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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르마

2009.07.09 02:1807.09

어두운 허공.
아래로부터 한줄기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어디선가 고오오오-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발정 난 암고양이의 울음 같기도 하고, 사막의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이곳은 서기 2099년의 지구.
정확히 말하면 지구 표면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하의 어둠 속.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공간이다.

달력의 날짜를 지우며
어쩌면 이런 생각도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기계 장치와 씨름하며 보낸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상의 채광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희미한 태양빛에 의지하며.
아니, 어쩌면 태양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지도 모른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지상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오년 전부터 지상으로부터의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했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서서히 죽어갔다.
개구리에서 물푸레나무에서 모든 포유류와 당연히 인간마저.

다행히 그 이전에 이곳에서의 삶을 시작한 우리들만이
이 오염된 땅덩어리의 마지막 생명체이다. 아니 그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의 어느 누구도 지상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모른다.

안전한 창고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 둔 선견지명 덕분에
이곳의 모든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아직은.

이 백 명 남짓한 우리들은 철저한 매뉴얼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개인적인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매뉴얼에 의한, 매뉴얼을 위한, 매뉴얼의 일상만이 존재할 뿐.

따라서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매뉴얼이 지시하면, 우리는 그 지시에 충실히 따른다.
매뉴얼을 만든 사람은 우리 조직의 창시자이며
이곳을 지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한 과학자이다.
필요상 그의 이름을 K라고 해둔다.

처음에 K는 인류의 미래에 지대한 공을 남기고자 하는 과학자일 뿐이었지만,
그의 줄기세포 연구가 세상의 관심을 타면서,
그는 과학이 곧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새끼 양을 복제하고 경비견을 복제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려갔다.
그 사이 그의 연구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자본의 세계에서 도덕성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학자로서의 자신을 버리는 즉시 그는 사업가로 재기할 수 있었다.

K는 우선 애완견 시장에 뛰어들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혼자 살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밤늦게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녀를 반기는 것은 어둠과 작은 애완견 뿐.
그녀의 애완견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포기한 모든 것을 대체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에 유통기한이 있듯 그녀의 애완견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애완견을 마음에 묻고 상실감에 젖어있던 그녀에게
화장장으로부터 연결된 한 회사의 전화가 걸려온다.
바로 그 회사, 'Karma'‘가 우리 조직의 시초가 되었다.

여자는 거금을 들여 애완견을 복제한다.
개는 예전과 똑같은 소리로 짖고, 애교를 부리고, 잔디밭을 뛰놀며 여자에게 행복을 준다.
더 이상 애완견의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애완견은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영원한 생명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개인적인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튼 복제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신문, 뉴스, 인터넷으로 퍼지며
전 세계에서 수많은 애완견의 복제 신청이 밀려들었다.
과학이 돈벌이가 된다는 자명한 사실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K는 이로부터 무수한 복제 견을 생산해내고,
그의 연구 범위는 개를 넘어 각종 포유류로 진화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게 되었다.
포유류의 복제가 가능하다면 인간의 복제, 즉 클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성경을 밀쳐내고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어갔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영화들이 클론의 미래를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K의 연구에는 더 많은 돈이 몰려들었다.
단순히 개인의 돈이 아닌,
거대 기업의 자본과 지구 곳곳의 권력자들로부터 지원이 쇄도했다.
이제 과학은 돈을 넘어 권력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

표면상 ‘카르마’는 복제 동물 회사였지만,
자본과 권력이 결합하면서 ‘카르마’는 점점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인간 복제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K의 연구가 온 인류의 미래가 아닌,
그들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것이 되기를 희망했다.

K는 우선 인간의 각종 장기 복제를 시도했다.
심장이, 간이, 신장이, 폐가 실험실의 유리병 속에서 만들어졌다.
연구는 처음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복제된 장기가 거부 반응을 일으켜 수술이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한 수술의 경우에조차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K는 자신의 연구가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미 ‘카르마’는 K 혼자만의 회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소수 사람들을 위한 꿈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K의 뇌가 조심스럽게 냉동된 지하 보관소 위에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K가 만든 매뉴얼에 따라 그의 제자들은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고,
어느 순간 인간 장기의 복제도 더 이상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인간 장기가 속속 완성되고,
그들은 은행에 맡겨 둔 돈을 찾듯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신만의 장기를 꺼내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더욱 더 많은 돈이 ‘카르마’로 몰려들었고,
그럴수록 ‘카르마’는 점점 더 깊숙이 내려갔다.
그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닌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비밀 조직이었다.

