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좋은 남편

2009.07.15 23:1707.15

좋은 남편




심장이 터질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몇 층 밑에서부터 칼날 같은 발소리가 들려온다. 공기를 가르는 그 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나를 금방 따라잡을 기세다.
허리에 힘을 주고 다시 속도를 높인다. 한번에 서너 계단씩 뛰어 오르지만 뒤를 쫓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누굴까? 차오르는 숨 너머로 공포와 의문이 비릿하게 올라온다. 다리가 무겁다. 허파에서 바람이 센다. 그대로 쓰러져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계단에 발끝이 걸려 넘어진다. 쫓아오던 사내가 내 어깨를 잡는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다.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내는…….
바로 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사내, 아니 ‘내’가 중얼거린다.
돌연 환한 빛이 엄습하는가 싶더니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손에는 쪽지가 들려있다.
“여보.”
빛에 둘러싸인, 손의 주인이 나를 부른다. 나는 멍하니 쪽지를 받아든다. 어느새 ‘사내’는 사라지고 없다. 구깃구깃 접힌 쪽지를 펼친다. 한 줄의 문장이 쪽지 위에 새겨져 있다.
“그날 밤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해.”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러기를 십여 분. 몸을 옥죄던 불안과 공포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같은 꿈을 꾼 지 벌써 며칠인가. 똑같은 계단, 똑같은 결말, 그리고 똑같은 두려움. 간신히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새벽녘 어둠마저도 매번 똑같았다.
그 어둠속에 오도카니 앉은 나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한쪽에 자리 잡은 화장대와 작은 탁자. 커다란 장롱. 바닥에 널브러진 아내의 사진까지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지만 왠지 모르게 낯설다. ‘우리 집’이지만 ‘우리 집’이 아닌 느낌.
아내가 사리진 이후로 나는 매번 낯선 집에서 깨어난다. 아내가 없는 텅 비고 두려운 집에서…….
어느덧 잠은 달아나 버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박이는 그 짧은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기적이 일어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내가 돌아와 있기를, 언제나처럼 화장대 앞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기를 바라지만 불 켜진 방 안에는 쓸쓸함만 감돌뿐이다.
조용히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에는 쪽지가 붙어 있다. 꿈에서 본 그 쪽지, 아내가 사라지기 전 붙여 놓았을 거라고 짐작되는 쪽지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그 문장이 적혀 있다.
그날 밤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해.
“그날 밤,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해.”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일주일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 문장을 소리 내서 읽었다. 그렇게 하면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에게는 그저 보통의 ‘밤’이었을 그날이 아내에게는 기억해야 할 ‘밤’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기억한다. 아내가 사라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으므로.
아내를 사라지게 만든 그날 밤의 괴물 같았던 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내는 평범한 여자였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옷차림, 그리고 평범한 학벌과 경리라는 평범한 직업까지. 중매를 통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바닷가의 수많은 조약돌 중 하나를 떠올렸다. 둥글고 넓적한, 색깔마저도 어중간한 그런 조약돌. 아내는 특별한 이야기꺼리가 없었고, 나 또한 그런 아내에게 붙일 말이 없었다.
시내의 조용한 커피숍에서 토요일 오후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말 수 적고 조용한 아내에게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젖어 모처럼 휴식을 취했다.
그랬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입사 후에는 바이어들을 만나느라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매일 밤 취한 채 집에 들어왔고, 술이 덜 깬 상태로 출근해서 다시 술자리를 뛰어다니는 일이 반복됐다. 당연히 변변한 연애한 번 해 볼 기회도 없었다. 물론 한 달이 멀다하고 여자를 만나긴 했지만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럴 때 아내를 만난 것이다.
나는 커피숍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삼십 분 이상이 흘러 있었다. 아내는 당황한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용히 말했다.
“피곤해 보여서 깨우질 않았어요.”
