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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레

2010.02.12 01:1902.12

10월의 첫째주 일요일, 눈을 뜨니 이미 정오. 남편은 이미 일어나서 경기중계를 보고 있다. 혹여 내가 깰까봐 커튼을 걷어두지 않았다. 상냥한 사람 같으니라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미풍이 쉬폰소재의 커튼을 기분좋게 간지럽히고 있다. 살랑거리는 커튼사이로 햇빛이 기분좋게 아른거린다. 얼른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조금은 가을의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소리가 듣기좋다. 남편이 나의 인기척을 눈치챘나보다.

"일어났어? 나 배고파. 뭐 좀 먹자."

식충이 같은 인간. 일요일인데 먼저 일어났으면 라면이라도 좀 끊여먹지.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그에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침대옆 서랍에서 고무줄을 꺼내어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고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세수만하고 거실로 나와 남편을 쳐다보았다. 이 인간 대체 언제 일어난거지? 이미 과자 한봉지를 해치우고, 주변은 과자 부스러기로 엉망진창.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밥 안해?"
"좀 기다려봐, 그리고 소파에 부스러기좀 치워."

대꾸도 하지 않고 경기에 집중하는 그가 얄밉고 한대 때려주고 싶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을 망치고 싶지 않다.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를 살펴보았다. 장을 본지는 꽤 오래됐지만 이렇게 먹을게 없다니.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뭐 먹고 싶어?"
"..."
"뭐 먹고 싶냐구."
"카레?"

갑자기 무슨 카레를... 카레도 없는데 카레가 먹고싶단다. 냉장고엔 야채밖에 없는데 말이다.

"카레랑 고기랑 사와야되는데 좀 사와. 놈팡이처럼 그렇게 있지말고."
"지금 이거 봐야 돼, 당신이 좀 사와."
"그럼 그거 끝날때까지 기다릴께, 배고픈 사람은 당신이잖아."

그는 또 대답을 하지 않는다. 자식도 없는 이 지겨운 결혼생활을 말해주는 이 상황. 남편은 사랑스럽다가도 죽이고 싶을만큼 미운 인간이다. 내가 여기서 화를 내서 저인간을 억지로 심부름 시킨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그냥 내가 빨리 갔다 오는편이 낫겠지. 그리고 대충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양말을 신으며 화장대를 쳐다 봤다. 연애시절과 신혼때의 행복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은 같이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연애시절엔 내가 좋아하는 빈달루 카레도 남편이 직접 해주곤 했는데, 이젠 내가 인스턴트 카레나 끓이고 있다니. 서러움에 창가에 비치는 햇빛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옷을 대충 갈아입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살짝 확인한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뭐 사올까? 뭐 사오면 된다고?"

경기가 끝났는지, 남편이 살갑게 물어온다. 옷까지 다 갈아입었는데... 순간 표정을 찡그렸다가 메모지에 사와야 할것들을 차근차근 적어주었다.

"돼지고기... 감자... 카레... 버터..."

카레재료들과 이것저것 필요한것들을 적었다. 남편에게 바가지 씌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깐. 그는 알면서도 군말않고 사온다. 그럴때 보면 눈치는 빠른 사람이라니까. 그는 추레한 몰골을 한채로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옆집 반장 아줌마가 보면 월요일의 근사한 가십거리가 되겠지. 그가 후다닥 나간사이 나는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야채들을 씻으며 준비를 할 작정이다. 쌀뜨물을 버리다 쌀까지 버리고, 양파를 썰다 눈물을 세숫대야에 받을 만큼 흘리지만 마음은 왠지 즐겁다.


밥솥은 슬슬 증기를 내뿜고 야채는 이미 준비완료.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리모콘을 더듬더듬 찾다 비디오 하나가 손에 잡힌다

'1999년 4월 25일, 결혼식 당일'

순간 웃음이 나왔다. 촌스러운 메이크업에 머리, 게다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진땀흘린 남편의 표정이 살아있는 웨딩촬영 비디오였다. 몇년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소파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그이가 꺼내 본걸까? 10년전의 촌스러움에 민망할게 뻔하지만 과감하게 비디오를 재생시켜 본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수줍어하는 나의 표정과 잔뜩 긴장해 있는 남편의 풋풋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봐도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의 10년전을 보며 민망함에 크게 웃어버렸다.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내비춘 내 친구들의 모습도 스쳐가고 남편 회사 동료들의 짓궂은 표정들도 지나간다. 한참을 웃고 순식간에 피로연 녹화장면으로 넘어갔다. 약간의 취기가 올른 남편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Robbie Williams의 Angels. 예전에는 줄곧 팝송도 들으며 불러주곤 했는데, 이젠 트로트만 듣는 30대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단단했던 몸은 점점 둥글둥글해져 똥배까지 나와버렸다. 비디오속 늠름한 청년이 내 남편이 맞나 의심이 들정도다. 문득 그이가 청혼하던 날이 떠올랐다. 장마가 끝나고 한참 더위에 찌들었던 8월초의 여느때와 다름없는 데이트였지. 불쾌지수 가득한 날씨에 서로 짜증을 내며 싸워버린 그날, 남편은 즉흥적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 모를 초라한 프로포즈를 해버렸다. 그래도 영화에서 본건 있어서 무릎까지 꿇고 나에게 반지를 들이밀었다. 그런 그의 대담함에 이끌려 그와 결혼까지 해버린 나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불꽃이 튀는 사랑얘기따윈 동이 나버린것 같다. 아! 이럴 정신이 아니지. 비디오를 보며 과거 회상에 젖은사이, 밥솥에서 밥이 찰지게 되어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뜸들이는 사이, 비디오를 끄고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편도 돌아왔고 나는 열심히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왠지 카레를 만드는 것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나의 젊은 시절을 봐서 일까? 아니면 그와의 꿈같던 연애시절이 떠올라서 일까... 어쨌든 나의 칼질은 리듬을 타듯 경쾌했고, 야채를 볶는 소리마저 신이 나는듯 하다. 재료를 다 섞고 물을 붓고 카레를 끓이는 사이. 나는 그릇에 밥을 담으며 식탁에 앉아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린애처럼 젖가락을 입으로 빨며 보채듯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얄미워.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될거야."

그는 못참겠는지 무말랭이를 집어 먹는다. 그리고 물을 한모금. 다시 무말랭이를 먹는다. 어쩌면 나는 애기와 결혼해 버린걸까?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 귀엽기도 하다. 카레가 보글보글 거리며 익어간다. 간을 보았다. 적당한걸. 불을 끄고 식탁위 받침대에 냄비를 올렸다. 국자로 그의 밥 위에 조금씩 얹어주었다. 고기는 많이, 그가 싫어하는 당근은 조금만. 내가 이렇게 신경쓰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다 얹지도 않았는데 어린아이처럼 그는 밥과 카레를 섞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밥을 한숟가락 떠먹기 시작했다. 잠시 숟가락을 내려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여보, 카레 맛 괜찮아?"

내가 그에게 살며시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채 카레를 먹으며 그저 온화하게 미소를 지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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