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변수 85.96%

2010.02.11 04:0002.11

공허한 소리가 맴돈다. 나에게 주어진 청각으로 느끼는 것인지, 내 속에서 생명이 잉태함을 감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창조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것을 나는 어떻게 느끼고, 왜 그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인지 질문해본다. 더 근본적으로 나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해본적도 없는 행위를 나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저 칠흑이 걷어지고 밝은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고 동시에 소망하는 단 한가지 바람이다. 언제부터 가진 마음일까...


-약 일주일 뒤-

아직도 나에게 시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는 존재일까? 어떤 움직임도 아직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칠흑같던 어둠속에서 가끔 반딧불같은 여명을 보곤한다. 반딧불은 어떻게 생긴 존재일까? 내가 시각을 가지게 된다면 볼 수 있는 것인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이 순간에도 밝은 반딧불이 나의 어둠속 시야를 밝혀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포물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개체수는 점점 많아진다. 나는 그것을 구체화된 어떠한 감각으로 느끼고 싶다. 또렷하게 시야에서 아른거리는, 반딧불같은 빛들을 나의 존재로 감지하는 것을 꿈꾼다. 촉감이라는 것일까. 그러한 느낌을 받아본듯한 기억이 떠오른다.


-3일 뒤-

긴 잠에서 깨어난듯 모든것이 낯설다. 추상적인 감각으로 느낀것들이 전부이긴 하지만, 최근 나에게 급진적으로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또렷해지고 있다. 반딧불들은 좀더 형상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공허하게 맴돌던 소리는 형태를 바꾸어서 진동으로 느껴진다. 그 빈도수는 산발적이긴 하지만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면서 두려움도 느끼게 해준다. 두려움을 느끼며 나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해주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이 모든것들이 나에게 생명을 선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일까, 생각하는 존재일까? 반딧불 몇마리가 나에게 많은것을 건내 준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을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정확하게 21시간 뒤-

진동이 점점 요란해진다. 실질적으로 나는 감촉이란 것을 가지게 된 듯하다. 아니 그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드디어 느끼게 된 것 같다. 반딧불은 더 선명해지고 그 크기가 비대해졌다. 이제 시야속 어둠은 거의 사라지고 징그럽도록 크게 빛나는 반딧불이 대신 자리잡고 있다. 움직임과 개체수는 더 늘어났고, 그것이 점점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진동덕분에 반딧불이 지나간 자리의 빛들이 뱀처럼 흐느적거린다. 나는 뱀을 본적도 없다. 하지만 알고 있고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으니, 뱀은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인지함을 시작하기 전에 본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왜 나는 아무것도 본적이 없는것인지 의문을 가져본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격렬하고 빠르게 진동을 하고 요동을 치는 것을 느껴간다.


-3시간 25분 뒤-


드디어 보이는 것 같다.

"반딧불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런 소리를 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귀를 통해 들린 것 같았다. 나에게도 소리를 내는 입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 내가 본 반딧불들은 반딧불이 아니라, 대지를 뒤흔들며 성스럽게 태어나신 예수님과 같은 형상이다.

"예수..."

빛의 구체같은 반딧불들은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이 나에게 전이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고 있다. 심지어 나는 감각으로 느껴보고 싶다. 순간 반딧불이 내 시야를 모두 하얗게 빛내며 나의 오감을 빼앗아 가려는듯 크게 진동한다. 전신이 들어 올려졌다가 크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진것 같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랬다. 자의와 상관없이 내 몸이 움직인 것이다. 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생각에 잠기게 하다가도 정신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일까... 그리고 모든 감각이 한곳으로 몰리는, 불타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13분 20초 뒤-

이제 나에게 모든 것은 뚜렷해졌다. 반딧불은 더이상 반딧불이 아니고, 진동의 근원지도 알 수 있을것 같다. 길고 날이 서있는, 여러각도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금속 관자 같은 것들이 내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그리고 그 관자의 끝에는 반딧불이라 생각했던, 거침없는 불꽃이 튀고 있다. 내가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차갑고 투명한 유리위에 누워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의 손발을 지지하는, 천장에 매달린 튼튼하고 비대한 금속 장치들이 내 몸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깔고 누운 유리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지만 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대단한 물질로 이루어진게 분명하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지만 지지대에 묶여서 움직일 수가 없다. 발은 더 높은 높이에 묶여있어서 무릎이 가슴에 가까운 정도이다. 하지만 아프거나 피곤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느낌이 무뎌지는 듯하다. 감각이 구체화되며 모든것을 느끼는데도 느낌이 무뎌지고 있다. 존재하고 생명을 숨쉬는 것이 이런 것일까?


