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하나를 위하여

2009.06.28 21:5806.28

1.

이것은 평범한 사랑 이야기다.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그날 무용실에서부터였다.
그때 우리는 어린애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좀 굵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논리적이지 않은 16세였다. 그녀는 눈이 크고, 까만 눈동자의 사슴같은 여자아이였지만 남자아이처럼 빡빡 깎은 머리에 굴곡이 없는 몸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눠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때 나는 그 아이와 내가 같은 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요즘말로 하면 중2병이라고 할까...우리는 어른들보다 더 똑똑한 구석이 우리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그 아이를 돌아보면 그 아이는 나른한 표정으로 뭔가를 그리거나 긁적거리고 있었다. 까만 그 눈동자에는 수업시간에 대한 한줌의 열의도 없었다.
나는 그 눈동자가, 답답한 교실에 매여있는 우리들을 대변하는 것이라 믿었다.
가끔 한숨처럼 그 아이의 자리에서 “지겨워...”라는 말이 흘러나오곤 했다.
우리는 몰랐다. 그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짐들이- 그러니까 나이가 더 들면 또 치르게 될 대학입시라던가, 취직이라던가 하는 것 말이다.-당시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완제품이며, 과오이며, 그들의 잘난 척 때문에 생각했을 뿐이었다.
여튼 간에 나는 그녀와 같은 반이었기에 시험을 칠 때 그녀의 옆자리에서 시험을 치기도 했고, 음악시간에 그녀가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녀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저 예쁘다고, 그녀가 똑똑하고 나를 제외한 무리들과 뭔가 다르다고 인식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 아직 어렸고, 세상에는 어설픈 동경보다 더 눈을 끄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방과후 무용실에서 춤을 추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없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철저한 무음 속에서 그녀의 긴 다리가 허공을 가르고, 팔이 우아하게 선을 그었다. 훗날 그녀와 자리를 같이 한 후 그때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내 중력은 거꾸로 뒤집혔고 가슴이 갑자기 가빠왔다.
난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2.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도 나는 그녀를 뻣뻣하게 대했다. 어떻게 대할지 몰랐던 탓이다.
사람들은 소년에게 소녀를 사랑할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빡빡한 학생의 일상에 그것은 하나의 문제거리와도 같았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고등학교 입시가 남아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할까 끙끙거리는 동안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녀가 학교에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참으로 명쾌한 해결방법이었다. 문제를 풀려는 사람앞에 놓여진 시험지 자체가 없어진 것이었으니까.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고 훗날 변명거리를 하나 만들어놓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결국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런 변명거리도 못 만들었을 거라는 것을.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그녀가 평소에 학교생활에 전혀 열의가 없는 아이였다면서-그러는 본인들은 얼마나 열의있게 학교를 다녔는지 의문이다. 입만 열면 선생들 욕을 하고, 어떤 짖궂은 녀석들은 여선생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장난을 쳤으니까.-아마 불량친구의 꾐에 빠져 가출했거나, 임신해서 중절수술을 하러 갔다는 등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이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데에야 남자아이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녀의 뒷 이야기가 마치 으슥한 뒷골목 이야기인것처럼 흐르는 동안 동급생 중 한명이 불치병으로 사망했다. 그 이야기가 워낙 비극적이라,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에 묻혀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녀의 뒷자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잊혀질 때쯤 그녀의 부모가 와서 자퇴수속을 밟았다.
그녀는 그대로 학적부에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출석부에 지워진 그녀의 이름을 나는 한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3.

훗날 그녀의 흔적이나마 찾게 된 건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가 주말에 무용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쯤 나는 그녀에 대해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에 손을 댄 채로 우아하게 선을 그리던 그녀의 쭉 뻗은 다리와 꼿꼿한 등. 야무진 손동작.
그 강렬했던 모습들은 가끔 추억에서 빛바랜 채 불려나왔을 뿐, 더 이상 내 마음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하나의 흑백사진과도 같았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때의 그녀는 그저 밋밋한 소녀였고, 내 눈앞에 선 여자친구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연인과 함께 차를 마시거나, 그녀의 무용수업 후 차를 몰고 함께 드라이브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썼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연인은 수업시간에 배운 동작을 내 눈앞에서 한번 더 보여주고 함께 나서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좀 특이했다. 연인은 동작을 끝내고 나서 잘 하지 않던 이야기를 했다.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춤을 너무 잘 춰. 멋져.”

