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21221

2009.12.21 00:0112.21

 2012년 12월 21일은 마야 달력이 끝이 나는 날이며 덤으로 지구의 운명이 끝이 나는 날이다. 그리고 덤의 덤으로 그날 운명이 끝나는 지구의 인류 60억도 지구와 같이 단체로 초상 치루는 날이다. 하지만 덤의 덤의 덤으로 홍석인의 28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홍석인을 제외한 59억 9천9백9십9만 9천9백9십9명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홍석인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홍석인의 가정은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특이했다. 홍석인의 가정이 가진 특이한 개성은 여느 가정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홍석인이 특히 강조하는 지점이 있었다. 홍석인의 아버지의 생일은 12월 31일이다. 그리고 홍석인의 형의 생일은 1월 1일이다. 마지막으로 홍석인의 어머니의 생일은 8월 15일이며 음력으로 계산할 경우 추석이기까지하다.

 가족들의 생일이 이렇게 모두 다 특이하다는 것은 홍석인에게 있어서 꽤나 반길만한 일이었다. 생일을 챙기는 것이 너무 귀찮은 나머지 다들 포기하기 때문이다. 홍석인은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왜 굳이 생일을 챙겨주어야 하는가? 홍석인은 생일을 맞이한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고 생일을 맞이했던 모든 이들은 홍석인을 싫어하게 되었다. 홍석인은 생일선물이란 자신의 감정을 볼모로 부당한 물질적 감정적 수익을 획득하려는 바르지 못한 제도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도왔다.

 어쨌든 홍석인의 지론은 그러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왜 굳이 생일을 챙겨주어야 하는가? 더불어,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는 가족들 생일은 더더욱 챙길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후자를 대놓고 떠들고 다닌 적은 없었다. 홍석인은 홍석인이 생각하는 만큼 가족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홍석인은 홍석인의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홍석인의 어머니의 생일이 그가 대보름만큼이나 좋아하는 추석이라는 점은 존경의 이유에서 꽤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했다.

 12월 31일과 1월 1일 그리고 해마다 달리 찾아오는 추석은 모두 민족 명절이라는 명분하에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하는 날이다. 또한 생일 파티를 하기에는 영 분위기가 살지 않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홍석인의 가족은 자연스레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그것도 가족의 생일을 챙기는 일반적 문화 관습과는 궤를 달리하는 삶을 보내왔다. 가족의 막내이자 홀로 유일하게 평범한 날에 태어난 홍석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일케잌을 생일날 먹지 못했다.

 혼자 생일을 챙겨먹으니 기뻐할 만도 하다만 홍석인은 어렸을 적 그 나이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존재하지도 않을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슈퍼 그랑죠에 열광했다. 하지만 슈퍼 그랑죠에 대한 홍석인의 유아기 또래의 일반적 관심과 열정 일반을 뛰어넘는 병적인 도착에 비하여 출생의 비밀에 대한 탐구는 그 기간이 압도적으로 짧았는데, 9살 때쯤 다른 가족과 달리 자기 혼자만 평범한 날에 태어났다는 것이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고 믿기에는 자신의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탓이다.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의문은 간헐적으로만 나타났지만-홍석인의 어머니는 홍석인의 어머니라기에는 성격이 너무 착하고 홍석인의 아버지는 홍석인의 아버지라기에는 허리 둘레와 머리 둘레가 홍석인보다 압도적으로 얇으면서도 홍석인보다 10cm가량이나 컸다는 점은 홍석인이 짜내던 출생의 비밀에 관한 가설에 큰 설득력을 보태주었다.-생일에 대한 불만은 이어졌다. 다른 가족들에 비하면 통 재미가 없는 날이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불만은 생일을 중시하지 않는 가족 내의 관습에 더해져 홍석인이 생일이라는 기념일에 대해 갖는 반발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운이 나빠 홍석인과 적절한 친분관계를 유지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이 홍석인에게 예의상 생일을 물어볼 때면 홍석인은 그 자신은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으며-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어제가 자기 생일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홍석인의 거짓말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이 거지같은 놈이랑 알고 지내는 게 아무리 불편했어도 생일 하나 눈치를 못 채는 부주의를 저질러 빚을 진 기분이 들게 되었다며 짜증을 두 배로 내어 홍석인을 제법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28번째 생일날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은 홍석인에게 있어서 꽤나 반가운 뉴스였다. 어쨌든 인류는 2009번 1월 1일을 겪었지만-거기다 달력을 달리 쓰는 동네는 2000번 가량 더 겪었을 것이다.-지구 멸망은 이 별의 역사상 단 한번 있을 빅 이벤트니까 말이다.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 '내 별자리는 우디 앨런의 별자리와 같다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자랑거리가 없던 홍석인은 마야인들과 영화 [2012] 제작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비록 지구 멸망의 날이 자신의 28번째 생일이라고 해도, 28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그 어떤 이들과도 마찬가지로 홍석인은 자신이 받을 생일 선물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운석 낙하? 외계인 침공? 지각 변동? 핵전쟁? 자포드 비블브락스의 태만으로 인해 별 의미 없이 시작된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우리 항성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어서?

