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뚝에 머리카락이 붙어서 털어냈는데 이상하게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카락이 아닌 팔에 난 털이었다. 아무래도 보기에 흉측해서 떼어내려고 하자 털이 비명을 질렀다. 털 주제에 비명을 지르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털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저를 뽑으려고 하나요?”
털이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깜짝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30년을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놀랄 일은 충분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일단 말하는 털은 처음 봤으므로 좀더 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저는 당신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았는데 말이죠.”
털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화가 난 모양이다.
“그거야… 이대로 두면 보기 흉하잖아.”
아무래도 팔뚝에 이런 긴 털이 나 있는 것은 보기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팔에는 이런 털이 없을 테니까.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저의 목숨을 앗아갈 작정인가요?”
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이 당황하고 털이 나를 취조하는 느낌이었다. 털 주제에. 그냥 확 뽑아버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도 내 몸에서 난 털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당신이 지금까지 저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죠?”
내가 털을 위해 해준 게 뭐가 있었더라. 잠시 이것 저것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발영양제를 팔뚝에도 바를 걸 그랬다. 적어도 머리카락을 위해서 해준 것은 있지만 팔뚝에 난 털을 위해 해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팔뚝에 난 길다란 털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어쩐 연유로 내 팔뚝에서 태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평생 관심이라곤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자랐을 텐데. 간신히 눈이 마주친 내가 다짜고짜 자신을 뽑으려 하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게다가 주변 털과 길이가 달라 분명 자라나며 차별도 받았을 게다. 머리에 났으면 머리카락과 어울려 샴푸며 린스를 받고 행복하게 자랐을 텐데 단지 팔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괄시당하는 거다. 나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히 할말이 없겠죠.”
털은 우쭐대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털을 바라보았다. 털은 바람을 타고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주변의 뻣뻣한 털과는 매우 달랐다. 마치 태생부터 다른 어딘가의 왕족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곡선이었다.
“대체 어딜 보는 거예요?”
아름다움에 취해 털의 모근을 바라보자 털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모근이라고 해 봤자 내 몸과 털이 연결된 1mm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일 뿐인데, 털은 그 부위가 내 눈에 보인다는 게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 듯 했다.
“따… 딱히 모근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니야.”
털은 자신의 긴 몸을 이리 저리 휘감아 모근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털 주제에 참 여러 가지를 한다고, 차마 겉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좋아. 뽑지는 않을게.”
나는 한숨을 쉬었다. 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단지 내가 더 힘이 세다는 이유로 털을 뽑아버리는 건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털을 뽑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나두어서는 곤란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 긴 털이 발각된다면 나는 분명 창피를 당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쓸데없는 프로그램에 나올지도 모른다. 유명세를 타는 것은 싫지 않지만 이런 일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 털을 뽑지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 두 가지 결정사항을 만족시킬 제 3안을 생각해내야 한다. 인간의 머리는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니까.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줘,”
“… 말해봐요.”
털도 자신의 입장을 알고 있는지 꽤 얌전해져 있었다. 성격은 조금 까칠해도 말은 통하는 것 같아 일단 안심이 되었다.
“팔에 반창고를 붙일게. 낮에 돌아다닐 때는 반창고를 붙일 테니까 갑갑하겠지만 그 안에 몸을 숙이고 있어줘.”
털은 잠시 고민하다가 내 표정을 살짝 훔쳐보았다. 나로서도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까다로운 것이면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매일 저녁, 저도 샴푸를 해주세요.”
뭐야- .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금새 표정을 숨기고 짐짓 곤란한 어조로 대답했다. 협상을 할 때 속내를 감추는 건 기본이니까.
“음 샴푸라…”
대답을 미루자 털이 조금 초조해하는 듯 보였다. 너무 오래 끌면 정말 어려운 요구를 할지도 모르니 나는 크게 인심을 쓰는 척하며 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매일 샤워할 때 샴푸를 해줄게. 그리고 특별히 린스로 행궈주지.”
“와아. 정말이요? 정말 린스도 해줄 거에요?”
샴푸는 물론 린스까지 해준다는 이야기에 털은 완전히 감동한 듯 보였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에 발라주지 않은 게 오히려 미안해졌다.
털과의 협상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매일 외출할 때 반창고를 붙이는 일은 번거롭겠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움츠리고 있을 털에 비하자면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막 잠들려고 할 때에 털이 소근거렸다.
“저는 핑크색이 좋아요.”
