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이벤트]Five of Swords

2004.02.10 00:2702.10

by moodern
2004. 2/10




  
   나는 검을 빼들어 마법사를 내리쳤다.
  그것은 몰락한 왕국의 왕인 내가 가진 권능의 마지막 표현이었다.
  나를 제지하던 마법사, 여전히 나를 막으려는 듯 쓰러진 그의 주변에
  번져가던 피가 순식간에 웅덩이를 이루었지만  나는 개의치않고 그것
  을 밟고 들어갔다. 복수의 신전, 나의 적수, 내 왕국을 빼앗은 그가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우리의 걸음마다  핏자국이 남았다.
  좋아, 너는 승자다. 하지만 이 '다섯개의 검' 안에서는
  오로지 평등한 살의만 존재할 뿐이다.

  
   신전의 천장은 그 입을 벌려 하늘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거대한 이빨들 사이로 달이 떠있다. 환하고 창백한 달이었다.
  신전안에 드리워진 다섯 개의 그림자, 그 끝에 서 있는
  다섯 개의 동상들, 내 조상 혹은 그의 적수들...혹은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신들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것들의 손에
  쥐어진 다섯 개의 검. 내가 먼저 그 중 하나를 골라들었다.
  그것은 이곳의 마지막 주인으로서의 권리였다.
 
  그가 내가 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좋아,
  우리는 품위있게 증오의 날을 세웠다.
  

   오랜 전쟁, 암투, 우리가 서로에게 건넸던 그 모든
  비열한 말들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 모든 증오와 탐욕은 의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최후의 승리가 내 아내의 힘을 빌지만 않았더라도
  이 모든 굴욕은 그저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것이었겠지.
  어떻게 그녀를 유혹한거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욕받은 한 개인으로서 나는 이 신전으로
 그를 초대했다. 흙묻은 발로 내 침실에 들어온 것에 대한 사죄.
  그것이 결투의 이유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로가 신중하게 살기를 가다듬고 있는 사이 나의 왕국의 왕비였고,
  나의 아내였으며 여전히 나의 모든 것인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곧 나머지 남은 3개의 검을 뽑아든다.
  여전히 아름답고 현명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를 보고 있는 걸까? 저기에 담긴 감정은 무엇인가?


   나의 적수답게, 그는 침착하게 기다려줬다. 좋아,
  너의 그 더러운 발을 잘라내고, 혀를 뽑고 눈을 지지리라.
  내 검이 그를 향해 뻗었다. 그때 옆에서 고풍스럽지만
  잔인한 또 하나의 검이 나의 검을 막았다...
  나는 경악해서..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나의 영혼은..
  그녀안으로 들어와버린 것이다. 내 앞에 선 나의 얼굴이
  침착해졌다. 당혹감으로 기울어져 있던 나의 손에 들린
  검이 서서히 제자리로 들어온다. 공격의 태세.
  그러나 나는 이미 그녀의 기억들을 헤집고 있었다.
  기억들에 달라붙어 있는 감정들을 훑고 있었다.
  우리의 정략결혼 전 그녀와 그의 만남들..거기에 채색된
  애련한 느낌들..나에 대한 증오, 혐오감 ..나에 대한 배신의
  계략도 그녀의 입에서 먼저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난잡한 만남들, 나의 침대에 그를 끌어들이고
  나의 왕국을 그에게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는 그녀보다
  더 나를 분노하게 한 것은 나를 불능으로 매도하는
  그녀의 기억이었다. '그는 수컷으로도 당신에게 상대가
   안되지요'
   나의 검에 맞서 그녀의 검을 휘둘렀다. 검이 그녀를(그 안에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관통하기 직전, 그의 검이 그것을 막았다.
   세 개의 검이 교차했다.

   그녀의 동생과 나의 아들이 숨을 몰아쉬며 신전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한차례 공수를 교환하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도 무척 당황하고
  있겠지. 나는 그의 머리속에서 나직히 웃었다. 그리고
  곧 나를 압도하는 그의 기억속에서 무시무시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그런 거였군. 나는 이 복수의 신전에 감사했다.
  천박한 년. 너도 나와같은 고통을 겪어야 해.
  그의 검이 그녀를 찔렀다.


   다시 나는 나로 돌아왔다. 자, 그녀는 어디있을까?

  그가 그녀를 찌르는 순간 내가 그것을 막은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의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 안에서 깨닫게 되겠지. 그걸 생각하면서 나는 웃었다.
  내 얼굴은 찡그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동생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그렇군, 결국 그녀도 알게 되었군.
  그가 그녀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의 아들은 처음에는 망설였을 것이다. 아비의 권능을
  짓밟은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를지. 아니면 부도덕한 자신의
  어미를 단죄해야할지.  혈육의 정은 그의 판단을
  흐리게 했겠지...혈육의 정..그래..이젠 더 괴로워졌겠군.
  아마 처음의 검은 분명 그를 향한 것이었으리라.
  난전에 휘말린 4명을 바라보고 주저하다 그의 등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때. 그의 검에 나의 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며 참을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도 이젠 이 사악한
  영혼의 윤회를 몇번이나 거쳤으니, 누구를 찔러야 할지
  더더욱 모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아들의 머리속에 남겨져있는 절규를 읽을 수
  있었다. '뭐라고, 저자가, 저 왕국의 원수가 정말은
  나의 아버지라고!!'
  