처음에는 학원에서 심어놓은 삐끼가 아닌가 했다는 것이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물을 넘겼을까 하는 여자인데 너무나도 능숙하게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누구한테 물어봤더니 다들 모른다는 거야. 예전부터 이 학원에 다니던 사람이 아니래. 최근에 본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선생님도 그 사람은 얼마 전에 봤다고 했어. 그런데 놀라운 건...이 학원에 등록한 지 3개월만에 프로로 데뷔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야. 물론 주역은 아니고 군무지만.”

연인은 토슈즈(맞나? 나는 그런 걸 잘 알지 못한다.)를 벗어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세상이란 참 이상하지? 그렇게 잘 추는데도 안 한다는 거야. 나라면 그런 제의 들어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텐데.”
나의 연인은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 내 여자친구는 지금 생각해봐도 어쩐지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서라. 데뷔하는 게 그렇게 쉬워? 밥벌이가 그렇게 쉬우면...”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활기차게 떠들던 연인은 입을 이내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에 심취하느라 누가 들어왔는지도 잘 몰랐다. 앞으로 척척 걸어가는 쭉 곧은 다리를 보고서야 나는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다리였다. 그 다리에 정신을 팔았던 게 들켰던지 그 다리가 자리를 떠난 뒤에 심하게 꼬집혔다.

“아야.”

꼬집히고 나서야 그 다리가 사라진 걸 깨달았다.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처럼 나갔던 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흥! 한눈이나 팔고.”

“...내가 언제 한눈 팔았다고.”

“어쨌든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확실히 눈길을 끌지? 정신 못 차리고 쳐다보더라?사람들이랑 별로 말도 안 해. 하긴 조금 별난 것 같기는 하더라.”

“왜?”

“데뷔를 왜 안할 거냐고 단장이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무용도 전문적으로 한 적이 없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무엇보다 저는 싫은 건 참을 수가 없어요...라고.”

그제서야 나는 그 쭉 곧은 다리의 그녀가 누군가를 연상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4.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애인과 결별했다. 열정이 넘치고 배우는 걸 좋아하던 그 여자는 자신의 실력보다 더 앞서나가는 사람들을 직장에서 만나자 초조하게 생각했다.
나는 애인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차분히 쌓아가며 살기를 원했기에 우리 두 사람간의 심리적 골이 점점 깊어졌다. 애인은 내가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기를 원했지만 역시 직장 1년차인 내가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입사 2주년, 연애 5주년 기념일에 헤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별장소에서 서로 커피를 쏟아 붓지도, 물을 퍼붓지도, 뺨을 때리지도 않은 채 헤어졌지만, 정말 비참한 오후였다.

“왜 헤어지자는 거야?”

“......”

옆자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보다.
작은 소도시인만큼 누군지 알려고 하면 금방이다. 하지만 나는 연애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굳이 누군지 추리하지 않기로 했다.

“말을 해봐. 거짓말 하는 거지. 너도 날 좋아하잖아.”

실연의 멜로 드라마. 나의 실연과 또 다른 사람의 실연이 조리되어 나오는 훌륭한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좋아해.”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건조한 목소리.

“그런데 대체 왜!”

“싫어.”

여자가 대답했다.

“지금은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싫어지겠지. 그리고 난 시어머니라는게 생기는 것도 싫어. 싸우게 되잖아.”

“시작하지도 않으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아냐, 결정났어.”

여자가 간단하게 말을 잘라버렸다.

“너, 내가 긴머리가 좋다고 하니까 머리도 길렀잖아. 내가 화장이 조금 진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그렇게 했잖아. 넌 내가 그렇게 좋았잖아! 아님 날 가지고 놀았던 거야?”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한동안 씩씩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 비슷한 걸 그녀에게 집어던지고는 나가버렸다.
여자는 그걸 물끄럼이 보는 것 같더니 조용하고 지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또 미용실 가야겠네...”

마치 커피가 엎질러졌네...라고 말하듯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

첫 번째 연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나 자신에게 활력을 주기 위해서 주말 바리스타 과정을 등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번째 연인이 된 지윤이를 만났다.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 전부터 계속 내 연인들을 그냥 연인들이라고 부르거나, 첫 번째 애인, 두 번째 애인 혹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녀]라고 지칭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사람은 없었다.
지윤이는 첫 번째 여자하고는 달랐다.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소심했고, 민쌍꺼풀이 독특한 미를 부여했지만, 다리만큼은 씩씩한 무다리였다.
나는 지윤이가 그 듬직한 다리로 버티고 서서 손님에게 낼 에스프레소를 담거나, 따끈한 우유크림으로 장식하는 것을 마치 예술품을 감상하듯이 아껴보곤 했다.
지윤이는 전문 바리스타가 되고 싶어했고, 나는 그때쯤에는 밀고 당기는 연애를 청산하고 싶었기 때문에 종종 아침시간에 나만의 바리스타로 지윤이가 모닝커피를 타주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성차별이라고 항의하면 어쩔 수 없다. 내 솔직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결혼하자.”

