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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어다니는 용

2009.12.12 18:2012.12

   붉은 비늘과 유연하고 긴 몸을 지닌 그 용은 북쪽 산맥에서 오랜 세월 동안 둥지를 틀고 살아왔다. 그 용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악취나는 숨결과 노랗게 찢어진 눈과 번들거리는 광택을 가진 거의 유일한 용이었다. 다른 용들은 대개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다. 어린 용이 근처에 둥지를 틀러 오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천둥처럼 으르렁대며 번개의 섬광 아래서 싸워 어린 용의 부드러운 살점과 피를 조각조각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용이라고 하는 단어는 오로지 그 용만을 가르키는 이름으로 쓰여왔고, 또 실제로도 그랬다. 그 용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왕국들마다 흔하게 왕가의 시조에 갖다 붙히기 마련인 전설들에서 그 용이 등장하고는 했지만, 대개 왕국들은 용보다 빨리 사라졌던 탓이다.
   용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마다 달랐으나 실제로 처녀를 제물로 받는다든지 보석을 씹어먹는다든지 하는 일을 본 사람은 없었다. 용의 크기를 생각해보아도 그 정도로 거대한 몸집이 하찮은 미물을 먹고 싶어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 용은 자기 둥지의 발치에 얼마만큼 사람이 모여 사는지에 관해서도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이 발치의 개미나 딱정벌레를 일일히 신경쓰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다른 용이 제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반드시 이길 때까지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이 깃을 치며 날아오를 때면 산 아래의 작은 사람들은 겁에 질려 문을 닫아 걸고 용의 발치 쯤에나 올 그들의 집이 그들을 용의 발톱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용은 오랫동안이나 그가 깃든 북쪽 산맥만큼이나 경외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거대하고, 오래되고, 한결같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인간을 초월해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히 그를 숭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흡사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의 형상을 닮은 무엇인가를 만들기라도 할라치면, 용이 산에서부터 날아와 모든 것을 발톱으로 뭉개버리고 자신을 그들의 짧은 언어에 담았다는데 분노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자들과 현자는 아니더라도 이따금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한 목동들은, 언제나 반복되어 왔듯이 해가 저물어가며 황금빛 석양을 길게 뿌릴 때 간혹 자신의 둥지에서 날아올라 광활한 영지를 내려다보는 용의 그림자를 보고서 그 강함과 거대함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에 경탄하곤 했다.

  이제 이야기는 북쪽 산맥 꼭대기에서 내려와 산 아래의 좀더 작은 것이 된다. 북쪽 산맥 아래 펼쳐진 야트막한 구릉지에서는 백년 또는 이백년 정도의 세월 동안 지속되는 왕국들이 일어섰다가 스러졌다가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용맹한 기사의 모험담에 들떠 집을 나섰다가 병사의 먼지투성이 삶을 지나 고단한 늙은 양치기가 되기까지의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는 나라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칼과 윤기 있는 방패에 새겨진 문장을 갖고 있었으나 이내 문장은 다른 것으로 바뀌곤 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일백명을 베었다는 무용담으로 왕국보다는 조금쯤 오랜 세월 기억되는 기사가 아닌 보통의 기사라고 해도 그 갑옷 한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도 없는 광부들과 대장장이들의 시간이 필요했다. 왕국이 하루 해처럼 바뀌는 동안 담금질과 망치질과 섞여드는 쇳물이 있었고, 몇몇 현자들은 그들의 오두막에서 나와 좀더 마법적인 힘들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북쪽 산맥과도 같이, 변하지 않는 금과도 같이 유지될 왕국과 평화를 위하여. 그러나 오두막을 나선 자들은 조급해진 나머지 변하지 않는 것은 금이지 다시 녹여지고 부어져 새 형상을 갖출 왕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부러지지 않는 칼과 깨지지 않은 방패를 만들 질 좋은 쇠를 위한 마법들. 칼이 날카로워지고, 방패가 단단해지고, 이제는 일곱 겹 도끼를 두동강내는 기사의 팔 힘보다도 강한, 하루에 해가 가로지르는 거리를 따라잡는 말보다도 끈기있는 마법들도 나타났다. 첫째 힘은 용의 숨결이라고도 하고 용의 불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용이 불을 뿜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무슨 무슨 기름과 부뚜막의 먼지와 검댕의 수상쩍은 혼합물은 큰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타올랐으며 그 힘을 갈무리하면 성벽도 단숨에 부술 수도 있었고 쇠로 된 탄환을 멀리 날려보낼 수도 있었다. 