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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파이퍼 전투 소대

2009.11.15 23:2811.15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파도 소리는 너무나 황량하기만 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 치 앞이라도 볼 수 없는 어둠을 넘어 배 한 척이 해변 가까이 다가왔다.
흐릿한 형체만이 보일 뿐인 그 거대한 인공의 존재는 한동안 침묵과 함께 정지해있었고 달이 구름에 완전히 가려지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삐걱거리는 괴성을 토해냈다.
배가 토해낸 상륙 주정 몇 대들은 재빠른 속도로 물을 가르면서 모래사장에 당도했고 곧 거대한 굉음과 함께 강철의 전사들이 그들의 충실한 철마와 함께 그 발자국을 디디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이 해변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몇몇 소규모 경계 병력이 있기는 했었지만 그들 모두는 이 장소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맹폭격을 가하고 있는 폭격기 때문에 다른 집결지로 철수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저 멀리 유럽 대륙에서 강제로 끌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군인들은 이 동북아의 반도에,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알 수 없는 나라의 전장 한 가운데에 무사히 상륙했다.


전차의 측면을 강타하는 강렬한 금속성 소음.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대전차포에 직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큐폴라 위에서 지시를 내렸다.

"적 대전차포대다! 우선회!"

FuG 5 무전기를 통해 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탄 장전했습니다! 거리 300!-

"좋아, 포이어!(쏴라!)"

티이거 2의 강력한 88밀리 71구경장 주포가 불을 뿜었고 육중한 포성과 진동이 전차를 뒤흔들었다.
전차포에 직격당한 인민군의 대전차포 포대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쌍안경으로 살펴본 결과 사람의 형체로 추정되는 두 개의 무언가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낙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흠..."

파이퍼 소령은 반쯤 파괴된 T-34 전차를 엄폐물 삼아서 격렬하게 저항을 가하는 잔존 인민군들의 모습을 조금은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와 흡사한 총성이 울리면서 인민군들은 MG-42 기관총의 맹렬한 사격에 처참하게 피떡이 되며 죽어나갔다.
공포에 질린 인민군 한 명이 도망치려다가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뇌수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비틀대다가 앞으로 엎어져 버렸고 운 좋게 팔, 다리를 얻어맞은 녀석들도 곧 머리가 깨져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반파된 구조물 저 편에서 인민군 수백여명이 고함과 함께 달려들고 있었다. 최초에만 해도 대전차포와 전차로 무장된 정예 부대였건만 지금은 소총과 수류탄, 폭탄만으로 무장한 채 전차 5대가 버티고 있는 소대에 덤벼들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동정이 들 정도였다.

“거리 200, 사격!”

미군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분명 독일인이며 한때 무장친위대의 일원으로 유럽과 러시아에서 싸워왔던 병사들은 침착하게 제 위치를 잡고 기관총과 각자의 개인화기를 연사하면서 돌진해 들어오는 인민군들을 일거에 섬멸해나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작렬하는 포탄과 기관총 세례는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으로 맹렬하게 저항하던 인민군을 거의 학살 직전으로 몰아갔다.
무차별적으로 기총 사격을 해대며 전진하는 4호 전차의 육중한 캐터필러가 인민군을, 그들의 모든 것을 마구 짓이겨 버리고 있었다.
이 절망적 상황에 이제는 몸 밖에 남아있지 않은 인민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싸우다 죽거나, 아니면 도망치다가 죽거나.
어차피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이 부대는 포로를 용납지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아 잡히더라도 그에게 기다리는 운명은 오직 죽음 뿐.


“조용하군.”

철저하게 파괴된 그 모든 광경에 잠시 시선을 두던 요아힘 파이퍼는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격렬했던 전투의 중심이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한국이라고 했나?
이 나라의 여름은 마치 1940년의 프랑스를 생각나게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때의 화려했던 나날이 벌써 10년 전의 일.
그 때만해도 모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대한 총통 각하가 우리 모두를 위대한 승리의 정점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을.

“지쳤어...”

파이퍼 대령은 아직 뜨거운 커피에 입도 대지 않고 그냥 바닥에 부어버렸다.
미국 녀석들의 입맛은 여전히 이해 못할 구석이 많았다. 러시아의 동토에서 대용 커피도 즐기던 그였지만 이 커피만큼은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망할 양키들.

