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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망령

2009.06.27 20:2506.27

“모사(模寫)의 원리가 실재(實在)의 원리를 압도한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오래전에 없어진 길을 찾아가며 걷다 보니, 결국은 밤이 다 되어서야 괴텡겐에 도착했다.

천천히 계곡 사이로 난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섰다. 문득 불어온 괴텡겐의 겨울바람은 황량했다. 그 서늘함에 재차 옷깃을 여미고는, 비에 젖어 검게 물든 낙엽을 밟는다. 흉한 마을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낡은 목조건물들은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나무바닥에는 잡초가 올라와 있었고, 먼지 쌓인 지붕은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괴텡겐에는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 괴텡겐이라는 다소 묘한 어감의 시골마을은 비록 뢰버크공국 최북단, 그것도 르겐산맥 끝 자락에 있음에도 뛰어난 경관 덕분에 한때 귀족들의 휴양지로 개척되던 번화가였다. 그러나 원인 모를 기괴한 사건들과 흉흉한 소문들에 의해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마을이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괴텡겐은 비참할 정도로 황량한 모습이었다.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오래전 여관이 있던 곳으로 과거의 기억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예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이제는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낡은 여관건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지 않아 차갑게 식은 그 허름한 석조건물의 입구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남자는 순간 멈칫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여관 입구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늙은이 하나가 구부정한 자세로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그 얼굴은 남자가 오래전 익히 알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늙은이의 모습은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았다. 홀연히 나타난 늙은이는 떨리는 입을 열어 남자에게 말했다.

“결국은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다네, 하엘.”

“……그렇습니다, 귄터 영감님.”

늙은이 귄터의 말에 하엘이 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여관을 향해 다가갔다. 늙은이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하엘은 자신의 몸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갸름하고 주름진 얼굴, 그 위에 엷게 그려진 싱거운 미소,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왼팔과 구부정한 허리. 오래전 기억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눈앞에 서 있는 늙은이의 모습에 하엘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르신께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그 말에 귄터는 싱겁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전의 귄터도 꼭 저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하엘은 고개를 숙여 새삼 귄터의 나이를 생각해보았다. 십 년 전 귄터의 나이는 이미 여든을 넘었었다. 그런데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건…….

“이것도 목걸이의 능력인가요?”

우연이었을까. ‘목걸이’라는 단어를 말한 것과 동시에 늙은이는 등을 돌려 여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늙은이는 등을 돌린 채로 하엘에게 말했다.

“자네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상태인 것 같나.”

그 말에 하엘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늙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늙은이의 구부정한 허리는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십 년 전 헤어질 당시에도 입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늙은이의 새까만 니트 티에서 느껴지는 그 선명한 명암은, 온통 흐릿하기만 한 이 황폐한 마을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늙은이 홀로 이 마을과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영감님께서 지금까지 살아계시는지 아니면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여기 계신 영감님께서는 실재(實在)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허상(虛像)이 아니겠습니까.”

어디선가 풍경이 울린다.

그 말에 귄터가 고개를 돌렸다. 하엘은 자신을 향한 귄터의 얼굴을 보았다. 파리한 형상이었다. 귄터는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어 여관 문 위에 얹었다. 다음 순간, 하엘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늙은이가 손을 더 밀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문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들어오게나.”

늙은이가 살짝 고개를 돌려 웃으면서 말했다. 하엘은 입술을 깨물고는, 천천히 여관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관으로 들어가자, 온통 먼지투성이에 난장판인 식당이 보인다. 탁한 공기로 가득한 식당 여기저기에 거미줄과 먼지가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가구들이 온통 박살이 나 있는 식당 한가운데 홀로 멀쩡한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에는 귄터 씨와 또 다른 익숙한 지인이 함께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짧게 깎은 거구의 노인. 그의 옆에 놓인 거대한 크기의 도끼가 익숙하다.

“……자크 씨도 계셨군요.”

“이리와 앉게.”

기억 속의 그 울림에 하엘의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십 년 전 예순이었던 자크 페레르 또한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정정한 모습으로 하엘의 눈앞에 앉아있었다. 눈앞에서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는 그 생생한 이미지에, 하엘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180파운드가량의 술통도 거뜬하게 들어 올리던 자크의 거구와 팽팽한 팔뚝이, 그때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변화 없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분명히, 자크는 눈앞에 ‘실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하엘은 그대로 선 채 자크에게 말했다.

