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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버섯과 나방

2010.02.11 04:0102.11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며 점점 어둠이 밀려온다. 태양은 이미 힘을 힘을 잃고, 달빛은 스믈스믈 기를 피려 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빛이 세상을 밝히며 생명을 속삭일때, 나는 고작 버드나무 아래 그늘에 숨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양이 지고 달님이 정수리위를 아른거릴때, 비로소 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 나는 암중비약하는 한량 그 자체이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인간이란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지 아니한가?


앙칼지게 머리칼이 휘날린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공기의 입자가 나의 전체를 뒤훑고 지나간다. 순수한 공기가 아니다. 수많은 생명 -어쩌면 포자뿐- 을 내포하고 있다. 이기적인 놈들. 내 콧속을 타고 비강에 버섯이라도 나게 되면 어쩌려고. 조용하지만 요망한 것들이다. 보기 흉하게 머리를 한번 털고서 버드나무 곁에서 발길을 옮겼다. 맨발로 잡초들을 밟을 때, 사르륵거리는 소리가 무신경하게 달팽이관을 파고든다. 흙은 차갑고 찰지게 발바닥을 감싸준다. 여전히 바람은 내 몸을 유린하고 있다. 하지만 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포자는 내 안으로, 나는 포자의 자궁이 되었기 때문에.


저 멀리 갈대밭에서 섬유질끼리 부딪히는 연주소리가 들린다. 살랑살랑 차분하면서도 앙칼지다. 금방이라도 오라고 손짓하듯 갈대밭이 격하게 춤춘다. 같대밭의 살랑거림에 반사되는 달빛은, 마치 흉측하게 날개를 벌린 아리오크처럼 볼썽사납다. 큰줄박각시 한마리가 나의 곁으로 날개짓을 하며 날아온다. 당돌하며 거침없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큰줄박각시 한마리는, 주변의 공기를 힘차게 밀어내며 나의 정수리위를 날아간다.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는다. 썩을 녀석.


인분을 휘날리며 저 기분 나쁘게 생긴 나방 한마리는 그렇게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매몰찬 놈 같으니라고. 그녀석은 그렇게 거침없이 날아가버렸다. 심심해져버린 나는 하염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발밑의 잡초더미는 촉촉하게 주변의 차디찬 산소를 머금고 있다. 발은 젖어버렸고 나는 그 차가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발가락 사이로 풀잎들이 조심스럽게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스쳐간다. 늪속 히드라가 퉁겨져나와 발가락 사이로 몸을 숨긴듯 기분나쁘다. 그렇게 내 발은 흙과 하나되어 스며들고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어 눈물을 흘리듯 뚝뚝 떨어진다. 풀들은 숨죽이고 생명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만개한 꽃들은 하나 둘씩 꽃잎을 떨구어간다. 나는 두팔을 벌리고 창조주의 양수를 전신으로 맞이한다. 꽃가루는 빗물에 섞여 토양속으로 알차게 스며들었다. 언젠가 또 꽃을 피우겠지. 그리고 밟혀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흠뻑 젖었다. 비는 금방 그쳤지만, 주변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정신없이 삐죽거리던 풀들은 숨이 죽었고, 휘날리던 공기는 습기를 머금은채 주변의 오라를 대체해버렸다. 바람소리가 스산하던 풀밭은 섬뜩할만큼 고요해졌고 달빛만이 날카롭게 아른거리고 있다. 땅은 촉촉함을 넘어서 진흙으로 뒤덮였고, 공기는 포자들로 가득차버렸다. 순간 비강에 자리잡은 개나리광대버섯이 싹을 틔우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꼇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버섯때문은 아니다. 아직 내 몸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겠지...


남쪽 하늘에서 오리온자리가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한바탕 비가 오고나서인지 밤하늘이 더 맑게 보이는 기분이다. 은하수를 방랑하듯 나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을 점찍고 있었다. 그런데 리겔의 자리를 절묘하게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가 신경쓰인다. 잎도 더럽게 넓은 활엽수. 자리를 옮겨 감상하려고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았는데, 나뭇가지 끝에 달린 고치가 보인다. 아까 본 큰줄박각시가 친걸까?


고치는 더없이 윤기가 흐르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기도 하고, 스스로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기도 했다. 아까 그 녀석은 아니겠지. 스치듯 생각이 지나갔다.

"이쁜 나비라면 좋겠어. 색깔도 이쁘고 날개도 우아한, 그런 녀석이라면 내가 이뻐해줄텐데..."

바람이 큰 탓인지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나비라면 기쁘겠다. 살포시 날개짓을 하며 꽃잎 위로 안착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적어도 오늘 밤에 말이다.


정원을 한바퀴 돌며 생각했다. 오리온자리의 별들과 달님중 어느쪽이 나에게서 가까울까? 분명 오리온자리가 더 가까울거야. 달은 그저 너무 커서 가까워 보일뿐이야. 어쨋든 내가 저것들과 가까워 질순 없잖아... 순간 거세게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나의 전신을 무방비상태로 바람에게 맡겼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꿈을 꾼듯 정원의 경치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방의 날개짓을 본것 같기도 하고, 나비의 인분가루를 만져본 듯도 하다. 여하튼 둘중 하나는 진실이겠지. 나의 소망은 그저 어둠이 계속되는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 빛이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 그 자체이다. 땅거미가 질 무렵 가장 행복을 느끼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 행복은 내 맘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모든것을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느꼇지만, 닿지도 않는 달님과 오리온자리만을 하염없이 올려다 보고 있다. 그리고 뱃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떨림을 느꼇다.


그 어느때보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지만, 내 시야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나뭇가지 끝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나의 머리위로 떨어져 목줄기를 타고 흐른다. 모든것이 희미해져간다. 나는 다시 버드나무 곁으로 돌아갔다. 살포시 무릎을 양손으로 껴앉으며 쪼그려 앉았다. 최소한 버드나무의 안락함에 기댈 수는 있을것 같다. 천천히 포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고작 비강에 자리잡았던 개나리광대버섯이 이젠 나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 버섯이자 포자이고 공기이다. 여명이 정원 전체를 뒤덮은 순간 나는 버드나무 아래 작은 개나리광대버섯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큰줄박각시 한마리가 나에게 날아온다. 우아하게 날아온 그녀석은 나를 점점 먹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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