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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청뢰장군

2009.12.14 23:0912.14

미세하게 진동하는 칼날이 새하얀 도광과 함께 반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공포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머리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조금은 어두운 색이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붉은 위용을 모두에게 확연히 각인시키고 있는 두정철갑 갑옷의 조선인 장수는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뜨거운 피가 얼굴에 튀었지만 키 7척의 용장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바로 뒤에 달려들던 후금 장수의 가슴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비명 소리와 함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그 장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절명해버렸다.
그는 생과 사의 이치가 하나의 혼돈으로 뒤엉킨 어지러운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무도한 오랑캐 놈들! 계속 덤벼 보거라!”

그는 조금 전 목이 날아간 후금 병사의 장창을 집어 들고는 저 멀리서 북방의 거친 말발굽으로 조선군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있는 기병에게 내던졌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창은 가슴 정중앙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고 그 불운한 후금 기병은 그대로 낙마해버렸다.
방금 자신이 날린 창의 결과물을 제대로 확인할 틈도 없이 알 수 없는 오랑캐의 언어를 외치며 달려드는 후금군 여럿의 습격을 받은 그는 그들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한 명은 그대로 즉사했지만 나머지 몇몇은 비틀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고얀 놈들!”

화살로 모조리 맞혀 버리고 싶은 그였고, 또 아무리 멀리 떨어진 표적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눈과 눈 사이 미간까지 맞출 자신이 있는 실력의 그였지만 궁대의 흑각궁을 빼들고 화살을 매기는 데에 시간을 소요했다가는 자칫 몰려드는 대군 앞에서 참살당할 위험이 컸다.
그리고 이 아수라 지옥과도 같은 오랑캐의 대지에서 그가 죽일 오랑캐들은 충분히 넘치고도 남았다.

“하하하, 길동무 삼을 이들이 참으로 많도다!”

그는 언제가 될지는 정확히 몰라도 곧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 황량한 만주의 벌판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때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을 때는 죽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오랑캐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아야 마땅했다.
그는 몸을 숙여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기병의 말 옆구리를 베어버리며 포효하듯이 외쳤다.

“나는 조선의 장수 김응하다! 은혜를 모르는 오랑캐들이여, 너희들은 이 나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도다! 모두들 덤벼라!”

조선군과 명군의 패배가 확실시되어가고 있는 심하 전투의 틈바구니에서 선천 군수이며 이번 원정에서 좌영장으로서 참전한 김응하는 죽을 장소를 찾기라도 한 듯 삶에 대한 일말의 주저도 없이 앞을 가로막는, 그리고 달려드는 모든 이들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실로 그 어떤 야수라도 압도할 강맹함이었으며 그 어떤 용장이라 할지라도 당해낼 수 없는 힘으로 그는 한 팔로 뭉쳐서 달려드는 적군 여럿을 단번에 밀어냈다.
김응하가 단순히 찌르고 베는 것을 초월한 실로 고강한 도법을 펼치기 시작했고 선명한 예기로 빛나는 도신은 화려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후금군이 비명을 내지르는가 싶더니 여기저기 머리와 사지가 떨어져나갔다.

“네 이놈들, 모두 죽어라!”

그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셀 수 없을 것 같은 화살들이 오직 김응하라는 한 인물을 노리며 잘 버무려진 촉을 빛내며 날아오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

그는 피에 젖은 환도를 칼집에 집어넣고는 긴 창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 피에 물든 초원 여기저기에는 주인 잃은 병장기들이 널려 있었다.

“으하하하하!”

그 잔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로 두 개의 창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허공을 무섭게 찢어발기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소음과 함께 화살들은 모두 튕겨 나갔다.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김응하 주위에 포진해있던 후금의 거의 모든 장수와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늙은 주정뱅이가 떠들어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저 조선 장수 앞을 가로막으려다 죽은 병사와 지휘관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그들은 은연 중에 알 수 있었다. 홀로 혈로를 개척해가고 있는 저 조선 놈은 물론 언젠가는 죽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달려들었다가는 비참하게 목숨을 잃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용맹무쌍한 초원의 전사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으, 이건 말도 안 돼!”

느긋하게 조선군 좌익을 전멸로 몰아가던 후금의 장수 마부태는 낮술이라도 한바탕 들이킨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 조선군 장수의 최후의 발악이 자신이 이끄는 부대에게 입힌 피해는 이제는 단순히 말로 꺼내기 힘들 수준이었다.
단순히 다른 녀석들에게 개망신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르하치님에게 개처럼 끌려가 목이 잘려나갈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저 조선군 장수를 의도적으로 도망가게 하도록 해줄 수도 없었다.
조선 녀석들은 자존심이 강하다고 분명 소문으로 들은 바 있으며 저 흉흉하게 빛나는 두 눈은 죽음을 각오한 이의 눈빛이었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자는 마음가짐으로 저 망할 놈의 조선 놈은 날뛰고 있었다.
죽을상이 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마부태는 곧 하나의 묘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주술사를! 주술사 놈을 빨리 데려오너라!”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역시나 알 수 없는 무늬가 그려진 가죽을 두른 주술사는 마부태의 호출에 두 후금 병사에게 억지로 끌려왔다.
겉으로는 침착한 얼굴로 마부태의 명령을 듣고 있던 주술사였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이런 젠장, 드디어 들켰구나! 진작에라도 도망을 쳐야 됐었는데!’

사실 주술사라고 떠벌리고는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한낱 떠돌이에 불과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눈속임 기술 몇 가지와 주술사들이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흉내 낸 것 뿐.
지금까지 어찌어찌 주술사로 잘 먹고 잘 살아왔지만 지금의 위기는 정말 간단히 넘기다 힘들었다.
만약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 가짜라는 것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으으, 내 목이 단숨에 달아날 거야! 아니, 그 전에 죽음을 애걸하게 만드는 고문을 펼칠 수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자, 주술사여. 어서 그대의 실력을 발휘하여 저 조선인을 어떻게든 해보게. 어서!”

한숨을 내쉰 주술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어라 빠르고 낮게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복잡한 손동작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마부태를 포함해 모든 후금의 전사들이 경건한 눈으로 그 의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속내는 물론 전혀 달랐다.
이왕 죽는 것 조금이라도 더 살기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주술사의 헛된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으으, 제발 아무나 저 망할 놈을 죽여라. 그러면 내 주술 덕분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데...’

그러나 이미 겁을 먹을 대로 먹은 후금군은 김응하 주변을 포위만 하고 있을 뿐 아무도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어떤 용감한 누군가가 화살을 날렸지만 너무나 쉽게 피해낸 김응하가 그 화살을 보내준 병사의 목에 정확히 창날을 박아주는 신기를 보여주자 아무도 감히 공격을 할 엄두를 못 내며 다시 거리만 벌리고는 대치할 뿐이었다.
주술사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쳐대며 격렬하면서도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대고 있었다.

