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긴 외출

2009.12.31 19:0612.31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 소설은 지난번에 썼던 '실종'을 고쳐 쓴 글입니다. 초반부는 거의 손댄 것이 없고, 후반부와 엔딩 부분을 고쳤습니다. 독자우수단편란의 비평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종'에서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부분에 대한 지적을 들은 덕분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긴 외출

따르릉, 찌릉찌릉.
시끄러운 벨 소리가 양쪽 귀에 동시에 전해졌다.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놓인 전화기에서 들리는 벨소리와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잡상인이나 종교인이 뻔하지만, 혹시 전화라면 친구가 걸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보세요, 라고 말한 직후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네? 아직…… 전화는 우리 집과 사이가 좋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친척 아주머니가 건 것이었다. 명절 다음날마다 부침개 반죽 만드는 것 마냥 자기 이름이 우리 집 식탁에서 주물럭거려지는 걸 알지 못하고 오지랖 넓게 사사건건 참견하려 든다. 오늘의 전화 첫머리가 너, 아직도 직장 못 잡았구나, 이 낮에 전화를 받는 걸 보니, 이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예의상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에도 문 밖의 벨은 찌릉찌릉 울려댔다. 더 이상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전화기를 내려놓아야겠다. 이때 아줌마의 걸쭉한 목소리를 뚜르르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통화 중에 전화라니, 이 시간대에 전화를 걸 사람이 또 있었던가? 나는 전화 왔으니 이따 다시 걸어드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여보세요? 라고 내가 말하자,

당장 도망쳐!

느닷없는 고음이 고막을 찔렀다.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정말 수화기에 대고 있는 힘껏 고함친 것을 고스란히 받아 버렸다. 나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귀를 감싸쥐었다. 잠시 동안 정신줄을 잡을 수 없었다. 아, 머 이런 십새가 있어? 난 떨어뜨린 전화기를 어찌어찌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화는 끊겨 있었다.
이래서야 전화기에 대고 마주 소리쳐봐야 뻘짓일 뿐이다. 속이 뒤집히는 것을 애써 삭이며 전화기를 놓고 대문으로 갔다. 벨소리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문을 벌컥 여니, 막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있다가 내가 문을 열기 직전에 포기하고 돌아간 모양이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들어와 문을 닫고 나니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인터폰으로 누구인지부터 확인했으면 간단한 문제 아니었나. 아무래도 두 개의 벨소리가 동시에 들려 상황파악이 안된 모양이다.
심란한 기분으로 방에 돌아와 아까 미처 켜지 못했던 컴퓨터를 켜자 익숙한 기동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부우우웅, 하는 소리가 영 이상했다. 나는 컴퓨터를 뜯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짐작대로 안에는 먼지가 그득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케이스를 닫은 후 다시 켜자, 아까보다 부드러운 소리가 기계 내부에서 들려왔다. 아직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나만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윈도우즈를 실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컴퓨터를 놔둔 채 시계를 보니 열한 시였다. 습관적으로 대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베란다로 가 담배를 물었다. 화초 하나 없는 삭막한 바닥에는 내가 턴 담뱃재가 여기저기 뭉개져 있었다. 물로 한 번 씻어내리면 되겠지만, 그나마도 하기 싫었다. 청소는 어디까지나 아내가 할 일이다. 식사야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챙겨먹고 있지만, 그 외의 일은 아내가 돌아오면 한바탕 시킬 생각이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집이 이 꼬라지가 되었다고 면전에 대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고, 또 이걸 내가 한다면, 아내가 없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언제 돌아올 생각일까.

