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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정신이 홀리다.

2009.07.04 10:3907.04

햇살이 따갑다 못해 아프다. 온몸에 달라붙은 찐덕찐덕한 땀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숨막히는 더위와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이 내뿜는 매연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여름은 덥기는 했지만 서늘한 나무그늘에서 느끼는 풀냄새가 상쾌하기까지 했었는데, 해가 지날수록 여름은 점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오늘은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이틀만이다. 2시에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내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혹시 그녀가 조금이라도 일찍 나오지 않을까 해서다.

오늘은 그녀와 만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여러 여자를 사귀어 봤지만 이렇게 여자에게 미쳐보기는 처음이다. 그녀에게는 마력적인 매력이 있다. 붉은 장미와 같은 화려함과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초와 같은 청순함이 절묘하게 조화된, 혼을 빨아들일 것 같은 미모와 심장을 살살 긁는듯한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나를 몽롱하게 한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마력적 매력에 내가 일방적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녀를 만난 일주일 동안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꿈꾸는 동안 조차도 언제나 그녀와 함께였다. 머릿속에 그녀를 떠올리지 않으면, 그냥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하다.

내가 그녀를 기다리는 곳은 서울에서 가장 맛이 있다는 일식레스토랑이다. 그녀가 해산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회를 정말 좋아한다. 사실 이 집은 평소에 가볼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고가의 음식점이다. 보통 국빈이나 고위 정치인들이나 찾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그녀를 만난 일주일간 그녀를 위해 쓴 돈은 천문학적이다. 그녀를 한번 만날 때 마다 대략 300~500만원의 데이트비용과 명품인 옷이며 핸드백, 구두 등을 선물하느라 대략 5천만원은 쓴 것 같다. 물론 그녈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돈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정신차리라고 충고를 해댔다. 뭐, 그다지 새겨 들을 필요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녀만 잡을 수 있다면 수백억원이 들어도 상관없다.

문밖에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문이 열린다. 그녀가 들어선다. 그 순간 음식점의 공기는 멈춘 듯이 고요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된다. 그녀가 한걸음 한걸음 나에게 걸어올 때 그들의 시선도 그녀를 추적한다.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손짓한다. 나는 왠지 승리자가 된 것 같아 으쓱하다.

사실 지난 일주일은 그녀와 함께해서 천국과도 같았지만, 또 한편으로 인생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 가득했던 지옥과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녀와 만난 이후 친구들에게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수도 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를 자랑하고픈 마음에 가장 친한 몇몇 친구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녀를 본 녀석들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에게 대쉬를 해댔다. 나를 배신한 것이다. 그 후,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 모두와 연을 끊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뼈에 사무치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 외에도 나를 미쳐버리게 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가장 난감했던 것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그녀에게 반해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난 그 후로 그 인간을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곧 어머니와 이혼 할 것 같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녀 특유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난다. 그녀의 체취는 날 살짝 취하게 한다. 그녀를 정면으로 보자니 아직도 약간 긴장이 된다. ‘후.. ‘

“현우씨, 너무 미안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

그녀는 모른다. 그녀가 나에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를 말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귓속으로 들어와 머릿속을 때려대고 말이 끝나고 내뱉는 달콤한 숨결에 손으로 초콜릿을 뭉개듯 내 심장도 뭉개지는 것 같다. 그녀에게 무언가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미치겠다.

나는 멋적게 웃는다. “저는 지연씨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걸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그녀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라고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싶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그럴만도 하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있다. 남자들은 불쾌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녀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녀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한다.

그녀가 회를 집는다. 내가 먼저 집어주고 싶었지만, 한발 늦었다. 그녀가 회를 음미한다. “현우씨 정말 맛있어요. 회를 먹다 보니 깊은 바닷속이 생각나요. 정말 바다가 그립네요.” 나는 기회다 싶어 말을 잇는다. “지연씨 그럼 오늘 바다 보러 갈래요” 그녀의 큰눈이 더 커진다.  "정말요?" 그녀는 정말 기쁜 듯 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예, 정말가요!"

어제 차를 바꿨다. 며칠 전까진 소형차를 몰고 다녔지만, 그녀에게 그런 차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외제 스포츠카를 뽑았다. 아버지 몰래 집을 담보로 사채를 끌어 뽑았다. 이미 카드도 정지되었고, 은행대출도 불가하다. 물론 아버지가 노발대발할게 뻔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안 뽑았어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아버지가 차를 뽑았을 것이다.

