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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다와 노래

2010.01.01 23:2201.01

바다와 노래


이 글은 외계어로 쓰여야 합니다. 하지만, 독자를 위해 편의상 한글로 씁니다. 그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우운 씨! 서류 찾아가세요."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채 텔레비전을 보며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약간 고개를 숙이며 안내 로봇에게 걸어갔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시선이 느껴졌다. 줄을 긋고 접고 붙인 자국 등이 선명한 손때 묻은 서류를 그에게서 건네받아 서둘러 축소시켜 전자지갑에 담은 나는 미쳐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재생쓰레기통에 쏟아버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고 나서 주차해놓은 2인승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골목길을 질주해 곧 고속로에 들어섰다. 앞에 접속차가 보였다. 평소라면 금방 접속했을 테지만 복잡해진 마음 때문인지 한참이나 어려움을 겪다 간신히 옆 차의 도움을 받아 차에 올라설 수 있었다. 헬멧을 벗고 바이크에서 내려 밖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가을 오후의 주홍빛 노을로 하늘이 온통 물들어 있었다. 어느덧 찬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이 여린 창문을 통해 불어와 양 볼을 세차게 밀어댔다.

  “어떻게 됐니?”
  “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됐어요. 어차피 전 상관하지 않지만…….”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앞날이 걱정이야.”
  “직접 부딪치고 보니 오히려 힘이 솟는대요? 자유로워진 느낌이에요.”
  “서두르지 마라. 침착해야 해. 콜록콜록…….”
  “네……, 건강 조심하세요, 선배님.”

  절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반드시 옳은 일을 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걸었던 주문의 힘 덕에 그나마 버틸 힘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힘이 났다. 엠안 의원과의 전화 통화를 마친 뒤 간단하게 제공되는 저녁을 먹고 접속차에서 분리해 집으로 돌아왔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의 길고 가는 나무들이 도로의 가장자리를 완전히 닫은 거리를 흔히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 소도시의 주택가로 이사 온 것은 2년 전 태양계-3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문화생활을 할 여유가 없는 우주비행사로는 원하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해 원래 전공인 법 분야와 관련한 새로운 직장을 찾아 대도시 근처의 한적한 주택가를 고른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끝이다. 2년간 몸을 담았던 우주법 전문위원의 계약이 오늘로 해지되었다.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이지만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고 이 나라에서 살아갈 방법은 없다. 집에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버렸다. 고민을 하다 잠을 못 잘까 걱정했으나 몸이 피곤한 탓인지 쉽게 잠에 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스르르 눈을 떠보니 방안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앞마당에 소복하게 내린 하얀 눈이 창을 통해 집 내부를 골고루 비추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었다. 운동 삼아 눈 처리기계로 허리까지 내린 눈을 모두 녹이고 마당을 정리하고 들어오니 배가 출출했다. 채소와 나물을 섞어 만든 간편한 아침을 차려 먹고는 치약 물로 입안을 행군 뒤 상쾌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 망에 접속했다. 오늘도 법안의 서명과 예산 결정을 요구하는 4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읽어보니 의장과 중앙당의 권한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뻔한 내용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반대란에 서명하고 법안을 제출한 위원회의 예산삭감에 한 표를 행사했다.

  “당신은 평화군대법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평화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원합니다. 하지만, 이 법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의장과 그 세력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목적의 법이라 반대하는 겁니다.”
  “당신은 우주법 개정 위원회에도 참여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우주 공간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법률적 목적을 명확히 하고 국가 간 분쟁 방지를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목적은 이루셨습니까?”
  “거의 제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씀 못하겠네요.”

  오후에는 망을 통해 연대회의라는 곳의 한 사무장과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이 단체는 폐지된 지 140여 년이 지난 의장 선거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인민운동을 벌이는 사실상 반의회 단체였다. 그들은 그동안의 나의 행적에 관심을 보였다.