‘으으, 난 죽었다! 악, 저 녀석의 눈이 점점 의심스럽게 변하고 있잖아?’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때였다. 맑은 겨울 하늘에서 갑자기 구름이 소용돌이치듯이 저절로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단순한 구름이 아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푸른 구름이 울부짖는 뇌광과 함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건 대체?”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은 채 숨을 고르고 있던 김응하는 하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푸른 번개가 조선의 장수를 향해 내리쳤고 그 푸른빛에 삼켜진 김응하는 이상하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전장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시력을 잠시 동안 앗아간 그 푸른 폭발 이후 하늘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오오, 주술이 효과가 있었군! 이걸로 우리들의 승리다!”

두 눈이 선명해지면서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마부태가 환호했다. 주술사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신명나게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심하 전투는 끝이 났다. 선천 부사 김응하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가 되어 조선의 왕은 충무의 시호를, 명은 요동백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후금 역시 김응하의 최후에 그들 나름대로 감탄하며 푸른 번개와 함께 전사한 장군이라는 뜻의 청뇌장군(靑雷將軍)으로 칭해 그 마지막 장소에 비석을 세웠다.
그렇게 모두는 김응하의 죽음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해나갔다.


대지에서 그 어떤 추악한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하늘만큼은 조용히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평화로운 날이었다면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시선을 둔 채 감탄했을 것이다.
정말 너무나 청명한 날이라고.
하얀 구름 조각이 장식으로 걸린 푸른 하늘은 바다처럼 드넓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름이라고는 없는 푸른 지점에서 점차 소용돌이치며 생겨나는 기괴한 보랏빛 구름이 요동치며 생겨났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 구름의 중심부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가면서 장대한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연속적으로 한 지점을 맹렬히 타격하던 푸른 번개 너머로 흐릿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허리 뒤편에는 활을, 그리고 등에는 화살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맨 채 한 손으로는 칼을 단단히 움켜진 사람이었다.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흐릿한 눈동자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자 김응하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남자다운 강건함이 느껴지는 준수한 얼굴을 장식하는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수염은 아직도 피로 젖어 있었다.

“푸른 번개....분명 괴이한 그 번개가...허허, 이것 참!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김응하는 끄응 하는 신음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누적된 전투로 엉망이어야 할 육체가 너무나 상쾌했던 것이다.

“흐음, 이것이 기록에서나 보던 번개의 효능이란 말인가? 직접 당해보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그렇게 탄성을 발하며 김응하는 주변을 좀 더 살펴보았다. 초록빛으로 찬란하게 우거진 들판이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는 오랑캐라던가 나뒹구는 사지와 병장기들, 그리고 코를 찌르는 혈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김응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그가 원래 있던 황량한 북방의 땅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아니?”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주변 여기저기를 바쁘게 살펴보던 김응하는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실로 거대하기 그지없는 성채가 자리 잡고 있음을.

“대단하군!”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웅장함과 장대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가까이 가면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성에서 시선을 못 박은 채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먼저 누군가를 만나보아야 마땅...흐음?”

김응하의 귀로 너무나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가 맞부딪치며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소리, 그리고 여자의 비명.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응하는 굳은 얼굴로 환도를 한 번 가볍게 휘둘러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내 집어넣고는 소리가 들려온 장소로 달려 나갔다.


크리세이스와 브리세이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너무나 멀리 자리 잡고 있는 트로이의 성 안으로 들어만 간다면 저 더러운 그리스 놈들의 노리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각각 크리네 섬의 아폴론 신전에서, 리르네소스에서 잡혀온 그녀들은 트로이 본토의 그리스 연합군 진영으로 끌려오던 중 알 수 없는 기괴한 기상 현상에 그리스군이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에 그 틈을 노려 같은 신세로 잡혀 들어가던 무녀들과 다른 여자들과 함께 도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꺄아아악!”

등 뒤에서 또 어떤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거친 목소리로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이 음담패설임에 분명한 이야기를 무어라 중얼대고 또 비웃어대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눈물이 나왔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치고는 놀랍도록 키가 커 당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브리세이스는 선명한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았으며 입 안은 고통스러운 갈증으로 가득했다. 숨도 더 이상 쉴 수 없었다.
트로이가 자랑하는 성은 아직도 너무나 멀리 자리 잡고 있었다.

“티케 여신이시여, 제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바로 옆에서 눈부신 태양빛을 그대로 물들인 것은 금발 머리의 크리세이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달리고 있었다.
브리세이스와 비교할 때 체구는 작지만 건강미를 알려주는 갈색 피부는 크리세이스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들 처지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이 내려준 축복은 오히려 재앙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의 진정함을 알지 못하는 야만인에게 꺾인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제우스님 맙소사! 크리세이스, 조심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이 그녀 앞을 추월해 나가던 크리세이스가 점차 비틀대는 순간 브리세이스는 그녀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떤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놀랍도록 장대한 체구였지만 갑옷으로 걸치고 있는 것이 분명 군인이었다.
그리스군? 트로이군?
브리세이스의 머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점차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 알 수 없는 남자가 걸친 갑옷과 투구의 모양은 그리스 연합군은 물론, 트로이군과 그 어떤 트로이의 동맹국과 닮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검은 색조를 띠고 있기는 해도 저 선명한 붉은빛의 갑옷이라니!

“꺄아악!”

거의 절망적인 심정으로 달려 나가느라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크리세이스는 그 정체불명의 군인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다가 다리가 꼬이면서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괜찮소?”

김응하는 머리 색깔과 눈 색깔이 참으로 이상한 여인을 부축해주며 말했다. 어찌하다보니 크리세이스가 김응하의 품속으로 들어와 껴안게 된,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쓰게 한 번 웃을 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브리세이스도 서둘러 김응하 옆으로 달려와 거칠게 숨을 몇 번 내쉬었다. 너무나 목이 말랐고 또 구토라도 나올 심정이었다.
방금 그녀가 들은 말(억양이 매우 이상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 알아들을 수 있었다)에 의하면 이 자는 분명 그리스 연합군은 아닐 것이다. 아니, 브리세이스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직 김응하를 보지 못한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은 비틀대며 장창을 휘두르는 여자를 에워싸고는 몇 번 상대해주다가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꺄아아악!”

깊게 베이지 않아 목에서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주저앉은 여자가 비명을 내질러내자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쳐다보던 김응하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피 젖은 손으로 목숨을 애걸하는 여자를 그리스 병사는 멍청하고 못 생긴 트로이 년이라고 놀려대고는 순식간에 목을 베었다.

“이런 잔인한 놈들!”

김응하는 분노를 토해내며 그리스 연합군 병사들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가 방금 전에 본 그 광경은 실로 잔악하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하지만 살기 위한 진심 어린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는 여자를 낄낄 대며 적당히 상대하며 조롱하더니 단번에 목을 베어버려 죽인 것이다.

“대낮에 연약한 아녀자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다니! 네 놈들이 정녕 그러고도 사람이란 말이냐! 실로 오랑캐보다 못한 야만무도한 자들이 아닐 수 없도다!”

