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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홉개의 방

2009.07.12 13:3707.12

<< 아홉 개의 방 >>

저녁 무렵 영태는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자리에 집은 없었다. 사라진 것은 집 건물만이 아니었다. 마당에 있던 나무 한그루와 풀 한 포기까지 깡그리 사라졌으며 집 앞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도 없어졌다. 덧붙여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부모님, 동생, 누나, 가족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영태는 20대 중반,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한지 얼마 안된 평범한 젊은이였다.
“이럴 수가……”
영태는 큰 혼란에 빠졌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 멀쩡하던 집이 이젠 폐허조차 없었다. 단지 50여 평 남짓한 편편하고 휑한 공터만이 붉은 석양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영태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집이 서 있었던 공터를 걸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짧은 시간동안 집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따지고 본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정도의 사태는 적어도 정부나 대기업 차원의 음모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가족 중에 정부나 대기업에 밉보일만한 일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설마…… 아버지가?’
아버지는 구청에 다니는 공무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혹시 아주 중요한 국가기밀과도 같은 일을 잘못 처리하신건가? 그러나 영태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인이 국가나 대기업에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굳이 그런 큰 조직들이 힘없는 개인 하나 상대하면서 이런 이상하고 번거로운 방법으로 복수를 해 올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사람 하나 매장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할테니 말이다. 괜스레 이렇게 튀는 방법을 시도했다간 오히려…… 그런데 영태의 생각이 막 여기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문득 영태의 발길에 무언가가 툭 하고 차였다. 몸을 숙여 보니 그것은 목이 부러진 호미였다.
‘이건 웬……’
영태는 호미를 집어들고 혹시 무슨 단서라도 되지 않을까싶어 잘 살펴보았다. 그러나 목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호미였다.
‘거 참……’
영태는 호미를 던져버리고 고민을 이어갔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웃집들은 모두 멀쩡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이웃집에 가면……
“그래.”
영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저 없이 성큼 성큼 걸어가서 곧바로 이웃집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 별로 친하게 지내고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거나 또는 가장 나은 해답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딩동
두 번 초인종을 눌렀으나 안에서 대꾸가 없었다. 그는 1분 정도 서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편 이웃집으로 가서 다시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이 집 역시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제길……”
영태는 나지막하게 신음하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단 신고를 해야 했다. 어디에? 경찰서에? 아니면 119에? 아니면 구청에? 좀 애매한 감이 있어 그가 잠시 갈등하는 찰나였다.
“잠깐 여기 좀 보겠니?”
문득 등뒤에서 웬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영태는 흠칫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눈앞에는 보통 키에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나이를 종잡기 힘든 모습의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의 어려 보이는 외모는 그녀의 나이를 10대 후반으로 보이게도 했지만 풍기는 기운이나 복장, 그리고 얼굴을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서는 30대 중반 이상의 미시족으로 볼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영태 자신보다는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누구세요?”
“놀랄 것 없어. 좀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주고 싶어서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셨나요?”
“보지는 못했지만 알고는 있지.”
“무슨 뜻이죠?”
그러자 그녀는 영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서는 여자 특유의 향수나 샴푸 냄새 같은 것이 전혀 나지 않았다. 단지 무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영태의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목 없는 호미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너네 집은 목조건물이었지?”
“예, 본 적이 있으신가봐요? 아버지 취향이 특이해서 목조로 지은 집이었죠. 이 동네에서는 유명했어요.”
“본 적 없어. 하지만 느낌으로 알지.”
여자는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가 왔다 간 것 같아.”
“그라니요?”
“저 산 알지?”
그녀는 문득 손을 들더니 마을의 뒷산을 손가락질했다.
“잘 알죠. 어릴 때부터 자주 다니던 산인데요.”
“반대편으로 가 본 적이 있나?”
“반대편이요? 그건 잘……”
좀 애매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마을 뒷산은 해발 500미터 정도로 제법 높기는 했지만 마을과 인접해 있어서 길이 잘 나 있고 공원도 조성되어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뒷산을 많이 올라갔었지만 정작 그 산의 뒤편까지 가 본 적은 없었다.
