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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밤의 시간

2004.01.13 09:4501.13

어린 시절, 나는 늘 어둠 속에 홀로 남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둠은 내게 견디기 힘든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늘 부모님께 촛불을 켜 달라고, 날 혼자 있게 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곤 했었다. 부모님은 때론 내게 화를 내고 -어둠은 네가 두려워할 게 아니다, 제발 겁쟁이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넌 우리 집안의 수치다- 때로는 날 달래주었다. 네가 좀 더 자라면 어둠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밤의 고요함과 적막함, 완전히 혼자라는 기분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도 밤과 보름달, 어둠은 내게 늘 두려운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어둠 속에는 모든 것이 살고 있었다. 피를 노리고 소리없이 다가오는 흡혈귀, 썩어 문드러진 살더미로 걸어다니는 좀비, 하얗게 빛나는 스켈레톤, 인간의 아이를 잡아다가 불에 구워 먹어버리는 마녀, 온갖 사악한 것들이 모두 어둠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훗날 나는 그 모든 것, 그 모든 공포들이 내가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걸 알았다.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른이 되고, 변화하고, 어린 시절이 끝장나 버린다는 것이 두려웠다. 어른이 되고, 더 이상 친구를 믿지 못하고, 조심스레 탐색해서 확신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만 그것도 어딘가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이유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다음에, 난 그것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허영심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 가문은 오래된 상인 가문이었고 부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 이상을 원했다. 부모님은 귀족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난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수도 마코프의 가장 큰 대학에. 마코프 대학은 90%이상이 귀족 자녀였다. 나의 성적과 부모님의 재력, 이 둘 중 조금이라도 모자란 것이 있었으면 난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그 대학에서 괜찮은 귀족 아가씨라도 낚길 원했겠지만 난 대학 내에서 나처럼 귀족이 아니면서 머리가 좋고 집안이 부유해 이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던 자들과 어울렸다. 그 속에서도 나는 어찌할 수 없이 약간 겉돌고 있었다.

도대체 부와 재력이 내게 뭐가 그리 중요하지? 난 그런 것들이 전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데…. 귀족이 된다는 건 내게 골치 아프게만 느껴졌지만 가난했던 집안을 이 정도까지 일으킨 부모님의 바램을 거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을 마치고 하칸과 한 잔 했다. 하칸과 난 나이도 같고 집안 분위기도 비슷해서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우린 일부러 너무 고급스러운 곳은 피해서 에일을 두 잔 시켰다.

"이번에 에르힌의 결혼식, 갈 거지?"

"그게 무슨 결혼식이야? 인간과 엘프가 결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

난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너 저번에 리온과 카르만의 결혼식도 안갔잖아. 이번에도 안가면 도라스 교수가 가만 안있을 걸? 에르힌 집안에서 받는 원조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빠진 애들은 기억해 둘 거라고."

"맙소사, 리온과 카르만의 '결혼식' 이라고? 남자끼리 하는 것도 결혼이야? 그게 말이나 되냐?"

주점은 비교적 조용했다. 칸칸이 나누어져 있어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도 좋았다. 술기운도 섞여서 난 입에서 나오는데로 지껄이기로 했다.

"좌우지간 다들 제정신들이 아니야."

평소라면 이런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온 이름들은 한다하는 귀족 자제들이니 말이다. 대학생 중 귀족이 아닌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앞으로 출세가 걸려 있었다. 눈치 보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문제가 뭐야?"

"무슨 문제?"

"너란 놈은 어째 매사에 불만 투성이냐?"

"단지! 그런 걸 결혼식이라고 부르며 호들갑떠는 것이 이해가 안 갈 뿐이야."

난 손을 들어서 에일을 한 잔 더 시켰다.

"넌?"

"난 좀 있다가."

하칸의 잔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종족간의 결혼이라는 게 말이나 되? 그 쪽 엘프도 하이엘프라던가? 엘프 중에서도 귀족이라고 엘프 사이에서도 시끄러웠다더군. 그런 걸 뭐하려고…. 뭐, 인간 입장에서 보면 엘프 피가 섞이면 수명이 길어지니 나쁠 것도 없다지만…. 반쪼가리 인간을 낳아서 뭘하자는 건지."

"그러니까 종이 다른 것이 문제란 말이야?"

"그럼 그게 문제가 안된다는 거야?"

에일이 왔다. 난 소리나게 에일을 들이키곤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럼 리온과 카르만은?"