내가 해고당한 후,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게 되자 그동안 술렁술렁 넘겨 왔던 온갖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가을밤 모기처럼 사방에서 엄습해 왔다. 한 열흘 전에는 반년 넘게 까먹어 이제는 반으로 줄어든 적금 때문에 또 한바탕 했다. 하지만 나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가. 지금같은 불경기에 변변한 기술도 없는 자를 받아줄 직장은 다단계 외에는 별로 없다. 지하철에 붙은 수상한 명함들을 꺼냈다 도로 집어넣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편네는, 그 자신도 아무 대책 없으면서 나만 보면 궁시렁댔다. 그러게 주식투자를 하자니까, 그러게 가게를 하나 내자니까, 그러게 저 근처의 땅을 조금 사 두자니까…… 적금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러게 타령의 어느 하나도 실행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걸 아내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만약 주택담보대출을 아슬아슬하게 완납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내의 그러게 타령에는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가자는 소리가 추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현실감각이 다소 없긴 하지만, 내가 직장이 있을 때의 아내는 제법 성실한 가정주부였다. 우리의 시스템은 완벽했다. 낮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생활, 밤에는 취침과 가끔의 관계, 주말엔 스마일을 유지하며 뒷산 정상에서 야호 한 번. 아내가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은 아쉬웠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나니 어느새 체념하게 되었다. 아이가 없다 보니 생활 리듬이 흐트러질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평온하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는데, 그만 내 쪽에서 실직이라는 원인제공을 했다는 말이다. 구조조정에 걸린 내 책임이라고 하기엔 좀 억울했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난 한동안 아내에게 슬슬 기었다. 적금이 든 통장을 넘기고, 나름대로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정도면 썩 모범적인 실직자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왜 아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닷새 전 아내는 집을 나섰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었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전날 내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 때문에 아내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안 그래도 빈약한 어깨를 더욱 더 좁히며 대문을 나선 아내를 보며 난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을 바랐던 터였다.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들은 방법대로 컴퓨터에 야동을 설치해 보았다. 동네 비디오집에서 빌려보는 에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모자이크고 어줍잖은 스토리고 없이 다짜고짜 관계를 시작하고 끝끝내 여자의 얼굴에 발사를 하는 남자의 표정은 자못 경건해 보였다. 쾌감이라고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이제야 끝낼 수 있다는 안도의 표정은 직장인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사장이 존재하지 않는, 제물들끼리 벌이는 그 살색 의식에 난 푹 빠져들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때였다. 아내는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지갑은 가지고 갔지만 통장은 그대로 있었다. 차 키를 가져간 게 신경쓰였지만 어차피 그녀는 초보운전이라 근처의 마트까지밖에 갈 수 없다. 그러니 역시 멀리 갔을 리 없었다. 없었을 터인데,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밖에 나간다거나, 더군다나 나가서 아내를 찾아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거나 경찰에 신고한다는 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내의 친정은 이미 확인해 보았고, 그녀의 좁은 교우관계에는 그녀의 발자취가 드러나있지 않았다. 