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fallout

2009.11.15 23:3911.15

언제든지 제목은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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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력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덕택에 조명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계속 깜박거리고, 환경제어시스템도 마찬가지여서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덥다. 이런 건 정말 사양하고 싶다. 이럴 때마다 난 도대체 왜 자진해서 여기로 들어왔는지 후회가 된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촛불을 불을 응시한다. 촛농이 흘러내린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모두 동생 때문이다. 피폭된 그 아이의 치료비 때문에 난 자진해서 이곳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동생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방호복은 그 자체만으로 답답하다.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어렵고, 강화 플라스틱으로 막아놓은 헬멧은 잔뜩 스크래치가 생겨서 앞을 제대로 응시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비닐재질로 만들어진 옷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서,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나에겐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그 것뿐만이 아니다. 방호복을 입어도 행동의 제약은 있다. 나 원, 행동의 제약을 줄이기 위해 입는 옷인데 행동에 제약이 있다니. 그래도 입지 않는 것보단 훨씬 안전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지만, 앞서 말했듯 시야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데다가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방호복 따윈 입지 않는 것이 훨씬 낮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불평은 살아있고 나서 할 불평이지만. 지구에서, 특히나 이 구역에서 방호복을 벗고 생활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멍청이거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괴물뿐이다.
“뭐, 어쩔 수 없나.”
  방호복을 입는 것 자체가 고욕이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방호복에 다리만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후끈거린다. 양다리를 방호복에 집어넣고 몸을 축 늘어뜨린다. 그리곤 멍하니 실험실의 기자재들을 바라본다. 실험실의 기자재들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방사선 계측기는 이미 구형이 되어 버려 제대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겨 버린지 오래다. 방호복은 통풍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실험실은 제대로 차폐가 되어있지 않아 콘크리트를 발라 차폐가 되게 만들어야 했다.
  보급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얼마 전부터 그나마 제때에 보급되던 보급품들도 늦어지거나, 거르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완전히 이곳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보급이 끊어진다면 난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도 대충 먹고살 수는 있지만, 그게 다 방사능에 오염된 게 문제라면 문제다.
  방호복에 손을 꿴다. 그리곤 연구실 구석에 놓인 전신거울로 다가가 등 뒤를 비쳐본다. 등 뒤의 지퍼를 채워줄 사람은 없다. 이젠 지퍼를 채우는데 이골이 나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요령이 생겼기 보다는 지퍼를 채워주는 장치를 만들어 냈다는 게 맞지만. 장치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단지 지퍼에 철사로 만든 고리를 달고 당겨주는 것이다. 장치라고 하기엔 솔직히 창피할 정도다. 만약 동생이 이런 꼴을 보면 배를 잡고 웃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수가 없고, 심지어 별 관심도 없을 것 같다. 그 아이와 연락이 끊어진지 얼마나 됐더라?  
  방호복을 입자마자 몸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방호복 안에서 피부와 맞닿는 부분이 껄끄럽다. 그마나 이건 나은 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방호복의 헬멧이다. 무식하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를 거의 차단하기 때문에 헬멧을 쓰면 꼭 턱밑에 촛불을 대고 있는 느낌이다. 힘껏 숨을 들이마신 뒤 헬멧을 쓴다.
  만약 헬멧을 쓰고도 시야가 평소와 다름없이 제대로 확보된다면 별로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호복은 벌써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할 상황이라 시야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목을 돌려 긴장되어 있는 근육을 푼다. 매일 나서는 차폐 문이지만 밖으로 나갈 때마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비록 바깥과 연구실 사이는 2m정도의 콘크리트로 마감이 되어 있지만 차폐가 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제대로 확인할 길도 없고 말이지. 아마 난 지금도 방사능에 노출되고 있다. 그나마 방사능 수치가 낮은 곳이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높았다면 난 죽었을 테지. 죽어봤자 별로 상관없다는 게 씁쓸하긴 하다. 나 원 참.