이제 목표는 단순히 장기의 복제가 아닌 클론으로 바뀌었다.
그 옛날 신세계를 찾아 황무지의 대륙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인간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의 연속 속에서 자신을 단련시켜 왔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의 기억을 클론에게 주입시킬 수 있다면
소멸의 공포는 더 이상 인간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유일한 지배자이자, 곧 신이 되는 것이다.

K의 뇌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수많은 과학자들이 ‘카르마’를 거쳐 갔다.
뇌의 복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복제된 뇌에 특정한 기억을 주입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구에 연구가 거듭되는 동안 사람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클론의 연구가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들이 더 이상 ‘카르마’에 투자할 이유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카르마’는 또 한 번의 모험을 시도한다.
‘카르마’의 상징적인 인물인 K의 유전 정보를 통해
인간의 장기를 각각 만들어내고
그것에 K 자신의 뇌를 이식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카르마’는 그 존폐를 걸고 모험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뇌 이식은 특정 기억이 주입된 뇌의 복제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색다른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K의 뇌 이식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투자자들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고 정력적인 모습의 K가 실험실에서 눈을 뜬 것이다.
‘카르마’는 뇌 이식 사실을 감추고
대신 되살아 난 K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취한다.
눈앞의 K를 보고 흥분에 들뜬 투자자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아마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자신의 손에 쥐었다고 들떠 있었겠지.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K가
그들보다 훨씬 탱탱한 피부를 갖고 활기찬 걸음걸이로 연구실을 활보하는 모습이라니.

‘카르마’는 K의 강력한 지휘 체제 아래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클론을 가지는 꿈은 요원했지만,
대신 죽음 이후에 뇌를 이식함으로써 어쨌든 그들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상의 곳곳에서 비밀리에 지도자들의 사후 뇌 이식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지도자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정력적이 되어 가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을 테지.
불사초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비밀이 견고하게 유지되면 될 수록
그들이 누리는 돈과 권력은 더욱더 강력해져 갔다.

그들이 지상의 지배자였다면,
K는 지하의 지배자였다.
그는 이전의 매뉴얼을 새로 재정비하고,
‘카르마’에서 근무할 백 여 명의 연구원과 직원들을 세심하게 선발했다.
우리들은 비밀 유지와 함께 지상에서 격리된 비밀 장소에서 근무할 것을
계약서에 다짐받은 후에 새로운 연구소로 이송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매뉴얼의 제 1규칙도 이 때 만들어졌다.

K는 세계의 소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지하 수 백 킬로미터 밑의 안전 가옥을 마련한다.
채광과 통풍 시설, 식량 창고, 물품 창고, 연구실 등 모든 것이 최신의 시설로 설계 되었고,
핵폭탄의 위력에도 미치지 않을 견고한 요새가 된 ‘카르마’의 본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 소수 정예 요원들로 구성된 일종의 조직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유리병 안에서 인류 역사 최초의 클론, ‘주니어’ 가 탄생한다.
그 때의 분위기가 ‘카르마’의 역사박물관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아널드 슈왈제네거의 유전자로 구성된 ‘주니어’는
강인한 육체와 지성 및 지도력을 지닌 또 다른 아널드 슈와제네거였다.

이미 사망한 아널드의 뇌와 유전자는 일치감치 냉동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뇌 속의 기억을 추출해 재구성함으로써
완벽한 클론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그가 그 유명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히로인이었다는 걸
그 때 깨닫지 못했을까.
그랬다. 그들은 그 때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불사초의 비밀을 손에 쥔 특권층들은 이제 마음대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해가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아와 자연 재난, 폭정에 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가진 자들만의 세계 속에서 안락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구는 점점 오염되고 자원은 고갈되어 가는데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 뿐이었다.
클론도 만들어 낸 과학인데, 지구 따위가 무슨 대수이랴.
그들은 지구가 싫으면 언제든지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름이 고갈되어 지상은 움직임을 멈추다시피 했는데
우주 과학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가며 날로 발전하고 있었고,
생명체가 살만한 행성을 찾기 위한 우주선이 연일 쏘아 올려졌다.
그 자본의 정체는
지상에서 기아와 폭정과 자연 재해에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의 피였고 생명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들은 자신의 피와 생명이 뽑혀져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우려했던 현실이 벌어진다.
영화에서처럼 핵전쟁이 벌어진 것도, 지구와 행성이 충돌하는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 몰락은 시작되었다.

