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살인마

2009.10.26 02:3910.26

살인마






6월 초의 어느 낮. 후텁지근한 열기가 주택들과 골목 사이를 가득 맴돌고 있
다. 그 열기를 반으로 가르며 노란 반소매 티에 카고 반바지를 입은 지훈이
대문을 열고 집에서 나온다.
지훈은 이십대 후반의 남자지만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
다. 하지만, 그 외에 눈에 띌 만한 점은 찾을 수 없다. 동안인 것만 빼면 어
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인 것이다.
지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글거리는 태양을 짜증스럽게 올려다본다.
강렬한 햇빛이 지훈의 온몸을 쨍하게 휘몰아쳤다. 지훈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
며 느릿느릿 큰길로 걸어간다. 큰길로 나가는 골목 오른쪽에 옆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위 때문에 심통이 난 지훈이 옆집을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그때였다. 별안간 옆집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몽둥이로 뭔가를 때
리는 듯 퍽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경을 긁는 쇳소리가 섞여든다.
지훈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삐죽 고개를 내밀고 낮은 담 너머로 옆집 안을 살
폈다. 옆집 마당에 성인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성인 남자가 뒤를 보인 채 그 사람을 깔고 앉아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밑에
깔린 사람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맞고만 있을 뿐이다.
'저건 너무 심하잖아?'
울컥한 지훈은 그 사람을 말리기 위해 얼른 옆집 대문을 열어젖혔다. 녹슨 쇠
붙이가 마찰을 일으키며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낸다. 지훈은 대문 틈 사이를 종
종걸음으로 통과해 문제의 그 사람에게 향했다. 허나 몇 발자국 채 걷기도 전
에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덜컥 멈춰 서고 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지훈
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날카로운 칼로 밑에 깔린 사
람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지훈이 가만히 얼어붙은 채 그 장면을 멍하니 본다. 밑에 깔린 사람의 몸속으
로 칼이 수십 번씩 들어갔다 나오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지훈이 안절부절못하며 바지 앞주머니를 뒤진다. 하지만 아
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도 찾는 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지훈이 낑낑대
며 바지 앞주머니와 건빵 주머니를 쑤시다가 아차 하며 뒷주머니를 더듬는다.
지훈은 뒷주머니에서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순간 그 사람이 난도질하는 걸 멈추고 뒤돌아 지훈을 쳐다본다. 느닷없는 행
동에 깜짝 놀란 지훈이 움찔하며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지훈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를
보는 것처럼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훈은 휴대전화를 주워들 생각도 못한 채 어찌할 줄 몰라 그 사람을 바라보
았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다. 귀티가 흐르는 하얀 얼굴에 수염이 흔적이
전혀 없는 말끔한 얼굴이 지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몸집은 뚱뚱하지도
또 마르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이었고, 새하얀 반소매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
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시원 해보였다.
지훈은 겁을 집어먹은 채 그 사람을 살피다가 문득, 몸이 너무 깨끗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몸은 물론, 주변 어디에서도 붉은 피는 보이
지 않았다.
지훈은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그 사람이 쥔 칼을 살핀다. 그
칼은 아주 날카롭고 예리했지만 역시 피가 튄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지훈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다가 밑에 깔린 사람을 살
핀다. 자세히 보니 밑에 깔린 사람은 성인 남자와 외모와 크기가 비슷한 한낱
인형에 불과했을 뿐이다.
지훈은 허탈함에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와중에도 울컥 화가 치솟는다. 저 나
동그라져 있는 사람이 인형이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놀란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지훈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옆집 남자에게 큰소리로 따져 묻는다.
"왜 사람 놀라게 그따위 짓을 하는 겁니까? 왜 그러는 건데요?"
하지만 옆집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지훈을 빤히 쳐다본다. 지훈은 몇 마디
더 내뱉으려고 숨을 들이켜다가 그 남자의 눈을 보고는 슬며시 입을 다물
었다.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눈빛이다. 물기를 머금어 번뜩이는 눈빛이 텅 비
어 있었다.
옆집 남자는 지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조용히 밑에 깔린 커다란 남자 인
형에게 눈길을 돌린다. 칼을 거꾸로 쥔 그 남자가 뾰족한 칼끝으로 남자 인형
의 가슴팍을 거침없이 찍어댔다.