  디지털 카메라와 삽, 차폐용기를 자리가 별로 남지 않은 가방에 쑤셔 넣는다. 가방을 매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방사능 계측기를 손에 쥔다. 차폐문을 연다. 문을 열어도 그 중간에 소독실이 있어 곧바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차폐문을 완전히 잠그고 소독실을 가로질러 걷는다. 그리곤 문을 연다. 자동문이었지만, 이미 고장난지 오래다. 열었던 문을 다시 닫고, 계단을 올라간다. 땅을 내리쬐는 햇빛은 전혀 없다. 연구실이 지하에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태양빛이 제대로 투과하지 못하게 만드는 먼지구름 때문이다. 순전히 방사능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에만 충실한 이 방호복은 추위는 전혀 막을 수가 없다.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만약 헬멧을 쓰고 있지 않다면 입김이 날 정도다. 아니, 눈이 내리고 있지 않다뿐이지, 완전 겨울이다. 방사능 계측기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온도는 영상 15도 정도다.
“거짓말.”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다. 이렇게 추운데 겨우 영상 15도 라구? 내가 느끼기에는 벌써 영하란 말이다. 계측기는 여러 가지 기능이 함께 내장되어 있어 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내 기분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내가 볼 수 있는 모습은 폐허다. 살아있는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평선이 보인다. 땅위에 솟아 있는 것은 마치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장승같이 멀찍이 서로 떨어져 있는 죽어버린 나무뿐이다. 말라붙은 땅에 발을 디딘다. 콘크리트바닥과 먼지가 날리는 땅바닥은 별로 차이가 없다. 필터를 빼서 침을 뱉고 싶다. 하지만 방호복의 헬멧과 일체형인 필터는 뺄 수 없다. 밖에 나오자마자 목이 마르다. 젠장. 하지만 착용자를 위한 편의가 전혀 없는 방호복은 벗을 때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어디부터지? 그러고 보니 미리 GPS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방을 내려놓는다. 가방에 방사능이 묻을 지도 모르지만 연구실 주변은 치명적일 정도로 방사능 수치가 높지 않다. 가방에서 삽을 꺼낸 뒤 그 밑에 처박힌 GPS를 꺼낸다. GPS의 스위치를 누르자 금세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뜬다. GPS의 지도에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내 동선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동선의 대부분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얼마 지나지 않는다. 어제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내 걸음이 느린 것도 아니다. 이건 이 지역이 내 생각보다 훨씬 넓거나, GPS가 고장 나 버린 것 중에 하나다. 물론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지만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모습을 보면 전자도 상당히 가능성이 있다.
“어쩌라고?”
  혼자 말을 지껄여 본다. 아무도 없는 이 지역에서 혼자 서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낯간지럽다. 머리를 긁적인다. GPS를 방호복에 달린 벨트에 매달고, 가방에 다시 삽을 집어넣는다. 어깨가 묵직하다.

  해가 질 때까지 발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매일 보는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시야를 가리는 먼지바람뿐이다. 간혹 대가리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쥐새끼들과, 뼈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피부를 뚫고나온 도마뱀이 눈에 띤다. 하지만 녀석들은 이미 포르말린 표본으로 만들어져 장식되어 있다. 녀석들의 모습은 기형적이지만 그 크기는 일반 쥐와 도마뱀과 별로 차이가 없어 그다지 위협은 되지 않는다.
  계측기를 들어 방사능수치를 체크한다. 상당히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측정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더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한다. GPS를 들여다본다. 연구실에서 5km 정도 떨어진 구역이다. 아마 피폭지에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피폭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방사능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피폭지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총을 가지고 올걸 그랬나?
  당연히 피폭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위험해진다. 방사능수치가 높아지는 것도 이유지만, 그 곳에서 살고 있는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이된 생물들이 더 그렇다. 언젠가 정상적인 모습을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이된 생물을 본 적이 있다. 아마 그 것이 피폭지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생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그 녀석을 사로잡아 해부를 해봤다면 그런 것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 나에겐 녀석을 제압할 무기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그 녀석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다가갔다간 위험할 수 있었다. 난 그때 도망쳤다. 사진이라도 찍어두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만약 사진이라도 제대로 확보했다면 보급이 어느 정도 더 되지 않았을까? 오늘은 그래도 카메라를 챙겨왔으니 다행이다. 보급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연구실에서 멀어질수록 몸이 무거워진다. 방호복 위로 방사능 분진들이 잔뜩 쌓여 있다. 방호복을 털어본다. 먼지가 기분 나쁠 정도로 떨어진다. 만약 방호복을 입지 않았다면 이 분진을 그대로 흡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오싹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식은땀까지 흐르니 더 추워진다. 어깨를 움츠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서둘러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다. 대충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나, 흙을 차폐용기에 담고 돌아가면 된다. 아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쉽다.