‘카르마’의 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처음에 그것은 한 마리의 쥐로부터 시작된다.
오염된 음식을 먹은 한 마리의 쥐가 한국이란 작은 나라의 시청 역 지하통로에서 죽는다.
죽은 쥐가 부패하면서 지하 통로의 다른 쥐들도 이상한 바이러스에 걸려 죽어갔다.
쥐들은 죽어가면서 온갖 더러운 배설물을 지하철 곳곳에 토해놓고
대한민국의 가장 번잡한 지하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쥐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다.
고열을 앓으며 헛소리를 하고, 기억력에 장애가 오는 특징을 보이며
일주일 안에 사망에 이르는 쥐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서울을 뒤덮고 전 세계로 퍼진다.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각국 정부의 부실한 초기 대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헛소리를 해대며 죽어갔다.
우주과학과 비밀 연구에 자금을 막대한 쏟아 붓느라
정작 많은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바이러스연구에는 소홀히 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후 폭풍을 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이 집과 거리와 강과 바다를 뒤덮자
지구 전체가 바이러스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애완견 복제로 행복해 하던 여자는 더 이상 애완견을 기를 수 없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완견에게서는 더 이상 건강한 유전자를 추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애완견의 소멸을 슬퍼하기도 전에 여자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자본가들은 더 이상 쥐 바이러스를 제어하기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장밋빛 행성에 대한 꿈은 아직 요원한데 지구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지상을 떠나기로.
‘카르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속속 지하로 입성했다.
'카르마‘의 모든 투자자들이 입성을 마치자 지상으로의 통로는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지상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카르마’의 역사다.
왜 ‘카르마’의 역사에 대해 이토록 세세하게 알고 있느냐고?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
나는 그저 매뉴얼에 정해진 대로
정해진 시각에 기계를 작동시키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잘 뿐이다.
시간도 여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의 생물학적 유통기한의 만료에 대비하여
저 지하의 어둠 속 냉동 창고에는 이미 나만의 냉동 배아가 수 십 개나 보관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동료와의 시답잖은 수다가 지루해질 때면
역사박물관의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동안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읽고 또 읽는다.

오늘도 그렇게 사이트를 한 바퀴 돌고 나올 무렵이었다.
마감 시간도 다가오고 슬슬 퇴근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료가 찾아왔다.
편의상 그의 이름을 P라고 해두자.

P는 나와 마찬가지로 ‘카르마’의 초창기 멤버 중 한 사람으로 한국계 아시안 혼혈인이다.
‘카르마’에선 특별한 관계라는 게 거의 드물지만,
나와 P는 우연하게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뭐, 그렇다 해도 식사를 같이 하거나 가끔 가상현실의 게임을 같이 즐기는 정도이지만.

최근에 P는 극심한 피로와 함께 사지가 힘을 잃는 신경증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P가 쥐 바이러스에 오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P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기억력이 부실해지고 상황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해 대던 P는
결국 자신의 클론을 통해 부활하기로 마음먹는다.
P의 오리지널은 분해되어 연구실로 옮겨지고 대신 새로운 P가 일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P의 발병은 계속되었고 오리지널을 통한 병의 원인도 파악되지 못 했다.
1회, 2회, 클론의 복제가 이어지고,
지금의 P는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지널 P의 다섯 번째 개체인 셈이다.

P는 저녁 식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려왔다.
피곤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P는 지팡이에 양 손을 의지한 채 말했다.
참석하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그렇게 안 좋아?
P는 더 이상 참기 힘든지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보스에겐 잘 말해 줘.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P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연구원들 뿐 아니라 투자자들에게도 같은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의 원인은 아무리 해도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병의 원인 자체가 너무 원시적인 수준이라
현대 과학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상 증세를 빼면 ‘카르마’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곳은 지상에서의 삶보다 훨씬 안락한 온갖 편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팜비치의 해변을 즐길 수도,
상하이의 유람선을 타고 저녁 식사를 할 수도 있다.
파도를 즐기고 썬 텐을 하고 이상적인 미녀와의 데이트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 했다.
마약처럼 환상이 지속되는 시간을 늘려 갈 뿐,
사람들은 ‘카르마’의 갇힌 현실을 떠나 가상현실에 안주하고
또 현실로 돌아와 우울해했다.
끝도 없는 시간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가상현실로 시간을 때우거나 먹고 자는 것뿐이었다.
지상에서 온갖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은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따분한 일상에 지쳐갔다.
갈등과 권모술수, 욕망으로 똘똘 뭉친 그들에게
동등한 시간과 동등한 물질이 주어지는 조직의 생활은
점점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봉쇄된 문을 통해 ‘카르마’를 빠져나갈 수는 없다.