두번째 힘 역시 용의 숨결이라고도 하고 용의 물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용이 물을 뿜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군주들 앞에서 밀봉된 그릇 아래 불을 피우면 용이 숨을 내쉬는 듯이 씩씩거리며 바퀴가 말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돌았다. 이 두 가지 힘은 전쟁의 양상을 이전과는 꽤 많이 바꾸어 놓았으며, 기사들보다는 이제는 마법사로 불리는 현자들의 도구와 하인들이 맞부딫히며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왕국들이 여전히 백년에서 이백년 정도의 세월만 지속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이번에는 한 사람과 하나의 사건을 들여다보자. 왕국이 있었고, 여느 왕국처럼 궁중 마법사가 있었고, 여느 왕국처럼 왕은 그 궁중 마법사가 그에게 가져다 주는 것에 만족하여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있었다. 여느 마법사들이 바라는대로, 마법사는 두 가지 비밀을 알아내기를 원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금속을 만들어내는 법을 원했다. 그러나 그를 고용한 왕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또 그는 불사의 영약을 만들어내는 법도 원했다. 역시 그를 고용한 왕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왕과, 다만 왕관을 쓰지 못했다는 점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마법적 지식의 결과물-이를테면 부귀영화라든가 불로장생과 같은 것-만을 꿈꾸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오로지 그 마법적 지식이 증명해 보이는 것,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바로 그것이 자신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원했다. 마법사는 어릴 적 그의 스승인 현자가 한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단다, 꼬마야.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은 언젠가 사멸하고 부스러져서 먼지가 되지. 너와 나, 이 세상조차도 말이야." 그러나 그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되살아날 수 없었고, 두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건만 이미 멸망해버린 왕국에는 복수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든 이 모든 저주스러운 혼돈이 하나의 영속적이고 안정된 균형으로 자리잡는 것 뿐이었다. 현자의 꼬마는 부모를 되살릴 능력이 없는 스승을 떠났고 이제 두가지 용의 숨결, 용의 불과 물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세상에서 마법사는 스승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는 변하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을 단 한가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북쪽 산맥, 그 용, 용이었다. 용의 피로 목욕한 영웅은 죽지 않는다고 했고-이야기 끝에서는 죽었지만-, 용의 심장은 보석인데 그 보석을 녹인 금속에 넣으면 금으로 변하고 물에 넣으면 영약이 된다고도 했다. 그에 더하여 용처럼 변하지 않는 왕국은 변하지 않는 질서를,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마법사는 어느 날 아침 왕 앞에 나아가 두번 절하고 말했다.
  "변하지 않는 왕국의 변하지 않는 주인이시여 만세. 왕이시여, 저는 왕의 권위와 왕국의 영광에 더할 변하지 않는 빛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용입니다."
   "그 용이라고?(왕은 재빨리 액을 쫓는 손짓을 했다) 오,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여, 용이 나의 왕국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왕이시여, 왕의 권위는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왕국은 영광됩니다. 저 위대한 용 역시 변하지 않으며 그 강대함은 비길 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그 용이 폐하의 상징으로 쓰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왕은 우물거렸다.
   "상징? ...하지만 용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졌다든지 너무 뚱뚱해 보인다든지 해서 말야. 마법사여, 나는-"
   "왕이시여, 저는 그 용이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큰 신경은 쓰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을 왕국과 그 주인 만세, 그림이 아닌 살아있는 용 자체가 바로 폐하를 상징하는 것이 되고, 왕의 이름으로 용을 복속시키며, 각국 대사와 왕자와 귀족들을 앞에 두고 사열식에 용을 세워 왕의 위엄을 내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모든것이 오로지 폐하께서 승인하시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왕께 변하지 않는 영광 있으라."