“넘어가 본 적은 없지만 반대편이 해화동이라는 사실은 잘 알죠.”
“산을 돌아서 가면 해화동이 나오지만 산을 가로질러 넘어가면 때에 따라서 해화동이 나오지 않을 지도 모르지.”
“예?”
조금 어이가 없는 그녀의 말에 영태는 과연 이 여자가 정상인가 하는 의구심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아, 지금은 네 집을 찾아 주어야겠지. 같이 가겠어?”
“어디로요?”
“저 마을 뒷산 뒤편으로.”
“지금 산을 넘어가자구요? 이 시간에?”
“해가 떨어져야 그곳으로 갈 수 있어. 아니,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낮에는 절대 갈 수 없다고 봐도 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일단 경찰서에 전화를 해야겠어요.”
“누구도 네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야. 신분증 가지고 있니?”
“당연히……”
영태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갑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어디서 잊어버렸지?”
“지갑 속에 말고 돈은 있나?”
“물론이에요. 지갑 안에는 돈을 잘 넣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영태는 주춤 주춤 주머니 속을 뒤졌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의 방식이야.”
“그가 누군지 아직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영태가 따지듯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버려진 사람이었어. 그가 산 속에 들어간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도 개발이 한참이던 1960년대였을 거야.”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그가 실수한 날이야. 널 빼먹었으니까, 그는 항상 한 가정을 모두 한꺼번에 데려간다. 그리고…… 증거는 절대 남기지 않아. 지금 넌 이 세상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만 말해서는 나를 믿지 않을 테니 증거를 대 볼까? 네 주민등록 번호를 외워 봐.”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주민 등록 번호는 85……”
그리고 끝이었다. 85 다음 숫자가 생각나지 않았다. 즉, 나이만 생각날 뿐 그 뒤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뭔가 애매하게 떠오르려 했다가 사라져 버렸다. 영태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녀가 계속 질문 공세를 퍼부어갔다.
“넌 어느 대학을 다니고 있지?”
“음. 그게요……”
“무슨 고등학교를 졸업했지?”
“그건……”
“중학교는 물론 떠오르지 않겠지? 그럼 부모님 이름은 생각 나?”
“으…… 이럴수가!”
순간, 영태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며 그 자리에 꿇어앉고 말았다. 바로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숱한 사실들이 물 쏟아지듯이 지워져 나가버린 것 같았다. 이게 기억상실증인가? 하지만 기억상실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억들은 모두 다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핵심적 요소들이 모두 지워져 버린 것이었다. 예컨대, 친한 친구의 얼굴과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떠오르는데 그가 사는 집과 이름을 알 수 없었고 학교 정경은 떠오르는데 어디에 있는 학교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억지로 발품을 팔아 가면서 하나 하나 찾아낸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평생 해도 힘들 것 같을 정도로 너무 많은 양의 중요 기억들이 지워져 있었다. 자칫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수용소로 들어가기 딱 좋다 생각되었다.
“가자.”
그녀는 괴로워하는 영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널 믿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를 따라 가자.”
“하지만 난 당신 이름도 모르는걸요.”
“수영이라고 불러.”
“네…… 수영씨. 어쩔 수 없네요.”
영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질문했다.
“그런데 수영씨가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요?”
그러자 수영은 영태의 손을 꽉 붙잡더니 말했다.
“그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거야. 지금은 산으로 가야해.”
그리고 그녀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기에는 도무지 부적절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영태는 잠시 그녀를 따라 걷다가 문득 그 점을 지적하려는데 순간 수영이 앞쪽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기! 저 개를 따라 가야돼! 놓치면 안돼!”