“수송 트럭이 전투의 와중에 하나 당했습니다.”

저 멀리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타오르는 트럭.
메이드 인 아메리카.

“경상이 두 명 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탄약 소모가 예상 외로 꽤 많습니다.”

파이퍼 대령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주 파란 하늘이었다.
지금 두 개로 갈라진 조국의 하늘도 저런 색깔인 것일까? 그는 궁금했다.

“파이퍼 대령님?”

미국 놈들은 자신들에게 완전 사면을, 그리고 집으로 무사히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그 대신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쟁 범죄자들인 자신들에게 한 가지 요구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발키리 여신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었다.

“슈베이크, 탄약 창고들을 폭파하기 전에 녀석들의 무기와 탄약으로 최대한으로 챙기도록. 다음 전투가 끝나면 필요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흐릿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화염에 휩싸인 채 불타오르는 전차의 잔해를, 전투의 배설물들을 쳐다보았다.


지겨운 전쟁이 끝났고 모두가 이제는 살았다고,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파이퍼와 그가 이끄는 부하들은 포로 학살을 일삼는 소련군이 아니라 서방 연합군에 항복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 파이퍼는 자신들이 너무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뼈저리게.
그들은 노골적으로 포로를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모두를 죽이고 있었다.
서방 연합군은 무장친위대를 정규군으로 대접해주기는 커녕, 히틀러의 사설 무장 범죄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 내내 육군과 마찰을 빚어왔고 그 위치도 애매했던 무장친위대의 생존자들은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고 그나마 서방 연합군이 제네바 협정을 적용해준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무장친위대 전용 포로 수용소는 절망 그 자체였다. 식료 배급은 늦어지기 일쑤였고 며칠 굶는 것은 예사였다.
더욱이 독일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는 레지스탕스들이 빵과 스프에 독약을 타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우울한 상황에서 무장친위대 포로들은 음식이 배급될 때마다 제비뽑기로 가장 먼저 먹어보는 사람을 뽑는 비참한 방법을 강구해냈다.
무사히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거품을 토해내며 죽어나가는 일이 더 흔했다.
제대로 된 천막도 지급해주지 않은 탓에 차가운 겨울에 동사하는 이들도 늘어만 갔다.
그리고 한창 날씨가 추워질 때 한층 대담해진 레지스탕스와 젊은이들이 경비병의 묵인 아래 포로 몇몇을 끌고 가거나 그 자리에서 총살, 혹은 무차별적 구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요아힘 파이퍼와 같은 장교들이 항의했지만 곧 서방 연합군은 1946년 다츠하우에서 열린 군사 재판으로 무장친위대 전원에 대한 총살형을 선언했다.
일부 영국, 그리고 미국 장교들이 항의할 정도로 어이없는 판결이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치열한 법적 공방이 난무했지만 1950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무장친위대 전원에 대한 총살형은 철회되지 않았고 포로 수용소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곳에서 역전의 용사들은 아사했고 또 동사했으며 학살당했다.

“파이퍼 대령, 제안할 일이 있습니다.”

부하들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4년의 세월을 보냈던 요아힘 파이퍼는 이제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전쟁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 같은 풋내기 미군 장교 하나 차갑게 웃으며 나타났다.
극동의 어느 나라에 발발한 내전.
그는 제안하고 있었다. 파이퍼가 무장친위대 일부를 이끌고 이 전투에서 미군이 요구하는 몇 가지 임무를 해결해주기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포로를 전투병으로 투입하는 것은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그 장교는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어차피 당신들은 정규군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집단들이지 않나요? 제네바 협정도 사람이 만든 것이고 허점은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맨입으로 해달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임무에 성공할 경우 총살형은 당연히 취소에다가 적절한 보상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파이퍼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장교는 서류 가방을 뒤적이더니 자신의 말을 입증해줄 서류들을 나열해나갔다.
미합중국의 힘이 실린 종이. 한낱 종이 조각이었지만 거기에 적힌 내용은 모두를 살리고 또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자, 이제 내 말이 믿어지십니까?

