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901384596

2010.01.26 08:4001.26

「901384596」

  밖에는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나는 추위는 싫지만 겨울은 좋다. 겨울에는 공기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차갑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겨울의 공기를 들이 마시면 뭔가 설레는 기분이 든다. 난 하루 종일 베란다에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나는 이런 짓을 한다. 헷갈리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바깥 풍경을 보고 싶은지 이다. 이건 아무래도 그때그때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밖은 어두워 가로등 근처 말고는 눈발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려면 매우 집중해야 했다. 자연스레 길 한 쪽 구석에 있는 가로등에 눈이 갔다. 눈 내리는 날 밤의 주황색 가로등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계속해 보고 있으면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난 시계를 봤다. 시계는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빠가 돌아올 시간이다.

  아빠는 좀 괴짜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빠와 살게 된 것은 8살 때부터였다. 아빠는 처음 봤을 때 이미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날 데리러 온 날도 오늘 같이 눈이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난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난 아빠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었다. 아빠는 날 부르더니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내 어깨를 잡았다. 난 용감한 편은 아니었으나 왠지 겁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근함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난 벗겨진 머리에 붉은 코를 하고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아빠를 쳐다보는 대신 시선을 피해 뒤쪽의 가로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아빠는 내가 너의 아빠다, 내일 데리러 오마, 라고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빠와 나는 집으로 왔다.

  아빠는 그 이후로 내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단란한 가족생활은 없을 것 같다는 내 예감은 들어맞았다. 아빠는 항상 저녁 늦게 들어오시곤 했다. 아예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렇지만 들어오는 날이면 십중팔구 12시 정도에 들어오곤 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빠가 자신의 얘기를 한 것에 비하면 내 일과를 물은 것은 오히려 많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집에 오면 아빠는 항상 TV를 틀고 뉴스를 보았다. 내게 같이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옆에서 봐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있든 없든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내가 옆에서 보고 있으면 가끔 뉴스를 보며 욕을 하곤 했다. 나에게 직접 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가끔, 아주 가끔은 나에게 동의를 구할 때도 있었다. 아들아, 저 새끼들은 정말 개 같은 새끼들 아니냐? 아빠는 나를 부를 땐 항상 아들아, 라고 불렀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랬으나 차차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이후에는 아빠와 나의 생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나에게 해준 말은 매우 적어서 난 거의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길면 길수록 기억하기 쉬웠다.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총에 관련된 얘기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이었다. 아빠는 그날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들어왔다. 굉장히 취해있었다. 오늘은 TV를 보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상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아빠는 개 같은 새끼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놈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날 일으켜 세웠다. 보여줄 것이 있다고 그랬다. 난 아빠를 따라갔다. 날 끌고 가면서도 아빠는 계속 개 같은 새끼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아빠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잘 쓰지 않는 작은방이었다. 난 거실에서 자고 아빠는 큰방에서 잔다. 작은방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내 공부방이고 하나가 바로 아빠가 날 데려간 곳이다. 그곳엔 장롱이 있었는데, 장롱을 열어 서랍 밑을 보자 작은 금고가 하나 있었다. 9자리 번호를 맞추면 열리는 간단한 금고였다. 아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 총이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901384596. 아빠는 몇 번이고 내게 확실히 기억하냐고 되물었다. 나에게 비밀번호를 외워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처음엔 잘 되지 않았으나 곧 쉽게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그제야 진정했다. 그리고는 이것은 불법이긴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고 했다. 난 그것이 일리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아빠가 어떻게 이 총을 구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잘은 몰랐지만 우리나라는 총기 소지가 금지였기 때문에 총을 구하는 일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아빠가 돈이 많으니 어떻게든 했겠지 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빠가 돈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가끔 친구들 집에 가면 바닥 장판부터 우리 집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집은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커도 쓸 사람이 없으니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대신 가구라든지 인테리어라든지 이런 것들은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총을 구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어차피 계속 생각해봐야 내가 방법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그 이후로 조금 더 개 같은 새끼들에 대해 말하다가 방으로 가서 잠들었다. 나도 잠자리로 돌아왔으나 왠지 흥분되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학교에 갔었다.