“아주 쌩쇼를 하는군. 나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사진을 찍어 보고를 하면 보급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 그러니까 내 스폰서들을 신뢰할 수가 없다. 신뢰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관계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연구실로 돌아간다고 해도 하는 일은 전혀 없다. 연구실로 돌아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더러운 기분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뭐, 가도 구석에 처박혀서 잠이나 자는 수밖에 없겠지.”
  자문자답이군. 그리고 또 나오려면 방호복을 입으면서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난 나란 인간을 잘 알고 있다.
  가방을 끌러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GPS를 가방에 집어넣는다. 벨트에 매달려 흔들리는 것이 거추장스럽다. 왼손에는 삽을 움켜쥐고 오른손에는 계측기를 든다. 완벽하다. 총이라도 한 자루 가지고 있다면 더 완벽하겠지만 말이다.
  걷는 수밖에 없다. 만약 작은 트럭이라도 있으면 이런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텐데. 더구나 걷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불평뿐이다. 이렇게 불평을 해봐야 나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마음 놓고 불평불만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해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장갑으로 헬멧을 닦는다. 먼지 때문에 가뜩이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가 더 짜증나게 만든다.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해가 어디에 떠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다. GPS에 시간을 알 수 있게 돼 있지만 꺼내기도 귀찮고 제대로 작동되는지 모른다. 만약 가방에서 꺼냈는데 지금이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겠지. 계측기를 들여다보면서 걷는다. 계측기의 바늘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제대로 측정을 하지 못 할 정도로 방사능이 높은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본다. 별다른 것이 없다. 지평선은 아직도 펼쳐져 있다.
“꺼내는 수밖에 없나. 귀찮은데.”
  가방을 내려놓는다. 다시 가방을 뒤져 GPS를 꺼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기왕 가방을 내려놨으니 손전등도 꺼낸다. 어차피 어두워진 이상 손전등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뭐, 배가 고프지만 어쩔 수 없다.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음식물을 먹을 수는 없다. 생각해봐라. 방사능폐기물을 내 입에 스스로 들이붓는 짓이다. 라기 이전에 헬멧을 벗어야 되니까 먹는 건 무리다. 계측기를 밸트에 매달고 GPS를 본다. 연구실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대충 봐도 20km정도 온 것 같다. 손전등을 들고 삽을 가방에 매달에 끌고 다니기로 한다. 삽을 들고 손전등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가방에 매달린 삽이 땅을 질질 끌면서 내는 소리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뭐, 변이된 생물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나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삽으로 얼굴을 가격해주면 되겠지. 웃어본다. 내가 획기적인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생물종을 찾지 않는 이상 나를 신경써주는 사람은 없다.
  손전등의 스위치를 누른다. 배터리가 거의 떨어져버린 것인지 전구의 필라멘트가 증발해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계속해서 스위치를 눌러본다. 여분의 배터리, 손전등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삽을 움켜쥔다. 빛이 전혀 없으니 자연스럽게 근육이 긴장이 된다. 손전등을 버리고 움직이기로 한다. 계속 가만히 서있었더니 추워죽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몸을 데우면 긴장도 어느 정도 줄어들겠지.
  들리는 소리는 아무 것도 없다. 간혹 들리는 소리는 바람소리뿐이다. 아니면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딪혀 나는 둔탁한 소리뿐이다. 삽을 어께에 매고 GPS를 보면서 움직인다. 자그만 소리에도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다.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아무 것도 아닌 것에도 더 긴장이 된다. 깊이 들어갈수록 온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바퀴는 이 피폭지에서도 살아남았다. 더구나 더 크게 성장해서, 발로 짓밟아 죽이기 어려울 정도다. 이 피폭지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생물들은 그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크기가 거대해졌다는, 그리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오염된 이 구역에서 살아남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내가 모르는 많은 생물들이 피폭지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나는 방금 갑작스레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 바퀴의 다리를 잘라낸다. 녀석은 다행히 암컷은 아니어서 알집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녀석이 암컷이었다면 알집이 떨어진 순간, 급속도로 성장한 새끼바퀴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녀석의 날개를 삽으로 툭 쳐본다. 단단한 갑각류의 껍질 같은 느낌이 든다. 카메라로 녀석의 머리와, 날개부분을 각각 촬영한 뒤 녀석의 몸을 뒤집는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녀석의 배 부분은 터져버려 내장이 드러나 있다. 내가 아까 전에 너무 강하게 녀석의 배를 가격한 걸까.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사진을 찍는다. 다시 삽을 들어 바퀴의 몸을 뒤집는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죽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바퀴는 크기가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더 질겨졌다. 녀석을 노려보다가, 다리를 다 잘라버린다. 이렇게 하면 살아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굶어 죽겠지.
