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먼귓의 여인

2009.07.01 23:3307.01

먼귓의 여인

1.

싸워 이겨 돌아왔음에도 웃음을 짓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돌아온 이며 맞이한 이며 모두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길에는 엎드려 통곡하는 이가 수천이었다. 통곡은 도성이 까마득한 언덕길에서 시작하여 성벽을 넘었다. 성벽을 넘은 통곡은 성 안 까지 이어졌다. 군량을 나르던 수레에 용포를 깔고 그 위에 젊은 왕의 시신을 뉘었다. 개중 몸을 다치지 않은 장수들이 그 수레를 끌었다. 젊은 왕이 태어나기도 전,  전장에서 한쪽 눈을 잃은 백발의 장수는 남은 한쪽 눈으로 눈물을 쏟아 내며 수레 앞을 걸어갔다. 눈물이 내를 이루는 도성의 신작로를 지나 궁궐 앞에 이르자 수레는 멈췄다. 장수와 병사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그곳에는 왕비가 서있었다.
왕비는 먼귓의 사람으로 처녀적 이름은 가희라 하였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눈은 운데닷의 왕자를 사로잡았다. 목소리는 차갑지만 깊고 맑았으며 웃음은 적었으나 봄볕 같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왕비의 눈은 슬픔에 가득 찼으나 눈물은 차오르지 않았다. 죽은 지아비의 시신 앞에 서있던 왕비는 고개를 들어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기고 돌아온 그대들을 마땅히 칭송해야 하나 슬픔도 함께 거두어 돌아 왔으니 애통하기  그지없소. 나라의 아비를 잃은 슬픔과 집안의 아비를 잃은 슬픔 중 그 어느 것이 더 크다 감히 말하리오. 그러니 아비를 되돌려 받은 이들은 그 기쁨을 나누어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해 주오. 나는 상을 받아야 할 이에게 상을 줄 것이며 슬픔을 가져온 이에게 위로를 줄 것이오.

이에 백발의 장수가 무릎을 꿇으며 통탄하였다.

-나라의 아비와 지아비를 모두 잃으신 왕비마마께 불충한 죄인들이 받을 위로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왕비는 용포 위에 누운 왕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대답하였다.

-나라의 아비는 한 아비가 죽으면 그 뒤를 이어 다른 아비가 서니 불사(不死)이며, 그 슬픔에 영원을 바칠 필요가 없소. 내 지아비를 잃은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 그대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지 말아주오. 나라를 지키고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불충을 묻는 것이  어찌 가당한 일이겠소. 돌아가 그대의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시오.

왕비는 왕의 시신을 궁 안으로 들여 장례를 준비하라 명하였다. 피로 물든 갑옷을 벗기고 시신을 염한 뒤 용포를 입혔다. 왕의 시신과 함께 돌아온 부러진 검이 그 옆에 놓였다. 사흘간 국상이 열리는 동안에도 왕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단지 왕의 시신 곁에 놓인 부러진 검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국상이 끝난 뒤 왕비는 상복을 벗고 왕의 어린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신하들에게 명했다. 새로운 왕은 아직 열다섯 살이었기에 왕비는 신하들에게 충정으로 그를 가르치고 보살피도록 부탁 하였다. 신하들은 아흐레 밤낮을 왕비의 궁 앞에 모여 뜻을 거두어 달라 청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그들 앞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궁으로 처음 들어오던 날 입었던 먼귓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왕비는 왕의 부러진 검을 들고 있었다.

-이제 운데닷과 나를 이어주던 내 지아비는 사라졌소. 그러나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은 아직 여기에 있소. 그러니 나는 먼귓의 여인으로 되돌아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기릴 것이오. 그대들은 슬픔을 거두고, 새로운 왕을 나라의 아비로 받들어 기쁨을 누리시오. 나는 나의 슬픔을 되돌려 주고 오겠소.

그리고 왕비는 운데닷에서 가장 빠른 말을 이끌고 궁궐을 나섰다. 신하들이 그 앞에 엎드려 묻기를

- 왕비마마. 먼귓으로 가시나이까? 험하고 위험한 사막을 홀로 건너 가시려나이까?

- 먼귓에서 태어나 먼귓에서 자란 나에게 사막은 이곳 궁궐보다도 편하오.
그대들의 심려를 모르는 바 아니나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도 나는 말 한필과 칼 한 자루가 전부였소.
왕비는 말을 궁궐 밖으로 돌려 길을 나섰다.
궁궐 밖으로 나서 도성를 가로질러가니 왕비를 알아본 이들이 길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말없이 도성을 나섰다. 왕의 부러진 검은 칼집 없이 돌아왔기에 왕비는 결혼식날 썼던 오색 명주실타래를 풀어 칼자루를 묶어 등에 메었다. 왕비는 하루와 반나절 동 안 말을 달렸다. 운데닷과 황제의 땅을 가르는 산줄기의 등성이에 다달았을 무렵에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왕비는 몸을 뉘일 곳을 찾아 산등성이를 따라 돌고 있었다. 그러다 사냥꾼이 놓은 강철 덫에 걸려 신음하는 흰늑대와 만났다.
왕비가 먼저 말에서 내려 늑대에게 다가가 다친 발을 살피며 물었다.