그제야 김응하의 존재를 깨달은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은 이놈은 뭔가 하는 생각으로 쳐다보았다가 일순 안색이 굳었다.
키가 거의 2미터는 될 것 같은 위풍당당한 체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형상의 붉은 갑옷, 그리고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놀라운 투기에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두려움에 떨던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득의만면한 미소로 원래의 태도를 되찾았다.
최우선적으로 붙잡아야 할 전리품 년들을 빼면 적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겨우 저 놈 한 명 뿐이라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자신들은 13명이었고 저 놈은 겨우 하나였다. 아무리 바보라도 누가 이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사실이었다.

“멍청한 떠돌이야! 트로이의 용병이냐? 살고 싶으면 그 여자들을 순순히 넘겨주고 우리들의 발아래에 노예로써의 모습을 한 번 보여 주거라! 그러면 살려주마!”

그 말에 나머지 그리스 병사들이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김응하는 피식 웃으며 그 놈들을 쳐다보았다. 말투가 이상하기는 해도 저 서역인들의 말을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곡절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네 이놈들, 어서 덤벼라!”

그 말에 그리스 연합군 병사들은 또 한 번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흠?”

이제 김응하가 생각하기에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적군 녀석들 역시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래도 자신이 중원과 서역의 경계 비슷한 곳으로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와아아아!”

그리스인 한 명이 고함과 함께 달려오더니 검을 강하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목표는 분명 김응하의 머리, 아니면 어깨 근처였다.
그는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느리군!”

김응하가 발을 몇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리스 병사의 칼날은 허공을 베며 빗나갔다. 그녀들과 그리스군 모두는 방금 김응하가 보여준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가볍게 공격을 피해낸 김응하는 순식간에 그 병사 가까이 접근해 들어가며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크아악!”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거친 소음과 함께 그리스 병사는 목이 한쪽으로 거칠게 꺾이며 쓰러졌다.
피를 토하며 꿈틀대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살아는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참사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리스군 병사들 12명은 곧 검과 창을 치켜들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들 모두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며 섬광과 같은 예기를 자랑하는 칼을 빼어든 김응하에게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칼날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면서 화려하게 빛을 발했으며 김응하는 가장 먼저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녀석의 검을 가볍게 쳐내며 복잡하게 회전해 들어가더니 팔꿈치 부분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크아악!”

피가 뿜어져 나왔고 살이 갈라졌으며 뼈가 어긋났다.
조금의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기세 좋게 달려든 그리스 연합군의 병사들은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의 동시에 나뒹굴었다.
전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잡신들을 중얼거리며 신음하는 병사들을 김응하는 냉혹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네 놈들은 이곳에서 동료들이 구해주러 오기 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럴 수는 없어요.”

브리세이스는 바닥에 떨어진 칼 한 자루를 집어 들더니 제대로 운신조차 못 하는 그리스 연합군 병사들에게 천천히,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 아름다운 여성의 발걸음에 환호를 보내며 짐승처럼 달려들었겠지만 지금 병사들은 그녀의 뒤틀린 미소에서 하데스를 엿보고 있었다.
죽음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브리세이스님, 저도 같이 하겠어요!”

잠시 망설이던 크리세이스 역시 방금 전 목이 잘려 죽은 여자의 비참한 모습에 아폴론 신전을 약탈하고 자신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을 때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다시 솟구친 것이다.

“허어....”

김응하는 그저 혀만 차며 그런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그 병사들의 목에 어설프기는 해도 아주 정확히 칼날을 박아 넣는 그녀들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웠으며 안타까웠지만 그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들과 저들 사이에는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명백한 적의와 원한 관계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원한 관계는 오직 피로 맺힌 복수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지옥과도 같았던 왜란 시절 동생을 잃고 왜놈들을 피해 전국을 떠돌던 때 충분히 배웠던 그였다.
이윽고 신음 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그녀들은 피 묻은 얼굴로 자신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창백하고 황량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소?”

점차 생기가 돌아오는 그녀들은 거의 동시에 김응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마치 악귀처럼 칼을 휘두르던 모습은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나 연약한 여인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고맙습니다. 정말 무어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당신에게 아폴론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는 그렇게 화사한 미소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눈부신 햇빛 아래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그녀들의 외모에 김응하는 지금 그가 처한 상황과 자신이 해야 할 일조차 잠시 잊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아름답군.’

그러나 그것 뿐. 곧 그는 잠시나마 느낀 감정을 털어내며 그녀들에게 물었다.

“흐음, 그나저나....여기는 대관절 어디요? 나는 조선국의 장수인 김응하라 하오. 여기서 어디로 가야 조선으로 갈 수 있단 말이오?”

그 질문에 그녀들이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크리세이스는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응하를 쳐다보았다.

“정녕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브리세이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조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 한쪽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던 크리세이스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으로 김응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는 트로이의 땅이에요. 벌써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한 가운데이기도 하고요.”

김응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벽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저 실로 웅장한 곳이 트로이란 곳이오?”

“네, 신들이 쌓아준 성으로 그 누구도 함락할 수 없는 곳입니다.”

신들이라. 김응하는 브리세이스의 대답에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체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처음에 여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에 왜놈들이 기억나 순간적으로 적이라 판단, 단숨에 공격해 제압했지만 현재 그가 선과 악의 구별이 불명확하고 누구에게 전쟁의 정의가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 우발적으로 개입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죄책감이 든 것이다.

“혹시나 실례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감히 묻겠소. 이 전쟁이 대관절 왜 일어난 것이오?”

크리세이스가 뭐라 말하기 힘든 참으로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생각에 골몰해하면서도 뭐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나 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얼굴이었다.
브리세이스 역시 이 사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김응하가 요구한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시작했다.
가장 먼저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와 헬레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며 신들조차 인정하는 미녀 헬레네를 데려가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왔다는 설명을 하고 헬레나가 원래는 스파르타의 왕비였지만 파리스 왕자에게 서로 반해 트로이로 도망 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녀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김응하가 앞부분만 듣고는 너무나 무서운 기세로 버럭 화를 낸 것이다.

“아니, 지금 무엇이라 했소? 아무리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할지라도 남의 아내를 탐하여 쳐들어오다니! 인륜을 모르는 실로 탐욕스러운 자들이도다!

그 분노를 예상치 못했던 브리세이스는 물론, 가만히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던 크리세이스 역시 깜짝 놀랐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 영롱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길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김응하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저런 왜놈 같은 놈들에게서 죽임을 당하거나 유린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구사일생한 것이 조금 전이었는데 이런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들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아, 흥분하여 참으로 미안하오. 그나저나 이놈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구려. 남의 아내를 탐한다는 불경한 이유를 앞세워 이웃 나라를 치려하다니....고약한 놈들!”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분명 뛰어난 용장이었지만 그 사고방식이 참으로 고지식하다는 것을.
만에 하나 헬레네가 사실은 원래부터 스파르타의 왕비였고 그녀와 파리스 왕자가 같이 이곳 트로이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것을 말했다가는 거꾸로 트로이에 적대감을 품을 가능성(“이런 파렴치한 놈을 봤나!”)이 컸다.
그녀들은 트로이 전쟁의 전말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분노를 진정시킨 김응하는 저 멀리 자리 잡고 있는 트로이 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저 트로이라는 곳의 관리를 만나 조선으로 안내해줄 수 있냐고 부탁이 가능한지 모르겠구려. 서역의 지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장님이나 마찬가지라서...허허허!”