지윤이의 튼튼한 무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그다지 로맨틱하지 않은 청혼을 했다. 첫 번째 애인이었다면 아마 이런 청혼에 질색팔색을 하면서 제대로 교육을 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여자를 보는 눈만큼은 정확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들은 남과 비교하기를 즐긴다. 그런 여자와 살면 연애도, 삶도 피곤하다. 내 첫 번째 연애가 깨어진 건 그것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윤씨.”

“응?”

소심하긴 해도 지윤이의 목소리는 항상 밝았다. 하지만 프로포즈에 답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했나? 겁이 덜컥 들었다. 너무 편한 맘으로 해서 상처받았나?

“사람이 있잖아...”

“응."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너무 잘 해도 안되겠지?”

“아냐. 그렇게 잘 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게 적당히 긴장감도 있고...”

지윤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응.”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뭐...라고?”

지윤이는 갑자기 등을 쭉피더니 정좌를 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윤이가 정식 바리스타가 되어서 일을 하는 카페에 머리를 민 여자가 들어와서 일을 하더라고 했다. 도대체가 서비스업인 바리스타가, 승려도 아니고, 여성 격투가도 아닌데 머리를 빡빡 깎은 게 이상해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 두상이 또렷한 얼굴이라 그런지, 손님들에게는 조금 별난 바리스타로 인식되어서 인기도 나름 끌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본인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는지 치렁치렁한 긴머리 가발을 쓰고 일을 하더란다.

“그 손가락이...그 커피 맛이...”

열변을 토하는 지윤이.

“대강대강 하는 것 같은데 커피 맛이 우리 점장님보다 더 나은 거야.”

그리고 운 나쁘게도 내가 청혼을 한 날이 바로 그 바리스타가 그만두고 나간 날이었다. 는 이야기였다. 충격을 받은 점장은 가게문을 닫는다고 해버렸고, 역시 자극을 받은 다른 바리스타들까지도 유학을 가겠다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유학가기로 했어.”

기다리라고...? 마음의 준비도 벌써 다 끝마쳤는데?
나는 암담한 표정으로 내 앞에 떨어진 시한폭탄을 바라보았다.
그 빡빡머리를 저주한들 뭐가 달라지랴. 내 눈이 잘못된 것을...

“알았어...근데 왜 그만둔거래?”

“싫은 건 더 이상 참기 싫대. 긴 머리가 싫은데 계속 긴 머리로 있으려나 거추장스럽대나봐...천재들은 가끔 그런 모양이야?”

6.

첫 번째 사랑, 두 번째 사랑도 물 건너 보내버리고 나는 미신과도 같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무슨 연애를 하건 간에 나는 [싫은 게 생기는 게 싫으니까.]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연애가 깨지는 운명이라고.
이직을 했다. 이작하는 과정 중에 헤드헌터들은 내 안이한 경력관리에 쓴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날 소개시켜주었다. 자잘한 소음이 있었지만 무사히 전직.
그런 연애의 아수라장을 겪고 나는 어느새 서른 중반이 되어 있었다.
대기업의 자회사이지만, 연구부에 가까운 회사인지라 분위기는 일반 중소기업과 유사했다.
팀장이 된 나는 좀 딸리는 회사에서 온 경력직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나는 어쨌든 비리비리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헤어진 첫 번째 연인에게는 배울 점이 많았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사장실의 비서에게 접근했다. 이름은 잘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내게 득을 보여줄 사람이었다. 희고 단정한 이목구비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넘긴 그녀는 말 수가 적고 조용한 여자였다. 비서치고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사람들 평에 의하면 유능하고, 성실하고, 깍듯하다는 평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들어오기 전 경력이 일반 회사와는 맞지 않는데다가 중구난방이었지만, 회장의 눈에 들어서 들어왔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회장이 미는 인재라는 이야기였다.

“시간 있어요?”

퇴근 후 가볍게 식사나 하자는 내 제의에 그녀는 힐끗 날 보더니 거절했다.

“오늘은 좀 바쁘네요. 미용실에 가야하거든요.”

내가 여자들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게 바로 미용실 간다는 이야기이다.
거절당한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핑계가 왜 미용실이란 말인가?
매일매일 미용실에 가면 뭔가 달라진단 말인가?
더더군다나 파마머리도 아니고 생머리잖아!
어떻게든 그녀와 친해져서 사장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려고 했는데...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적인 자리에서 너무 도도하다고 불평하긴 했지만 공적인 일에서 그녀는 언제나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장님 이하 기획실의 프레젠테이션 일정을 잡으러 가면 그녀는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항상 그렇듯이 미장원으로 가서 다듬을 것도 없는 머리를 다듬었다.

