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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햇빛이 비치는 방안에서 남자가 어지럼증과 동시에 각성했다.
이도 저도 아닌 단순히 잠에서 깨어난다는 의미의 각성이다. 만화책에서 하도 많이 써먹었으며 싸구려 판타지소설에서나 볼법한 그런 초능력에 대한 각성이 아닌 잠에서 깨는 것.

침대 위에 전기장판이 깔려있고 다리께 에 두꺼운 이불이 난리통인 덕분에 자신이 열병에 걸려 이렇게 장판까지 몸소 깔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시장기가 느껴졌는지 배를 문지르며 부스스한 머리로 천천히 일어났다.
시계를 쳐다본다.
이미 일주일전부터(아니, 멈춰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 일주일전이니 실제로 멈춰져 있던 것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지도 모른다.) 멈춰있는 시계가 어떻게 시간을 알려줄 것인가? 어차피 해를 보니 정오를 좀 넘긴 듯이 보인다.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에 대해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우선은 시장기를 해결하기로 하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는 전기밥솥이 있었지만 쓰지 않은지 며칠 되어서 아마 말라 비틀어진 쉰 밥에 곰팡이가 피어있을 것이다. 열병에 걸린 지 이틀 정도 되었으니 밥을 먹지 않은지도 이틀째였다. 아무리 아파도 시장기가 느껴질 만하다. 스스로 죽을 끓일 자신도 없거니와 안경도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다.

약 10분쯤 뒤에 남자는 안경 없이 밥상에 앉아 인스턴트 죽을 먹고 있었다.사실 맞게 조리한지도 모르지만 인스턴트음식을 많이 먹기에 남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죽을 조리(조리라기보다는 전자레인지 조작)하고 퍼먹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뜨거워서 혀를 델뻔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취할 수 있었다.
'맛있는걸 보니 MSG가 많이 들어갔나 보군.'
남자는 막상 MSG가 무엇의 약자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많이 들어갔다는 것만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어릴 적에 뉴스를 본 엄마가 몸에 안 좋다고 한 행동들이 기억날 뿐이자.

'그러니까, 아마 집에 있는 미원을 전부다 버렸었지?'

인스턴트 죽은 양이 썩 많지 않아서 조리하는 데는 10분이 걸리더라도 먹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가 이틀 동안 굶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해가 될 런 지도 모르지만 그는 인스턴트의 정의가 즉석이 아니라 만드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더 짧게 걸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옆에 놓여있는 배추김치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다.

남자는 해열제를 먹으려고 물컵을 찾았다.

'침대 옆에 두 개 정도 있을 텐데......'

예상대로 딱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비어있었고 하나는 반쯤 차있었다. 그는 두 개 다 집어 들어 속을 헹구고 물을 담아 해열제와 함께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지나가는 것이 느껴져 묘한 쾌감을 느끼던 그는 문득 시선이 마룻바닥으로 가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시선이 향하는 것은 왜일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니 정정하도록 하자, 마루에는 단지 여름용 이불과 베게 그리고 쿠션이 있을 뿐인데 시선이 향하는 것은 왜일까?
남자는 마루로 가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머리맡에 리모콘이 보였지만 TV를 틀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쿠션을 만지작거렸다. 천으로 만든 것치고는 내구성도 좋아 보이고 디자인도 꽤 세련되어 그가 좋아하는 물건 중 하나이다. 게다가 사용법도 모호해, 껴안고 자도 되고 베도 되고 앉아도 되는 그런 것이다.
조금 후 그는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남자가 깨어나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구토감을 느끼는 것 이였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게 빨리 먹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애초에 그는 식사속도가 느린 편이였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내며 부엌으로 걸어가 이미 미지근해진 물을 들어 마셨다.

'좀 나아졌나?'

밖을 보니 다섯 시쯤 되어 보인다.
남자는 부연 시야를 견디지 못하겠는지 두리번거리며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안경을 어디에 뒀더라.'

분명히 남자가 안경을 두는 곳은 굉장히 한정적일 터라 안경을 찾지 못할 일은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안경을 찾기 시작한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을 버려야 했다.
서랍 위, 피아노 위, 침대 옆과 책상모서리, 화장실 앞 탁자 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찾은 것은 허탈감뿐이다.
남자는 약간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짜증과 동시에 아까부터 남자를 괴롭혀 왔던 두통이 다시 그를 엄습했다. 그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아스피린을 두 알 먹고 마룻바닥에 앉았다.
물론 쿠션을 이용해 턱에 손을 괸 채 다시 골똘히 생각한다.

'분명히 안경을 어디 두긴 둔 것 같은데.'

기억을 못하는 것은 자신의 두뇌 탓인가, 라는 쓸데없는 망상과 함께 초등학교시절 받았던 수학 경시대회의 상도 생각났다.

'10여 년 전 일도 기억하는데 왜 안경 놓은 곳이 생각이 안 나지?'

남자는 자신이 바닥이 아닌 침대에 잠들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애를 썼다. 한참을 끙끙대던 그는 아직 이불정리조차 되지 않은 침대로 가서 앉은 뒤 음악을 듣기로 하고 오디오를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디오에서 글루미한 뉴 에이지들이 흘러 나왔다. 오디오 옆의 보관함에는 몇 개의 재즈 CD와 얼터너티브 락 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명한 밴드부터 꽤 마니악한 밴드들까지 장수가 꽤 많은걸 보니 남자의 취미는 앨범 콜렉팅인듯 보인다.

앨범 하나 정도가 모두 재생될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피아노에 다가갔다. 아스피린의 효과 덕분에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있었다. 그는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맑아있었다. 해열제의 작용인지 식은 땀이 약간 흐르며 묘하게 기분이 좋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순간 그는 다시 좌절해야만 했다. 악보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물론 암기해뒀던 곡들은 몇 가지 칠 수 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다시 안경을 찾으려고 일어섰다.

그는 이번에는 온 집안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평소라면 절대로 안경을 두지 않을 부엌의 찬장하나하나부터 티비 앞과 책장 앞, 가방 속과 현관까지 가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노트북 뒤에는 먼지만 좀 쌓여있고, 신발장엔 몇 달 전에 놓아둔 냄새제거제와 신발 몇 켤레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혹시 자기 전에 안경을 끼고 잔 건가?'

남자는 침대로 가서 뭉개진 요와 두꺼운 이불을 들춰보았다. 펄럭거리며 나온 것은 바라던 안경이 아닌 햇살에 비친 먼지뿐이였다. 혹시나 해서 전기장판의 밑까지 뒤져봤지만 역시 없었다. 다시 생각나는 곳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남자가 떠올린 곳은 침대 밑 이였다.
큼지막한 기타 하드케이스와 평소 그가 즐겨보던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남자는 안경 찾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흔들고 있다.
밖을 보니 이미 어두워졌다. 안경을 찾는데만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남자는 갑작스런 복통을 느꼈다. 남자는 잘 모르겠지만 열병에 의한 설사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화장실의 불을 키며 변기에 앉았다. 본래는 희었을 세면대가 화장실특유의 노오란 불빛을 받아 누렇게 빛나고 있다.
그는 변기에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안경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것이냐.'

남자는 허탈감과 상실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는 물을 내리며 화장실에서 나와서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남자의 오른 손에는 유리 두 알과 플라스틱 그리고 약간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들려있었다.






'세수한 뒤, 나는 자버렸다.' 끝

잡담 : 쓰고보니 판타지가 아닌게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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