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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간사



-가간사家間事야.
-뭐?
-아, 집안일이라고.

안색이 안좋은 것을 보니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B에게 툭 던지듯
대답한 A는 B가 되묻자 눈을 찡그리면서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말
했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 표정에서 묻어나는 근심에 행여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던 B는 머쓱한 듯 A가 혼자 잔 기울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분위기 파악 못하고 쓸데없는 질문
잘하기로 유명했던 B는 아직 버릇을 개에게 주지 못했다. 그는
A의 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제수씨랑 싸웠어?
-싸울 일 뭐 있겠어. 죽었는데..
-헉, 아이구..어쩌다가?
-일주일 전에 화병 정리하다가 2층
  에서 떨어졌어. 목부터..
-아, 저런..내가 괜한 걸..야, 그럼
  진작 연락..아니..잠깐..저기..
-됐어.

짧게 끊은 A가 또다시 한잔 비우는 동안 열없게 있던 B는 말했다.

-..미안하다.
-됐다니까. 장례식 안했어. 지하실
  벽에 밀어넣고 도배 새로했어.
-그래..
  그러면 저기, 애들은 어떻게 하냐.
-애들..애들이라..

갑자기 A는 혀를 차면서 힘없이 웃었다. 그것이 또 B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그래?
-말도 마라. 요즘 애들 때문에 죽을
  맛이다.
-응?
-첫째..우리 딸아이..
  자기가 무슨 아라비아에서 온 악령
  이라나 뭐라나..방에 박혀서 나오지
  도 않고 십자가로 자기 손목 긋고
  생쑈를 해요. 어쩌다 방 밖으로
  나올 때는 목 비틀고 계단에 꺼꾸로
  매달려서 내려온다니까..
-으음..그 나이 때 애들 그렇지 뭐.
  둘째는?
-아, 우리 아들놈..그게 기가 차지.
  옛날에 유모 목매달아 죽는 것 봐서
  충격 클까봐 해달라는 거 다해주고
  키웠더니 글쎄, 얼마 전에 봤더니
  머리 속에 문신을 했더라니까. 여기
  뒷통수에 머리카락으로 숨겨놨더
  라고. 멋진 것도 아니고 6자 세개
  겹친 꼴로..이제 겨우 6살이야.
-흠, 요즘 애들은 빨리 자라니까.
  자네가 이해해야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늑대까지
  갖다가 키우는 데도?
-..개겠지.
-늑대야.
-..어, 그래..
  참, 셋째는?
-셋째라니?
-저번에 너희 집 갔을 때 하녀가
  등에 엎고 있던 갓난 아이. 여자
  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우리 셋째 없어.

A의 말에 B는 잠깐 생각해봤다. 그때 분명 하녀가 아기를 엎고
있었다. 벽을 관통하는 하녀의 등 뒤에서 피에 젖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던 그 끔찍한 얼굴을 기억한다. 참! 하녀라..어쩌면
말못할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혼자 만의 추리를 마친 B는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B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는..일주일..후에..죽는다..

이상한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기분나쁜 목소리에 B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제 빌렸던 비디오 -웬 우물가만 계속
비추는 실험 영화였다
- 에서 나오던 소리들 만큼이나 기분 나쁘다.

-왜 그래?
-별 것 아냐. 장난전화야.

A에게 다시 술을 따라주며 B는 싱겁게 웃어보였다. 가장으로서
힘들어하는 A가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부인에게 쫓겨나서 이런 남
의 집안일 듣는 것이나 즐기고 있는 자신도 처량했다.

-자, 너희 집안을 위해 건배!



가계약



-아직 가계약假契約 상태로군요.
-네? 네..



C의 말에 D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계약을 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이러시면
  아무래도 좀..
  이해하십시오. 아무래도 이것도
  비즈니스다보니 이렇습니다..
  물론 저희가 D님을 못믿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비즈니스다보니..
-그, 그렇겠죠.

D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좋아보이는 웃음을 만면에 띄고
그를 보며 C는 말했다.

-언제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네? 아..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데 말이죠.
  어떻게, 이번 주에, 가능하시죠?
-..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요즘 계속
  문의전화도 오고 사람들 관심이
  많아서, 이번 주 안에 정식계약
  안하시면 저희도 다른 분을..
-알겠습니다. 이번 주 안에 꼭..
-네, D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C의 말에 D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인 나무 탁자 위에 덮힌
유리에 창백한 얼굴이 반사되었다.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람, 안오는 거 아니에요?

전화기 앞에 앉아 손톱을 다듬는 중인 E의 말에 C는 엷은 미소를
띄고 고개저었다.