그 순간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다른 조건들은 볼 필요도 없었다. 평범하고 조용한 여자, 게다가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여자라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예식장을 잡고, 결혼하기까지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당황해하던 아내도 곧 말없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지에서의 첫날 밤. 아내가 내 품에 안겨 조용히 울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저를 선택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들었던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국의 작열하는 태양은 밤이 되어도 식을 줄을 몰랐고, 머리 위에서는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품에 수줍게 얼굴을 파묻은 여자가 조용히 떨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단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됐다는 사실을 알까? 사랑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하자, 거짓말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심장 한 끝에 줄을 묶고 커다란 돌을 달아놓은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묵직하게 밀려왔다. 그 밤, 나는 다짐했다. 이 여자를 슬프게 하지 말자. 사랑하지는 못할지언정 슬프게 하지는 말자.
지금은 눈에 잡힐 듯 생생한 그 밤의 다짐을 왜 지난 몇 년간은 감쪽같이 잊고 살았던 걸까?
아내와 나 사이에는 결혼하고 2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2년 후 부터였으므로 그때쯤 아이가 생겼다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끝내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작은 흠집 수준이었던 최초의 균열은 점점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남들은 깨소금이 쏟아진다는 신혼이었지만 나는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심드렁해졌다. 편안하게 느껴졌던 아내의 조용한 분위기는 곧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회사일이 바빠서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술에 취해 들어온 대부분의 밤 동안 한결 같은 얼굴로 소파에 앉은 아내를 볼 때면 이유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그냥 자지 왜 안자고 청승이야?”
그때는 이미 첫날밤의 다짐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일 년, 이 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결혼 생활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내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모든 술주정과 짜증과 푸념과 억지를 아내는 묵묵히 받아냈다. 마치 처음 만났던 날, 나의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던 것처럼 그렇게.
더 큰 문제는 내가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필름이 끊기는 나를 동료들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이. 김 대리. 옛날엔 안 그러더니 요즘은 술만 들어갔다 하면 아주 정신을 못 차려. 어제도 바이어들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모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옆 사람에게 토하고, 술집 여자들을 때리고, 아무에게나 욕설을 퍼붓는 내 모습은 알콜 속에 숨어 있던 하이드, 바로 그것이었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쳤다. 수백 억대의 계약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회사에서의 입지가 급격하게 좁아졌다. 진급 심사에서도 떨어졌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을 모두 아내에게 토해냈다. 최근까지 계속 그래왔다. 그리고 문제의 한 달 전 그날 밤.

“도대체 어디서 뭘 한다고 이렇게 늦게까지 싸돌아다니는 거야?”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나는 크게 소리쳤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나는 석 달 전부터 아내를 의심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화장품 가짓수가 늘어나고, 외출하는 횟수도 잦아졌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매일 같이 술에 절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나에게는 그 모든 흔적들이 외도의 증거로만 보였다.
흥신소에다 의뢰를 해 아내를 감시했다. 그날 오후 회사로 배달돼 온 사진에는 아내가 낯선 남자와 웃고 있는 모습이 잔뜩 찍혀 있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훑어봤다면 사진 속의 남자들이 각기 다른 사람이고 낯선 여자들도 함께 찍혔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판단력이 없었다.
“말해 보라고! 어떤 놈팡이랑 뒹굴다가 온 거야?”
나는 아내의 얼굴에 사진을 집어 던졌다. 파랗게 질린 아내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여, 여보.”
“시끄러. 여보라고도 하지 마! 역겨워. 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역겹다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몇 번 술에 취한 밤에 아내를 때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만큼 분노가 치밀었고, 그만큼 아내를 때리는 손과 발에도 힘이 들어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내 발길질에 당하고만 있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그때는 아내의 그 모습마저도 왜 그렇게 미워보이던지…….
“여보. 제발 이야기를 들어……. 당신을 위해서…….”
맞는 틈틈이 아내가 단발마의 말을 뱉었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나를 멈춘 것은 바닥난 체력이었다. 발길질을 멈추고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아내가 쓰러진 주위에는 피가 흥건했다. 신음을 뱉는 아내에게 나는 차갑게 소리쳤다.
