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멘(Amen)

2010.01.17 02:1601.17

  이젠 정말 그 수밖에 없었다. 검을 뽑을 수 없었다. 마법으로 상대하려 했지만 도통 스펠링이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그것만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헬리아 여신마저 내게 독촉하고 있었다. 정말 저 무지렁이들에게 이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인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미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참고 있었을 뿐이다. 구름이 달빛을 다 가렸지만 저자들은 오히려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 저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다.

  대현자 아시우스는 상대의 실력에 맞게 상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그의 생생한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써서는 안 되는 방법이었다. 난 이미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특히 성녀 헬레나의 축복이 깃들어 있는, 살로몬 대륙 최고의 갑옷이었다. 반면 내 앞의 장정 세 명은 고작 검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레이디 오지은 양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조직의 상징인 정장이라고 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라고는 긴 쇠막대기랑 나무 막대기가 전부였다.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동네 날건달들에 불과한 차림이었던 것이다. 못해도 가죽갑옷은 입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펄럭이는 옷깃으로 훤히 보이는 살갗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저런 무방비한 상대들에게 가혹한 신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자세를 바로하자 그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외쳤다.

  “어이, 기사양반! 왜? 마음처럼 안 되나보지?”
  “왜 그래요, 윌리엄 아저씨! 어서 그 주문을 쓰라니까요!”

  레이디 오지은 양이 내 팔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변하였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모습은 한시라도 빨리 저들을 퇴치해야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불쌍한 레이디! 어쩌다 그녀가 저런 나부랭이들에게 발록을 만난 것과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것인지!

  그래, 사실 발록을 잡으러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성녀 헬레나가 신탁을 받은 후로 정확히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살로몬 대륙에서는 이미 그녀의 예언에 따라 발록의 등장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발록이 어디에서 등장하느냐가 정확하지 않다는데 있었다. 성녀의 예언에 따르면 ‘수많은 음모가 생성되는 촛불 밑에서 그는 등장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장소가 사실, 너무 많았다. 발록을 상대하기 위해 아틀라스 성에 모든 물자와 용자들을 소집하였지만, 정작 그곳에서 등장한다면 크게 곤란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 논란은 아틀라스에서 타국을 침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음모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크게 번져갔다. 지혜왕 안티우스는 다른 장소로 옮겨서라도 이 난관을 타계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빠르게 사분오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우려를 증명이라도 하듯, 발록은 아틀라스 성에서 나타났다. 아틀라스는 내부에서 등장한 적에게 너무 쉽게 무너졌다. ‘천년의 고도가 지옥도로 변하는구나!’라는 안티우스의 유언만이 당시의 참담함을 전해줄 뿐이었다.

  아틀라스 성이 단숨에 함락되자 성도 그람시에서 여론을 재빨리 수습하고 총 반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렇지만 이미 수많은 물자와 용자들이 아틀라스 성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충격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유격대를 편성해서 발록 군단의 진군을 조금이라도 저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골머리를 썩게 되었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지원을 하게 되었다. 비록 성도 그람시의 수문장에 불과했지만, 기사 작위를 받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성녀 헬레나의 축복이 깃든 갑옷과 무적왕 카스트로가 썼다는 마법 검을 얻었다. 이왕이면 발록을 무찔러주길 바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레이디 오지은 양이 내 허리춤의 검에 손을 데었다.

  “안돼요!”
  “꺄!”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뒤로 튕겨 나갔고, 하필이면 그곳에 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들은 레이디가 자기들 곁으로 온 것을 보고도 멍하니 내 검을 바라봤다. 마법 검은 단순히 마력이 깃들어서 마법 검이 아니었다. 이 검은 깃들여 있는 마력만큼 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손에 닿는 것조차 싫어하는 특성이 있었다. 레이디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어이 형씨. 그건 뭔고?”

  머리를 빡빡 민 남자가 나무 막대기로 어깨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이 검은 성왕…….”
  “아따, 거시기 성왕이고 뭐고 간에. 뭐냐고?”