  계속 걷는다. 다리가 이젠 아플 정도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추워죽을 것만 같아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피폭지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인지, 계측기에서 방사능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상승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린다. 만약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피폭지가 맞는다면 다행이다. 만약 피폭지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라면 난 영락없이 죽는 수밖에 없다. 피폭지로 가는 방향에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벙커가 있다. 어느정도는 쉴 수 있을 것이다. 경보음이 짜증이 날 정도로 쉴 새 없이 울려 경보기를 꺼버린다. 계측기에서 내는 소리가 만약 오염된 생물들을 자극한다면 큰일이다. 바퀴가 문제가 아니다. 피폭지 중심부에 대한 연구는 완벽하지 않다. 솔직히 피폭지 중심의 오염된 호수가 있어, 그 곳에 식인메기라던가 생명체의 체액을 빨아먹는 잠자리 유충이 있어도 놀라지 않겠지.
  벙커를 찾아 계속 움직인다. 배가 고프다. 더구나 체온이 계속 내려가 온몸이 마구 떨린다. 눈앞에 김이 서려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곳이 덩굴로 쌓인 정글이었다면 난 쉴 새 없이 자빠졌을 것이다. 점점 힘이 풀린다. 동상에 걸린 것만 같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렵다. 삽을 땅에 쑤셔 넣고 자리에 서서 몸을 푼다. 온몸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삽을 지팡이처럼 움직여 걸음을 겨우 옮긴다. 머릿속이 몽롱하다. 마치 내가 성냥팔이 소녀가 된 느낌이 든다. 뭐랄까. 소녀가 죽기 전에 처한 상황이겠지. 그래도 소녀는 죽기전엔 꿈이라도 꿨지만, 나로서는 그럴 것 같지가 않다.
  불빛이 보인다.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벙커가 전무할 것이 분명한 텐데 당연하다는 듯이 비춰지는 빛이 이상하다. 누군가 나를 낚아채기 위해 주비해둔 함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째서?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이득은 없다. 김이 서려 잘 못본 것인지도 모른다. 김을 닦아낸다. 하지만 불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덥지도 않아 신기루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흡사 이것은 죽기 전에 보이는 일종의 환각 같다. 침을 삼키고 삽을 움켜쥔다. 저 불빛이 환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편이 낮다. 이 지역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전혀 없다. 이 구역에 대한 출입허가를 받은 것은 나뿐이고.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으로 다가간다. 벙커의 입구는 솔직히 입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면 난 그저 스쳐지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입구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땅바닥에서부터 새어나오고 있다. 물론 이 ‘나 여기 있소’라면서 쉽게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벙커는 밖에서는 열수 없게 설계가 되어있다. 대책 없이 문을 열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춥고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다. 삽을 움켜쥔다. 입구는 폭발당시의 열과, 후폭풍의 영향 때문에 거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다. 삽을 들고 내리치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다. 삽을 들고 내리친다.
  생각 외로 입구는 단단하다.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삽으로 내리치고 나서야 입구가 어느 정도 열렸을 뿐이다. 입구의 틈이 벌어질수록 새어나오는 빛의 양은 더욱 많아진다. 기분 탓인지, 따뜻하다. 삽을 집어넣어 틈을 벌린다. 몇 번을 더 해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틈이 생긴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헬멧을 틈새에 집어넣어 벙커 안을 살핀다. 빛이 새어나오기는 하지만 생명체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괜한 걱정이었나? 머리를 틈새에서 빼낸 뒤 삽을 벙커 안으로 던져 넣는다. 가방을 끌러내려 그 안에 GPS와 계측기를 집어넣는다. 이미 망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없는 것보단 낮다. 가방을 틈새에 던져 넣는다. 가방이 벙커의 유리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에. 뭐랄까. 이거 들어가는 것도 일이겠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선 머리부터 틈새에 집어넣는다. 머리는 손쉽게 들어가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다. 방호복이 찢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삽으로 억지로 비틀어서 만든 틈새여서 그런지 방호복은 간단하게 찢어버릴 수 있게 날이 서있다. 거의 허리에 쥐가 날정도 긴장이 될 정도가 되자 겨우 벙커에 몸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생각보단 깨끗한데?”