"둘 다 남자잖아!"

"성별이 달라도 종도 다르면 싫다, 같은 종이라도 성별이 같으면 그것도 싫다, 넌 도대체 뭘 기준으로 같고 다른 것을 나누는 거냐?"

말문이 막힌 건 몇 초에 불과했다.

"정상적인 애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야."

"어쨌든 무사히 졸업하고 싶으면 이번 결혼식은 나오는 게 좋아. 안그래도 너 안좋게 보는 교수들도 많다고."

"제기랄, 게다가 그 결혼식은 보름이잖아!"

"쿡- 하여간 네 녀석, 알아줘야 한다니까. 네가 애냐? 호위병 몇 명 데리고 오면 될 걸 가지고 아직도 보름밤이 무서워?"

"젠자앙~!"

"그만 가자, 더 마시다간 진짜 취하겠다."

하킨은 날 일으켜 세웠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주점 밖에 매어진 개가 줄이 끊어져라 짖어댔다.

"아악! 저 놈, 우리가 아까 들어올 때도 짖어대더니! 제기랄, 저걸 그냥 확-!"

"야야, 너 오늘 따라 왜 그래?"

하킨은 날 잡아끌었다.

"집까지 바래다줄테니 가자."

"이거 왜 이래? 나 그 정도로 안 취했어."

하킨은 내 말을 무시하고 날 따라오며 술도 깰 겸 걷자고 말했다. 막상 밖에 나오자 바람도 시원하고 기분도 좋아졌다. 그래서 나도 선선히 좋다고 말했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깜빡한 것이다.

"우어~ 워~"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는데 눅눅하고 지저분한 시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썩어문드러진 옷과 살점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초점이 없는 그 휑한 눈이었다.

"으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냅다 도망치려고 했다. 하킨이 날 단단히 붙잡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어이어이, 좀 진정해!"

하킨은 허리 춤에서 검을 뽑아 단 칼에 좀비를 베어버렸다. 좀비는 검은색 피를 쏟으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도대체, 검술도 제법 익힌 녀석이 왜 이렇게 좀비를 무서워하는 거야? 애들도 가볍게 때려잡는 놈을…."

"무서운 게 아닐 끔찍할 정도로 싫은 거야! 제기랄, 반드시 저 놈의 묘지를 없애버릴 거야! 없애고야 말 거야! 내 반드시…!"

"그러고 싶으면 이번 결혼식에 와. 에르힌양께서 고귀하신 하이 엘프 남편을 위해 저 묘지를 사서 화원을 만드신다니까 말야. 너네 집 소유잖아."

"젠장, 젠장, 젠자앙!"



하킨은 자고 가라는 걸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하킨을 위해 마차와 마부를 빌려주셨다.

그 날은 정말 그 놈들이 작정을 한 날 같았다. 뱀파이어가 내 방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뱀파이어라는 것들은 연기로 변하는 재주 때문에 조금만 틈이 있어도 기어들어 오곤 했다. 목이 간질거려 깬 나는 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시커먼 녀석을 보고 비명을 질렀고 하인들이 총출동해 그 놈을 잡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니, 그 놈이 잡힌 후에도 자지 못했다. 젠장, 젠장, 난 정말 이 세계가 싫었다. 세상 어딘가에 저런 것들이 없이 살 수 있는 곳은 없는 걸까?



부모님은 당연히 내가 에르힌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저 묘지는 부모님으로서도 그다지 애착이 없는 땅이니 이 기회에 에르힌의 가문과 친분을 쌓아놓기를 바라시는 것이었다. 물론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엘프랑 인간이 결혼을 해? 엘프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을까? 원숭이랑 자는 거랑 뭐가 다르지?

부모님의 속셈은 하나 더 있었다. 그 결혼식에서 내가 괜찮은 귀족 영양의 눈에 띄어 나도 빨리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하아, 결혼이라…. 물론, 언젠가 나도 결혼을 할 생각이긴 하지만 귀족 가문과 결혼해 평생 부인 집안의 눈치를 보며 살고 싶진 않았다. 제기랄-



제대로 못자서 벌개진 눈을 가지고 대학에 가려는데 어머니가 날 잡아서 기어이 맛사지와 찜질을 받고 가게 했다. 난 잘생긴 편이었다. 형도 대학에 가고 싶어했지만 형은 아버지의 사업을 바로 도와주면서 대학은 가지 않았다. 형의 결혼 상대는 비슷한 집안의 상인이었다. 가끔 날 필사적으로 대학에 보낸 건 내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곤 했다. 형은 몰라도 나라면 귀족 아가씨를 하나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자 더욱 우울해졌다.