-1분 30초 뒤-

발을 묶고 있는 지지대가 점점 내려오면서 무릎과 가슴도 점점 거리를 벌리게 되었다. 반면 양 손을 속박하고 있는 지지대는 점점 올려져서 고개를 움직이지 않아도 나의 열손가락을 볼 수 있을정도가 되었다. 손은 바닥에서 더 멀어졌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는 힘은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손끝에 전해오는 금속의 느낌을 감상했다.

"차가워... 금속이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모든것을 느꼈고 크게 소리내어 말했다. 이제부터 느끼는 모든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되었다. 추상적으로 인지함을 넘어 나는 이제 구체적인 의사표현을 하고 있다. 그렇다해도 움직일 수가 없다. 손발은 묶여있고 허리를 바닥에서 때어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기쁨이 느껴진다. 생명이기 때문에, 나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순간 또박또박하며 감정을 느낄수 없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A-SH090617의 완성예정은 20분 10초뒤, 생명유지 이상없음. 출고예정까지 5분 13초 지연예상. 예상 추가비용 12.47%증가."



-12초 뒤-

모든 속박이 풀려졌다. 손발을 묶고 있던 금속장치들은 미련없이 나의 수족을 풀어주었다. 이제껏 참고 있던 감각들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꼴이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성가신것들, 이제 날 어떻게 못하겠지!"

그리고 허리와 등을 죄여오던, 거부할 수 없는 중력과도 같던 힘도 어느 순간 부터 사라졌다. 이제 나는 정말 의지만으로 움직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듯 기운이 없지만 오히려 자랑스럽다. 생각한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느끼고 있는 자신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A-SH090617 구속장치 해제, 신체 갱신 단계 돌입."

기분 나쁘도록 날카로운 아까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 수 없는 말을 하지만 어딘가 측은한 느낌도 든다. 일어나기위해 양 손바닥을 지지대 삼아 짚은 순간, 내 몸을 떠받들던 유리가 녹아내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녹아내린것이 아니라 똑같은 부피의 물이나 젤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어린시절 먹었던 곰모양의 젤리가 떠올랐다. 나에게 어린시절이 있었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듯하다. 유리가 물로 바뀌며 나의 무거운 몸뚱이가 순식간에 그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물이라면 내 몸이 떨어지며 방정맞게 출렁대겠지만 어떠한 요동도 없었다.

"분명 물이 아닐거야. 그렇다고 내가 먹던 젤리도 아니야. 도대체 뭐지?"

그 속에서 말을 하지만 음성은 또렷하고 기분나쁜 젤리가 내 몸을 관통하지도 않았다. 금속보다 차갑지도 않고, 내 몸을 유린한 불꽃들처럼 뜨겁지도 않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곰모양 젤리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4분 58초뒤-

"A-SH090617의 신체 갱신 완료까지 1분 예정, 모든 절차 준비완료"

기분나쁜 젤리에 내 몸이 유린당한지 5분은 훨씬 지난듯하다.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다. 몇분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나의 오감들은 힘을 잃고 죽어가는 듯하다. 문어발처럼 징그럽게 생긴, 끝이 날카로운 장치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을 찌르고 지나갔다. 어떠한 느낌도 없었지만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감각을 느낀 뒤로 가진, 최초의 기분나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잠이 들기 시작했다. 곰모양 젤리를 먹는 꿈이 아른거린다...


-꿈-

나는 눈을 떴다. 사방을 올려보았다. 하늘은 젤리처럼 몽글몽글 구름이 듬성듬성 보이고 햇빛은 온화하다. 땅은 끝없이 잔디밭이 펼쳐져있고 바로 옆 너도밤나무의 그늘에 나는 앉아있다. 테디베어가 그려진 돗자리에 엄마와 함께 말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엄마의 긴머리 뒤로 소풍간식이 담겨진 바구니가 보인다. 실용성은 없어보이지만 엄마는 많은 것들을 챙겨온듯 하다. 엄마는 말없이 웃으며 나에게 샌드위치를 건내준다. 한 입 베어물었다.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오이를 영악하게도 치즈밑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나는 싫은 내색없이 순식간에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어버린다.