  다행이다. 만약 쥐새끼들이나, 바퀴들로 우글거렸다면 큰일이었겠지. 배는 채울 수 없을 테고, 심지어 바퀴한테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빛은 지속적이지 않다. 벙커 윗부분의 달려있는 LED는 계속해서 깜박거린다. 아무리 전력소모가 적다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교체되지 않는 이상 망가지는게 당연하다. 스위치를 눌러 유리문을 연다. 가방과 삽을 들고 유리문 안으로 들어선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문이 닫힌다. 그리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소독액이 분사된다. 헬멧에 소독액이 뿌려지면서 일 미터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다.
“뭐야 이거?”
  소독액이 분사되는 것이 사 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역시 센서가 맛이 가 버린 게 틀림없다. 필터너머로 소독액의 독한 냄새가 두통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삽을 든다. 완전 만능이구만. 삽을 들어 센서가 있을 만한 곳을 내리친다. 그 짓을 두어 번 하니 분사되는 것이 멈춘다. 바닥에 고인 소독액이 질척거린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스위치를 눌러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고인 소독액이 흘러내린다.
  소독실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어둠이 나를 반긴다. 역시 제대로 작동되고 있을 리가 없군. 헬멧을 벗는다. 숨을 쉬자 공기 중에 떠 있는 먼지가 코점막에 달라붙어 코가 간지럽다. 헬멧을 바닥에 던져 놓고 방호복을 벗는다. 땀이 배긴 것 때문인지 방호복이 제대로 벗겨지지 않는다. 소독액 때문에 가방이 엉망이다. 덕분에 GPS와 계측기에 신나게 소독액이 들어가 버렸다. 최악이다. GPS와 계측기를 꺼내 놓는다. 괜히 배터리를 빼놓는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다간 완전히 기판이 날아가 버리겠지. 믿을 것은 삽밖에 없다. 어딘가에 분명 전력을 제어하는 동력실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동작할지 의문이지만 최소한 시도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그나마 전력을 제외한 환경제어시스템은 잘 동작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당장 숨 막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을 보면.
  억지로 방호복을 벗고 그 남은 허물을 바라본다. 꼭 매미가 허물을 벗어 놓은 것 같다.
  어딘가에 이 벙커가 몇 번 벙커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아님 내가 서있는 바로 아래에 표지판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얼굴을 기울여 바닥을 바라본다. 빛이 전혀 없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선 손전등부터 찾아야 겠어. 비상용으로 두어 개 정도는 있겠지. 라기 이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쩌라는 거냐. 초라도 두어개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얼굴에 멍이 생겼을 때에야 겨우 손전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전등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처음 스위치를 눌렀을 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스위치가 제대로 눌러지지 않았다. 뭐, 어떻게 해서 불이 들어오게 되긴 했지만 언제 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삽을 들고 있는 것도 귀찮아서 가방 가까이에 두고 벙커를 둘러본다. 몇 번 벙커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다. 표지판이 피폭당시의 충격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인지, 처음부터 표지판이 없었던지 둘 중 하나다.
