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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커피

2010.01.05 01:1501.05

슈퍼에 다녀 오던 나는 우편함에 꽂혀 있는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발신자와 주소가 영어로 쓰여 있는 국제 우편이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보낸 이의 주소가 온통 영어로 되어 있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누군가가 나에게-분명 손으로 직접 썼을-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더 당황스러웠다.
‘woo-suk, kim’
김우석. 내가 꼬불꼬불한 외국 글자들 속에서 내 친구의 이름을 발견 한 것은 편지를 손에 쥔지 한 참 후였다.
집에 들어 온 나는 편지 봉투의 한 쪽 모서리를 잡고 그 아래쪽을 향해 따라 쭉 찢어 냈다. 이때 안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작은 알갱이들이 종이에 쌓여 있었다. 커피 원두였다.
‘웬 커피?’ 나는 편지를 꺼냈다. 분명 이 커피 원두에 대한 이야기도 쓰여 있을 테니 말이다.  
쿠바로 여행을 떠났던 우석이가 그 곳의 분위기를 전해 왔다. 어느 노천카페에서 부카네로(쿠바 맥주)를 마셨다는 장면에선 나도 미칠 것만 같았다. 해적이라는 뜻의 이 부카네로는 쿠바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맥주가 아닌가 생각해 봤다. 혁명과 열대성 기후가 불러오는 열정을 시원한 맥주로 식히고 있을 그 녀석을 상상하니 부러움에 배가 아파오기까지 했다.  
우석이는 그곳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남자는 우석이와 죽이 잘 맞았던지 그 녀석을 자신의 나라로 초청 했다고 했다.
‘자신의 나라로 초청 했다고?’ 나는 편지 봉투를 다시 봤다.
‘Rumania’
아, 루마니아. 나는 이제야 편지 봉투에 적혀있던 꼬불꼬불한 외국 글자들 중에는 내가 아는 글자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까 ‘편지’라는 고대 유물을 발견하고 당황 한 것뿐이었다.
우석이는 내가 편지를 읽은 지 2분도 채 안 된 시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대륙으로 넘어가 있었다. 우석이는 남자의 일을 돕는 대가로 그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남자가 우석에게 맡긴 일이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사향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것이었다.
‘고양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유럽 여행이 공짜라니!’
우석이가 자신의 ‘세계 여행기’를 들려 준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밑으로는 편지에 동봉한 커피 원두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다. 나는 종이에 쌓여 있는 원두 알갱이를 만져보고는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우석이는 이것을 ‘코피 루왁’이라고 불렀다. ‘코피 루왁’은 무척이나 귀해서 가격이 비싸다고 했다. 비싸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던 내가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바로 다음 문장을 읽은 후였다. ‘코피 루왁’은 사향 고양이에게 커피 체리를 먹인 후, 소화 되지 않은 채 그 사향 고양이의 배설물과 같이 밖으로 나온 커피 원두를 가공해 만든다는 것이다.
‘고양이 똥 속에서 꺼낸 커피라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내가 지구상에서 최고로 맛있다고 생각하는 커피는 노란색 스틱 봉투에 담긴 모카 맛 커피였기에 굳이 더 맛있는 커피를 찾기 위한 모험은 할 필요가 없었다.
우석이가 보내 준 ‘고양이 똥 커피’는 그렇게 편지와 함께 서랍 안으로 던져 졌다. 서랍을 닫고 나서야 내가 외출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방금 슈퍼에서 사온 라면은 허기져 있는 나에게 우석이의 쿠바와 루마니아 여행기, 아니 세계 여행기를 금세 잊도록 만들어 주기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여느 날들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워드 프로그램을 열었다.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그만 둔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도 아직 빈 문서뿐이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빈 문서의 맨 위쪽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언제 성공해서 언제 돈 벌거냐.’는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보였다. 글을 쓰기 위해서였지만 부모님의 집을 나온 것은 여러모로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빈 문서를 닫아 버리고 인터넷을 켰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등의 기사를 대충 살펴 본 나는 영화나 한 편 다운 받기 위해 즐겨 찾기에서 P2P사이트를 찾았다. 이때 한 블로그의 헤드라인이 내 마우스를 멈추게 만들었다.
“[추천 맛 집/카페] 코피 루왁_매력 있는 브런치 카페”
‘코피 루왁’ 내가 아는 단어, 아니 커피다. 고양이 똥 커피.
