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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별을 먹는 고래

2009.12.08 22:3212.08



부족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시각테러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마치 크리스마스 기획단편처럼 되었군요^^;;
그럼 모두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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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먹는 고래]

  밤하늘을 헤엄치는 고래의 꿈을 꿨다.
  별을 삼키는 검은 고래는 드넓은 바다가 아닌 좁은 은하수 속에서 커다란 몸을 뒤척인다. 고래의 등에선 짠 바닷물 대신 빛나는 별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별 하나에 추억을, 별 하나에 사랑을, 별 하나에 낭만을, 별 하나에 공상을, 별 하나에 희망을, 별 하나에 기쁨을, 별 하나에 노래를. 그 모든 것을 담은 별줄기를 고래는 힘차게 분출한다.
  고래는 검다. 꿈속의 고래는 캄캄한 밤하늘보다 농후한 검정의 소유자다. 고래는 해가 지면 감쪽같이 사방에 은폐되어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고래가 눈에 띄는 건 은하수를 헤엄치고 있을 때에 한정된다. 다행히 별을 먹고 별을 내뿜는 고래는 은하수를 사랑한다. 고래를 보고 싶은 이는 언제나 은하수를 올려다보면 되는 것이다.
  허나 나는 항상 고래를 꿈속에서 봐야만 했다. 깨어있을 때는 하늘을 잘 올려다보지도 않거니와 설령 고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해도 은하수는커녕 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침침한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까.
  눈망울이 또렷할 때 꿈을 찾는 건 그 눈에 비추는 게 너무나도 멋없고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은 잘 때밖에 꿀 수가 없고, 별의 바다를 누비는 고래 또한 그 안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다.


12/24 22:10∼23:00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다. 2년 동안 무대에 오르면서 이렇게 망신살이 뻗힌 적은 처음이다. 마지막 연주가 끝난 뒤 무대 분위기는 아주 거북했다. 기분 좋았던 관객들의 얼굴에는 어찌 대응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난처함과 은연중에 실소를 금치 못하는 혐오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주형 선배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제 와서 은아의 자리를 메운다는 건 불가능했고, 구차해보이기만 했다. 품위 있고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다면 그 곡을 부르는 것만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목소리가 구성진 그 발라드 가수가 불렀던 가사의 한 구절처럼 헛된 꿈은 독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엔 선배의 경고를 따를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조금이라도 당당하고 뒤끝 없이 막을 내리고 싶다는 의견에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의외로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정인 모양이다.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는 결국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볼이 얼얼하다. 뺨을 맞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선배는 결국 자신의 신조를 깨고 밴드의 멤버에게, 그리고 여자에게 손을 대고 말았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아예 주먹으로 맞았으면 했지만 선배로서는 뺨을 치는 정도가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선이었으리라.
  여하튼 마침내 우리 밴드는 해산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청산이다.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멋지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주 만족스럽다. 머리는 맑고, 마음은 가볍다. 볼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통증조차 기쁨으로 느껴질 만큼 속이 시원하다.

“하지만 눈물쯤은 흘려줘도 괜찮겠지.”

  개인적으로는 듣기 좋은 가성이라 생각하지만 우리 밴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혹평을 받았던 한 가수의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눈물쯤은 흘려줘도 괜찮다. 당연하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파탄이 난 게 마냥 기쁠 리만은 없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2년 이상 고락을 함께 나눈 동료들이다. 한창 사이가 좋았을 때는 지긋하게 나이를 먹어서도 같이 공연하자며 진담 반, 농담 반 술잔에 섞어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런 관계가 한 달 만에 붕괴해버린 걸 그 누가 웃으며 반길 수 있을까.
  허나 난 웃기로 했다. 아니, 웃어야만 했다. 경솔한 언행으로 이제는 모양새가 좀 우스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때는 묘한 카리스마로 추앙을 받았던 어느 교주의 노래처럼 지금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날아가야 할 때다. 아니, 날지 않아도 상관없다. 고래에게 중요한 건 밤하늘이 아니니까.
  커플들을 비롯해 인파로 가득 찬 길거리를 빠져나오자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잘 됐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눈을 치워야 하는 입장에 있는 몇몇 애처로운 사람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휴일을 방해하는 신의 심술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역시 흰 눈이 내리는 성야聖夜에는 가슴을 들뜨게 하는 낭만이 존재한다.
  눈치 채고 보니 시선은 하늘에 가있었다. 역시 별은 보이지 않는다. 성야聖夜일지는 몰라도 성야星夜는 아닌 것이다. 애초에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비웃음거리겠지. 당연하게도 구름 낀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도시에선 맑은 날이라도 보이지 않겠지만.

"I stand alone in the darkness."

  인적 드문 골목길에 들어선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이올린 명기 같은 이름을 가진 어떤 밴드의 유명한 곡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 것처럼 나 또한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무슨 발라드 가수가 부른 곡인 줄 알았다.

"The winter of my life came so fast."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사와 정반대로 내 인생의 겨울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나는 좀 더 일찍 찬바람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수확의 계절이 풍성하게 계속될 거라 안이하게 맹신한 빚은 정해진 수순대로 엄청난 이자가 붙어 돌아왔다.
  내가 노래를 그친 건 자취하는 아파트 단지에 다다라서였다. 이쯤 오면 다시 사람들의 왕래가 늘어나는지라 조심해야 한다. 딱히 창피했다기보다는 내 노래가 밤중의 소음으로 여겨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차갑게 언 손을 다시 코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오른손에선 서늘하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은아가 건네준 명함이다.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결심을 굳혔다. 2년이나 방황했으면 충분하다. 이제 대학은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지.
  클럽에서 나와 버스도 타지 않고 번화가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눈은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이미 세상은 순백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아, 마음이 포근해진다. 나는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지도 않은 채 아파트 현관에 서 한참 동안 하얗게 안겨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12/04 21:00∼23:00

