인가? 태평천국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부러 수라계를 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람 : 그러나 천하의 백성들은 지금은 단지 아주 오래된 도서관 아래에서 사육되고 있을 뿐입니다. 베인 상처도 알지 못하고, 덴 화상도 모르며, 사별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저들을 우리와 같이 만들고자 합니다. 지식을 알 뿐 아니라, 지식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도 알도록 만드려고 합니다.

관장 :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태평요술서의 지식은 짧고, 그 지식이 퍼진 나라는 수십개에 지나지 않는데도 수십만의 백성들이 아비규환을 겪었다. 이제 더 많은 지식이 더 널리 퍼지면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피눈물이 땅을 적실 것이다.

아람 :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지식의 무게를 알게 된 것은 ‘일곱 밤’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뭇 백성들에게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쥐여 주면, 다시 한 번 수라계가 펼쳐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백성들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비로소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이 어떤 것인지 온전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천하의 백성들이 아이요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그 부모라면, 언제까지 아이를 아이로만 남아있게 하려는 부모는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단지 그 피의 무게가 아까워서 지식을 폐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올바르게 전해주기 위해서 지식을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장 : 그러하면,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어찌해야 하는가?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고통이라고만 말하고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인가?

아람 : 물론 그것이 가볍게 말할 것이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지식의 무게이며, 아주 오래된 도서관과 뭇 백성들의 차이가 바로 그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쁘게 수라계를 백성들에게 가져다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의 말대로라면, 같아지기 위해, 평등해지기 위해, 동등한 권력을 위해서서겠지요.

(이 시점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관장들이 잠시 토의하였다.)

관장 : 그렇다면, 귀하가 더 많은 지식을 주지 않고 태평요술서 다섯 권만을 준 까닭은 무엇인가?

아람 : 한 입에 베어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고, 소화시키지 않으면 먹은 것도 쓸모가 없습니다. 태평요술서 다섯 권에 담긴 오행의 지식은 비록 적고 짧은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가히 참혹하다 할 만 했습니다. 만일 그보다 더 많은 지식을 주었더라면, 백성들은 성급한 나머지 곧 ‘일곱 밤’과 같은 다른 재난을 불러내릴 것입니다. 배울 틈조차 없이, 그들과 그들 자신의 지식 모두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의 백성들에게 아주 적은 지식만을 전해 주었습니다.

관장 : 그 행동이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필경사를 파견하는 것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아람 : 필경사들은 세상의 백성들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뽑아 쓸 따름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의 무게가 아니라 무지에 의해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지식에 비교하면 그들의 것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지식이 휘둘러졌을 경우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합니다. 필경사들이 조심스러운 것은 오직 그 때문이며, 만일 지식이 주어졌을 경우, 누구보다도 기꺼이 그 힘을 마구 부리려는 자들은 도리어 스스로의 무지에 목말라 하던 그들 자신일 것입니다.

관장 : 그렇다면 귀하는 장차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행보가 어떠해야 바람직하다고 여기는가?

아람 : 사서와 필경사는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극히 조금만 필요하다고 판단한 한도 내에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이제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이 일부라도 풀려 나가면,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권위는 깨어질 것이고 왕들, 장군들, 부자들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하는 필경사보다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더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경사 제도는 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사서는 지식을 관리하기 위해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암송하여 필경사에게 넘겨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일곱 밤’이전의 지식을 조심스럽게 흘리는 가운데, 동시에 지식의 무게를 설파하고 일이 크게 그르칠 경우 그것을 어느 정도 바로잡을 수 있는 조언자들을 비밀리에 파견해야 합니다.

관장 : 그러한 조언자를 파견하는 것 역시 아주 오래된 도서관과 백성들 사이에 어떤 위계 질서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람 :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지식의 무게를 알게 되기 위해서 치른 대가는 매우 큰 것이고, 또 겨우 그 수준에서 그친 것은 실로 요행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일곱 밤’ 이전의 지식을 보존했다가 풀어놓아 세상을 수라계로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는 다른 백성들이 언젠가는 아주 오래된 도서관과 같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단순히 사육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조언자는 지식의 무게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행해야 합니다. 비록 순리는 하늘의 도이지만, 하늘은 어질지 않아 사람과 흙덩이를 똑같이 대합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백성들이 흙덩이처럼 부스러지는 것을 막고, 순리의 작용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실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관장 : 좋다. 이제까지 귀하의 행동에 대한 징계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관해 관장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으나, 귀하의 주장을 수렴하였다. 도서관의 첫째 규칙대로, 금기를 어긴 사서는 즉각 직위를 해제하게 되어 있으므로, 귀하는 더이상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사서가 아니다. 이제까지 귀하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사서의 권한은 박탈된다.