영태가 앞을 보니 불과 몇 발자국 앞, 이제 막 불이 들어온 가로등 아래에 흰색의 작은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영태는 개의 종류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개가 소위 말하는 ‘똥개’라는 사실을 금새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는 눈에서는 푸른 불빛이 일어나고 있어서 뭔가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희미하게 남아있던 석양이 완전히 꺼져버리는 순간, 개가 천천히 산 쪽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개를 놓치지 마.”
“저렇게 천천히 가는데요?”
“그렇지 않아.”
수영이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돌연 개가 뛰기 시작했다.
“빨리!”
동시에 수영도 뛰기 시작했는데 높은 하이힐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상 선수를 방불케하는 엄청난 속도가 나는 것이었다.
“어어……”
영태는 잠시 당황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달리기 시작했다. 평상시 운동을 꾸준히 해 오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게다가 군대에서 구보를 매일 험하게 해오던 터라 제대한지 얼마 안된 지금은 체력적으로 절정이나 다름없었다.
익숙하지만 뭔가가 낯설어 보이는 동네 풍경들이 귓전으로 휙 휙 지나갔다. 단순히 해가 떨어졌기 때문에 낯설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 전체에서 무엇인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어색함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오르막길만 한 10여분 달렸을까? 마침내 계속되는 콘크리트들의 행진이 끝나고 산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산길이라고 해서 산길이 아니었다. 좌우에 나무들이 늘어나긴 했으나 길은 여전히 포장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외등이 켜져 있어 오가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수영은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고 그녀와 영태와의 거리는 5미터 남짓, 그녀와 그 앞의 개와의 거리는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역시 5미터 남짓 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산에 들어온 직후부터 몸이 좀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헐떡였는데 어느 틈에 달리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산을 오르는데는 빨라 봐야 1시간 조금 못되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났다. 그런데 오늘 같은 경우는 불과 10여분(?) 만에 그는 산 정상 코밑까지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점이 발생했다. 그것은 나는 듯이 산을 정상까지 올라가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순간 부터였다.
주변이 이상스러울 만치 훤해진 것 같았다. 하늘은 오히려 평상시 하늘보다 더욱 검었다. 도시의 하늘은 밤이 되더라도 완전히 까매지기는 힘든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오랜만에 영태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땅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빛이 가로등 불빛이나 네온사인처럼 별빛을 잡아먹을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았다. 은은한 촛불과도 같은, 침실의 수면등을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온 땅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마치 야광으로 칠해진 물체를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야광보다는 확실히 밝아서 순간 ‘환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방 천지가 모두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정말로 꿈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수영은 계속해서 뛰어 가고 있었다. 영태는 발걸음이 한층 더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고 속도를 좀 더 내어서 수영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신비로운 분위기에 취하며 즐겨 보는 여유 있는 감정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잠시 후, 주변의 나무들이 키가 점 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긴 풀로 뒤덮인 널찍한 벌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멀리 암석으로 된 빛나는 누런 산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뒷산 너머에 언제부터 이런 산이 또 있었나? 굳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집이 사라진 자리에서 출발을 했을 때부터 뭔가 정상적인 상식으로 해석이 되는 부분은 이미 하나도 없었다.
계속해서 달렸다. 다시 한 10분쯤 지났을까? 누런 산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들은 그 암석으로 된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암석으로 된 산에 이르자 마치 성스러운 신전을 올라가는 것 같은 기나긴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제 영태는 더욱 힘이 샘솟아 올라 오히려 수영보다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손에 바로 잡힐 정도로 가까이에 흰 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개가 속도를 내는가 싶더니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달려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내심 큰일이다 싶었으나 그래도 이 계단이라는 것이 산 정상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중간에 샛길 같은 것이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으므로 영태는 묵묵히 뛰는 것을 계속했다.
잠시 후에는 계단이 한번 왼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였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꺾이면서 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경사가 한층 가파라지는가 싶었다. 다시 개의 모습이 사라지고 영태는 모퉁이를 돌아서 정면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웬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계단은 그 동굴 안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굴 안은 역시 불을 켜둔 것처럼 환했는데 앞서 가던 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영태는 뛰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뒤를 돌아다보았다. 수영은 여전히 몇 걸음 뒤에서 자기를 따라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계속 가.”