요아힘 파이퍼는 굳은살과 흉터로 엉망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떨리고 있었다.
그 지옥과도 같았던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 이 말이지? 거기다 자신을 믿어주는 부하들을 이끌고.
파이퍼는 경련하는 손을 불끈 쥐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하겠소.”


비행장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잘 주기되어 있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동체 부분이 박살이 난 채 널브러져 있었고 비행장의 시설물들 역시 검게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명중! 적 항공기 모두 격파했습니다!”

포미 약실에 새 포탄을 밀어 넣으면서 탄약수가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비행장에서 2000미터 가까이 떨어진 지점에서 장거리 포격을 아주 정확하게 퍼붓던 티거 2의 포성이 일순 멈췄다.

“적 전차가 튀어나오고 있군. 아마 영문을 모르겠지.”

비행장 방어 임무를 맡고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T-34 전차 8, 아니 9량이 조금 전 박살이 난 비행기의 잔해를 짓밟으며 서둘러 비행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이퍼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끝났군.”

미군의 옷을 벗어던지고 따로 챙겨온 무장친위대 얼룩무늬 위장복으로 갈아입은 채 완벽하게 매복해있던 무장SS 병사들은 판쩌 파우스트로 T-34 전차들를 겨냥하고 있었다.
차체 정면에 하나, 그리고 측면에 또 하나를 얻어맞은 선두 전차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전차들 역시 주저앉으면서 격파당하고 있었다.
전차병들이 포탑 해치를 열고 급히 빠져나오려 했지만 무장SS의 총격에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FuG 5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2호차와 3호차는 대전차포에 주의하며 비행장으로 진격하라! 4호차는 소대원들을 호위하며 진입하도록! 장갑차량은 보급 트럭의 호위에 전념한다!”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티거 전차와 판터 전차가 전차포을 각각 쏘면서 비행장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4호 전차 역시 기총 사격을 실시하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바로 뒤에 바짝 붙은 무장SS 병사들은 사격 자세를 취한 채 뒤따르고 있었다.
둔중하게 울리는 포성과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총성, 그리고 비명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승리했군.”

파이퍼 대령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누구를 위한 승리란 말인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직도 저 멀리 검게 불타오르는 연기가 보일 정도로 비행장은 파이퍼 대령의 전투 소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조금 지체되었군...”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불안한 눈빛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비행장 파괴를 성공리에 끝마치고 신속히 철수하려는 순간 티거 2가 고장이 나버려 시간을 소요해버린 것이다.
미군 녀석들이 최초에 건네줄 때 정비를 엉망으로 해놨는지 몰라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시도해봤지만 결국 포탄과 기관총, 그리고 여타 쓸 만한 장비들을 모두 따로 챙겨두고 티거 2를 자폭 처리했다.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이 땅에서 벗어날 때가 되면 최초의 모든 장비들 대부분은 사라진 채 맨몸으로 도망쳐야 될 것이다.
아니,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현재 이 장소에서 최대한으로 멀리 벗어나야만 했다.
파이퍼 대령은 지휘전차의 큐폴라에서 자신의 뒤를 따르고 이 이국의 땅에서 헛된 전투를 벌이는 장병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을 죽게 놔둘 수는 결코 없었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 계속 연승을 해나갔지만 사단, 아니 2개 대대 규모의 병력과 맞부딪치면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이제 남은 임무라고는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는 적의 보급 루트와 보급 기지를 파괴하는 것뿐이라고, 그것만 수행하면 이제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어가 보고 싶군...”

아마 지금쯤 캐나다의 수용소에 있을 것이다. 혹시나 벌써 총살되지 않았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 장교가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출전 전에 그 장교가 특별히 힘을 써줘서 이번 한국전에 참전하는 무장친위대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 양키 녀석이 정말로 편지를 전해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레도 파이퍼는 믿고 싶었다.

“어....”

저 멀리 하늘 너머로 검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비행기?
현재 한국의 하늘은 분명 소련 공군임에 틀림없는 북한 공군과 미 공군이 팽팽하게 서로 하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공중전을 벌이느라 지상 공격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늘은 광대한 공간이다. 분명 그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하는 빈틈이 생길 때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젠장, 대공 사격이다! 대공 사격!”