  나무 막대기가 가슴에 닿았다. 빡빡이가 막대기로 밀고 있는 것 같았다. 빡빡이는 히죽 웃으면서 말하였다.

  “움마, 이 아저씨가 버티네? 운동 좀 했나보구만. 히히!”

  선글라스를 낀 녀석이 쇠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형님, 운동을 했건 안했건 중요하지 않잖소. 후딱 일 끝내고 지은이 데리고 갑시다.”
  “아우가 성격이 많이 급하고만. 아우, 이런 녀석이랑은 좀 놀아 봐야지.”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녀석이 레이디 곁에 머물렀다. 빡빡이와 선글라스는 각자가 든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지만-를 흔들면서 내 주변을 돌았다. 검을 뽑아야 하나? 성왕 히에론 전하께서 정의가 허락하는 곳에서 이 검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냥 사정 보지말고 죽여요!”
  “뭘 죽여, 썅! 닥치고 가만 안 있어?”

  칼자국이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레이디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때 빡빡이가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정확히 머리를 향해 왔기 때문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무언가 둔탁한 것이 목덜미를 내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목 보호대에 걸린 듯 큰 충격은 전달되지 않았다. 바닥으로 몸이 숙여지는 것을 이용해서 앞으로 굴렀다. 빡빡이와 선글라스 사이를 벗어났다. 그렇지만 쉽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뒷목이 저려 와서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목 보호대가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을 순간이었다. 그 상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자 모골이 솟구쳤다.

  “아따, 정말 운동했는갑네.”
  “지금 빨리 끝내버리죠.”
  “아우는 참말로 성질이 급하고만. 형님의 즐거움을 그렇게 뺏고 싶은가?”
  “큰형님이 기다리실까봐 그러지요.”
  “허허, 별 걱정을 다하고 그라는구만. 아우의 말을 들어서 그럼 이제 끝내볼까?”
  “아저씨!”

  뒤를 돌아봤다. 빡빡이의 나무 막대기가 하늘 높이 들려 있었다. 왼쪽으로 몸을 피함과 동시에 붕하는 소리와 섬뜩한 기운이 지나갔다. 동시에 선글라스의 쇠막대기가 배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재빨리 배를 빼고 뒤로 굴러 그 둘과 거리를 두려했지만, 빡빡이와 선글라스의 연계공격에 쉽게 간격을 만들 수 없었다. 플레이트메일을 입고 바닥을 몇 번 구르니까 숨이 턱까지 차왔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지만 저들의 공격은 점점 날카로움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선글라스의 쇠막대기가 시야를 가득 채우며 들어왔다. 퍽! 손으로 잡았지만 뒤로 벌렁 넘어졌다.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쇠막대기를 쥐었지만-어떻게 만들었는지!-둥글게 되어있어서 곧 손에서 빠져나가버렸다. 머리를 향해 나무 막대기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 끈질기게 머리만 노리는 자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오른팔로 막았다. 딱! 나무 막대기는 두 동강이 났고, 그 중 하나는 내 몸에 떨어졌다. 재빨리 그것을 쥐고서 달려오는 선글라스에게 던졌다. 선글라스는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에 맞고 말았다. 단발마를 남기고 뒤로 벌렁 넘어진 그는 쥐고 있던 쇠막대기도 놓쳤고, 그것은 저만치 떨어져버렸다. 그는 머리를 쥐고 뒹굴고 있었다. 재빨리 뛰어가서 쇠막대기를 손에 든 그 순간 칼자국이 쇠막대기를 휘둘러 배를 강타했다. 신음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지만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어서 손에 쥔 쇠막대기를 휘둘러 그를 쫓아낼 수 있었다.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들과 나는 갑옷을 입고, 안 입고를 제외하고는 동등한 입장이었다. 레이디는 어느새 내 뒤에 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검에 대한 것을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습니다. 제 죄는…….”
  “아우, 죄가 뭐고 간에 어서 검을 뽑으라니까요! 단칼에 죽이세요, 아저씨!”
  “아, 당신은 정말 정의가 넘치시는군요. 하지만 전 이 쇠막대기로도 충분히 저들을 제압할 수 있답니다.”
  “제압이 아니라 살인! 살인 몰라요? 검도 가지고 있으면서!”
  “아름다운 레이디, 당신의 입에서 살인이라는 핏빛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장미꽃잎 같은 그 입이 피로 물드는 모습을 볼 수가 없군요!”
  “아무튼 어서, 어서!”