옆집 남자의 그런 행동에 지훈은 소름이 쫙 끼친다.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정상이 아니다.
지훈은 떨어져 있는 휴대전화를 낚아채듯 집어 들고 황급히 옆집을 빠져나온다.
  

다음날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럽다. 그럼에도, 지훈은
잠이 깨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졸린 얼굴을 한 채 가방을 메고 집에서 나온다.
지훈은 하품을 요란하게 해대며 아무 생각 없이 큰길로 나갔다. 텁텁한 입 안
때문에 입맛을 다시던 지훈은 새들이 왜 이리 시끄럽나 살피다 무심코 옆집을
본다. 마당에서 옆집 남자가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떨
결에 그 장면을 본 지훈이 멈칫 한다.
지훈은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옆집 남자의 행동을 바라본다.
옆집 남자 바로 앞에 소년과 똑 닮았을 뿐 아니라, 155cm 정도로 실물과 크기
도 비슷한 인형이 누워 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년 인형의 뱃속을 칼로
후벼 파고 있었다.
그 광경에 불안함을 느낀 지훈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재수 없게 왜 저래?'
지훈은 옆집 남자를 벌레 씹은 얼굴로 계속 지켜본다. 옆집 남자는 멈출 기미
도 없이 소년 인형의 뱃속을 칼로 잔인하게 헤집고 있다.
지훈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잠시 망설이던
지훈이 112 버튼과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댄다.
통화 연결 음이 울리고 이어서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
가 들렸다.
"예. 감사합니다. 112 경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뜸을 들이던 지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에 위험한 사람이 있거든요? 칼을 가지고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요. 이러다 무슨 일 나겠어요. 완전 싸이코라니까요!"
경찰도 뭔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감지했는지 목소리가 빨라진다.
"바로 그곳으로 출동하겠습니다. 계신 곳이 어디죠?"
지훈은 한결 마음을 놓고 숨을 몰아쉰다.
"조산동 1495번지 12호에요. 12통 4반이구요. 빨리 좀 와주세요. 당장에라도 무
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지훈은 전화를 끊고 잽싸게 옆집 남자를 살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소년 인형
의 뱃속을 칼로 헤집고 있었다.
그때 경찰차가 사이렌을 번쩍이며 큰길가에 멈춰 선다. 곧이어 양쪽 문이 벌
컥 열리면서 두 명의 경찰관이 내리더니 지훈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한
명은 30대 초반의 젊은 경찰로 앞서 뛰어오고, 나머지 한 명은 40대 후반의
노련해 보이는 경찰로 조금 뒤처진 채 뒤뚱거리며 뛰어온다.
지훈은 경찰관이 빠르게 나타나자 의아한 얼굴로 경찰관들을 바라본다. 앞서
뛰어오던 젊은 경찰관이 지훈의 앞까지 도달하자 다짜고짜 물었다.
"다친 사람은요?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어서 40대 후반의 경찰관이 막 도착해 헐떡이며 지훈을 주시한다.
의외의 상황인지라 지훈은 약간 당황한다.
"아.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요."
경찰관들이 차마 화는 못 내고 허탈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
훈도 할 말이 있다. 허위 신고를 한 게 아니니까, 지훈은 당당한 몸짓으로 담
너머 옆집 남자를 손으로 가리킨다. 그 남자가 마당에서 칼로 소년 인형의 뱃
속을 쑤셔대는 게 보였다.
지훈은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경찰관들에게 하소연한다.
"저기 저 사람 보이죠? 하는 짓 좀 봐요. 대체 저게 뭔 짓이냐구요. 이거 위법
아니에요? 옆집에서 저따위 짓을 하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살아요. 얼른 잡아
가세요. 네? 아니면 시정 명령이라도 내리던지."
젊은 경찰관이 옆집 사람을 보고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내젓는다.
40대 후반의 경찰관도 옆집 남자를 살피더니 곤란해 하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으음… 이것 참, 여기로 출동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요. 네 번 이였
나 다섯 번 이였나. 하여간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왔는데 뭐,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죠. 자유권이라고 아시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권리.
그건 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저
사람의 권리도 존중해 줘야 하거든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주의와 경고 뿐인
데 도통 들어 먹지를 않으니…"
어안이 벙벙해진 지훈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경찰관들에게 묻는다.