의심가는 곳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보았었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나가서 찾지 않는다면 기다릴 뿐이란 생각으로, 아내가 나간 뒤론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그게 핑계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둘러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집에 있는 몇 안 되는 책들은 다 읽은 지 오래이고, 결국은 컴퓨터 앞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다. 컴퓨터는 시간때우기부터 일, 유흥, 독서, 욕구충족 등등을 모두 만족시켜 주는 마법의 기계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 고여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컴퓨터에 질려서는 곤란하다. 난 인터넷 뉴스를 클릭했다. 인터넷 뉴스야말로 컴퓨터를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사용하게 해주는, 말하자면 마법의 기계를 작동하는 기어 정도이다. 제일 먼저 뉴스속보를 클릭해 보았지만 닷새째 돌아오지 않는 내 아내에 대해선 나오지 않았다. 정치 기사를 빼고 나니, 얼마 전 산속에서 발견된 얼굴이 뭉개진 여자의 시체를 조사해 본 결과 우리 집에서 삼십 분 거리인 마트의 주차장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는 뉴스 정도가 그나마 흥미있었다. 아내와 같은 갈색 머리라고 하는데, 뒤숭숭한 세상이다. 혹시 아내일지도? 란 생각 따위는 진작에 접었다. 정말 그녀가 아내라면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내가 돌아오거나, 혹은 아내의 부고가 전해지길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일까. 내 일인데도 다른 차원의 나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고 멍한 나날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베란다 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5층이니 우리 집과는 상관없겠지만 일단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한 이십 분 전쯤에는 한산했던 아파트 화단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경비아저씨가 진땀을 연신 닦아내리고 있었고, 퉁퉁한 여자들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괴음을 내고 있었다. 몇몇이 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몸을 살짝 내밀어 위를 보니 웬 남학생이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댄 채 기우뚱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빤한 상황이었다. 보나마나 成적이나 性적 문제겠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가정사 문제. 저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과연 저 아이가 무사히 돌아가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화끈하게 뛰어내려 자신들에게 선명한 기억을 선사해주는 걸 원하는 걸까. 이 재미없는 현실에서 가끔 자신이 살아있다는 강렬한 자극을 바라는 사람들은 지금 속으로 저 아이가 뛰어내리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였다. 아이가 안 뛰어내려도 상관없지만, 내 깊숙한 곳에서 아이의 두개골이 지면에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담배 한 대를 피는 동안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해결은 요원해 보였다. 아이가 쉽게 뛰어내리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담배를 끄고 잠깐 창문을 열어 담배냄새를 날려버린 후 다시 방에 들어갔다. 혹시나 해서 다시 뉴스속보를 클릭해 보았지만 아파트 옥상에서 외롭게 시위중인 소년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인터넷 창을 닫고 탐색기를 열어 폴더옵션의 ‘숨김 파일 및 폴더 표시’를 클릭하자 휑하던 공간에 노란색 폴더들이 병아리떼처럼 줄지어 선다. 보기 좋게 정리된 폴더에는 내가 본 여인들과 아직 손대지 못한 여인들이 뒤섞여 내게 손짓하고 있다. 사창가의 접수창구에 온 기분으로 하나씩 클릭하고, 화면 가득 펼쳐지는 살색의 잔치를, 짝짓기라는 목적에서 멀어진 배설행위를 감상한다. 파일 하나당 최소 30분은 넘기 때문에 점심 먹는 시간을 빼면 기껏해야 하루에 스무 개 남짓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보면 언제라도 지우고 새로운 것들로 바꾸면 된다. 무궁무진한 인터넷의 바다에는 껍데기를 벌린 조개가 널렸고, 조개를 잡아다 파는 상인들도 넘쳐났다. 지금까지 본 것만 백 개가 넘었지만, 아직도 검색하다 보면 내가 모르는 파일명이 속속 등장했다. 굳이 궁녀를 삼천씩이나 두었던 의자왕이 이해가 된다. 해도 해도 새롭고 싶었겠지. 하면 할수록, 보면 볼수록 무감동해지고 무감각해지는 나와는 다른 인간이었을 테니.