크리세이스가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런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맹장과 함께라면 그리스 연합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트로이 성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잘 됐네요! 우리도 트로이 성으로 가던 참이었는데! 같이 가면 되겠어요. 그렇죠, 브리세이스님?”

브리세이스 역시 크리세이스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이 장수가 자신들을 호위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크리세이스가 뛰어난 재치로 자연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다.

“아, 어차피 길이 같으니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지요. 더군다나 여인들을 여기에 그저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란 때 홀로 남겨진 여인들이 왜놈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 여인들을 혼자 버려두고 갔다가는 아마 저 병사들을 찾기 위해 나타난 나머지 군사들이 곧바로 그녀들을 붙잡을 가능성이 컸다.
크리세이스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잡더니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안 했네요! 전 아폴론님을 모시는 신전에 속해있는 몸이에요. 저희 아버지 크리세스가 신전의 신관이고요.”

서역 땅에는 참 많은 신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전까지 있는 걸로 봐서는 아폴론이라는 이름의 신이 가장 그 위세가 강함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김응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독특한 이름이구려.”

그 말에 크리세이스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브리세이스 역시 가슴에 새하얀 손을 얹으며 천천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브리세이스입니다. 트로이의 동맹국이었던 리르네소스의 왕 미네스의 왕비였지요.”

김응하는 그 말에 정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저 변방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한 나라의 국모에 해당하는 여인과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니!
김응하는 대번에 무릎을 꿇어 예의를 표하려 했고 브리세이스 역시 깜짝 놀라 급히 그를 말렸다.

“아, 전 이제 그러한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몸을 담고 있던 리르네소스는 이제 멸망하고 말았으니까요. 아킬레우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김응하는 쉽게 측량하기 어려운 크나 큰 비애와 슬픔, 그리고 절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저의 사랑이며 리르네소스의 왕이었던 미네스를, 그리고 저의 가족들도 모조리 죽여 버렸지요. 단지 트로이의 동맹국이라는 이유로...그렇게 저의 땅에서 살아가던 남자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고...여자들은 노예로 끌려갔지요. 저희들 역시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스 연합군의 진영에 끌려가다가 운 좋게 탈출 할 수 있었지요.”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취한다. 김응하의 얼굴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수염과 굳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실로 도적 집단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작자들이 아닌가?
브리세이스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리고 아킬레우스를 한 눈에 반하게 만든 희미한 미소로 말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저희들을 트로이까지 부디 안전하게 데려다 주세요. 이제 저희들이 갈 곳이라고는 그 곳 밖에 없답니다.”

크리세이스 역시 간절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트로이에만 가면 저주 받을 그리스 놈들을 한 번에 전멸시키고 이 전쟁을 트로이의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저주 받을 아킬레우스는 리르네소스를 멸망시킨 것도 모자라 아폴론 신전까지 약탈하고 유린했어요! 분명 신의 저주가 있을 겁니다. 제가 트로이의 신전에서 아폴론님에게 정식으로 저 신을 무서워 할 줄 모르는 그리스인들의 패악을 이야기한다면 분명 아폴론님께서 친히 강림하여 저들을 멸망시켜 주실 겁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반드시 트로이로 들어가야만 해요!”

그 확고한 믿음 하나만은 참으로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많이 어리석은 처자였다.
김응하는 측은한 눈동자로 크리세이스를 쳐다보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주먹으로 가슴 부분을 쾅쾅 두들겼다. 주먹이 갑옷의 두정 부분에 부딪혀 아플 법도 했건만 김응하는 아무런 고통의 기색 없이 실로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시오! 내가 안전하게 저 트로이라는 곳까지 데려다줄 것이니 말이오! 아무런 걱정 할 것 없소이다! 하하하하!”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는 이제는 살았다는 심정으로 김응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맞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미소였겠지만 김응하는 그저 ‘실로 아름다운 서역의 미인들이로다!’  하는 마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나저나 김응하님은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오셨나요? 부끄럽기만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브리세이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김응하는 약간 헛기침을 하더니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사실상 그의 주관적 시점으로 따지면 아직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심하 전투 때의 기억과 여기에 오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흠?”

김응하는 흥미롭게 듣던 그녀들의 눈동자가 괴이한 푸른 구름과 푸른 번개라는 대목에서 대번에 동그래지는 모습에 놀라 잠깐 말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크리세이스는 경악과 확신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부릅뜬 채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왜 그러냐고요? 세상에, 저희들이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푸른 번개 때문이에요! 그리스인들도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에 경악해 한눈을 팔았고 저희들도 이것은 올림포스의 신들이 우리들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해 필사적으로 병사 몇 명을 급습해 무기를 훔쳐가지고 도망을 친 것이에요! 맙소사, 그렇지만 그 번개가 당신과 함께 온 것이라니!”

브리세이스 역시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 헤라 여신이시여!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여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일종의 경외심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차린 김응하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길을 잃은 평범한 무장이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당돌하기 짝이 없는 크리세이스가 말을 가로채고는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로 외쳐댔다.

“역시나! 제 생각이 맞았어요! 당신은 아폴론님이 보내주신 영웅이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반신이시거나....하여간 당신은 자각 못하시질 몰라도 분명 저 무도한 그리스인들에게 아폴론님의 의지를 보여주실 분입니다! 오, 이제 신의 아들이라고 떠들어대는 아킬레우스 따위 단숨에 당신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에요! 하데스님 앞에서도 자기가 티데스님의 아들이라고 떠벌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호호호!”

김응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정색한 얼굴로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폴론이라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서역 잡신이 보낸 이가 아니오. 나는 오직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며 나라와 백성, 그리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조선의 장수 김응하일 뿐이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잡신이라는 말에 그녀들의 얼굴이 대번에 핼쑥해졌고 크리세이스가 격렬히 무어라 항의하려 했다.

“잠깐!”

김응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급히 제지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군. 하나...아니 둘인가?”

그의 말대로 들판 너머 저 멀리 말을 탄 병사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크리세이스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스군이에요!”

브리세이스는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김응하가 보기에 겁에 질린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을 잡으러 보낸 병사들이 왜 이렇게 늦나 확인하러 온 작자들 같았다.

“왜 이렇게 늦는...맙소사! 이건 대체!”

“저 놈은 누구야?”

김응하는 허둥대며 외치는 그리스 연합군 기병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궁대에서 흑각궁을 뽑아들었다.
그녀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짓이었다. 화살로 맞추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다.
등에 진 시복에서 장전 하나를 꺼내 천천히 매기면서 그대로 목표를 겨눈 김응하가 시위를 놓았다.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날아간 화살은 기병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고 피를 토하며 잠시 버둥대던 그리스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꺄악!”