나는 공동 식당에 지정석에 앉아 오늘의 메뉴를 살펴보았다.
냉동 건조된 콩과 당근 요리에 스테이크와 고기 스프.
삼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은 음식을 같은 표정으로 먹는다.
최근 들어 메뉴는 더욱 빈약해졌다.
저장 창고의 식량이 바닥나고 있음을 누구나 짐작하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 뿐.

영겁이 시간이 주어진 들 어찌하랴.
인간은 무언가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을 지속시킬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 해당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K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구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카르마’는 인간의 유일한 생존지이다.
K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에 살아남은 이 백 명의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다.

일 년쯤 전부터 ‘카르마’의 고위층에서 뭔가 비밀스런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은 우리들에게 공개되지도, 공개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조직의 체계가 부산스럽게 정비되고
연구원들의 대대적인 부서 이동이 시작되었다.
냉동 배아의 배양을 맡던 내가 지금의 부서로 옮겨온 것도 그때부터이다.

나에게는 완성된 클론을 실험관에서 꺼내어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 업무가 주어졌다.
냉동 배아는 실험실의 작은 유리관에서 배양되어
일정기간이 지나면 관 모양의 실험관으로 이동된다.
그곳에서 석 달 동안 적정한 온도와 배양액으로 배아를 클론으로 키워내고,
완성된 클론은 인간의 출산처럼 세심한 과정을 통해 외부 세계로 꺼내진다.
실험관으로부터 분리된 클론은 불안정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양수가 제거되고 산소호흡기가 부착되면 기계가 클론의 상태를 그래프로 보고한다.
심박 수가 안정되고 자가 호흡이 가능해져야 비로소 클론은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나의 임무는 완성된 클론을 그 장소 앞까지 이송하는 데서 끝이 난다.

그 다른 장소란 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나처럼 그 곳의 누군가도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른 채
그저 매뉴얼대로 지시된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장소가 특별 출입금지 구역이란 것과
한 번 그곳으로 들어간 클론을 다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클론의 완성은 어떤 형태로든 오리지널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클론에게는 오리지널과 대비되는 은색 팔찌가 채워진다.
팔찌에는 클론의 복제 개시일과 완성일, 복제 회차 그리고 오리지널의 넘버가 기록된다.
오늘 난 오리지널 A2011의 클론A 2011-5와
또 다른 오리지널 B 0413의 3회차 클론을 특별금지 구역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저녁 식사에 나타난 A2011과 B0413은 여전히 황금색 팔찌를 끼고 있었고
그 의미는 그들이 내가 완성한 클론이 아닌 오리지널이란 뜻이다.
그럼 내가 완성한 클론 A2011-5와  B0413-3은 어디로 간 걸까.

저녁 식사 후 나는 그동안 완성한 클론의 데이터와 오리지널을 대조해 보았다.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다 내가 가상현실이나 역사박물관 자료에 싫증이 나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때울 그 무엇이, 나에겐 필요했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나와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연구원이 이십 여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루에 40 여명의 클론이 복제되어 특별 금지구역으로 이송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걸까.
왜 ‘카르마’는 오리지널이 존재하는 데도 불필요하게 클론을 복제하는 걸까.
고민을 채 하기도 전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P는 그 다음날도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점심시간에 맞춰 그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거절하는 P를 억지로 식당에 데리고 가 앉히고 음식을 들고 온 것은
특별히 P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그 무엇이 P의 발병과 특별 금지구역으로 이송된 클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메뉴는 여전히 냉동건조 야채와 스테이크, 고기 스튜였다.

이젠 이것도 지겨워.

양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내가 말했다.
하지만 불평은 무의미하다. ‘카르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걸 안다.
P는 가만히 앉아 음식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먹어 둬.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먹지 않으면 병세가 더 악화될 뿐이다.

아무래도........먹을 수가 없어.

P는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모르겠어. 음식을 씹을 때마다 고통이 밀려와. 내 몸 어딘가에서 거부하고 있어. 음식을.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설마 또 클론으로 대체하려는 건 아니겠지?

글쎄, 다음 번 클론 역시 이 병에서 자유롭진 못 할 거야.

나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잘랐다.
적당하게 익은 스테이크 사이로 붉은 육즙이 흘러나온다.
결국 P는 한 숟가락도 음식을 입에 대지 못 했다.
그를 사무실로 데려다 준 뒤 나는 다른 오리지널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안다. 이런 생각이 내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개인적인 생각이 용납되지 않는 이곳에서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불필요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호기심이 모종의 쾌락,
가상현실에서는 절대 맛 볼 수 없는 짜릿함을 주었다고나 할까.