  세상은 연말을 맞아 들떠있었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여러 판촉행사야말로 화려한 빛깔로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는 일등공신이었다. 비록 불경기라고 해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은 균형이 맞지 않으면 망가지는 법이라 연중 내내 힘들었던 만큼 송년시기를 맞으면 그간 쌓인 것을 배출하고 싶은 경향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호프집 돌고래. 고래와 돌고래의 차이는 크기뿐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이름의 이 술집도 그러한 유행에 휩쓸려 있는 상태였다. 가게 안은 울긋불긋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적당히 흥겨운 노래와 붐비는 사람들의 높은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우리 밴드 멤버들은 억지로 생산된 활기를 거부하듯 낯빛을 잔뜩 굳힌 채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그저 모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중앙의 대형액정TV에 눈을 고정하고는 묵묵히 술을 마시며 안주를 씹기만 했다. 화면의 음악채널에서는 <White Emotion Union>, 줄여서 W.E.U라는 한 유명그룹의 면면들을 비추고 있었다. 요즘 세태에 맞게 미남미녀로만 구성된 인기 혼성 아이돌 그룹이 이번에 새로운 멤버를 맞아 한결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이 방송의 골자였다.
  곧 방송은 W.E.U의 신멤버의 얼굴을 비추었다. 자그맣고 갸름한 동안에 흰 살결, 8등신의 비율이지만 작은 체구가 한없이 가녀린 인상을 주는 미녀였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인디에서 보컬로 활동하다가 큰 결심을 하고 전의 밴드를 탈퇴한 뒤 이번에 새롭게 W.E.U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정은아. 바로 며칠 전까지 우리 <블루와인>의 메인보컬이었던 여자다.

“뒤통수를 쳐도 유분수지…….”

  우리 밴드의 리더이자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이주형 선배가 모래 씹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약간 짧게 깎은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물들이고, 오렌지 색안경을 낀 선배의 얼굴은 왼쪽 귀에 매달린 2개의 피어싱과 어우러져 상당히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선배가 인상을 찡그리자 한층 더 박력 있게 보였다.

“제대로 당했어요. 그러고 보면 한 달 전부터 이상하게 연습도 자주 빠지고, 우릴 살살 피하는 기색이 보였죠. 그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선배의 말을 받은 건 밴드의 드럼을 맡고 있는 노민혁이었다. 민혁이는 180cm는 훌쩍 넘는 큰 키에 제법 단아한 미남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걸치고 있는 옷은 온통 검정색 계통으로 신부나 목사를 연상시키는 딱딱하고 수수한 차림새를 병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배는 씹고 있던 소시지를 마치 알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맥주를 들이켜 꿀꺽 삼킨 후 침착하지만 어딘가 격정을 감춘 목소리로 말했다.

“야, 현주야. 너 진짜 들은 거 없냐? 은아랑 넌 무슨 친자매라도 되는 마냥 친했잖아. 화 안 낼 테니까… 좋은 말 할 때 불어!”
“대체 몇 번이나 물어요. 저한테도 아무 말 안 했다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밴드의 베이스이자 가끔 서브보컬을 맡고 있는 주현주. 바로 읽나 거꾸로 읽나 똑같이 읽히는 이름처럼 큰 변화 없이 평범하고 재미없는 여자다.
  나는 며칠 전부터 은아가 아무 말도 없이 밴드를 탈퇴한 일에 대해 끈질기게 추궁을 받고 있었다. 선배가 말한 것처럼 둘이 사이가 좋았으니까 뭔가 알고 있지 않겠냐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그건 내가 도리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그동안 은아에게 해준 게 얼만데. 처음 이쪽 세계에 들어와서 아무 것도 모르고 갈팡질팡 하던 걸 하나에서 열부터 가르쳐주고, 악기 살 때 돈도 빌려주고, 계절마다 쇼핑도 같이 하고, 가끔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면 며칠 동안 내 자취 아파트에 묶게 해주고 그랬는데, 어떻게 나한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래서는 마치…….

“우린 배신당한 겁니다.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우릴 자기 발판으로 이용한 거라고.”

  민혁이는 평소 무뚝뚝하고 말을 잘 하지 않는 만큼 한 번 입을 열면 아무런 순화 없이 직접적으로 아픈 곳을 찔러댔다.

“아니… 자기 실력이나 입맛에 따라 활동하는 곳을 바꾸는 건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야. 그건 당연한 권리지. 다만,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어째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나갈 수가 있느냐는 거야.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건 없어. 개념법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올바른 정의나 공동선이 실제로는 규정지어 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 어쩌면 세상에는 가치 있는 일에 따라 어떠한 위계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그저 각 개인과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있는 것뿐일지도 몰라.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통념과 보편적인 윤리관에 따라 1년이 넘게 고락을 같이 한 동료들에게 어떤 상의나 양해의 말조차 없이 불쑥 소식을 끊는다는 건…….”

  명문법대를 나온 주형 선배는 가끔씩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폭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하자면 선배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나르시스트였다. 생각해 보면 선배가 지은 곡들은 하나 같이 현학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면들이 있었는데, 그가 작곡작사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나 <파우스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노래들의 제목을 보면 쉽게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참고로 내가 그를 선배라고 부르는 건 대학교가 같아서가 아니라 클럽에서 일을 할 때 선임알바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리 그래도 ‘오빠’라고 부르는 건 낯간지러웠고, 그렇다고 이름에 ‘씨’를 붙이는 건 더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선배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정착되어 버렸다.
  여하튼 선배의 흰소리와는 별개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강 이해는 갔다. 요컨대 선배도 나처럼 그럴 듯한 변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차라리 서로 대판 싸웠다거나, 눈앞에서 이런 밴드는 장래성이 없어 못해먹겠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순순히 납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 - 물론 민혁이의 지적대로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긴 했지만 - 갑자기 모습을 감추더니 덜컹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우리 밴드는 여태까지 인디 계에서는 꽤나 잘 나가고 있었다. 선배의 ‘뭔가 있어 보이는’ 작사센스와 지금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당장 메이저에서도 통용되는 은아의 미모가 극적인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멤버들 간의 사이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랑 은아는 가족처럼 가까웠고, 각 멤버 사이는 화기애애하다는 고리타분한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괜찮은 분위기였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우리 밴드가 흔들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변명 한 마디쯤은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 당연했다. 선배가 계속 내게 뭐 들은 게 없냐고 다그치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납득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우리 크리스마스이브 공연 어떡하죠. 인정하기 싫지만 은아 녀석이 빠진 우리 밴드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를 바 없어요. 일단 취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에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민혁이의 말처럼 지금 우리 밴드의 높은 인지도는 은아라는 존재가 있기에 비로소 손에 쥘 수 있는 과분한 영광이었다. 조금 뼈아픈 소리를 하자면, 은아라는 미모의 디바가 부르지 않았다면 선배의 도취적인 가사만 가지고는 이렇게까지 좋은 반향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블루와인의 팬층에 남성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남자는 대개 눈으로 사랑을 하니까.