그녀들은 경악했고 바로 옆에서 이 거리에서 활을 쏘다니 멍청한 놈이군 하고 비웃던 그리스 연합군 기병 역시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으아아악!”

김응하는 그저 화살을 다시 매길 뿐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이제는 혼자가 된 기병의 어깨에 박혀들었다.

“쯧!”

아무리 동료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빨리 도망치려 할 줄 예상 못 했던 김응하였다. 그 변칙적 움직임으로 인해 빗나가자 그는 서둘러 다음 화살을 집어 들었다.

“크헉!”

다음 화살 역시 어깨에 박혀들었다. 이제 장전의 최대사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끈질기도다...”

비틀대며 떨어지려던 그리스 연합군 기병은 아슬아슬하게 자세를 잡고 미친 듯이 말을 재촉해댔다. 이제 희미한 점 비슷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김응하는 편전과 통아를 꺼내들려다가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리까지 도망치는 그 모습에 결국 포기해버렸다.

“맙소사, 그 활은 헤라클레스의 활인가요?”

크리세이스가 또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김응하는 가볍게 무시하며 주인을 잃었음에도 한가롭게 들판을 거닐고 있는 말에게 다가갔다.

“이 말을 타면 저 트로이라는 곳으로 금방 갈 수 있을 것이오.”

고삐를 잡고 말을 끌고 오자 브리세이스는 놀랍도록 말을 잘 다루는 김응하의 실력에 감탄했고 크리세이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준 활을 쳐다보며 역시 자기 생각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김응하는 기병이 도망친 방향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비록 어깨이기는 해도 화살을 두 대나 맞았으니 기력이 다해 중도에 낙마했을 수도 있겠지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었다.

“추격병이 대대적으로 뒤따라 올 수 있으니 각자 위험을 대비하여야 마땅하오.”

그 말에 브리세이스는 이제는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시체 더미로 걸어가 주저 없이 방패와 장검을 집어 들었다. 피에 젖은 시체와 금발의 기품 있는 미모가 대조되면서 쉽게 보기 힘든 기괴한 풍광이 만들어졌다.

“으음! 브리세이스님, 제 것도 대신 집어주실래요?”

크리세이스가 질겁하는 표정으로 시체들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부탁하자 브리세이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 손은 두 개 뿐이거든.”

김응하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시체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크리세이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대신 칼과 방패를 가져다주었다.

“하하, 나에게 빚이 하나 생겼구려!”

크리세이스는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짓궂게 자신을 놀려대는 김응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안해진 김응하는 잠시 근엄한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말했다.

“자, 그럼 어서 말에 올라타시오. 제가 안장 위에 앉고 앞에 한 분, 그리고 뒤에 한 분이 같이 타면 되겠구려.”

그러고 보니 세 명이 한꺼번에 말에 올라탄 채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위험하지 않도록 천천히 말을 몰아야 마땅했다.
그 사실은 생각보다 빨리 트로이 성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걸어서 가는 것보다야 훨씬 유리하겠지만 열 받을 대로 받은 추격병들이 말을 마구 채찍질해 달려오는 속도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김응하는 조선의, 그리고 만주의 하늘과도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하늘을 멍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결국...또 싸워야 되는 것인가...”

크리세이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간힘을 쓰며 브리세이스를 말 위로 올려주느라 한창이었다.

“네? 지금 뭐라 했어요? 아니, 그것보다 저 좀 도와주세요!”

김응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앞에 쓰러진 것 마냥 엎드려 있는 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나 싶어 둘을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한 명, 그것도 거의 정신을 잃은 것 모양새로 말 머리에 몸을 맡긴 채였다.
어깨에는 화살도 몇 발 꽂혀 있는 것이 아주 완벽한 패잔병 모습이었다. 결국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다른 그리스 병사가 급히 부축해 아킬레우스 앞으로 옮겨다 주었고 지금 그의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목소리로 보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킬레우스의 조각과도 같은 외모가 분노로 새빨개지면서 점차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아킬레우스는 절규하며 눈앞의 병사를 걷어찼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고국의 그 어떤 여자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그 아름다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근거림!
아킬레우스를 한 눈에 반하게 만든, 그리고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 브리세이스를 손에 넣었을 때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녀를 사로잡았을 때 아킬레우스는 이 짜증나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아프로디테님의 선물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함께 행복해했다.
아킬레우스에게 있어 더 이상 전쟁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물도, 전쟁의 영광도, 그리고 미녀들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여자는 그녀 하나면 충분했다. 오직 그녀만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면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그녀를 얻었다고 말하고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라 말할 계획이었다. 아가멤논과 여타 다른 장수들이 막으려 들겠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해변의 그리스 연합군 진영으로 회군하면서 그녀와의 달콤한 상상에 흠뻑 빠진 채 힘없이 걸어가는 브리세이스를 틈만 날 때면 훔쳐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취하고 싶었지만 명목상의 군법을 그냥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식적이기는 해도 아가멤논에게 전투의 결과와 전리품에 대한 보고를 해야 마땅했고 이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전리품에 대한 소유권을 결정할 경우 그 명예와 이름에 있어 큰 손상을, 그리스 연합군 전체를 무시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져 처벌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킬레우스에게 있어 상상도 못한 시련을 선사했다.
휴식을 위해 중간에 잠깐 멈춰 섰던 것이 화근이었다. 망상으로 가득 찬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에 대한 달콤한 꿈으로 잠시 잠이 든 사이 병사들이 말하길 제우스님이 행하신 권능임에 틀림이 없을 번쩍이는 푸른 번개가 대지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저 멀리서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했다.
올림포스의 신들을 경배하는 모든 이들이 거기에 정신이 팔렸을 때 이를 아폴론님이 준 탈출 기회라고 여긴 그녀들이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는 것이다.
뒤늦게 아킬레우스가 잠에서 깨어나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았을 때에는 이미 그의 부관이 대신 보병들로 추격대를 편성, 잡아오도록 명령한 상황이었다.
연약한 여자들은 제대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며 도망친 사실을 알자마자 곧바로 추격대를 보냈기 때문에 곧 잡혀올 것이라고 전리품 감시와 호송을 맡은 장수가 급히 변명을 하자 길길이 날뛰던 아킬레우스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리스의 영웅에 걸맞는 여자라면 마땅히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불현듯 나타난 그 화려한 푸른 번개야말로 제우스님이 자신들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일종의 상징이라 멋대로 이해한 아킬레우스는 곧 기분이 좋아졌으며 다시는 도망 못 가도록 아킬레우스가 큰 관심을 가지고 전리품으로 소유할 것이라 공언한 브리세이스와 그 미모가 브리세이스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아 아가멤논에게 바치기로 결정한 아폴론 신전의 무녀인 크리세이스만을 생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는 부관의 말에도 적절한 처분이라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리품 감시에 소홀했던 장수를 몇 번 매질한 아킬레우스는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즉시 목을 베겠다고 경고하고는 진영으로 먼저 회군해버렸다.
느긋하게 자신의 막사에서 브리세이스가 오길 기대하던 그는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늦는다는 불길한 느낌에 얼른 부관에게 날랜 기병 둘을 보내 상황을 알아오도록 지시한 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으아아아! 이 무능한 새끼들! 그리고 붉은 갑옷! 그 놈을 직접 내 손으로 죽인 후 내 여인을 되찾을 것이다!”

