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시간.

2009.06.22 05:1206.22

어제는 보름이었다. 광막한 어둠 속에 홀로 높이 솟은 것은 분명 보름달이었다. 그것을 트럭 뒤에 비스듬히 누워 바라보았다. 밝구나. 무의식중에 말이 튀어 나왔다. 말 그대로 달이 참 밝았다. 사람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모두 파랬다. 이른 아침에 세상을 파랗게 물들여가던 새벽빛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창백한 달빛은 새벽빛과는 달리 사그라지지 않고 내 주변을 모조리 신비로운 색체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별 하나 반짝이지 않는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달은, 영롱한 빛을 내려 메마른 나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저 달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토끼가 살고 있나. 만약 토끼가 산다면 날마다 큼지막한 몽둥이를 들고 절구통을 찍고 있을까. 사실이라면 그 토끼는 인류처럼 두 다리로 지면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돌연변이임에 틀림이 없다. 절구통을 처대려면 직립보행이 가능해야 한다. 혹시 외계인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이 삼켜버린 달 뒤편에서 지구 침공을 준비 중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인류 최초로 이쑤시개 같은 성조기로 달의 이마빡을 찍어버리신 암스트롱께서 삽질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에라, 달이 딸 치는 소리 하고 앉았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트럭 뒤에 누워 온갖 해괴망측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롱한 달빛은 메마른 나의 가슴을 적시다 못해 종국에는 저미고 있었다. 트럭이 달릴 때마다 저 멀리 달아나는 바람결에서 싸한 풀잎 냄새가 났다.

자정을 넘기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울렁거리게 된 이유는 한 지인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썩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몇 마리 해버리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 했다. 그래서 대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에게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 주었다. 까닭 없이 욕을 한 됫박 얻어먹은 달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만 같았다.

불쾌한 기분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하루 종일 어제 저녁 지인과의 대화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낮에는 욕을 퍼부어 줄 달도 뜨지 않는다. 더욱이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는지 늦은 저녁까지 달이 보이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고스란히 스트레스를 쌓아 두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더욱 난감해진 기분으로 책상에 앉았다. 그때 어느새 구름이 걷혔는지 창문 너머로 달이 보였다.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영롱한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어제와 같이 신비로운 색체로 물들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창밖의 세상을 둘러보고 있을 때, 세상을 파랗게 물들여가던 달이 나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찌질한 자식.”

순간 울컥했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 엄한 욕지거리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달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일단은 참고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격한 감정 때문에 옹알이처럼 들리던 속삭임은 조금씩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중간 부분은 듣지 못 했지만 다행이 마지막 부분은 들을 수 있었다. 달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 봐. 네가 그 속에서 무엇을 찾게 될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좋든 싫든 그것은 네가 살아 온 시간들이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그 시간들을 한데 싸잡아 과거라고 말하더라. 가슴이 메마른 사람들이지. 우리는 가슴 속에 추억으로 새겨. 너는 어떻게 했을까. 과거로 남겼을까 추억으로 새겼을까. 좋은 장면 떠오르면 공유해. 내 메일 주소는 bluemoon.co……”