수영이 짧게 말했다. 이토록 오래 달렸음에도 둘의 대화는전혀 숨이 찬 기색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던 계단이 웬 커다란 바위벽으로 틀어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여기에서 영태와 수영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건가……”
영태는 바위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왼편 구석에 영태의 가슴 높이 정도 되는 위치에 가로 30cm, 세로 20cm 정도 되는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사람 몸이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것 봐요.“
영태는 수영에게 손짓한 뒤 구멍 안으로 머리를 약간 들이밀고 안쪽의 정황을 살폈다. 구멍 안에는 흙으로 된 복도가 가로방향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에서 본 고대 피라미드의 통로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죠?”
영태는 목을 뒤로 빼면서 물었다. 하지만 수영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 저을 뿐 특별한 대꾸가 없었다.
“음……”
영태는 신음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무의식적으로 오른편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 순간이었다.
끼릭 끼릭
문득 둔탁한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오른쪽 바위벽이 마치 미닫이문처럼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닌가?
영태는 주저하지 않고 앞장서서 벽안으로 들어섰다. 벽 내부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조금 전에 보았던 정면 바위벽 너머의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천천히 복도로 들어서자 일정 간격으로 복도 양편에 지펴져 있는 횃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방이 하나 있었다. 입구에 문은 없었지만 방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수영의 표정을 보니 고개짓을 슬쩍 하는 모양새가 방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것 같기에 영태는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등뒤에서 수영이 말했다.
“노래를 불러.”
“노래요?”
“노래를 불러야 해.”
“무슨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불리는 노래.”
“가요도 되나요?”
“가요 중에서 그런 노래가 있다면.”
“그럼……”
“빨리 해!”
“네, 알겠어요.”
조금 황당한 일이기는 했지만 영태는 일단 그녀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잠시 갈등하다가 문득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동요가 하나 떠올랐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더 크게!”
별안간 수영이 외쳤다.
“아니 왜요?”
“얼른 더 크게 불러!”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더 크게!”
수영이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휴……”
노래가 끝나자 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다음 방으로 가자.”
두 번째 방은 첫 방의 맞은 편 대각선 위치에 있었다. 그곳에는 녹슨 양철문이 달려 있었으나 잠겨 있지는 않았다.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뭔가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라?”
살펴보니 수십 년은 된 것 같은 녹슬고 시커먼 기계 덩어리 한 개가 방 한구석에 있는데 웬 세탁기 같았다.
“이게 뭐죠?”
“세탁기겠지.”
수영이 대꾸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지시했다.
“열어.”
“네.”
영태가 세탁기의 뚜껑을 열자 세탁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영태는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허 허헉!”
세탁기 안은 온통 끔찍한 시뻘건 피와 웬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반죽이 되어 있었는데 역겨운 냄새가 확 피어올라 영태는 순간 구역질을 하면서 뚜껑을 다시 닫았다.
“열어!”
수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 못하겠어요.”
“열어. 그것을 한움큼만 떠먹으면 다음 방으로 갈 수 있어.”
“한움큼이나?”
“먹지 않으면 네 식구들은 영영 보지 못해.”
“아아……”
영태는 갈등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용기를 내었다. 아무래도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들을 찾아야 할 것 같았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수영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시킬 것 같진 않다고 여겨졌기에, 그는 순간적으로 용기를 내어 세탁기를 다시 열었다. 이어 한 손 가득 피에 전 고깃덩어리를 떠서 어거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삼켜.”
수영이 말했다.
“우 우욱!”
영태는 순간 목구멍이 역류할 것 같았지만 코를 막고 어찌저찌해서 핏덩이들을 모두 삼키는데 성공했다.
“서둘러 가자.”