“… 뭐가?”
“반창고 색 말이에요.”
핑크색 반창고라. 나는 털과 함께 할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잠들었다.
“어째서 저를 뽑으려고 하나요?”
털이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깜짝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30년을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놀랄 일은 충분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일단 말하는 털은 처음 봤으므로 좀더 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저는 당신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았는데 말이죠.”
털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화가 난 모양이다.
“그거야… 이대로 두면 보기 흉하잖아.”
아무래도 팔뚝에 이런 긴 털이 나 있는 것은 보기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팔에는 이런 털이 없을 테니까.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저의 목숨을 앗아갈 작정인가요?”
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이 당황하고 털이 나를 취조하는 느낌이었다. 털 주제에. 그냥 확 뽑아버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도 내 몸에서 난 털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당신이 지금까지 저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죠?”
내가 털을 위해 해준 게 뭐가 있었더라. 잠시 이것 저것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발영양제를 팔뚝에도 바를 걸 그랬다. 적어도 머리카락을 위해서 해준 것은 있지만 팔뚝에 난 털을 위해 해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팔뚝에 난 길다란 털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어쩐 연유로 내 팔뚝에서 태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평생 관심이라곤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자랐을 텐데. 간신히 눈이 마주친 내가 다짜고짜 자신을 뽑으려 하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게다가 주변 털과 길이가 달라 분명 자라나며 차별도 받았을 게다. 머리에 났으면 머리카락과 어울려 샴푸며 린스를 받고 행복하게 자랐을 텐데 단지 팔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괄시당하는 거다. 나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히 할말이 없겠죠.”
털은 우쭐대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털을 바라보았다. 털은 바람을 타고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주변의 뻣뻣한 털과는 매우 달랐다. 마치 태생부터 다른 어딘가의 왕족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곡선이었다.
“대체 어딜 보는 거예요?”
아름다움에 취해 털의 모근을 바라보자 털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모근이라고 해 봤자 내 몸과 털이 연결된 1mm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일 뿐인데, 털은 그 부위가 내 눈에 보인다는 게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 듯 했다.
“따… 딱히 모근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니야.”
털은 자신의 긴 몸을 이리 저리 휘감아 모근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털 주제에 참 여러 가지를 한다고, 차마 겉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좋아. 뽑지는 않을게.”
나는 한숨을 쉬었다. 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단지 내가 더 힘이 세다는 이유로 털을 뽑아버리는 건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털을 뽑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나두어서는 곤란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 긴 털이 발각된다면 나는 분명 창피를 당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쓸데없는 프로그램에 나올지도 모른다. 유명세를 타는 것은 싫지 않지만 이런 일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 털을 뽑지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 두 가지 결정사항을 만족시킬 제 3안을 생각해내야 한다. 인간의 머리는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니까.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줘,”
“… 말해봐요.”
털도 자신의 입장을 알고 있는지 꽤 얌전해져 있었다. 성격은 조금 까칠해도 말은 통하는 것 같아 일단 안심이 되었다.
“팔에 반창고를 붙일게. 낮에 돌아다닐 때는 반창고를 붙일 테니까 갑갑하겠지만 그 안에 몸을 숙이고 있어줘.”
털은 잠시 고민하다가 내 표정을 살짝 훔쳐보았다. 나로서도 최대한의 양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까다로운 것이면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매일 저녁, 저도 샴푸를 해주세요.”
뭐야- .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금새 표정을 숨기고 짐짓 곤란한 어조로 대답했다. 협상을 할 때 속내를 감추는 건 기본이니까.
“음 샴푸라…”
대답을 미루자 털이 조금 초조해하는 듯 보였다. 너무 오래 끌면 정말 어려운 요구를 할지도 모르니 나는 크게 인심을 쓰는 척하며 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매일 샤워할 때 샴푸를 해줄게. 그리고 특별히 린스로 행궈주지.”
“와아. 정말이요? 정말 린스도 해줄 거에요?”
샴푸는 물론 린스까지 해준다는 이야기에 털은 완전히 감동한 듯 보였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에 발라주지 않은 게 오히려 미안해졌다.
털과의 협상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매일 외출할 때 반창고를 붙이는 일은 번거롭겠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움츠리고 있을 털에 비하자면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막 잠들려고 할 때에 털이 소근거렸다.
“저는 핑크색이 좋아요.”
“… 뭐가?”
“반창고 색 말이에요.”
핑크색 반창고라. 나는 털과 함께 할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