코가 완전히 뭉개져 피로 엉망인 병사를 한 번 더 강하게 발길질한 아킬레우스가 거칠게 으르렁대며 칼을 뽑아들자 막사 안, 그리고 밖의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 좀 하세!”

당장이라도 전차를 타고 달려갈 기세의 아킬레우스를 막은 것은 리르쿠네스 전투에서 돌아왔음에도 아가멤논과 자신들에게 찾아와 정식으로 보고하기는커녕 숙소에 틀어박힌 아킬레우스를 이상해하며 찾아온 오디세우스였다.
아킬레우스는 뜨거운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노려보며 오디세우스를 노려보았다.

“흥분? 난 전혀 흥분하지 않았어! 지금 당장 나는 내 여자를 찾으러 가야 돼!”

“음, 아가멤논이 지금 급하게 자네를 찾고 있네. 리르쿠네스 전투의 경과 보고를 서둘러 해야 마땅한데 사적인 일로 그렇게 흥분해서야 되나?”

“젠장, 그 망할 아가멤논! 난 그리스의 영웅이야! 그깟 녀석 따위 두렵지 않아!”

발끈하는 아킬레우스를 오디세우스는 침착하게 달랬고 또 경고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여기는 적지야. 자넨 혼자이고 아가멤논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왕이고. 그걸 주의하게.”

아킬레우스는 그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그는 입을 꽉 다문 얼굴로 오디세우스를 차갑게 응시했다.

“좋아, 나를 그렇게 원하는 아가멤논 녀석에게 찾아가도록 하지. 그 대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군사들을 개인적으로 출전시키겠어! 젠장,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부관에게 여자와 관련한 개인적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조금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깟 여자 한 명을 위해 정예 그리스 병사 수천을 동원하다니?

“이거 참! 지금 아가멤논은 방금 찾아와 저주를 퍼붓고 간 아폴론 신전의 사제와 관련해서도 의아해하고 있네. 우리 군이 자기 딸을 끌고 갔는데 적절한 보상을 할 것이니 돌려 달라던 가? 당연히 아가멤논이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자 격분해하며 저주를 퍼붓더군. 그거와 관련해서 아는 일이 있나?”

아킬레우스는 간단한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의 관심사라고는 오직 브리세이스 뿐이었다.


김응하는 적잖이 놀란 눈으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구조물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지척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무어라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위로는 푸른 하늘을, 아래로는 대지를 압도하는 회백색의 인공 구조물은 그 어떤 군세의 파도라 할지라도 능히 막아낼 위엄과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김응하가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상태로 트로이에 접근하면 혹시나 우리를 적으로 알고 대뜸 공격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저와 브리세이스님이 먼저 가서 이야기할게요. 저기 제 말 듣고 있죠?”

김응하는 크리세이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저 멀리 들판 너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으음!”

이렇게 빨리 추격이, 그것도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로 따라붙을 줄이야!
쉽사리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군세가 점차 선명하게 그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그 광경에 김응하는 신음했다.

“아무래도 빨리 가보아야 할 것 같소이다. 어서 말에서 내리시오! 어서!”

수천의 적군이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상황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말에서 내렸다.

“당신도 같이 가야 되요! 저희들만 갈 수는 없어요!”

칼은 버리고 일단 방패만으로 몸을 보호하기로 마음먹은 브리세이스가 트로이의 성문 앞으로 서둘러 달려가려다 김응하가 말 위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활을 꺼내들자 그 의도를 깨닫고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크리세이스 역시 김응하가 저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창백한 얼굴로 바로 불과 불과 다섯 보(약 3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트로이의 웅장한 성문과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그리스 연합군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김응하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뒤따라갈 것이니 걱정할 것 없소. 먼저 가시오!”

브리세이스는 그럼에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며 주저했고 결국 크리세이스가 억지로 잡아끌었을 때
크리세이스 역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장검을 김응하에게 건네주었다.

“아폴론님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그녀들은 트로이의 성문으로 가는 와중에도 연신 김응하를 걱정스럽게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오직 시선을 전장에만 못 박아두며 통아 끈을 팔목에 매고 있었다.

“쉽지는 않겠군.”

아무리 갑옷과 장비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는 해도 저렇게나 수가 많으면 생사가 위험했다.

“흐음!”

김응하는 통아에 편전을 담고는 천천히 시위를 매겼다가 놓았다.
통아를 빠져나간 작은 화살은 소리만으로 표적을 찢어버릴 기세로 순식간에 날아가더니 목표로 삼은 적의 이마를 단번에 꿰뚫었다.

“역시나 허둥대는군.”

김응하는 재빨리 편전을 다시 꺼내들면서 중얼거렸다. 왜군이나 북방의 오랑캐 놈들처럼 저들은 편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하고 있었다.
사거리가 장전보다 두 배나 되고 그 관통 능력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편전이었지만 아쉽게도 7발, 아니 이제는 6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되도록 말을 탄 녀석들, 또는 그나마 주변 녀석들과 비교해 그 갑옷과 투구가 화려한 녀석들을 우선적으로 노려야만 했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파공성이 여러 번 울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편전이 떨어져버렸다.

“달려오지 않은 것인가? 벌써 겁을 먹다니 참으로 한심하도다!”

서역 땅의 장수들 그리고 병졸들은 아무리 변방의 오랑캐라고 해도 너무나 그 질이 너무나 떨어지는 작자들이었다.
불과 6, 7발의 편전 공격에 지금 수천의 적군은 처음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한심한 꼴이라니!

“참으로 그 기술이 못하도다.”

화살을 열심히 쏴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거리나 적중력 등등이 의례용 화살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하긴 등자도 없이 말을 몰고 다니는 녀석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김응하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아들고 발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장전의 사거리까지, 그리고 꽁꽁 숨어있는 적군이 자신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몰고 갔다.
적이 오직 하나라는 사실에 그리스 연합군은 최초의 용기를 되찾고는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돌격하기 시작했다.
김응하는 화살을 매김과 동시에 시위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남은 장전의 수는 이제 겨우 10발 남짓.

“화살이 다 떨어지면 돌진해 들어가야 마땅하겠군.”


트로이의 성문 앞에서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전 리르네소스의 왕비 브리세이스입니다. 페르네소스라면 저의 얼굴을 알 거에요!”

“이 전쟁을 단번에 끝낼 방도가 저에게 있어요! 그들은 아폴론님에게 무례를 범했어요! 트로이 성으로 들어가 신전에서 정식으로 간청한다면 직접 개입하여 저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그리스 놈들을 전멸시켜주실 겁니다!”