  그래서 왕은 기막힌 장난감을 선물받기로 약속한 아이처럼 들떴고, 마법사는 만족해서 물러났다.

  이제 이야기는 좀더 여러날에 걸친, 치열한 전쟁의 광경으로 옮아간다. 그 광경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참혹하기도 한 것이다. 마법사는 최근 들어 발명된, 용의 물을 이용해 빙빙 도는 날개로 하늘을 나는 기구에 용의 불을 뿜는 총을 든 병사들을 태워 보낸다. 날틀은 씩씩대며 김을 뿜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나 용은 조금 시끄러운 날파리에 신경쓰지 않았고 복잡한 관을 열고 닫던 병사의 실수로 두 기가 부딪혀 떨어진다. 이번에는 용을 유인해 내기로 하고, 철포를 준비한 뒤 저 먼 남방항로를 수소문해서 새끼 용의 똥을 팔겠다는 상인들을 찾아낸다. 가죽부대에 담긴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은 냄새가 지독해서 과연 용의 것 같다. 다른 용들이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소문대로라면 포화 속으로 용을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 한복판에 일주일씩이나 용의 똥을 널어두자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지만 용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사기꾼들은 금화를 챙기고 도망친지 오래였다. 이러고 있을 때 건국공신이자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장군들이 늦은 저녁 마법사의 저택을 방문한다. 그들은 마법사의 면전에서 모욕적인 말들을 퍼붓고, 그런 조잡한 주문과 속임수를 강대한 자에게 쓰는 것은 거리 마술사 같고 야바위꾼 같은 마법사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며 검과 용기로 용을 쓰러뜨리겠다고 공언한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이끄는 행렬은 북쪽으로 떠난다. 용을 사냥하는 기사에 관한 낭만적인 모험담을 듣고 자란 시민들은 꽃을 뿌리며 전송하지만 마법사는 어두운 방 안에서 생각에 잠긴다. 마법사는 수십마리의 소를 쌓아올리고 독약을 주입한다. 그러나 한번 용의 똥에 낭패를 본 시민들은 소의 시체가 썩을 대까지 기다려줄 마음이 없을 듯 했다. 그동안 귀족들은 돌아오지 않고, 마법사의 첩자는 악취로 가득한 산에서 그 용감한 귀족들이 이끄는 부대는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반란으로 산산조각 났으며 배신자들은 용의 소행으로 꾸미고 대장들을 참살한 뒤 도망쳤다고 알려온다.
  마법사는 비밀히 별동대를 보내 산 중턱까지 용의 불을 옮기게 한다. 용이 사냥을 떠나는 틈에 별동대는 둥지 안으로 용의 불을 들여 놓는다. 용이 돌아오자 전서구가 날고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둥지가 폭발한다. 지옥처럼 치솟는 불과 연기 속에서, 격노한 용이 드디어 날아오른다. 불을 호흡하면서 불꽃을 철철 흘리는 눈은 산 아래에서 신호라도 하듯 치솟고 있는 연기를 보았다. 용은 날개치며 날아내려갔다.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파티용 폭죽들이 용의 앞을 가리려 날아오른다. 따닥거리는 불꽃을 뚫고 단 두 차례 날개를 치는 것만으로 용은 용의 물로 달리는 가장 빠른 전차를 따라잡는다. 용의 발톱이 막 마법사를 움키려는 순간, 용의 숨결 포가 불길을 토해내며 거대한 쇠 기둥을 발사했다. 날개를 꿰뚫린 용은 추락했다. 그러나 환성이 터져나오기는 아직 이르다. 찢어진 날개로 날 수는 없지만 날지 않는 용이라고 해도 일찍이 이 땅에 선 일이 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용은 피를 흘리며 일주일이나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용의 숨결 전차들을 뒤업고, 몇 대의 쇠기둥에 더 꿰이고, 그러면서 점차 굶주리고 지쳐간다. 한달만에 온 왕국이 용의 피로 범벅이 되고 마법사는 용을 사로잡았다. 가장 강한 쇠로 만든 사슬과 대못들이 용을 얽어매었다.