동영상 보기에도 질려 방에서 나왔다. 베란다로 나가보았지만 아직 경찰차도, 죽음의 신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 길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며칠째 개지 않은 이부자리에서 퀴퀴한 내가 났다. 밤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낮에 보니 확실히 지저분하다. 빨지 못한다면 최소한 바깥에 널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이걸 그대로 밤에 덮고 잘 생각을 해 보니 끔찍했다. 그러고 보면 아내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진 날도 이런 이불을 덮었었다.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내를 껴안으며 쾌재를 부른 건 좋았는데, 정작 거사를 치를 장소가 없었다. 지금이야 모텔들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여관 하나 찾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골목을 돌고 길을 묻고 아슬아슬하게 걸린 해가 빨리 떨어져 버리기를 기원하며 돌아다니는 내내 아내는 빨개진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은 내가 간신히 찾아낸 토굴 같은 여관방 아래에서 느슨해지려 했다. 이제 와서 내숭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손을 꽉 잡았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돈을 내고, 방을 안내해주려는 척하며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주인을 카운터에 밀어넣고 기세 좋게 방으로 걸어갔다. 방은 끔찍하다, 와 지저분하다, 의 중간 정도에 걸쳐 있었다. 아내의 실망한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난 신발을 벗자마자 성급히 아내를 눕히고 입맞춤했다. 아내와 나 모두 때에 찌든 이불과 누런 방바닥 사이로 기어가는 조그만 바퀴벌레, 이상하게 얼룩져 있는 벽지에는 애써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난 그녀만을 쳐다보았고, 아내는 관계를 맺는 내내 눈을 꼭 감고 신음을 참았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였을 것이다. 어설픈 서로의 첫경험은 순식간에 끝났다. 뭐가 어떻게 끝난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내가 떨어지자 아내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화장실에 뛰어가 뒷물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피임약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뜻밖이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우린 크게 싸웠고, 방을 잡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거리로 나서야 했다. 나중에 왜 사람 민망하게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묻자, 아내는 다른 데서라면 몰라도 그런 데서 혹시라도 임신해서 그 아이를 낳으면 자기는 결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때의 그 기억이 못내 가슴에 남았는지 아내는 전세를 들어 살 때도, 지금의 집을 얻고 난 후에도 광적일 만큼 청소에 열심이었다. 그런 아내와 살아서 그런지, 고작 닷새간의 아내의 공백은 이처럼 집안 곳곳에 드러났다.
나는 일단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후 베란다 창문에 이불을 대충 널어놓았다. 이불이 흔들리면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난 부엌으로 가 홍두깨를 가져왔다. 아내가 주말에 가끔 칼국수를 밀 때 사용하던 물건이다. 만약 지금 아내가 돌아온다면 이 물건은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다행히 이 자리에 없다. (다행히?)
홍두깨로 이불을 털자 밀가루와 먼지가 함께 날렸다. 아차 싶어 홍두깨를 깨끗이 씻었다. 씻는 김에 근처에 굴러다니던 걸레들도 한데 모아 빨았다. 구정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몇 번이고 헹궈 깨끗하게 만들고, 이불을 털고,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는 꼴이 보기 싫어 걸레를 들고 온 집안을 닦기 시작하고,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설거지도 좀 하고, 책상도 좀 정리하고, 베란다도 물청소하고 하다 보니, 맙소사, 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분명 아내가 올 때까진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문득 학생이었을 때가 떠오른다. 공부가 딱히 싫었던 것은 아닌데, 희한하게 책상머리에 앉기만 하면 이런저런 할 일들이 떠올랐다. 미뤄놨던 방 청소나 책상 정리, 언젠가 다짐했던 푸시업 백 번 같은 사소한 목표들이 둥실둥실 떠올라 펼쳐놓은 책 위를 흘러다녔다. 결국 생각난 것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나서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아깐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결혼 후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열성적으로 청소한 적이 있었나? 아내보다도 더 꼼꼼하게, 먼지 하나까지 몰아낼 기세로 청소를 한 시간 가량 하자 집안은 꽤나 사람 사는 곳 같은 공간이 되었다. 청소하는 도중에는 바람 들어올까 봐 닫아놓았던 창문을 열어놓는 것으로 청소는 마무리되었다.
