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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스러진 시간들

2010.01.04 10:5501.04

바스러진 시간들



나는 잠들었다. 뒤엉킨 시간 속에서 혼란으로 침몰했다.

16.

의식의 달이 점차 흐릿해졌다. 희뿌연 빛을 머금은 채 잿빛 구름 뒤로 자취를 거두었다. 구름 뒤의 달은 연기처럼 흩날렸다. 몸이 노곤해졌다. 수면이 뭉실하게 침대에서 피어올랐다. 볼을 베개에 묻은 채로, 두 팔과 두 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침대에 스몄다. 날이 선 밤눈의 또렷함은 눈꺼풀이 보드랍게 어루만져 달랬다. 놓을 듯 쉽사리 놓이지 않는 의식의 끈이 빠르게 낡아갔다. 창밖으로 사람들 지나다니는 소리, 옆방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도 한걸음씩 멀어져갔다. 라디오의 볼륨을 줄인 것처럼, 혹은 라디오를 점점 먼 곳으로 가져가는 것처럼, 흐릿하게 존재하는 작은 의식의 점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머릿속 수많은 방의 조명을 누군가 차례로 끄는 것 같았다. 머릿속 어둠이 마지막 방에 다다르고, 아이스크림 같은 내 몸이 모두 녹아 스민 순간, 볼륨은 0이 되어 음소거가 되었다. 마지막 방의 불이 꺼졌다.         

1.

질퍽이는 어둠의 늪에서 첫발을 떼 올린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감상할 때 다음 장면을 내 의지로 보는 것이 아니듯, 발걸음도 시선도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다만, 행해질 뿐이었다. 나의 시선을 빌린 장면은 하늘에 다다랐다. 날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신의 시선을 빌린 듯한 전지전능함도 없었다. 그저 열정적인 피디의 극성을 못 이겨 카메라를 돌리는 카메라맨 같은 무심함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었다. 누군가 틀어놓은 다큐멘터리 채널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시선’이 향하는 곳을 내버려두었다.
바다였다. 널따란 대양 한가운데였다. 물결을 보고 파도소리를 듣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었다. 카메라가 빙그르르 360도 돌았다. 흐릿하게 타오르는 수평선이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시선은 다시 제멋대로 장면을 진행했다.
빠른 듯, 느린 듯 알 수 없게, 다만 단호하게 진행되던 바다 위 직선의 여정은 수평선 위에 점이 떠올랐을 때야 주춤했다. 장면은 차분하게 다가왔다. 조금씩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점은 돌멩이만 해졌다가, 다시 바위만 해졌다. 어슴푸레한 태양이 그제야 감돌았다. 태양을 등진 그 ‘섬’은 먹으로 그린 듯 검었다.
역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가까이 도달한 섬은 태양이 스쳐간 듯 그을려 있었다. 제멋대로 솟은 산들도, 굽이굽이 얽히고설킨 채 흐르는 강물도, 하나같이 재로 빚은 듯 탁하게 검었다. 섬을 보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숲이 우거졌다. 먹구름을 끼얹은 듯 검푸른 숲이었다. 혹시나 싶어 생명의 씨를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화석이 되어버린 듯, 둘러싼 대기마저 늙고 바래 숨이 멎은 듯했다. 고요함을 넘어선 정적에 질식할 것 같아 얼른 시선을 추슬렀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영화와 달리 간혹 내 의지가 작용할 수 있었다. 시선은 한숨 돌리라는 듯 하늘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하늘에 가까워졌다. 다시 높은 곳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섬은 어느 이름 없는 조각가가 홀로 깊은 산에 버려둔 바위조각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4.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았을 때 눈꺼풀에 맺히는 잔상처럼, 꿈의 아득함이 현실에 흔적처럼 스며 있었다. 핸드폰 알람이 요란스레 지껄였다. 소음의 틈바귀에 끼어 잠시 괴로워하다가 일어났다. 머리가 무거웠다. 알람을 끄니 U의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 남자친구랑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 미안
탁-하는 소리와 함께 폴더를 닫았다. 공허함이 먼지처럼 떠돌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U의 남자친구는 직장인이어서 주말 외에는 마땅히 U와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일요일 밤, 그러니까 어젯밤에 전화했을 때, 남자친구랑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간단하게 씻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후 방에서 나왔다. 자취방에서 학교는 가까웠다. 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스산한 공기가 허파를 메웠다.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고 길을 걸었다. 학교 건물까지는 십 분 정도 걸려서 한 대를 다 피우고도 한두 대를 더 피울 여유가 있었다. 필터 끄트머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탁탁 털어 꺼버리고는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3.