"너무 맛있어! 엄마, 하나 더 먹고싶어."

그리고 엄마는 샌드위치 하나를 더 건내어 준다. 땅콩버터에 곰모양 젤리가 들어있다. 내가 좋아하는 곰모양 젤리말이다.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곰모양 젤리의 잘려나간 머리가 샌드위치 끝에서 덜렁거리며 매달려있다. 그 머리 조각을 나는 살포시 빼내어 왼손으로 가져가자 엄마가 물어온다.

"왜 먹지 않고 빼버렸니?"

"이 곰돌이는 너무 불쌍해... 나는 이거 먹지 않을거야."

그러자 엄마는 나에게 곰모양 젤리를 봉지채 권한다.

"여기 젤리가 아주많아. 그러니깐 안심하고 먹으렴."

순간 엄마의 얼굴이 심해처럼 깊은, 무섭도록 시퍼런 금속 구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봉지에 든 곰모양 젤리도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금속으로 바뀌어버렸다. 곰모양젤리의 조각을 쥐고있던 왼손을 더 꽉 쥐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뜬다.


-%*$$@(-

눈앞에 수많은 무언가들이 서있다. 모두 앞을 보고 있으며 생김새가 낯설지 않다. 일체의 미동도 없이 서있는 그것들은 모두 똑같은 생김새이다. 섬뜩할정도로 끝없이 진형을 갖추고 서있다. 죽은듯이 고요한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익일 생산량 7.82% 초과. 예상 추가비용 23.85%초과. A-SH생산의 모든공정을 중단 합니다. 089943이후 생산품은 전량 폐기처분합니다."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저 멀리에서 묵직한 기계 소리가 들려온다. 정면만이 보이기 때문에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앞쪽에선 아무 일도 없으니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에는 분명하다. 그 기분나쁜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바닥이 진동하는 느낌도 전해져온다. 나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리고 묵직한 금속소리가 내 귀 바로 옆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이 든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이윽고 내 머리 위까지 온 듯하다.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천장에서 갈고리 모양의 서슬퍼런 금속이 내 양팔을 잡아 들어올린다. 나의 자유의지는 그것을 뿌리치려 하지만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끝도없이 끌려 올라간다. 멈추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시간 감각마저 잃어버린 때였다.


-제 18구역 A37번 복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감상에 젖을때가 아닌 듯하다. 나는 지금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서슬퍼렇게 날을 세운 갈고리는 사라졌지만 내 눈앞은 다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뒤덮고 있다.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이 고철덩어리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며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고, 방향 감각도 잃어버렸지만 놀라울만큼 규칙적으로 걷고있다. 나는 걸어가고 싶지 않다. 순식간에 자유의지를 거세당한 나에게 그런 바람은 통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푸른 잔디밭이 펼쳐질까. 혹은 어둠이 걷히고 눈부신 빛을 볼수 있을까.

"누구 하나 말 좀 해봐. 왜 다들 입을 다물고 걷기만 하는거냐고!"

벙어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다시 말을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의 이 머저리들은 모두 벙어리같이 말을 하지 않는다. 약해빠진 놈들. 어둠이 걷히고 빛이 보이면 난 이 머저리들에게서 벗어날 생각이다. 그 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도 지금 최소한 내 주둥이는 살아있잖아?


-기수를 돌려라-

고철덩어리들 뒷통수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희미한 빛의 기운이 느껴진다. 분명 저 앞에 빛이 존재하고 있다. 가까워질수록 희미함은 점점 선명함으로 바뀌고 있다. 두려움은 금방 안도감으로 대체되고 나의 몸은 기분좋게 발열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분명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멍청이들도 똑같은 가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여전히 뒷통수에 가렸지만 빛은 점점 커져서 이제 나는 그 빛의 안에 들어와 있다. 밝다. 눈이 부실정도로 밝다. 그리고 나를 강제로 움직이던 힘도 없어진듯 하다.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다! 주변의 멍청이들의 어깨에 부딪히며 나는 사방을 뛰어 다녔다.

"멍청이들아! 나는 다른곳으로 갈거야! 매가리 없는 멍청한놈들!"