  “다음 주 대도시에서 전국회의가 있습니다.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곧 초대장이 전송되었다. 축소시켜 전자지갑에 넣었다. 그들의 활동을 평소에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운동이 약간은 비현실적이지 않나 하는 인상을 주는, 어쩌면 조금 막연한 정보밖에 모르는 단체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내 전문 분야를 인정해주고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망에 떠도는 아가 연합 인민의 여론은 대체로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기타 여러 나라의 지도자 그룹도 연합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합이라는 단일 정치 노선의 효율성에 찬사를 보내며 대부분 정책에 협조적이었다. 단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소수 지식인만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국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무거운 정치 토론은 평소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회의장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무거운 얘기는 싫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느라 도대체 내가 거길 왜 갔어야 했는지도 헛갈릴 정도가 돼버린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반 의회연대 모임에 참가한 이후 정치인 말고도 말로만 들어왔던 유명한 언론인 주드, 대학교수 마리 등 반정부 지식인들을 많이 접하게 됐다는 건 소득이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회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리더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 의회연대는 특별한 지도자를 두지 않고 그때그때 개별적으로 힘을 모아 활동했는데 이런 방식의 운동은 통합 의회에 대한 항의의 첫 번째 실천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끔 모임은 어수선했고 산만해지기도 했지만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연대는 순수하고 진솔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정부는 의회에서 반 의회연대 모임에 이름을 올린 의원들에게 경호를 명분으로 안전로봇을 붙여놓았다. 주로 연대회의 소속 의원들이었다. 이 로봇들은 의원들을 평생 따라다니며 밀착 수행을 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었다. 로봇과의 동행이 아니면 그 어떤 정부 기관에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원들은 어쩔 수 없이 법에 따라야만 했다.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해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사실은 로봇의 임무는 감시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게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몇 개월 전부터는 언론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유명 지식인들에게도 안전로봇이 지급됐다. 그래서인지 결심이 약한 지식인들은 하나 둘 대도시를 떠나 춥고 험한 지방으로 잠적하곤 했다. 일단 대도시를 떠나면 행정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다시 도시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은 일생을 건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연합의 수도를 떠나는 지식인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제 정권에 비판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을 쉽게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이에 대항할 시민사회는 성장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시민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정부는 다양한 혜택을 통해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었다. 스스로 일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면 일자리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으므로 실업률은 몇 십 년째 0%를 기록 중에 있다. 그러므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게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는 사람들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편견의 눈은 늘 존재했다. 한마디로 반의회 운동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런 현상을 몇 십 년 이상 경험한 지식인들이 하나씩 대도시를 떠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며칠 후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모 언론사 기자와 점심을 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그도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둘의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 답답한 긴 얘기를 듣고 있을 수 없어 오랜만에 술도 마시자는 걸 거절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가면 궁극적으로 통제 불능의 나라가 되고 말 거야. 다시 학교에서 강의해야 할지 아니면 유유자적 우주비행사나 할지 아니면 지방으로 은둔해야 할지 나는 요즘 혼돈스럽다구.”
  “친구,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지. 결국, 정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지. 자기들만을 위한 권력이란 있을 수 없어. 소수 피해자는 나올지언정 우리 다수는 기본적으로 번영의 길을 가고 있잖나. 우리 역사상 이 정도로 빈곤이 사라진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봐.”

  헛소리다. 씁쓸한 마음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설 업체에서 우주비행사를 추가로 모집한다는 거리 게시판의 광고가 바람에 나부끼는 게 보였다. 행인들의 이목을 끌만한 각종 장치가 되어 있는 광고다. 얼마나 더 많은 우주비행사가 필요하단 말인가. 비행사 인력 사업은 불황을 모른다. 기본적인 교육만 마치면 누구나 당장 비행정을 타고 아가 행성 위를 날 수 있는 시대다. 우주비행사는 상상과는 다른 험난한 위성에서 평생 위험한 일에 종사하다 생을 마칠 수도 있는 직업이지만 별다른 주특기가 없는 젊은이들이 가장 무난하게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더욱 우주 탐험 사업에 열정적이었다.

  연합은 군대 또한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쟁이 사라지고 장기간의 평화시대가 오자 정부는 이제 군대를 활용할 곳을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모든 탐사선에 일정 비율의 군대를 승선시키도록 하는 법을 마련하여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젊은이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해왔다. 젊은이들의 10년 장기 복무 지원 비율은 매년 큰 폭으로 성장 중이다.

  화려한 간판들로 복잡한 거리를 걷는 동안 갑자기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참고 참아 간신히 집에는 돌아왔는데 어떻게 무사히 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드러누워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눈이 침침하고 아팠다. 정상으로 물체가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의사와 간호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 몸에 부착된 여러 회로를 정리하며 옆 침대로 옮겨가는 보조로봇의 움직임도 보였다. 많은 환자 틈에 파묻혀 초췌한 얼굴을 한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목을 돌려보니 뻐근했다. 그때 한 군복을 입은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내게 접근해왔다.