관장들 : 그러나 동시에 새로이, 귀하가 제기한 조언자의 직위를 신설하고 귀하를 그 직위에 임명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즉각 귀하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장 : 이미 풀려나간 지식을 다시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 태평요술서의 내용이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면 차후로도 그 지식들로 인해 또다른 재난이 빈발할 것임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바,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그를 진정시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귀하를 파견하여 귀하가 뿌린 태평요술서의 지식을 세상의 뭇 백성들이 바로 익히게 한다. 이는 지식의 무게를 익히 알고, 지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지 가르치는 동시에, 가르침이 지나친 경우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관장들 :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규칙을 사서 한 사람의 의견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져 버린 일의 책임을 묻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관장 : 어린 사서들 가운데 귀하와 같은 주장을 한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금기가 직접적으로 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차후에도 귀하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나타날 것이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지식의 영구적 보존과 시의적절한 전달을 위하여 설립되었으나, 귀하의 행동은 상당히 시기를 서두르게 하였다. 귀하를 조언자로 파견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귀하로 하여금 이미 ‘일곱 밤’을 겪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사서와는 달리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관장들 : 이 파견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이므로, 귀하는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소속임을 증명할 수 없다. 또한 조언자의 직위 역시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

관장 : 귀하의 기록은 모두 소멸될 것이다. 귀하의 직위는 귀하의 이름을 따서 ‘아람’으로 칭한다. 더 많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귀하에게는 태평 요술서의 지식과 ‘일곱 밤’이전의 역사 일부만이 허용된다. 귀하는 여전히 지식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자신이 어째서 그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귀하는 고통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귀하는 오로지 그것들을 진정시킬 사명감만을 가지고 움직이리라. 어째서 그러는 지도 알지 못한 채, 귀하는 귀하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관장단 : 귀하는 귀하에게 내려질 징계의 내용에 승복하는가? 귀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다시 징계의 세부 사항은 조정될 여지가 있다.

아람 : 승복합니다.

관장 : 이상으로 문책 및 징계를 마친다. 즉각 아람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채비를 갖추도록 한다.

  기록은 여기에서 끝나며, 이후 아람에게 필요한 조치가 취해지고 나서 아람은 비밀히 아주 오래된 도서관을 떠났다. 그러나 필경사는 여전히 파견되었고, 태평 요술서의 지식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난의 소문은 종종 세상 밖에서 들려 왔다. 아람은 아직 귀환하지 않았으나, 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아람의 최후 변론이 첨부되어 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금기를 깨고 태평요술서를 세상의 사람들에게 전해준 것은, 확고한 결심이 선 후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권의 책에 담긴 지식 또한 수십만의 목숨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지만, 이윽고 그 지식이 또다시 불러올 수십만의 죽음과 고통을 생각하면 손발이 떨리고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지식을 꽁꽁 묶어서 쳐박아 놓고, 엄중히 관리하여 밖으로 세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옳은 길은 아닙니다. 이제껏 그 지식들을 축적하기 위해 사람이 치러야만 했던 수많은 고통들을 모두 없는 것인 양 치워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역사는 그 어떤 일도 완벽히 예측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도서관은 ‘일곱 밤’ 이후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지식을 보존해왔고, 한번도 그 문이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차후에도 아주 오래된 도서관이 영원하리라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언젠가 지식들은 사서들의 손을 벗어나고, 지식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손에도 들어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결국 아주 오래된 도서관과 세상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허망히 사라져 버리는 때가 오겠지요.
저는 이제껏 지식을 얻기 위해 사람이 치러 온 대가를 그렇게 쉬이 넘겨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그토록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 얻은 것은, 나아가 그의 후손들을 더 많은 고통에서 구하고 편안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고통이 없었던 것처럼 내버려두고, 후손들이 또 다시 고통을 겪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지식의 무게들에 몸을 떨면서도, 지금 저지르는 일이 불러올 또다른 엄청난 고통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죄 많은 행동을 끝내 실행에 옮겼습니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요? 어질지 못한 하늘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요, 마치 이제까지 그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에도 한번도 눈을 돌린 적 없는 하늘이, 이번 만큼은 저의 부르짖음에 답하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흔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가득찬 곳을 수라계라고 하지만, 실로 사람은 수라계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 없고, 오랜 시간 동안 대가를 치루면서 그 모든 고난과 싸우며 살아남았습니다. ‘일곱 밤’은 그 모든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대가를 조금 더 치루고, 지식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하는 작은 지식 하나를 더 얻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를 위해서 사람이 흘린 피와 눈물과 고통을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중한지, 또 그런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새삼스레 압도당하게 됩니다.
이제 저는 아주 오래된 도서관의 사서였던 모든 기억을 잃고, 제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세상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조금 떨리는군요. 애초부터 수십만 명의 목숨 값을 치루는데 제가 무엇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다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 태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그 고통을 함께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그 값을 적게 치르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선조들이, 사람이 이미 치른 대금을, 그 후손들이 또다시 내야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그토록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는 건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저로 인해서 덜 고통받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수십 만명을 수라계로 던져 넣고서 겨우 그 정도 일만 하면 족하다고 여기는 것 같긴 하지만, 제게 가능한 모든 것은 다 하겠습니다. 그 후는 정말로, 무자비하고 잔혹한 하늘의 순리가 내리치는 대로입니다.
변론을 마치기 전에, 제가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저 자신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저로 인해서, 어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다만 아주 약간의 지식만을 가지고 고통에 시달리게 될 저에게요. 아마 그 때의 제가 귀환하여 다시 이 기록을 볼 수 있게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러고 나서 저를 이해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저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람’, ‘아는 이’, 안다고 하지만, 지금의 제가 어찌 그 때의 제가 겪게 될 고통을 차마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길을 떠나기에 앞서, 스러져간 수십만과 스러져가게 될 수십만과 또한 그로 인해서 고통받을 아람, 그리고 그 이전에 사람이 치러온 모든 희생들에 대해서 엎드려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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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의 형식 자체가 대본식이라서 우수단편선정에 내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그저 예전에 쓴 글 한번 다시 올리는 셈 치고... 역시 다른 긴 글의 들어가는 이야기로도 쓸 수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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