“안 돼! 물론 녀석이 없으면 곤란해. 나도 우리 인기가 내 작곡 때문만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 정도 염치는 있다구.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우린 뭐가 되지? 만약 여기서 공연일정을 취소하면 우리가 진짜 뭔가 문제가 있어 은아가 나간 것처럼 오해 받을 수도 있어. 아니면 은아 꽁무니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잉여밴드처럼 비춰지거나. 걔가 나갔다고 해서 아예 이 바닥을 뜰 것도 아니잖아. 알겠어? 아무리 꼴이 우스워지더라도 공연은 해야 돼.”

  오렌지색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선배의 눈빛은 단호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용납할 수 없다는 선배의 태도에 민혁이는 그저 어깨를 움츠리며 대신 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 녀석 없이 우리 셋이서 나가봤자 무지 초라할 뿐이에요. 다른 곳에서 멤버를 빌린다면 더 꼴이 우습고요. 아직 늦기 전에 공연취소하고 냉각기를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과일소주를 쉬지 않고 홀짝 거렸던 나는 일시적으로 취기가 확 올라 정신이 멍해져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시 과일소주는 잘 넘어가는 만큼 잘 취한다는 점이 무섭다. 선배는 내가 과일소주를 시킬 때마다 소주에 주스를 타거나 주스에 소주를 탄 그런 걸 왜 먹냐면서 면박을 주곤 했는데, 나야말로 쓰기만 한 맥주나 물에 알코올을 탄 소주를 왜 먹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취기가 올랐기 때문일까. 나는 머리가 붕 뜬 상태에서 전혀 상관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괴로움이 남기고 간 것을 맛보아라. 고통도 지나고 나면 달콤한 것이다.”

  내 나쁜 버릇이다. 어린 시절, 자신감이 부족했던 나는 옛 성현들이나 위인들이 남긴 문구를 집어삼키면 자신 또한 대단해질 수 있을 거라는 부끄러운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정신이 혼미할 때면 가끔씩 그 때 버릇이 튀어나오곤 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너 무슨 메저키스트라도 되냐. 난 인생의 고통을 즐기는 취미 따위 없어. 그런 괴팍한 성벽은 혼자 곱씹으라고.”

  과연 주형 선배. 칼 같이 받아친다. 어떻게 보면 성희롱 발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 두 번 저러는 게 아니라서 익숙해졌다.
  다소 분위기가 살벌해졌다고 느꼈는지 선배는 민혁이와 내 잔에 각각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차라리 잘 됐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잖아. 이번 기회에 은아년 그림자를 확 걷어내자구. 우선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공연 준비에 전념하자. 응?”


12/11 13:00∼14:00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꿈을 반추한다. 오랜만에 은하수를 헤엄치는 고래를 봤다. 밤하늘의 고래는 변함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별줄기를 웅장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침부터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한숨이 다 나온다.
  어제는 연희랑 술을 마셨다. 대학동기인 서연희. 음악 한다며 벌써 2년이나 휴학하고 있는 나와 달리 장학금까지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이번에 유명 대기업에 취직해 착실하게 실적을 쌓고 있다고 한다. 잘 생긴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는 얼굴만큼이나 성격도 똑발라서 게으름 피우는 법 없이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어제 술자리는… 친구랑 술잔을 나누었다기보다는 교사에게 훈계를 듣는 기분이었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고조되자 연희는 내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한 마디로 친구의 말을 요약하자면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였다. 확실히 뼈가 시리도록 연희의 말은 옳았다. 지금 하고 있는 밴드가 한창 잘 나간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벌어먹고 살 정도의 담보는 되지 않는다. 음반판매수익이라든지 그런 걸 떠나서, 엄밀히 말하자면 블루와인의 인기는 은아인기 이콜이라 할 수 있기에 걔 없이 우리만으론 어디에서도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연희의 설교라는 이름의 걱정은 결국 내가 만취해 곯아떨어진 후에야 끝이 났다. (물론 내가 술이 약한 탓도 있지만) 같이 대작對酌을 하고선 택시까지 잡아 집에 데려다 준 후 아침밥마저 만들어놓고 일찌감치 떠난 친구에게 난 경외심과 고마움을 느꼈다.
  한참 연희가 해준 오므라이스를 먹고 있는 도중 핸드폰이 울려 받았더니 다짜고짜 큰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야, 주현주! 뭐하고 있길래 안 오는 거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선배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TV 위의 전자시계는 13:40을 표시하고 있었다. 잠깐, 그럼 지금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었어? 그럼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건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네? 그럼 지금…….

- 으이구, 보나마나 또 진창 술 마셨구만. 술도 약한 주제에 술은 왜 이리 자주 마시냐. 변명은 나중에 들을 테니까 빨리 연습실로 튀어 와!

  선배는 고압적으로 말하며 탁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비몽사몽거리다 방금 전 뱃속에 집어넣은 오므라이스의 당분이 뇌를 활성화시켰는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준비를 시작했다. 으으, 불찰이었어. 평소엔 연희랑 마시면 그렇게 오래 안가니까 오늘 연습에 지장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화장을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준비를 마친 나는 방안에서 기타케이스를 어깨에 메기 위해 들다가 대체 뭐하고 앉아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한심스럽다. 진짜 난 이렇게 살려고 학교도 휴학하고 밴드를 시작한 걸까.

“아니야… 나도 부르고 싶었어…….”