  손전등으로 비춰보는 벙커의 모습은 방금이라도 누군가 살고 있었던 느낌이 든다. 물론 벙커로 숨어든 돌연변이들일 가능성도 있지만, 비상식량으로 구비해뒀을 것이 틀림없는 통조림이 깔끔하게 따져있으니 그런 가능성은 줄어든다. 물론 비정상적으로 지능이 상승한 돌연변이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만. 이 지역에서는 뭐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실험의 결과는 항상 달랐고, 난 덕분에 확실한 결과를 얻은 연구가 없는 연구자가 돼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이 된 거지. 통조림을 들어 손전등에 비춰본다. 참치통조림이었던 걸까. 통조림을 거꾸로 들자 참기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이 무지개처럼 보인다. 삽을 놓고 온 것이 후회가 된다. 긴장이 돼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확실한 것은 통조림을 안전하게 딸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통조림을 눈앞에 들고 자세히 살핀다. 핏방울이 묻은 것 같지는 않다. 통조림을 내려놓고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아마 이 곳은 식량창고인 것 같다. 여러 개의 통조림이 입을 벌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식사 중이었던 걸까. 그 통조림은 모두 한꺼번에 해치운 듯 아직 기름이 남아있다. 조명의 전력을 제외한 전력은 제대로 공급되는 것인지 냉장고가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 냉장고는 대형이다. 철제로 만들어진 냉장고의 문은 냉기 때문에 서리가 껴있다. 손전등의 자루 끝을 잡고, 조심스럽게 냉장고문을 연다. 싱싱한 양상추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삭막해 보인다. 모두 통조림이다. 통조림을 하나 꺼내 살펴본다. 통조림에도 서리가 껴있다. 지금 통조림을 따면 그 내용물이 얼어붙어있어 제대로 씹기조차 어려울 것 같다. 통조림을 까본다. 서리 때문에 손이 미끄러져서 제대로 따기가 어렵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손전등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당장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덮칠 것 같다. 조심스레 뒤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의 문을 닫는다. 냉장고에서 새어나온 냉기 때문에 몸이 서늘하다.  
  냉장고를 포함해, 통조림과 벙커를 돌아다니는 동안 발견한 발자국을 볼 때 이곳에는 확실히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이 있다. 만약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물이라면 사로잡아서 해부해보고 싶다. 그러나 섣불리 사로잡으려 하면 오히려 내가 위험할 수 있다. 기분 탓인지 무언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니, 발걸음소리가 아니라 맨발이 바닥의 먼지를 스치면서 내는 그 조그만 소리다. 무언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이 소리가 그 생물이 내는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 벙커 안을 비춰보지만 움직이는 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심호흡을 해서 긴장된 근육을 풀어준다. 나를 훔쳐보고 있는 생물은 아직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 마음을 바꿔 나를 공격할지 몰라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벙커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 않다. 내가 모르는 통로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 벙커에서 계속 머무르지 않는 이상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지 다행히 동력실을 금새 찾을 수 있었다. 동력실이라기 보단, 동력을 제어하는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는 방이다. 확실히 자가발전기가 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모니터에서 새어나오는 새파란 빛이 바닥을 비춘다. 먼지투성이의 바닥에 발자국이 찍혀있다. 발자국의 주인은 컴퓨터 앞에서 긴장하거나 무서워하고 있던지 컴퓨터의 반경 3m이내에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날려 입을 손으로 막고 컴퓨터에 가까이 다가간다. 발자국의 주인이 이 먼지 때문에 컴퓨터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입김을 불어서 키보드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엔터키를 누른다. 간단한 프로그램이다. 연구실의 동력실에 있는 제어프로그램과 같다. 조명을 제어하는 키를 입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다. 환한 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다.  
  그리고 신음성이 들린다. 신음성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내 신음소리는 아니다. 내 소리보다 더 얇고 날카로운 소리다. 손전등을 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 들려서 무엇이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분명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내가 듣고 있는 소리가 환청 같다는 느낌이 들 때 갑작스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환청인걸까? 아니면 그 소리를 내던 존재가 어디론가 도망친걸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굳어있던 몸도 어느 정도 풀어져서 움직일 수 있었다. 여차하면 손전등을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소리가 났던 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간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소리가 났던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날카로운 것으로 긁힌 자국이 여러 개 나있다. 그 것은 마치 고양이가 긁는 스크래치같아서, 내가 들은 소리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 변이된 고양이가 내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긴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으니까. 밝아져서 그런지 나를 지켜보고 있던 그 존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다. 먼지위에 나있는 수많은 족적들이 보인다. 나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상하게 족적의 뒤를 쫓고 싶어진다. 스턴건이라고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족적은 계속해서 벙커 깊숙한 곳으로 향해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벙커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콘크리트에 구멍이 나있는 것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아마 콘크리트를 갉아먹고 사는 쥐새끼들이겠지. 구멍에 손전등의 스위치를 켜서 비춰본다. 곧바로 발광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족적은 끊어져 있다. 족적이 끊어진 그 자리에는 환풍구가 있어 먼지가 쌓일 틈새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환풍구의 윗부분이 구겨져 있다. 아마 환풍구 안으로 들어갔겠지.