  레이디 오지은 양과 간만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남자들은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빡빡이는 얼굴이 벌겋게 변했는데 이마에 굵은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는 손에 든 나무 막대기를 집어던지더니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냈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결투를 원한다면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어라!”
  “아저씨, 정당방위! 정당방위에요!”

  선글라스는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자기도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들었다.

  “형님, 그러니까 제 말을…….”
  “닥쳐! 저 개새끼를 그냥!”

  남자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늑대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마구 짖어 대는 것까지 똑같다고 하면 저들이 화를 내려나? 쇠막대기는 너무 가벼웠고, 손잡이가 없어서 빠져나갈 것 같아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렇지만 레이피어보다 조금 무거운 검이란 생각을 하면서 남자들을 겨누었다. 레이디는 뒤에 바싹 붙어서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정당방위는 처벌 안 받는데요! 이러다 아저씨가 죽겠어요!”
  “오, 레이디. 저런 빵 자르는 칼은 이 갑옷에 상처조차 내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그 정당방위란 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정당방위 몰라요? 아저씨 아는 게 대체 뭐에요? 어, 그래! 도전장! 도전장과 같은 거예요!”
  “편지도 안주고 도전했다는 것입니까? 장소와 시기, 방법도 알리지 않았단 말입니다!”
  “날건달들이 그런 거 말하고 싸우던가요?”
  “저년 주둥이를 확 찢어버릴테다! 뭐라고 이년아?”

  레이디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욕들이 튀어나왔다. 남자의 중요한 그곳을 어떻게 한다는 욕은 그중 최고였다. 어쨌든 정말 저들이 날건달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싸움 방식은 모조리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날건달이라고 해도 갑옷 없이 투니카 같은 옷을 입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에 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발록 군단을 저지하러 가는 길은 영웅 서사시의 그것처럼 험난하지 않았다. 발록이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뜻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몬스터들과 마주쳐서 싸우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그것은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도 그람시에서 아틀라스 성까지는 한 달 보름의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평소 여행을 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었다. 강행군을 해서라도 빨리 아틀라스 성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찰나, 한 노파가 다가왔다. 그 노파는 검은 로브를 입었고, 허리가 너무 구부러져 지팡이를 집고 서 있어야만 했다. 뾰족한 매부리코와 뼈마디가 보이는 손, 쉬어서 뭐라 말하는지조차 불분명한 목소리. 영락없는 마녀의 행태였다. 그렇지만 종종 현자들이 영웅을 시험하기 위해 마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노파를 정중히 대하다 아틀라스 성까지 단숨에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다만 성공률이 너무 적어 오히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그래, 그것이 내 최악의 실수였다. 단지 아틀라스 성까지 가면 된다는 일념 때문에 그 함정을 와락 끌어안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어서 해봐라 는 내 성화에 노파가 오히려 당황하였다. 일일이 그 방법이 가지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없었다. 결국 노파는 나를 성문크기만한 거울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간절히 바라면 단숨에 그곳에 도착한다는 말을 해주고 사라져버렸다. 그 거울을 통과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레이디 오지은 양 이었다.