   이 부도덕한 년같으니. 그래도 일국의 왕비가 품위마저
  잃다니. <닥쳐,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나의 동생을
  건드린거지> <그래서 넌 지금 너의 그 소중한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건가?> 내 머릿속에 남겨진 그녀의 말에
  나는 응대했다. 그가 남겨 놓은 것도 있군.
  <이제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고 몇십년간
   사랑해온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나?>
  맨처음 내 아들의 심장을 꿰뚫은 것은 내가 아니었어!!


   그렇다. 그녀를 맞아들이기 전에, 그녀의 동생이 먼저
  왕국으로 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볼모였다. 나는 정복자의
  아들이었으니까. 정복된 소왕국의 차녀에게서 향락을 얻어내는 것은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해도, 유흥을 그만둘 것 까지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왕비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설마 그 사실이, 나에 대한 원한을 키우고, 옛 정인에 대한 충성을
  날카롭게 했을줄은.
  그렇지만 그녀의 동생이, 그 장난감이, 자신을 유린한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요, 당신은 항상 언니만을 바라보았죠>
   왜, 나는 당신에게 잔인했는데
  <그래, 이런 쓰레기를>
   왕비가 남긴 외침.
  <그래, 정말 널 사랑한 것은 나였는데>
   그의 목소리.

  
    왜인지 모른다. 그녀의 동생이 남매간의 질투에서 시작하여
   원한을 되씹다가 어째서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가 애초에는 그녀의 동생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던 과거가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승리자가 되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를 취했던 나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아직도
   나에게 이어지는지. 그가 사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나, 자신의 동생에게
   이 모든 복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달. 몇 천번이나 더 저 달이 변했는지 이젠 세지도 못한다.
   나를 막아세웠던 마법사의 시신은 이미 부패한지 오래고
   뼈조차 먼지가 되어버렸다. 창백한 돌바닥위에
   서늘한 그림자가 뒤엉킨다. 다섯 개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이젠 서글프다.  그 소리를 따라 우리의 영혼도
   흐른다. 처음에 진실은 우리가 서로를 더욱 미워하게
   했었지. 그래도 결국 검은 무뎌지고, 그것을 쥔 손아귀의 힘은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 어느 순간은 그녀를, 그를,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거품과 같은
   것이었다. 대개 무의미함이 먼저 찾아오고, 뒤이어
   간헐적인 화해가  서로의 검을 타고 번져간다.
   아직까지도 이 신전의 신들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육체는 예전의 그 형상을 잃어버렸는데.
   이미 서로가 남긴 기억과 감정속에서 내가 정말
   누군지도 의심스럽게 되었는데.
   여전히 검은 날아온다. 내 검도 멈추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우리의 검무 사이사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항상 달은 처음 그대로다. 이젠 알 것도 같다.  
   어떻게 하면 이 윤회를 멈추게 할지. 그것은 양적인 문제다.
   조금 더 증오하거나 조금 덜 증오한다면, 반드시 이
   균형은 깨어지겠지. 사랑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래,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 춤이 끝나는 날에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사랑 혹은 증오.  
    
  


  
    
  
   마침.  


  
    
  

  
moodern
댓글 3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40 단편 신인류 cancoffee1 2003.12.17 0
2139 단편 [크리스마스 단편] My Only Wish ~ This year unica 2003.12.24 0
2138 단편 타로 카드 이벤트를 엽니다.21 mirror 2003.12.26 0
2137 단편 묘한 인연 제세기 2003.12.27 0
2136 단편 마리엔느 - 3 完 暮夜 2003.12.30 0
2135 단편 밤의 시간 아진 2004.01.13 0
2134 단편 [이벤트(..)단편] 국화6 unica 2004.01.16 0
2133 단편 25시 azrael 2004.01.19 0
2132 단편 이벤트용-Grow Up Story1 리디 2004.02.09 0
단편 [이벤트]Five of Swords3 moodern 2004.02.10 0
2130 단편 [이벤트] Three of swords 재언 2004.02.19 0
2129 단편 [이벤트] five of pentacles - Les yeux 서진 2004.02.20 0
2128 단편 [이벤트]Page of Pentacles - 酒2 샤나쉬 엘 2004.02.20 0
2127 단편 두 번째 이벤트 - 동화 재해석입니다.4 mirror 2004.02.21 0
2126 단편 [두 하늘을 날다] 목소리를 듣다 1 (unica) unica 2004.02.29 0
2125 단편 [두 하늘을 날다] 목소리를 듣다. 1 (요한) 요한 2004.02.29 0
2124 단편 [단편] 쌍둥이 unica 2004.03.07 0
2123 단편 [단편] 공주님 unica 2004.03.07 0
2122 단편 <하드고어 러브스토리> 1. 소포 moodern 2004.03.10 0
2121 단편 겨울, 플랫폼 명비 2004.03.14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