기왕 일을 시작했으니 마무리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아내가 청소를 끝내면 내가 커피를 타 주곤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잔을 꺼내고 몇 남지 않은 믹스를 꺼내 들이부으며 물을 끓였다.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을 잔에 붓고 휘휘 젓던 내 눈에, 바로 옆에 똑같이 세팅된 커피잔이 보였다. 무의식중에 아내 것까지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잠깐 생각한 후 이쪽에도 물을 붓고 대충 저은 후 큰 컵에다 붓고 내가 들고 있는 것도 거기에 부었다. 컵을 들고 마루로 나와 tv를 켰다. 환경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커피를 마실 동안만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채널을 그대로 두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나레이션은 지극히 담담하게, 얼마 후면 한 섬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읊조렸다. 불어터진 크로와상이 떠 있는 것처럼 볼품없이 생긴 섬이 나오고, 사리 때마다 물이 1층 마루까지 들어온다고 말하는 주민들이 나왔다. 섬이 없어지는 이유는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이곳, 투발루는 서서히 잠겨간다고 한다. 죽기 싫으면 어딘가로 가야 하겠지만, 거진 만 명에 달하는 이곳 주민들을 받아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선진국들은 침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투발루의 환경장관이 나와 격정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리 때마다 우리 발밑까지 차오르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죽이기 위해 지구를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다큐가 끝나고 제작진의 이름이 위로 올라가며 몇 장의 사진을 내비쳤다. 이 섬보다 앞서서 사라진 주변의 무인도들이었다. 섬을 메웠던 야자나무들은 간데없고, 100평짜리 산호더미 위에 석면과 페트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진이 천천히 사라지자 요새 뜨고 있는 댄스그룹이 나와 춤을 추며 과자를 선전했다. 난 tv를 끄고 그때까지 마시지 않았던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어서 별 맛이 없었다.
다시 야동이라도 봐야 하나 생각했지만 역시 지겨웠다. 전자파를 잔뜩 쐬어서 그런지 바람을 쐬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문을 열고 나가진 않았다. 그냥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느낄 뿐이었다. 날이 흐릿해진 게 신경쓰이긴 했지만 창문 열어놨다고 그 안으로 비가 들어오진 않을 테니 문제없을 것이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방에 들어와 문을 반쯤 닫은 후 최근 본격적으로 시작한 넷마블 고스톱을 켰다. 리니지니 뭐니 하는 게임들은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기에 이 정도가 적당했다. 점당 오백 원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몇 판 하다 보니 돈이 슬슬 늘어갔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컴퓨터가 변덕을 부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점당 이천 원 방에서도 몇 번 터뜨려 점당 오천 원 방에 입성하고 나니 슬슬 신중해졌다. 싸구려 방에서 돈 쌓아놓은 것 정도는 이런 큰 판에서 몇 번만 잃으면 순식간에 증발한다. 조심조심, 피박 쓰지 않겠단 각오로 상대방을 집적거려 본다. 상대방은 내가 몇백만 원을 잃자 우습게 보였는지 제법 크게 나간다. 원, 투, 쓰리고. 하지만 내겐 조커 두 장이 고스란히 있었다. 고박이나 먹으라고 조커 두 장을 연이어 내자 상대방은 채팅창에 18이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내가 선이다. 이 게임은 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라 이제부터 내가 딸 차례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놈이 한 번 잃었다고 바로 나가버렸다. 썅! 욕이 튀어나왔다. 아마 저 놈은 다시 다른 방을 만들고 새롭게 선을 잡을 생각이겠지. 아직 잃은 돈을 다 찾지도 못했는데 돈만 들고 튀다니.