  비록 그녀가 맨 처음 만났을 때 ‘오빠 놀다가’라는 창부들이 하는 말을 했다는 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천사였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곳에 떨어져 고아와 다를 바 없는 내게 여러 가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또 다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고, 동시에 궁극의 강신주문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맨 처음 이 날건달들에게 아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갈등했던 것은 궁극의 강신주문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었다. 다행히 내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아직 대현자 아시우스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과 내게 커다란 행운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때 빡빡이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왔다. 혼자라면 슬쩍 피하면 상관없었지만, 뒤에 레이디가 숨어 있었다. 아까처럼 레이디를 지키지 못하고 저들에게 보낼 수 없었다. 왼팔로 레이디를 오른편으로 밀면서 쇠막대기로 빡빡이의 허리를 내리쳤다. ‘헉!’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뒤에서 선글라스가 언제 들었는지 돌맹이를 내게 던지는 것이 보였다. 가볍게 피하자마자 선글라스가 휘두르는 칼에 뺨이 베였다. 선글라스에게 쇠막대기를 휘둘렀지만 이미 바닥을 가볍게 굴러 저만치 피하였다.

  칼자국이 안보였다.

  “아저씨, 아마 패거리를 부르러 갔을 거예요. 어서 도망가요! 어서!”
  “기사는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습니다!”

  선글라스는 쉴 틈 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두 명이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들 거란 말이에요!”
  “그때는 레이디가 알려주신 주문으로 물리치면 될 테니 걱정 마세요!”
  “이 답답한 양반아! 내가 여기서 살아도 너보다는 많이 살았으니까 내말 들어!”

  말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선글라스는 그런 우리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이 재빨리 쫓아왔다. 쇠막대기를 휘둘러 선글라스를 위협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골목골목에 어둠을 밝혀주는 마법 불들을 의지하면서 여기저기 도망 다녔지만 선글라스는 끈질기게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도망가다 보니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순간, 네모로 된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길이 나왔다. 레이디는 좌우를 살피더니 네모가 가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선글라스가 따라오지 않았다.

  “하하! 대단하십니다, 레이디! 그 날건달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멍청한 소리, 헉헉! 하지 말고 어서 따라와요! 헉헉!”

  한 명의 여전사 같은 레이디를 보고 있자니, 지난날 성계대전 때 활약한 성기사 플로라가 떠올랐다. 비록 신화로만 만나야 했지만, 그녀에 대한 묘사는 레이디 오지은 양과 똑같았다. 네모는 너무 커다란 굉음을 냈기 때문에 혼이 빠지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그녀는 너무 익숙하다는 듯이 오로지 뛰는 것만 집중하였다. 그러다 점차 길이 밝아지더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있는 곳으로 갔다. 성 안에 장날이거나 축제 때가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그런 인파였다.



  안이 훤히 보이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가 잠깐 있으라고 하고 조금 지나자 무언가 가져왔다. 쟁반에 직접 음식을 받아오는 것이 영 볼썽사나웠지만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레이디의 말에 그냥 기다렸다.

  “햄버거라는 거에요.”

  그녀가 재빨리 종이를 벗기더니 그 안에서 나온 빵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알았으니까 그냥 먹어요. 아저씨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그게 격식에 맞춰 이야기하다보면 그렇게 되는군요. 주의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위를 살피면서 햄버거를 먹었다. 레이디 오지은 양을 만난 곳도 이렇게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다. 다른 것은 이 음식점은 하얀 마법 불로 밝게 안을 밝힌 것과 다르게 그곳은 붉은 마법 불로 어두침침하게 밝히고 있었다. 처음에 이 세상에 왔을 때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도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몇 마디를 주고받자마자 그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을 듣던 와중에 아까 봤던 선글라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선글라스는 왜 일을 안 하고 있냐고 따졌고 나보고 뭐하고 언제 나갈 거냐고 물어봤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레이디가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말한 후부터 시비가 붙었다. 선글라스를 때려눕히고 -맹세코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디와 함께 도망치던 중 빡빡이와 칼자국을 만나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돌아가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 방법만큼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거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실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어쩌면 어린왕자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죽는 것이, 었나? 아무튼! 방법은 있을 거예요. 근데 저 반드시 구해주고, 아니 데리고 가야해요. 아셨죠?”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리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햄버거를 한입 베어 먹었다. 창 밖에 빡빡이가 보였다. 햄버거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섰다. 빡빡이는 뒤에 서너 명의 졸개들을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 씨발년이 어딜 튀었나 했더니 고작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쳐 먹고 있어? 그래, 배는 고픈가보지?”
  “밥은 먹게 해줘야 할꺼 아냐?”
  “뭐야! 입만 살아가지고.”
  “네 상대는 나다.”