“내가 왜 너 따위와 결혼했는지 알아? 밋밋했기 때문이야. 자극적인 여자들만 만나다가 너처럼 밋밋한 여자를 보니까 또 새롭더라고. 그래서 결혼했어. 사랑? 난 너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아내는 맞고 있었을 때보다도 더 무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을 읽었어야 했다. 제발, 그런 말만은 하지 말아요. 제발. 그러나 나는 끝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더 했던가.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 둔 술을 병째 들이켠 후 무심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로 아내는 소리 없는 사람이 되었다. 봉제인형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옷가지며 짐도 그대로 둔 채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결국 화장대 앞에 앉은 채로 또 몇 시간을 보냈다. 나는 화장대 서랍을 열어 어제 배달되어 온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신문지를 찢어서 적어 놓은 편지에는 별다른 말없이 딱 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

- 아내를 살리려면 아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던 곳으로 가. 그곳 옥상에서 밤까지 기다려.

무슨 뜻일까? 그리고 누가 보냈을까?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일 수도 있다. ‘아내를 찾습니다.’라고 적힌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으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 집 주소가 적혀 있으니까.
편지 봉투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그저 하얗게 질린 공백뿐이었다. 그 공백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속 어딘가에 허연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필체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아는 사람이란 뜻일까? 아내를 살린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아내가 나를 사랑하게 됐던 곳이라니, 그리고 그곳에서 밤까지 기다리라니…….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모든 의문도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는 무의미해졌다.
아내가 사라진 후 며칠 동안, 나는 그녀가 죽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골칫덩어리, 배신자, 배은망덕한 년! 꽉 죽어버려라. 자기가 뭘 잘했다가 집을 나가? 목표를 잃은 분노가 낯 뜨거운 욕설과 저주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들어온 밤에 아내의 옷장을 뒤졌다. 다시 돌아와도 발도 못 붙이게 옷가지며 소지품을 죄다 버려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다가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파란색 표지의 맨 밑에는 또박또박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휘리릭 넘긴 몇 장마다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일기구나!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내 욕을 잔뜩 써 놓았겠지? 그 놈팡이 이름이 있을까?
하지만 일기장에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온통 내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자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고마움, 설렘, 기쁨,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또 내가 아내에게 무심코 했던 말들, 형식적으로 중얼거렸던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감사,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한 행복의 말들이 빼곡했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 쪽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 왔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함께 뼛속 깊이 사무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끝내 쓰러져 통곡을 하고 말았다.

아내의 비밀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나는 삼십 분을 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세 시간을 잤다. 하지만 아내가 내 손목시계는 물론이고 커피숍 안의 시계까지 돌려놓은 덕에 딱 삼십 분 만큼의 부끄러움만 느끼면 됐었다. 내가 술에 취해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누운 날 밤이면 아내는 손수 물을 받아와 내 얼굴이며 발을 씻겼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눈치 챌 수 있었던 것들을 나는 왜 몰랐을까?
그리고 아내는 외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생활비 걱정에 보험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생활이 엉망이 되면서 나는 몇 달째 월급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눈물이 앞을 가려 간신히 읽어 내려간 마지막 장에는 그날 밤의 날짜 아래 짧은 한 줄이 곁들어졌을 뿐이었다.

- 이젠 모든 것을 끝내고 떠나고 싶다.

나는 그 문장에서 죽음의 의지를 읽었다. 아내가 자살을 마음먹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막아야 한다. 아내를 찾아야 한다. 찾아서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한다. 내가 바보였다고, 내가 못난 놈이고 나를 때려 달라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나 또한 당신을 사랑했다고 고백해야 한다!
다음 날부터 아내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경찰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정체불명의 편지 한 통이 들려 있는 것이다.
“아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던 곳으로…….”
아내가 나를 사랑하게 됐던 곳이 어디일까?