  “우운 선생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연대회의에서 나왔습니다. 감시를 받고 있어서 복장을 이렇게 하고 다닙니다. 이해해주세요.”

  그 여인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남을 속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간 선생님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자리에 앉아서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병실 한쪽의 휴게실을 가리켰다.

  “며칠이라니……,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오늘이 8일째입니다.”

  놀랐지만 태연한 척했다.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이젠 많이 회복되었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임무를 맡았어요. 내버려두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엠안 의원님이십니다. 저는 공무 비서관 그리안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위험하겠어요. 괜한 걱정이네요. 그 선배님도 참…….”
  “아닙니다. 선생님 기억나시는지요. 병원에 실려 오던 그날 거리에서 뇌 교란 전파를 받으셨어요. 일종의 테러이고 그건 어느 집단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뭐라구요?"

  설마 하던 일이 나에게도 닥친 것일까? 이제 마음 놓고 거리에도 못 나간다는 말일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나기도 했다. 몇 시간 후 나는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좀 뻐근하긴 했지만 약을 복용하면 곧 나아질 거라는 의사의 지시를 신뢰하고 병원을 나섰다. 우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사실 며칠 전 저희 연대회의를 정신적으로 지원해주시던 언론인 주드 씨가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셨어요. 주드 씨가 결백을 주장하고 있어서 우리는 거칠게 항의했지만,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워낙 구체적이고 뚜렷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평소 지병이 있으신 엠안 의원님도 쓰러지셨어요. 지금도 병원에 계시는데, 저에게 꼭 우운 선생님을 안전하게 모시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갑자기 그런 일이…….”
  “저희도 어리둥절해하고 있습니다. 언론에는 크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시민이 별로 없다는 게 더 안타까워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군요.”

  나와 여비서가 탄 차는 대도시 외곽 순환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공장지대가 밀집한 지역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 하늘을 보니 병원에서 나올 때도 있었던 곤충형비행정이 멀리 떠 있는 게 보였다. 당장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감시하는 게 틀림없었다. 작은 오래된 건물 내부로 들어간 우리는 지하 통로를 통해 몇 블록 떨어진 곳의 건물로 들어갔다. ‘바다와 노래’라는 명칭이 붙은 흰색 건물이었다. 그곳의 중앙에 있는 큰 홀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옆쪽엔 작은 식당도 있었다. 칸막이가 되어 있는 사무실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사람도 몇 명 눈에 띄었다. 여비서의 안내에 따라 나는 곧 의료시설이 갖춰진 방으로 갔다. 거기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엠안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린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비서가 자리를 비워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소식 들었니?”
  “어떤 거요?”

  엠안 의원은 옆에서 바닥을 청소하고 있는 안전로봇의 눈치를 보며 슬쩍 감춰둔 종이를 꺼내 거기에 하고 싶은 말을 펜으로 썼다.

  “오늘 정보원에게 들은 얘기인데, 곧 태양계-3에 전투 함대를 파견한다는구나.”

  내가 쪽지를 다 읽자마자 엠안 의원은 그것을 소리 안 나게 조심스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탐사선이 아닌 함대를 태양계-3에 파견한다는 건 우주법에 의하면 정부 주도의 실질적인 식민지 건설 사업을 의미했다. 사설 함선을 파견하는 기업들은 아무리 군대가 포함된다 하더라도 함부로 식민지 사업을 하지는 못하도록 규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엠안 의원과 자세한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다른 동료와 많은 대화를 하며 대책을 세웠다.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태양계-3에서 발견된 푸른 별, 지구에는 수천억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중에서 행성 표면에 위성을 올릴 수 있는 지적인 생명체라면 우리의 의도를 금방 눈치를 챌 것이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맹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문명 파괴와 희생이 일어나는 걸 피할 수 없다. 재앙이다. 악마의 짓이다. 그러나 막을 수 없다. 우린 힘이 없다.

  며칠 후 집에서 망에 접속해 뉴스를 검색하던 나는 그리안으로부터 한 메시지를 전송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만나러 가까운 거리까지 왔으나 낯선 사람들에게 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가 공무원에게, 그것도 대낮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나라라면 국가의 기운이 급격하게 기울어가고 있음을 예고하는 강력한 징조다.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엠안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해 그들과 함께 그리안의 위치를 추적해 갔다.