7.

그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사장이  어느 날 전직원 회식을 제안했다. 나도 그때쯤에는 운좋게 들어온 경력직이라는 딱지를 뗀 터라, 술자리도 마음 편하게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분위기가 좋은 회사였다. 말이 대기업의 자회사이지(회장의 아들이 바로 이 회사 사장이었다.)중소기업 정도의 이 회사는 굉장히 분위기가 좋은 회사였다. 물론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건 사고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말~달리자!!! 말~달리자!!!”

알기는 알고 노래를 부르는 건지. 음정, 박자 다 틀리는 노래를 사장이 신나게 불러 제끼는 동안 우리는 탬버린을 흔들어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흥에 겨운 제 2팀장이 옆에 있던 그녀의 팔을 잡아챈 건 순간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대리 몇이 그녀를 둘러싼 채로 탬버린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와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팀장이 그녀의 양팔을 잡고 볼에 쪽하고 뽀뽀를 했다.
너무나도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굳어있더니 팀장을 있는 힘껏 밀어버리고는(팀장이 술에 만취했던 터라 밀자 바로 쓰러져버렸다.)노래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오해했다고 말해주기에는 저 세 사람이 한 행동은 조금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선량한 의도였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만취한 채로 뻗어버린 세 사람을 발로 툭툭 찬 후에 노래방을 빠져나왔다.(왜 사고를 쳐놓고 뻗어자는걸까?)
사장님은 여전히 말달리기, 소달리기에 심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노래방을 나와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에 신던 하이힐이 아니라서 그런지 정말 잘 달렸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육상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쉽게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뭘 그것까지고 삐졌어요?”

너무 숨이 차서 심통이 났다.

“악의가 없는 거 알잖아요.”

기분 탓인가, 그녀의 머리가 헝클어져서 길게 늘어진 것 같았다.

“직장 생활 어디 한 두번 해요? 여기가 첫 직장도 아니라면서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사람이 왜 그래요? 뛰쳐나가면 어디 갈 곳이나 있어요? 술 취한 사람들이다. 그냥 내일 좋게 이야기하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렇게 뛰쳐나가버리면 그 사람들 다 나쁜 사람들 되잖아요.”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정돈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들어가요...”

“......”

그녀가 뭐라고 말한 것 같았다.

“아님, 지금 어디 다른데 갈 데 있어요?”

“미용실.,”

그녀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미용실에 가려고 했어요. 머리가 너무 엉망이라서.”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예전의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8.

우리는 그 이후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가 회장의 며느릿감 중 하나라는 소문도, 그녀를 2팀장이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은 직장이라도 사내연애는 독이다. 더더군다나 요즘은 예전처럼 사내 분위기가 좋지도 않았다. 사장이 독한 맘을 먹고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승진하지 못한 몇몇 팀장이 사내를 곧 나가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와중에 사내연애라니...
그건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것이 지금만의 감정인 것인지, 아니면 중학 시절 알게 모르게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그 특별한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그녀는 조금 변한 것 같았다.

[미용실에 가려고 했어요...]

[머리가 헝클어지는 게 싫어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는 미용실로 달려갔다. 앞서 사귄 꿋꿋한 두 여자의 생기를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전의 그 특별한 느낌은 착각이었다...

“나윤씨 안녕. 오래간만이야.”

오래간만에 걸려온 첫 번째 애인의 전화.

“잘 지내고 있어?”

“응. 수현씨도 잘 지내고 있어?”

“아, 이번에 계장으로 승진했어. 이직했었다면서?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보람있겠더라. 요즘 그 회사 잘 나간다면서.”

자잘한 잡담. 그리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

“나 결혼해.”

“그래...”

“청첩장 보낼 테니까 꼭 와야 해? 지금 애인 있으면 애인도 데려오고. 내가 부케를 그쪽한테 던질 테니까.”

그 뒤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지윤이가 전화를 했다. 튼튼한 무다리로 버티고 서서 찍은 라떼 아트였다.
오후에 약속된 데이트 장소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미용실행이었을 것이다.

[요즘 사장 심기가 좋지 못하다더니 그것 때문에 미용실로 간 건가...]

결국 나는 바람을 맞았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면 그냥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뭔가 할 말이 많았다.

“......”

11시가 되어서야 그녀가 집에 도착했다. 까만 모자를 머리에 쓴 채로.
저녁도 못 먹고 기다렸는데, 새로 산 모자까지 쓴 채로 들어오다니. 잠시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어딜 갔다오는 거야?”