“‘진짜’ 자크 씨는 잘 계십니까?”

“죄책감에 시달리며 부질없는 생을 연명한다. 아마도, 자네와 재회할 일은 영영 없겠지만.”

무심한 듯 내뱉는 자크의 말에 하엘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하엘의 눈앞에 있는 자크는 분명히 실재한다. 그러나 진짜 자크는 아닌 것인가. 비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는 또 다른 존재였다.

하엘이 목이 마르단 것을 알아챈 자크가 천천히 자신의 앞에 있던 맥주잔을 그에게로 밀었다. 하엘은 맥주잔에 담겨 있는 맥주를 보았다. 천천히 맥주잔을 손으로 잡아본다. 마을 어디에도 없을 것이 분명한 냉동고에서 방금 꺼낸 것인 양 차갑고 시린 감각에 손바닥이 얼얼해진다. 하엘은 잠시 주저하다가 느릿느릿 맥주를 들이켰다. 이가 깨질 것처럼 차가운 맥주에 갈증이 금세 사라지는 느낌이다. 하엘은 깨끗이 비운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 맥주잔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하엘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짓누름을 느끼면서, 의자에 앉았다.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두 늙은이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하엘은 진짜 사람과 함께 앉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는 자네는 왜 이제야 돌아왔는가.”

귄터의 반문에 하엘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대답은 그의 안에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두려움.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워서, 믿을 수 없었다.

“저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떠났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지 수년……. 괴텡겐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지, 수년이 흘렀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해를 입은 그 세월 동안, 자네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채 살아왔지.”

“그것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 목걸이. 그 목걸이를 가진 것이 자네의 잘못이네.”

귄터는 손가락을 들어 하엘의 목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목걸이를 가져간 자네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네. 자네가 그 목걸이를 버렸다면, 이런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겠지.”

욕심이라는 말에 하엘은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그 오른손을 목에 가져가 주먹을 쥔 채로 말했다.

“……그녀가 남긴 물건을 보관한 것이 그렇게나 큰 욕심이었습니까?”

“그 목걸이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데서 자네의 운은 이미 다한 것이네. 그 어떠한 의미로나, 자네는 어리석었네.”

귄터는 날카로운 눈으로 하엘을 노려보았다. 자크는 그러한 두 사람을 묵묵히 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도, 그 목걸이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는 변명은 하지 못할 것이다.”

목걸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이 목걸이 때문에 수없이 괴이한 일들을 겪어왔다. 이번 괴텡겐 사건조차 그의 예상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목걸이의 능력에 관해 몰랐다는 핑계는 될 수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믿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을 겪어왔다.

“……이것은 소망을 이뤄줍니다.”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기억까지도, 심지어는 망상마저도 이루어주지.”

귄터는 한숨을 푹 쉬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언급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네. 기억에 뒤처진 존재라면 더욱더.”

기억에 뒤처진 존재. 그 말이 하엘의 가슴으로 날아와 콱하고 박혔다.

그렇다. 그는 기억에 뒤처진 존재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십 년 전 기억 속에 살고 있었다. 하엘이라는 사람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못했다. 눈앞에 앉아있는 귄터와 자크처럼, 그 역시 십 년 전 사람이었다.

하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붓을 먹에 찍어 그리듯 선명한 인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게 늘어뜨린 화이트블론드의 머리카락, 자그마한 입술, 가녀린 손. 그리고 그 손을 잡았을 때 전해지던 따스한 온기까지.

금세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녀는 오로지 그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존재였다.

눈을 다시 뜨는 순간, 우연히도 반대편 창문을 통해 마을 뒤쪽에 있는 거대한 검은 숲이 보였다. 어둠숲이다. 망자들의 숲. 그때나 지금이나, 저곳은 여전히 죽은 자들의 영역이다. 지난 십 년간의 모든 악몽이 바로 저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때의 악몽들이 새삼 되살아나,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엘은 천천히 귄터와 자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하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결국, 이 모든 일은 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다만, 깨닫는 것조차 두려웠던 것이다.

깨닫는 순간, 기억 속에서조차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으니까.

“어찌 된 일인지 알려주십시오.”

아직 괴텡겐의 일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다.

“모든 것은, 그 목걸이로부터 비롯되었네.”

아직도 여운이 담겨 있는 귄터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해왔다.

“그녀를 떠나보내고서도, 자네는 계속 그녀를 생각해왔지. 그것은 단지 떠나간 그녀를 그리는 추억만은 아니었네. 거기에는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은연중에 담겨 있었네.”