다음 날 아침, 나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 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그 날 내게 주어진 임무는 P 1213의 여덟 번째 클론을 실험관에서 꺼내는 일이었다.
P는 지금껏 다섯 번밖에 클론을 만들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세 개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클론의 복제가 시작된 날짜를 확인했다.
그랬다.
정확히 석 달 전 나는 그 서류에 사인을 하고 P의 냉동 배아를 실험관에 옮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 생각도 없이 할 수 있었을까.
P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P는 아침 식사에도, 점심 식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하루 종일 가상현실 게임에 빠져 방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P 1213-8을 꺼내 특별 금지 구역을 이송했다.
이송확인 서류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는 기분이 묘했다.

퇴근 후 나는 그의 방을 방문했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P는 여전히 힘겨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상태가 나쁘면 클론을 신청하지 그래.

나는 최대한 내 감정을 숨기며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럼?

모르겠어.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P는 말문을 닫아 버렸다.

P에게서 뭔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늘 복제가 시작된 P1213-8의 존재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의 호기심은 점점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이 점점 나를 옥죄어 왔다.
진실을 궁금해 하는 내 자신이 두렵고, P가 숨기고 있을 그 무언가가 두려웠다.
그건 일종의 본능이었다.
단지 오랫동안 이곳의 일상에 젖어들며 점차로 잊혀져갔을 뿐인 그 무엇.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던 나는
어느덧 특별금지구역 앞에 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순간, 나는 두려움을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특별 금지 구역.
임무를 맡은 소수의 연구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P의 구역이었던 것이다.
P가 일 년 전부터 바뀐 임무를 시작했던 곳!

나는 몸을 떨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추측은 맞았다. P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P가 이상한 증세에 시달리게 만들만큼 충격적인 그 무엇임이 틀림없다.
그게 무엇일까.
식사도 거르게 만들고 삶의 의욕조차 떨어지게 만든 그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한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두려움은 밤새 악몽으로 이어졌다.

꿈속에서 P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 있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돌덩이를 산 위에 올려놓으면
돌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P의 발목을 찧는다.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른 채 P는 또다시 그 돌덩이를 옮겨야 했다.
P의 얼굴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 둬!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P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만 두라니까!

그러자 P는 비로소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만 두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계속할 수밖에.

말을 마친 P는 다시 돌덩이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을 꾸긴 처음이다.
쾌적한 실내 조건과 안정적인 수면 리듬을 포함한 전파가 흐르기 때문에
‘카르마’의 사람들은 불면을 경험하지 않는다.
나는 ‘카르마’의 일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P의 방을 노크했다.
딱히 뭘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 시간에 P가 깨어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뭔가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예상과 달리 P는 파리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

나는 얼결에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왜 아직도 안자고 있는 거지?

그러는 넌.

P는 휠체어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었던 듯 했다.
내가 들어서자 P는 서둘러 종이를 찢어버리고 내게 의자를 권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곳의 모든 것이 무섭게 느껴져. 내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P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P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지옥이야.

나는 당황했다.

그, 그런 말은 해선 안 되잖아.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곳은 이미 지옥으로 변했어.

나는 여전히 P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상에서의 일을 생각해 봐. 우리가 지금껏 살아있는 것도 ‘카르마’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해.
언제까지 여기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P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처럼 많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서 우리는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어.
지하엔 아직도 수많은 냉동배아가 보존되어 있고,
그게 떨어진다 해도 원하는 만큼 만들어내면 돼.
그런데 그 다음은 뭘까? 우리에겐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카르마’를 벗어날 수는 없어.
수십 년, 아니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도 ‘카르마’엔 오직 우리들뿐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거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건 없어.
과학의 발전? 우리가 변하지 않는데, 과학이 발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만 지속시킬 수 있을 뿐이야. 발전은 없어.

나는 P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한숨을 쉬었다.

쥐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내가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여?

P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어.

나는 충격적인 얼굴로 P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P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어.