  경찰은 다행히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리안이 가끔씩 보내오는 짧은 메시지 덕에 그녀의 현재 위치와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공중 치안을 담당하는 곤충형비행정에서 놈들이 운전하는 차량을 발견하고 경고를 하는 중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도시 외곽의 인적이 드문 지방 쪽이었다. 나는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우회하는 경찰차에 옮겨탔다. 나를 제외하고 2명의 경찰이 타고 있는 차였다.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정체를 알아내야 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히 우리 철통 경호 경찰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이는 놈들이라면 꼭 배경을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운전하던 경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보다도 더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투철해 보였다. 신경총을 충전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총은 빔이 닿은 곳으로부터 반경 2미터 내 모든 생물의 신경을 급속도로 마비시킬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기로 최근에 지급되기 시작했다. 아주 운이 좋지 않아 생명체의 급소에 해당하는 부분에만 직접 맞지 않으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신경일련번호가 포함되어 있어서 반드시 이 총은 해당 경찰관의 손에서만 발사가 허용됐다.

  마침내 긴 추적 끝에 황량한 폐공장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서 놈들이 붙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매우 멀리까지 앞서 나갔던 우리는 급히 그곳으로 차량을 돌렸다. 만약 블랙리스트가 실재하고 이들 단체와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반 의회 운동에 힘이 붙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안 씨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탄 경찰차에는 그 후로 어떤 공식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았다. 도로를 한참 달렸으나 구체적으로 놈들이 체포되었다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경찰관은 열심히 본부와 교신을 했지만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늘에 멀리에서라도 항상 보이던 곤충형비행정마저 보이지 않았다. 운전하던 경찰관은 매우 당황해 하며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요? 왜 놈들이 체포된 곳을 알 수 없는 거죠?”
  “네, 죄송합니다만……, 첩보국에서 암호문을 전송한 것 같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 다른 교신이 모두 끊기는데, 지금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건 무슨 소리죠?”

  곰곰이 생각하던 경찰관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어느 황량한 벌판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용히 차에서 내려 나보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손엔 어느덧 신경총이 들려 있었다. 순간 내가 최악의 상황에 부닥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천히 내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에 있던 경찰관은 뭐가 뭔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해하며 나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을 쳤다. 운전하던 경찰관은 한 손에 특수 교신기를 잡고 암호문이 도착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작업을 했다. 그러는 동안 멀리서부터 쌀쌀한 바람이 몰아쳐 왔다.

  “나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위원회에서도 일했었습니다.”
  “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확인이 될 때까지 잠시 그대로 있으십시오.”

  경찰관은 특수 교신기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를 겨누던 총을 거두었다. 매우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규칙이라서…….”
  “네, 괜찮습니다만, 문제는 뭐죠? 여긴 어딥니까?”
  “글쎄요. 그걸 더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왜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는지…….”

  경찰은 다시 차를 몰고 대도시로 향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주위가 캄캄한 밤이 된 때였다. 교신을 계속 시도해봐도 전혀 되지 않자 서로 답답해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겨우 이런 실력으로 그리 큰소리를 쳤나 싶어 나는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며 창밖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렇지만 그리안의 행방은 여전히 걱정되었다. 마지막 정보에 의하면 분명히 경찰은 놈들을 체포했을 테지만, 그리안에게서 메시지가 더는 오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 멀리 숲속에서 경찰차를 향해 누군가가 총탄을 퍼부었다. 툭! 툭! 툭! 좌 아악~
차는 도로에서 미끄러지며 한쪽 안전벽을 강하게 밀쳐냈다. 차의 앞부분이 찌그러졌다. 운전하던 경찰관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음을 확인한 나는 간신히 문을 부수고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었다. 차가 있던 방향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큰 나무 뒤에 숨어 바짝 엎드린 채 사태를 주시했다. 곧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곤 곧 조용해졌다.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적이 살아남았다면 나는 여기서 끝장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경찰차에서 메시지 소리가 울렸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관의 응답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적 두 명이 신경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경찰관은 사망한 선배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잠깐 동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옷을 털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갔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두 녀석을 차로 옮기는 그를 도왔다. 경찰관은 그들이 타고 다녔던 차량을 뒤져 몇 가지 소품을 가져오고 나서 그 차량에 간단한 전자표식을 했다.