목소리가 좀 커졌다.
[참아. 넌 그녀의 애인일 뿐이잖아. 남편도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해야 해?”

“또 미용실이야? 핑계를 대려면 적당하게 대! 맨날 머리 손질한다면서 머리형은 바뀌지도 않잖아! 미용실 핑계대고 어떤 놈팽이를 만나고 있는지 내가 알게 뭐야!”

나는 그녀의 모자를 벗기려고 했다.

“미용실을 갔다오면! 적어도 모자는 쓰지 않잖아. 안 그래?”

그녀는 결사적으로 내 손을 막았다. 나는 억지로 그녀의 모자에 손을 대면서 그녀를 밀었다. 그리고...

“이제 속 시원해?”

그녀가 울었다. 가로등 밑에 드러난 그녀는 민머리였다.

“뭐야...너! 왜 갑자기 머리는 밀고 그래!”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방울, 두방울...
그리고 지금 내가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그녀의 머리카락도 한올 한올 마치 뱀이 흘러내리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내 바닥에 닿을 만큼 길어지더니 조금씩 그녀에게서 물러난 내 발밑까지 닿았다.

“뭘 봐!”

그녀가 화를 냈다.

“너...”

“잔말 말고 가방에서 가위 꺼내 줘. 너무 길면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그녀가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처음으로 연 그녀의 핸드백에는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모든 종류의 제모기가 있었다. 눈썹깎이, 제모크림, 미용사들이 쓸 것 같은 전문적인 가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들은 잘라 주었다.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그녀는 가방과 모자를 챙기고는 뱀처럼 사라져버렸다.

9.

우리는 그 뒤에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그녀에게서 별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 이게 끝인 것 같아.”

그녀는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다. 손끝에 얼마 전 내가 선물한 커플링이 반짝였다.

“난 정말 널 사랑했던 것 같아.”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정말 싫었어. 어디든지. 직장생활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어. 조금만 싫은 일이 생기면 항상 그 문제가 생겼으니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했어. 어릴 때는 그래도 괜찮았어. 부모님이 계셨으니까. 부모님은 내 문제를 알고 있으니까.”
“......”

“학교도 네가 있어서 좋았어.”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수업시간에 네가 항상 날 쳐다보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 나는 널 참 좋아했는데. 하지만 병이 시작되니 장사 없더라...”

“미안해...난 그런 줄도 모르고...”

“부모님이 언제까지나 살아계시는 것도 아니고, 난 아직 남들 보기에 건강하니까. 그래서 병이 생기고 나서, 취업할 자리를 찾아다녔어.”

그녀는 더 이상 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젠 확실히 알았어.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었을 일이니까. 그래, 이젠 사람하고 부딪히지 않는 일을 찾아봐야겠어.”

“......”

“춤도 너무 좋았어. 커피도 너무 좋았어. 비서일도 너무 좋았어. 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조금만 싫은 일이 생겨도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어버려.”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이 고백을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너무 싫은 일일 것이다. 나는 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때 너도 알지? 그 소문.”

쓸쓸하게 그녀가 말했다.

“어느 날 시험을 되게 못 친 날, 하나님한테 기도했어. 학교 가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다음날, 내 머리카락이 온 집을 가득 채웠어...너무 무거워서 일어나지를 못하겠더라. 그때가 되어서야 난 알았어. 내가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었는지, 남들이 하던 것처럼 일하고 싶었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그녀가 말했다.
아냐, 난 알아.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다.

“널 좋아했었어.”

나는 겨우 입을 떼서 말한다.

“그래, 나도. 널 좋아했었어.”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는 커플링을 빼서 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카페를 나왔다.
나는 신호등을 건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조금은 우는 것처럼 구부린 어깨 사이로 머리카락이 조금씩 길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우리의 이야기는 정말 평범한 그런 사랑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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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하나와 앨리스]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야기입니다.
제목도 [하나를 위하여]지요.
이름은 안 나오지만 주인공의 [그녀]이름이 하나거든요.
물론 실제로 이미지를 사용한 건 [하나]가 아니라 [앨리스]가 종이컵을 이용해서 만든 발레 슈즈를 신고 춤추는 장면을 따왔지만...;;;;;;;
잡설이지만, 아오이 유우가 춤추는 장면 너무 예뻐서...T.T
그 밖의 모티브는 고구려의 머리카락이 치렁거려서 이뻤다는 관나 부인과, 옛날에 TV에서 본 발모제를 발랐다가 머리카락이 끝없이 길어졌던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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