갑자기 내 애마 다크 윙이 발버둥을 쳤다. 워낙 길이 잘든 녀석이라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알아서 날 학교까지 잘 태워다 주던 녀석이었는데…. 무슨 일이지?



"드래곤이다~"

청년 하나가 말을 몰아 달리며 외쳤다.

"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인들은 물건을 걷고 지붕을 쳤으며 사람들은 허둥지둥 어디든 들어가려고 날뛰었다. 나도 급히 다크 윙을 몰아 골목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런 소동 속에서 사람들을 밟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도 큰일이었다. 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 엄마가 사람들을 헤치고 아이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이미 손을 밟혔는지 벌개진 손을 감싸안고 목이 째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 엄마는  등에도 갓난애를 업고 있었다. 난 말을 몰아서 길가에 있는 어머니의 단골 보석 가게로 들어갔다.

"아이구, 도련님- 말은 밖에다가-"

보석 가게 주인은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걸어 잠그다가 날 알아봤다. 밖에 말을 매어둘 수 있는 곳이 있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난 뛰다시피 말에서 내려 다크 윙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은 바로 문을 잠궜고, 그 순간에 일이 터졌다.

쿠르르르릉- 털푸덕- 털썩-

보석 가게의 단단한 문으로도 그 소리는 들렸다.

"꺄아아아아~"

"으아악~"

하늘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배설물이 떨어졌다. 그것도 정통으로 어떤 마차 위에. 가게 안으로 들어온 후 밖을 내다보자 마자 생긴 일이었다. 그 마차는 얼핏 봤지만 화려한 귀족용 마차였다.

"이런 제길- 커텐을 쳐요!"

난 주인에게 외쳤다. 주인은 허둥지둥 커텐을 쳤다. 저런 건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저런 꼴을 봤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잘난 자존심에 멍이 들면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의 마차일까?

난 커텐을 약간만 들어올려 밖을 살폈다.

"아이구, 도련님- 그러지 마십쇼- 그러다 몰래 봤다는 걸 알게 되면 더 경을 칩니다요-"

말은 위에서 떨어져 내려온 배설물의 무게에 허리가 부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도대체 뭘 먹고 다니는 거냐, 드래곤은?

덩어리에는 소화가 되지 못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해골에 심지어는 조약한 창도 삐죽이 나와 있었다. 오크들이 가지고 다니는 창인 것 같았다. 뭉실뭉실한 덩어리들, 나무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마차를 하나 통째로 삼키기라도 했던 것일까?

단단한 덩어리 주위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들어온 곳이 이 근처에서도 제일 고급스러운 이 보석가게였기에 망정이지 밖은 지독한 냄새에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일 터였다. 고급가게들은 이런 때를 대비해서 단단한 차단막을 만들고 있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몇몇은 고개를 숙이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구- 도련니임-"

대머리 주인의 머리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배설물을 직격으로 맞은 건 마차와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대였다. 대부분 배설물 덩이에 휩싸여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그 중 그나마 무사한 제일 뒤에 있던 자가 고함을 쳤다. 한 두 사람이 그가 빼든 칼에 겁먹어 삽을 들고 달려와 똥을 치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빼 뿌렸다. 그래도 선뜻 달려드는 사람이 많진 않았다. 똥독에 죽고 싶진 않을 테니. 돈도 살아있을 때나 쓰는 거다. 마차도 찌그러져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은 과연 살았을까?

겨우겨우 똥더미를 파헤쳤을 때 안에서 나온 건 에르힌이었다.

이런 제길- 정말 못 볼걸 봤군. 내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걸 저 긍지 높은 - 하이 엘프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긍지를 더욱 높여주기만 했다. 설사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닐지언정- 여자가 알게되면, 묘지 건도 끝장이다.

그녀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나왔다. 마차가 심하게 찌그러진 것에 비해 다행히 그녀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호위병의 몸에 묻은 똥을 보고 그의 품에 안겨 나오길 망설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이 엘프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쇼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난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다크 윙은 밖에 나가길 거부했지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었다. 수건으로 코를 막아도 밀려오는 냄새에 헛구역질이 났다. 난 최대한 빨리 다크 윙을 몰아 이 역겨운 소란에서 달아났다.



"헤이, 이야기 들었어?"