나는 필요이상으로 들뜬 반면, 이 녀석들은 아무도 날 쳐다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이녀석들과는 다르니까.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빛의 방에서 나는 저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비상구-

얼마나 달린걸까. 뒤로는 더이상 고철덩이들도 보이지 않고, 정면은 그저 밝은 빛만 보일뿐이다. 마치 초대형 반딧불의 내장을 헤치고 가는 기분이다. 한참을 달린듯 하지만 그자리를 맴돌듯 풍경의 변화가 없다. 턱을 조금 내려 밑을 보면 열심히 움직이는 양다리와 앞뒤로 격렬하게 흔들며 꽉쥐고 있는 양손이 보일뿐이다. 전혀 힘은 들지 않는다. 이상하리만큼 사뿐사뿐 빠르게 뛰어갈뿐이다. 분명 이 길의 끝에 나가는 문이 있을 테니깐. 순간 정면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온다. 가까워 질수록 강해진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내 몸을 식혀준다. 꿈에서 본, 바람에 날리던 엄마의 긴 머리가 떠오른다. 곰모양 젤리의 맛도. 그 순간 저 끝에 흉칙한 검은색의 환풍구 하나가 보인다.


-희생-

거센 바람이 불어 오고 있다. 가만히 서있는게 힘들 정도로. 환풍기는 세상의 공기를 모두 토해내듯, 거대한 악마의 입같은 꼴을 하고 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대여섯개는 되보인다. 나는 이것을 멈추고 탈출하고 싶다. 이곳을 벗어나 나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고 싶다. 더이상 강제로 움직이기 싫다. 이 환풍기를 멈춰버릴 것이다. 환풍기의 중심부는 내 눈높이에 있다. 살짝 내 손끝을 가져다본다. 빠른 속도로 도는 환풍기에 내 손가락은 타들어 갈듯이 기분나쁜 소리와 불꽃을 일으켰다. 곧바로 나는 오른쪽 팔을 환풍기 팬속으로 집어 넣었다. 팔은 순식간에 내 몸뚱이에서 잘려나가 환풍기 팬과 팬사이에 끼어서 기분나쁜 금속소리를 내었고, 과부하를 일으킨듯 환풍기는 연기를 내며 속도를 늦추어갔다. 오른쪽 팔은 더이상 쓸수없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는다. 나에겐 왼팔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짐을 하듯 왼손을 더 꽉 움켜쥐며 환풍기가 거의 멈추었을때 나는 환풍기속으로 들어갔다.

"제 18구역 폐기장0A3 환풍구 이상, 지금 즉시 시스템 오류확인"


-탯줄-

환풍기 너머는 끝없이 펼쳐져있다. 통로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내장의 형상을 하고 있다. 듬성듬성 천장에서 물이 웅덩이로 떨어지며 청명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나는 또 다시 하염없이 앞을 향해 걸어간다. 환풍기 너머의 눈부신 빛을 뒤로하고 다시 어둠속으로 걸어간다. 습하고 차가운 바람이 이전까지 있던곳의 공기와는 다르게 내 오감을 자극했지만, 기분나쁘지는 않다. 내 몸의 부식을 빠르게 진행시켜 가겠지만 더없이 기쁘다. 생명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몇걸음 걸어가자 환풍구 너머로 기계음이 들린다.

"$$099-44##@#@-*#**"

뒤를 돌아보니 불꽃을 일으키며 환풍기를 뜯어내려는듯 보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분명 우호적이지 않은 녀석들일 것이다. 나하나쯤 없어지는게 무슨 대수라고 이 난리인지. 달려가며 중간중간 환풍기쪽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불꽃은 환풍기의 테두리를 따라가며 통째로 뜯어내는듯 하다. 그리고 시야에서 환풍기가 불꽃 한점으로 보일때쯤 육중하게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풍기를 완전히 뜯어낸 모양이겠지. 나는 점점 속도를 내며 앞으로 하염없이 달려나아갔다. 뒤에서는 증기를 뿜어내는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쫓아오는 몇명의 고철덩이들이 보였다. 아니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으로 느꼈을 뿐이다.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나는 계속해서 달려나아간다. 그래야하고 그렇게 하는것이 맞다고 느껴진다.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에 이끌려 달려나갈 뿐이다.

"A-SH090617를 추격중인 모든A-RUV의 소비비용이 상승중입니다. 추격한계선 조정단계 돌입"


-언덕-

1km는 달린듯하다. 내가 이전에 이만한 거리를 달렸던 적이 있었나? 산들바람이 약하게 불어오는 잔디밭의 기억만이 떠오르고 점점 좁아져간다. 나의 모든기억은 한곳으로 집중되고 밤하늘의 별들이 유성이 되어 떨어지듯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역동적으로 쫓아오는 추격자들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오고 이 길의 끝은 점점 없어보인다.