“그리고 그 목걸이는…….”

다시 한 번 자크가 무거운 입을 열어 말했다.

“망상마저도 이루어준다.”

어디선가 바람이 흘러들어와, 하엘의 팔을 감쌌다.

하엘은 문득 주위가 어두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걸이는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거기에는 어떠한 기준도, 한계도 없네.”

“너는 그 일이 있고서, 언제나 그녀를 추억해왔다. 지금도 네 머릿속에는 그녀의 존재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목걸이는, 네가 바라는 것을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우리 역시, 목걸이가 자네의 추억을 비춘 것에 불과하다네.”

목걸이는 소원을 들어준다. 거기에는 기준도, 한계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상입니까, 실재입니까?”

“모사(模寫)의 원리가 실재의 원리를 압도한다.”

귄터는 진중한 눈빛으로 하엘에게 말했다.

“목걸이로부터 파생(派生)된 이미지는 비록 그 존재바탕은 허상에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실재보다 더 실재다운 것이지. 오히려 그것은 실재마저도 초월하는 존재라네.”

“실재를 모사한 허상이라면, 영감님께서는 어떻게 여관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겁니까?”

“목걸이 앞에서 실재와 허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목걸이의 파생 실재는 볼 수 있고, 맡을 수도 있으며, 만질 수도 있는 실재 그 자체다.”

그렇게 말한 자크는 하엘을 향해 검지를 들었다.

“만져보겠는가?”

하엘은 눈앞에 뻗어진 자크의 검지로 초점을 모았다. 뭉툭하고 갈라진 손톱, 그 밑에 단단히 박힌 굳은살, 손등 위로 송송히 나있는 솜털, 손가락 마디마다 깊게 갈라진 주름. 하엘의 눈앞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살아 숨 쉬는 자크의 손가락은 결코 이미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였다.

“아뇨. 됐습니다.”

의외라는 듯 자크는 천천히 들었던 손을 내렸다. 하엘은 천천히 귄터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여관 문을 여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습니다.”

그 말에 귄터는 떠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침을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목걸이는 자네의 기억에 남아있던 그녀의 이미지를 실재로 만들었네. 처음의 그녀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실재와 같은 이미지로서의 파생 실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하지만, 너는 지난 십 년간 그녀만을 그리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네게서 그리움, 슬픔, 아픔, 분노, 원망의 감정을 먹고 자라났다.”

“지금의 그녀는 모든 것에서 실재를 능가하는, 진정한 초 실재가 되었다네.”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침통한 표정으로 하엘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안식을 취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귄터는 비정한 얼굴로 하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목걸이를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충분히 깨닫고 있겠지?”

하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는 이미 귄터가 무슨 말을 할지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네. 그녀를 파괴하거나, 자네 자신을 파괴하거나.”

목걸이는 파괴할 수 없다. 목걸이를 버린다 해서, 그것이 하엘의 기억과 목걸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목걸이로부터 파생된 그녀는 결코 그런 식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방법은 두 가지이다.

계속해서 목걸이로 하여금 그녀의 파생 실재를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머릿속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녀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그녀를 기억조차 할 수 없도록 하엘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것.

“자네를 파괴한다면, 목걸이는 더는 자네로부터 기인한 모든 파생 실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네. 그녀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목걸이로부터 기인한 파생 실재로서의 그녀를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자네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지운다는 것이 되겠지.”

결국은 어느 쪽이 되어도, 하엘은 스스로 죽은 것보다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녀의 기억조차 없는 그의 존재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목걸이로부터 파생된 실재는, 목걸이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실재를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녀를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이지.”

자크가 도낏자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 얼굴에는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실재보다 오히려 더욱 실재 같은 그는 하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자네의 기억 속에서 그녀가 살아있는 한 자네의 기억은 목걸이로부터 또 다른 그녀의 파생 실재를 만들어낼 테니까. 결국, 유일한 문제 해결방법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네 스스로 그녀의 파생 실재를 파괴하는 것뿐이지.”

그렇다. 결국은 하엘 스스로 그녀의 존재를 지워 버려야 한다.

사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수년 전부터 이곳 괴텡겐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네. 물론 그 유령은 바로 그녀였네. 물론 그녀는 물질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의 단순한 결집으로서의 유령과는 달리 초 실재로서의 진짜 몸을 가진 채로 이 마을을 배회해왔네.”

