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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비사사설毘舍舍說

2009.11.15 08:4111.15

위서 땅에서 귀양살이를 할 적의 일이다.

위서 땅에 호보라는 자가 있어 담이 쎄고 용력이 대단하여 이름난 자가 있었는데,무과에 응시하여 활쏘고 말 달리는 데 빼어난 기량을 보였으나 반역의 상이 있는 땅에서 왔다고 하여 이름을 그으려는 것을 한 사람이 아깝게 여겨서 그 고장의 관직이라도 줄 것을 청했으므로 3위의 성적을 차지하고도 좌천지인 위서 땅에 발령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도 크게 마음 쓰지 않고
"관직을 얻고 의기양양하게 고향 땅에 돌아오니 이야말로 금의 환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고 웃어 넘기니 그의 사람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호보가 그 땅에 부임하여 관병을 사열하고 무기고를 점고해 본 즉 장부와 일치하는 것이 없으매 크게 노하여 꾸짖고는 즉시 그 고장의 엽부들을 불러 모았다.
호보가 무과에 응시하기 전 함께 어울리던 자들로 본디 풍속이 사냥을 즐겨 하는지라 모여든 이들이 구름같았다. 호보가 그 자리에서 너는 십부장, 너는 포수장 하고 썩썩 새로 명부를 써내려간 즉
구실아치들이 만류하여 "전례에 없는 일이고 절차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하자 호령하여 대조해 보게 하니 관병 가운데 엽부들과 겨루어 당해낼 자가 없고 관고의 무기들은 하나같이 녹이 슬고 제대로 된 것이 없었으나 엽부들의 무기들은 항시 날을 갈고 기름칠하여 두므로 언제든 집어 쓸 수 있었다.

이리하여 호보가 이들을 이끌고 자주 엽행하여 구실아치들이
"북방의 오랑캐들이 항시 땅을 넘보고 있는데 어찌 이리 태만하십니까?" 하였으나
다만 웃을 뿐 듣지 않았다.

나라가 기울어 국력이 쇠하매 오랑캐들이 업신여겨 자주 침탈해오다가,
마침내 크게 떼지어 몰려온즉 구실아치들이 낯빛이 변하고 백성들이 수족 둘 곳을 모를 때 호보가 새 관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거푸 대승하여 적의 예봉을 꺾고 여러가지로 적의 수괴를 달래어 돌아가게 하니 비로소 백성들이 안심하였다.
호보가 "본디 엽행이 군사 기르는 일의 한가지라, 둔병 할 수 없는 곳에서는 엽행을 자주 함으로써 첫째로 실제의 훈련을 할 수 있고 둘째로 그 땅의 지세에 능숙하게 하는 일이라." 이르니
그제야 구실아치들이 감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백성들이 명관이 오셨다고 칭송하여 그의 사람됨이 또한 대체로 이와 같았다.

내가 처음 위서 땅에 이르렀을 때 한조각 집은 누추하고 밤마다 바람이 새어 괴롭기 그지 없었는데
내가 위서 땅에 유배되었다는 말을 듣고 호보가 직접 찾아와 관졸을 시켜 집을 수리하게 하고 때때로 사냥한 것들을 지어 보내게 하였다.
어찌 죄인에게 이리 관대하냐고 만류하자 껄껄 웃으며
"상께 직간하여 진노를 사는 일은 충신이 마땅히 해야 할 뿐, 대감의 기개를 높이 살 따름입니다."
하고 고집을 꺾지 아니하여 선물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선물을 보내오고 왕래하여 담소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호보가 청하여 그의 집에 갔을 때 한동안 차를 두고 담소하다가
문득 호보가 명하여 "그 물건을 내어오라" 하였다.
본 즉 갑옷과 같이 생겼는데 그 우둘두둘한 거죽이 기이하고 색이 검붉었으며 마치 통으로 바느질 한 곳 없이 짠 듯 하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호보가 답하기를

"새로 만든 갑옷인데 진귀한 것을 얻었으므로 대감께 구경시켜드리려 합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거죽에 누벼 만든 자죽이 전혀 없는데도 여러 겹이 떨어지는 곳이 없고 물샐틈 없이 빽빽하고 질기어 빗나간 살에 상할 일도 없을 듯 하여 잘 알지 못하는 눈으로도 썩 좋은 물건으로 보였으나 그 외에 진귀한 점은 알 수 없어 다시 물었다.

"갑옷으로 좋은 물품인 듯 합니다만, 어째서 진귀한 물건인지 알 수 없군요."

호보가 웃고 다시 명하여 "머리도 마저 내오라" 하였다.
붉은 천에 받쳐 내온 물건을 보니 마치 개의 것과 흡사한 머리였는데 그 생김이 개라고 보기에는 기묘한 데가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도 마저 내오라 하셨으니, 무엇의 머리란 말씀입니까?"

"이는 비사사라는 짐승의 머리입니다. 운 좋게 이번 엽행에서 사로잡았기로 그 가죽으로 저 갑옷을 만든 것입니다."

비사사라는 짐승은 전혀 처음 듣는 것이었으므로 다시 물어

"견문이 짧아 비사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상세히 설명하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사사라는 것은 개의 머리에 원후의 몸을 한 짐승인데, 본디 원후의 크기 만 하던 것이 오래 묵으면 장정만해집니다.
이렇게 큰 것은 구하는 이가 많아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요.

비사사라는 놈은 자기 가죽을 아주 공들여 다듬는데,
산이나 골에 살면서 갖가지 약풀을 구하고 또 이로운 뿌리와 열매를 취하여 더러는 먹기도 하고 또 그 즙을 내어 바르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물 아래에서 버티기도 하고, 해가 뜨거운 때에 산 높은 곳의 바위가 달구어지면 그 위에서 견디기도 하지요. 폭풍우가 쳐서 뭇 짐승들이 숨어들 때면 밤새도록 숲을 날뛰고 달리어 상처 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얼어붙도록 추운 겨울날 얼음을 깨고 그 찬 물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자기 거죽에 상처를 내고 약풀 즙을 발라서 낫게 하여 흉터와 굳은살이 지게 하여 그 가죽을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서 오래 되면 오래될 수록 더 가죽이 강해져, 심지어 몇십년 이상 사는 놈은 술법을 익혀서 가죽에 스며들게 하기도 한다는군요.

이런 까닭으로 그 가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통짜로 갑옷 한벌을 지을 만한 녀석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저 먼 서역 땅에서는 그 지방의 군주에게 바치는 물품이라 하니 이토록 진귀한 물건을 얻는 것도 참으로 드문 일일 것입니다."

그와 담소를 마치고 돌아와 문득 생각하니 세상 일이 돌아가는 것이 이와 같았다.

비사사라는 짐승이 자신의 가죽을 아껴 공을 들이나 그 때문에 도리어 목숨을 잃게 되니,
옛말에 이르기를 성인의 가르침은 재주를 숭상치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기교를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하며
욕심날 물품을 보여주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도록 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재주에 공을 들여 그 기예를 훌륭히 하면 사방에서 그를 탐하여 교만타가
마침내 한발짝 실수라도 하게 되면 천길 낭떠러지에서 굴러 이름은 물론이요 그 재주와 심지어는 목숨마저 잃기 쉬우니,

가까이로는 나 스스로도 엄정한 성품과 결백한 미덕으로 이름남을 쫓다가 오늘의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비사사와는 달리 목숨을 구하였으니 다행한 일이며, 또 세상 이치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못하고 무턱대고 달리다 일을 그르쳤으니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이리하여 청운을 쫓고자 공부하는 이들에게 경계하는 뜻으로 짧게 적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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