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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맑은 하늘빛 눈망울

2009.07.11 20:5407.11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사회는 가부장제적이고 폭력적이며 할렘이 발달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인류학에선 우세하지만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단지 이상적 원시 사회를 그려보려 했습니다. 이문열 대작가님의 <들소>를 보고 쓴 것이므로 그 작품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권력의 집중 과정과 예술 지상론을 소재 삼은 <들소>와는 달리 헬렌 피셔의 이론을 헬렌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1998년 1월에 쓴 거니까 수준은 뻔하죠. 니그라토.***

시대적 과제


1.맑은 하늘빛 눈망울

갈대들이 사락 사각거리며 움직인다. 새들이 날개를 펄력여 갈대밭 위를 난다. 코발트 가운데서도 가장 푸른 것보다도 푸른 하늘이 어슴푸레한 하늘을 밀어내며 맑아져 온다. 목숨붙이를 아침으로 내몰 햇빛이 대평원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비춘다.
이 모든 것이 신호다.
<돌주먹>이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흔들어 깨운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눈꼽을 떼고 얼굴에 들러붙은 파리들을 쫓으며 일어난다. 히브리 신화의 아담과 하와처럼 벌것벗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남녀 한 쌍이다.
해 떴어.
<돌주먹>은 무리를 위해 불침번을 선 상태라 여간 피곤하지 않다. <돌주먹>이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깨우곤 쓰러진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나머지 무리를 깨웠다.
구름이 아름다운 실뭉치처럼 하늘을 꾸미고 있다.
무리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낳았으며, 무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자인 <자애로운 어머니>가 손벽 치며 무리에게 말한다.
먹거리가 모두 떨어졌다. 일할 시간이 돌아온 거야. 사흘만 모두 일하면 나흘동안 이야기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열심히만 일하면 아흐레라도 놀며 지낼 수 있다. 자, 모두 일하러 나가자.
무리가 네 발로 움직인다. 사람은 익숙해만 지면 네 발로 달리는 게 훨씬 빠르다. 무리가 채집 터에 들어서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각각 흩어진다. 남자들은 사냥감을 찾아 더욱 멀리 나아갈 것이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나무뿌리,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주검, 곤충의 자란벌레와 애벌레, 도마뱀 따위를 모아들인다.
꽤 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구역질을 하며 쓰러진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의 어머니이기도 한 <자애로운 어머니>가 달려와 일으켜준다. 쏟아진 먹을거리를 주워 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엔 시름이 가득하다.
임신을 했구나. 쉬고 있으렴.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앉은 채 다른 여자들이 먹을거리를 채집하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다보았다. 가끔 다른 여자들이 와서 통통한 애벌레를 입에 넣어준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불현듯 자기 삶을 이렇게 남들이 먹여주는 먹이만으로 지탱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도리질을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보는 순간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한숨을 내쉰다.
임신은 살아가는데 불리하기만 하다. 제대로 뛸 수도 없으니 맹수라도 나타나면 잡아먹히기 십상이고, 먹이를 스스로 구할 수 없으니 남들이 구해주는 먹이만 먹어야 하는데 그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좋은 먹이는 먼저 해치우는 얌체족들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스스로 구하는 먹이보단 적은 양을 섭취하기 마련이다. 물론 힘없는 약자에게 먼저 먹이를 주고 맹수라도 나타나면 보호한다는 윤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무시하려드는 족속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법.
이래저래 골치 아프게 된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자신에게 임신시킨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본다. 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숱한 남자들과 자다보니 누가 임신시켰는지 알게 뭐냐. 알 필요도 별로 없어서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그만 드러누워 버린다. 임신하면 영양분이 더 필요한데 정작 영양을 섭취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결론이다.
여자들은 먹이를 꽤 많이 모았는지 여기저기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나이는 열다섯 살로, 남자라면 보통 그 정도는 살지만 여자치고는 대단히 오래 산 것이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말한다.
<잽싼 손>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얼마나 작고 귀여웠는지 몰라.
지금은 참말 늠름하잖아.
그러게 말야.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그녀들의 행복을 바라본다. 옛날, 불과 몇 시간 전만 하여도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그곳에 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었다. 지금은 소외감만 밀려들 뿐이다.
쟤, 왜 저런데?
임신하면 가끔 우울해지잖니.

<잽싼 손>은 그 무리에서 가장 날래고 뛰어난 사냥꾼이다. <잽싼 손>은 손만 날랜 것이 아니라 눈도 빨라서 사냥감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지를 무리에서 가장 나이 많고 노련한 사냥꾼보다도 더욱 잘 가늠했다.