  빡빡이는 실실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졸개들도 그를 따라서 웃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어이 형씨. 형씨가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냥 보내줄 생각 없었소. 각오 단단히 하쇼. 아까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응께 말요.”

  졸개들은 모두 다섯 명. 저마다 손에 쇠막대기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가 잘록하고 위로 갈수록 굵어지는 쇠막대기도 있었다. 빡빡이는 쇠막대기를 들고 내게 겨누면서 말하였다.

  “나오소. 여기서 하믄 여그 장사하는데 피해도 주고 하니까.”
  “아저씨, 가면 안 돼요. 애들 있는 데로 가서 아저씨 다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녀는 내 왼팔에 바싹 붙어서 애원하였다.

  “하지만 저자의 말도 틀리지 않아요. 여기 있으면 괜한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랑께 어서 가자니까 그려. 지은이 넌 어디 도망갈 생각 말어. 그래봐야 내 나와바리에서 도니까, 흐흐흐!”
  “아저씨, 그냥, 네? 그냥 여기 있어요. 경찰 오면 우리 다 살수 있다니까요!”

  경찰? 그녀를 바라보자 환해진 얼굴로 내 귀를 끌어당겼다.

  “경찰이라고 레인저 같은 거예요. 아니, 각 성의 경비대! 네! 경비대에요. 그 경비대들이 오면 저 녀석들 크게 뭐라 못하고 도망갈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요.”

  듣고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끼고서 빡빡이를 바라봤다. 빡빡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쇠막대기를 다른 손으로 잡았다 놨다를 반복하다가 말하였다.

  “어이 형씨.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니까 왜 그렇게 순진하게 구오? 그 년이…….”
  “레이디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하따, 고마 대갈통을 확 깨버릴랑께 후딱 나오라고! 레이디고 뭐고 간에!”
  “우리 아저씨가 니 말을 들을꺼 같아? 흥이다!”
  “넌 시방 닥치고 있으랬지! 아무튼 우리 큰 형님께서 도전장? 그래, 그걸 신청하셨으니까 그러는 거 아뇨?”

  도전장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런 식으로 정식으로 도전을 청한다면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레이디가 내 왼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말하였다.

  “안돼요! 안돼! 제발, 저 도전장이란 말에 솔깃해진 것은 아니겠죠? 가면 안돼요. 도전장이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런 도전장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아저씨 꼬이려고 하는 거라고요!”
  “도전장을 받았을 때 거부하는 것은 크나 큰 불명예입니다.”
  “하지만…….”

  울지 않고 있는 것이 용한 눈을 바라보니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더 용기가 용솟음쳤다.

  “걱정 마세요. 만약 정식으로 도전을 해 온 것이라면 제가 검을 뽑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을 따라 간 곳은 아까 싸웠던 장소였다. 언제 왔는지 선글라스와 칼자국도 와 있었고, 그들 사이에 몸짓이 왜소한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 남자를 보면서 그녀가 말하였다.
  
  “아저씨, 저 사람은 마왕이에요, 마왕. 어둠을 지배하는 마왕이라고요.”
  “발록?”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발록이라고 하기에 그는 평범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폴리모프 마법으로 모습을 변형시켰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 검은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레이디가 내 등을 마구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네, 발록. 발록이 꼭 머리에 뿔있고, 몸짓이 거대한 녀석이라 생각하셨어요? 아니에요. 저런 조그만 영감탱이가 발록의 진짜 모습이에요.”