기분 잡쳤으니 그만할까 하려는 참에 누군가가 대전신청을 했다. 나와 비슷한 금액을 가진 녀석이다. 아까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바로 게임을 종료하리라 다짐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단 실력도, 매너도 좋은 녀석이었다. 마치 시소게임처럼 게임머니가 이리저리 쉴새없이 넘어갔다. 따고 잃고 하면서 각자 수중에 몇 만 원밖에 남지 않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는데, 그럴 때는 따도 고작 몇만 원이고 잃으면 수십만 원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둘 다 나가지 않고 게임을 진행했다. 덕분에 질리지 않고 그 작자와 제법 오래 칠 수 있었다. 한 사람과 몇 시간이 넘게 고스톱을 칠 수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늘 어떻게든 이놈과 끝장을 보리라 다짐하고 신중하게 똥쌍피를 클릭했다. 이건 깔아주는 거지만 녀석이 이제 와서 피를 몇 장 더 먹어도 승부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지금의 난 광을 네 개 먹은 상태. 마지막 남은 비광이 저쪽에 갔다간 순식간에 피박으로 털릴 것이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비광을 들고 있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밖에서 쿵 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순간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 일어서서 바깥을 구경한다면 이 판은 자동진행이 될 테고, 그렇다면 그나마 남은 돈도 이 자에게 몽땅 털릴 것이다. 이 판만 끝내고 가도 늦지 않다. 일단 나가기 버튼을 눌러 이번 판까지만 하기로 하고 다시 패를 냈다. 상대방이 여덟 배 미션을 성공했기 때문에 절대 질 수 없다. 피박으로 지느냐, 오광으로 이기느냐의 단판 승부. 녀석이 일곱 번째 피를 내고 뒤집자 드디어 비광이 나왔다. 이거다! 난 가지고 있던 비피로 단숨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피도 비라 싸 버렸다. 그것을 상대방이 널름 집어먹는다. 아, 제기랄!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수십 판을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런 식으로 단판승부가 나 버리다니. 판이 끝나고 올인당하자마자 난 방 밖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상대방은 수고했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나 역시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이제 둘이 다시 만날 방법은 없다. 저 무수한 닉네임의 파도에 휩쓸린 이상 나도, 그도 오늘이 지나면 고스톱을 몇 시간 동안 쳤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오늘 밥을 언제 먹었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 커피 한 잔 한 게 다였던가? 배는 고프지 않은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은 채 눈앞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피를 짝짝 내리치는 효과음이 난무하는 방 안과 비교해 더욱 적막하게 느껴지는 흰 화면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숫자들과 방제목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까까지 상대방과 마주하며 느꼈던 즐거움은 나를 떠나 흰 화면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어두운 방에서, 닷새째 깎지 않은 수염을 만지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몇 시간째 고스톱을 치다 올인당한 남자라 생각하니 한심하고 우스웠다.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부옇게 눈이 흐려져 왔다. 오랜 시간 어두운 방에서 컴퓨터를 해서 그런지 눈이 아팠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눈을 비비자 손에 눈물이 맺혔다 떨어졌다. 바짓단에
툭,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크게 들려왔다. 눈을 힘주어 깜빡이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 턱에 둥글게 뭉쳤다. 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 정적만 아니라면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따윈 들리지 않을 것이다.
티슈를 뽑아 얼굴을 대충 닦으며 방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으쓸하게 몸을 둘렀다. 온기를 찾아 희미하게 햇빛이 남아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소동이 있었다. 몸을 내밀어 보니 소년이 매트리스 위에서 부모를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었다. 적절한 시간에 구조대가 출동한 모양이었다. 구조대원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모자에게 빨리 비키라고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아까의 반도 되지 않았다. 한 여자가 집값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게 들렸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모처럼 사람 하나 죽는 광경을 목격할 기회를 놓친 진한 아쉬움을 남긴 작자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그냥 저 아이는 도망치는 데 실패했구나, 라고 느낄 뿐이었다.
손바닥만큼 남아있던 햇빛이 사라졌다. 구름이 가린 것일까.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 대신 무수한 뿌연 입자들이 플랑크톤처럼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가을의 황사는 차라리 적조(赤潮)에 더 가까웠다. 창문을 열어놓은 지 몇 시간이 지났기에 거실 여기저기에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었다. 무심결에 난간을 잡았던 손에도 붉은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을 털고 창문을 닫은 후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아까까지 열심히 청소했던 거실이 폐허처럼 느껴졌다. 황사는 이미 집안을 점령했고, 심지어 환기를 시킬 수 없도록 창 너머에도 득실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은 위태롭게 덜컹거리며 안팎의 협공을 힘들게 막아냈다. 이젠 여기가 나의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처럼 느껴졌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참을 수 없어 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둥글게 웅크려서 빠져나가고 있는 내 체온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따르릉, 찌릉찌릉.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를 깨운 것은 벨소리와 초인종 소리였다. 둘은 마치 시계 알람이라도 된 것 마냥 동시에 울려대고 있었다. 난 망설이지 않고 전화기를 들었다. 다시 한번, 도망치라고 소리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대론 아까와 똑같아질 뿐이다. 난 침묵을 지키는 상대방에게 고함쳤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새끼야! 전화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끊어졌다.