<잽싼 손>은 모두 가족인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다른 피였다. 남자들 가운데엔 코끼리의 수컷처럼 홀로 떠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홀아비 아버지를 따라 떠돌던 <잽싼 손>은 아버지가 죽자 언제 맹수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홀로 소리죽여 울고 있는 <잽싼 손>을 구해 무리로 데려온 사람은 당시 다섯 살이던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잽싼 손>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들은 영양 떼를 사냥감으로 정했다. 남자들이 영양 떼를 몰아오면 뛰어난 사냥술을 지닌 남자들 몇몇이 숨어 있다가 영양을 잡을 예정이었다. 갑자기 <잽싼 손>이 외친다.
이곳으로 표범 한 마리가 오고 있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건방진 놈!
<돌주먹>은 침을 뱉으며 표범의 진로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나중에 그들은 사자니 표범이니 따위를 신으로 숭배하게 되지만, 종교적 감정이 움트기엔 그들이 어릴 적에 경험하는 성적 유희가 너무나 풍부하다. <잽싼 손>이 <돌주먹>에게 말한다.
넌 애송이 사냥꾼처럼 굴고 있어. 옆에서 돌을 던져야 잘 맞지 앞에서 던지면 쉽게 맞출 수가 없어.
알아.
표범이 달려왔다. 표범은 자신을 가로막는 건방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컷을 대뜸 사냥감으로 정하고 발톱을 내밀며 뛰어오른다. <돌주먹>은 윗몸을 젖혔다가 몸을 날려 온몸의 무게를 실은 주먹으로 표범의 따귀를 후려갈긴다. 120kg이 넘는 표범이 그대로 땅바닥에 내려앉는다. <돌주먹>은 어깨를 표범의 앞발에 얻어맞아 발톱 자국이 깊이 났지만 대뜸 툭툭 털고 일어난다.
<잽싼 손>이 달려와 묻는다.
대단하다. 어떻게 했냐?
<돌주먹>은 주먹을 펼친다. 손가락 마디마다 살갗이 까져 피가 흐르고 있다. 손바닥에 쥔 둥굴둥굴한 돌맹이 탓이다. <돌주먹>은 돌맹이을 쥔 채 표범의 따귀를 친 것이다. 돌맹이를 쥐고 상대를 치는 것은 신기술이다.
이러면 뼈가 부러져.
난 단련이 되어서 괜찮아.
<돌주먹>의 손은 억세기 짝이 없었다.

일과가 끝나자 무리는 다시 모였다. 저녘이다. 불 피울 줄 모르기에 화톳불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맛을 즐길 수 없는 그들이지만 별바다 아래서 입을 여는 솔솔한 재미는 느낄 수 있다.
<돌주먹>, 너 표범을 한 방에 날렸다며.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묻는다. <돌주먹>이 답한다.
응. 덕분에 어깨가 욱신거리고 손이 망가져서 한동안 사냥을 제대로 못할테지만 말야.
안 됐다.
지금 <돌주먹>은 평소엔 가장 인기 있을 <맑은 하늘빛 눈망울>에게 데면데면한 반응 밖에 보이지 않고 있다. 정상적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무리는 밤이 깊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높은 바위에 있는 잠자리로 오손도손 올라가 잠든다. 몇몇 쌍들은 몸을 섞기 위해 손을 잡고 풀밭에 눕는다. 그들은 그날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과 <돌주먹>이 몸을 섞고 있었던 것이다. 어버이와 자식 끼리, 남자와 남자끼리, 여자와 여자 끼리, 아이와 아이 끼리, 사람과 짐승끼리도 너그러이 허용하며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다지 꺼리지 않는 그들이 어째서 그 행위를 이상하게 보았는가.