“그녀는 너를 찾았다.”

자크의 음울한 음성이, 하엘의 귓전을 따갑게 때렸다. 하엘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떨고 있었다. 떠난 줄 알았던 그녀는, 지난 십 년간 그를 찾아 헤매왔던 것이다. 물론 하엘 역시 그녀를 그리어왔다. 그러나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녀와 재회하는 날이, 그녀와의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심이 섰는가.”

하엘이 괴텡겐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대답이 될 물음을, 귄터는 굳이 물어보았다. 그것은 하엘의 결정에 확답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엘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여관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귄터와 자크는 탁자에 앉은 채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엘이 여관 문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오직 진실만을 기억하게.”

등 뒤로부터 귄터의 무거운 울림이 하엘의 귓가를 울렸다. 하엘은 뒤돌아선 채,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물었다.

“무엇이 진실인가요?”

“그녀가 없다는 것.”

그 말에 하엘은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탁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맥주잔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하엘은 자신의 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목이 타는 듯이 말라온다.

끼이이익.

여관 문을 밀어젖히고서, 하엘은 희미해진 괴텡겐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음습한 안개에 싸여, 이제는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별할 수 없다.

마을 입구의 다리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부드러운 화이트블론드의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가운데 장밋빛으로 물든 뺨.

작은 입술. 그리고 가느다란 목선.

마지막 날, 그녀가 입고 있었던 새하얀 드레스.

그 옛날 우연히 마주쳤던 십 년 전 그날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스물다섯 살의 아세스 플뢰베르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오래전에 죽어 바스러진 줄로만 알았던 옛 기억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사하게 되살아났다.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십 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되살아난 그녀의 모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문장력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그 자신의 화술을 원망했다. 그가 사줬던 그 옷을 입고 그렇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입술을 물어 삼키며 터지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하엘, 왔구나.”

뭐라도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이 메어서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끝없이 내리는 안개비 속에서, 그의 앞에 선 채로 예의 그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녀 앞에서, 하엘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기다렸어.”

지난 세월 보잘것없는 삶을 연명해 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잊지 못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엘은 이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머릿속에 마비되어가는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결심이 상기되는 바람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아세스.”

하엘은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그의 입속에서 가만히 잠들어 있던 그 이름을 불러보는 순간, 그 스스로 버티기 어려운 이별의 두려움과 재회의 중압감 속에서 몸이 흔들렸다.

“그래, 하엘.”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가. 아세스의 눈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아세스의 눈물을 보는 순간, 하엘의 눈에서도 눈물이 수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아세스. 나도 널 기다렸어.”

아세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쥔 채, 젖은 눈으로 하엘을 바라보았다. 십 년이라는 세월의 풍파 속에 수없이 깎인 얼굴 가운데,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선명해진 두 개의 잿빛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아세스는 슬픈 듯이 말했다.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창백한 두 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하엘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녀를 보면서, 하엘은 마음이 아파져 왔다.

“그렇겠지, 너는…….”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힘들게, 대답했다.

“……죽었으니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다.

“……하엘, ……왜 그래?”

“아세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하엘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넌 죽었어.”

“무슨…… 소리야.”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아세스는 그렇게 물었다.

“……난 죽지 않았어.”

“오래전 어둠숲에 들어갔을 때…….”

“……뭔가 잘못되었어.”

이제는 공포와 불신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세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뭔가 오해가 생긴 거야.”

“그렇지 않아.”

하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어둠숲에서 넌 이미 죽어있었…….”

“난…… 죽지 않았어.”

아세스의 멍한 중얼거림에 하엘은 잡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어느새 그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을 알고는 흠칫했다. 아세스는 목에 메고 있던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끊었다. 그리고는 목걸이를 쥔 손을 주저앉은 하엘의 앞에 내밀면서 말했다.

“왜……, 왜 가져가지 않은 거야?”

내밀어 진 그녀의 손에, 오래전 그녀가 그에게 주었던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목걸이 끝에는 자두만 한 크기의 하얀색 보석이 달렸다. 어딘가 음침한 구석을 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왜 가져가지 않은 거야? 네가 날 버린 거지?”