   이번에는 피칠갑인 장면들은 생략하고 대화만 듣기로 하자. 마법사가 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가장 지독한 고문들과 주문들을 총동원했다는 정도만 알아두면 된다. 용이 말을 한다는 것은 애들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일이지만 간혹 그런 이야기들도 진실을 담는 법이다. 용이 피곤하고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때 마법사는 화들짝 놀랐으나, 곧 무엇이나 아는 현자답게 침착하고 오만한 태도로 용과 이야기했다.
   "너희 조그마한 것들이여, 너희는 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상처입히고 구속하느냐?"
   "우리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너무 늙어서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가? 지금부터라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용이여. 우리는 인간이다.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이빨도 발톱도 없이 맨몸뚱이로 던져져, 마침내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 그 위에 우뚝 선 인간이란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대마저도 굴복시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희는 젊은 종족인 모양이군. 그런데 어째서 너희가 나를 적대하는 거지? 나는 너희에게 관심도 없으며,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너희가 내 몸에 상처를 입혀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것은 그대가 강대하고 고귀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약하고 작으며 쉽게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이미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질투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우리 것으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용이여, 그대는 이 땅 위에 살아있는 존재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강력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제 우리는 그대를 굴복시킴으로써 그대의 것을 빼앗았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 빼앗는다니 무슨 말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타인에게 있는 것을 타인에게서 강제로 가져오는 것을 뜻하지. 우리는 그대를 굴복시키고 얽어매었다. 그대는 한 때 이 땅 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였지. 그러나 우리는 그대를 우리 아래 둠으로써 그대가 지니고 있던 영광을 빼앗아 온 것이다. 그로써 우리의 변하지 않을 왕국에 변하지 않는 영광을 더하고, 모든 왕국들을 복속시켜서 영구한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나는 그대의 피를 따라 흐르는 불멸성의 비밀도 빼앗아 가질거야. 변하지 않는 금속과 불사의 영약을 가져오는 비밀 말이야,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고 용보다도 더 오래 살아가겠지."
   여기서 용은 기묘한 투로 말한다-흡사 인간이 각다귀를 가엾게 여기기라도 하는 듯이.
   "너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군, 스스로 인간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것이여. 아마도 너무 작고 약한 나머지 어딘가에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를 바라는 모양이겠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다만 너희 조그마한 것들은 너무 빨리 태어나고 죽어서 종족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도 못했을 따름이다. 더군다나 너는 나를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북쪽 산맥 너머에는 내가 고래를 사냥하는 거대한 북해가 있는데, 그 큰 고기가 삼천년을 지나 새로 변하면 날개가 하늘을 덮으며 한번 날개를 치면 구만리를 날아 저 허허로운 우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마법사는 절규했다.
   "그만! 그만! 거짓말하지 마라! 그대는 변하지 않는 존재임이 틀림없고, 가장 위대한 존재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대를 복속시키고 그 모두를 빼앗아 가졌고, 그만큼 더 위대한 존재가 되었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위대한 자가 말이야. 더 이상 그대의 거짓말을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예로부터 용의 혓바닥은 뱀의 것과 같고, 뱀은 간교하여 거짓말을 잘한다더니 말이야."