P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도 역시 지쳐가고 있는 걸까.
계속되는 클론의 복제와 소멸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P의 말처럼 그들 역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걸까.
하지만 그에게 특별금지구역의 임무를 묻는 일만은 할 수 없었다.
매뉴얼의 가장 최고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P는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경비원 몇 명이 소리 없이 그의 시신을 어디론가 옮겨버리고 방은 텅 비어졌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는 몰래 다른 연구원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보안 코드를 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컴퓨터에 입력된 클론의 복제 기록을 열어보는 데는 채 십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마치 수백 년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H0808, 나의 클론 복제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H0808-6. 나의 클론은 벌써 여섯 번이나 생산되어 특별 금지 구역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오늘 H0808-7이 완성되어 실험관에서 깨어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 한 채 사무실로 돌아 온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혹시 나는 클론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생긴 불상사로 인해 클론으로 대체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섯 번이나?
그렇다면 나의 팔목에 있는 황금색 인식 팔찌는?
나는 클론이 아니다. 오리지널이다.
아직 단 한 번도 나의 클론을 요청한 기억이 없다. 없지만,
확실히 없다고 자신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카르마’에 지원한 기억,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 온 기억,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기억. 그 뿐이었다.
K는, ‘카르마’는 그것만을 요구했으니까.

두려움보다, 공포보다, 진실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새삼 ‘카르마’라는 조직이 실체가 궁금해졌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알아야겠다는 결심.

나는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별금지 구역으로 갔다.
보안 코드가 있었지만 P의 방에 있던 보안패스가 아직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행운이 찾아와 보안패스가 작동한다면, 오늘 밤 나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새벽1시. 감시 카메라가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지금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바로 찾아와 묻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특별 금지 구역 근방은 내가 늘 출입하던 구역이었고,
아마도 지루함에 지친 경비원들이 오락이나 뭐 다른 심심풀이로
모니터를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행히 보안패스는 아직 유효했다.
첫 번 채 방은 나도 와 본 적이 잇는 곳으로
클론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나는 그 방을 지나 보안패스를 거쳐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왼쪽은 근무자들의 탈의실로 비닐 옷과 보안경이 달린 모자가 걸려있었다.
오른쪽은 십여 대의 팬 베이어 벨트가 설치된 조립라인 같은 곳이었다.
그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당황한 나는 탈의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밤에는 근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낮 근무자였으니 몰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밤 근무자들이 조용히 탈의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아마도 경비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나를 밤 근무자로 착각한 때문이리라.

잠시 뒤, 경고들이 울리며 첫 번째 방으로 침상이 이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클론들을 이송하러 온 연구원들과 근무자들의 인수인계 과정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과 전율이 함께 몰려왔다.
나는 탈의실 문틈으로 오른쪽 방을 엿보았다.
수면에서 깨어난 클론들은 침상에서 팬 베이어 벨트로 조심스럽게 옮겨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가, 아니 H0808-7 이 침상에서 벨트 위로 옮겨지고 있었다.
약간은 얼떨떨한, 그러나 세상에의 호기심이 가득한 상기된 얼굴로
나는, 아니 나의 클론은 벨트 위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팔목과 발목에 잠금 장치가 씌워졌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십 여명 가까운 클론이 십여 대의 벨트 위에 차례로 눕자 방의 불이 꺼졌다.
이윽고 벨트 위의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졌다.
조용히, 그러나 일사분란하게 팬 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무자는 방을 나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왜일까. 벨트 안쪽에선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근무자는 담담한 얼굴로 보안패스로 문을 열고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순간, 세 번째 방 쪽에서 기계들이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 같았다.
하지만 방문이 닫히자 소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달아날 수는 없었다.
저 방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떨리는 손으로 P의 보안카드를 보안 코드 함에 넣었다.
승인 불빛이 반짝이며 조용히 문이 열렸다.

차가운 흰색 타일로 뒤덮인 실내엔
각각의 팬 베이어 벨트에 연결된 금속의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엔 각종 기계 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십 여 명 쯤 되어 보이는 근무자들은 내 쪽으로 등을 돌린 채
기계를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엔 갓 깨어난 클론들이 누워 있었다.
나는 재빨리 구석의 세면대 뒤로 몸을 숨겼다.
순간, 근무자들 사이로 나는 H0808-7의 눈빛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어떤 위기감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때 내가 본 광경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차마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계 팔이 H0808-7의 몸에 여러 선을 긋고 있었다.
마치 아주 어릴 적 박물관에서 보았던 정육점의 돼지 그림처럼
H0808-7의 배와 팔, 다리, 가슴, 목, 손목 등에 점선이 그어졌다.
테이블 위에서는 다음 과정을 위한 톱날이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곳은 분해 실이다!
저들은 지금 막 태어난 클론을 분해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톱날이 서서히 클론들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나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서서히 내려오는 톱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를, 아니 H0808-7을 소멸시키려 하고 있다!
찰나였다. 그 순간 나와 H0808-7의 눈이 마주친 것은.
H0808-7은 자신과 똑같은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동안의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린 듯 했다.
갑자기 H0808-7이 테이블 위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나를 향해 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무자들이 발버둥치는 그의 몸을 짓눌렀다.
그 소란으로 H0808-7의 위에 있던 톱날이 잠시 작동을 멈췄다.
그러나 다른 클론들은 비명과 함께 톱날 아래에서 조각조각 분해되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었다.
순식간에 사십 여명의 클론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갈고리에 부위별로 걸렸다.
당장이라도 먹은 것을 토할 것만 같았다.
나는 H0808-7의 소동을 틈 타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와 달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가까스로 다다른 방 앞에서 나는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그리고 문 앞에서 쓰러졌다.