아세스의 손을 감싸면서 하엘은 고개를 숙였다. 보석을 쥐고 있던 아세스의 손에, 하엘의 눈물이 떨어졌다. 비슷한 때맞춤에 잠깐 그쳤던 비가 다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보잘것없는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너무나 선명해서 만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억들이 하엘을 둘러쌌다. 오래전 아름다운 풍경의 괴텡겐과, 그곳에서 그녀와 만났던 날을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해주었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녀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지난 십 년간 약속을 외면한 것은 다름 아닌 하엘 자신이었다. 하엘은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는 답답한 듯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를 끌렀다. 그리고는 그 안에 매고 있던 것을 밖으로 꺼냈다.

“하지만…… 네가 준 목걸이는 단 한 순간도 몸에서 뗀 적이 없어.”

그가 와이셔츠 깃 사이에서 꺼낸 것은 그녀가 든 것과 똑같이 생긴 목걸이였다. 그가 꺼낸 목걸이에도 자두만 한 크기의 하얀색 보석이 달린 채 불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세스는 눈앞에 나타난 또 다른 목걸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 그게 또 있는 거지?”

“말했잖아. 난 네가 준 목걸이를 항상 지니고 있었어.”

하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목에서 목걸이를 풀러, 그것을 아세스에게 내밀었다.

“……아세스. 이젠 현실을 볼 시간이야.”

하엘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세스는 당황해서 하엘의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다, 자신의 손에 아무 것도 쥐어져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겁먹은 눈빛으로 하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도, 네가 살아있다는 생각도, 모두 나의 망상일 뿐이야.”

하엘은 애써 스스로 설득하려는 듯한 어조로 자신 없게 말했다. 아세스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하엘과 자신의 몸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난 살아있어……. 이것 봐……. 이렇게나 선명한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하엘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다리 위에 주저앉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의 귓가로, 아세스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대답해줘……. 지금 난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녀의 물음에, 하엘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결에, 아세스의 머리칼이 하엘의 눈앞에서 휘날렸다. 하엘은 천천히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건조하고 황량한 그 바람을 어쩌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울다가, 하엘은 천천히 그 손으로 아세스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 손으로는, 바람은 잡지 못했으나 아세스의 머릿결은 만질 수 있었다. 부드럽고 포근한 촉감이 전해져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손끝이 아려온다.

아아, 살아있다.

품 안에 안겨 있던 아세스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하엘의 가슴으로 전해져온다. 하엘은 그녀를 더욱더 꼭 안았다.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소리를 들으며, 하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환상이든 파생 실재든 간에, 눈앞의 아세스는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실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디서 기원했든 간에, 자신이 알던 아세스와 동일한 존재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녀는 분명히 아세스였으며 동시에 살아있었다.

그녀는 하엘의 심장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천천히 다리 밑을 내려다본다. 깊은 계곡 사이로 바닥 대신에 희끄무레한 안개만이 보인다. 그리고 뒤늦게 결단이 선다. 그 아득한 깊이에 정신마저 아득해진다.

감당할 수조차 없는 버거운 감상주의를 불필요하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하지만, 하엘은 단 한 순간도 그 감상을 뿌리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양손으로 들어, 아세스의 목에 살며시 걸어주었다.

목걸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엘은 천천히 눈을 감고는,



“아세스, 가자.
우리만의 세계로.
너와 내가 같은 존재로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세스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로 그녀를 다시 한 번 꼬옥 껴안았다. 눈을 감음과 동시에 세상은 사라졌으나, 두 손으로 껴안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래서 하엘은 안심했다.