별로 할 일도 없었고, 호기심도 생긴 나는 그 블로그에 방문했다. 그곳은 ‘코피 루왁’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의 홍보용 블로그였는데 ‘코피 루왁’에 대한 설명이 사진과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사향 고양이의 사진이었다. 사향 고양이는 내가 생각한 -말 그대로의 고양이- 모습이 아니고 거의 족제비나 너구리에 가까웠다. 그 밑으로는 사향 고양이의 똥 속에서 막 꺼내진 원두와 로스팅부터 드립 되어 커피 잔에 담기기까지의 과정이 보여 졌다.
‘코피 루악’에 대한 요점은 ‘비싸다’는 것이다. 블로그를 보고 있으니 우석이의 ‘코피 루악’이 생각났다. 나는 재빨리 서랍을 열어 우석이의 편지 봉투를 찾아냈다.
나는 커피 원두가 담긴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항상 내 곁에 두었던 모카커피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귀여운’ 사향 고양이의 사진 덕에 처음에 가졌던 망설임도 많이 줄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써 풍부한 경험은 필수 아닌가!’
내 머리에서 ‘똥’이란 단어는 ‘최고로 비싼’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 귀하고 비싼 커피가 빨리 먹어 보고 싶어 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등 뒤로 펼쳐진 주방을 둘러봤다. 라면을 끓여 먹고 쳐 박아 둔 냄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명품 커피를 맛있게 뽑아 낼 기구 따위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전자에 물 한 컵을 붓고, 종이에 쌓인 원두를 쏟아 넣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 방법-요리라고 해도 될까?-이란 물과 재료를 넣고 그냥 끓이는 것 뿐 이었다. 나는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법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커피를 끓이고 있는 주전자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물이 끓자 주전자가 ‘삐익’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낸다. 하지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가루가 아닌 원두 자체를 끓이는 것이기 때문에 더 우려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보리차를 끓일 때 마다 물이 팔팔 끓어도 좀 더 우러나야 한다고 한동안 가스 불을 못 끄게 하셨다. 탄 보리 때문에 암에 걸릴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젠 주전자 뚜껑까지 들썩거린다. 이제 내가 이 ‘비싼’ 커피를 맛 볼 시간이 되었다.
창문을 열고 햇볕이 들어오게 했다. 왠지 이 ‘코피 루왁’은 모카커피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향을 맡아보고 커피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뜨거웠다. 대략 30만 원 정도의 현금을 바닥에 쏟아 버릴 뻔 했다. 차를 마시기에 적당한 물의 온도는 80~90도 정도라는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이번엔 천천히 한 모금을 들이켰다. ‘코피 루왁’의 맛은 이렇다. 가장 먼저 쇠 맛이 났다. 녹슨 쇠 파이프를 혀에 가져다 대어 본적은 없지만 그것이 어떤 맛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뒤이어 비릿한 맛도 함께 스쳐 갔다.
내가 기대 밖의 커피 맛에 실망하고 있는데, 뒤늦게 초콜릿 향이 다가왔다. 뒤늦은 초콜릿 향이 먼저 느껴진 쇠 맛과 비린내를 없애 주긴 했지만 그것 역시 내 입 안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코피 루왁’ 좋은 경험이었으나 ‘한국인의 커피는 역시 모카커피’라 것에 확인 시켜 줄 뿐이었다. 나는 모카커피에게 ‘코피 루왁’은 한 순간 스치는 바람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코피 루왁’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개수대에 원두 알갱이들을 부어 버렸다.

내가 잠에서 깬 것은 한 밤중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 손이 목으로 향했다.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할 때가 이런 기분일까.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대며 마셔댔다. 하지만 갈증은 해소 되지 않았다. 나는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 사람처럼 물을 마셔댔다.
나는 어제 라면과 함께 사온 2리터짜리 생수 두 통을 다 마신 후에야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햇살에 눈에 떠졌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목이 말랐다. 나는-내가 어제 밤에 다 마신 것으로 추측 되는-빈 생수통들을 보고 있다가 싱크대로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기 시작 했다. 상수도 정수처리장에 있는 모든 물들을 다 마셔도 이 갈증을 채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물 마시는 것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싱크대의 개수대에 쳐 박혀 있던 원두 알갱이들을 본 후였다. 나는 개수대 속에 손을 넣고 그 알갱이들을 꺼내려 했다. 손이 구멍보다 커서 들어가지 않았다. 음식물받이를 꺼내 알갱이들을 골라냈다.