하킨이 달려와 소근거렸다. 학교는 어딘지 모르게 소란스러웠다. 모두들 소식을 들은 것이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에르힌의 오빠인 카르센이었다. 모두들 아무 일도 없는 양 딴청을 부렸다. 카르센은 주위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사라졌다.

"휴우- 죽갔군."

하킨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를 낮춰."

난 하킨에게 말했다.

"흥, 뭐냐, 너도 겁먹은 거야?"

난 그 녀석의 귀에 속삭였다.

"난 직접 봤거든."

하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녀석은 당장 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기어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말았다.

"푸핫핫핫- 이렇게 유쾌할 데가. 드래곤 똥의 냄새를 뺄려면 일주일가지고 될까? 결혼식은 무사히 치룰 수 있으려나?"

"알 수 없지."

젠장, 그 배설물은 내가 맞을 수도 있었단 말이다.

난 이 곳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뱀파이어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엌 구석에서 스켈레톤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이 세계는 뭔가 끔찍했다.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일주일 후 정확히 보름날에 에르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미룬다면 더욱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식장에서 그녀의 가족, 그녀, 그리고 하이 엘프는 모두 거만하고 도도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미끈하게 생겼군. 저런 것과…. 제길, 우웩이다-



낮부터 비가 와서 흐렸지만 부모님은 먼저 돌아가시며 내게도 너무 늦지는 말라고 말했다.

"기꺼이 그 땅을 팔아주기로 해서 고마워."

에르힌이 하이 엘프의 팔짱을 끼고 와서 말했다. 난 일어서서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에르힌은 잠시 날 쏘아보더니 내 옆을 스치며 내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형편없는 멍청이."

제기랄…!

그래, 난 겁쟁이에 멍청이에 부모의 재력에 의존해 귀족들의 꽁무니만 바라보는 신세다.  난 연거푸 와인을 들이켰다.

"이봐, 왜 이래? 교수가 오고 있어. 정신 바짝 차려!"

하킨이 날 치며 말했다. 난 교수님과 멀쩡하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못 버틸 거라는 걸 알았다.



"하킨, 나 먼저 간다."

"괜찮겠어? 안 바래다 줘도?"

"괜찮아~ 괜찮아~ 마차타고 갈 건데, 뭐."

하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비틀거리는 날 마부에게 맡겼다. 난 마차가 에르힌의 성에서 멀어지기 무섭게 뛰다시피 해서 마차에서 내렸다.

"먼저 가."

"하지만, 도련님!"

"가라니까!"

마부는 망설이다가 날 내버려두고 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 나쁜 자식, 우리 부모님께 맞설 용기가 없으면, 도망가자는 말이라도 못해?



불과 몇 달 전 에르힌이 내게 쏘아붙인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지 6개월도 못 돼서 그녀는 결혼했다. 그것도 엘프 나부랭이와!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술기운이 밀려왔다. 아니, 술기운 때문만이 아니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어느샌가 맑아진 하늘에서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젠장맞을!

난 무턱대고 달렸다. 늦었다. 이미 집으로 갈 순 없다.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술이라도 안마셨다면 좀 더 제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아까부터, 달이 나오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주위를 살폈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아윽-!"

고통이, 온 몸의 혈관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장이 아파 왔다. 아니, 이건 다른 이유로 인한 아픔이다.

"크르릉-"

목소리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옷이 갈갈이 찢어져 나갔다. 젠장, 난 이제 죽었다. 새 옷인데. 온 몸에서 감춰졌던 털이 솟아 나왔다. 머리가 앞으로 쏠리면서 형태가 바뀌었다.  고통은 순식간에 시작되었듯이 한 순간에 끝났다. 다음에 찾아온 것은 쾌감이었다.

"아우우우우-"

난 달을 보고 목청껏 울었다. 길어진 손톱을 혀로 핥았다. 잘 됐군. 안그래도 뭐든 다 때려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어디부터 갈까? 일단 저번에 하킨과 함께 갔던 주점으로 가서 그 놈의 개를….

벌써부터 입맛이 당겼다. 난 옷을 확실히 찢어서 누구 옷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해 땅에 묻었다.

부모님은 틀렸다. 난 성년이 되어서도 어둠을 사랑하진 못했다. 네 개의 다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바람이 시원하다. 내가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시간. 모든 속박에서 풀려나는 시간,  그래서 이 시간을 사랑할 뿐이다. 오늘 밤, 신나는 사냥을 해 보자-


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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