임신한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돌주먹>에게 몸을 제공했기 때문이며 임신했기에 발정기가 결코 아닐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고 곧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자연히 그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고 용납될 수 있는 일이 되어갔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임신 기간동안 숱한 남자들과 몸을 섞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잽싼 손>과 짝 짓기한 그녀였다.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몸을 섞는 친한 남자들이 정해져 있었지만 몸 섞는 횟수가 훨씬 잦았고 다른 자매와는 달리 때에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간파해낸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몸을 손과 약초와 꽃향기로 낫게 하는 솜씨를 지닌 <영원한 눈>은 신과도 통한다는 위대한 통찰력으로 <맑은 하늘빛 눈망울>의 행위가 몰고 올 사태를 꿰뚫어보았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더불어 약초를 따서 받침돌에 놓고 차돌로 으깨던 <영원한 눈>은 자기 일을 도와달라며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불렀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엉금엉금 기며 꺄르륵 재롱떠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것을 재치고 <영원한 눈>에게로 갔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대신 놀아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둘이서 한참 열심히 약초를 으깨고 있는 판인데 <영원한 눈>이 <맑은 하늘빛 눈망울>의 어깨를 탁 친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이름처럼 맑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로 <영원한 눈>을 말똥말똥 본다. 얼마나 깨끗한 눈망울이냐.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다른 여자들보다 코가 좀더 높았고 눈도 좀더 컸다. 그래봐야 들창코에 작은 눈이긴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였지만 좀더 귀엽긴 하였다. 가슴은 절정을 맞이하여 소담스럽게 봉오리져 있다. 같은 여자인 <영원한 눈>의 눈매에도 그랬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계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미녀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135cm에 21kg으로 여자치곤 키가 크고 몸무게는 적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살갗이 햇살 때문에 늙는 것을 빼면 늙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 <영원한 눈>이 고운 입술을 연다.
넌 지금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 왜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섞는 거니?
그게 뭐가 잘못됐니? 너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언제나 다리를 열 수 있지만 넌 그렇지 않다는 점 뿐이잖아. 처음엔 발정기 아닌 때에 몸 섞는 것이 고통이었어. 그러나 지금은 익숙해.
덕분에 나를 사랑하게 된 남자들은 자기 몫을 떼어서 나에게 주지. 그 남자들은 자신들 몫 자체를 축내어 나에게 주기 때문에 무리의 공동 먹이가 줄어들지는 않아. 그들은 분배 뒤에야 나를 챙겨주지. 덕택에 난 임신 기간 중에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 무리에 해될 것은 없잖아.
네 말은 모두 맞아. 하지만 넌 앞날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해. 넌 인류를 진화시키고 있어.
더욱 잘 됐네. 내가 우리를 진화시키고 있다니 참말 좋은걸. 내 아기를 뱃속에서 우량아로 키우고 싶어서 벌인 일인데.
<영원한 눈>이 남자 못지않는 힘과 빠르기로 옆에 있는 돌을 세차게 던져 새 한 마리를 떨어뜨린다.
여자는 본디 몸의 힘이 남자에게 썩 떨어지는 건 아니야. 우리같이 남자가 여자의 두 배나 되는 몸집을 지닌 종족이라도 비슷한 정도로까지 힘을 키울 수 있지. 민첩성과 유연함으로 벌충하면 되거든.
남자가 여자를 압도하는 힘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임신한 여자를 휘어잡는 거야. 지금은 무리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얻고 있기 때문에 임신을 해도 큰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어. 하지만 넌!
<영원한 눈>은 분노를 일으키며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쏘아본다. <영원한 눈>이 말을 이어나간다.
넌 단지 좀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임신 기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발정기의 질서를 깨뜨렸어. 너는 결국 한 사람이 단지 한 사람만을 책임지는 세계를 만들고 말 꺼야. 지배욕은 팽창하고 결과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겠지. 우리의 어린이들은 끊임없이 말썽을 피우지만 나이가 들면 단지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법을 배우지. 싸움을 싫어하는 법도 배우고. 어릴 때부터 성적 유희를 즐기며 자라온 덕이야.
남자가 월등히 강한데도 우리 무리가 평화로운 것은 그 때문이지. 구성원들 사이의 폭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네가 만들고야 말 세계는 정반대야. 한 사람을 향한 집착은 성적 유희를 한참 나이 들어서야 허용하도록 만들 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고 살인하는 법을 가르칠 거야.
패배한 남자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단지 먹기 위해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벌리는 자매들도 나올 거야. 제발 그만두어 줘.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슬픈 눈으로 말한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그만두기란 힘들어. 나를 우리 무리의 몇몇 여자들이 벌서 따르고 있어. 더구나 우리 아닌 다른 무리에서도 시작된 일일지 몰라. 옛날에 끝났을지도 모르지. 우리 무리의 일은 네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모든 무리에서 일어날 일을 다 막을 수는 없어.