  “어떤 녀석들인지 확인되나요?”
  “돌아가서 조사해보겠습니다. 지금은 교신이 되는 걸 보니 놈들이 우리를 뒤쫓으며 계속 전파를 교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운전하실 줄 아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찌그러진 경찰차는 제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연료는 충분했고 교신도 정상이었다.

  다음날 나는 무사히 돌아온 그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엠안 의원의 병실에서였다. 그녀는 다행히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았다. 그녀에 의하면 놈들이 비밀 테러 단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관 한 명이 숨졌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에는 이 사건이 전혀 보도되지 못했다. 소수의 연대회의 소속 의원들이 이 문제를 의회 차원에서 공식화하기로 하고 법적 투쟁을 결의했다고 그녀가 전해줬다. 엠안 의원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런 일까지 발생하다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야…….”

  하루 종일 나는 반 의회 운동 모임의 본부에 해당하는 ‘바다와 노래’ 건물에 머물며 대책을 마련했다. 마리 교수와 그날 처음으로 직접 얘기를 나눠볼 수 있었는데, 매우 차분하면서 지적인 사람이라 좋은 인상을 받았다. 주드 씨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존재는 이 연대에 있어서 매우 소중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들과 헤어지고서 집 근처를 지나가는 도시차를 이용해 동네까지 온 후 차에서 내려 쓸쓸히 거리를 홀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지만 왠지 긴 나무로 덮인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두 개의 달빛이 긴 나무숲에 가려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는 매우 특별한 정취를 만드는 거리를 걷는 건 이곳에 온 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그러나 그날은 엠안 선배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다음 날 새벽 엠안 의원이 지병이던 폐혈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끙끙 앓던 병이었다고 했다. 단순한 병인 줄만 알고 있다가 충격을 받은 나는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로 며칠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먹는 양도 절반으로 줄였다.

  그렇게 지내던 며칠 후 아침 잠결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우운 씨, 일자리는 구하셨습니까?”
  “아뇨,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만 내버려 두시지요.”

  질문에 짜증나는 말투로 답한 뒤 끊어버렸다. 일주일에만 수십 개의 일자리 리스트를 보내오던 대도시 노동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연구직을 그만둔 뒤 최근 몇 달 동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침대에 엎드린 채 한동안 멍하니 창밖 정원만 내다봤다. 오늘도 수북이 눈이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쑤시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눈 처리기계로 마당의 눈을 모두 녹이고 나서 옷이 더러워지건 말건 바닥에 그냥 드러누웠다. 하얀 새들이 브이 자를 그리며 평화로이 나는 게 보였다. 잿빛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으면서 곳곳에서 자그마한 번개가 일어나고 그곳 근처를 수십 대의 상용 비행정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네, 오래전에 지방의 천문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보수는 적지만 제가 갈 곳은 거기뿐인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계속 힘이 되어주실 수는 없는 것인가요?”
  “저는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입니다. 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저 하나도 감당하지 못해서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마리 교수님을 중심으로 뭉쳐주십시오. 저는 글렀습니다.”

  연대회의의 사무장과 망을 통해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짐을 꾸렸다. 이젠 이곳과도 정말 이별이다. 2년 넘게 살면서 나름대로 정이 든 이 현대적이며 마당이 딸린 작은 1인용 주택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문득 침대 옆 벽에 걸어 둔 예어진 씨와 함께 탐사선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금도 태양계 어딘가에서 묵묵하게 평화로운 우주를 품은 채 살고 있을 것이다. 태양계-3 탐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계속 그곳에 기지를 짓고 머무르기로 작정한 그녀와 해어진 것은 어쩌면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난 그 어떤 야망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내가 싫어졌다. 그녀가 자꾸만 생각나는 날이다. 사진을 떼서 축소시켜 전자지갑에 담았다.

  집을 나와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는 내 짐을 바이크에 실었다. 나머지 축소시킨 책과 업무상 서류들은 살 곳이 정해질 때까지 우편국에 보관해두기로 하고 배송신청을 해두었다. 곧 바이크를 몰아 그 소도시를 벗어났다. 그리고 정부 기관들이 모여 있는 연합의 수도인 대도시를 향하는 접속차에 올라탔다. 주민국에 들러 이전 신고를 마치면 이제 당분간 대도시 근처로는 오지 않을 생각이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춥고 험난한 완전한 지방은 아닐지라도 대도시로부터 떨어져 상대적으로 규제가 적은 산골에 들어가 이 정권의 종말이 올 때까지 기다려볼 생각이다.