  그래. 사실 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이제 와서 이런 고백을 해봤자 아무도 좋아하지 않겠지만 진짜 내가 밴드에서 하고 싶었던 건 베이스 기타가 아니라 보컬이었다. 스스로 자찬하는 건 심히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베이스 실력은 그저 그럴지 몰라도 노래는 제법 잘 부르는 편이었다. 본래 은아가 들어오기 전에 메인보컬은 나였으며 지금도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내가 부른 버전을 좋아해주는 팬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베이스 포지션으로 굳어져버렸다. 기껏해야 가끔 서브보컬을 하면 다행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은아보다 예쁘지 않으니까. 인정한다. 나는 예쁘지 않다. 날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밖에 없다. 그건 예쁘다는 칭찬이 아니라 일종의 예의라고 봐야겠지. 물론 어딘가 장애가 있거나 흠이 있어 남들이 추하다고 수군거리는 얼굴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부모님께 감사해야겠지만 어디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 그냥 평범하게 생긴 내 얼굴로는 은아가 있는 이상 절대 메인보컬을 맡을 수 없으며 그녀가 탈퇴한 지금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은아가 없었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내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해봤자 정당한 평가는커녕 비교만 당해 더욱 비참한 꼴이 될 게 뻔하니까.


12/11 14:30∼15:00

  뒤늦게 도착한 연습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주형 선배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씩씩거리고 있었고, 민혁이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상대에게 말없는 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발산방법이 대조적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지금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졌다. 차라리 내가 늦었기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얼마나 문제가 간단하겠냐만은 이 두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적의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즉 내가 오기 전부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연습실에 들어서자 선배는 씩씩거리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아, 이제 왔냐.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봐. 미치겠다, 정말!”
“무슨 일인데요?”

  영문을 모르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민혁이가 대신 대답했다.

“저 오늘부로 그만 둘 겁니다.”
“그만둔다고?”
“예, 누나도 알잖아요. 저번 술자리에선 냉각기를 가지자고 돌려 말했지만 우리는 이제 끝났어요.”

  항상 세상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 숙취 탓인지, 눈앞에 있는 현실 탓인지 현기증이 난다.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선배가 말을 받았다.

“아직이야. 이번 공연만 잘 넘기면 가능성이 있어. 일단 어느 정도 이미지쇄신을 한 후에 새로운 멤버를 영입해서 곡 스타일도 바꾸고 하면…….”
“이제 됐어요! 형은 내년에, 저랑 누나도 몇 년만 있으면 30대죠. 다시 출발하기에는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게다가 저는 형처럼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누나처럼 집에 돈이 많지도 않아요. 슬슬 안정적으로 벌지 않으면 제 생활뿐만 아니라 부모님 노후도 걱정스럽다고요. 은아가 있을 때는 이대로라면 인디 밴드라도 탄탄대로라 생각해 매달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민혁이에게 난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민혁이 말대로 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은 있어도 집안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집안사정에 따라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와 혼자 멋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없는 나 사이에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균열이 존재했다. 분명 독일의 한 대문호는 외로운 밤에 눈물로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건 아마 인생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를 비꼬는 말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어본 자만이 서로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선배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다행히 삼촌이 경영하는 회사에 자리가 나서 내년 1월부터 일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었는데 은아가 탈퇴하는 바람에… 아무튼 지금은 거기서 필요한 기술을 벼락치기로 익히느라 바빠요. 더 이상 밴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구만. 그래도 24일 하루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지? 어차피 지겹게 부른 노래만 재탕할 거니까 연습은 오늘 이후로 하지 않을게. 다만 크리스마스이브 공연할 때만 와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다.”

  꽉 다문 선배의 입에서는 굳은 집념이 느껴졌다. 민혁이는 거절하고 싶은 낌새였지만 선배의 기세에 눌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대로 놔두면 한참 눈싸움만 계속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선배, 왜 그리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을 고집하는 거예요? 물론 선배 말대로 공연을 취소하면 꼬리를 빼는 것 같아 보기 흉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싸우면서까지 무리하게 밀고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혹시 진짜 그날 공연으로 뭔가 역전할 비책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오기 때문이라면…….”
“바보냐. 나도 그렇게까지 대책 없지는 않다고. …아, 증말 미치겠네. 그래, 좋아. 솔직하게 말하마. 나도 희망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우리 밴드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생각해. 그동안 우리는 은아에게 너무 의존해왔어. 물론 그건 내 책임이야. 그게 제일 잘 먹히겠다고 생각하고는 기획을 추진한 건 나니까. 걔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마음에 없는 곡도 몇 개나 썼고. 또 그것들이 전부 우리 밴드 사상 최대의 히트곡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우울하다, 정말. 아무튼 민혁이 말대로 우리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고 해도 좋아. 진짜 우리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은아가 탈퇴한 일로 이런저런 억측도 무성해질 테지. 최악의 경우에는 소문조차 도는 일도 없이 그냥 밴드 자체가 조용히 묻혀버릴 수도 있어. 그러니까…….”

  선배는 단숨에 말을 내뱉은 후 잠시 숨을 돌렸다.

“후우, 하다못해 끝이라도 좋게 맺고 싶은 거야. 메인보컬이 떠나니까 서로 균열을 일으키다 흐지부지 사라지는 밴드? 난 그런 거 용납 못해. 너희는 용납할 수 있어? 우리가 그동안 피땀 쏟아온 밴드가 이렇게 한심스럽게 끝나고 괜찮냐고. 물론 한심하게 끝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조금은 꿈으로 장식해도 나쁠 건 없잖아. 우리는 은아가 탈퇴해서 허둥거리다 무너진 못난 밴드가 아니라 단지 각자의 꿈을 위해 마지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해산한 밴드가 되는 거야. 그래, 몽상가라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비웃는 건 공연이 끝난 다음에 해줬으면 한다.”
나와 민혁이는 대답하는 대신 각자의 위치에 섰다. 분명 선배가 말하고 있는 건 스스로도 자각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기만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겐 꼭 그 거짓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

  선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앙금이 가라앉기 전에 유종의 미를 잘 거두어라.”

  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하지만 그건 좀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잠깐, 두 사람 다 그만해요. 시간도 없으니 빨리 시작합시다.”

  민혁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으나 표정은 전보다 한층 밝았다.