지금은 아내를 찾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조금의 단서라도 있다면 찾아나서야 한다. 실제로 요 일주일 동안 버스 터미널과 지하철, 그리고 기차 역 등을 돌며 손수 만든 전단을 돌렸다. 아내의 사진은 얄궂게도 흥신소에서 찍어 준 것을 사용했다.
“너를 사랑하게 됐던 곳…….”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읽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아내의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또 다시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첫 만남에서부터,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을 읽어 나가다가, 결국 발견했다.

- 오늘은 언제 예약을 했는지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했다. 도심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의 식사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었던 순간! 야경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에 따뜻함이 어려 있었다.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불안하던 눈빛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여유롭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래. 사랑.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언제쯤 그 사람도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줄까?

생각났다. 그날 식사를 했던 곳!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고층 빌딩의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 빌딩으로 가야 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갈 수밖에 없다. 마음이 급하다. 옷이라도 챙겨 입을 생각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주방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와서인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싱크대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누가 사용했던 것처럼 그렇게. 집안에서 느껴지는 정체모를 인기척. 지금처럼 물이 저 혼자서 흐르거나, 방문이 스르르 닫히거나, 거실이나 방 안을 거니는 발자국 소리 같은 이상한 일들이 요즘 들어서 부쩍 잦아졌다.
내 눈을 피해서 누군가가 몰래 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밖으로 나왔다. 온몸에 힘이 없고 어지럽다.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아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날 밤의 부끄러운 내 행동에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아내를 찾아야 한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빌딩으로 향했다. 어지럼 때문에 자가용을 운전하기가 두려웠다. 지하철에서도 쉬지 않고 전단을 돌렸다. 차량과 차량 사이를 오가며 앉아서 졸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 무릎 위에 아내의 사진이 인쇄된 전단을 올려놓는다. 몇몇 사람은 걸인의 구걸이라 생각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대부분은 꽤 열심히 읽어준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금방이라도 당신의 아내를 목격했다는 전화를 받지 않을까하는 위안.
차량 몇 개를 지나며 전단을 돌리다가 무심코 지나왔던 차량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코트를 입고 빨간 목도리를 두른 누군가가 인파 속으로 재빨리 몸을 감췄다. 차량을 연결하는 문의 유리 틈으로 본 것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얼핏 여자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다시 전단을 나눠주는 척을 하다가 갑자가 몸을 틀었다. 확실하다! 손잡이에 매달려 끄덕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그 사람. 이번에도 내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미행인가?
미행이라면 누가, 도대체, 왜?
머릿속에서 실타래들이 얽혀 갔다.  
미행, 누가 보냈는지 모를 편지, 집안의 인기척, 기억도 나지 않는 상처, 그리고 매번 꾸는 똑같은 꿈까지 차곡차곡 나열해 보니 이상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아내의 실종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는 건 아닐까? 문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지나왔던 차량의 문을 열었다. 정말로 나를 미행하고 있던 것인지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빨간 목도리’는 되돌아오는 나를 봤는지 등을 돌리고 사람들 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머리카락을 확인할 순 없지만 뒤태만으로도 여자임이 분명했다. 재빨리 여자를 쫓아갔다. 그러나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선 사람들을 헤집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지하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다. 내가 아직도 사람들 속에 갇혀 있을 때 여자는 재빨리 지하철에서 내려 버렸다.
분명했다. 내리기 전 나를 힐끗 돌아보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마주친 여자의 얼굴은 커다란 마스크와 모자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지하철은 다음 역을 향해 속력을 높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혹시나 있을 또 다른 미행을 염려해서다. 한산한 역사에는 마실 나온 것으로 보이는 노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 역사 한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아내가 걱정되긴 하지만 편지에도 밤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미행의 의심이 풀릴 때까지, 그리고 혼란스러운 이 상황에 나름의 해답을 내어 놓을 수 있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면 된다.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월드컵 4강을 넘어 우승으로!> <온 국민이 하나 된 응원, 전 세계가 놀랐다!> <비자금 조성 대대적인 수사 착수>
헤드라인만 눈으로 훑을 뿐 기사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놓쳐버린 헬륨풍선처럼 시커먼 의혹들이 두둥실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재빨리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무언가 생각 날듯 말듯 머리를 맴돌았다. 앙금처럼 가라앉은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막연히 그런 느낌만 들 뿐 구체적인 방법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편지에서 지시한 곳으로 가서 아내를 구하고,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실.