난 거기서 듣는 것을 멈추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아라. 뭘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이정표도 존재하지 않는 커다란 공간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이라도 일단 떠올려야 했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방황하고 있을 때 무심코 본 폴더. 바탕화면. 나는 녀석의 몸통을 마우스의 뾰족한 코끝으로 두 번을 찔렀다. 그러자 찌른 지 1초도 되지 않아 뱃속에 숨기고 있던 다른 녀석들을 큼지막하게 토해 내었다. 노래다운. 이건 아냐. 지워버렸다. 오른쪽 마우스 해제. 너는 가끔 쓰니까 계속 거기 있어라. 가마우지. 넌 뭐냐. 지우자. 잠깐, 아니다. 너도 계속 거기 있어라. 미안하다. 널 잊고 살았다. 나는 녀석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고 탐색을 계속 했다. utill. 그래, 찾았다. 나는 녀석의 몸통도 바탕화면과 같은 방법으로 두 번을 찔렀다. 이번에도 녀석이 삼키고 있던 놈들이 대번에 튀어나왔다. 거기서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녀석을 찔렀다. 그러자 전화번호가 무려 300개나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절반 이상, 혹은 대부분이 필요 없는 번호들이었다. 업무상 만나왔던 사람들의 번호. 그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배재시키고 존재감 있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몇 개의 번호를 훑어보았을까. 수많은 번호 중에 그녀가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흥분으로 인한 뜀박질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찡한 느낌이었다. 몇 년 만에 떠올린 그녀는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상당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하지만 선뜻 번호를 누르지는 못 했다. 망설이고 있었다. 입술을 핥아가며 번호를 누르고, 누르고, 또 눌러보았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 했다. 답답하기는. 나름 남자답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던 인간이 소심증에 걸린 모양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야.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떨리는 손을 털어 긴장감을 떨쳐내고 싸이를 들어갔다. 가입했을 때부터의 방명록을 모조리 훑어보았다. 많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이는 가장 절친한 친구 놈이었고, 어떤 이는 한 때 친했으나 이제 보지 않는 사람이었고, 또 어떤 이는 친하지 않지만 연락만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을 읽을 때마다 당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슬쩍 미소 지을 일도 있었고, 짜증나는 일도 있었고,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지금도 가슴이 따스해지게 만드는 일들이 많았다. 그 때, 그녀가 다시 보였다. 여기에도 네가 있구나. 가슴 속에 꽁꽁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내 주변에 있었다는 듯 샐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홈피를 들어갔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나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구나 미안하다. 죄를 성토하는 고해의 시간. 절로 이 소리가 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고해성사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아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방명록에 짧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왔다.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나간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서로가 사랑했던 시간은 그 크기만큼 아픔으로 쌓였을 테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녀의 홈피를 나왔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어서였다. 그녀의 홈피를 보고 있자니 사랑했을 때의 일들이 그렇게 후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귀는 동안 무심코 내뱉었던 매정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고개를 숙여 바라 본 발밑에는 시뻘건 피가 흥건해 있었다. 그 피는 나의 가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들도 많았어. 사랑한다는 사진을 찍으려고 동네를 두 시간이나 배회했던 적도 있었고, 자정이 넘어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가기도 했었지. 그 때의 그녀는 정말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어.
조금씩 새어 나오던 피가 이내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는 것을 보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조금은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지나간 시간은 내가 느끼지 못할 만큼 더디게 다가와 추억이 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을 탐닉한지도 두 시간이 넘었다는 게다. 하지만 그 두 시간이 나에게는 하루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꺼내지 못 할 말들이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만난다면, 그래서 속에 묵혀 두었던 말을 꺼낸다면 그녀는 썩어 문드러져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의 고백에 코를 쥐어 잡으며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른다. 꺼져.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달은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시침을 뚝 떼면서 말을 걸어 왔다.

“괜찮니.”
“왜 그랬어.”
“뭐 어때. 달이 밝잖아.”

달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지나간 시간은 항상 후회뿐이라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그래, 나 또한 사람이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는 거고.”
“후회하니.”
“죽을 만큼.”

달은 푸근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시간을 걷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 하지만 시간은 앞에 놓여있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지. 네 뒤를 따라오고 있어. 무슨 말이냐고? 뒤를 돌아 봐. 네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시간은 말해 주겠지. 지금까지 네가 살아 온 시간들이 어떠했는지를 말이야. 다시 앞을 봐. 너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어. 시간은 항상 너의 뒤편에 있으니까. 사람들의 생각처럼 시간이 자신들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듣지 못해. 시간은 그들 뒤에서 흐느끼고 있을 뿐이야.”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 뒤에 있는 시간을 과거나 추억 따위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달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 나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안녕. 내가 너에게 해 줄 말은 여기까지야.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랑해. 어느 날 문득 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시간을 마주보며 웃을 수 있게. 지금처럼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달은 그 말을 끝으로 빗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창밖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아도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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