12/18 21:00∼23:00

  일주일 전의 연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말 단 한 번도 모이지 않았다. 꼭 연습을 하지 않더라도 3일이 멀다 하고 만나던 것에 비하면 커다란 변화였다. 비록 마지막 연습은 처음 밴드를 결성했을 당시 천진한 우리로 돌아간 것처럼 열정적인 공기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한여름 밤의, 아니 한겨울 밤의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연습실에서 선배의 이기적인 웅변에 거짓된 우정을 되찾은 일을 떠올려보면 우리 밴드가 해산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하는 음악은 분명 사회비판적이며 현학적이고, 멋들어진 맛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진실미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허구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경쟁사회를 비판하는 가사를 지은 선배는 명문대 출신이다. 가난한 자의 아픔을 베이스로 연주하는 나는 아버지가 대학병원 원장이라 원룸이나 고시원 따위가 아닌 아파트에서 호화스럽게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마음으로 통하는 진실한 사랑을 노래하는 은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모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민혁이네 집도 여유롭지는 않다고 하지만 아무튼 아들 하나 대학 보내줄 정도의 여력은 있었다.
  물론 어떤 특정한 일이나 상황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창작분야 관련 종사자들은 정체성을 부정당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음악을 해서는 안 됐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고, 우수한 학력을 가지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의 슬픔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 팔아먹어선 안 되는 거였다.
  노르웨이의 한 극작가는 고독 속에 홀로 서는 인간이야말로 강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역겨울 정도로 약한 인간이다. 이렇게 혼자 있다 보면 서서히 깊은 진흙탕에 마음이 침전되는 느낌이 든다. 사람과 부대끼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에 홀로 있는 건 견딜 수 없다니 나 같은 엉터리 인간이 또 어디 있을까.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마침 외롭다는 생각이 사무쳐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누구인지 확인할 생각도 없이 반사적으로 벌컥 문을 열어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언니…….”
“……너.”

  밖에 서있는 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20대 초반에 들어섰지만 아직 10대처럼 앙증맞고 청순한 가녀림을 지닌 귀여운 소녀. 얼마 전에 우리를 배신하고 유망 아이돌 그룹에 합류한 블루와인의 전前 메인보컬, 정은아.
  그녀를 눈앞에 둔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배신감, 실망감, 괘씸함 등이 복잡하게 섞여 나도 모르게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은아는 각오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고 나는 한껏 위로 뻗은 손을 살며시 아래로 내려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볼이 차갑네. 많이 춥겠다. 빨리 들어와.”
“아, 예? 예!”

  한차례 피부간 충돌사고를 각오했던 은아는 혼란스러웠는지 허둥거리며 내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더플코트에 같은 색깔의 털모자를 눌러 쓴 그녀의 모습은, 내가 남자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는 진부한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아주 귀여웠다. 나는 그녀의 자태에 우리 밴드가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지 새삼스럽게 통감했다.
  은아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기, 언니. 저 말이죠…….”
“알고 있어. 변명하러 온 거지?”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의 뺨을 때리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니 무슨 파이선전 같네요. 예전부터 언니는 그랬어요. 굳이 말하자면 눈치가… 없는 편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저랑 관련된 건 금방 알아채고 배려해주셨죠.”

  그랬다. 나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데다 행동까지 굼뜬 면이 있어 자주 주형 선배에게 푼수데기라고 놀림 받았지만 기묘하게도 은아를 챙겨주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로 전생에 헤어진 친자매였을 거라는 둥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나랑 닮았다. 다른 사람 사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까불거린다는 점이 꼭 닮은 것이다. 은아 역시 예쁜 용모로 어릴 적부터 대접받으며 살아온 탓에 권위 있는 아버지 후광으로 공주님처럼 자란 나와 비슷한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그녀와 난 결정적으로 달랐다.
  은아는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에서 작은 케이크와 와인 한 병을 꺼내들었다.

“우선 이것부터 드세요. 빈손으로 오기 죄송해서…….”

  내가 은아를 이해하는 것처럼 은아 또한 내 취향쯤은 전부 꾀고 있었다. 이 빵집의 생크림 케이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와인은…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나마 술중에서 내가 기분 좋게 음미할 수 있는 부류였다. 무슨 포도주에 조예가 깊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술은 싫어하지만 달착지근한 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일소주도 비슷한 이유로 자주 마셨다.
  나는 말없이 찬장에서 글라스와 접시를 꺼냈고, 은아는 케이크를 잘랐다. 서로 상대편 접시에 케이크를 놓고 와인을 따른 다음 각각 한 입, 한 모금씩 맛을 보자 곧 은아의 변명이 시작되었다.

“다들… 화 많이 나셨나요? 제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신다거나…….”

  나는 잘라 말했다.

“사실이잖아.”
“예. 그냥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은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냉랭하게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거야? 조금이라도 사정을 얘기했다면 모두 그렇게까지 상처 받지는 않았을 거야.”
“전… 언니도 알다시피 독한 인간은 아니에요. 옛 멤버들을 버리고 갈 수 있을 만큼 염치가 없을지는 몰라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매정하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만약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언질을 했다면 민혁 오빠는 크게 반대했겠죠. 그 오빠에게 있어 밴드활동은 꿈보다는 생계에 가까웠고, 제가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주형 오빠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반대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온갖 사탕발림으로 저를 구슬리려 했을 거고, 전 틀림없이 거기에 넘어갔을 거예요.”
“…그렇겠지. 넌 귀가 엷으니까.”

  나처럼 말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꿀꺽 삼켰다. 이제는 더 묻고 싶은 것도 없고, 묻고 싶지도 않았지만 은아의 얼굴은 아직도 변명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불필요한 신문訊問을 계속했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찾아온 거야? 사실 네 변명을 가장 듣고 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선배일 텐데.”