그날 밤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나는, 이제 아내를 그리워하며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으므로 아내만 찾는다면, 그래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두 정거장을 달려 빌딩이 있는 역에 내렸다. 시내라 주변이 꽤 붐볐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빌딩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것이 이제 완연한 겨울이다. 시내에 있는 백화점이나 큰 빌딩 곳곳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거렸다. 덩달아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환하다. 저들 중에 아내가 있다면,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나 처음 만난 그날 그랬듯이 잔잔한 미소를 맞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층 빌딩 숲을 지나가다가 마주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미안합니다.”
사과를 한 다음 몸을 돌리려는데 낯익은 모습이 빌딩 유리창에 비쳤다.
긴 코트, 모자, 마스크, 그리고 빨간 목도리.
그 여자였다! 나를 미행하던 그 여자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놀라움보다도 두려움, 분노보다도 당혹스러움이 먼저였다. 여자는 어떻게 나를 따라잡은 것일까? 어디서부터 다시 나를 따라온 것일까?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미행을 할 일도, 미행을 당할 일도 없다. 그저 아내를 찾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마주 오는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앞으로 걸었다. 빌딩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어쨌든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찾아야한다. 거의 뛰다시피 걷다보니 이내 숨이 가빠왔다. 머리가 어지러워 몇 번이나 비틀거렸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걸었다. 걷다가 잠시 뒤를 돌아 볼 때마다 그 여자가, 빨간 목도리를 휘날리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빌딩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경비원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아,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경비원을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경비원은 들은 척도 않고 경비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따라가며 다시 이야기했다.
“좀 도와달라니까요. 저기 뒤에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 보이시죠? 저 여자가 저를 미행하고 있어요. 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빌딩에 들어가야 되는데 한 몇 분만 저 여자를 좀 막아주세요. 네?”
경비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또 당신 입니까? 정말 지긋지긋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막아드리죠.”
“네?”
경비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막아드린다는 말은 알겠지만 ‘또’라니? 경비원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경비실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저기요 아저씨. 아까 ‘또’라고 하셨죠?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휴. 이것 참. 아 제가 헛소릴 했어요. 그러니까 빨리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 보세요.”
“제가 스카이라운지 간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아차!’하는 표정이 경비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리고 ‘또’라는 말은 어떤 의미죠?”
경비원의 팔을 잡고 물고 늘어졌다. 의혹이 점점 커졌다. 바로 그 순간, 경비실 탁자에 놓인 달력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 지금이 2002년 아닌가요? 어떻게 2009년도 달력이 벌써…….”
경비원이 다 귀찮다는 듯이 손짓으로 나를 쫓아냈다.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주체할 수 없는 가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번뜩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스카이라운지. 아니, 그 위의 옥상이라고 편지에 나와 있었으니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아내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왔을 때 실수로 한 층을 더 올라가서 내리는 바람에 확실히 알고 있다. 맨 꼭대기에는 얼기설기 지어진 사무실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옥상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강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천천히 난간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높이. 떨어진다면 곧바로 즉사다.
밤바람이 휘돌아가는 옥상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넓고 황량한 옥상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내가 올라온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입구도 없었다.
내가 늦은 걸까? 아니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장난에 놀아난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며 추위에 발을 구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누굴까? 아내? 아니면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 제발, 제발 아내이길. 제발.
옥상으로 올라온 누군가는 곧바로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속에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아내였다!