무려 이틀 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손목의 자동건강 관리 시스템은 아직도 내 상태가 불안정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영양주사액이 주입되었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기와 음악이 특별히 처방되었다.
다행스럽게 아무도 나의 내면의 공포까지는 알아차리진 못했다.
영양주사액 따위를 맞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K를 만나야 한다.
클론의 완성을 책임지고 이송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카르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을 되찾자 그 모든 일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K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가 지시한 일이 분명하다.
‘카르마’에서 K외에 이런 일을 진행할 사람은 없다.
연구원들이 대대적인 부서 이동이 이루어지던 그 때부터였다.
매뉴얼이 한층 강화되고 특별 금지 구역이란 신설 부서가 생긴 것도.
내가 보았던 바로 그 곳에서 P는 일했고, 모든 것을 보았으며,
결국 자살이란 고전적인 방법으로 소멸을 택했다.
그러나 왜.
클론의 분해가 자살이란 극단적 방법을 선택할 만큼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원한다면 부서 이동을 고려해 볼 수도 있었다.
병의 이상 증세도 클론 대체라는 방법이 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H0808-7의 눈빛이었다.
그의 두려운 눈빛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목전에서 또 다른 나의 분해 현장을 보고만 것이었다.
P도 그런 걸까.

점심 식사를 알리는 벨이 울렸지만 도통 식욕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삼백 여명이 모인 거대한 식당이 나를 압도해 왔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식량이 필요할까.
저장 창고에는 식량이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나는 자리에 앉아 눈앞에 놓인 식판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메뉴는 역시 냉동 야채와 스테이크, 고기 스튜이다.
한숨을 쉬며 나이프와 포크를 쥔 나는 힘없이 고기를 썰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지. 일단 먹어야한다.
마음을 다잡고 포크를 들던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스테이크의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점선의 자국!
지난 밤 H0808-7의 몸에 그려지던 검은 점선이 겹쳐지며
나는 먹은 것을 왜엑- 뱉어냈다.
부들부들 떨며 포크를 내던지는 나를 동시에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삼백여명의 사람들.
그들의 한없이 지루하고 나른한 눈빛들.

우리는........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어.

P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옳았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식당을 빠져 나왔다.

달리고 또 달렸다.

이곳은 지옥이야.

‘주니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인류의 존재를 끝장내려고 온 터미네이터였다.

나는 봉쇄된 ‘카르마’의 출구를 향해 달렸다.
경비원들이 막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한 시간을 갖기 보장하기 위해 K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자신의 클론을 먹는 것이었다.

P는 눈앞의 P1213-3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클론을 대면하고 당황한 P가
P1213-3의 손목과 발목의 잠금 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였다.
P1213-3 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도 P 자신이 더욱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P1213-3 은 손에 흐르는 피도 아랑곳 않고 기계 팔의 날카로운 침을 들고 있었다.
그가 P의 클론이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의식 상태가 깨어나기 직전이었다.

너는 누구지?

P1213-3 이 물었다.
다른 근무자들이 조용히 P1213-3의 주위로 다가섰다.
그 사이 한 명은 구석으로 가 비상벨을 눌렀다.
세 번째 방의 문이 견고한 철문으로 봉쇄되었다.

나, 나는 너의 오리지널이다. 너는.........나의 클론이야.

톱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른 클론들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걸 내려 놔.

근무자 한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나를 죽일 거잖아.

P1213-3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P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또 다른 내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다.
P 역시 두려웠다.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P를 엄습해왔다.
왜지? 난 살아있는데, 앞으로도 살아갈 건데.
소멸되는 것은 나의 클론일 뿐이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무수한 생각이 P의 머리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다른 근무자가 말했다.

애초부터 너란 존재는 없어. 너는 오리지널 P의 클론일 뿐이야.

묻는 말에 대답해. 나는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카르마’를 위해 일해 왔어. 그런데 왜, 왜 나를 왜 죽이려고 하지?