검은 섬은 어떤 근본적인 어둠 속에 침몰해있는 타락한 골동품 같았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가슴 속에 섬의 으슥한 기운이 스며 숨이 가빠왔다. 고개를 거세게 털고는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섬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온 듯, 바다 위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길은 거센 파도라도 치면 잠시 모습을 감출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바다 한쪽의 수평선에 다다를 만큼 아득히 이어져 있었다. 카메라는 자연스레 길을 따라갔다. 길이 향한 곳은 해가 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노을 속의 해에게는 보라 빛깔의 스카프를 걸친 여인네와 같은 교태로운 화려함이 있었다. 은밀한 추적을 하는 기분으로 태양을 쫓았다. 퇴폐적인 햇빛이 강해질수록 눈을 자주 감았다 떴다. 길의 끝은 태양의 바로 아래에 있었다.
섬이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검은 섬에서 뻗어 나온 실오라기 같은 길은 안개의 섬 앞에서 뚝 끊겨 있었다. 시선은 끊긴 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장면은 전개되지 않았다. 조금 더 안개의 섬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섬이 흐물거렸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망상 같은 자태뿐이었다. 위기를 느낀 건 그 순간이었다. 섬이 조금씩 침몰하고 있었다.

10.

  U. 너는 담배 같을지도 몰라.
  왜?
  맛 때문에, 니코틴 때문에 피우는 그런 담배 말고, 심란하고 우울해서 피우는 그런 담배 말고, 그런 거 있잖아. 우두커니 앉은 자리에서 피는 두 번째, 세 번째 담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 게 있어.
U는 캐묻지 않았다. U는 원래 잘 캐묻지 않았다. 어느 카페의 흡연석에서, 네다섯 번째 담배를 피우며 했던 말 같다. U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의미가 없어. 아무것도.
U는 가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날 선 바람이 코트 자락을 기어코 후비고 들어오는 겨울날이었다. U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바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발짝 뒤에 있던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U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바람의 의미를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다. 말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바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의미가 있다며 세상을 변호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I.
  응.
  춥지 않아?
  별로.
U는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U의 눈은 삼분의 일 정도 감겨 있었다. 항상 그랬다. U는 눈을 항상 조금씩 감고 있었다. 때로는 반쯤, 때로는 거의 다.
  그래도 돌아가자.
  왜. 추워?
  아니, 그렇지는 않고. 그냥.
  그래. 그러지 뭐.
앙칼진 바람에 할퀸 U의 얼굴은 발개져 있었다. 거북이가 목을 집어넣듯 U도 회색 코트 속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긴 머리가 반쯤은 바람에 흩날렸고 반쯤은 코트 속으로 엉켜 들어가 있었다. 나는 검은 파카를 벗어 U에게 건넸다.
  됐어. I.
  나도 됐어.
  그냥 입으라니까. 추워. 감기 걸려.
난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U를 응시했다. 걸음을 따라 멈춘 U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고집은.
  얼른 입어.
U는 회색 코트 위에 내 검은 파카를 걸쳤다. 또각또각. U의 구두 굽이 옥상의 바닥과 충돌했다. 난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U는 철제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삐걱하는 신음이 났다. U는 힘겹게 문을 열어젖혔다. U가 들어갈 때까지 문을 잡아주었다. 바람이 없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U의 뒷모습을 보며 난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U.
  응?
  아니야.
U는 다시 앞을 보고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난 의미 있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U, 의미 있는 것도 있어. 말할 수 없었다. 내게 의미 있는 것이 U에게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방 사이사이 스미는 찬 기운에 살갗이 일어났다.

12.

도서관에는 O가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또 아침부터 울상이야.
  울상 아닌데.
  울상인데 뭘 아니야.
  별거 아니야.
O는 캐묻길 좋아했다. 하지만 내게는 캐묻지 않았다. 캐물어 봤자 나올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O는 짙은 눈썹을 쓰다듬었다. 언제나 힘이 넘치는 O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U는?
  몰라.
아마 눈치를 채고 있었을 것이다. O는 워낙 눈치가 빠르다. 그래도 나는 O가 나와 U의 관계를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나와 U를 모두 아는 친구는 O 밖에 없었다. O가 나와 U의 관계를 알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나와 U의 관계는 둘만의 관계로도 이미 버거웠다. 다른 이가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의 복잡함이, 우리 둘이 의식해야 할 대상이 한 명 늘어난다는 것이, 지금의 살얼음 같은 우리의 관계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요즘 U랑 연락 안 해?
  하긴 하지.
  졸업 학기 하나 남은 기집애가 스터디를 안 오면 어떡하냐.
  기다리면 오겠지. 아직 시간 많이 안 지났잖아.
O는 그 이상 나를 떠보진 않았다. O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O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고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U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5.