나는 ‘코피 루왁’을 끓이고 있는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다. 왜 갑자기 이 커피가 다시 먹고 싶어 진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적당히 물이 끓자 커피를 따라 마셨다. 이 ‘코피 루왁’은 내 목을 타고 위를 통해 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혈관을 타고 내 몸 이곳저곳으로 퍼져 가는 것 같았다. 한 모금 더 마시자 불같이 타오르던 목도 편안해 졌다.
나는 ‘코피 루왁’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엄마의 젖을 먹고 배부른 낮잠을 자는 아이처럼 달콤한 낮잠을 잘 수 있었다.

밤이 돼서야 다시 눈이 떠졌다. 역시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이룰 수  있다. 다시 ‘코피 루왁’을 한 잔 마셨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끓일 때 마다 물을 계속 넣어서 인지 처음에 났던 맛이 옅어져 버렸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 이 커피를 맛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노트북을 켜 워드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동안 못 썼던 소설을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우석이에게 ‘코피 루왁’을 더 보내 달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다. 편지를 워드로 쓴다는 게 이상했지만 왠지 손으로 쓰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나는 간단하게 우석이의 안부를 묻고는-본론인-‘코피 루왁’을 더 보내 줄 수 없냐고 썼다. 빠르게 연락 할 수 있는 수단인 전화번호나 e메일을 알려주지 않은 우석이가 원망스러웠다. 편지를 출력한다. ‘툭툭툭’ 소리를 내며 편지가 출력되는 순간은 마치 어렸을 적 유치원에서 줄서 있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점점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우체국으로 달려가 우석이에게 국제 우편을 붙인 나는 어제 밤 모두 마셔버린 생수가 기억나 몇 통 더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편지를 보낸 지 3일이 지났다. 나는 우석이의 답장을 받으려면 4일 정도가 더 걸릴 것이라는 우체국 직원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코피 루왁’을 주문했다. 50g에 75만원이나 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코피 루왁’이 도착 했다. 나는 천식 환자가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숨을 들이키듯 커피를 끓여 마셨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알던 ‘코피 루왁’이 아니다. 이것도 캐러멜이나 초콜릿 향이 옅게 풍기긴 했지만 우석이가 보내 준 것과는 다르게 나뭇잎이나 곰팡이 냄새가 났다. 우석이가 보내 준 ‘코피 루왁’과 이것은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산 ‘코피 루왁’처럼 지역 차이도 있을 테니깐 말이다. 하지만 75만 원짜리 인도네시아 산 ‘코피 루왁’이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데는 단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우석이의 편지가 도착 했다. 편지가 조금만 더 늦게 왔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 지는 나 자신도 알 수 가 없었다. 더 이상 거의 물과 같이 옅은 ‘코피 루왁’을 마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재빨리 편지 봉투를 뜯고 종이에 쌓여 있는 원두를 찾아냈다. 우석이에겐 미안했지만 편지를 먼저 읽을 겨를이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들도 선물을 먼저 보고 난 후에야 카드를 읽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은 너무나 작은 양의 원두였기에 미안함 보다는 원망이 더 컸다.
나는 원두를 분쇄기에 정성스럽게 갈았다. 적은 양이였기에 원두 분쇄기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분쇄하는 동안 집 안 엔 커피가 아닌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곱게 갈린 커피 가루를 커피메이커에-더 이상 ‘코피 루왁’을 주전자에 끓이지 않는다.-넣고 생수를 부운 후 전원을 켰다.
초조한 기다림의 긴 시간은 우석이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견뎌 내기로 했다. 우석이는 자신 역시 ‘코피 루왁’을 많이 얻을 수 없어 미안하다고 적어 보냈다. 이 말 이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섭섭하지 않았다. 금세 드립 된 커피를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몸이 편안해 졌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마약 환자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나는 하루에 한번, 아주 작은 양의 ‘코피 루왁’을 마셨다. 사실 계속 먹고 싶지만 점점 옅어져 가는 맛 역시 참을 수가 없어서 애써 참으려고 노력했다. 커피를 먹어서 인지 밤만 되면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곤 했다. 밤을 꼬박 새워도 아무 상관없었다. 다음 날 낮 동안에-아무에게도 잔소리를 듣지 않으며-하루 종일 낮잠을 잘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커피가 점점 옅어지자 다시 우석이에게 편지를 썼다. 이번엔 워드 프로그램을 쓰지 않고 편지지에 손으로 썼다. 동네 문방구의 알록달록한 편지지들 중에서 그나마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 편지지를 골라내느라 애를 썼지만 이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편지는 최대한 우석이가 귀찮게 느끼지 않도록 썼다. 나와 우석이 만의 추억거리도 몇 가지 적어 넣었다. 꼭 ‘코피 루왁’ 때문에 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고 보이길 원했다.