  주민국에 도착해 번호표를 뽑고 커피를 한잔하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한적한 오후였다. 마침 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부부가 보였다. 저마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표정들이다. 이들에게 진정 정의롭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보장되는 사회가 찾아오기를…….

  마치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남의 일이라 생각하며 무심코 앉아 있던 그때 텔레비전에서 속보가 방송되었다. 태양계-3으로 명명된 길2895 지역을 향해 출발할 함대가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최종 승인을 요청하면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는 뉴스였다. 중앙당 정치인을 포함한 관료 30명과 수십 명의 과학자, 백여 명의 우주비행사, 수백 명의 군인과 전투형 로봇으로 이루어진 수십 기의 비행정으로 구성된 함대는 외계 행성으로 향하는 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예상대로 언론은 찬사 일색이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지지 기자회견이 잇달았다. 나는 절망적인 현실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민국에서의 절차를 마치고 밖을 나와 평온히 일상을 보내는 인파를 헤쳐 평소 일을 할 때 자주 들렀던 식당에 마지막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한 뒤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도로로 나왔다. 좋은 사람들을 두고 나만 홀로 떠나는 게 비겁해 보이기도 했고 그들처럼 별다른 걱정이 없이 살지 못하는 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차해 놓은 바이크에 앉아 헬멧을 쓰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그냥 그대로 있었다. 아직 이 대도시에서 내가 뭔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정말 이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저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 누구도 나의 결정엔 관심이 없었다. 어떤 명망 있는 한 사람이 떠나가도 이 거대한 국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유한 질서를 유지해 갈 것이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누구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막 시동을 켜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이봐, 뭐하고 지내나?”
  “………….”

  반가운 목소리, 그동안 연락도 못 하고 지냈던 준산 천문대장 이식이었다. 그는 이번에 과학자 자격으로 함대에 참여하게 됐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인상적이었다. 이식 대장 같은 사람이 어떻게 정부의 촘촘한 감시망을 피해 그들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연구보조원 1명을 더 추천할 수 있게 되었어. 자격이 된다면 자네가 어떨까 하는데…….”
  “글쎄요……, 방금 준산 천문대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거기서 대장님을 뵐까 했더니…….”
  “거긴 왜?”
  “그곳이……, 우리 같은 사람에겐 훌륭한 도피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이봐, 상황이 달라졌어. 이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나. 자네는 이 나라가 끝이라고 보는가? 전혀 아니지. 그렇게 될 수 없지. 나는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 중 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역사에 보여주고 싶어. 아니,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어. 그동안 숨을 만큼 충분히 숨었지.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떳떳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아직 부족한가?”

  나는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바이크의 핸들을 잡은 두 손이 떨려왔다. 가슴으로부터 울리는 그 무언가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 하늘 위로 거대한 비행정이 도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낮게 천천히 날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에 떠 있는 무시무시한 비행정을 지켜봤다. 평소 중요한 정부의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날곤 하던 그 큰 물체가 국민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미개척지를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출항하게 될 함대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응원하자는 것.

  나는 바이크를 다시 주민국 쪽으로 향했다. 도로에 바이크를 주차해놓고 로비를 거쳐 50층에 있는 민원실로 들어갔다. 대기자가 없어 번호표를 뽑을 필요는 없었다. 바로 재신청 서류를 접수했다. 그리고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며 초조하게 대기실에 머물렀다. 잠시 후 안내 로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운 씨! 신청이 통과되었습니다. 서류 받아가세요.”

  이전 신고를 취소하는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안내 로봇으로부터 승인 서류를 받은 나는 그것을 축소시켜 전자지갑에 넣으며 뛰어 내려가듯 밖으로 나왔다.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몸을 태운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우주국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바퀴의 마찰소리가 시원하게 도심에 곧게 뻗은 건축물들 사이에서 기분 좋게 울렸다. 한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장님, 저 우운입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두 눈에 힘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행성은 여름만 빼면 이틀에 한 번 꼴로 눈이다. 제법 두터워진 눈발에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전면에 안전주행빔을 쏘고 바퀴엔 눈 처리시스템을 가동시키며 질주를 계속했다. 반드시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절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한 주문을 걸었다.


- 끝 -
이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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