-아니, 분명히 와.
-하지만 그때 얼굴을 보니까 영
  내켜하는 것 같지 않던데..
-E는 아직 사람 볼 줄 모르는 군.
  분명히 와. 나와 내기하겠어?
-됐어요. 아직 당신하고 내기할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어요.
-칭찬으로 들을께.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D가 보였다. 숨을 몰아쉬면서 C와 E를 본 D는 다른 누가 더 있는
지 살피는 듯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여기 좀 앉으세요. 숨을 왜 그렇게
  몰아쉬세요. 미스E, 뭐 음료수라도
  있으면 하나 갖다줘요.
-네.
-저, 저기..
-아..숨 좀 돌리시고 이야기하세요.

인상을 찡그리고 거칠게 한번 숨을 토한 D는 품 안에서 무엇인가
를 꺼내어 C 앞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신문지로 쌓인 뭉치였다.

-가져오셨군요.
-확인해보세요.

C는 신문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꽤 두껍게 감았다. 두어겹 정도
풀어내자 붉게 젖은 신문지가 보였다. 계속해서 뜯어나갔다.
C는 곧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16살 여고생의 풋풋한 심장.
  F여고 G학년 H반 I양의 것이군요.
  모두들 노리던 상급품인데..
-에에, 그래요?
-설마 모르셨다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혼자 걷고 만만해
  보이길래 쫓아가서..
-저런! 모르고도 이런 상급품을
  찾아내시다니 정말 대단한 소질
  이십니다.
-여기 음료수 드세요.

E가 가져온 조그만 음료수병을 뚜껑을 뜯어 던지고 한번에 마신
D는 크게 한숨을 돌렸다. 옷소매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려고
팔을 들던 D는 C가 가리킨 손 끝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제 계약하셔야죠.
-아..
-아직 조건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죠?
-한입..이요?
-네, 이 심장을 한입 드시면
  정식으로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D는 자신이 가져온 핏덩어리를 꺼림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입가를 붉게 적신 D와 흡족한 표정의 C는 악수했다.



가구점



-이거 얼마예요?
-네, 잠시만요.

가구점 사장인 J는 막 나가는 손님을 배웅하고 밝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K가 가리키는 장을 보고 말했다.

-아, 이거요? 좀 비싼 편인데..
-얼마 정도인데요?

비싸다는 말이 거슬리다는 표정으로 묻는 K의 남편 M에게 J는
사람 기분좋게 하는 미소로 응하며 말했다.

-사모님이 안목있으시네요. 예전에
  자주 추천하던 물품인데 요즘 찾는
  분이 너무 없고 예약하시고 취소
  하시는 분이 많아서 좀 말씀드리기
  그래서 망설였습니다.
-아니, 전 정말 마음에 들어요.
  색이 저희 방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장식도 멋있구요.
  예약같은 거 필요없이 지금 당장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K의 호들갑에 M은 거만한 표정으로 J를 보며 당장이라도 수표와
카드로 가득찬 지갑을 꺼낼테니 어서 가격을 부르라는 표정을
지었다. J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으로 옷장을 보다가 말했다.

-사실 이 옷장은 수공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든 장인분이
  이외에도 몇개 더 만드셨어요.
  그건 2층 별실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다면
  그것도 한번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머, 그럴까요..

반짝이는 눈으로 따라오는 K와 그런 K의 뒷모습에 콧방귀를 뀌며
계단을 올라오는 M을 곁눈으로 보면서 J는 2층의 구석에 있는 문
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K와 M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밖에 있던 옷장보다 더욱 예쁜 색상
과 화려한 치장으로 이루어진 가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식탁,
찻장, 침대, 옷장, 서랍장 등이 그들을 맞이했다. 지금까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내를 위한 계산기 역할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던 M도 지금은 심미안으로 가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동네 가구점에서 이런 화려하고 진귀한 장식장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한 표정으로 K가 말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책장을 쓰다듬었다.

-무늬도 예쁘고 색상도 좋고,
  거기다 질감도 너무 좋네요.
  무슨 재질이죠?
-질감이 좋을 수 밖에요.

문으로 다가가고 있던 J는 대답했다.

-체온을 유지하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니까요.
-네?

되묻는 K를 보고 미소지으며 J는 문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K가 고개돌리자 M이 앞에 있는 촛대와 한 세트로 이루
어진 장식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K는 지금까지 M이 입술을 떠는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표정이 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M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자세히
보고는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장식장의 윗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보석을 원형으로
배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인간의 이빨
이었다. 앞니, 송곳니, 어금니에 금을 입힌 틀니도 섞여 있었다.
그 기괴한 장식은 세공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불쾌했다.
문이 잠기고 자물쇠가 내려앉는 묵중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 장식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K와 M은
황급하게 문에 다가가서 두드려보았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M의 잘 발달한 어깨에 부딪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문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K는 갑자기 뒤로 고개돌렸다. 그에 맞추어 어떤
그림자 하나가 옷장 뒤로 사라졌다.
M이 다시 부딪치려 할 때 K는 그런 M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뒤로
숨었다. M은 당황한 표정으로 K를 보다가 앞을 보았다.
화장대에 붙어있는, 멋진 장식으로 꾸며진 거울에 예리한 칼을
든 손이 비추고 있었다.



                                                          <200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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