  그 뒤로 가끔 아빠가 나에게 맞는 비밀번호를 가르쳐줬나 하는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확인을 해보려면 얼마든지 해볼 수 있었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아 확인해 본 적은 없다. 물론 몇 번 정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진 적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모두 학교에 있을 때뿐이었고 시간이 지나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낮의 열정은 이미 사라지고 귀찮은 생각뿐이었다.

  난 시계를 봤다. 어느새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아빠도 아직 오지 않았다. 난 계속 베란다의 의자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조바심의 원인이 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끔 이유 없이 초조해지거나 안절부절 못 할 때가 있다. 이번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설사 내가 초조한 이유가 금고 때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비밀번호를 확인해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금고가 있던 방으로 향했다. 장롱을 열고 서랍을 보자 금고는 그때 넣어놨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난 조심스레 금고를 꺼내 비밀번호를 맞추었다. 9……. 0……. 1……. 3……. 한 자리 한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해 나갈 때마다 더욱 초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9자리 번호를 모두 맞춘 나는 금고 한쪽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스위치를 더 세게 눌러보고 금고를 탕탕 때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력한 번호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7번째 자리가 5가 아니라 4로 잘못 입력되어 있었다. 숫자를 고치고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금고는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고 안에는 매끈한 검정색의 권총과, 몇 개의 실탄과 소음기가 빨간 양탄자 위에 놓여있었다. 순간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방어를 위해 보관해둔 총에 소음기까지 있는 것은 이상했다. 또 다시 생각해보니 비밀번호가 9자리나 되는 것도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약간 불리한 조건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난 총을 들어 자세히 관찰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탄창에 노란색 실탄을 넣도록 되어 있었다. 빈총을 왼손 오른손에 옮겨 쥐어 보았다. 총의 차갑고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소음기에 눈길이 갔다.

  영화에서 밖에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소음기를 단 총은 정말 조용했다. 주의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픽, 하는 소리 밖에는 나지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소음기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밖은 어둡다. 지금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나무 그늘 아래라도 숨어있는거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난 잠시 고민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정말 이런 범행을 저질러도 걸릴 확률은 매우 미비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전적으로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난 베란다의 의자로 돌아갔다. 권총과 실탄, 그리고 소음기도 가지고 갔다. 의자에 털썩 앉아 시계를 흘끗 봤다. 1시 20분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오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결정은 빨리 내려야 했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곧 날이 밝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자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렸다. 언뜻 밖을 보았다. 주황색 가로등이 보였다. 그 밑으로 하얀 눈이 보드랍게 깔려있었다. 그 눈 위로 털썩 쓰러지는 시체를 상상한다. 그리고 쓰러진 시체의 밑에서부터 붉은 피가 번져 나오는 광경을 상상한다. 갑자기 이런 걸로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멍청해보였다.

  난 방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갖췄다. 상의는 후드 티에 역시 모자가 있는 검은색 재킷을 골랐다. 모자 두 개를 푹 눌러쓰고 거울을 봤다. 난 약간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살인이란 것은 아무래도 평범한 경험은 아니다. 어쨌든 모자는 더 눌러 쓰고 목도리도 차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이렇게 다 보여서는 곤란하니까.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고 실탄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있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아빠였다. 취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아빠보다 키가 컸다. 아빠는 잠시 날 올려다보았다. 나도 아빠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잠깐 생각해봤지만 아빠가 왔다고 해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난 신발을 마저 신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확 몸 안으로 들어왔다. 맑은 공기였다. 눈은 아직도 퍼붓고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많이 왔다. 난 눈발 속을 달렸다. 열심히 달리면 15분 정도 거리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권총을 들고 있는 것을 봤을까? 잘 모르겠다. 봤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요새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찼다. 숨이 차면 걷다가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큰 언덕을 넘자 곧 아파트 정문이었다. 난 달리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단지 내로 들어갔다. 아직도 좀 숨이 거칠었다.