U가 많이 취한 밤이었다. 학기가 끝나 과에서 종강파티를 했다. U는 평소답지 않게 과음했다. 그날의 U는 유독 예민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꼬박꼬박 자기 잔에 술을 채웠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내 잔에도 술이 빌 순간이 없었다. 말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별로 참견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어.
U는 작게 중얼거렸다. 주위는 떠들썩해서 U의 말은 꺼진 촛불처럼 초라하게 사그라졌다. U의 말을 들은 건 나뿐이었다. U가 잔을 들이키기에 나도 잔을 들이켰다. 술집의 주홍빛 조명이 눈동자에 묻은 물감처럼 번졌다.
  의미는 있어.
내 목소리에 U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나는 U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병을 빼앗아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말했다.
  목적은 없지만.
U는 거의 감겨 있던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반 정도 뜬 U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목적지는 없이 의미만 있는, 산책 같은 걸지도 몰라.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걷는 산책이지. 마치 어딘가에 빨리 도착해야 되는 사람처럼.
U는 후-하고 술기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O가 옆 테이블에서 흘끗흘끗 우리를 보고 있었다. U가 O의 시선을 의식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U는 잠깐 바람을 쐐야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난 아무 말 없이 U의 뒤를 따라나섰다.

U는 앞장서서 걸었다. 언 바람이 매몰차게 불었다. 을씨년스런 밤이었다. U는 제 팔짱을 야무지게 끼고는 빠르게 걸었다. 움츠러든 등이 안쓰러웠다. 금요일 밤인데도 날씨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군데군데 며칠 전 내린 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U는 검댕이 묻은 듯 지저분한 눈 한 덩이를 발로 찼다. 물 먹은 눈은 U의 신발을 더럽혔다. U는 잠깐 신발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이었다.
U가 걸음을 멈춘 곳은 놀이터였다. 작은 공원이라 해도 괜찮을 곳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놀이터에는 술기운에 젖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U도 벤치 하나를 잡고 앉았다. 내가 옆에 앉자 U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 놀이터 같아.
  뭐가.
  잡초가 아무렇게나 자란… 아이 없는 놀이터.
  그러니까 어떤 게.
  네 산책의 의미.
내 산책이 어떤 건 줄 알아? 라고 물으려다 그만뒀다. U는 알 것이다. U가 그걸 모른다면 나는 산책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I.
  응.
  날 사랑해?
  모르겠어.
  의미가 없어.
  이번엔 뭐가.
  사랑. 보통은 사랑에서 의미를 찾잖아. 난 잘 모르겠어.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사랑하는 것도, 받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텐데. 난 모르겠어. 시간 지나면 다 잊혀질 텐데.
가족은? 꿈은? 묻지 않았다. U에겐 의미가 없는 단어들이었다. U에게 가족은 아픔을 의미했다. 꿈은 시시했다. 한 학기 뒤면 졸업할 U에게 남들 같은 꿈은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남들이 꾸는 꿈이 U에게는 꿈같지가 않았을지도 몰랐다. U에게 꿈이 어떤 것일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I.
  응.
  나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렇구나.
  네가 날 사랑하는 것도 느껴. 아주 좋아. 그런데…….
U가 말을 멈추자 나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내게 U는, 그리고 사랑은 의미가 있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걷는 산책이었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목적이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문 나를 U는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U의 슬픔이었는지도 몰랐다. U의 슬픔은 물기가 없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U와는 달리, 나는 젖은 슬픔으로 U의 눈빛을 받아냈다. 의미가 될 수 없음이 슬펐다.
우리는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나는 O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성격 좋은 O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깔깔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U도 그 속에서 눈물을 쏙 빼도록 웃었다. 술도 계속 마셨다. 찬바람에 발개진 U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볼을 잡고 움켜쥐면 피가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U는 밤이 새도록 술잔에 술을 부어댔다.

7.

나는 그날 U와 잤다.

11.