인터폰을 들었다. 설마했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막 문이 닫히고 있었다.  여기서 놓칠 순 없었다. 난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고장난 건가? 전자키 방식으로 된 현관문은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약올리듯 귓전에 맴돌았다. 인터폰으로 달려가 경비실을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아까 그자가 나갔을까 싶어 베란다로 나갔다. 어둑해지는 저녁 어스름의 텅 빈 거리에는 황사만 자욱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지하주차장에서 차가 한 대 나왔다. 난 눈을 비볐다. 내 차와 기종이 같았다. 아니, 정말로 내 차 같았다. 누가 타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난 난간을 붙잡고 그 차를 향해 뭔가를 외치려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차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베란다에서 돌아와 황폐한 거실을 서성대다 결국 난 결심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119를 누르니 바로 안내원이 받았다. 목소리가 어찌나 기계적인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통 들지 않았다. 난 그녀에게 실종자 신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신원을 말하라고 하자 난 아내의 이름을,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내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그러니까 그 아파트에서 두 사람이 실종되었단 말씀인가요? 네, 하고 대답하자 그녀는 재차 내가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물었다. 난 본인입니다, 라고 말했다. 본인이 실종되었다구요? 그녀는 처음으로, 한심하다는 감정을 넣어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다시 119를 누르자 아까와 다른 사람이 받았다. 아내가 사라졌다고 실종신고를 하고, 아파트의 전자키가 고장났으니 와서 열어달라고 말했다. 이번엔 아무 문제없이 접수되었다.
잠시 후 담당기사가 와 문을 땄다. 하지만 기계를 죽이고 문을 열었을 뿐, 전자키를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다. 조만간 업체에 연락해 서비스 받으셔야겠네요. 그렇게 운을 뗀 담당자가 재차 물었다. 혹시 본인이 실종신고하신 분 맞으신가요? 확인해보라고 하던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장난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그가 돌아서며 멋쩍게 말했다. 아내분을 잘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난 글쎄요, 라고 답했다. 아내가 돌아온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지만, 돌아와야 할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그가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걸 확인한 후 다시 문을 닫았다. 고요해졌다. 그 고요가 지금은 차라리 반가웠다.
모처럼 말을 했더니 목이 말랐다. 물병을 가져와 소파 앞에 펴 놓은 밥상 위에 놓았다. 다시 소파에 몸을 던지고 내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통화나 문자 따위가 표시되지 않는 이상 이건 비싼 시계에 불과했다. 난 그 시계를 열고 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휴대폰답게 작동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문자함에서 닷새 전에 온 문자가 액정에 표시되었다.

그것은 아내에게서 온 것이었다.

작은 액정마저 휑하게 보일 만큼 간략한 내용이었다.

-도망쳐서 미안해.

이게 전부였다.

난 휴대폰을 접었다가, 다시 펴서 내용을 보았다가, 닫았다가 다시 폈다.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한 줄의 문자가 두 줄, 세 줄로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이 한 줄을 한 줄로서 받아들여야 할 때다. 동시에 지난 닷새간 내가 아내에게 걸었던 수많은 전화들이 그녀에겐 부재중 전화 00통, 이라는 한 줄의 메시지로 간단하게 요약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한 줄, 몇 글자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편리한 침묵의 세상이다. 난 핸드폰을 편 채 두 손으로 양쪽을 붙잡고 천천히 눌렀다. 어딘가에 힘을 집중하고 싶었고, 마침 손 안에 핸드폰이 들려 있을 뿐이라고, 난 솔직하지 못하게 생각했다. 몇 년을 써 왔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계를 눌러 비틀어대며 무기질적인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의외로 화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분노 대신 좀 더 생소한 감정이 뭉클거리고 있었다. 이 기분을 과연 한 줄로,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무리일 것이다. 그날 나는 무척 괴로웠다, 라고 나중의 내가 생각하더라도 결국 내가 떠올리는 건 그 문장 뒤에 있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금의 내 모습인 것이다.