  난 사람을 죽여도 될 정도로 으슥한 곳을 찾아 단지 내를 걸어 다녔다. 10분정도 걷다 보니 팔각정 뒤에 있는 좋은 덤불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을 보려는 순간 손목시계를 깜빡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낭패였다. 그렇지만 손목시계는 살인을 하는데 핵심적인 도구까지는 아니다. 난 팔각정에 앉아 총에 실탄을 채우며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초조했다.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러다 날이 밝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4시만 넘어도 위험하다. 현재 시각을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해지기는 처음이었다. 불안감을 잊기 위해 총을 쐈을 때의 장면을 자꾸 떠올렸다. 시체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이 베어 나오는 붉은 피……. 그 장면은 아무리 아무리 떠올려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사람을 발견하고 말았다. 팔각정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난 서둘러 팔각정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자였다. 난 나지막이, 아줌마. 하고 불렀다. 여자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날 봤다. 나이가 40정도 되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였다. 예쁘지도 않고 못생겼다고 하기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먼저 소리 지르지 마세요, 라고 말한 뒤 조용히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여자에게 보이도록 흔들었다. 여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다행히 소리 지르지 마라는 내 말을 알아먹은 것 같았다. 난 또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지는 않을게요, 라고 하며 날 따라오라고 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여자로서는 내 말이 사실이길 바라고 행동할 도리밖에 없었다.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소리는 내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이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계속 뚝뚝 떨어졌다. 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꼼짝 할 생각을 안 하기에 엄지손가락으로 총의 공이를 당겼다. 그제야 여자는 날 따라왔다.

  난 여자를 팔각정 뒤의 덤불로 끌고 갔다. 여자는 끊임없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했다. 난 여자가 정말 절실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알았다. 난 여자를 눕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 타 머리에 총을 갖다 댔다. 여자는 기겁을 했다. 그러나 끝내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난 방아쇠에 걸쳐져있는 검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총이 발사될 정도로 세게 당기지는 않았다. 난 갑자기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총구를 머리에서 심장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다시 여자의 눈을 봤다. 여자는 끊임없이 살려달란 소리를 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딸 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와 별로 상관없는 얘기였다. 다만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내가 당신을 살려줄 것 같나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살려달란 소리만 계속 했다. 그래서 다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겠지만 살려주면 너무 감사할 것 같다고 그랬다. 이 말을 할 때는 여자도 자제력을 잃어서 울음소리를 약간 크게 냈다. 난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여자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또 다시 속삭이는 소리로 ‘살려주세요’란 말을 반복했다. 난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자를 살려준다고 해도 그는 내가 없었으면 목숨의 위협 같은 것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목숨을 살려준다고 해서 내게 고마워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난 다시 정말 내게 고마울 것 같나요? 라고 물었다. 여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어 내가 만약 여자를 살려준다면 경찰에 신고할 것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난 여자의 눈을 똑바로 봤다. 여자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여자는 진심을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이 눈을 본다면 그렇게 느낄 것이다.

  난 결국 여자를 내버려둔 채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아빠는 자고 있었다. 난 권총에서 실탄을 빼고 소음기도 분리해 다시 금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웠지만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고 아빠가 나가자마자 난 TV를 켰다. 내 관심은 온통 그 여자가 날 경찰에 신고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뉴스란 뉴스는 모조리 봤다. 지금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 고마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까? 며칠 정도 뉴스에서는 내가 저지른 사건에 대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끈기를 갖고 기다렸다. 딱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집에 늦게 들어왔다. 아빠는 이미 들어와 TV를 보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TV를 봤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TV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펑펑 울고 있었다. 그러나 고마워하는 기색은커녕 나를 향해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내가 살인미수를 저지른 것이고 잡히면 무거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머리 속에는 그날 밤 여자의 눈과 지금 TV에 비치는 분노에 찬 여자의 모습만으로 가득했다. 경찰이 내가 저 여자를 다시 찾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10년? 20년? 약간 오래 걸린다고 해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그날 밤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거고, 금고의 비밀번호도 절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상상해본다. 이번에는 꼭 겨울이 아니라도 좋다. 캄캄한 밤, 이제는 세월이 지나 좀 더 늙은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 아줌마, 하고 여자를 불러 세우는 나를…….





얼마 전에 썼던 단편...
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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