그녀는 차를 보더니 조금 놀란 눈치다. "현우씨, 이 차 정말 멋져요" 그녀의 말은 나를 정말 기쁘게 한다. “당신에게 어울릴 것 같아 뽑았어요”

그녀는 내 말에 감동을 했는지,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현우씨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이 내 겉모습만 보고 다가왔었는데.. 당신은 진심인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그녀에게 미쳤고, 영혼을 바쳤다. 그녀가 나에게 없다면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두둥, 두두둥, 스포츠카의 리드미컬한 엔진소리에 그녀는 즐거운지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이차에 쏟아 부은 5억원은 충분한 값어치를 한 것 같다. 스포츠카는 동해를 향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간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비릿하기도 하지만 더운 여름에 바다냄새는 상쾌하기 이를데가 없다. 그녀는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정말 좋아요. 정말 바다가 좋아요” 그녀는 모래사장을 어린애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버지다. 난 당연히 받지 않는다. 문자가 계속해서 날라온다. 어짜피 욕지거리일 것이 분명하다. 아마 지금쯤 우리가 살던 집은 사채업자에게 넘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나에게 뛰어오더니 뜬금없이  "전 현우씨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이 바다 속에 있었을 지도 몰라요"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현우씨, 현우씨는 정말 제가 좋아요?" "전 이미 당신에게 제 영혼을 바쳤어요" 그러자 그녀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럼 제가 사람이 아니더라도 저를 사랑할 수 있어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다. “그럼요. 당신이 외계인이라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엉뚱한 이야기조차 귀엽다.

노을이 진다. 그녀와 함께 해변근처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와 술을 한잔씩 한다.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과 붉은 노을과 어울어져 더없이 아름답다.

그녀는 약간 취했는지, 혀가 약간 꼬인다.  여자들 특유의 경계심이 약간은 풀린 것 같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친밀하다. “현우씨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그럼요. 좋아요”

“옛날에 바다 밑에 사람이 살았대요. 지금 땅에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요. 사실 지구의 모든 생물은 바닷속에서 태어나 땅 위로 올라온 것이거든요. 생물들이 땅 위로 올라오기 전에 바다 사람들은 바다 밑에서 거대한 문명을 이뤄 지구의 주인으로 살았대요.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았대요. 지금의 사람들보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다가 주는 고마움을 모르고 바다를 마구마구 괴롭혔대요. 마구 쓰고, 마구 버리고.. 그러다가 바다가 벌을 내려 바다가 얼어붙기 시작했대요. 바다사람들은 어찌 해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대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멸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바다사람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알들을 빙하 속에 얼려놓았대요. 나중에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런데 요즘 날씨가 더워지면서 빙하가 녹아서 바다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깨어나 육지로 올라온대요. 다시 세상를 되찾으려구요. 재밌죠? ”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연씨는 참 엉뚱한 면이 있네요. 재미있어요. 이거 SF영화로 만들면 성공할 것 같아요” 그녀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인어라고 부른대요.” 나는 그녀가 왜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지 사실은 당황스럽다.

“현우씨, 제가 왜 바다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그건 제가 바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저도 그럴거라 생각했어요. 바닷가에 태어난 사람들이 보통 해산물을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나에게 친밀하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게 아니라요, 전 바닷가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났어요. 난 인어라구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귀엽지만 난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 진지하기 때문이다. 내 모든 것을 다 걸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이런 장난은 짜증이 난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이내 시무룩해 진다. “당신도 역시 그렇군요. 날 믿지 않아요.” 난 그녀의 이야기에 짜증스럽게 대꾸한다. “당연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니깐요” 그녀도 내 말에 화가 난 듯하다. “외계인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서, 인어는 찝찝한가 보죠?”

나는 그녀의 도가 넘치는 장난에 정말 화가 났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당신은 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좋아요. 정말 인어라면, 바다가 그렇게 좋다면 바다로 돌아가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온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나, 정말 당신 좋아했는데.. 정말 좋아했는데.. 당신은 날 믿지 않는군요” 그리고 그녀는 내가 사과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다. 그녀를 한참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도저히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너무 혼란스럽다. 그녀를 찾다 바닷가의 가파른 절벽 앞에 이른다. 눈앞에 익숙한 물건들이 한곳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내가 사준 옷과 반지, 시계, 구두......... 하지만 그녀는 없다. 나는 그 자리 주저앉아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핸드폰은 끊임없이 진동한다. 은행, 카드사, 사채업자, 그리고 아버지…

나는 무작정 눈에 보이는 술집에 들어가 술을 들이키며 티비를 본다. “요즘 여름이 너무 덥습니다. 연일 되는 폭염에 노인들과 아이들이 탈진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더위는 남미에서 발생한 엘리뇨현상 때문인데, 지구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조속한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다음뉴스입니다. 최근 과도한 부채문제로 인한 남성들의 자살이 급증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고급호텔, 음식점, 고가의 명품들을 사용하는데 돈을 탕진하고 부채가 감당이 안되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김진성 기자 연결합니다.

“그랬던가, 옛날 인어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배를 홀려 침몰시켰다더니, 그녀는 정말 인어였나? 내가 정말 정신이 홀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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