-먼귓의 어르신이 어찌 이런곳에 계시오?

흰늑대가 대답하길

-길을 잃은 새끼를 찾아 떠돌다 이곳으로 왔다. 보니 그대는 먼귓의 여인인데 어디로 가는가. 이 산너머는 먼귓이 아니다.
왕비는 부러진 검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 돌려주고 돌려 받을 것이 아직 있어 길을 나섰소.
-그렇구나. 과연 먼귓의 여인이로다.
왕비가 칼로 흰늑대의 발을 잡고 있는 덫을 벌려 그 발을 빼내게 하였다.
상처 입은 앞발을 본 왕비는 자신의 옷을 찢어 그 상처를 동여 매었다.
흰늑대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낯선 땅에서의 고초를 태어난 땅의 여인의 도움으로 벗어났다. 비록 발 하나가 성치 않으나 은혜를 갚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대의 길을 앞장서겠다.
흰늑대가 몸을 일으키자 왕비가 만류하였다.
-먼귓의 어르신을 뵌 것 만으로도 반가운 일이오. 어르신은 먼귓으로 돌아갈 여정을 서둘러야하나 나는 황제의 땅으로 들어 갈 것이오.
그러나 흰늑대는 왕비의 만류를 물리쳤다.
-산길은 험하여 저 말로는 넘기 힘들 것이다. 그대가 비록 먼귓의 여인이라 하나 여인 홀로  밤의 산짐승들로부터 안전 하다 할 것인가.
그 말에 왕비가 수긍을 하고 일단 불을 놓아 잠자리를 만들기로 하였다. 흰늑대가 간간히 울음 소리를 내니 사방에서 먼귓의 늑대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두 헤아려보니 그 수가 열둘이더라. 늑대들은 흰늑대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하고 다시 왕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열두 늑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 왕 비는 모닥불을 펴고 누울 자리를 폈다. 왕비를 보며 흰 늑대가 말하였다.

-듣자니 먼귓의 아비의 검을 훔쳐 운데닷으로 달아나 먼귓과 운데닷의 싸움을 끝낸 여인이 있었다 들었다.

-있었다 들었소.

-황제의 아들이 운데닷의 비옥한 토지를 탐하여 그 땅을 수차례 노렸으나 운데닷의 젊은 왕이 그 칼로 황제의 군사 수만을 도륙하였다 들었다. 젊은 왕은 육신을 떠났음에도 운데닷을 염려 하여 편히 천도에 이르지 못하였다. 내가 사막의 바람에 실려온 그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그 울음을 들었소.

-그대가 그울음을 거두러 가는가.

-그러하오.

-거두어가라. 그 곡소리가 심히 슬프다.

-고향을 버리고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40 단편 영엉방해 죄 손지상 2009.06.10 0
1439 단편 지그소 퍼즐 손지상 2009.06.10 0
1438 단편 어떤 만남에 대한 우연한 도청에서 발췌 g.codec 2009.06.11 0
1437 단편 생명의 나무7 라티 2009.06.16 0
1436 단편 모모지세 니그라토 2009.06.16 0
1435 단편 사흘, 한 달, 더 많은 시간 - 더글라스 라이트 안지형 2009.06.19 0
1434 단편 ㄱ 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湛燐 2009.06.22 0
1433 단편 쭈꾸노미야키 湛燐 2009.06.22 0
1432 단편 시간. 강성훈 2009.06.22 0
1431 단편 사반트 후작국 니그라토 2009.06.23 0
1430 단편 망각의 폐교, 그 위를 기는 광기 씩꼬델리이꼬 2009.06.24 0
1429 단편 옆 칸 남자1 몽상가 2009.06.25 0
1428 단편 망령5 하엘 2009.06.27 0
1427 단편 하나를 위하여 세이지 2009.06.28 0
1426 단편 차기 정권 수립 후 좀비化 바이러스 살포 및 경영 합리화에 대한 보고서 dcdc 2009.06.30 0
단편 먼귓의 여인 룽게 2009.07.01 0
1424 단편 죽음의 무도2 메이 2009.07.03 0
1423 단편 정신이 홀리다.2 피러휀 2009.07.04 0
1422 단편 루시의 이기적인 몸매9 김몽 2009.07.08 0
1421 단편 카르마 쥔님 2009.07.09 0
Prev 1 ...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