   이후로 용은 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법사가 불에 달군 집게로 용의 혀를 뽑아내 버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지막 장면이다. 마법사가 변하지 않는 왕국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용의 날개를 꺾고 주문으로 복속시켜 용주의 칭호를 얻은지 몇달 후의 모습이다. 새로 발명된 유리를 만드는 주문으로 세워진 거대한 수정궁 앞에 똑같은 제복으로 똑같이 움직이는 군대가 도열한다. 용의 숨결로 연주되는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시민들이 꽃잎을 뿌리는 가운데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 웃음지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우아하고 기품입게 차려입은 귀족들은 점잖게 박수를 치며 왕국의 위대한 번영을 감상한다. 끝도없는 군대의 행렬. 용의 불을 뿜어내는 예포. 용의 물로 씩씩거리며 굴러가는 전차들. 그 뒤로 용주가 새로 만들어낸 쇠로 된 거인들이 용의 숨결소리를 내며 육중한 발을 내딛고 있다. 하늘에서 좀더 안정적으로 개량된 나는 기구들이 비행 시범을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바로 그 것이 나오고 있다. 그 용이- 용주에게 굴복당한 용이. 평화협정과 정전 조약을 위해 모인 외국의 대사들은 사실 소문의 그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다. 아니, 애초에 그 일이 없었더라면 일개 소국의 왕이 왕국간의 항구적인 평화가 어쩌고 번영을 위한 공존이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귀를 기울일 사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저기에 있다. 한때는 북쪽 산맥의 경이였고, 가장 강대하고 고귀하며 위엄있는 자였던 용이,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잃고 바로 저기에 있다.
  날개는 잘려나가고, 뿔은 전부 꺾였으며, 눈에는 대못을 박히고 혀를 뽑히고 두꺼운 구속구와 쇠 기둥에 꿰인채 쇠사슬에 끌려간다. 땅에 떨어져 짓밟힌 아름다움에, 참담한 몰락에 슬퍼할 줄 아는 자는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 대사들은 놀라움을 가장하기 위해 예의바르게 이야기하고 왕국의 강대함과 군주의 위엄을 칭찬한다. 입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말하고 가면처럼 웃으면서 이 동맹에서 옆나라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박수들, 웃음들, 환성들, 음악소리, 꽃잎. 기어다니는 용은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용은 왜 아직도 기어다니고 있을까?) 벌써 수천번이나 가해진 고통은 무뎌지고, 거대한 고래를 사냥하던 힘은 쇠진되었다. 이미 용은 오래 전에 죽었고 이 자리에는 아직 굳지 않은 피를 흘리는 거대한 고깃덩어리뿐이다. 그가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용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왜 그가 죽임을 당한 즉시 죽지 않았을까?) 다만 무엇을 기다려, 이미 죽은 용은 생을 가장하고 이 거짓된 즐거움의 한가운데에서-.(무엇 때문에?)  더이상 볼수 없는 눈은 아득하게 되새긴다. 번져가는 석양, 날개치며 날아오를 때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하늘과, 그리고 바람을. 행렬의 한가운데에서, 기어다니는 용의 걸음은 점차 느려진다. 쇠사슬이 팽팽해지고 이윽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진다.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눈과 입과 코와 귀에서, 그 모든 상처들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용은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우왕좌왕하는 행렬들, 계속 떨어져내리는 꽃잎들, 그치지 않는 음악소리. 기어다니는 용의 숨이 그를 떠나자마자 움직이던 사체는 단번에 삭아내렸다. 그 자리에서 살점이 녹고 악취나는 걸죽한 피가 퍼져나가며 백골만 남는다. 대사들과 귀족들은 허둥지둥 퇴장하고, 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멀뚱 멀뚱 서 있다. 꽃잎만 바람에 날려 굴러다닌다.

  용주의 왕국이 무너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왕국들은 언제나 백년이나 이백년 정도만 지속되었다. 아무리 마법사들의 주문과 기구와 하인들이 강력해져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용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미쳐버렸다고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고 용의 피를 마시고 온 몸이 썩어버려 언제까지고 세상을 떠돈다고도 하지만 모두 이야기만 남았을 뿐이다. 기어다니는 용의 사체가 삭아버렸다는 자리는 저주받기라도 한 듯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다. 하지만 그 백골의 행방에 관해서도 아는 이는 없다. 쉽게 깨지는 수정궁의 유리를 만드는 마법만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 역시, 용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야기를 증거할 것은 남지 않고, 이야기만이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변화 속을 이어간다. 어떤 사람은 용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허나 기어다니는 용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모든 것은 무상하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짧은 우리의 생 바깥에서는 언젠가 변화하며 용의 너머로 우리로써는 닿을 수조차 없는 것들이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용이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부르는 말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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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대로, 퍽 도가스러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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