사실 U는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방 열쇠는 내가 가진 것 하나와 여유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유 열쇠를 U에게 준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상징적인 의미였다. U에게 내가 사는 공간에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싶었다. U는 좋아했다.
  믿음의 표시야?
별 소용은 없었다. U는 열쇠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학교 옆에 있는 원룸이니만큼, 수업이 없는 시간에 잠깐 들러 눈을 붙이기에도 좋았다. U가 그런 활용 방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U는 열쇠를 쓰지 않았다. 이따금 내가 U에게 왜 방에 들려 쉬지 않느냐고 물으면 U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줄 열쇠가 없잖아.
U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 퉁명스러움 속에 숨어 있는 애정이 고마웠다. ‘U에게 방이 있었다면 내게 열쇠를 주었을까’하는 의문은 그 애정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U와 이야기할 때면 U 외의 세상은 모두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함께 있는 공간과 시간마저 U만을 남겨놓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오롯이 서 있는 U의 존재는 완벽했다. 결코 길지 않은 그 순간 후에 다시 현실이 밀물처럼 다가오면, 아이를 기차역에 버리고 온 것처럼 불안해지곤 했다.

13.

그날은 온종일 U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U와 연락이 되지 않는 날에는 신경이 곤두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보통 연락이 되지 않을 때 U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U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상상을 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책상 앞에 앉으면 U가 떠오르고, U가 떠오르면 담배를 피우러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 나가 담배를 물면,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U의 남자친구가 U를 안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U를 안아본 뒤로 내 상상은 구체적으로 변해 날 몹시 지치게 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집으로 돌아온 건 도무지 책이 손에 안 잡혔기 때문이다. 나름의 끈기로 저녁까지 버텼건만, 그 행동의 부질없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해가 짧아 초저녁인데도 무척 어두웠다. 숨이 약간 가쁠 정도의 언덕을 오르며 ‘U가 내 방에 들르지 않는 이유는 혹 이 언덕 때문이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덧 방문 앞에 도착했다. 정적이 어깨를 짓눌렀다.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쇠를 책상에 던지며 불을 켰다. 현관에 놓여 있는 여성용 구두와 침대에 누워있는 U를 발견한 건 거의 동시였다. U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놀라운 마음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커 급히 신발을 벗었다. 작고 낯선 플라스틱 통을 발견한 건 U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중이었다. U가 깰까 봐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던 내 눈에 웬 약통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약통이었다. 그렇지만 알 수 있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예감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된다.
난 황급히 U를 흔들었다. U는 깨지 않았다. 반쯤 울었던 것 같다. U를 매다시피 업고 약통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방문을 잠그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한 채 길가로 뛰쳐나갔다. 세상이 거대하게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색감이 살아있는 세상이었다. 더욱 날카로워진 모서리와 더욱 입체적인 질감에 둘러싸였다.
밀물이 U를 지우고 있었다.

나는 욕을 질겅질겅 씹었다. U는 정신을 못 차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먼저 온 다른 환자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식이 있었고 U는 없었다. 나는 질겅질겅 씹던 욕을 퉷하고 뱉어냈다. 의사도 화를 냈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병원은 여기저기 번쩍거렸다. 최신 시설의 세련미를 가진 병원은 보통의 병원보다 더 쌀쌀맞아 보였다. 하얗디하얀 조명이 U의 얼굴 위에서 가루처럼 비산했다. 너무 하얀 분을 바른 듯, U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 퍼런 창백함에 손끝이 저려왔다.
다행히 무례하게 뱉은 욕의 효과가 있어 의사가 U를 진찰했다.
  수면제?
난 말 없이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의사는 약통을 건네받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보호자예요?
고개를 젓자 의사는 보호자에게 빨리 연락이나 하라고 했다. U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전화번호부를 볼 수가 없었다. 오줌이 마려웠다. 방광을 시작으로 요도를 통과해 귀두까지 찌릿하게 조여 왔다. U의 몸과 달리 내 몸은 당황과 긴장의 신호를 강렬하게 보내고 있었다. 난 U를 흔들었다. U의 어깻죽지를 양손으로 꽉 붙들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침대가 요동쳤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긁어댔다. 볼을 달구다 못해 눈알까지 올라온 열기에 세상이 빨갛게 변했다. 무심히 사라졌던 의사가 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6.

U가 토했다. U의 토사물이 내 옷가지를 적셨다.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저 눈물 고인 U의 눈과 끊임없이 토사물을 게워내는 입을 바라볼 뿐이었다. U는 두 눈과 두 콧구멍과 한 입으로 자신의 내용물을 꾸역꾸역 뱉어냈다.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몰라 그냥 U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U가 정신을 차려 다행이었다. U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 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U는 내가 혹여나 자기 집에 전화를 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어차피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난 U의 등을 토닥였다. 달래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남아있을지 모르는 토사물을 위해서기도 했다.
  안 할게.
U의 창백한 뺨과 충혈된 눈이 가슴 아팠다.

8.