평범한 얼굴, 하지만 이제는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특별한 아내의 얼굴이 어스름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내는 난간을 붙잡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난간 위로 기어올랐다.
뛰어내릴 기세다. 그런 판단이 든 순간 나는 어둠속에서 달려 나갔다.
“여보!”
내 목소리에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휘청. 불안하게 올라 선 그녀의 두 다리가 떨렸다. 몸이 기우뚱했다.
“안 돼!”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몇 미터를 단 두 걸음에 달려서 아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 반쯤 뜬 아내의 몸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내 등과 바닥이 접촉하는 큰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든 것은 이미 둔중한 고통이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머리를 부딪쳤는지 통증이 상당했다. 순간적으로 옥상 바닥에 떨어진 것인지 난간을 넘어 그대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 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상으로 떨어졌다면 아내나 나나 바로 죽음이다. 죽었다는 말은 지금처럼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
따뜻한 입김이 얼굴에 느껴졌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아내가 내 위에 엎드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보.”
이게 꿈은 아니겠지? 얼마 만에 보는 아내 얼굴인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마세요.”
아내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밑에 깔린 건 당신이잖아요.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아내가 따스한 목소리로 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삭신이 쑤셨지만 나도 밝게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은 어두웠다. 화가 풀리지 않았겠지. 그렇게 심한 꼴을 당했으니. 한편으론 이해를 하면서도 아내의 얼굴에 서린 기운이 분노가 아닌 슬픔과 애잔함인 것만 같아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살하려던 사람치고는 너무도 침착한 행동까지.
“내가 잘못했어. 그날 밤에는 미쳤었나 봐. 정말 미안해. 용서해줘.”
아내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낙엽처럼 쓸쓸하고 슬픈 미소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무릎을 꿇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쉽게 용서받지는 못하리라. 아내를 다시 찾은 이상 빌고 또 빌어서라도 아내의 마음을 돌리리라.
“여보. 그만 일어나세요. 그리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아내의 목소리가 무척 부드러웠으므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툭.
아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실 거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아니, 한때는 그랬지만 저는 이미 용서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오래…전에?”
“네. 오래 전. 7년 전에.”
7년 전이라니 무슨 말일까? 자신이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에둘러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가슴이 아파 머리가 이상해진 것일까. 6년 전이라면 1996년이다. 그때 우리는 아직 만나지도 않았다.
“아니에요.”
아내가 내 생각을 읽은 듯 곧바로 대답했다.
“7년 전이면 2002년. 그렇다는 말은, 지금은 2009년이라는 뜻이에요.”
“이, 천, 구, 년?”
2009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생소하게 들리는지 나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되뇌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경비실에 놓여 있던 달력에도 그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09년.
“네. 2009년. 당신이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그날 밤의 일은 이미 7년이 지났어요. 그리고 당신과 내가 이렇게 옥상에서 만난 최초의 일도 7년 전이에요. 물론 그 후에 우리는 수백 번도 더 이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당신, 혹시 기억나지 않죠?”
“무슨 소리야? 2009년은 무슨 소리고, 수백 번도 더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주지 않겠어?”
아내는 미친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당한 이야기를 이렇게 당연하게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의 틈바구니에서도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피어오르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 설명할게요. 제발, 제발 하나하나 새겨들어주세요.”
아내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내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내의 눈은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침만 삼켰다.
“당신은 7년 전 그날 밤 저에게 상처를 줬어요. 그리고 저는 집을 나갔죠. 정말로 자살을 결심했었어요. 며칠간은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떠돌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 이곳 옥상으로 왔어요. 결심을 굳힌 거죠. 그리고 바로 오늘처럼 난간 위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저는 자살에 실패하고 말았어요. 왜 인줄 아세요?”
아니, 모르겠어. 여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왜 이렇게 몸이 떨리고 슬픈지 모르겠어.
“당신이 나를 구해줬기 때문이에요.”
무언가 묵직한 기운이 몸 안 어딘가에서 터져버렸다.
“내, 내, 내가?”
