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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공원 벤치 옆자리

2010.02.07 22:1002.07

 가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우울해질 때가 있다. 아니 이유가 없다기 보다는, 뭐랄까. 민감해진다고 하면 맞을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쑤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 안에만 있자니 답답한 기운이 도무지 가시질 않아 밖으로 나섰다. 밖은 2월 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렇다고 외투를 벗거나 지퍼를 내려도 될 정도로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목까지 바짝 지퍼를 올려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해두기만 하면 약간 쌀쌀한 가을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리는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집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는 공원에 생각이 미쳤다. 이 근방에 오래 살기는 했지만 운동을 싫어하는 까닭에 공원에도 거의 가보지 못했다.

 방향을 틀어 약간 더 걸으니 공원이 나타났다. 걷기 편하도록 푹신푹신한 블록이 깔린 인도가 좌우로 늘어선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아래 길게 뻗어있었다. 그곳을 걸을까 잠깐 고민하다 그냥 가로등 옆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별로 영양가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질러 놓았다. 고슴도치 두 마리가 있다. 둘은 서로를 좋아하여 곁으로 다가가지만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만다. 화들짝 놀라 멀찍이 떨어지지만 다시 외로운 마음이 들어 서로에게 다가간다. 또 다시 가시에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상처받고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두 고슴도치는 서로가 상처받지도 외롭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 어디선가 주어들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만약 살을 맞댈 정도로 가까워야만 외롭지 않은 고슴도치가 있다면 그에게는 이런 거리조절의 테크닉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어차피 외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고슴도치는 상처를 입어가며 굳이 그런 테크닉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혹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 몇 번 내 뒤를 지나가기만 했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만화나, 소설, 혹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누군가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다. 벤치는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옆으로 길었고 나는 그 왼쪽 한 구석에 앉아 있다. 앉겠다고 생각만 하면 공간이 부족할 리는 없다. 그래도 앉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상상을 해본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어온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여자가 좋겠지만 꼭 미녀가 아니라도 좋다. 한 번도 본적 없던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밤이 깊으면 헤어지는 거다. 연락처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다. 그건 즐거웠던 시간을 망치는 짓이다. 당분간은 이 공원에도 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 공원의 벤치 같은 것은 완전히 잊고 있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르게 되고, 또 다시 며칠을 줄곧 이곳에 나오다 마침내 몇 년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지막이 재잘대는 소리와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흘끗 쳐다봤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세 명.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인 듯싶었다. 말소리가 점점 커지고 나는 고개를 숙인다. 잠시 만에 여자 아이들은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 까지 왔다. 푹 숙인 뒤통수로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착각이 아니라 정말 나를 쳐다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늦은 시간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의 웃음거리가 됐다고 생각하면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면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 것 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쪽일까, 생각하다 잠깐 잠이 들어버렸다.

 아름다운 여자가 내 옆에 앉는 꿈을 꿨다. 깨어나 옆을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약간 떨어진 가로등 밑에 개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아니지만 종종 개를 기르곤 했다. 난 개가 좋다. 개에게는 푹신푹신한 털만 있고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 때부터 기른 애완견의 경우이다. 지금 보이는 개는 딱 봐도 길거리에서 생활한지 몇 년은 넘어 보였다. 그런 개들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수를 치며 이리와, 하고 개를 불러보았다. 개는 의외로 순순히 내 품으로 왔다. 개는 씻지 않아 역한 냄새가 났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난 개를 쓰다듬고 개도 내 손을 핥아주었다. 그러다 곧 흥미가 떨어진 듯 내 품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날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그에게 무엇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현명한 생각이다. 나도 무슨 염치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분명 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또 꿈을 꿨다. 아름다운 여자가 내 옆에 앉는 꿈을. 또 혹시 하고 옆을 돌아봤다.

 그런데 거기에 여자가 있었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가로등에 주황빛으로 물든 하얀 정장을 입었다. 갸름한 턱선을 따라 떨어지는 검은 머리칼은 방금 그려낸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숨이 막혀올 정도의 미인이었다. 가슴 한 쪽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몰랐다.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 날 쳐다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실 나는 예쁜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난 그것이 열등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통계적인 이유도 있다. 이때까지 알아온 예쁜 여자는 대체로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새로운 예쁜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내가 애써 친해지려 들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과 정말 예쁜 여자가 내 옆에 앉았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이 별개이긴 하다. 그렇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가슴이 뛰는 한편으론 그 예쁜 여자와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은 지금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 밖에 없다. 저 여자는 내게 말을 걸어올까?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따분해진 나는 그만 졸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꿈과 현실의 중간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응……그래……공원이야……학원……끝내긴 했어?……나는 아직……수연이는?……빨리 와……이상한 사람……혼자……

 혼자

 라는 말에 화들짝 깨서 주위를 둘러봤다. 여자는 없었다. 꿈결에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본다. 이상한 사람이란 건 나를 말했던 것일까?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내 가시가 그녀를 찔렀을지도 모른다. 난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목시계를 봤다.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렇게 많이 잤나? 어쨌든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난 집으로 돌아갔다.
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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