분명 비행장의 참변을 확인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 단순히 관측기였으면 좋겠지만 만약 무장을 하고 있다면?
최초의 로켓탄이 연기 줄기와 함께 날아왔다. 운 좋게 빗나갔지만 녀석이 퍼부어대는 기관포 몇 발은 운 나쁘게 판터 전차의 기관부를 관통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파이퍼 대령은 주먹을 내리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전차병이 서둘러 빠져나오려던 찰나 로켓탄이 판터 전차 특유의 곡선 장갑 전면을 강타하면서 굉음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흑사병(Schwarz Tod )이다! 도망쳐!”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보급 트럭 한 대가 한순간에 폭발해버렸다.
그 안에 들어있던 연료와 탄약, 예비 장비, 그리고 전차 기동에 필요한 부품들이 단 한 번의 폭격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하나 남은 보급 트럭마저 날아가면 더 이상의 작전 수행은 불가능했다.

“대공 사격이다! 저 망할 슈트로모빅을 격추시켜버려!”

그 공격기는 이상하게 어설픈 느낌이 역력했지만 하늘에서의 공격은 언제나 지상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았다.
슈트로모빅 공격기가 발사한 로켓탄가 기관포 세례에 장갑수송차량 한 대가 불길에 휩싸이며 뒤집혀졌고 필사적으로 대공 사격을 펼치던 독일병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나갔다.

“조금만 더! 날개에 연기가 보인다!”

파이퍼 대령은 손수 MG-42 기관총을 잡고 그의 머리 바로 위를 스쳐지나가는 슈트로모빅 공격기에 총알을 퍼부어댔다.
그제야 너무 낮게 날고 있음을,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음을 깨달은 북한 공군의 조종사는 급히 고도를 상승하며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녀석을 포착한 탄막은 쉽사리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꼬리 날개가 너덜너덜해지는가 싶더니 엔진 카울 커버가 순식간에 박살이 나면서 비틀대던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는 지면에 거칠게 추락하면서 동체가 똑 부러지더니 폭발해버렸다.

“젠장!”

너무 피해가 컸다. 전차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장갑수송차량도 2량이 기동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급 트럭 한 대는 보급품과 함께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지금까지 아무런 인명 피해가 없던 파이퍼 전투 소대는 총원 47명 중 22명이 전사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23번째 전사자가 될 운명의 병사가 파이퍼 대령의 눈앞에서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대령님, 전 처음에 아주 밝은 빛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가 저와 제 동료들을 덮쳤습니다. 마치 지옥의 화염과도 같았습니다. 대령님, 제발 절 죽여주십시오.”

그 모든 의료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숨을 거둔 부하의 모습에 파이퍼 대령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그저 저주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8월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날씨는 한층 더워지기 시작했지만 간간히 시원한 바람이 전장 한가운데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했다.
요아힘 파이퍼 대령은 우울한 표정으로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번 임무만 마치면 미국 녀석들의 배를 타고 집에 갈 수 있다! 힘을 내라!”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곳에서는 의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독일군 포로를, 그것도 모두에게 악마라고 지탄받는 자신들을 한국전에 임의로 투입한 사실은 분명 국제적으로 비난을 삼고도 남을 일이었다.
과연 정말로 미군은 자신들을 무사히 귀환시켜줄 것이란 말인가?
임무가 끝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이퍼 대령은 미군이 자신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다가 마지막에 죽여 버리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파이퍼 대령은 잠시 웃었다. 모두가 멋진 미소라고 칭찬해주던 미소였지만 잔인함에 배어나오는 웃음이었다.

‘만약 네 놈들이 우리를 쓰다 버리는 체스 말로 취급한다면...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아힘 파이퍼 대령의 잘생긴 얼굴은 결연한 의지로 인하여 굳어있었고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의 눈동자는 냉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이퍼 대령님, 미군입니다!”

파이퍼 대령은 그 말에 의아해하며 그 병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대로 전차 4량 정도가 약 20여명 정도의 병력과 함께 저 멀리서 흙먼지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 모양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미군 복장을 한 녀석들이었다.

“분명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 중일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잠깐만....”