"그럼 저런 짓을 하는데 보고만 있겠다는 거예요?"
젊은 경찰관이 그런 지훈의 말에 볼멘소리로 항변한다.
"우리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연행하고 싶죠. 저건 누가 봐도 위협을 느낄 만
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나라의 법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우리는 법을 집행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 말에 지훈이 분통을 터뜨리며 젊은 경찰관에게 따진다.
"그래도 그렇지, 저 싸이코 같은 새끼가 홱 돌아서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해
요? 그게 당장 내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예요?
책임질 거냐구요!?"
40대 후반의 경찰관이 눈치 없는 젊은 경찰관을 슬쩍 노려보고는 지훈을 달
래려 애쓴다.
"자. 자. 진정하세요. 진정. 지금 경찰청에서 저 사람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까요. 아까 신고하자마자 우리가 출동한 거 보셨죠? 특별 지시가 내려와 5분
마다 이곳을 순찰하며 감시 중이거든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1분도 안돼
경찰관이 출동할 겁니다. 안심하세요."
지훈은 그 경찰관의 말을 반신반의하다가 또 다른 경찰차 한 대가 큰길가에
세워져 있는 경찰차를 지나는 걸 발견한다. 저 경찰의 말을 다 믿을 순 없어
도 어느 정도는 사실인 셈이다.
지훈은 상황이 그쯤 되자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하지만, 불안함은 사그라지
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활활 타오른다. 경찰마저 그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훈은 옆집 남자를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지켜본다. 그 싸이코 자식은 아직
도 소년 인형의 뱃속을 칼로 휘젓고 있다.

  
다음날 낮. 하늘이 짙은 회색빛으로 잔뜩 찌푸려 있다. 지훈도 어딘가 불편한
듯 언짢은 얼굴을 한 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지훈은 큰길로 걸어가다 옆집을 보고는 꺼림칙해져 가방을 거칠게 고쳐 멘다.
한시도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은 지훈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쾌한 기분에
몸서리를 치며 지훈은 빠른 속도로 옆집을 지나친다.
하지만 지훈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갈 곳을 찾지 못하더니, 슬며시 뒤
를 향한다. 지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옆집을 돌아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불안해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뭘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될 것 같다.
지훈은 긴장된 몸짓으로 옆집 가까이 접근한다. 벽에 붙어 잠시 숨을 고른 지
훈이 슬그머니 옆집 안을 들여다본다.
"허…"
지훈이 탄식을 내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늘도 역시 싸이코 같은 옆
집 남자는 인형을 칼로 난자하고 있었다. 청순한 성인 여성의 외모를 가진
160cm 정도의 커다란 인형이다.
'왜 저따위 짓을 하는 거지?'
지훈은 심각한 얼굴로 옆집 싸이코의 행동을 지켜본다. 결코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여성 인형을 난자하던 싸이코가 갑자기 칼로 인형의 왼쪽 팔꿈치를 자
른다. 싸이코의 느닷없는 돌발 행동에 지훈은 눈을 크게 뜨고 싸이코의 행동을
주시한다.
싸이코는 왼쪽 팔을 다 잘라내자 이번에는 오른쪽 어깻죽지 부분에 칼을 갖다
댄다. 금세 오른팔도 여성 인형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지훈은 아무리 인형이지만 두 팔이 잘려나가는 걸 보자 기분이 더러워진다. 하
지만 싸이코는 거침없이 여성 인형의 오른쪽 허벅지로 칼을 가져가 오른쪽 다
리를 쓱싹쓱싹 잘라낸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남은 왼쪽 다리마저 정강이
부분을 잘라 분리시켰다.
지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두 다리를 어루만진다. 싸이코
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여유롭게 여성 인형의 머리를 잘라냈다. 마당에 여성 인
형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싸이코는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금세 무언가를 한아름 들고 나왔다. 그의 손에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 흙 묻은 삽, 등에 메는 검은색 가방이 들려 있다.
