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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바탈(AVATAL)

2010.01.18 10:0801.18

나는 방송녹화를 끝내고 기획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장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는 회전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영화잡지를 읽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얼굴에는 기름이 번들번들하다. 그의 기획사는 요즘 현금흐름이 아주 좋아졌다.

“어서와! 오늘도 방청객들 즐겁게 해줬나?”
“그럼요. 남을 웃기는 건 항상 쉬운 일이죠.”
“후후.......넌 나의 영원한 현금박스야.”

사장은 오늘따라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무언가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거나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한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길 거야.”

차는 외곽순환도로를 달려 구리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왔다. 점차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그의 원대한 계획, 아니 음모를 들었다. 사장은 지금까지 웃기는 개그맨들과 개성 있는 예능맨들로 이루어진 인적구성을 조금 바꾸어보려고 한다. 잘 생기고 예쁜 댄스그룹도 키우고 꽃미남 탤런트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인을 뽑아서 키우려면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경쟁기획사에 있는 될성부른 유망주를 스카우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판도라에 가주었으면 해.”
“판도라? 대한민국 최강의 연예기획사 판도라?”

판도라! 모든 연예인이 꿈꾸는 스타사관학교 판도라! 손톱자국처럼 작은 눈을 가진 전직 가수가 세운 판도라는 신인을 뽑을 때 외모와 재능을 철저히 검증하기로 유명했다.

“그래. 판도라에 네가 위장취업해서 꽃미남 댄스그룹 ‘언옵타니움’을 우리 기획사로 데려왔으면 좋겠다.”
“위장취업하라구요? 이 얼굴로? 뽑아줄 거 같아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지만, 내 외모는 사춘기를 지나서까지 오랜 세월 나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완전히 민주화를 이룬 이목구비와 달표면같은 피부,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작은 키는 보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거나 깔깔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내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느니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개그맨이 되었다.

“물론 판도라에서는 개그맨을 뽑지 않아. 하지만 네가 꽃미남으로 변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변신? 성형수술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아니. 아바탈을 쓰면 된다.”
“아바탈?”

사장은 기묘하게 생긴 탈바가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눈코입이 그려져 있기는 한데 눈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

“이게 뭐에요? 이래가지고 어떻게 앞을 보겠어요?”
“아바탈은 안동 하회마을의 비전(秘傳)이다. 아바탈을 쓰면 정신을 유체이탈시켜 원하는 육체로 집어넣을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가능해. 황우순 박사에게 부탁해서 네 분신도 이미 만들어놓았다. 지금 황우순 박사의 연구실로 가는 중이야.”

나의 분신은 눈을 감은 채 거대한 수조 안에서 둥둥 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이국적인 얼굴,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너의 분신 <다니엘>이다. 마음에 드나?”
“잘 생겼군요.........”
“이리와. 어서 아바탈을 시험해보자. 박사님, 다니엘을 기계에 연결해주세요.”

아바탈은 정말 이상한 물건이었다. 얼굴에 씌우자마자 빛의 터널이 보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버둥대다가 정신을 잃었다.

“어이, 일어나. 정신차려!”

누군가 나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내 자신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땅은 더 멀리 있었고 몸은 가뿐했으며 얼굴은 매끈했다. 나는 거울에 내 자신을 비춰보고 입을 떡 벌렸다.

“다니엘 헤니라고 합니다.”

나는 판도라 사장과 악수를 했다. 그의 작은 눈이 더욱 작아졌다.

“반갑습니다. 당신 외모라면 연기를 못해도 먹어줄 겁니다. 다음 달에 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시켜 줄게요.”

나는 판도라에 소속된 식구들을 소개받았다. 방송국에서 슬쩍슬쩍 훔쳐보았던 미녀들이 손을 잡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휴게실에 갔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미소년들이 떠들고 있었다. ‘언옵타니움’이었다. 내 목표다.

“다니엘 헤니씨죠?”
“반가워. 네가 ‘유니자장’이냐?”
“전 ‘최강잠봉’이에요. 얘는 ‘시어주스’구요.”

난 언옵타니움 멤버들과 금방 친해졌다. 미남들끼리는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들은 내게 꽃미남들의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 다양한 모임, 많은 여자들, 화려한 패션, 격렬한 춤, 그리고 하늘같은 인기, 인기, 인기. 개그맨의 인기와는 또 다른 강렬하고 짜릿한 인기였다.

아바탈은 76시간 내에 벗지 않으면 영혼이 영원히 분신 속에 고착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장은 내가 죽어버리기 전에 아바탈을 벗겨냈다. 아바탈을 벗겨내면 다니엘 헤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때문에 사장은 되도록 늦은 밤이나 새벽에 탈을 벗겼다.

“어떠냐? 언옵타니움은 설득해봤냐?”
“아직 판도라를 배신하게 만들 정도로 친해진 건 아닙니다. 시간을 주세요.”

솔직히 난 그들을 우리 기획사로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판도라는 천국이었다. 아니, 다니엘 헤니의 삶이 천국이었다. 처음에는 분신으로서의 삶이 꿈같았지만 지금은 본체로 사는 것이 악몽같았다. 무엇이 진짜 삶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판도라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관습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상대와 내키는대로 <교감>한다는 것이다. 시어주스에게 <교감>에 대해 물었더니 녀석은 깔깔대고 웃었다.

“교감은 예민한 접속단자를 상대방에 끼워서 감각을 주고받는 거야. 하나가 되는 거지.”

나는 시어주스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날 오후에 <교감>을 하게 되었다. 소녀댄스그룹의 멤버인 ‘네이티리’와 우연히 방송국에 동행을 하게 됐는데, 돌아오는 길에 네이티리의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네이티리는 나보고 <교감>을 하자고 했으나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쩔쩔맸다.

“저어.....시어주스에게 듣기는 했는데 접속단자를 끼워야 한다고.....근데 전 단자가 없는데....”
“큭큭....오빠 사타구니에 달려 있는 게 접속단자야.”

그래서 나는 그녀와 <교감>하게 되었다. 아 언옵타니움 멤버들은 지금까지 그 많은 여자들과 이 <교감>을 했다는 말인가! 판도라의 그 많은 미녀들과, 나이트클럽에서 부킹한 그 많은 여자들과! 나는 결심했다. 영원히 내 분신 속에 살기로.

“사장님! 사장님! 큰일 났어요.”

‘갈갈이’ 박준형이 뛰어 들어왔다. 사장은 스포츠신문을 읽다가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녀석이....아바탈을.....아바탈을.....”
“뭐? 아바탈이 어쨌다고?”

대한민국 일류 개그맨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는 아바탈 안쪽에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얼굴에 붙여버린 뒤 영원히 잠들었다. 그의 시신은 서울 변두리의 작은 모텔에서 발견되었다. 사장은 기획사에 남아있던 아바탈이 그가 바꿔치기한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성 있는 외모를 가졌지만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풍부한 표현력과 번개 같은 순발력, 자신의 기획사를 지금의 회사로 성장시킨 걸출한 개그맨. 사장은 아쉬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애칭을 목놓아 불렀다.

“옥동자야~ 돌아와~”

The End.

AVATAL - director Kim Mong


김몽
댓글 2
  • No Profile
    김양현 10.01.20 13:10 댓글 수정 삭제
    같은 상상력을 이용해서 다르게 비트셨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좀 더 진지하게 전환시켜보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ㅇ_ㅇ
  • No Profile
    김몽 10.01.20 13:19 댓글 수정 삭제
    아바타 보고나서 우스개 한 번 써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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