빠각 하는 소리가 손 안에서 났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보니 핸드폰이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액정이 꺼지며 훨씬 보기 좋은 새까만 화면으로 되돌아갔다. 손에는 차가운 땀이 배어 축축했다. 문자를 보고 핸드폰을 부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았지만, 시계를 보니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손에 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앞에 있는 밥상에 힘껏 집어던졌다. 그 중 하나가 물병에 맞아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스크린 너머에서 비쳐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깨달을 수 없었지만, 나중의 나는 아까보다 좀 더 구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날 나는 무척 괴롭고 외로웠다, 라고.
바닥을 타고 밀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온 물이 발가락을 적셨다. 난 발을 드는 대신, 먼지투성이의 발이 얕은 물속에 잠기는 걸 바라보았다. 아까 본 섬이 떠올랐다. 아마 다들 이렇게 잠겨 갈 것이다.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고독하게 노를 저으며 섬에서 멀어져간다. 도망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현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사리 때마다 발밑까지 차올랐다.
난 그 섬에 내가 서 있는 상상을 해 보았다. 배는 모두 떠났고,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남겨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장소에서 꼿꼿이 선 채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체념이 빚어낸 짙은 정적 속에서 다함께 고요하게 바닥까지 가라앉는 건 과연 내가 원했던 것일까.

그건 아냐

라고 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외칠 정도로 내 오지랖이 넓은 건 아니다. 단지, 가라앉는 대신 좀 더 버둥거리고 싶었다. 뻥 뚫린 가슴에 이런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잔뜩 채워넣은 채 볼품없는 미이라 꼴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내 가슴 안에 있었던 내용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건 내 가슴에 안주할 자리가 없어 쫓겨난 다른 나다. 나를 다시 내 안에 받아들여 이 감정들이 들어갈 자리를 없앤 후에 난 이 수렁에서 발을 빼 아직 마른 땅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때야말로 그곳에서 도망칠지, 아니면 가라앉을지에 대해 완전한 내 의사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은 밖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쉽게 열렸다. 텅 빈 복도로 아래층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올라왔다. 난 찢어진 정적 너머로 어서 와, 라고, 긴 외출에서 돌아올 내게 미리 인사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단편 긴 외출 라티 2009.12.31 0
1319 단편 노래의 처음 룽게 2009.12.31 0
1318 단편 대황룡사 먼지비 2010.01.01 0
1317 단편 바다와 노래 이경원 2010.01.01 0
1316 단편 바스러진 시간들 숲내 2010.01.04 0
1315 단편 동반자의 진실1 mso 2010.01.04 0
1314 단편 커피3 박성우 2010.01.05 0
1313 단편 청학도靑鶴島1 먼지비 2010.01.09 0
1312 단편 1 하로리 2010.01.14 0
1311 단편 아멘(Amen)1 제시안 2010.01.17 0
1310 단편 아바탈(AVATAL)2 김몽 2010.01.18 0
1309 단편 주선전酒仙傳2 먼지비 2010.01.18 0
1308 단편 흑야 백일(黑夜 白日)2 언어유희 2010.01.20 0
1307 단편 남자의 손목시계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하늘을울리는별의종 2010.01.20 0
1306 단편 불나방2 츄다 2010.01.23 0
1305 단편 901384596 roi 2010.01.26 0
1304 단편 늑대인간 공주4 roi 2010.01.26 0
1303 단편 푸른 종이의 아이1 귓도리 2010.01.28 0
1302 단편 카슐라 언어유희 2010.01.30 0
1301 단편 타인의 섬 카르온 2010.01.31 0
Prev 1 ...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