'저걸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지훈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싸이코를 가만히 지켜본다. 싸이코는 든 것들을
마당 한쪽에 내팽개치더니 여성 인형의 몸통을 주워들었다. 잠시 마당을 두리
번거리던 그가 마당에 미리 파 놓은 구멍으로 향한다. 구멍 옆에는 파낸 흙이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싸이코는 그 구멍으로 여성 인형의 몸통을 던진다. 구멍이 깊지 않아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싸이코는 구멍 가까이 가 여성 인형의 몸통을 확인한다. 그는 삽을 들고 되돌아
와 쌓인 흙을 퍼 구멍을 감쪽같이 메웠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에 지훈은 왠지 오
싹해졌다.
'그럼 저것들의 용도는…'
지훈은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와 검은색 가방을 바라본다.
갑자기 메운 구멍을 삽으로 다듬던 싸이코가 고개를 돌려 지훈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지훈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재빨리 몸을 숙인다.
싸이코는 지훈을 보지 못한 듯 삽을 내려놓고 여성 인형의 잔해들이 있는 곳
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훈은 다시 고개를 들어 싸
이코의 행동을 관찰한다.
싸이코는 여성 인형의 팔다리를 긁어모았다.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에 팔다리
를 집어넣은 싸이코는 봉지 끝을 끈으로 묶어 마당 한쪽에 세워둔다. 금세라도
저 찌그러져 있는 검정 비닐봉지가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 같다.
싸이코는 그 일을 끝내자 손을 탈탈 털며 검은색 가방을 등에 멘다. 그는 여성
인형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가 머리를 가방 안에 넣고는 대문을 향해 걸어왔다.
화들짝 놀란 지훈이 잽싸게 몸을 쭈그린다. 지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담벼락
을 끼고 달려 옆집의 뒤편으로 숨었다.
싸이코는 집을 나오자마자 큰길로 성큼성큼 나간다. 그런 싸이코의 뒷모습
을 훔쳐보며 지훈은 적잖이 당황한다.
'왜 머리를 가방 안에 넣은 거지? 대체 어딜 가는 거야?'
그 사이 싸이코는 사람들 사이로 거침없이 뒤섞였다. 사람들은 싸이코에게 아
무런 관심도 없었다.
'어쩌지?'
지훈은 사라져가는 싸이코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큰길가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살핀다. 보는 눈들이 아주 많다. 게다가 한낮이지 않은가?
약간 용기를 얻은 지훈이 뒷주머니에서 다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저러
다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닌 것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하면 된다.
지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의문투성이인 얼굴로 싸이코를 따라 나섰다.
그는 지훈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인근에 있는 산
으로 향한다. 지훈은 그런 싸이코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며 계속 뒤를 밟
는다.
얼마 후, 싸이코가 인근에 있는 산에 도착했다. 그 산에는 많은 등산객이 수시
로 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잠시 등산로를 살피던 싸이코가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엉켜 있는, 길이 없는
숲 쪽으로 무작정 들어간다. 풀들과 나뭇가지가 싸이코의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는 긁히는 걸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마구 헤쳤다.
지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주저한다. 왜 저리로 가는 것일까. 하지만, 이
왕 여기까지 온 거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왜 그러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지훈이 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채 잔뜩 긴장하며 싸이코를 따른다.
얼마쯤 그렇게 가던 싸이코가 갑자기 멈추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훑는다.
지훈이 깜짝 놀라 제법 두꺼운 소나무 뒤로 얼른 숨었다.
그곳에는 바람이 휑하니 부는 소리와 새들만이 부지런히 나무 사이를 오갈
뿐,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싸이코는 다시 한 번 그 곳을 찬찬히 둘러본다. 지훈이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린다.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싸이코가 갑작스레 검은색 가방을 벗어 앞으로 내던졌다. 검은색 가방
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덤불 속으로 파묻혔다. 그는 검은색 가방을 버린 덤불
로 다가가 안이 보이나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확실히 검은 가방은 덤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휙 뒤돌아 날듯이 산을 뛰어 내
려간다.
소나무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훈은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떤다.
'이 모든 게 마치… 시체를 유기하는 것 같은 행동이잖아?'
지훈은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는 싸이코를 보며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날 밤. 지훈은 새벽이 가까워져오는 늦은 밤임에도,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불 꺼진 방에 누워 있다. 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뒤척인다. 불
안한 마음에 잠이 오질 않는 것이다.
'하는 짓을 보니, 분명 사람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거야. 틀림없어.'
지훈은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다가 똑바로 누워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사방이
고요하다.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조차 없다.