새벽에 U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U는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U의 눈치를 살피며 바깥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 정보가 표시되기에 받기 전부터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덤덤하려 애썼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수화기 건너편의 남자는 당황하는 듯했다.
  누구 시죠?
  U의 친굽니다.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물론 내 임의대로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U의 남자친구는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안정을 찾았다. 나중에는 이미 여러 번 겪어봤다는 투로 말했다.
  또 그랬군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켰다. 새벽 하늘은 어두웠다. 불현듯 꿈에서 보았던 섬이 떠올랐다. U의 남자친구는 자기가 직접 오겠다고 했다.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U와 그의 드라마에서 확고한 주연이었다. 내 드라마에선 나와 U가 주인공이고 그는 조연이었지만, 그의 드라마에서 나는 조연은커녕 등장조차 의심스러운 단역일 뿐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U의 드라마에서 나와 그는 어떤 존재일까.
어쩌면 둘 다 조연일지도 몰랐다.

U의 남자친구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내가 둘러댄 말들에 의혹이 있었을 텐데도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U의 행동을 두고 ‘또’라는 표현을 쓴 게 생각났다. 어쩌면 U의 남자친구는 그런 방식으로 U를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그의 표정에서 피로는 있을지언정 짜증은 없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U의 남자친구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고생하셨어요.
그의 앞에서 할 말을 찾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답 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 악수는 존중과 예의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U에 대한 인계를 뜻하기도 했다. 이 순간 이후로 나는 U에게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슬며시 떠 세상을 퍼렇게 물들였다. 사물은 신에게 손찌검을 당한 듯 멍 자국 같은 푸른색을 덧칠하고 있었다. U와 U의 남자친구를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굳지 않은 아스팔트 위를 걷는 듯 발바닥이 끈적였다. 늘어지는 호흡의 꼬리를 낚아채가면서 나는 억지로 담배를 피웠다.

15.

그 후 며칠간의 삶을 기억하는 건 무리다. 그 나날의 기억엔 구체적인 형태가 없었다. 그저 막연한 흩어짐과 뭉침, 응고와 융해, 색의 번짐과 변질 등이 어느 정신 나간 비디오 아티스트의 작품처럼 내팽개쳐졌다. 그 비디오는 흑백의 화면으로 지직거리다가 이따금 꺼지기도 하고, 때로는 폭발할 듯이 제어할 수 없는 소음으로 세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날들에 삶과 이성은 도무지 나와 상관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호흡 외의 생활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날아가, 방 안이 흩날리는 나의 가루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입자로 흩날리는 내 몸을 수족관 속 펭귄 보듯이 바라보는 기억은 비교적 정확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였다. 며칠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발견한 건 의미를 찾아 헤매는 나의 모습이었다.

9.

잠에 반쯤 취해 핸드폰 액정을 켰을 때 U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걸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을 실감한 건 처음이었다. 내려앉은 심장은 바닥에서 미친 듯이 팔딱였다.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는 심장을 뒤로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 I, 미안해.
시공간이 멈추고 세상엔 나와 핸드폰 액정만이 남았다. 핸드폰 액정은 그 순간 U였다. U의 글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난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14.

이미 늦었어. 그만해.

17.

다시 잠든 꿈속에서 섬은 비장하게 가라앉았다. 도무지 가 닿을 수 없었기에 더욱 비장해 보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섬의 침몰은 어쩐지 굉음과 진동을 동반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나비가 꽃에 앉는 정도의 소음도 없었다. 섬은 침묵을 지키며 고요히 가라앉았다. 섬에 내려앉던 햇빛이 무지개처럼 갈라졌다. 바람이라도 한 점 불어왔다면 덜 쓸쓸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적막의 바다에 스러지는 섬의 죽음에 압도당한 듯 그 어떤 대기의 동요도 없었다.
영원 같던 시간이 흘렀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인과가 뒤엉켰다. 나의 시선은 이제 망망대해에 머물고 있었다. 침몰한 섬의 자국은 새벽처럼 매서웠다. 흘끗 뒤를 돌아보니 검은 섬과 이어져 있는 길이 사나워진 바다의 횡포에 점차 모습을 잃어갔다. 나는 서둘러 등을 돌렸다. 반쯤 사라져버린 길을 되짚어가야 할 일이었다. 돌아가야 할 곳이 검은 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작스레 새가 날았다.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까악대며 앞장섰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서 폭풍 냄새가 났다. 까마귀의 등에 업혀 자리를 잡은 채 나는 잠에 들었다.

꿈속의 꿈이었다. 어디서부터 꿈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바스러진 시간들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난 머릿속을 헤집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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