파이퍼 대령은 선두의 전차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군을 상징하는 하얀 별이 그려져 있었지만 오목한 달걀처럼 생긴 포탑은 분명 스탈린 전차와 닮아있었다.
그리고 다른 전차 역시 소련군 전차와 비슷했으며 다른 하나는 판터 전차를 개조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제기랄, 소련군의 제5열이다! 저 녀석들은 위장부대야! 공격 준...”

비를 외치기도 전에 포탄이 파이퍼 대령의 바로 옆에 작렬하면서 그는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커억!”

바닥에 내동이치면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과 귀가 멍해지는 그 기묘한 감각에 요아힘 파이퍼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어나, 몸을 움직여서 지휘를 해야 돼! 일어나란 말이야, 이 망할 자식아!
그는 붉게 물든 눈을 부릅뜬 채로 떨리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부하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공격해오는 적들도, 오랜 적도 같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후퇴를...후퇴를 해야...”

누군가가 투척한 수류탄이 요아힘 파이퍼의 근거리에서 폭발했고 그 충격파에 휘말린 그는 차가운 흙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귀에서 무언가 질척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소련군 한 명이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한 채 쓰러져있는 파이퍼 대령 바로 앞에서 죽어버렸다.
맙소사.
그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생명을 잃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리고 피에 물든 그 얼굴을 보았을 때 파이퍼는 그 소련병이 낯이 익음을 알 수 있었다.
소련군 옷 너머로 보이는 독일군 제복. 그리고 1944년 겨울에서의 기억이 그가 누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는 녀석들은 독일군이었다. 미군이 이 전쟁에 독일군 포로를 이용하는 생각을 했을 때에 소련군 녀석들 중 어떤 놈도 그 비슷한 생각을 거의 동시에 했던 모양이다.
미군처럼 위장시켜서 전선에 혼란을 가하거나 정치 선전을 벌이는 목적의.
그리고 극동의 전장에서 전우들은 다시 조우했다. 만남을 기뻐할 틈도 없이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밀려드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파이퍼의 두 눈은 이제 푸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고요했다.
요아힘 파이퍼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조병순은 오늘이 특히나 바쁜 날이라고 생각했다. 임시 수도 부산은 무법천지와 비교해보아도 별로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아비규환인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경찰인 그로써는 하루하루가 고된 나날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찰이라는 직위는 배 굶지 않고 적당히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여러 가지 부수입을 얻을 수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어떨 때에는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쉬고 싶었다.

“저리 꺼져!”

이제 막 도착해서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로 이런저런 잡상인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병순이 한 손에 든 경찰봉을 휘두르면서 욕설을 내뱉는 동안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라? 미국 놈이네..”

조금은 허름한 차림이긴 했지만 분명 미군 녀석들이 입는 옷을, 그것도 꽤나 높은 지위의 장교 제복을 걸치고 있었고 상당히 야위긴 했어도 놀랍도록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 낯선 미국인은 싱긋 웃더니 무어라 묻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에, 제네럴들에게 가봐야 되는데...어, 길을 알려달라고?”

조병순은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대강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가졌다.
그 덕분에 미군정 시절에 경찰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상사와의 마찰 때문에 이렇게 거리에서 질서 유지 일이나 하고 있는 신세가 됐지만.
조순병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문법이나 맥락은 전혀 맞지 않는 단어만의 나열로 어떻게든 설명을 해주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영어였지만 그 미군 녀석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땡큐라고 말했다.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 노 프라블럼!”

간만의 영어 대화에 자신감이 붙은 조병순은 또 뭔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다.
그 미국 장교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말했다.
분명 거절의 의사였는데 건? 권총이란 말인가? 그리고 거어네이드? 그건 무슨 뜻이지?
조병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보았다.
권총과 거어네이드만으로 충분하다?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거절의 뜻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케이, 오케이! 바이!”

조병순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그렇게 외치며 손을 흔들어댔다. 미군 장교는 왜인지는 몰라도 힘이 없어보이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어, 달러인가?”

아니었다. 작은 십자 모양의 장식품이었다. 검은 재질에다가 무게가 조금 무거운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철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뭐야, 돈도 되지 않을 걸....”

조병순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 이미 그 미군 장교는 수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는 거리의 저 편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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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준 09.11.18 18:3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파이퍼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좀 난감할 듯 하네요.
    포로 학살에 책임이 있어서 그다지 좋은 이미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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