다음 순간,

다리 위에 있던 두 사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함께 흔들린 다리가 다시 멈추었을 때,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댓글 5
  • No Profile
    Phantahunter 09.06.30 10:15 댓글 수정 삭제
    이 소설을 세 번 읽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세 번 읽었으니 많이 읽은 셈입니다. 처음엔 보드리야르의 인용문이 철학을 공부하는 저를 유혹을 했습니다. 두 번 째는 이해가 안 되서 다시 읽었고요. 마지막으로는 이해가 안 된 이유를 작품 내에서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모사/실재, 존재/비존재, 현실/비현실이란 쉽지 않은 이항대립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만들어 나가셨어요. 결국 이 주제에 대한 어떤 나름의 이해를 담고 있지 않아서 나름대로 실망을 했습니다. 단지 이 단어들은 어떤 몽환적인 분위기를 위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념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실재/존재 와 관련된 문장이 논리적이지 못 합니다. 예를 들면, “목걸이로부터 파생(派生)된 이미지는 비록 그 존재바탕은 허상에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실재보다 더 실재다운 것이지. 오히려 그것은 실재마저도 초월하는 존재라네.”
    실재마저도 초월하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초실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그녀가 초실재란 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냥 뭔가 막연히 '신비한 존재'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실재'란 것은 무엇으로 부터 파생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개념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환상이든 파생 실재든 간에, 눈앞의 아세스는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실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디서 기원했든 간에, 자신이 알던 아세스와 동일한 존재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녀는 분명히 아세스였으며 동시에 살아있었다."
    '환상이든 파생 실재든 간에'라고 해놓고 '실재하는 존재라는 것을'이라고 하시고.
    개념상의 혼란을 통해서 신비로운 존재의 형상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소설이니까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소설이라도 개념을 사용할 때엔 그 개념을 알고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 기본 의미를 간과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독자들에게 먹혀들지 않습니다.
    결국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여주인공과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테마일 것 같네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지는 알 수 없는 그 마법 목걸이라는 클리셰가 핵심이 되는 그런 러브 스토리 말이지요. 이런 방식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개념을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탐구하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 적어도 작품에 끌어 들인 철학 개념들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숙고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더 믿음직 스런 작품, 믿음을 주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 판타지 소설 싸이트에 매일 올라 오는 작품들을 생각해 볼 때 신선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긴 댓글을 남겼습니다.
    댓글은 횃불과 같이 글쓴이에게 힘을 주더군요^^
    님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 No Profile
    Rei 09.07.02 11:23 댓글 수정 삭제
    1. 여기서 나타나는 파생 실재라는 개념은 사이버공간 상에서 쓰이는 개념입니다. 실재는 파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미 사이버공간 상에서 실재는 파생되고 있어요.

    2.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를 통해서 충분히 접할 수 있듯이, 사이버공간은 점점 더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이버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실재는 우리에게 점점 더 현실과 같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3. 과거에는 텍스트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이버공간에는 어느새 2D와 3D가 생기게 되었고, 만약 앞으로도 무한히 발전한다면 분명 매트릭스와 같은 사이버공간이 도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이버공간 속에서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는 또 다른 성질의 실재를 만나게 되겠지요. 이 사이버공간 상에서 존재하는 실존하는 것들을 파생실재라고 합니다.

    4. 우리가 매트릭스에 접속했을 때, 우리의 몸은 현실세계의 진짜 실재라는 것은 전혀 접하지 못하게 됩니다. 통제당하는 것이지요. 대신에 사이버 공간 상에서의 파생실재가 우리를 둘러싸게 됩니다. 우리는 그 파생실재를 만질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습니다. 파생실재가 실재를 초월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만질 수 없는 실재보다 만질 수 있는 파생실재가 우리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초실재입니다.

    5. 이런 상황에서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모두 경험한 사람은 현실과 사이버공간 중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현대에도 게임중독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만, 만약 매트릭스와 같은 세계가 등장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파악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6. 본문 마지막에 하엘이 아세스의 존재를 두고 고민하는 장면도, 실재와 파생실재 중 무엇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이버세계의 인간을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아세스의 질문으로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 No Profile
    Phantahunter 09.07.02 11:42 댓글 수정 삭제
    Rei 님의 깔끔한 답변 감사합니다. '실재가 파생된다'는 표현은 좀 모호한 표현입니다. 가상현실에서는 '이미지가 복사된다'는 표현이 적합니다. 그러나 개념이란 것이 그렇지만 자신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재규정을 한다면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님처럼 초실재를 규정한다면 마을이란 존재와 노인의 존재 역시도 초실재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질 수 없는 실재보다 만질 수 있는 파생실재가 우리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초실재입니다."

    라고 하셨으니 여주인공 뿐 아니라 주인공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 마을과 노인들도 초실재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Rei님이 의도하신 바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그런 주제의식이 어떻게 소설이란 형식으로 반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인데 이건 제가 할일이 아닌 것 같네요.
    거울은 이미 좋은 두 명의 평론가 분을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Rei 님의 또 다른 작품도 보고 싶어 지네요!

  • No Profile
    Rei 09.07.02 12:25 댓글 수정 삭제
    두명의 노인은 파생실재이지만 마을은 실재라는 설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어쨌든 좋은 평과 깊은 관심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No Profile
    Phantahunter 09.07.02 12:34 댓글 수정 삭제
    소설은 재밌었어요.
    누구에게나 재밌게 읽힐 수 있지만, 쉽게 잡을 수 없는 해석의 매력을 가진 작품이 진짜 좋은 작품이겠지요.
    노력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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