그녀들은 그렇게 외쳐댔지만 트로이의 성문은 굳게 닫힌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화살이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치는 병졸들을 우악스럽게 독려하는 말 탄 장수의 눈을 꿰뚫는 것을 확인한 김응하는 흑각궁을 궁대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형편없이 빗나가기만 하던 화살 중 몇 발이 정확하게 김응하를 향해 날아들어 왔고 그는 방패로 재빨리 막아냈으나 불행히도 말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이런 제길!”

김응하는 서역에도 명궁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아니면 운이 아주 좋은 놈이 있거나) 너무 방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거칠게 땅에 나뒹구는 말과는 별개로 아주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한 그는 바로 코앞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서 흉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적군을 쳐다보았다.

“장관이로군. 실로 숲이 아닐 수 없어!”

그렇게 일갈한 김응하는 방패를 내던지고 한 손에는 장검을, 다른 한 손으로는 환도를 뽑아들었다.
두 팔을 교차하는가 싶더니 김응하는 순식간에 빽빽하게 인간의 숲을 형성하고 있는 그리스 연합군을 향해 몸을 날렸고 폭발할 것처럼 번뜩이는 섬광을 뿜어내며 휘둘렀다.
하잘 것 없는 갈대, 아니 그저 잡초 마냥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죽음이라는 끝으로 향했다. 왜 처음 오게 됐는지 망각할 만큼의 세월을 전쟁으로 보낸 이 트로이의 땅에서 그들은 이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각자의 욕망과 꿈, 소망하던 모든 미래를 상실했다.
난공불락일 것 같던 인간의 숲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점차 황폐해지면서 순식간에 그 구멍을 드러내며 와해되고 있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난자당하는 피와 살이 대지를 기름지게 만들고 있었다. 사지가 처참하게, 그리고 너무나 깔끔하게 토막이 나고 있었다.
그는 분노였으며, 감정 없는 운명의 대행인이었으며, 스틱스 강 이전에 죽음을 안내하는 사자였다. 대적할 도리가 없는 맹수 앞에서 사냥감 신세로 저항하던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잘려나간 상처를 한 손으로 감싸며 그리스의 장수가 울부짖었다. 울분과 고통으로 가득 찬 울부짖음은 목이 떨어져나간 뒤에야 그쳤다.
그 누가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그 누가?


“대단하군.”

헥토르는 성벽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장군.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고차원의 검술과 무예로 적진을 유린하고 있는 그 아찔한 모습에 헥토르는 무인 특유의 호승심과 흥분으로 격동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저 붉은 갑옷과 투구! 처음에는 이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참으로 멋지고 또 탐이 났다.
무수한 화살과 칼날, 창날이 스쳐지나갔지만 아주 완벽하게 막아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천의 그리스군이 오직 한 명에 의해 겁을 먹었어.”

헥토르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전투를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성문 앞의 두 여자는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면서 문을 열어주길 간청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수천의 그리스군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상황에서 겨우 여자 둘 때문에 문을 열어주었다가는 지금까지 함락되지 않던 트로이가 일순간에 무너질 위험이 컸다.
그리고 저 여자들은 그 위험성을 감수 할 만큼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명은 동맹국의 왕비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무력하게 아킬레우스의 손에 멸망해버린 터이라 이제 이용가치가 없었고 다른 한 명은 트로이 성 안에도 넘쳐나는 아폴론 신전의 무녀일 뿐이다.
지금도 아폴론님이 전쟁에 개입하실 방책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기는 하지만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신들은 이 전쟁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저 자기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올림포스의 신과 이 전쟁의 유일한 연결점은 아킬레우스 뿐이었고 그마저도 불분명했다.

“호오, 이거 상황이 더욱더 재밌어지는군.”

헥토르는 두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번쩍이는 전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나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있는,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의 남자가 전차를 몰며 전장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가멤논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보낸 부하 녀석들은 벌써 트로이 성벽 코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만약 그 멍청한 녀석들이 자신의 여자를 조금이라도 험하게 다루면 진정한 분노가 무엇인지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달려온 그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모습은 실로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이...이건 대체?”

수천의 그리스 연합군이 단 한 명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만 수만 해도 이미 일백은 되는 것 같았고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며 공격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전차를 급히 멈추고 트로이 성벽을 등진 채 홀로 대군과 맞서 싸우는 ‘그’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전혀 처음 보는 괴이한 형태의 붉은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단단히 감추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그리스인은 물론, 트로이인 역시 절대 아니었다.

“브리세이스!”

아킬레우스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있었다. 견고하게 닫혀 있는 트로이의 성문 바로 앞에 아폴론의 창녀가, 그리고 브리세이스가 서있었다.

“브..브리세이스!”

아킬레우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하고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걱정 어린 눈으로 붉은 갑옷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브리세이스는 자신의 것이었다. 리르네소스를 공격할 때 용맹하게 선두에 선 것도,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해 전리품으로 챙긴 것도 바로 그였다.
그녀는 마땅히 자신에게 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빼앗겼다. 저 당당한 풍채로 전장을 휩쓸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자신의 여인을 가로챈 것이다.

“내가 너에게 대답을 요구하노니 너는 누구냐!”

아킬레우스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브리세이스를 잃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머리는 말하고 있었다. 저자를 죽이고 그녀를 다시 되찾으라고!

“대답해라, 하찮은 자여! 너는 누구냐! 나는 아킬레우스, 테디스 여신의 아들이며 브리세이스의 주인이다! 내 여자를 당장 돌려 달라!”

오직 한 명을 목적으로 둥글게 에워싼 채 포위하고 있던 그리스 연합군은 아킬레우스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고함을 질러대며 나타나자 즉각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하고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그때가 돼서야 붉은 갑옷의 남자는 아킬레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둡게 빛나는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살아오면서 저런 기세를 뿜어내는 눈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저 자는 누구란 말인가?
아킬레우스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제우스님의 이름으로 묻노니 너는 대체 누구냐?”


저 자가 대장이로군.
김응하는 숨을 몇 번 거칠게 몰아 내쉬면서 말 두 필을 이어서 만든 마차 비슷한 이상한 무언가를 타고 온 건장한 체격에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의 젊은 청년을 노려보았다.
몇 번을 격돌하면서 적군을 치열하게 도륙하자 전체적으로 김응하가 보기에 그 전투력과 장비 등의 질이 매우 좋지 않은 그리스군은 정면 대결에서 물러나 둥글게 포위망을 형성, 자신을 노리는 대치 상태로 접어든 상황이었다.
번개에 맞아 길을 잃기 전 후금 녀석들과의 상황과 묘하게 똑같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원형 포위망 한 쪽에 자리한 그리스군의 병사들이 서둘러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청년.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고 병사들이 나타난 것만으로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젊은 나이임에도 분명 이들 모두를 통솔하는 자리에 있는 자임에 틀림없었다.
흥미롭게 그 청년을 쳐다보던 김응하는 그 청년이 무어라 오만하게 외쳐대는 말에 무슨 소리인가 집중했다.
번개의 효능인지는 몰라도 서역인들의 말을 딱히 배우지는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었지만 흐릿하게 들리기도 했고 멀리서 외칠 때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뒤늦게 그 청년의 말을 알아들은 김응하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고 그는 일순 피가 역류할 것 같은 분노에 휩싸였다.