수영이 앞장서서 두 번째 방을 나섰다. 다음 방은 복도가 오른쪽으로 꺾어진 후 그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외로 이 방만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부가 어두웠다. 게다가 웬 노린내가 확 풍기는데 방구석에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시커먼 것이 들어앉아 거친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영태는 당황했다. 수영이 말했다.
“이번에는 싸워야 해.”
그녀는 벽에 걸려 있던 두 개의 작고 녹슨 단검을 들더니 영태를 향해 던져 주고는 말했다.
“싸워요? 난 싸움을 못하는 편인데요?”
“싸워야 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큰 개 만한 몸집에 머리가 둘 달렸고 표범을 닮았으나 송곳니가 각각 머리통 정 중앙에 삐져 나와 있는 모양새가 괴기하기 그지없었다.
“어…… 어떻게 싸워요?”
“놈의 머리에 단검을 하나씩 꽂아 넣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못하면 네가 죽어.”
“아……”
그가 주저하는데 표범이 별안간 몸을 날려 닥쳐왔다.
“아악!”
그는 양손에 단검을 쥔 채 눈을 감고 반사적으로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그렇게 한 수십 초 지났을까?
“됐어.”
문득 수영이 그의 등을 툭 쳤다. 영태는 그제야 스르르 눈을 떴다.
“에…… 네?”
“가자.”
“괴물은……”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눈앞에 괴물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복도로 나와 보니 어느 틈에 그녀는 제법 멀어져 있었다.
“같이 가요!”
영태는 뛰어갔다. 복도는 다시 왼쪽으로 꺾이고 있었고 바로 왼쪽에 그 다음 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잠겨 있었으며 사람 머리통만큼 작게 난 창에는 두꺼운 철창이 버티고 있었다.
“여긴 뭐죠?”
“이 안에 어떤 사람이 있을 거야.”
수영이 대꾸했다.
“어떤 사람이라면?”
“중요한 비밀을 알려 줄……”
그때였다. 문득 윙 하는 성가신 잡음 같은 것이 동굴 내부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
별안간 수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영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 나가자.”
“나가요? 왜……”
“가자니까.”
수영은 황망히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아니 왜 돌아가는거죠?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따라 오기나 해!”
잠시 후, 둘은 순식간에 동굴 내부 복도의 입구, 미닫이문 근처까지 왔다. 둘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별안간 둘의 등 뒤, 동굴의 한쪽 벽면이 열리는가 싶더니 아무렇게나 자라난 긴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웬 키 큰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공손한 자세로 인사하며 말했다.
“이제 나갈 시간입니다. 오전 여덟시 이후로는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오전 여덟시라뇨? 우리가 여기 들어온게 오후 여덟시도 되기 전이었는데……”
영태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다음 손님들을 받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영태는 수영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나갈 거였죠?”
“서둘러, 저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몇 가지만 물을게요.”
영태가 머리 긴 사내를 향해 물었다.
“이 복도에는 몇 개의 방이 있나요?”
“아홉개가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나요? 그리고 어떻게……”
“후후……”
사내는 웃음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이 호미로……”
그는 품속에서 호미를 한 개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수영이 영태의 팔목을 강하게 당긴 후 서둘러 동굴 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어 어……”
영태는 순간적으로 사내와 수영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달렸다. 그런데 그가 막 동굴을 나서는 순간, 엄청나게 눈부신 아침 햇살이 영태의 눈을 따갑게 했다.
“앗.”
그는 발걸음을 멈추며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천천히 떴다.  
앞을 보니 정말 이상하게도 그렇게 잘 놓여 있던 계단 길이 험하고 협소한 등산로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영씨.”
이어 영태가 수영을 불렀다. 하지만 동굴로 나가는 뒷모습을 사진처럼 틀림없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깥에 수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고개를 돌려 그가 걸어 나온 길을 보니 그냥 평범한 산길이 산 정상을 향해 이어져 있을 뿐이었으며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두 소나무 숲들뿐이었다.


<<끝>>


蘇昊
Giganoto Shin

2005.11.24 초고.
2009.7.12 수정.


蘇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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