"추격한계선 조정완료. 전방 500M이상 접근금지. 더 이상의 비용소모 불허"

그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통로를 울리지만, 내 청각을 자극하지는 못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런 사소한 소동에 내 신경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다. 한참을 달린듯 한데 나를 쫓아오던 기분 나쁜놈들의 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격하게 순환운동을 하던 나의 다리를 잠시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에서 바닥으로 증기를 심하게 내뿜으며 그 놈들이 나를 가만히 보고있다. 저 녀석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추격한계선 도달. 모든 A-RUV는 즉각 귀환명령. 추가경비 32.94%소비."

메아리치는 목소리와 동시에 그 놈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것도 굉장한 속도로. 나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다시 앞을 향해 뛰어갔다. 몇발자국 뛰지 않아 통로의 오른쪽으로 꺾인 모퉁이가 보인다. 모퉁이 너머로 희미한 빛줄기도 아른거린다. 그래, 진정한 빛이야. 나를 구원해줄, 잔디밭을 수놓을 바람이 살랑이는 그곳이야. 그리고 나는 빛을 향해 뛰어나간다.


-구원-

모퉁이에 당도했을때 나는 몇초간 머뭇거렸다. 알수없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곧바로 모퉁이를 돌아서 빛을 맞이했다. 그 순간은 너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느리지 않은 속도로 걸어나아갔다. 그리고 모든것이 희미하지만 점점 또렷해졌다. 나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탁하고 두터운 느낌이다. 대지는 점점 붉어지고,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발밑을 천천히 내려다 보았다. 새빨간 대지위에 고르지 못한 입자의 먼지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점점 나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대지의 끝에 노을이 지고 있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마치 내눈앞에서 아른거리듯 굉장히 커보인다. 나무나 잔디는 보이지 않는다. 날개짓을 하는 새도 보이지 않는다. 태양이 지는 반대편은 이미 먹구름으로 잔뜩 어두워져있다. 그리고... 내 몸이 점점 녹아내려간다. 새하얗고 매끈한 나의 외피는 정액처럼 점점 흘러내려가고 있다. 가슴팍에서 빛나던 초록색의 생명유지 장치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태양의 반이 지평선너머로 삼켜졌다. 오른쪽 눈이 녹아내리며 시야를 잃어간다. 다리의 연결 부위가 약해지며 나는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왼쪽 눈도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생명유지 장치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대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나의 시야를 채운것은 녹아가는 왼손으로 힘겹게 쥐고 있던 곰모양 젤리의 조각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00 단편 호모 네티우스1 노 새 2010.02.01 0
1299 단편 1 하늘깊은곳 2010.02.01 0
1298 단편 칼과 십자가 먼지비 2010.02.02 0
1297 단편 [엽편]어느 작가 지망생의 꿈 먼지비 2010.02.02 0
1296 단편 공원 벤치 옆자리 roi 2010.02.07 0
1295 단편 살인충동 언어유희 2010.02.10 0
단편 변수 85.96% cocoon 2010.02.11 0
1293 단편 버섯과 나방 cocoon 2010.02.11 0
1292 단편 카레 cocoon 2010.02.12 0
1291 단편 악마의 씨앗 cocoon 2010.02.12 0
1290 단편 세수한 뒤, 나는 자버렸다. 타넨 2010.02.12 0
1289 단편 돼지 좀비 바이러스2 dcdc 2010.02.14 0
1288 단편 싼따말레나 은십자가 파괴 사건 황당무계 2010.02.16 0
1287 단편 그림자 매듭 룽게 2010.02.17 0
1286 단편 십일금무(十一錦舞) sylvir 2010.02.17 0
1285 단편 태평요술서1 먼지비 2010.02.20 0
1284 단편 나이팅게일 니그라토 2010.02.21 0
1283 단편 망각의 숲 sFan 2010.02.21 0
1282 단편 상처입고 상처를 잊어버린 남자는 고통을 이겨내 상처를 치료한다. 김진영 2010.02.22 0
1281 단편 군대갈래? 애낳을래?4 볼트 2010.02.24 0
Prev 1 ...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