  은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주형 오빠는 절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그건 민혁 오빠도 마찬가지고요. 언니만이 절 제대로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역시 그랬다. 이 아이는 처음 내가 말한 것처럼 작정하고 변명을 하러 온 것이다. 즉 변명이 통할 상대, 용서해줄 만한 상대를 일부러 골라서 온 것이다. 이유는 실로 단순하다. 마음의 죄책감을 덜고 싶은 거겠지. 아무리 교활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간은 가슴 깊숙한 곳에 앙금이 남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생긴 죄책감을 또 계산적으로 덜어낸다는 건 어찌 보면 모순된 말일수도 있으나 은아 같은 타입은 죄책감을 마음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 입력된 사회규범에 따라 일종의 부채로서 인식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일전 선배가 은아의 숨겨진 면을 지적하며 꺼냈던 말이다. 그 때는 화를 내며 은아를 변호해주었지만 이제는 선배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싸구려 면죄부 같은 것이다. 허나 기묘하게도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아마 은아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주뼛거리며 물었다.

“저기, 언니.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응. 말해봐.”
“왜 아까 절 때리려다 만 거예요? 그랬으면…….”

  속이 후련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만약 그 때 때렸다면 난 ‘용서를 빌러 온 상대를 감정에 못 이겨 손찌검을 했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때문에 꼼짝없이 은아에게 심정적인 빚을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은아도 그 점을 노리고 맞을 각오를 한 것이리라. 이 아이는 절대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은아의 뺨을 때리지 않은 건, 그리고 이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은 건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 때문이 아니었다.

“난 널 때릴 만한 자격이 없어. 그게 이유야.”
“자격이라니…….”
“네가 떠난 건 우리 밴드에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잖아. 서로 입 밖으로 말만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실은 모두 알고 있었어. 우리는 얼마 전까지가 전성기였던 거야. 네가 계속 남아 있었다 해도 이제 앞으로는 내리막길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네가 매력적이라도 선배가 쓰는 곡으로는, 그리고 우리들의 연주로는 그 너머로 갈 수가 없어. 그저 마니아들이나 만족시키는, 그런 활동이 계속 됐을 거야. 물론 마이너 취향이라는 데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배는 반 정도는 일부러 그런 상황을 유도한 것 같지만. 어쨌든 넌 그걸 용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떠난 거야. 그리고 나는 네가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고, 줄 생각도 없었어. 봐. 네가 널 탓해야 될 이유가 없잖아?”

  적당히 취기가 돈 탓인지 평소보다 혀가 잘 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허튼 소리를 할 때는 항상 술이 들어갔던 것 같다. 왜 옛 사람들이 술의 신을 숭배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고마워요, 언니…….”

  어째서 고맙다는 걸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네. 하지만 은아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뒤로 묵묵히 케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아니, 먹고 마셨다기보다는 처리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기계적인 섭취였다.
  마지막 한 조각,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우자 은아는 쓰레기를 전부 가지고 온 쇼핑백에 넣은 다음 일어섰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저도 이제 완벽하게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은아가 품속에서 꺼내 건네준 건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흘러간 가수의 명함이었다.

“이게 뭐야?”
“때늦은 고백이지만… 사실 저 언니 목소리에 반해 밴드하겠다고 마음먹은 거 몰랐죠? 제가 드린 명함의 그분은 실력 있는 보컬 선생님이에요. 정작 가수활동하실 때는 별 인기 없었지만, 업계에서는 본인의 실력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실력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세요. 거의 음치였던 저도 이만큼 부르게 되었으니 만약 언니가 가서 배운다면 훨씬 성과를 내실 걸요? 다만 아무나 받는 분이 아니시긴 한데, 블루와인도 나름 인지도 있는 밴드인데다 제가 줬다고 명함을 보여드리면 아마 받아주실 거예요. 명함도 아무한테나 돌리는 분이 아니니… 에헤헤, 꼭 추천서 같죠?”

  난 정색하며 명함을 돌려주었다.

“난 이런 거 바라고 네 변명을 들어준 게 아니야.”
“예. 그러니까 저도 굳이 드리는 거예요.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서요.”

  살짝 애교가 섞여 있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감정이 일체 섞이지 않은 은아의 목소리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군. 잊고 있었다. 이 아이는 과거의 연결고리를 없애기 위해 여기에 온 거였지. 꼭 친목을 도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분노나 증오가 섞인 사이도 엄연한 인간관계에 속한다. 그런 걸 함부로 남겨두었다가는 언젠가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소한 손이 닿는 부분이라도 정리하자고 생각한 것이리라.
  나는 중얼거렸다.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숲과도 같다.”
“예?”
“아무것도 아니야. 알았어. 이건 잘 받아둘게. 그럼 조심해서 가.”
“예, 언니.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은아는 울어서 살짝 부운 눈을 모자로 감추며 겨울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홀가분하게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확신했다. 아마 다시는 우리 둘이 사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길거리에 마주쳐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지나치겠지.


12/24 17:30∼18:00

  크리스마스이브. 클럽 안은 점차 늘어나는 사람들로 혼잡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첫 번째 밴드의 공연이 시작된다. 우리 순서는 가장 마지막이니 아직 여유가 있다. 참 씁쓸한 일이다. 본래 클럽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찬밥신세나 마찬가지다. 자기가 보고 싶은 밴드공연이 끝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기 때문에 종반부는 상대적으로 한산해지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 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진짜 자기 밴드의 팬이나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시간대인지라 관객들도 지쳐있어 아무래도 생기가 돌지 않는다. 평소에는 부탁하지 않아도 클럽 쪽에서 알아서 좋은 시간대에 공연순서를 잡아주었는데 한 달 만에 이렇게 추락해버리다니 세상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슬슬 해가 져가는 하늘은 아직 밝아 별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해가 완전히 진다하더라도 별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후부터 하늘 저편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구름이 점차 우리 머리 위까지 덮고 있는 중이니까. 날씨도 춥고 하니 내린다면 틀림없이 눈이겠지. 좋은 징조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별을 볼 수 없을 거란 사실은 우울했다.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조금만 기운이 빠지면 이렇게 나쁜 버릇이 튀어나온다.

“칼 R. 포퍼. 뭐냐, 뭐가 그리 죽상이야. 일체 골칫거리 없는 인생을 원한다면 무덤 속에나 들어가라고.”

  그리고 내 나쁜 버릇을 받아주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다. 선배는 클럽 바에서 들고 온 커피잔을 내게 넘겼다. 긴 유리컵에 담긴 커피는 차가웠는데 이건 선배의 장난이 아니라 배려였다. 난 뜨거운 커피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선배는 예상대로 맥주를 들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영하의 날씨에 찬바람을 맞으며 각각 냉커피와 생맥주를 들이켰다.