 홍석인은 마치 자신의 생일날 친구들이 마련해준 서프라이즈 파티를 눈치 챈 생일파티의 주역이 자신의 파티를 기대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2012년 12월 21일 지구 멸망의 과정에 대해서 상상했다. 운석 낙하라면 가능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크기로 글귀가 써있으면 좋겠군. '홍석인씨의 28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처럼 심플한 문구로. 외계인 침공은 [신체강탈자의 침입]이었으면 좋겠는데. 고전은 언제나 그 가치를 잃지 않으니까. 오, 안돼. 어쨌든 이명박 재임은 안돼. 차라리 핵전쟁으로 하자.

 물론 홍석인이 가장 기대하는 방식은 자포드 비블브락스의 태만으로 인해 별 의미 없이 시작된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우리 항성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이었다. 샘 록웰이 자포드 비블브락스의 역을 맡게 된 이후 홍석인은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트릴리언과 맺어진다는 비극적 결말을 내린 더글러스 애덤스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앞으로 나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6권에서 지구를 백만번 더 밀어버린다고 해도 신경 하나 쓰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구를 밀어버리는 것도 역시. 자포드 비블브락스는 샘 록웰이니까.

 많은 20대들이 '나는 내가 영원한 10대일 줄 알았지.'라고 말하고 많은 30대들이 '나는 내가 영원한 20대일 줄 알았지.'라고 말하며 많은 40대들이 '나는 내가 영원한 20대일 줄 알았지.'라고 말한다. -밝혀두자면, 이 문단에서 내가 낸 오타는 없다. 자신이 영원히 30대로서 살 것이라 기대하거나 견딜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홍석인도 많은 20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20대들이 '30살이 되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라고 말할 때 약간 다른 레파토리를 활용할 수 있었다. '28살이 되느니 차라리 지구를 멸망시키고 말지.'

 자기 자신이 지구 멸망의 원인이라는 유아기적 망상은 홍석인의 지적 수준에 딱 걸맞았다. 더욱이 소시민으로서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특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이 언제나 사람들 한 구석에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갖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특별한 인상도 주지 못한 채 심심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던 홍석인에게 있어서 2012년 12월 21일 자신의 28번째 있을 지구 멸망이라는 사건은 반갑기까지 한 경사였다.

 홍석인이 근본부터 유치하고 어리석지만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자신만은 살아남을 것이라 믿을 만큼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2012년 지구 멸망설을 들었을 때-당시는 자신의 생일, 즉 12월 21일이라는 구체적 날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홍석인은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이네. 28살이면 할 거 다 했겠네. 아무리 나라도 그때까지 제대로 연애 한번 못하겠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서 연애라는 단어에는 고등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하지만 고등학생이 알아서는 안 되는 상상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25살이 되기까지 홍석인은 연애를...말을 말자. 말을 말자 내가. 이제까지 서술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홍석인이 한심한지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넘어가겠다. 어쨌든 홍석인은 남은 3년 동안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으리라 믿을 정도로 구제불능은 아니다. 그럼에도 2012년 지구 멸망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이는 시험기간을 일주일 앞둔 고등학생의 마음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와중 홍석인은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자신의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신의 별자리가 밤이 가장 긴 주간의 별자리라는 것이다. 당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만화책 [백귀야행] 18권의 후기 만화를 보고나서 모든 것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12월 21일은 동지冬至였다. 정확히는 음력으로 11월 10일 내외가 동지라 한다. 그리고 홍석인의 음력 생일이 그 날이다.

 그러니 마야인들의 달력이 12월 21일에 끝이 나는 것은 그날 지구가 멸망하거나 혹은 홍석인의 생일이라서가 아니라 동지여서, 이기가 쉬울 것이다. 동지는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며 이 날이 지나면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다른 말로 일양내복一陽來復이라 하며 이 사자성어에는 악운이 가시고 좋은 일이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다. 달력의 끝으로 썩 나쁜 날은 아니다. 홍석인 생일이랑은 별로 상관없이.

 홍석인은 무척 애석했다. 세상에 지금 이만큼까지 이야기를 이끌고 왔는데 동지에 대해서 네이버 지식인이랑 다음 백과사전에서 검색한 걸로 마무리 지으면 너무 썰렁하잖아. 무언가 괜찮은 끝이 없을까 고민하다 홍석인은 자신의 감정을 볼모로 부당한 물질적 감정적 수익을 획득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계획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자신이 활동하는 사이트에 여태까지 자신의 생일과 그 생일에 대해 생각했던 잡다한 것들을 옮겨 적은 다음 '그런 의미에서 dcdc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글을 마치자는 것이었다. 홍석인답게 쪼잔하고 썰렁한 발상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써놓은 글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컴퓨터 고치느라 마음이 피폐해진 홍석인은 그만 무리수 중의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dcdc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
출간기념모임...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ㅠ_ㅠ
댓글 4
  • No Profile
    123 09.12.22 22:52 댓글 수정 삭제
    으악! 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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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c 09.12.23 13:3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비장의 개그였는데 반응이 없어서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
  • No Profile
    123 09.12.25 01:40 댓글 수정 삭제
    짐승이라는 얘기였음! 저,절대로 생일축하한단 얘기가 아님! 흥
  • No Profile
    dcdc 10.01.07 21:15 댓글 수정 삭제
    그러시면 제가 얀데레로 돌변할지도 모릅니다 우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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