하지만 지훈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지훈은 신경질을 내며 왼쪽으로 돌아눕는다.
이때 밖에서 비닐 같은 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집 안이 아니라 집 밖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 같다. 지훈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 소리는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다. 옆집 근처쯤이다.
지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옆집에서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훈은 안절부절못하며 어두운 방안을 서성거린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금
방이라도 문이 벌컥 열리며 싸이코가 들이닥칠 것 같다.
지훈이 허겁지겁 방문 옆에 바짝 붙어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누
군가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기척은 없다.
약간 마음을 놓은 지훈이 다시 밖의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허나, 이
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자 더 불안해진 지훈이 방안을 갈팡질팡하다가 휴대전화를 챙겨 들고 최
대한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지훈은 집 대문에 몸을 살짝 숨긴 채 조심스럽게 옆집을 살폈다. 싸이코가 자
신의 집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인다. 지훈은 깜짝 놀라 대문에 몸
을 완전히 감춘다. 그리고 다시 얼굴만 살짝 내밀어 의아한 얼굴로 싸이코를
지켜본다.
싸이코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양새가 몹시 음산하다. 다음 순간, 그가
느닷없이 큰길로 뛰어갔다. 싸이코의 오른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 칼이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번쩍인다.
지훈은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저 놈이 사람을 죽이
러 가는 것이다.
지훈은 자신의 집에서 뛰쳐나와 다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112 버튼을 누른
지훈이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한다. 지훈은 큰길로 달려가는 싸이
코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좇는다.
'어쩌지? 아직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지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싸이코가 어디까지 갔나 살핀다. 그는
벌써 큰길로 사라진 후다. 지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확실한 상황을 포착해야 해!'
지훈은 휴대전화 폴더를 열어둔 채, 냅다 싸이코를 쫓아 뛴다. 다행히 싸이코
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큰길로 들어선 지훈은 저 멀리 뛰어가는 싸이코를
뒤쫓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찰 중인 경찰차를 찾는다. 쥐죽은 듯 고요한
길가에는 싸늘한 어둠뿐. 경찰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씁쓸한 얼
굴로 행여 놓칠세라 그를 더욱 바짝 뒤쫓는다.
싸이코는 집들이 얽히고설킨 골목길로 들어서자 걸음을 늦췄다. 그는 미궁같
은 골목을 걸어 다니며 집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갑자기 한 집의 담을 가볍게
넘어 안으로 침입했다. 먼발치에서 그걸 본 지훈이 깜짝 놀란다. 드디어 일이
터진 것이다.
지훈은 싸이코가 침입한 어두운 집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바짝 긴장한 지
훈이 폴짝폴짝 뛰며 안을 살핀다. 불이 꺼져 있는 집 안에는 아직 아무런 인기
척도 없었고 소란스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그 집을 바라보며 몸서리를 친다. 곧 있으면 안에서 참극이 벌어질 것
이다. 지훈은 지체 없이 112가 눌러져 있는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에 엄지 손가
락을 가져간다.
그 순간, 싸이코가 날듯이 담을 넘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지훈의 앞으로 가볍게 착지한다. 그 바람에 지훈이 소스라치게 놀라
휴대전화를 쥔 상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둠 속의 싸이코를 올려
다본다.
싸이코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쥐어져 있었고, 왼손에는 2~3세쯤 돼 보이
는 아이가 머리칼이 잡힌 채 대롱대롱 들려 있다. 그는 바로 앞에 서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지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훈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싸이코가 그런 지훈을 향해 소리 없이 접근한다. 지훈이 흠칫 놀라 몸을 들
썩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훈을 지나치더니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지훈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힘겹게 고개를 돌려 싸이코의 뒷모습을 확인했
다. 그러고는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 바들바들 떨며 얼굴에 밀착시
킨다.
지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싸이코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간절히, 아주 간절
히 지훈은 통화 연결 음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훈은 종료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싸이코의
왼손에는 아이가 아닌, 아이와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한 인형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싸이코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눈을 떼
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주택들을 환하게 비추자, 한숨도 못 잔 지훈이 푸석푸
석하고 그늘진 얼굴로 집에서 나온다.
지훈은 나오자마자 바로 옆집으로 접근했다.
'이번에도 그러고 있을까?'