  환풍구 안까지 조명이 있을 리가 없다. 손전등으로 환풍구 안을 비춰본다. 동굴의 입구다. 하지만 박쥐는 없을뿐더러, 그 천적인 고양이가 있을지 모르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박쥐의 천적이 고양이인지, 쥐인지 헷갈린다. 이 벙커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벙커가 제대로 방사능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쥐들이 갉아먹은 콘크리트 틈새로 방사능이 노출되고 있을 것 같다.  
  다시 환풍구를 바라본다. 환풍구는 내가 들어가기엔 너무 작고, 약해 보인다. 더구나 마스크도 없이 환풍구 안으로 들어갔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올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속도 때마침 좋지 않은데, 일부러 들어가 더 좋지 않을 상황과 마주할 필요는 없겠지. 괜한 호기심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조명이 켜져 있으니 나를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빛이 없던 이 벙커에서 살던 생물이 갑자기 빛에 금방 적응할 수는 없을 테니, 모습을 드러내기엔 어려울 테지. 속이 이상하다. 배가 고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내가 잘 못 본 것이 아니다. 환풍구의 입구에 무엇인가의 눈이 빛난다. 눈동자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내 눈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눈에서 나는 느낌은 야생 삵같다. 내가 눈을 피한다면 곧바로 나를 덮칠 것만 같은 눈빛이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거슬린다. 정말로 고양이가 돌연변이한 걸까. 이족보행하는 고양이라. 웃기기는 하지만 지금 웃을 수는 없다. 눈을 바라본다. 충혈 되어 있는 눈은 금방이라도 실핏줄이 터질 듯하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린다. 환풍기 안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더 크게 들린다. 참치캔을 가지고 올걸 그랬다. 이렇게 된 이상 나를 공격할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선제공격을 하던가, 아니면 별다른 확률이 없는 도주를 하던가. 등 뒤에 상처가 나는 것은 질색이다. 손전등의 끝을 움켜쥐고 녀석이 환풍기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린다.
“어?”
  하지만 그 눈동자는 곧 사라진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순간 울컥 치밀어오르지만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환풍구를 타고 조용히 움직이는 그 것의 발소리가 천장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손전등을 켜서 환풍구를 비춰본다. 환풍구의 쌓여있는 먼지위에 그 족적이 확실히 찍혀있다. 한참동안 환풍구에 빛을 비춘다.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계속해서 환풍구를 보고 있었더니 눈이 아플 지경이다.
  냉장고를 뒤진다. 참치캔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수병이 몇 개 있다는 것이다. 부유물이 떠있지 않은 생수병을 하나, 그리고 참치캔을 하나 꺼내든다. 참치캔은 그나마 유통기한이 남아있지만, 생수는 이미 삼년정도 지나있다. 마셔도 될까? 생수병을 까서 물을 마신다. 냉장고에 보관돼 있었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목을 축이자, 추워진다. 제대로 난방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배를 채우면 괜찮아 지겠지. 참치캔을 딴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식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먼지가 가라앉은 포크조차 없다. 벙커안에서 이 지역을 벗어난 정상적인 지역에서 즐기는 식사를 생각하는 것 자체는 쓸데없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심하다. 연구실은 그나마 식기정도는 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손을 들어 참치를 집어 입에 집어넣는다. 꼭 내가 거지가 된 듯한 기분인데. 참치라기보단 물에 불린 종이를 씹는 것 같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배는 어느 정도 차는 것 같다. 뱃속에 차곡차곡 종이가 한 겹씩 쌓인 느낌. 그래도 참치기름은 사양이다. 비어버린 통조림을 한곳에 쌓아둔 곳에다 던져 놓고 먼지가 잔뜩 쌍인 의자에 앉는다. 덕분에 먼지가 공기 중에 날려 기침이 나온다. 기침이 심각할 정도로 나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거, 진짜 심한데? 이상할 정도로 기침이 나온다.