“그냥… 좀 아쉽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일들에 질리고 지쳐서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막상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으니 감상적인 생각이 드네요.”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제법 진심으로 밴드활동에 매달렸으니 해산을 앞두고 기쁘거나 무덤덤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특히 너랑 난 가장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면 우리 밴드 이름도 네가 지었지. 블루와인. 근데 왜 내가 아니라 네가 지었던 거냐?”

  나는 샐쭉해져서 선배를 노려봤다.

“세상에. 진짜 기억 못하는 거예요? 선배가 말도 안 되는 밴드명을 지으려고 하니까 대신 제가 지은 거 아니에요. 참나. 3권분립이 뭐야, 3권분립이.”
“왜? 좋잖아. 우리 처음 모였을 때는 3명이었으니까 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4명일 때는 뭐라고 하려고요?”
“4두정치.”
“…말을 말아야지, 말을. 그나저나 민혁이는요?”
“응. 무슨 오피스 사용법 익히느라 정신없다고 거의 시간 다 될 때쯤 온다는군. 어쩔 수 없지. 그 녀석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점점 실감이 된다. 밴드해체는 기정사실, 설령 앞으로 무슨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블루와인이 회생한다고 해도 옛 멤버가 그대로 모이는 일은 절대 없겠지.


12/24 19:00∼22:00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된 클럽은 강렬한 메탈 사운드와 함께 점차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연말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렸는데 다른 곳에 비해 꽤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클럽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가운데서도 관객들은 질서정연했으며 공연매너는 충실히 지켜졌다.
선배와 나는 민혁이가 오기 전까지 클럽 안을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틈틈이 준비실에 들어가 각자 사용할 기타를 점검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덧 우리가 공연하기 바로 전 밴드의 무대가 막이 올랐다.

- 안녕하세요. 저흰 <붓다스 프리스트>입니다. 어디 카피밴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익살스럽게 무대 인사를 마친 끝물 밴드멤버들은 아직 앳돼 보이는 고등학생들이었다. 비록 연주는 어설프고 보컬 목소리는 음악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부터 확실히 좋아하는 걸 찾아 매진하는 모습은 조금 부러웠다.
  난 그 시절에 뭐했더라. 아마 수험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밴드에는 중학시절부터 흥미가 있어 개인적으로는 기타연습을 한다든지, 노래를 따라 부른다든지, 유명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간다든지 한 적은 있었지만 멤버를 모아 공연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마 주형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내게 있어 음악이란 단순한 취미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선배의 박식함과 카리스마에 홀딱 빠졌었다. 지금은 선배가 내뿜는 광채의 대부분이 허세라는 걸 알고 콩깍지가 벗겨진 상태지만 그 때는 마냥 숭배했었다. 뭐, 맹신은 힘이라는 말처럼 덕분에 베이스 실력은 많이 올랐다. 네가 잘 친다면 도움이 될 거야, 란 말 한 마디에 주경야독 정신으로 전력을 다했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교생 밴드의 공연이 끝나기 전, 다행히 민혁이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 걔들은 앞으로 아직 2곡정도 더 부른다고 하니까 가볍게 미팅할 시간 정도는 있을 것이다. 공연 시작 십 몇 분 전에 첫 미팅이라니 아무리 망조가 든 밴드라곤 해도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차가운 눈으로 민혁이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전에 말한 것처럼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어. 우리가 공연할 곡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 <파우스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침을 뱉는 방법> 이렇게 3곡이야. 그동안 아주 지겹게 부르고 연주했던 노래들이지. 아마 다들 싫어도 손에 익었을 거다. 게다가 3곡 전부 내가 부를 거니까 너희들은 연주에만 전념하면 돼.”
“저기, 그보다는 <양을 쫓는 모험>이나 <안녕, 너구리야>, <양말 줍는 소년>을 넣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선배가 쓰는 곡들은 크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리가 초창기에 불렀던 곡들로서 선배가 자아도취에 빠져 마음에 든다고 한 노래들은 하나 같이 사상서의 제목을 그대로 붙이거나 살짝 변용해 붙였다. 반면 은아가 들어온 후 쓴 후자의 곡들은 대충 자기가 재미있게 읽은 소설 제목을 그대로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히트를 친 건 후자 쪽으로 가사 내용도 낭만적이고, 멜로디도 대중적이었다.
  선배는 만약 개미가 얼굴에 붙어있었다면 살결에 눌려죽었을 만큼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그년이 부른 노랜 절대 안 불러! 아, 오해는 하지 마라. 꼭 감정적으로 화가 나서 싫어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생각해봐. 네가 말한 곡들은 오로지 그년… 은아 이미지에만 맞춰서 쓴 곡들이야. 까놓고 말해서 곡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그 곡을 부르는 걔 얼굴을 떠올리며 좋아하도록 만든 곡이라고. 당사자가 부르지 않는 이상 내가 부르건 네가 부르건 엄청나게 위화감이 생길 거야. 그리고 그런 우리 모습은 관객들에겐 이미 떠난 여자에게 미련 못 버려 지겹게 매달리는 추한 남자처럼 엄청 구차하게 보이겠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나는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도 선배의 결정에 딱히 불만은 없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인 만큼 그동안 우리가 못했던 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선배는 최대한 순조롭게 막을 내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고교생 밴드 붓다스 프리스트가 자리를 뜨고, 우리 블루와인의 고별무대가 시작되었다. 예상과 달리 클럽 안에는 아직까지 사람이 꽤 남아 있었다. 축제 분위기로 고조된 크리스마스이브인 탓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지도도 완전히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 안녕하세요. 블루와인입니다. 이렇게 저희 무대에 찾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부분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이 저희 밴드의 마지막 공연이에요. 갑자기 결정된 건 아니고 이미 반년 전부터 예정 되어있었던 일입니다. 여기 드럼을 맡고 있는 노민혁 군은 삼촌 회사를 물려받기로 되어있고, 우리 베이스의 주현주 양도 이번에 의대에 다시 복학할 예정입니다. 정은아 양은 아시다시피 지금 W.E.U의 신멤버로 활약 중에 있지요, 본래는 이번 공연까지 함께 할 예정이었는데 그쪽 사정으로 일정이 앞당겨져서 피치 못하게 저희들끼리만 나오게 되었습니다. 은아 양을 보지 못해 아쉬운 분도 계시겠지만 앞으로 TV에 자주 나올 테니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선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떳떳한 태도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는 교묘한 말솜씨. 상황에 따라서는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웃으며 정치적인 포섭을 할 수 있는 선배에게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라.”
“빌프레도 파레토.”