“그래요. 당신이. 오늘처럼 멋지게 날아서 저를 구했죠. 하지만 여보. 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당신이 조금 다쳤어요. 머리를…….”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따라 아련한 아픔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난 이렇게 멀쩡해.”
바보 같은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물론이죠. 당신은 멀쩡해요. 그때도 멀쩡했죠. 다만 기억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머리를 다치고 난 이후의 일들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요. 당신의 섬세한 뇌 어딘가가 고장 났는지, 당신은 끊임없이 2002년의 그날 밤을 시작으로 당신이 옥상에서 저를 만나 다치기 전까지만 반복해서 기억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마 당신은 금세 잊을 거예요. 지금까지, 7년 동안 그래왔던 것 처럼요.”
머리가 아팠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가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내가 기억상실이라는 거야?”
“네. 무척 특이한. 저를 자살로 몰 뻔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때의 기억만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특별한 치료법도 없으니 그저 당신이 죄책감을 벗어 던지고 기억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아내가 울었다. 이번에는 내가 아내의 눈물을 닦아줬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거야? 한 집에서 같이?”
“네. 하지만 당신은 저를 보는 순간 바로 잊어버려요. 그리고 지난 며칠 간 그랬던 것처럼 나를 찾기 위해 일기를 읽고, 전단을 만들고, 매일 같이 그 전단을 뿌리죠. 당신은 누가 밥을 차려 주는지, 누가 세탁을 해 주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매일매일 되풀이해서 읽는 2002년의 신문을 쌓아놓고 7년 전의 그때를 살아갈 뿐이죠.”
집에서 느껴지던 인기척, 2009년도 달력,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밤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당신이 여기서?”
“일주일마다 한 번씩 당신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까요. 나도 당신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거죠. 이 빌딩의 경비 아저씨와 우리 동네 경찰은 벌써 수백 번도 넘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몰래 당신의 뒤를 따라오다가 이렇게 옥상으로 올라오는 거죠.”  
아내가 코트 주머니에서 빨간 목도리와 마스크, 그리고 모자를 꺼내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아내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 말 믿을 수 있겠어요?”
믿을 수 있다. 아내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지난 7년 동안의 기억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나는 믿을 수 있다. 아니, 믿고 싶다.
“그렇다는 말은,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얘기지? 건강하게 살아서 나와 살고 있다는 말이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쪽지 하나를 건넸다. 무심코 받아서 펼쳐보니 낯익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날 밤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해.”
아내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아내를 바라봤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 밤은 당신이 저를 버렸던 ‘그날 밤’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구했던 ‘그날 밤’이에요. 제발, ‘그날 밤’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하세요. 제발. 당신은 저를 구했어요. 아니, 일 년에도 수십 번, 저를 구하고 있어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가슴은 따뜻해졌다. 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존재감이 온몸 가득 느껴졌다. 그걸로 됐다. 아내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라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월드컵 소식이 가득한 2002년도 신문.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이미 너덜너덜한 신문의 한 면을 찢었다. 그리고 가방을 뒤져 찾아낸 볼펜으로 ‘아내를 살리려면 아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던 곳으로 가. 그곳 옥상에서 밤까지 기다려.’라고 적었다.
“정체모를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이제 알겠어. 바로 나였어. 이걸 가지고 있다가 나는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서 나는 신문지를 접어서 흔들어 보였다.
“그래야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지금처럼 당신을 찾으러 다니다가도 당신을 구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이렇게 살아있지만 내 기억에서 죽으면 안 되는 거니까.”
아내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해.”
“저도요. 여보. 당신이 앞으로도 수천, 수만 번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해도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언제나 저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오니까요.”
차가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침이 오면 사그라지는 저 별처럼 지금 아내에게 들은 말도 얼마 후면 잊게 되는 걸까? 또 다시 ‘그날 밤’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아내를 구해야 나는 아내를 만나게 될까?
기억이 살아있는 지금이라도 더욱, 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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