“이거 뭐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붉은 액체가 묻어있는 것이 보인다. 피 같다. 그러고 보니 목이 따끔거리는게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 같다. 속이 헤집어 진다. 구역질이 나온다. 토사물에 피가 섞여 나온다. 한번 구역질을 했더니 미식 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괜찮아 진 것 같다.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뭔가 불순물이 섞여있던 걸까. 구석에 쌓여있는 통조림캔을 뒤져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흘러내려 만지면 만질수록 구역질이 나는 참치기름뿐이다. 입을 다물어도 피는 계속 흐른다.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먼지위로, 참치기름 위로 흘러내린다. 피를 닦을 만한 휴지나, 수건은 보이지 않는다. 입안에 상처가 생긴걸까? 아니면 속에서부터 내장이 파열했다던가. 손으로 입을 훔쳐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장속이 바늘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진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흐르는 것은 더욱 심해진다. 혹시 방사능에 피폭된 걸까. 방호복을 아무런 대책 없이 벗어버린 것이 후회가 된다. 젠장. 배를 움켜쥐고 방호복을 벗어둔 곳으로 되돌아간다. 필름배지가 들어있을 것이다. 만약 필름이 변했다면 상황이 좋지 않다. 가방을 뒤진다. 가방을 뒤지고 있는 순간에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 가방 안으로 스며든다. 보이지 않는다. 작동이 제대로 되지 모르는 계측기를 주워든다. 겉에 묻은 소독액은 모두 증발돼 버렸지만 속에 있는 것까지 증발되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벙커가 정말로 안전한 것인지 확인해야 겠다. 계측기의 전원스위치를 누른다. 그 순간 너무나 어이없게 스파크가 튀긴다. 그리고 계측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흰 연기는 이 상황이 전혀 웃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웃게 만든다.
“으웩.”
  다시 구토가 시작된다. 아까전과는 달리 선지같이 뭉친 피가 토사물과 함께 섞여 나온다. 토사물 중에서 대부분은 피다. 온몸이 아파온다. 몸이 화끈거린다. 화상을 입은 기억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근육이 급격하게 수축되면서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난 분명 일어서 있는데, 다리는 이미 풀려 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다.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면서 속이 어느 정도 편해진다. 하지만 그 것은 일시적이어서, 통증 때문에 그런 느낌은 곧 사라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지만 움직이는 것은 왼쪽 팔이다. 온몸의 신경들이 서로 엉켜 제대로된 행동을 못하고 있다. 난 분명 대량의 방사능에 피폭됐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이런 내 증상을 내가 진찰하면서 죽음을 선고하는 꼴이라니. 웃는다. 하지만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다리가 움직인다. 내 웃음같이 다리가 떨린다. 배를 움켜쥔 채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픈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바닥에 부딪힌 충격 때문에 머리가 터져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눈앞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다. 눈을 감았다 뜬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발가락이다. 눈이 감겨지지 않아 눈물이 흘러나온다. 천장에서 누군가 걷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지켜보려는 걸까. 아마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비명을 질러 주었으면 좋겠다. 천장을 올려다보려고 목을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것은 오른쪽 발목이다. 환풍구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런 모든 반응도 피폭증상이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몸이 움츠려든다. 몸에 있는 물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이 바스라질 것 같다. 움직이고 싶지 않지만 온몸이 종이처럼 말려서 무의식적으로 조금씩 움직인다. 몸이 바닥에 스치면서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더 이상 흘러나올 피가 없는 것인지 피가 흐르는 것은 거의 멈췄다. 하지만 통증은 계속 느껴진다. 차라리 지금 죽어버렸으면 좋을 정도다. 머리가 움직인다. 내 의지와 서로 상반되는 움직임이다. 눈가를 찡그린다. 조명이 눈을 제대로 감지 않아서 그런지 자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느 정도 조명에 적응이 되자 내 머리를 움직인 그 것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눈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것 이외에는 전부 그림자인지, 머리카락인지 가려져 있다. 손을 내민다. 조명에 비춰지는 손은 참치기름인지, 아님 다른 무엇인지 무지갯빛으로 빛난다. 그림자에 먹혀 눈동자만 보이는 그 얼굴은 계속 보고 있으니 동생의 얼굴인지, 무엇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같이 보인다. 웃고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보면서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걸까. 정신이 흐릿해진다. 눈동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난 손을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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