  아주 작게 말했는데 들렸는지 선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킥 웃으며 속삭였다.

- 그럼 첫 곡 갑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블루와인 최후의 공연이 시작됐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란 강렬한 샤우트로 막을 여는 이 곡은 장르로 치자면 파워메탈, 혹은 멜로디 스피드 메탈이라 불리는 분류에 가까웠다. 사실 가사는 뭐가 뭔지 잘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회비판적인 느낌과 힘찬 리듬으로 데뷔음반 중에서는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 두 번째 곡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첫 곡이 끝난 후 선배는 평소랑 다르게 청중에게 농담 한 마디하지 않고 바로 두 번째 곡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제야 선배의 마음에 전혀 여유가 없다는 걸 눈치 챘다. 워낙 허세가 심한 사람이라 여태까지 몰랐지만 자신이 직접 쌓아올린 꿈의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실감해야하는 선배는 이미 한계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공연은 끝까지 해내야 했다. 그것이 선배를 선배답게 지탱해줄 수 있는 최후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트 박사의 몰락은 시작됐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곡은 사이키델릭에 가까웠다. 이 곡의 멜로디는 선배가 쓴 곡들 중 가장 연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난 그동안 연습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결국 3군데나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다행히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썰렁하고 비참한 공연이 될 거라는 민혁이의 예상과 달리 관객들의 반응은 의외로 괜찮았다. 거기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 효과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처음 무대인사에서 선배가 위에 구멍이 뚫리는 심정으로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 밴드에게 가졌던 의혹을 전부 풀고 마지막 가는 길을 기쁜 마음으로 전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곡도 거의 끝나간다. 이제 남은 건 세 번째 곡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침 뱉는 방법>뿐. 마치 선원들의 항해가처럼 흥겨운 리듬에 풍자적으로 비꼬는 대사들이 익살스러운 노래로 포크적인 리듬이 메탈 사운드에 절묘하게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아마 선배의 계획대로 3번째 곡까지 무사히 부른다면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여기서 무슨 획을 더 그어봤자 틀림없이 사족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과연 이대로 끝내도 좋은지 나는 고민스러웠다. 지겹게 되뇌는 말이지만 이제 우리 밴드는 끝이다. 블루와인은 앞으로 다시는 모일 일이 없을 터. 나는 블루와인에서는 언제까지나 베이스 담당으로 기억이 되리라. 허나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난… 난 보컬을 하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무대에서 은아처럼 낭만적이고 상큼한 가사를 불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최소한 블루와인에서는 지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내가 노래를 부를 일은 없다.
  2번째 곡이 끝났다.

- 후우, 모두 잘 들어주셨는지요. 드디어 저희 밴드 마지막 곡입니다. 이걸로 저희는 각자의 꿈을 위해 해산하게 되지만 또 다른 곳에서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갑니다. 3번째…….

  난 선배가 최종선고를 내리기 전에 급하게 앞의 마이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 저희 블루와인의 최대 히트곡인 <양을 쫓는 모험>을 부르겠습니다!

  선전포고와도 같은 내 고함소리에 선배랑 민혁이는 물론 관객들마저 당황하고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도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은아의 노래를 부른다는 게 얼마나 꼴불견처럼 보일지를.

“야, 주현주! 뭐하는 거야!”

  선배는 무대 앞이라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삭이듯이 낮게 으르렁 외쳤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날 바라보는 선배는 재주도 좋게 관객석에 보이는 얼굴 반쪽은 변함없이 평온하게, 허나 그 반대편 얼굴은 있는 대로 찡그리고 있었다. 선배의 좌우대칭적인 표정은 개인기의 수준을 넘어 거의 호러에 가까웠으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선창을 시작했다.
  어찌 되어도 좋다. 그대로 밀고 나가자. 조금 낯이 뜨거운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이런 건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 자리에서 은아의 히트곡을 부르는 건 비참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중에 취소하는 건 더욱 보기 안 좋겠지. 머리 좋은 선배가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없다. 과연 민혁이는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리듬을 넣기 시작했다. 선배도 마이크 반대편으로 혀를 차고는 뒤늦게 연주에 가담했다.
  아마 우리들의 마지막 공연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들떴던 사람들 중 일부는 거북한 기분으로 클럽 문을 나서리라. 민혁이는 그냥 욕 한번 봤다며 털고 잊어버리겠지만 아마 선배는 평생 원한으로 생각하겠지. 난 내 이기심 때문에 선배를 배신했다. 별로 큰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 30분도 안 되는 공연이라도 맞춰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우리 밴드의 2년간 활동 자체가 선배의 자기현시 같은 게 아니었던가. 별로 그 점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이제는 나도 내 길을 걷고 싶은 것뿐. 은아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이런 곳에 있었다. 그 아이는 단점도 많고, 인간미도 결여되어 있지만 자신이 디딜 발판은 항상 스스로 마련해왔다. 반면에 나는 타성에 젖어 살아왔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하늘의 별에만 눈을 두고 다녔다.

- 별을 삼킨 양이 걷는 들판. 양을 품은 소년이 걷는 밤하늘. 소년과 손을 마주 잡은 소녀의 꿈.

  이렇게 무대에서 원하던 노래를 부르자 확연히 느껴졌다. 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까. 고래를 만날 수 있는 건 꼭 은하수 저편만이 아니었다. 그래, 수평선. 바다의 끝은 하늘과 이어져 있다. 고래는 별을 먹고 있던 게 아니라 단지 헤엄치고 있었다는 걸 난 이제야 깨달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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