그리고 이것이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난 일인 이상 지금 막더라도 네가 죽은 뒤에 다시 일어날 거야. 굳이 막으려고 들지 마. 어쩔 수 없어.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남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전성기를 누릴 때에는 무리의 가장 별 볼 일 없는 남자들도 손쉽게 몸을 섞을 수 있었다. 뇌성마비아, 소아마비아, 지체 부자유자, 정신 박약아등으로 태어난 남자들이나 사냥 솜씨가 없어 여자처럼 채집하고 돌아다니는 남자들조차 <맑은 하늘빛 눈망울>의 탄력 있는 몸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맑은 하늘빛 눈망울>이 열 해를 살게 되자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윤곽이 잡혔다. 그 가운데서도 <맑은 하늘빛 눈망울>은 <돌주먹>이나 <잽싼 손>과 가장 친한 관계를 지켰다. 그렇게 되자 그때까지 붙어있던 다른 남자들은 슬그머니 딴 여자들을 찾아갔다. 보통 한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죽음이 그들을 가를 때까지 맺는 남자들은 여럿 되었다. 따라서 단 둘만을 사랑하는 건 특별한 경우였다. 난혼제가 이들에게서 깨진 것이다.
그날은 딴 날보다도 풍성한 날이었다. <잽싼 손>이 끝을 깎아 뽀족해진 막대기를 던져 짐승의 눈에 꽃아 넣는 새로운 사냥 법을 개발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를 축하해주었다. 가장 기뻐해 준 것은 <남보다 3배나 더 산 사람>이라는 최고령자였다. 그는 나이가 마흔이나 되어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선천적으로 여러 질병에 면역이 있는 몸을 타고난 행운으로 긴 수명을 유지하는 남자였다. 사냥도 곧잘 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렸다. 그들은 평소보다 풍성한 먹이를 동굴에서 꺼내 먹었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춤과 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그날 저녘이 깊어 사람들이 곤히 잠들자 <돌주먹>은 <잽싼 손>을 깨웠다.
내가 불침번 설 차례니?
아니. 내가 빛나는 돌을 찾아냈거든. 딴 사람이 불침번을 보고 있으니까 안심해.
<돌주먹>은 부싯돌을 <잽싼 손> 앞에서 두들겨 불똥을 튀게 했다.
대단하다.
이게 많이 있는 곳을 내가 알아. 미리 모아오자.
평소 몹시 부지런하고 호기심 많던 둘은 잠자리를 빠져나가 풀숲을 가로질렀다. <잽싼 손>이 말한다.
여기니? 위험하다. 하이에나들 구역이잖아.
물론 <잽싼 손>은 하이에나를 밤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게 파란 빛이 나며, <잽싼 손>은 183cm에 85kg으로 평균보다 약간 더 큰 몸집을 지닌 솜씨 좋은 사내가 아닌가. <돌주먹>도 물론 그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너를 데리고 나온 거야.
그랬구나. 너 혼자선 위험하지.
<잽싼 손>이 몸을 일으킨다. 다음 순간 <돌주먹>의 주먹이 뺨에 날아들었고 <잽싼 손>은 목뼈가 부러지면서 날아가 버린다. <돌주먹>은 <잽싼 손>을 암매장했다.
<돌주먹>에겐 <맑은 하늘빛 눈망울>을 홀로 소유하겠다는 비정상적 욕망을 떨쳐낼 길이 없었다. <잽싼 손>은 무리에 본디 속한 이가 아니었기에, 무리 사람들도 가끔 그가 벌이는 이상한 행동들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용인하고 있다. <돌주먹>은 실제로 그렇게 둘러대었다. <잽싼 손>은 스스로의 뿌리를 찾아간 것이다라고. <돌주먹>은 진실을 숨기기 위해 권력을 일으키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여 이를 써먹어 그 무리의 족장으로 군림하고 다른 무리를 공격하도록 선동하기도 했다.
그날부터 인류는 변질되었다. 돌이킬 길은 영원히 없어졌다.
댓글 3
  • No Profile
    Phantahunter 09.07.11 21:33 댓글 수정 삭제
    돌이킬 길은 영원히 없어졌다. 돌주먹으로 인한 원죄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까지도 그 죄가 전해지다니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요? 구원자의 모습도 이제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니그라토 님의 글은 늘 "이게 전부야 게임 끝!"이라는 식의 성향이 강하거든요.
  • No Profile
    니그라토 09.07.12 09:49 댓글 수정 삭제
    태무진님,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는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태어났다는 게 정설입니다. 모든 유인원들은 그들 이전의 사회로부터 살다가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쎅쓰가 가능한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이 과연 타락일까요?
  • No Profile
    니그라토 09.08.11 17:25 댓글 수정 삭제
    문장 주간상 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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