“하루 강아지 같은 놈이 감히 범에게 이름을 묻는단 말이냐? 오냐, 나는 조선국의 장수 김응하이다!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왔노라! 네 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 금발 청년은 무표정하게 김응하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아킬레우스!”

그걸로 끝이었다. 그 버릇없는 대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김응하는 저 작자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에 해당하는 놈이라는 걸 깨닫고는 애써 참으며 일단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이미 브리세이스의 고향과 남편, 그리고 가족을 참살했으면서 또 무엇을 바란단 말이냐? 네가 정녕 인륜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라!”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를 소릴 지껄이는 김응하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아킬레우스는 오직 브리세이스만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 여자가 되어야 할 브리세이스를 스스로 물러나 트로이로 보내줄리 만무했다.

“그 여자는 내 여자다! 어서 돌려 달라!”

그 말에 참고 참던 김응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네 이 고얀 놈! 네 놈이 정녕 내 손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저 여인의 가족과 남편을 죽인 것도 모자라 뻔뻔히 능욕하려 들다니! 네 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란 말이냐! 네 놈은 개보다 못한, 아니 왜놈들보다 못한 말종이로다! 하늘을 대신해 단죄해주마!”

여기저기 이가 빠져 흉해진 장검을 던져버리고 환도로 자세를 바로잡은 김응하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
김응하의 두정갑 안쪽에는 방호철판이 빽빽이 들어차있어서 무게가 무거웠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어? 으악!”

무시무시한 기세와 속도로 쇄도해 들어오는 그 기세에 아킬레우스는 급히 칼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새하얀 섬광과 함께 찔러 들어가는 환도는 아킬레우스의 칼을 박살내면서 그대로 목을 꿰뚫고 들어갔다.

“끄...끄거어억...”

충혈 된 아킬레우스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김응하를 쳐다볼 뿐이었다.
눈에 띄게 창백해진 안색의 김응하가 단숨에 칼날을 빼내자 아킬레우스는 숨조차 제대로 못 내쉬면서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는 헛된 시도와 함께 천천히 무너졌다.

“크윽....”

김응하는 몸 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순간적으로 몸을 구부리면서 메마른 기침을 연속적으로 했다.
입에서는 무언가 질척하고 쓴 액체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너무 무리했단 말인가? 이게 대체...”

땅을 짚고 서있는 다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부처럼 밀착되어 아무런 존재감을 느낄 수 없던 갑옷과 투구가 갑자기 천근만근 마냥 무거워지고 있었다.
도통 영문을 모를 조화였다. 그러고 보니 방금 그의 손에 죽은 저 건방진 청년이 신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크리세이스에게 들은 것이 기억났다.
설마하니 그것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허허...”

김응하는 검붉은 피를 연신 입에서 흘리며 힘없이 웃었다. 여기서 이렇게, 그것도 서역 잡귀신 따위에게 죽을 줄은 몰랐다.
시야가 제대로 보이자 않는 것을 시작으로 하늘과 땅을 인지하는 감각이 점차 어지러워졌다.
차가운 흙이 볼을 통해 느껴지는가 싶더니 둔중한 충격이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깊은 암흑 너머로 모든 것을 맡기기 직전 김응하는 땅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허어?”

눈을 뜨고 보니 낯선 천장이 그를 반겨주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전혀 처음 보는 방이었다.
은은한 꽃 향이 느껴지고 이런저런 장식에 부드러운 비단 비슷한 천을 덮고 있는 걸로 봐서는 꽤나 화려한 방이었다.
김응하는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그게 모두 꿈이었단 말인가?”

“무엇이 꿈이란 말인가?”

방을 뒤흔드는 느낌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누군가 싶어서 쳐다보니 강골한 체격에 멋들어진 수염까지 기른 남자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서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까지 머금고 있지만 두 눈은 범접하기 힘들 정도의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난 트로이의 왕자이며 이 땅을 지키는 헥토르라고 하네. 어제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어. 그 덕에 이번 전쟁이 끝날 희망이 조금이나마 보이니 다행이지.”

김응하는 왕자라는 말에 예의를 취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다.
지금 자신이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상태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음, 치료와 몸의 땀을 닦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불쾌해하진 말기를.”

헥토르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자 김응하 역시 무안한 얼굴로 급히 침상 위의 천을 끌고 와 대충이나마 몸을 가렸다.

“입을 옷을 가지고 오도록 명하지.”

김응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라는 여인들은 무사히 여기에 왔습니까?”

헥토르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누구인지를 깨닫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물론! 지금 브리세이스는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크리세이스라는 여인은 아폴론 신전에서 아폴론님에게 정식으로 간청할 의식 준비를 하고 있지. 뭐, 그 여인 말로는 이걸로 그리스군은 끝이라고는 하지만...”

헥토르는 마지막 대목에서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일단 자기가 호위해주기로 한 여인들이 무사히 왔다는 사실에 안도한 김응하는 이 트로이에 온 본연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나라의 왕자라고 하니 부탁합니다만..혹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아신다면 조선으로 갈 수 있는 배를 내줄 수 없겠습니까? 아니면 육로로 안내를 해주시는 방안도...”

헥토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가 조선이라는 알 수 없는 나라의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들을 통해 알고 있는 그였다.
조선.
트로이의 모든 학자들에게서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알 수 없다 했으며 오직 몇몇만이 동방 저 너머의 나라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을 뿐이었다.

“물론 알고 있지. 다만...배로 가려 해도 이 나라를 침공해온 그리스 연합군이 모든 항구를 장악하고 있고 육로 또한 포위하고 있는 지라...어찌할 도리가 없군. 안타까운 노릇이야...”

김응하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차 일그러지더니 천천히 그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군. 우리들 역시 이 트로이 성 안에서 농성한지 벌써 5년이 넘었어. 다만 어제 자네가 그리스 제일이라 칭송받으며 이번 전쟁에서도 우리의 발목을 잡던 아킬레우스를 죽여주었으니...이제 전황이 우리들에게 유리, 아니 역전 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곧 전쟁이 끝날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 한 1, 2년만 우리들과 같이 지낸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야.”

헥토르의 위로에 김응하는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생각했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서역의 전쟁에서 참가하여 적을 도륙하고 트로이라는 나라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단 말인가?
김응하는 자신을 덮친 그 푸른 번개를 저주하며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루 빨리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마땅했다.
오직 그것만이 김응하가 조선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도이니.
어쨌거나 김응하 자신이 도와준다면 병법을 포함해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조선과 비교해 너무나 뒤떨어지는 이 트로이라는 나라는 이 전쟁에서 분명 승리할 것이다.
트로이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날이 올 때에 그 또한....

“전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신이 곧 돌아가 오랑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낼 것입니다!”

김응하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한 목소리로 외쳤고 그 모습을 헥토르는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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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를 보다가 불현듯 저 난장판에 임진왜란 조선 장수가 난입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써본 글입니다. 시간 보호군 연작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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