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나는 온통 책이 가득한 서가 사이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이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래의 정령입니다. 당신의 미래에 관한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나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니, 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서가의 책 한 권을 뽑아들더니 내게 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두꺼운 가죽으로 장정된 표지에는 요즘 내가 한창 쓰느라 골몰하고 있는 장편의 이름이 황금색의 화려한 필체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미래의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됩니다. 당신은 수많은 책을 써낼 것이고, 그 책에 쓰여진 모든 글자 수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써내려간 책의 한 줄 한 줄에 감동하고 한숨짓고 눈물흘릴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영원토록 위대한 작가들의 반열에 끼어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책들은 언제도록 인류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 되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책을 내게 건네 주었습니다.

“자, 살펴보십시오. 이 책들은 언젠가는 당신의 손에 의해 쓰여질 것들이기에, 어차피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꿈에서라도 잠시 훑어보고 미래의 자신이 쓴 글들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당신이 이 모든 위업을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근 당신은 어떠어떠한 장의 내용을 진행하는데 막혀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은, 그 이후로 어떤 단편들이며 장편들을 써내려갈지 영감을 얻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쳐냈습니다.

“이것들을 내게서 치우시오! 내게서 나를 빼앗아가지 마시오. 나는 책의 마지막 장, 길 끝의 목적지, 무거운 묘비석이 아니오. 글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려움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것을, 길을 걷는 것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겠소! 설령 미래의 내가 어떤 책을 쓸지 훔쳐보지 않아서 그런 책을 쓸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 책들을 보고 쓰게 된다면 차라리 그것들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은 나를 이미 쓰여진 책으로 만드려고 하고 있소. 그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해서도 안 되오.”

미래의 정령은 어깨를 으쓱해보였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의 선택이 어떠하든, 무수히 펼쳐진 가능성의 갈림길에서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테니까요.”

그리고 어지러이 불어온 바람에 무수히 책장이 날려,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는 이미 아침 햇빛이 눈가에 와 닿고 있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때의 그 어려운 장은 겨우 다 써서 넘겼지만, 끼니를 거르고 방세를 재촉하는 주인에게 시달리며 살고 있노라면 그 때의 선택을 다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일어납니다. 그 때마다 아니, 당연히 잘 한 선택이야 하고 재빨리 마음을 다잡다가도 화려한 표지와 필체에 생각이 미치면 빙긋 웃으면서, 기껏해야 가난한 작가 지망생의 허영심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에 쓸 문장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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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짜리 짤막한 엽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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