일주일이 조금 지나서 답장이 왔다. 나는 커피 메이커 앞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우석이의 편지를 읽었다. 내가 보낸 편지 내용이 길어서였는지 우석이의 답장도 꽤 길었다.
첫 내용은 저번 편지와 마찬가지로, ‘코피 루왁’은 많이 얻기가 힘들어 조금 밖에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쉬웠지만 그만큼 귀한 것이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우석이는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간 남자가 자기에게 그 고양이를 맡기고는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내가 적어 보낸 우리들만의 추억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우석이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더 많은 내용을 적고 싶지만 손목이 아파 다음에 다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손목’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벽에 기댄 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체 게바라 평전’
붉은색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책이었다. 나와 우석이는 니체와 랭보, 체 게바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사실은 우석이의 큰 관심사였기에 결국 나도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우석이는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인간의 생과 사,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상담하듯 질문해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던 말은 고작 ‘술 한 잔’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우석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에 우석이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병실에서였다. 나와 통화를 마치고 손목을 그었던 것이다. 나는 충격에 빠졌고, 나중에 깨어난 우석이게 위로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 우석이는 쿠바로 여행을 떠났다. 까사(쿠바의 홈스테이)를 구해 두었는데 체 게바라에 대한 블로그를 운영 중이던 쿠바인이 그 까사의 주인이라고 했다. 나도 같이 가고는 싶었지만 우석이처럼 쉽게 한국을 떠날 수는 없었다.
‘체 게바라의 나라’를 찾아 떠난 놈이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 사향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니. 요즘엔 사육이 가능하다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향 고양이가 어떻게 동유럽까지 흘러 들어갔는지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석이가 나중에 자세하게 말해 줄 것이기에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코피 루왁’을 마시면서부터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낮 동안은 계속 잠을 자기 일쑤였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밤을 지새우다 무언가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 낸 일은 글쓰기였다. 나는 멈출 수 없는 열정으로 소설을 써가기 시작했고,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샘솟았다. ‘코피 루왁’은 내게 무한의 힘을 주고 있었다.
커피가 옅어지자 다시 편지를 보냈고, 우석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코피 루왁’과 아무것도 적지 않은-적으려고 시도하다 포기한 듯한-편지를 보내왔다. 우석이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이러다 우석이가 나에게 ‘코피 루왁’을 보내지 못하게 되는 두려운 상상과 함께.

커피가 다시 옅어져 우석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열흘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다시 편지를 보냈다.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나는 두려워졌다. 우석이의 안부가 걱정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석이가 보내 준 ‘코피 루왁’으로는 더 이상 커피를 뽑아 내지 못했다.
목이 타들어가자 물을 계속 마셔댔고, 다시 그 물을 토해 내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팔과 다리에서 시작해 온 몸이 가려워졌다. 내 혈관 안에 ‘무언가’가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고통 속의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나에게 경찰이 찾아 왔다. 경찰은 나와 우석이가 어떤 관계인지 물어봤고, 나는 우석이에게 어떤 큰 일이 생겼음을 직감 했다.
“편지로 어떤 얘길 주고받았어요?”
“커피요.”
“네?”
경찰이 뜬금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커피요. 우석이가 편지를 보낼 때 마다 커피 원두를 조금씩 보내줬어요.”
경찰은 우석이가 편지에서 이상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냐며 편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경찰은 우석이의 안부를 묻는 내 질문에 우석이의 시체가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브라쇼브’라는 도시의 어느 주택에서 발견 됐다고 했다. 주머니에서 내 편지가 발견되어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우석이가 사향 고양이를 키우며 지내던 곳은-나에게 편지를 보낸 주소-임대한 곳이며, 임대를 해준 집 주인은 임대료를 지불하고 외국으로 떠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경찰은 편지에서 별 단서를 못 찾아내자 나중에 다시 연락한다며 가버렸다.