지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조심스레 옆집 안을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싸이코 자식은 90cm 정도의 크기를 가진 인형을 땅바닥에 짓누른 채 두 손
목을 끈으로 묶고 있었다. 어찌나 꼼꼼히 묶었는지 손목과 끈 사이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 손목을 끈으로 다 묶자 이번에는 인형의 두 발목을 끈으로 꽁꽁 묶
었다. 그 인형은 어젯밤에 싸이코가 훔쳐낸 아이 인형이었다.
싸이코는 아이 인형의 두 손 두 발을 다 묶자 칼을 가져와 그 아이 인형의 온
몸을 칼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지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싸이코의 행동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사람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면… 왜 인형에게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지훈은 의아해하며 옆집 앞을 서성대다 용기를 내 대문 안으로 쭈뼛쭈뼛 들
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싸이코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한다.
하지만 싸이코는 누가 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이 인형을 쑤셔대고
있다.
지훈은 그런 싸이코를 보자 더욱 용기를 내 근처까지 조심조심 접근한다. 여
전히 싸이코는 아이 인형의 몸 이곳저곳을 조용히 쑤셔대고 있을 뿐이다.
근처까지 어렵게 접근한 지훈은 그런 싸이코의 행동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의
문에 휩싸인다.
'왜 그러는 거지? 도대체 왜?'
그때 싸이코를 유심히 뜯어보던 지훈이 문득 싸이코의 피부가 어딘가 부자연
스럽다는 걸 깨닫는다. 얼굴과 목, 팔 부분의 피부 전체가 다 한 치의 오차
도 없는 똑같은 색이다.
이상함을 느낀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더 가까이 접근해 싸이코의 피
부를 자세히 살핀다.
그의 모든 피부는 상처나 잡티가 전혀 없이 아주 매끈하고 깔끔했다. 또한
열심히 인형을 쑤셔대는 오른팔과 그 왼팔에는 혈관이 불거지기는커녕 혈관
자체가 전혀 비추어지지 않았다.
그걸 본 지훈은 뭔가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왜 위화감이 느껴지는지 의문
스러워 하며 싸이코의 팔 부분을 자세히 살핀다.
그의 팔에는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희미한 선 같은 게 손목에
서 팔꿈치 쪽을 지나쳐 목 부분까지 길게 그어져 있었다.
지훈은 그 희미한 선을 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함을 느낀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지훈은 그 기이함에 당황한 채 희미한 선을 살피다가 목 부분의 희미한 선 근
처에 하얀 게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게 뭐야?'
지훈은 그 하얀 걸 목을 빼고 들여다보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
으며 펄쩍 뛰듯 물러섰다.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싸이코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싸이코의 목 부분 봉제 선에 실밥이 터져 있었고, 그 틈으로 하얀 솜이 삐져나
와 있었다.
그 싸이코는 인형이었던 것이다.

댓글 1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단편 살인마1 엄길윤 2009.10.26 0
1359 단편 정의의 거짓말2 사랑 2009.10.26 0
1358 단편 상실4 9crime 2009.10.27 0
1357 단편 블록과 아들1 나길글길 2009.10.27 0
1356 단편 실종4 라티 2009.10.30 0
1355 단편 죽은 달의 여신4 안단테 2009.10.31 0
1354 단편 4번 타자 최고의 날 심동현 2009.11.03 0
1353 단편 갈증해소 夏弦 2009.11.03 0
1352 단편 숲의 꿈 먼지비 2009.11.06 0
1351 단편 일상단상 닥터회색 2009.11.09 0
1350 단편 스넌2 앤윈 2009.11.10 0
1349 단편 붉은.3 Claret 2009.11.10 0
1348 단편 신의 힘을 가졌던 인간들 먼지비 2009.11.11 0
1347 단편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지 않는다1 매구 2009.11.12 0
1346 단편 구멍 니트 2009.11.12 0
1345 단편 추락한 물고기1 리오르 2009.11.12 0
1344 단편 비사사설毘舍舍說 먼지비 2009.11.15 0
1343 단편 셀레네 여신은 보석을 원한다 Mothman 2009.11.15 0
1342 단편 파이퍼 전투 소대1 Mothman 2009.11.15 0
1341 단편 fallout SunOFHoriZon 2009.11.15 0
Prev 1 ...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