  그 남자 주변으로 졸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미리 와 있던 졸개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도망가요, 네?”
  “그렇다면 더 도망칠 수 없어요.”

  레이디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무릎에 얼굴을 박고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 맘대로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듣고 말야! 아저씨 죽어도 난 몰라요! 아니, 나도 같이 죽게 생겼으니까 아저씨가 반드시 책임져요! 책임져!”
  “레이디 오지은 양. 걱정하지 마세요. 저자가 발록이라면 강신마법을 사용해서 무찌르면 되니까요.”
  “강신마법이고 나발이고 난 몰라요! 으앙!”

  하늘을 봤다. 어둑어둑했지만 아직도 달은 구름에 가려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고 강신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이디를 뒤로 하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서 발록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발록의 진군이 느렸던 것은 이곳에서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를 무너뜨린다면 살로몬 대륙에 가지 못하더라도 크나 큰 공을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헬리아 여신의 은총이 이 세계에도 닿는 이 경이로운 순간을 또 누구에게 전할 수 있으리오!

  졸개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싸울 생각이 없는 듯 건들거리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천천히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검광이 스르릉,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졸개들은 검을 보고서 움츠러들었는지 그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때 졸개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그 남자가 다가왔다.

  “난 한태성이다.”

  그는 오른손을 올렸는데 조그만 쇳덩이를 들고 있었다.

  “피해요!”

  레이디의 비명과 함께 재빨리 몸을 날렸다. 탕! 어마어마한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 쇳덩이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도전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탕!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그는 내게 쇳덩이를 겨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손이 향하는 곳에는 레이디 오지은 양이 있었고, 그녀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탕! 그녀의 몸이 요동쳤다. 바닥은 점점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여급 따위를 미끼로 내게, 내게 도전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야!”

  탕! 그녀의 몸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날 지키기 위해 내지른 비명으로 날 살릴 수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지킬 수 없었다. 내 뒤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 그 중요한 사실을 난 망각하고 있었다. 졸개들은 그 보다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탕! 발록. 탕! 발록. 탕!

  “네 놈을 가만 두지 않겠다!”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였다. 십자가의 형태를 유지한 채 무릎을 꿇고, 검 손잡이가 이마에 닿도록 한 뒤 주문을 외웠다. 레이디 오지은. 그녀가 내게 알려준 이 세계의 최고 마법인 강신마법을 말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졸개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있었다. 발록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쇳덩어리를 내게 향하였다. 마음속으로 헬리아 여신의 은총을 빌었다. 손이 뜨거워지고 검을 쥐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검 끝을 하늘로 향하였다. 하늘이 갈라지고 달은 해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아멘.”

  검을 그들에게 내리쳤다. 달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들을 향해 무섭게 내리꽂혔다. 콰콰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주변이 하얗게 변하였다. 온통 빛으로 둘러싸이고 있었다. 남자들의 비명소리. 발록의 괴성. 다시 들리는 폭발음.
따뜻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서지거나 파괴된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발록과 그 졸개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빛이 번쩍거렸는데 빨갛고 파란 빛이 왔다갔다했다. 요정들이 등장한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지만 쉽게 일어설 수 없었다. 온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다리를 삐었는지 쉽게 움직일 수 없어서 절룩거려야 했다. 레이디 오지은 양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는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몰려들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통제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렇지만 레이디만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녀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를 품에 안았다.

  혼자 남았다.

* 아멘(Amen) : 기독교적으로 여러 의미를 함축해서 담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되길 믿습니다." 의 뜻만을 의미합니다.
댓글 1
  • No Profile
    Dominique 10.01.17 23:25 댓글 수정 삭제
    재밌습니다. 하지만 여운보다는 허무함이 남는 결말이네요. 분명 무언가 뒷 내용이 더 있을법한. 왠지 급하게 뚝 잘라 마무리 지은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판타지에서 건너온 기사와 현대의 기묘한 조합은 퍽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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