나는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우석이가 뼈 만 남았을 정도로 말라 있었고, 그의 손목 여기저기에는 송곳으로 찔린 듯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가 보낸 ‘코피 루왁’을 맛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떨리는 내 몸을 붙잡았다. 언제나처럼 목이 타올랐고,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 내지 못하며 피를 토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코피 루왁’을 마신 후 부터 아무 것도 먹질 않아서 인지 창으로 통해 들어오는 햇볕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우석이가 보내 온 편지들을 꺼냈다. 눈을 감고 편지지에 베여 있는 ‘코피 루왁’의 향기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 느낌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떠졌고, 첫 번째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세 번째 편지를 읽던 중 실수로 편지지에 손가락을 베었고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빨았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석이가 보내 주던 ‘코피 루왁’의 맛이었다. 비릿하고 쇠 파이프가 혀에 닿은 맛, 철분의 맛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 사향 고양이에게 자신의 손목을 내줘 피를 빨게 하고, 그 대가로 철분의 맛이 나는 ‘코피 루왁’을 얻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은 어렸을 적 과학관 내-돔 모양의-영화 상영관에서 본, 지구가 태양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 태양계가 은하계 속으로, 그 은하계가 다시 더 큰 은하계 속으로 들어가다 마지막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우주가 펼쳐지는 광경을 봤을 때와 흡사했다.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던.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해가 저물고 나서였다. 나는 기절하듯 다시 잠들었다. 나는 그렇게 며칠 동안 잠을 잤다.
꿈을 꾸었다. 나는 예전에 블로그에서 본 브런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다. ‘코피 루왁’이 담긴 커피 잔이 테이블 위에 올려 져 있다. 바삭하게 구운 후 시나몬 가루와 슈가 파우더를 뿌린 두툼한 토스트가 ‘코피 루왁’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커피 잔을 들어 ‘코피 루왁’의 향기를 맡은 후 천천히 입술부터 적셨다. 한 낮의 따뜻한 햇살까지 더 해지자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해가 저무는 시간에 맞춰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우석이의 ‘코피 루왁’을 마시지 못한 지는 일주일 정도 지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목이 불처럼 타올라 생수를 퍼마시거나 죽어 가는 느낌에 몸부림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활기가 넘쳤고, 내 몸은 독감을 떨쳐 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이 활기찬 힘을 소설 따위를 쓰는 일에 낭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기지개를 편 후 외출 준비를 했다. 요즘 부쩍 날씨가 추워 진 것 같아 후드 티 하나를 더 걸쳐 입었다.
집을 나선 나는 눈을 감고 밤공기를 들이켜 본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코피 루왁’의 향기가 밤바람을 타고 내 폐를 통해 혈관 속으로 들어 왔다. 달콤한 이 커피의 향기는 각성효과를 일으켜 낮 동안 잠들어 있던 내 세포들을 모두 깨웠다. 나는 이 커피 향기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이제 밤마다 ‘코피 루왁’을 맛보기 위해 외출을 하고 있다.
                                                                                                       끝
댓글 3
  • No Profile
    Dominique 10.01.17 23:52 댓글 수정 삭제
    으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사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끝 문장을 보고선, '이거 참 소름끼치는 소설이네!' 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먹고 싶었던건 궁극적으로 인간의 '피'인가요? 마지막의 문장이 정말 의미심장하네요.
  • No Profile
    Minato 10.01.23 01:22 댓글 수정 삭제
    제목만 보고 좀 환한 내용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어둡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우석이가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아도 크게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주인공의 심리가 잘 나타나는 것 같아요.
  • No Profile
    123 10.01.30 02:37 댓글 수정 삭제
    우석이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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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 단편 아멘(Amen)1 제시안 2010.01.17 0
1310 단편 아바탈(AVATAL)2 김몽 2010.01.18 0
1309 단편 주선전酒仙傳2 먼지비 2010.01.18 0
1308 단편 흑야 백일(黑夜 白日)2 언어유희 2010.01.20 0
1307 단편 남자의 손목시계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하늘을울리는별의종 2010.01.20 0
1306 단편 불나방2 츄다 2010.01.23 0
1305 단편 901384596 roi 2010.01.26 0
1304 단편 늑대인간 공주4 roi 2010.01.26 0
1303 단편 푸른 종이의 아이1 귓도리 2010.01.28 0
1302 단편 카슐라 언어유희 2010.01.30 0
1301 단편 타인의 섬 카르온 2010.01.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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