그건 네가 아냐. 너의 오리지널의 기억일 뿐이지. 넌 지금 막 라인에서 깨어났을 뿐이야.

나, 나는 클론이 아냐. 나는 P야. 내가 일하던 곳, 잠자던 곳, 밥 먹던 곳 모두 기억해.

P1213-3 은 기계 팔의 침을 근무자들에게 겨눴다.
그는 거의 절망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다가오지 마. 어느 누구도. 다 죽여 버릴 거야.

P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살기 위해 클론을 먹어야 돼.

머, 먹어? 내가, 나를 먹어야 한다고? 살기 위해서?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식량이 부족해. 대신 클론을 만들 수는 있지. 하지만 너는......... 내가 아냐.

P는 고개를 돌린 채 자신 없는 소리로 말했다.
차마 P1213-3을 바라보면서 그 이야길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근무자들은 경비원을 부를 수 없었다.
경비원들이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클론의 분해 실은 ‘카르마’에서 가장 보안이 유지되어야 하는 곳이다.
P 역시 부서 이동 당시 그런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신의 클론과 마주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근무자들은 조용히 전자 봉을 꺼냈다.
위기의 순간에 사용되는 최후의 방법이다.
P는 전자 봉을 들고 망설였다.
그러나 이곳은 ‘카르마’다. 임무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
전자 봉을 든 P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근무자들은 일제히 P1213-3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든 흉기로 저항해 봤지만 전자봉의 위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P는 충혈 된 눈으로 마지못해 전자 봉을 내려쳤다.
이것은 살기위해서다. ‘카르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P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하지만 눈을 뜬 순간, P는 그만 P1213-3 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P에게, 아니  P1213-3에게 무수한 전자봉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전자봉의 고통이 P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것은 P1213-3 만이 아니었다.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P의 의식도 서서히 흐려져 갔다.
전자봉 찜질에 까맣게 타들어간 P1213-3 의 손에서 기계 침이 떨어졌다.
입에서는 부글부글 거품이 흘러나오고 신음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건 안 되겠는 걸. 어쩌지?

어쩌긴. 위에 보고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자.

시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며 P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P는 그 때부터 식욕을 잃었다.
이건 한 생물이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을 취하는 포식관계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P에게는 내가 나를 먹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반복되는 P의 이상 증세는 아마도 그것 때문이라고 P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나를 먹는 일이 지속된다면 아무리 클론을 복제해도 증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업보다.
K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카르마’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생존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달리면서 텅 빈 P의 방을 떠올렸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소멸을 택하더라도 그처럼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지상이 바이러스로 오염되었더라도,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아 있지 않더라도
마지막만큼은 지상의 하늘 아래에서 맞이하고 싶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복잡하고 길었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이미 경비원들이 막고 있었다.
나는 예전 지상으로부터 물품이 수송되던 파이프라인을 떠올렸다.
‘카르마’ 초기에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물품을 지상으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이다.
기억을 떠올려 얽히고설킨 파이프라인을 따라 도망쳤다.
지상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카르마’의 존재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긴 탈출이었다.

나는 마침내 봉쇄된 출구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출구는 견고한 벽으로 막혀있었다.
출구의 옆에는 이미 오래 전에 봉인된 보안코드 함이 있었다.
경비원들은 이곳까지는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지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비상 해머를 들고 보안코드 함을 내리쳤다.
마지막을 위해, 소멸을 위해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은.
그렇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단지 지쳤기 때문은 아니다.
내 자신을 먹으며 살아온 과거에 대한 역겨움도 아니다.
이런 수고 없이 지하에서의 영원한 삶을 꿈꾸는 자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멸은, 아니 죽음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마지막 관문이어야 한다.
보안코드 함을 깨자 오랜 잠에서 되살아 난 불빛이 반짝거린다.
패스워드가 뭘까. 나는 닥치는 대로 버튼을 누른다.
조직의 시초인 ‘카르마‘? 최초의 클론인 ’주니어‘? 조직의 창시자인 'K'?
영원한 삶? 과학의 힘? 클론?
모두 아니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인간’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파벳을 눌렀다. 'HUMAN'
그러자 봉쇄된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간, 강렬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간신히 눈을 뜬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지상이 있었다.

처음 떠나올 때 그 곳은 매연과 고층 빌딩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지금의 지상은 쥐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모니터를 통해 보았던 그 땅이 아니었다.
서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선홍빛 지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인간이 모두 사라진 땅에는 온통 푸른색이 넘쳐났다.
나는 땅 위로 발을 내딛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푸른 지상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비로소 땅으로 되돌아왔음을,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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